역사신학 연구/기독교 역사 이야기

초기 그리스 철학-소크라테스 알기

heojohn 2009. 10. 23. 23:41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의 첫째 공통점은 우주에 관한 일반 이론을 만들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 방법은 신들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는 신화(mythos)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과 추론을 통해서 겉으로 보이는 것의 배후에 있는 비밀을 편견이 없고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만드는 것이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그리스 세계의 변방이나 식민지, 즉 이오니아와 밀레투스 출신이라는 것이다. 그들에 관해서 전해오는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요점적으로 정리해본다.

 

탈레스(BC 580년경)

 

최초의 철학자로 기록된 인물,

밀레투스 학파,

철학적 명언 “모든 사물의 일차적인 원리와 근본적인 본성은 물이다.”

철학적 평가: 최초로 환원론적 사고방식을 도입한 사람

 

아낙시만드로스(BC 619?-540?)

 

밀레투스 학파

탈레스에 대한 반론: “만약 모든 사물이 물이라면 모든 것은 오래전에 물이 되어버렸을 것”

철학적 명언: “어떤 근원에서부터 솟아났든 간에 사물들은 파괴되고 나면 필연적으로 다시 그 근원(apeiron: 그리스어것)으로 되돌아간다. 사물들은 시간의 흐름으로 인해 겪은 불공정함에 대해 서로에게 징벌을 가하고 보상을 하기 때문이다.”

철학적 관점: 한 요소가 어떤 시기에 지배적이면, 그 다음 시기에는 다른 요소가 지배적이 된다. 아페이론은 어떠한 경우에도 불변이며 파괴되지 않는다.

철학적 평가: 엔트로피 개념의 발견

 

아낙시메네스

 

밀레투스 학파

철학적 질문: 무에서는 무가(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원초적 공기가 ‘농후화와 흐박화를 통해 만물을 형성시킨 것이 아닐까?

철학적 관점: 모든 질적 차이가 사실은 양적 차이에서 온다.

밀레투스 학파: 위의 세 사람은 모두 페르시아 밀레투스 출신으로 밀레투스 학파이다. 이들의 철학적 방법은 관찰에 의한 자연주의, 우주가 궁극적으로는 한 가지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일원론을 주장한다.

 

피타고라스(BC 572?-500?)

 

사모스 섬 출신

철학적 견해: 모든 사물이 수(數)이다.

특징: 수학자라기보다는 수(數) 점술사. 10을 신성시하였고, 태양계를 10개의 천체라고 주장-이는 결국 맞는 것으로 입증. 종교집단적인 생활. 모든 사물을 수(數)학적 공식으로 파악하고자 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이후 약 400년간 존속.

 

헤라클레이토스(BC 470년경)

 

에페수스 출신

철학적 견해: “불은 만물을 변화시키고, 만물은 불을 변화시킨다.” 모“든 것은 흐르며 아무 것도 제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모든 것은 움직이며, 아무 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로고스란 언제나 그렇다.” 변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변화 자체뿐이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로고스-논리가 변화를 지배하고 있다고 보았다. 로고스가 변화를 혼돈이 아니라 이성적인 현상으로 만들어 준다.

 

파르메니데스(BC515?-440?)

 

철하적 견해: 관찰 따위를 통한 경험적인 지식이 아닌 이성(理性)의 진리를 주장, 이것은 자기모순을 증명하지 않고는 부정될 수 없다. 이러한 방식은 곧 역설(逆說)의 진리를 낳게 된다.

 

제논(BC490-?)

 

철학적 견해: “거북이가 아킬레우스보다 조금만 더 빨리 출발한다면, 아킬레우스는 결코 거북을 추월할 수 없다.”는 유명한 역설을 제안하여 그의 스승 파르메니데스를 옹호하였다

철학적 평가: 감각에 의한 정보와 이성에 의한 정보를 구분. 이는 경험론과 합리론으로 발전했다.

 

엠페도클레스(BC440년경)

 

시칠리아 출신

철학적 견해: 모든 사물이 불, 공기, 흙, 물이라는 4요소에 의하여 이루어져 있고, 이를 ‘4개의 뿌리’라고 했다. 제논의 역설을 반박하기 위해 변화와 운동을 설명하는 두 개의 힘을 가정하고, 이를 ‘사랑’과 ‘다툼’이라고 불렀다. 사랑은 통일의 힘이며, 서로 무관한 것들을 뭉치게 해서 새로운 창조를 낳는다. 반면에 다툼은 파괴의 힘이며 낡은 통일성을 파괴하여 조각들로 분해한다.

철학적 평가: 20세기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가 이 이론을 변형시켜 ‘에로스’와 ‘티타토스’, 즉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이 유기체의 근간을 형성하는 두 가지 힘이라는 이론으로 만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견해를 “우연의 여지를 너무 많이 남겨 놓았다.”고 비판했다. 결국 이 이론적 체계에서 진화론이 발달했다.

 

아낙사고라스 (BC500?-428?)

 

밀레토스 출신

철학적 견해: 엠페도클레스를 너무 단순하다고 비판하고 ‘4개의 뿌리’를 ‘무한한 씨앗들’로 바꾼다. 또 운동의 힘을 누스(nous=마음)라는 하나의 정신적인 힘만을 상정한다. 이는 씨앗을 가지고 만물을 창조하는 신과 같은 존재이다. 그는 누스를 포함한 살아 있는 유기체와 누스가 포함되지 아니한 무생명의 무기체를 구분했다.

철학적 평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는 누스(정신)을 나치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이용하여 세계의 형성을 설명한다. 어떤 사물이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울 때면 즉각 그것을 끌어들여 설명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경우에는 누스가 아닌 다른 것을 원인으로 말한다.”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

 

철학적 견해: 원자론자. 세계가 실체로 이루어져 있고, 그 실체는 원자들의 묶음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원자(atomon:그리스어)는 분할할 수 없고, 쪼개질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 원자들은 빈 공간 속에서 엄격한 자연 법칙에 따라서 필연적인 길을 따라 이동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되면 빈 공간과 운동은 실재하는 것이 되고, 나아가 원자와 마찬가지로 빈 공간과 운동도 더 이상의 분석이 불가능한 자연적이고 근본적인 것이 된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대한 정리

 

시대적 상황: 기원전 370년 전에 그리스 철학은 철저한 유물론과 엄격한 결정론이 되었다. 세계에는 운동하는 실체만이 존재하며 자유는 없고 오직 필연만이 있다. 그들은 이전 시대의 신화와 종교로부터 특정한 종류의 사유를 해방시켰으며, 사유의 방법과 내용을 개발했다. 그러나 그들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종교적 및 도덕적 가치들을 온통 뒤흔들어 놓고는 그것을 대신할 아무 것도 남겨놓지 않았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제우스가 무너지면 혼돈이 뒤따르고 회오리가 지배한다.”고 말했다.

철학적 평가: 그들의 사유방식은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모든 철학자들과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시대부터 우리 시대까지 이어지는 모든 철학과 사상의 계보를 발견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

 

1. 시대적 배경과 생애

 

소크라테스가 나온 시대적 배경에는 실재와 진리의 본질에 관한 것을 토론하던 철학자들을 대신하는 수사학자들이 등장하면서, 권력과 설득의 본질에 관한 것들을 강의하고 있었다. 다음과 같은 소피스트가 유명하다.

 

프로타고라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말과 “신들에 관해서라면 나로서는 그들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성공을 거두려면 전통적인 관습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가 가르친 인간의 주관성과 상대주의는 소피스트의 핵심 가르침이 되었다.

고르기아스: 철학의 지위를 끌어내리고, 수사학을 그 자리에 앉히려 했다. 아무리 터무니 없는 논쟁이라도 이기는 방법만 가르치려 했다.

트라시마코스: “정의란 강한 자의 것이다.” 도덕 따위에 관한 일체의 논쟁은 무의미하다.

칼리크레스크리티아스: 가장 냉소적인 두 명의 소피스트이다. 칼리크레스- 전통적인 도덕이란 약자가 강자를 구속하기 위한 약삭빠른 장치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크리티아스(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성립한 30인 과두체제에서 가장 잔인한 인물)- 존재하지 않는 신들로써 백성들의 두려움을 유발시켜 통치할 줄 아는 자가 영리한 지배자라고 말했다.

 

소피스트들의 주장은 진리가 아니라 조작과 편의주의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에 대하여 분노했다. 그는 이전의 철학자들과는 달랐다. 즉 소크라테스는 이오니아와 이탈리아 우주(kosmos)론자들이 자연에 관해 사변하는데서 인간생활의 성격과 행위를 분석하는 데로 철학의 초점을 옮겼다. 그는 도덕적 가치가 침식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혼란기에 살면서 "너 자신을 알라"는 말로 인간의 무지를 깨우치고자 했으며, 도덕적 용어의 의미에 대한 연구를 통해 윤리생활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소명을 느꼈다. 그는 서구문화의 철학적 기초를 마련한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세 인물인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가운데서 첫째 인물이다. 키케로가 말했듯이 그는 "철학을 하늘에서 땅으로 끌어내렸다".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69년에 태어나 70세 되는 399년에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그의 제자인 플라톤의 [대화록], 크세노폰의 [회고록], 그리고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을 통해 알려져 있다. 플라톤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조각가인 소프로니코스를 아버지로, 해산술을 업으로 하던 파이나레테를 어머니로 하여 아테네의 서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관계로는 아내 크산티페와 사이에 아들 셋을 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녀의 기질이 불 같았다고 전하지만 그녀가 바가지 긁는 여자였다는 증거는 없다. 그의 참을성은 대단했다. 그는 군에 있을 때 어느 여름날 아침 일찍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사색에 잠겨 있었다고 한다. 그의 추한 외모와 빈곤한 삶은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성장 및 교육과정은 전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미루어 짐작컨대 아마 마흔을 전후로 하여 그는 자신의 철학적 관심 분야와 방법론을 확고하게 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활동하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그의 철학적 관심 분야에 관해 좋은 실마리를 발견 할 수가 있다. 즉 기원전 5세기는 아테네의 정치 및 문화의 전성기이며, 그와 동시에 쇠퇴기의 전초기라고 볼 수 있다. 문화적 측면에서 특히 이 시기는 소피스트들(sophist))의 활동이 눈에 두드러진다.

 

그는 공직이 자신의 원칙과 타협하는 것이라고 보고 정치적으로 어느 편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는 아테네 세력가들의 미움을 샀다. 온갖 협박에도 불구하고 재판할 때 참주들의 위헌적인 유죄판결을 끝까지 거부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의 적들은 그가 신을 모독하고 잘못된 학설을 가르치면서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있다고 비난했다. 나침내 소크라테스는 '불경죄'로 기소되었다. 소송을 제기한 자는 권력자 아니토스로서, BC 403년 반혁명을 통해 복위한 민주주의자의 두 우두머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명목상의 고소인은 멜레토스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패전한 이유는 소크라테스의 제자 한 사람이 적국 스파르타에 정보를 넘겨주었기 때문인데, 소크라테스가 이에 책임이 있다는 것과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도시가 숭배하는 신들을 무시하고, 새로운 종교를 끌어들였다 는 등의 황당한 혐의를 씌운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상의 이유는 소크라테스가 반민주주의적인 알키비아데스와 30인 참주의 우두머리였던 크리티아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혐의였다. 당시 아테네에서는 30인 참주의 공포정치에 대한 반동으로 보수적인 민주정을 시행하고 있었다. 그는 배심원 투표에서 약 280 대 220의 비율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다시 소크라테스의 항소가 받아들여져 그는 배심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변론했다. 그는 배심원들에게 당당하게 ‘무지를 알라’고 꾸짖으면서 자신은 행복을 깨닫게 해주는 국가 공헌자로서 도리어 ‘동상을 세워주어야 한다’고 까지 요구했다. 이런 행동이 배심원들을 자극하여 501명 가운데 361명의 요구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아테네 규칙에 따르면 유죄판결을 받은 자는 24시간 이내에 '독배를 마셔야' 했는데, 델로스로 신성한 배를 보내는 기간에는 형을 집행하지 않기 때문에 형의 집행이 1개월간 미루어졌다. 그는 친구들을 매일 만나면서 일상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들이 간수를 매수하고 탈출시킬 계획을 꾸몄으나 소크라테스는 거절했다. 판결이 사실과 어긋나는 것이지만, 그 판결은 법정의 판결이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독배를 마셨다. 그의 최후에 관한 이야기는 플라톤의 〈파이돈: phaedon〉에 잘 기술되어 있다. 사형되기 직전에 자신이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을 빚졌다며 자신 대신 갚아 달라고 친구에게 당부하였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학의 신으로 그의 신전에서 치료받은 사람은 닭을 대가로 바쳐야 했다고 한다.)

 

2. 소크라테스의 성격과 생활방식

 

소크라테스의 외모는 기이한 편이었다. 뚱뚱하고 키가 작고 눈은 튀어나왔으며 들창코이고 입은 컸다. 마치 주신(酒神) 실레노스 같았다. 그러나 친구들은 그가 "내면적으로 매우 훌륭하고", "당대에 가장 곧은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를 괴롭히는 금욕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아테네 국민의 심성도 개선·발전시키는 것이, '신'이 자신에게 부과한 사명이라고 확신했다. 또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길임을 잘 알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만이 무지를 깨닫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더 현명하다고 자처했다. '소크라테스가 가장 현명하다'는 델포이의 신탁을 그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소크라테스는 글을 남기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인격이나 이론은 주로 플라톤의 [대화록]과 크세노폰의 [회고록: Memorabilia] 등에 남아 있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안과 밖의 두 가지 방향을 가진다. 밖으로는 객관적 정의를, 안으로는 내부의 인격, 즉 영혼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는 영혼이야말로 진리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거의 모든 시간을 길거리와 시장, 김나시온(고대 그리스의 운동경기장, 마차 경기장) 등에서 정치, 시인, 예술, 정의 등에 관해 자유롭게 이야기했다. 이러한 대화의 목표는 소크라테스를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선언한 아폴론의 델포이 신전의 유명한 신탁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이 신탁은 소크라테스가 동료들에 대한 사명을 의식하기 전에 나온 것으로, 지혜에 관심을 가진 소피스트 집단에서 그가 최고의 명성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그는 동료들로 하여금 무지를 깨닫게 하고, 영혼의 선(善)을 위한 지식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임무를 신에게서 부여받았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임무를 등한시하기보다는 차라리 당장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스스로 선언했으며, 독배를 마심으로써 그 믿음을 증명했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그의 옷은 항상 같았다. 그는 신발도 신지 않았고 겉옷도 걸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주제넘게 간섭 잘하는 인물로 생각했다.

'악법도 법이다'(Dura lex, sed lex)라는 말로 유명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한 적이 없다. 소크라테스는 [변론]에서 법정이 그의 철학을 포기한다면 석방해주겠다는 제안을 하더라도 자신이 철학을 하는 이유는 신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러한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법 이전에 자신의 철학적 원칙과 신념에 기초하여 의사결정을 했다. [크리톤]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에게 독배를 내린 법률에 대해 자신이 국외 추방을 제의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소극적으로나마 동의한 법의 절차적 정당성을 뒤늦게 훼손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독약을 마셨고,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친구들과 철학을 이야기 했다. 그 결과로서 그는 철학을 위해 순교한 상징적 인물로 남게 되었다.

 

3. 철학의 방법과 중심 사상

 

소크라테스는 질문과 토론을 통해 최선의 답을 이끌어내는 산파술이라고 하는 철학의 방법으로서 대화법을 갖고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대개 특수한 철학적 문제들을 강조한다. 이를테면, 정의란 무엇인가-[국가], 덕이란 무엇인가-[메논], 의미란 무엇인가-[소피스테스], 사랑이란 무엇인가-[향연], 경건함이란 무엇인가-[에우티프론] 등이 그런 것들이다. 전형적인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세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대화의 상대방에게 문제를 제기한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객관적으로 타당한 정의(定 義)를 바탕으로 모든 논쟁을 전개했다. 예를 들면,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할 때 ‘인간’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둘째, 상대방의 정의에서 조그만 결함을 찾아내고는 서서히 그것을 풀어간다. 마침내 상대 방이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도록 만든다.

셋째, 무지를 깨달은 두 사람이 앞으로 진지하게 진리를 추구하기로 약속한다. 대화는 반 드시 결론 없이 끝나야 한다. 왜냐하면 진리는 각자 자신의 힘으로 찾아야 하기 때문 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소크라테스 자신은 아무 것도 모른다고 고백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질문에 거의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질문은 계속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꼼꼼하게 따져보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철학의 중심 문제를 우주론에서 인간 생활의 규칙을 규정하는, 즉 이성을 실천적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옮겨 놓았다. 소크라테스는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임무는 육체나 재산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돌보고 배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개인의 영혼을 선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영혼을 삶의 호흡으로 본다. 이러한 관점은 그를 인간의 육체가 소멸될 때 영혼도 함께 포기해야 하는 것으로 보는 호머나 이오니아 학파의 유물론적인 견해와는 상반되는 관념론자로 불리게 만들었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인간의 행복은 영혼의 선함이나 악함에 의존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치는 모든 시민의 영혼을 돌보고 그들을 가능한 한 선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는 자기만이 그것을 이해하고 있으므로, 자기만이 참된 정치가로 불릴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이것을 깨우치게 하려고 하다가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철학이 훗날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된 것은 제자 플라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