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연구/기독교 역사 이야기

현대교회사(곤잘레스)-2부

heojohn 2008. 11. 25. 23:53

현대교회사(곤잘레스)-2부

 

제2부 19세기

제12장

정치적 지평선: 미합중국

13개 식민주의 독립-178: 시초부터 영국령 식민주들은 상당한 독립을 향유하고 있었다. 영국 정부가 군대를 파견하고, 세금을 추가 징수하고, 토지취득을 제한하는 등의 직접통치를 강화하는 정책을 취하자 갈등이 일어났다. 13개주는 반발했고 양측이 충돌하는 가운데 독립전쟁이 일어났다. 결국 7년간의 전쟁을 치르고, 1783년 파리회담에서 도립협정이 조인되었다. 하나님의 섭리를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독립을 곧 진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진보 가운데 일부는 전통적 기독교가 가지는 교리주의적 태도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단지 '자연종교' 혹은 '본질적 기독교'(essential Christianity)만을 인정하게 되었다. 자연 이성 혹은 보편적 윤리를 통해 이해될 수 있는 것을 제외한 기독교회의 전통적 교훈들과 신앙은 과거의 유물로서 간주되었다.

이러한 사상들은 그 후 하나로 결합하게 된 두 가지 운동을 통해 조직되었으니, 곧 유니테리언주의와 만인구원설이다. 전자는 실질적으로 독립과 함께 생겨나 더 이상 전통적 정통신앙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던 앵글리칸과 회중파 교회들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이 운동에서 결과된 교회들은 특히 삼위일체의 교리를 부인했기 때문에, '유니테리언'이라고 불렸으나 실제로 이들은 정통적 교리들과 많은 점에서 상이한 모습을 보였다. 이들은 특히 초자연적 신비와 인간의 죄성을 강조했던 정통 교리와는 대조적으로, 인간의 자유와 지적 능력을 보다 강조하는 이성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특히 뉴잉글랜드 지방의 상인들 사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종래는 모든 인간들이 다 구원을 받으리라는 교리를 주장하는 만인구원설은 원래 영원한 형벌의 교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영국 감리교신자들에 의해서 독립 직전의 식민주에 소개되었다. 얼마 안 되어 이 운동은 유니테리언들과 합류한다.

또한 이들로부터 소위 '초월주의'(Transcendaentalism)에 찬성하는 이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가장 유명한 대표자로서 랄프 왈도 에머슨을 들 수 있는 이 운동은 이성주의와 낭만주의를 결합한 것이었다. 이들은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을 우주와 우주의 목적을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유니테리언주의와 마찬가지로 초월주의에 빠진 것은 주로 부유한 상인층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많은 주장은 결국 이 새로운 국가의 다른 부분들에까지 침투했다. 진보 가운데 일부는 전통적 기독교가 가지는 교리주의적 태도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단지 '자연종교' 혹은 '본질적 기독교'(essential Christianity)만을 인정하게 되었다. 자연 이성 혹은 보편적 윤리를 통해 이해될 수 있는 것을 제외한 기독교회의 전통적 교훈들과 신앙은 과거의 유물로서 간주되어 마치 진보라는 이름의 배가 항해하는데 불필요한 화물처럼 생각되었다.

웨슬리는 철저한 왕실지지자였으므로 식민지의 감리교 신자들에게 왕실에 대한 충성을 명령했다. 독립선언 후 애즈베리를 제외한 식민지의 모든 영국인 감리교 설교가들은 대영제국으로 돌아갔다. 이 때문에 미국측의 애국자들은 감리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애즈베리의 꾸준한 노력으로 아메리카 감리교는 특유한 성격을 형성하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설교가들을 모집할 수 있었다. 마침내 1784년 '크리스마스회의'(Christmas Conference)에서 미국 감리교는 영국 감리교 및 앵글리칸 교회와 결별한 새로운 교회로서 탄생했다. 또한 미국내 감리교는 주교들에 의해 영도될 것도 결정되었다.

정치적 생존을 위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던 종교적 복수사회 속에서는 이미 유럽의 교리우선주의가 불러 왔던 유혈극을 비판적인 안목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북아메리카의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교회를 모든 진정한 신자들로 구성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로 파악하는 경향이 농후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교회들, 혹은 교파들은 신자들이 나름대로의 확신과 선호에 따라 창조하고 가입한 자발적 조직체들로 규정한 것이었다. 이러한 미국식 기독교의 교파주의에 의한 반응으로 나타난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The Disciples of Christ) 교파이다. 이 운동의 창시자는 토마스 캠벨(1763-1854)과 그의 아들 알렉산더(1788-1866)로서, 처음에는 새로운 교회나 표가를 만들 의도가 없었다.

이민-184: 당시 유럽에는 나폴레옹 전쟁, 공업화로 인한 사회의 격변, 왕실들의 폭정, 흉년 등으로 인해 대량이민이 미국으로 들어왔다. 이러한 과정 가운데서 가톨릭 교인들의 유입은 미국 민주주의의 안보를 위협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메이 플라워를 타고 필그림들을 비롯하여 미국이민자들과 정착민들은 그들의 이상적 공동체를 설립하기 위해 계속 서진했다. 펜실바니아에 세운 모라비안 공동체는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외에도여러 공동체가 실험되었는데 모두 재산의 공동소유를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제2차 대각성 운동-187: 18세기말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제2차 대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서부로 나아간 개척지의 상황은 뉴잉글랜드와는 달랐다. 1801년 켄터키에서 발생했던 케인릿지 부흥(The Cane Ridge Revival)은 천막집회 를 시도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결국 개척지대에서는 이러한 부흥집회가 사회생활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으며 감리교와 침례교는 양적으로 급성장했다. 이들 교파가 성장했던 또 다른 이유는 이들은 거의 교육을 받지 못한 설교가들을 기꺼이 사용하여 가능한 한 쉽게 기독교복음을 전파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교파들이 엄격한 교육수준을 요구했던 반면, 감리교와 침례교는 누구든 하나님께 소명을 받았다고 확신하는 이들은 가리지 않고 사용했다. 감리교의 선봉에 선 것은 주교들의 감독 아래 봉사한 평신도 설교가들이다.

침례교에서는 생업을 가진 농부들을 개교회의 목사로서 활동하도록 했다. 새로운 정착지에는 기꺼이 말씀 선포의 직분을 감당할 경건한 침례교 신자가 섞여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하여 감리교와 침례교는 새로운 지역에서 세력을 구축했으며, 마침내 미국 내에서 가장 큰 프로테스탄트 교파가 되었다. 제2차 각성운동의 중요한 결과는 출신민족들과 특정교파간의 상관관계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운명에의 길’과 멕시코 전쟁-191: 메이 플라워호를 타고온 청교도들이 처음 상륙한 이후, 신세계의 영국령 식민지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의도하시는 사명을 띄고 세워졌다는 관념이 통용되고 있었다. 독립전쟁 지도자들은 인류를 발전과 자유의 길로 인도할 새로운 실험을 부르짖었다. 후기의 이민들은 미합중국을 자유와 풍요의 약속된 땅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관념은 프로테스탄트주의가 가톨릭보다 우월하며, 가톨릭은 진보와 자유를 저해하는 방해물이라는 확신과 결합되었다.

1823년 제임스 몬로 대통령은 미합중국이 더 이상 유럽 국가가 서반구를 침략하는 것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미국의 운명은 특히 서반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질 것이라는 유명한 선언을 했다. 당시 멕시코는 가톨릭이었다. 텍사스는 멕시코 영토 코아후일라주였으나 미국인들이 많이 이주해 왔다. 멕시코는 이주민들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요구했다. 이주민들은 멕시코를 미국에 합병시킬 음모를 꾸미고 ‘엘 알라모’ 요새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마침내 전쟁이 벌어졌다. 몇 번의 패배 끝에 반란군이 멕시코 대통령을 포로로 잡는 일이 벌어졌다. 텍사스는 멕시코로부터 독립하는 조건으로 대통령을 풀어주었다. 그러나 텍사스는 곧 미합중국에 가입하고 말았다. 그 다음 해인 1845년에 미국의 확장주의를 의미하는 ‘운명에의 길’이라는 구호가 처음 등장했다.

이는 멕시코 영토인 서부와 남부를 침략하는 것을 뜻했다. 미국과 멕시코의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은 1848년에 끝났으나, 멕시코는 1,500만 달러에 300만 평방Km를 양도해야 했다.오늘날의 미국 남부지역과 서부지역의 대부분이 ‘리오 그란데’라고 부르는 새로운 국경에 포함되어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지역에 정착민들이 몰려 들어가자 교회는 서진정책에 합세했으며, 일부 교파들은 하나님께서 멕시코인들의 복음화를 위해서 문을 여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남서부에 남아 잇던 멕시코 가톨릭교회는 동부 미국 가톨릭교회의 수중으로 넘어갔으며, 스페인계 신부들의 숫자는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다.

노예제도와 남북전쟁-196: 식민지 시대부터 노예제도는 많은 이들의 양심을 괴롭히는 것이었다. 교회들은 노예제도에 반대했으나, 입장은 모호한 것이었다. 감리교 목사들은 노예를 소유하기도 했으며, 장로교총회는 노예제도는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난다고 하면서, 노예제도 폐지는 반대한다고 하였다. 반대자들 중의 일부는 노예를 사서 아프리카로 돌려보내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오늘날 라이베리아는 이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처음에는 남부와 북부 모두 노예제도에 반대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북부는 그대로 반대하였으나, 남부는 찬성하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결국 교회의 분열을 가져왔다.

마침내 남북전쟁이 일어나고 남북 교회들은 서로 하나님이 자기들의 편에 서있다고 설교했다. 전쟁에서 승리한 북부인들은 남부를 경제식민지화 했다. 남부의 교회들은 공공연하게 흑인들을 조소했으며, 일부 목회자들은 흑인들의 복수를 두려워해서 KKK단 발족을 지지하기도 했다. 남부교회들은 이전의 노예로서 출석했던 흑인들에게 교회를 떠나라는 압력을 가했다. 이에 따라 흑인 교파들이 생겨났다. 곧 흑인교회들은 흑인들을 연합시키고, 자존심을 회복시키는 등, 흑인사회의 중추기관이 되었다. 이들은 또 아프리카 선교의 중요한 몫을 감당한다.

남북전쟁에서 제1차 세계대전까지-201: 남북전쟁이 끝난 뒤에도 과거의 사회적 경제적 긴장 관계는 계속 증가했다. 남부는 더 인종 차별주의적이며 반지성적인 경향으로 흘렀으며, 북부는 새로운 흑인 이주민들로 도시인구가 급격히 늘어났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미구긔 통일성에 기여한 것은, 미국이야말로 인류의 발전을 위한 임무를 하나님으로부터 맡아가지고 있다는 의식이었다. 이러한 직분은 대개 인종적, 종교적, 정치적 측면에서 이해되었다. 즉

인종적으로는 앵글로-색슨족의 백인들, 종교적으로는 프로테스탄트, 정치적으로는 자유기업 위에 기초한 민주정치체제였다. 따라서 북부 유럽 인종들은 나머지 세계의 ‘보다 후진적’인 인종들을 문명화시킬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들은 당시 미합중국 내의 도시들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몇 가지 기독교 조직체들이 이를 위해 활동했으나, 가장 성공한 것으로는 YMCA와 YWCA가 있다. 다른 것으로는 주일학교였다. 프로테스탄트 측은 옛날의 천막 집회를 새로운 상황에 적응시켰다. 그리하여 부흥회가 다시 도시지역 종교생활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했다.

이 운동 초기에 가장 중요한 인물은 드와이트 무디였다. 그는 회중파 교회에서 시작했으나, 곧 독립파 교회를 설립했다. 그는 또 YMCA 운동에도 참여했다. 그의 설교내용은 간단하고도 열정적인 것으로서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의 구원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도시 빈민들을 기반으로 발전했던 감리교가 점차 중산층으로 파고들면서 가난한 자들을 등한히 하므로, 이에 대해서 회복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영국에서는 윌리암 부스에 의해 구세군이 창설되었다. 구세군은 시초부터 도시 빈민들의 영적, 육체적 복리를 위해 활약했다. 구세군이 미국으로 건너오자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미국 내에서도 감리교회의 분파가 생겨났다. 특히 성화에 대한 강조 때문에 성결교회라고 불리는 분파가 나타나서, 성령의 은사-특히 방언, 치병, 예언 등을 중심으로 예배를 했다. 이러한 모습은 곧 시들해졌으나, 1906년 로스안젤리스의 아주사 거리에서 재등장했다. 바로 이 아주사 거리의 신앙 부흥에서 시작된 ‘오순절의 불길’은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 운동은 흑인과 백인들의 양 교파로 퍼져 나갔는데, 오순절파 잡지 발행인이 ‘성령세례를 믿는 자들’을 한데 모아 ‘하나님의 성회’를 조직했다.

남북전쟁 후에 겨우 모습을 드러낸 교파는 제7일 안식교라고 불렸다. 버몬트에 살고 있던 침례교 신자 윌리암 밀러는 1843년에 주님께서 재림하신다고 예언했다. 예언했던 날자가 그대로 지나자 추종자 대부분은 흩어졌으나, 화이트 부인이 나타나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들은 주일 대신 토요일 안식일에 예배하기 시작했다.

다윈의 진화론이 유럽에서 건너오면서 기독교에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보다 큰 문제는 역사 비평적 연구들이었다. 이러한 연구들은 성경의 많은 부분이 역사적으로 과연 사실인가에 의문을 던졌다. 우선 방법론적 전제로서 기적들은 부인되었다. 이러한 경향의 학자들은 인간의 능력에 상당히 낙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프로테스탄트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사상의 구조 속에 기독교를 집어넣고자 했으며, 미국의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런 사상의 전체적 흐름을 본 많은 이들은 자유주의야말로 기독교신앙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유주의자들 가운데 일부 과격파-현대주의자-Modernist-는 기독교의 성경을 다른 종교의 경전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자유주의자들의 도전에 대해 보수주의자들은 기독교의 근본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대응했다. 이런 움직임은 ‘복음주의 동맹’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뉴욕주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열린 1895년 열린 집회에서 기독교의 다섯 가지 이념들을 정립했다. 그것은 성경의 무오성, 예수님의 신성, 동정녀 탄생, 우리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의 죽으심, 그리고 그의 육체적 부활과 임박한 재림이었다. 얼마후 장로교 총회도 이와 비슷한 원리들을 채택했다.

근본주의들은 성경의 무오성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성경해석을 창출했다. 그들은 세대주의자로 불리는데, 사이러스 스코필드 박사는 그의 주석 성경을 출판하여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역사를 세대로 구분하여 지금은 여섯 번째 세대에 해당한다고 했다. 어쨌든 근본주의는 세대주의와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다.

그 후 자유주의는 사회복음(social Gospel)이라 불리는 움직임을 통해 중요한 공헌을 하게 된다. 라우쉔부쉬가 이들의 지도자 역할을 했는데, 그는 한 국가의 사회적 경제적 생활은 복음의 요구하는 바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유방임주의적 경제정책이 불평등과 부정의를 낳게 된다고 역설했다.

신흥종교-208 : 19세기 미국 종교계의 중요한 현상은 전통적인 기독교와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에 신흥종교들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새로운 종파의 출현이다. 이들 가운데 중요한 것들로는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크리스쳔 사이언스 등이다.

모르몬교는 조셉 스미스에 의하여 창시되었는데, 천사가 준 금판의 기록들을 번역했다는 모르몬경전이 있다. 추종자들은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오하이오에 정착했다가 일리노이로 옮겨갔다. 스미스가 주민들과의 갈등으로 살해된 이후 브리감 영이 이들을 이끌고 유타주로 가서 독립 국가를 세웠는데, 미국의 서진정책에 의해 합병되었다. 이들은 일부다처제를 주장했다가 미국민의 반발을 받고 폐지하였으며, 공동체 생활의 강조를 포기하고 외국에 선교사를 보내고 있기도 하다.

여호와의 증인은 성경을 마치 미래의 사건들과 세상의 종말에 관한 암호가 숨겨 있는 것처럼 읽는데서 발생한 종교이다. 창시자 찰스 러셀은 사탄의 세 가지 무기는 정부, 기업, 교회라고 했다. 그는 예수님의 신성과 삼위일체를 부인했으며, 예수님의 재림은 이미 1872년에 이루어졌고, 세상의 종말은 1914년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 해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으나, 세상의 종말이 오는 아마겟돈 전쟁은 아니었다. 그의 뒤를 이은 것은 루드포드 판사라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는 조직을 거대한 선교단체화 했으며, 1914년의 추태 이후 러셀의 교훈을 재해석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를 창시한 베이커 에디는 질병에 시달리다가 큄비의 치료를 받고 낫게 되자, 병은 진리의 지식만 있으면 낫게 되는 허상에 불과한 서이라고 했다. 이에 관해서 [과학과 건강, 성경을 푸는 열쇄와 함께]라는 책을 출판한 것을 계기로 추종자들이 ‘과학자 그리스도의 교회’를 설립했다. 그녀는 책에서 하나님, 그리스도, 구원, 삼위일체 등의 기독교 용어들을 본래의 의미와는 판이하게 다른 ‘영적’으로 해석했다. 그녀의 교리가 약속한 행복과 건강은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다. 그녀는 말년에 극심한 고통과 번민에 빠져 있다가 죽었다.

제13장

정치적 지평선: 유럽

프랑스 혁명-215: 루이16세는 왕실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귀족과 성직자들에게 과세하고자 했다. 왕은 성직자, 귀족, 부르주아로 구성되는 ‘삼부회의’를 소집했다. 부르주아의 요구에 따라 단일화된 ‘국민의회’는 정부 측의 반대로 회의를 열지 못했다. 그러나 국민의회는 헌법 제정을 요구하면서 난동을 일으키고, 왕은 이에 굴복하여 헌법제정의회를 구성했다. 이 회의에서 ‘인권선언’과 ‘성직자 시민헌법’이 연이어 발표되었다. 이러한 혁명적인 운동은 유럽 각국으로 파급되어 갔다. 1791년 헌법제정의회는 ‘입법의회’로 대체되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에 들어갔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입법의회는 해산하고 ‘국민공회’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언했다. 왕은 반역음모죄로 처형되었다. 혁명파들도 서로를 고발하여 단두대에 처형하는 공포정치가 실시되었다.

혁명파들은 종교란 인간의 무지의 소치에 불과한 것이며, 자기들은 일체의 미신과 종교를 극복한 과학과 이성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인물들이라고 생각했다. 프랑스 혁명은 ‘이성의 종교’에서 후에는 ‘지존자의 종교’라고 불리는 자기들의 종교를 조작해 냈다. 형식상으로 종교의 자유는 보장되고 있었으나, 소위 ‘자유의 제단’ 앞에서 맹세하기를 거부하는 신부들은 반혁명분자로 지목되어 단두대로 보내졌다. 나중에는 시민헌법에 서약을 한 여부나 가톨리과 프로테스탄트를 가리지 않고 마구 잡아 죽였다.

1795년에 공포정치는 끝났으나 정부는 공식적으로 계속 기독교에 대적했다. 이때 군부를 장악한 나폴레옹은 정치적인 이유로 기독교와 화해를 했다. 마침내 나폴레옹은 피우스7세 교황의 집전으로 황제 대관식을 올렸다. 그러나 황제의 야망과 교황의 입장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다시 사로잡혀 연금 상태에서 나폴레옹의 몰락을 기다려야 했다.

새로운 유럽-222: 나폴레옹 전쟁으로 말미암아 유럽은 각국의 왕실들이 전복되는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패배하자 유럽은 다시 옛날로 돌아갔으며 전쟁이 그치고 평화를 회복했다. 그렇지만 평화적인 표면 아래에서 사회적 정치적 갈등으로 말미암아 음모와 반란과 폭동은 그치지 않았다. 신학적 자유주의와는 또 다른 성격을 띤 경제적 자유주의가 수요와 공급의 법칙으로 자율적으로 조정된다는 ‘자유방임주의’의 원칙아래 보수주의자들 사이에 신봉된다. 1848년 프랑스에서 제2공화국이 선포되고 공산당 선언도 이해에 발표된다. 신학발전과 선교활동을 제외한 가장 중요한 19세기의 문제들은 교회와 국가 사이의 분리관계로부터 발생한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 이후 이러한 현상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왕정복고 후에도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는 이전처럼 강력하지 못했다. 독일의 경우, 국가 통일을 위해 폐지되었던 옛날 법률들 속에는 종교의 통일성을 보장하는 조처들이 많이 들어 있었다. 유럽 전역을 통해, 경제적, 정치적 자유주의도 비슷한 결과를 불러오게 되었다.

이데 따라 '자유교회'들이 성장하게 되었다. 이들은 국고에 의해 유지되는 국교들과는 대조적으로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내는 헌금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다. 독일과 북부 유럽 일대에 걸쳐 감리교와 침례교가 퍼져 나갔다.

영국에서의 발전-227 19세기는 유럽에 거대한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가져왔다. 일반적으로 가톨릭측은 프로테스탄트측보다 이러한 변화 때문에 더욱 큰 피해를 받았다. 따라서 19세기는 현대사상들에 대해 가톨릭 측의 반동기라고 할 수 있다.

반면 19세기는 프로테스탄트 측에 새로운 기회들을 부여했다. 대영제국과 독일 등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의 영향력이 급증했다. 정치적, 경제적 자유주의는 프로테스탄트 신앙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주장한 이들은 이러한 자유, 진보주의야말로 이미 한물간 권위주의적 가톨릭 측에 대한 미래로부터의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프로테스탄트는 각종 사회적 불의, 그 중에서도 특히 노예제도에 대항한 투쟁의 선봉에 섰다. 그 결과 가톨릭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경계와 의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데 반해, 수많은 프로테스탄트신자들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미래를 낙관했다.

제14장

정치적 지평선: 라틴 아메리카

요약해서 말하면, 19세기는 유럽에 거대한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가져왔다. 일반적으로 가톨릭측은 프로테스탄트측보다 이러한 변화 때문에 더욱 큰 피해를 받았다. 따라서 19세기는 현대사상들에 대해 가톨릭측의 반동기라고 할 수 있다.

반면 19세기는 프로테스탄트측에 새로운 기회들을 부여했다. 대영제국과 독일 등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의 영향력이 급증했다. 정치적, 경제적 자유주의는 프로테스탄트 신앙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주장한 이들은 이러한 자유, 진보주의야말로 이미 한물간 권위주의적 가톨릭측에 대한 미래로부터의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프로테스탄트는 각종 사회적 불의, 그 중에서도 특히 노예제도에 대항한 투쟁의 선봉에 섰다. 그 결과 가톨릭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경계와 의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데 반해, 수많은 프로테스탄트신자들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미래를 낙관했다.

새로운 국가들의 태동-231: 정치적 격동들은 라틴 아메리카에도 느껴졌다. 스페인과 포르투칼령 식민지에서는 이베리아 반도 출신의 사람들(페닌슐라르-Peninsula)과 라틴 아메리카 출신의 백인 원주민(크리올-Creole) 사이에는 갈등이 있었다. 크리올들은 식민지의 발전이 자기들의 노력의 결과이기에 페닌슐라르보다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성속을 불문하고 중요한 직책은 유럽에서 임명했으므로 페닌슐라르가 차지했다.

남부에서 크리올들은 스페인 본국 정부에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으며,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우루과이, 칠레가 연이어서 독립을 선언했다. 북부에서는 시몬 볼리바르가 군대를 조직하여 스페인군을 물리치고 대콜롬비아를 선언했다. 볼리바르는 남아메리카의 대부분을 포용하는 거대한 공화국의 성립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꿈은 각 지역의 이해관계와 미국의 분열정책으로 좌절되었고,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쿠아도르, 볼리비아 등으로 분열되었다.

멕시코의 일부였던 중앙 아메리카는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혼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등으로 나뉘어졌다. 브라질의 독립 역시 나폴레옹 전쟁 때문이었다. 포르투칼 후앙 6세는 나폴레옹을 피하여 브라질에 자리를 잡았으나, 나중에 본국으로 복귀하면서 아들을 남겨두었다. 이 아들이 독립을 선언하여 페드로 1세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브라질은 곧 공화국으로 넘어갔다. 아이티는 나폴레옹의 전쟁이 직접저적인 결과였다. 본국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틈을 타서 흑인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독립을 얻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전반에 걸쳐 라틴 아메리카를 뒤흔든 사상적 논쟁은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 사이의 갈등이었다. 대부분 보수주의자들은 스페인으로부터 사상을 수입해온 반면에, 자유주의자들, 혹은 진보주의자들은 영국, 프랑스, 미국에 의존했다. 그 결과 장기간에 걸쳐 이들의 주도하에 혹독한 독재정치와 폭력이 극에 달한 혁명들이 반복되었다.

새로운 국가들 속에서의 교회-237: 식민지 시대에 걸쳐 라틴아메리카 현지의 주교들은 스페인과 포르투칼의 정부에 의하여 임명되었다. 따라서 페닌슐라르와 크리올 사이의 긴장관계가 교회 안에서도 존재했다.

독립 후 주교들은 대부분 본국으로 돌아가 버렸고, 수많은 교구들이 비었으나 성직자들이 없었다. 진보파와 보수파들 사이의 투쟁은 대치되는 종교정책들로 나타났다. 보수파들은 성직자와 교회의 전통적 특권들을 수호하고자 했지만, 진보파들은 이에 반대했다. 자유파와 자유주의자들의 계속된 갈등은 결국 자유주의자들이 반가톨릭 감정을 가지게 했다.

프랑스 철학자 콩트는 인류사회는 삼단계의 발전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신학적, 형이상학적, 그리고 실증 과학적 단계를 말한다. 이제 우리는 과학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실증적 원리‘에 의하여 사회가 재조직되어야 한다는 것이 콩트의 주장이었다.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진보파와 교회 사이에 갈등은 새롭게 가열되었다.

새로운 사상들이 널리 퍼지면 퍼질수록 교회 정치가들은 더욱 격렬하게 이런 사상들을 정죄했으나, 수많은 가톨릭신자들은 신앙을 교회와는 별개로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곳에 도달한 프로테스탄트 신앙은 쉽사리 많은 개종자들을 얻을 수 있었다.

제15장

프로테스탄트의 신학

새로운 사상의 주류들-244: 19세기 초 산업혁명은 유럽의 대부분을 휩쓸었으며, 신세계의 일부까지도 미쳤다. 그 효과는 단순히 경제 분야를 넘어 인간들의 생활 전체에 까지 미치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자기들의 생애를 개인적인 책임으로 보게 되었으며, 개인주의와 나라는 주제가 철학과 문학의 중심이 되었다. 새로운 기술이 나타나고 이러한 신기술의 적용으로 모든 사회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는 낙관적인 견해가 지배했다.

이러한 사고는 1859년 출간된 다윈의 [자연적 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표면화되었다. 결국에는 현재의 인류는 과거의 인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이 나타났다. 왜냐하면 인류의 지적, 혹은 종교적 관념 역시 진화했기 때문이었다.

산업혁명의 시기에 발생한 빈민들의 문제의 규모가 너무도 거대했으므로 많은 이들이 급격한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수많은 기독교신자들을 비롯하여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사회주의에서 해답을 찾고자 했다. 결국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회주의 저술가는 1848년 [공산당선언]을 출판한 칼 마르크스였다.

그가 제안한 이론은 당시 사회주의자들이 꿈꾸던 유토피아의 범주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사상 속에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기초 아래 역사와 사회에 대한 분석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분석의 중요한 내용은 지배계층은 순수한 합리적 이론의 가면 아래 실제로는 기존질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한 사상을 발전시키고, 종교 자체도 유력한 자들을 지지하기 위한 기반의 일부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유명한 말을 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이 단계를 넘어서 다음에는 노동자 혁명을 통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이고, 그 다음에는 국가의 존재까지도 무용해지는 계급 없는 사회 즉, 진정한 공산주의 사회가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프로이드는 수년 동안의 관찰을 통해, 인간의 사고는 단지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절대적으로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무의식의 차원에서만 존재하는 다른 요인들에 의해서도 좌우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예를 들어 성과 호전성은 아무리 이들을 억압할지라도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론은 심리학뿐만 아니라 신학에서도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았다.

이제 과학적 논리가 자연과학의 범주를 뛰어넘어 사회와 인간의 심성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에도 적용되는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새 학문 분야의 확장 속에서 신학자들은 자기들의 임무를 감당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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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라이어마허의 신학-247: 칸트의 역할을 통해 18세기의 순진한 이성주의는 종식되었다. 만약 “순수이성”이 하나님의 존재, 혹은 죽음 이후의 생명들과 같은 의문들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신학은 종교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길들을 모색해야 할 것인가? 또한 사고의 구조가 우리들의 지성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현실과 상응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궁극적 실재들에 관해 어떻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슐라이어마허는 칸트가 인간의 도덕률을 기초로 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 이성주의 방식을 더 이상 주장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는 ‘게풀’이라고 부르는 ‘절대자를 향한 의존의 감정’에 하나님이 내재하시는 것으로 파악했다. 그의 신학의 기능은 의존의 감정을 세 가지 차원 속에서 탐구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자와 세계의 관계, 그리고 자아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의존의 감정에 관련되지 못한 것은 신학 속에서 아무런 자리도 차지할 수 없다. 예를 들어서 창조론을 생각해 보자. 이 신조는 절대 의존의 감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이는 일체의 존재가 하나님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를 부인하는 것은 기독교적 종교 감정의 중심을 차지하는 의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우리가 특정한 형태의 창조를 인정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창세기에 표현한 창조는 역사적으로 정확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슐라이어마허는 이것이 사실적인 묘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이것이 신학탐구를 위한 정당한 대상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는 의존의 감정과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모세에 관련된 사건들이 초자연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이 정보는 우리들이 의미하는 신앙의 신조가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절대 의존의 감정은 이에 의하여 새로운 내용이나, 새로운 형태나, 혹은 보다 명백한 정의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천사들의 존재, 사탄의 역할 등에 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같은 이유에서 자연과 초자연 사이의 전통적 구분은 포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들이 현대과학에 위배되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구분은 초자연이 드러난 사건이나 장소들에 대한 우리의 의존의 감정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슐라이어마허는 종교가 지식과 다르다고 주장함으로써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들을 과학의 발견들과 모순되지 않도록 해석할 수 있었다.

헤겔의 체계-251: 칸트의 비판 이후 남겨진 또 하나의 길은 인간의 지성이 일체의 지식을 인증한다는 데에 그와 동의하면서도 이를 이성의 제한성을 보여주는 증명이라고 인정하는 대신 이성이 실재 자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성은 우리가 실재, 혹은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서 우리들의 지성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이야말로 실재이며 유일한 실재이다.

헤겔은 신학 분야에서 학자로서의 수업을 닦았다. 그러나 후에는 신학이 학문탐구의 영향으로서는 너무 협소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종교뿐만 아니라 실재 전체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실재는 서로 관련되지 않는 일련의 사물들이나 사건들로서가 아니라 전체로서 파악해야만 한다. 그는 이성과 실재가 동일하다고 인정할 때에 이러한 작업을 이룩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실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이성의 문제가 아니며, 혹은 실재가 이성을 제한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성이 곧 실재이며, 유일한 실재는 이성이다. 그가 말한 바와 같이 '합리적인 것은 존재하며, 존재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그런데 헤겔이 언급한 '이성'이란 단지 이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혹은 논리의 결론들을 가리키지도 않는다. 이는 오히려 사고과정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할 때에 어떠한 사상을 연구하기 위해 고정된 사상 앞에 서지는 않는다. 반대로 우리는 하나의 사상을 제시하고, 이를 초월하기 위해 점검하거나, 혹은 다른 사상을 선호하여 이를 부인하며, 마지막에는 이전의 두 가지 사상 속에 담겨 있던 가치를 포함한 일체를 포괄하는 제 3의 사상에 도달하게 된다. 이처럼, '테제'를 제안하고, '안티테제'의 방법으로 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여, 결국에는 '합'에 도달하는 과정을 가리켜 헤겔은 '이성'이라 불렀다. 따라서 이는 동적 이성, 계속하여 발전하는 운동의 형태를 띠고 있다. 또한 이러한 이성은 단지 인간의 지성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적 이성 - 헤겔은 이를 가리켜 우주정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 이야말로 실재의 전부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바로 이러한 우주정신의 변증법적이고 동적인 사고이다.

헤겔은 기독교야 말로 절대종교라고 확신했다. 이는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을 부인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헤겔이 볼 때 기독교야말로 모든 종교들의 종합으로서 인간의 종교적 발전의 전체과정을 종합한다는 의미였다. 종교의 중심주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이다. 그 관계가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성육신의 교리에서 절정에 달한다. 왜냐하면 성육신 속에서 신과 인간이 완전히 연합했기 때문이다. 다른 초기의 종교들 속에서 은연 중에 잠재해 있었던 신과 인간의 연합이 이제 성육신을 통하여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삼위일체의 교리도 하나님에 관한 사고의 종합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는 궁극적 실재의 동적인 본질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의 변증법은 세 가지 움직임을 포함한다. 우선 신은 영원한 사념으로서 우리가 흔히 창조라고 부르는 합리적 실재의 발전을 초월해서도 그 자체로서 존재하고 있다. 이것이 곧 '아버지의 왕국'이니 이는 다른 일체의 존재들로부터 하나님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이다. '아들의 왕국'은 우리가 흔히 창조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시간과 공간 속에서 존재하는 세계로서, 그 결정은 신과 인간 사이의 궁극적 일체성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성육신이다. '성령의 왕국'은 이러한 신과 인간의 종합을 뒤따른다. 그리하여 공동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존재 속에서 나타난다. 이들을 종합한 것이 '하나님의 왕국'으로서 도덕적 생활과 국가의 질서 속에서 역사적인 열매를 맺게 된다. 이에서 볼 수 있는 바처럼 헤겔은 국가의 개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헤겔은 이러한 결과 일체의 교조적이고 부분적인 체계들의 편협성을 탈피하는 철학이 성립된다고 보았다

이제 드디어 역사야말로 영원한 실재들을 파악할 수 있는 배경으로 간주되었다. 후기신학자들로 하여금 성경적 관점의 많은 부분을 회복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던 이러한 관념이 헤겔 및 19세기가 남긴 유산의 일부라 할 수 있겠다.

키에르케고르의 업적-255: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의 뛰어난 지능을 자각하고 특별한 임무가 그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결혼도 포기하고 외로운 신앙의 길을 걷기로 했다. 그것은 칸트를 비판하는 제3의 길이었다. ‘순수이성’은 하나님을 알 수 없으나, 신앙은 하나님을 직접 안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결국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 속에서 우리에게 펼쳐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인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의 큰 대적은 기독교권이었다. 기독교권은 너무나도 쉽게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사람들에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단지 유대인이나 모슬렘이 아니라는 이유로 스스로를 기독교 신자라고 부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기독교를 이해하는 자들은 이교도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설교가들이 기독교를 쉬운 것으로 설교함으로써 이러한 착각을 촉진하고 있다. 이야말로 기독교를 유희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하나님을 바보'로 생각하는 '기독교권의 범죄'인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논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를 깨닫는 이가 별로 없다는 것이야말로 비극이다.

이러한 기독교권의 비극에 대응하여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자기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물론 그가 사람들에게 기독교 신앙이 잘못이라고 납득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설교를 듣고 가르침을 받았던 내용들은 진정한 신앙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진정한 기독교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신앙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하고, 그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이러한 고통 없이 우리는 기독교권의 한 구성은 될 수 있을지 모르나 기독교신자는 아니다.

진정한 기독교는 단지 지성이 아니라 한 인간의 존재 자체와 관련을 가진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체계'의 환상을 부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체계는 물론 그가 헤겔의 철학을 조소하여 붙인 명칭이었다. 헤겔과 그의 추종자들이 한 것이란 고통과 회의와 절망 속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진정한 존재에게 설 자리가 없는 구조물을 지어낸 것이었다. 이들은 마치 화려한 궁전들을 지어놓고는, 그 궁전이 너무나도 화려하기 때문에, 헛간에서 살기로 결정한 자들과 같았다. 진정한 고통의 인간의 존재는 본질에 우선하는 것이며, 본질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이처럼 존재에 관한 강조 때문에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주의의 창시자라고 불린다.

그러나 물론 후대의 실존주의자들은 그와는 판이한 흥미와 관심을 추구했다. 존재란 투쟁이다. 무엇인가가 형성되고 태어나기 위한 고통의 투쟁이다. 이처럼 존재를 사물의 중심에 놓을 때, 인간은 헤겔주의뿐만 아니라 모든 다른 체계들을 포기해야 하며, 어떤 일관성 있는 체계를 향한 희망까지도 저버려야 한다. 비록 현실 자체가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체계라 할지라도, 존재의 한 가운데 있는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절대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키에르케고르는 특별한 형태의 존재, 즉 기독교적 존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역시 어떤 체계로서 축소될 수 없었다. 기독교권, 즉 쉬운 기독교의 비극이란 이러한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모험이나 계속적 위험이 되지 못하고, 도덕 혹은 교리 체계의 형태로 전락했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만인들에게 계시하고자 했던 키에르케고르의 거대한 문제는, 우리가 기독교권의 한 가운데에서 살아야 하는 약점을 안고 있을 때에 어떻게 하면 진정한 신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기독교와 역사-258: 기독교 교리(도그마)가 여러 세기를 통해 진화했다는 사상은 많은 이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진화는 단지 초기 기독교 당시 이미 잠재해 있던 가르침들이 점차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돌프 폰 하르낙(1851-1930)은 도그마의 발전은 초대교회 신앙의 점차적 포기로서, 원래의 예수님의 가르침들로부터 예수님에 관한 가르침들로 옮겨가는 것이라고 간주했다. 하르낙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부성과 인류의 형제애, 인간 영혼의 무한한 가치, 그리고 사랑의 명령을 가르치셨다. 그러나 후일에 장기간에 걸친 과정을 거쳐 예수님과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기독교 메시지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또한 사건들, 특히 예수님의 사건들에 관한 사실적 지식에 기초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실제적인 것이다. 실제 생활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이다. 신학이 이를 망각할 때 이는 이성주의, 혹은 신비주의에 빠지게 된다.

마지막 교부라고 불리는 알브레히트 리츨은 이러한 오류들에 대항하여 역사 연구는 예수님이 남기신 교훈의 중심에 하나님의 왕국과 '사랑에 기초한 행동을 통한 인류의 조직'이라는 윤리가 자리 잡고 있음을 밝혀준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리츨의 신학은 앞에서 거론했던 라우센부쉬의 사회복음의 기초가 되었다

19세기에 두드러졌던 역사에 대한 관심은 “역사적 예수의 탐구”였다. 기독교의 진정한 본질을 찾기 위해서는 교회의 신앙과 복음서의 기록들 뒤에 숨겨진 사실적 예수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대두된 것이다. 그리하여 20세기 초 슈바이처 박사는 이러한 탐구가 예수님 자신을 발견하는 대신에 19세기의 이상적 인간을 만들어냈다고 결론지었다.

제16장

가톨릭 신학

교황청과 프랑스 혁명-263: 프랑스 혁명 당시 교황은 피우스 6세였다. 프랑스 혁명 정부는 ‘성직자들의 시민 헌법’을 반포하고, 로마를 점령하여 교황은 더 이상 그곳의 세속적 통치자가 아니라고 선언하고 교황을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집권하면서 새로운 교황은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집전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 교황청은 보수주의로 흘러 정치와 결별하기 시작했다.

피우스 9세-266: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재위했던 피우스 9세(1846-1878)는 당시의 패러독스를 여실히 보여주는 인물이다. 이런 패러독스들 가운데 가장 뚜렷한 것은, 교황들이야말로 무오하다고 선언했던 이때에 이들은 권력을 상실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교황의 주권은 바티칸 궁에만 제한되었다

이러한 권력의 상실 속에서 피우스 9세는 단지 종교적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자기의 주권을 옹호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1854년 그는 성모무염시태의 도그마를 선언한다. 이 교리에 의하면, 구세주의 어머니로서 택정 받았기 때문에, 마리아 자신도 원죄를 포함한 일체의 죄 및 그 영향으로부터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는 이미 카톨릭 신학자들이 아무런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 채 수세기 동안 논쟁을 거듭한 문제였다. 그런데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이 도그마를 교회의 공식 교리로 선포함으로써 피우스 9세는 종교회의의 지원 없이 독단적으로 도그마를 정의한 최초의 교황이 되었다는 점이다. 어떤 점에서 볼 때 성모무염시태의 도그마를 선언했던 교황의 칙령 인에퍼빌리[Ineffabilis]야말로 세계가 그에게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알아보기 위한 시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칙령에 대해서 별다른 반론이 없었으므로 교황무오설의 교리가 그 뒤를 따르게 된다.

먼저 쿠안타 쿠라 회칙과 80개의 오류목록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무오류설이 선포되었다. 이에 반발해 네델란드와 오스트리아, 그리고 독일의 일부 가톨릭 신자들은 교황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보수 가톨릭교회로서 독립했다. 고올주의자들과 교황권 지상주의자 사이의 투쟁에서 결국 후자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승리는 이전에 고올주의자들이 두려워했던 교황청의 권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레오 13세-271: 레오 13세는 현대의 새로운 조류들을 무시하지 못하면서도 언젠가는 교황청에 의하여 성립된 원칙에 이끌어질 가톨릭 사회의 실현을 꿈꾸고 있었다. 그는 재임 중 노동자와 고용주의 관계를 다룬 ‘레룸 노바룸’[Rerum novarum] 칙령을 반포했다. 이는 개인들의 사랑과 자선이 정의를 수행하기에 불충분하므로,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노동조합을 만들 것을 권고하고 있다.

피우스 10세-275: 가톨릭의 보수주의화로 현대사상의 주류 및 사회의 흐름과 가톨릭 사이의 간격은 넓어지기만 했다. 어쨌든 이러한 움직임의 결과 세계 제 1차 대전 당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소원한 관계에 있었다.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카톨릭 교회를 지나간 과거의 유물이라고 생각했으며, 가톨릭 측에서는 프로테스탄트주의야말로 현대 세계의 도전에 무릎을 꿇음으로써 그 이단적 특성을 드러내었다고 확신했다.

제17장

지리적 확장

19세기의 눈부신 지리적 확장은 오직 16세기의 그것에나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16세기가 가톨릭 확장기라고 한다면, 19세기는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확장시대였다.

이처럼 거대한 움직임의 정확한 결과를 아직도 확실하게 평가할 수는 없지만, 기독교의 역사에서 볼 때, 19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야말로 모든 인종들과 국가들로 이루어진 진정한 우주교회의 설립이라 할 수 있겠다. 반면 이러한 모습이 식민지주의와 경제적 제국주의의 기틀 아래 이루어졌음을 반드시 지적해야 한다.

식민지의 확장-278: 유럽에서 나폴레옹 전쟁이 끝났을 때 영국은 이전 프랑스와 네델란드의 식민지를 인수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신 식민주의가 팽배했다. 아시아에서의 식민지 개척은 군사점령과 정치적 점령이라는 보다 전통적인 형태로 진행되었다. 아프리카의 식민지화도 가속화되었다. 서구국가에 의해서 완전정복을 받지 않은 경우에도 무력에 의해 문호를 개방해야 했다. 역사상 최초로 전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경제구조를 이루게 되었다.

서구세계의 많은 이들은 물론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일부는 이러한 식민지의 확장이 자기들의 국익에 위배된다는 이유에서 이를 반대했다. 대부분 기독교신자였던 또 다른 집단은 식민지화된 현지의 주민들에 대한 착취에 반대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식민자들은 피식민지들이 누릴 혜택에 따라 자기들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즉 하나님께서는 백인들의 수중에 서구문명과 기독교 신앙을 맡기셨다. 따라서 유럽인들과 북미인들은 세계의 나머지 인류와 이를 공유해야 한다는 이론이었다. 나머지 세계에까지 공업화, 자본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기독교의 혜택을 베풀어야 하는 것은 '백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다.

물론 이러한 환상을 꿈꿀 근거들도 있기는 했다. 예를 들어 의학의 혜택이 오지에까지 전파되어 수많은 인명들을 구했다. 교역과 공업발전은 여러 지역의 부를 증가시켰는데,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현지인들 가운데 일부 계층은 기꺼이 협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수많은 현지인들이 농토를 빼앗기고 방황하게 되었으며, 수백 년 동안 현지를 이끌어 왔던 문화와 전통이 파괴되었고, 전 세계에 걸쳐 부자와 가난한 자들 사이의 생활수준의 차이가 커져가기만 했다. 어쨌든 이러한 전체식민주의의 기반을 이루고 있던 인종적, 문화적 자만심은 20세기 중반을 특징짓는 반식민적 반동을 불러 올 수밖에 없었다.

선교 활동-281: 교회는 이러한 상황들과 사사들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선교사들이 식민지주의의 열려진 문을 통해 들어갔다는 주장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선교사들이 식민지에서 사역하기는 했지만, 이들은 백인상인들이나 정복자들보다 먼저 오지에 들어가곤 했기 때문이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식민지의 관리들이나 상인들은 선교사역을 반대하고 훼방하곤 했다. 그러나 서구 제국의 식민지 확장과 선교영역의 확장이 중복되었던 것은 사실이며, 이들 양자는 상황에 따라 서로를 돕기도 하고 갈등을 겪기도 했다.

선교협회들의 출현은 19세기 선교운동의 또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즉 일반신자들에 의한 폭넓은 지원이다. 그 이전의 수백 년 동안 대부분의 선교활동은 국가의 공식적 지원 아래 이루어졌다. 그러나 19세기에 있어서 대부분의 서구정부들은 선교활동과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영국의 동인도회사 같은 경우는 자기들의 교역지에 선교사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대부분의 유럽 정부들과 미국은 선교사들과 그 사역에 대하여 중립적인 -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약간 적대적인 - 태도를 견지했다. 이론적으로 불 때 선교사들이 다른 자국민들보다 더 특별한 보호를 받지는 못했다. 그런데 특히 재정지원의 측면에서 볼 때, 현대의 선교사들은 그 이전의 현상과는 큰 대조를 이룬다. 선교활동을 위해 자금을 제공하는 정부나 교회들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선교지로 나가고자 하는 이들은 대중들에게 직접 호소해야만 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선교협회가 성장하고 번성했던 것이다.

그런데 프로테스탄트 신자들 가운데에서는 여성선교사들이 고국에서는 금지되어 있던 설교나 교회개척 등의 책임을 수행하기 시작했다(특히 당시의 인종차별로 말미암아 열등한 인종들에게는 백인여성들이 성경을 가르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결국 이러한 여성들의 모범과 이들의 성공담에 힘입어 유럽과 미합중국내의 여성들은 자기들에게도 이러한 기회를 줄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선교활동이야말로 서구의 프로테스탄트들 사이에서는 여성운동의 근원 중 하나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선교활동의 중요한 결과 가운데 하나는 서로 다른 여러 교파들 사이에 발생한 협동정신이라 할 수 있겠다. 유럽이나 미합중국 내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던 교파들 사이의 경쟁이 인디아나 중국의 선교 사역현지에서는 큰 장애물이 되었다. 따라서 수많은 선교사들과 이들을 통한 개종자들은 교파간의 울타리를 낮추고자 노력했다. 어떤 선교협회는 여러 교파로 구성되었다. 또한 선교지에서는 경쟁을 회피하고 서로 협력할 수 있는 길을 항상 간구했다. 그리하여 적어도 프로테스탄트진영에서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19세기와 20세기의 선교활동의 경험으로부터 연유한다고 할 수 있겠다.

아시아와 오세아니아-285: 아시아의 경우 식민지 확장의 영향을 직접 받은 곳은 현재의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그리고 스리랑카 등으로 이루어진 인도 대륙이었다. 오랜 엣ㄴ날부터 기독교는 이곳에 존재하고 있었으며, 가톨릭교는 16세기에 , 프로테스탄트는 18세기에 최초의 선교사들이 덴마크 국왕의 보호를 받으며 들어왔다.

동인도회사는 처음 백 년 동안에 선교를 반대했다. 그러나 윌리엄 캐리의 노력의 결과 이런 상황이 변하게 되었다. 윌리엄 캐리는 원래 앵글리칸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침례교로 개종했다. 그가 현대선교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는 당시의 많은 기독교 신자들과는 달리 복음을 알지 못하는 먼 나라에까지 전도해야 한다는 특별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 선교의 길에 나서 가족과 의사 1명을 데리고 인도에 도착했다.

캐리는 나중에 합류한 제2진 선교사들과 함께 가장 시급한 성경번역 사업을 시작해서 임종 시까지 35개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했다. 인도에서 캐리의 tkur은 많은 개종자를 내진 않았으나 다른 사람들이 그의 뒤를 이었다. 알레산더 더프는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그 결과 100년 후 인도가 독립을 쟁취했을 때,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기독교 신앙에 의해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아도의 최하위계층의 사람들이 대량으로 개종했으며, 여자들도 기독교를 통해 해방을 맛보았다.

동남아에서는 사이암 왕국(현재 태국)이 독립을 지키면서 기독교를 받아 들였다.

중국에서는 극동의 가장 거대한 제국이었다. 여러 번에 걸쳐 선교사들이 들어갔으나, 혹독한 박해와 고립상태로 말미암아 종적을 감추곤 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로버트 모리슨이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중국어로 번역했으나, 7년 동안의 개종자는 고작 1명에 지나지 않았다. 가장 어려운 난관은 중국 정부가 외국인들의 존재를 반가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중에 아편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남경조약을 통해 홍콩을 양도받고, 5개 항구를 개항하게 했다. 이를 계기로 선교사들이 주재할 권리가 주어졌으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기독교 포교의 와중에 기독교에 심취한 홍수전의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다. 15년간 계속된 이 난리로 2,0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잃었다.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에 도착한 것은 바로 이 태평천구의 난이 벌어지고 있던 때였다. 그는 심혈을 기울여 중국 내지 선교회를 영국에서 조직하고, 이 기관의 이름으로 분열 없이 기독교를 중국에 전파하고자 했다. 그러나 뒤이어 일어난 의화단의 난동으로 수천 명의 선교사와 개종자들이 살해되었다. 서구연방은 의화단 사건을 진압하고 중국을 함락했다. 이로 이해 중화인민 공화국이 설립되었다. 프로테스탄트 선교사가 수만 명에 달했으며, 각 지방마다 번창하는 교회가 있었다. 이 때의 상태가 너무도 낙관적이었으므로 일부 서구인들은 콘스탄틴 대제 시대의 로마제국을 방불케 하는 중국 전체의 개종이 이루어질 것으로 예언하기도 했다.

19세기 중반까지도 일본은 폐쇄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미 해군 제독 페리가 1854년 강제로 일본의 문호를 개방했다. 일본인들은 서구문명의 우월성을 재빨리 간파하고 가능한 한 이를 빨리 습득하고자 했다. 이의 결과로 19세기 말에 일본은 발전된 공업력과 군사력을 보유하고 중국과 러시아까지 패배시킬 수가 있었다. 급속도의 서구화의 물결을 타고 주요도시마다 교회가 세워지고, 일본인들이 교회를 지도하기 시작했다.

페리 제독의 수법을 그대로 흉내 낸 일본은 1876년 한국에게 문호개방을 강요했다. 한국은 어쩔 수없이 일본에게 뿐만 아니라 서구제국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다. 이에 따라 한국에도 1884년 프로테스탄트 선교사가 미국으로부터 들어왔다. 비록 1910년 일본 침략으로 어려움을 겪기는 했지만, 한국교회는 계속 성장했고, 얼마 안 되어 한국은 필리핀 다음으로 가장 많은 기독교 신자를 자랑하게 되었다.

필리핀은 이미 오래전에 스페인에 의해 정복되어 식민지가 되어있었고, 주민의 대부분은 가톨릭 신자였다.

인도네시아는 포르투칼의 식민지였으나, 19세기 초에는 네델란드 수중에 있었다. 19세기 말에는 기독교는 인도네시아에서 숫적으로 굉장히 성장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는 영국의 제임스 쿠크 선장에 의해 영국의 식민지로 편입되었다. 영국인들은 이곳에서 본국과 비슷한 교회들을 설립했다. 태평양의 많은 섬들에도 교회가 세워졌고, 뉴기니의 깊은 내륙 오지에만 아직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지 못하고 있었다.

아프리카와 모슬렘 세계-294: 수세기에 걸쳐 모슬렘 세력은 남부와 남동부를 향한 유럽의 진출을 가로막고 있었다. 19세기 초에 근동 및 아프리카 북해안은 오토만 제국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초기에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은 아프리카 북부 해안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 지역에는 이미 다른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었다. 원래 기독교는 이곳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따라서 서방교회들은 어떻게 하면 이런 오래된 교회들과 관계를 맺는가 하는 것이었다. 로만 가톨릭교회는 모든 동방교회들과 모슬렘들을 개종하여 교황청에 복속시키고자 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반면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는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동방교회들과 협력하고자 했으며, 협력을 통해 활력을 불어넣고자 했다. 보수적인 집단은 옛날 관습으로 돌아갔으며, 진보적인 집단은 프로테스탄트 화했다. 프로테스탄트 진영은 결국 모슬렘들까지도 개종시킬 수 있었다.

19세기 초에 암흑대륙 아프리카에는 유럽인들의 거주 지역이 별로 없었다. 식민지의 확장과정은 상당히 완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아프리카 대륙은 유럽 각국에 의해 식민지화했다. 일반적으로 가톨릭 국가의 식민지에서는 가톨릭이, 영국과 독일의 식민지에서는 프로테스탄트가 우세했다.

프로테스탄트의 가장 중요한 선교사는 데이비드 리빙스턴이었다. 그가 선교사이자 영국정부의 대표로서 탐험보고 기록은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으며, 노예폐지 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1914년에는 내륙의 큰 도시뿐만 아니라 오지의 촌락에도 교회들이 존재했다.

라틴 아메리카-299: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은 모든 국가 내에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성립을 가능하게 했다. 처음에는 이민의 결과로 이러한 현상이 이루어졌다. 유럽인들의 이민 장려는 결국 가톨릭이었던 원주민들 사이에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전파하는 결과를 낳았다.

20세기 초에 프로테스탄트 측은 라틴 아메리카에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교파 분열도 새로운 교회들을 낳기 시작했다. 1914년에는 라틴 아메리카의 모든 국가에 상당수의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존재했으며, 이들 중에는 라틴 아메리카 자체 교파에 속해 있는 숫자도 많았다.

에큐메니칼 운동-302: 19세기 교회의 역사를 살펴볼 때, 이때에 발생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전 세계에 교회가 설립되었고 현지교회가 자체적으로 지도자들을 배출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우주교회, 혹은 보편교회라고 할 수 있겠다. 두 가지 의미로 볼 때, 이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발생을 뜻한다. 첫째로, 에큐메니칼이라는 단어 자체가 '사람이 사는 모든 지역'을 의미한다. 따라서 19세기에 들어서야 기독교는 실질적 의미에서 '에큐메니칼'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둘째로, 만약 '에큐메니칼'이라는 것을 기독교인들의 연합, 혹은 통일과 관련지어 생각한다면, 현대적 기독교 통일운동을 불러온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 선교활동임을 쉽사리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