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연구/기독교 역사 이야기

위대한 설교가- 드와이트 무디

heojohn 2008. 11. 26. 23:11

드와이트 무디(1837-1899)

무디의 생애

무디는 미국 매사세츠주 노스필드의 가난한 소작농의 집에서 9남매 중 여섯째 아들로 태어나서, 5살 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 벱시는 신앙심이 매우 깊은 여인이었습니다. 어려서 무디는 혼자서 무너지는 철책에 깔렸을 때 그의 어머니가 가르쳐준 기도를 믿고, 하나님께 강력하게 살려달라는 기도를 하자 무거운 철책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경험을 합니다. 그것은 무디가 처음으로 기도에 대한 응답의 경험이었습니다.*(1)

가난 때문에 그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초등학교를 입학해서 졸업한 것이 학력의 전부였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말로서 남을 웃기는 재주가 있음을 나타냈습니다. 그는 졸업 후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서 17세에 시골집을 떠나 외삼촌이 있는 보스톤으로 가서 구둣가게 점원으로 일하게 됩니다. 또 마운트 버논 회중교회 청년부에 출석하게 됩니다. 그는 점원으로 일하면서 훗날 대전도자가 되어 사람들을 낚는 어부로서 필요한, 사람들을 상대하는 법을 익히게 됩니다. 그는 목사의 설교시간에는 졸면서 때우기가 일수였지만, 주일학교 킴볼 선생으로부터 지도를 받고 성경공부를 하면서 회심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그의 회심의 체험을 설교시간에 간증하는 경험을 합니다. 무디는 그의 회심의 경험을 편지로 써서 어머니에게 보냅니다. “저는 1837년 2월 5일에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저는 1855년 4월 21일인 오늘 성령 안에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2)

그러나 무디는 사업가가 되려는 꿈의 성취를 위해 시카고로 갑니다. 그는 플리머스 교회에 출석하면서 어린이 선교회를 시작합니다. 그의 타고난 말재주로 어린이를 끌어 모은 어린이 선교회는 그에게 큰 성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무디는 직장 일을 하면서도 어린이 선교회를 더욱 확장하면서 개인적으로도 많은 후원자들을 확보하게 됩니다. 한번은 링컨 대통령이 몸소 무디의 어린이 선교회를 방문하기도 했습니다.*(3)

이후 무디는 설교가로서 본격적인 전도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가 설교 중에 청중들에게 삶과 죽음의 길 가운데서 하나를 택할 것을 요구하면, 청중들은 살길을 택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무디의 전도활동이 한창일 때 터진 남북전쟁 기간에는 북부군의 자원 전도자로 활동합니다. 이것은 무디에게 중요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 전 세계도 전쟁터와 마찬가지 상황이었기 때문에 전쟁터에서 생명을 무릅쓰고 전도활동을 폈던 것은 그만큼 실제적인 훈련이 되었던 것입니다. 전쟁 중 군목으로 일하던 무디는 결혼을 합니다.

마침내 북부군의 승리로 전쟁이 끝나고 시카고로 돌아온 무디는 어린이 선교회를 주일학교체제로 바꿉니다. 이 운동은 곧 전국적으로 크게 확장되었고, 또 YMCA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는 회장이 됩니다. 회장이 된 무디는 유능한 전도자로도, 또 기금 모금에도 두각을 나타냅니다. 무디는 아내의 건강을 위해 같이 영국여행을 하는 중에 죠지 밀러와 찰스 스펄전을 만나 친구가 되었고, 설교에서도 대성공을 거둡니다. 또한 시카고까지 와서 설교를 했던 무어하우스를 만난 것은 나중에 그의 사역에 큰 보탬이 되었습니다.

찬양 사역자 아이라 생키를 만난 것은 앞으로 무디의 대중 전도집회의 방법을 바꾸어놓는 계기가 된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시카고 대집회는 그들의 합작으로 만들어낸 첫 결실이었으며 대성공이었습니다. 무디는 자기의 역량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했던 이런 성공의 뒤에는, 그러나 세 여인의 기도에 힘입은 성령의 역사가 있음을 깨닫고 자기의 오만한 심정을 회개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4)

1871년 시카고 대화재 때에 무디가 그동안 이룩했던 모든 것들이 불에 타버리고 맙니다. 무디는 잠시 실망하고 있다가 다시 전도활동을 하면서 독립교회를 세웠는데, 이것은 지금 무디 기념관이 되었습니다. 한편 생키와 무어하우스와 무디는 무디의 전도단이라고 불리면서 미국과 영국에서 집회 때마다 폭발적인 전도활동을 전개합니다. 1873년의 세 번째 영국 방문 때에는 초청자들이 모두 죽는 불운이 있었음에도, 성령께서 다른 길을 열어 요크에서 집회를 하게 하셨고, 이 집회는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 때문에 웨슬레 이후 대 부흥 운동의 불길이 영국 전역에 번져 마침내 런던 대 집회가 이루어집니다. 이때 스펄젼은 직접 집회장에 찾아와서 “나의 두 친구인 무디와 생키 선생이 이곳 런던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고 있어 이 감격을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쪼록 이 두 사람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증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5)라고 연설해주었습니다

영국에서 3년간의 전도활동을 하고 있는 동안 그들의 활동은 미국 신문에도 보도되어, 그들이 미국에 돌아왔을 때에는 집회요청이 물밀듯이 쇄도하였습니다. 무디는 잠시 고향에 돌아와서 잠시 가족들과 휴식을 취한 뒤에 곧 브루클린과 필라델피아 등지에서 전도 집회를 재개합니다. 그는 이미 런던 집회를 통해 조직 활동의 효과를 알고 있었으므로 미국의 대도시들의 집회에 있어서도 이 조직을 활용하여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런 조직 활동은 뒤에 전도 집회의 모델로 자리 잡았습니다. 무디는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직전까지 복음을 전할 필요가 있는 곳에는 어디라도 가서 전도 집회를 열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한편으로 그는 전도 집회뿐만 아니라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무디 성경학교를 세워 무디 신학교로 발전시켰고, 고향 노스필드에는 남녀 신학교를 각각 세웠습니다. 기타 수많은 선교단체와 전도 서적들을 출간했습니다. 하나님은 무디의 이런 일을 통해 미국이 세계적 선교국이 되는 바탕을 준비하셨습니다.*(6)

무디는 평생 동안 많은 영적 수확을 올렸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말했습니다. “제가 이만큼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전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께서 쉬지 않고 기도해주신 덕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저희 어머니만큼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신 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6)라고. 그리고 그의 생애를 마감하는 순간에 “오, 이 세상은 내게서 점점 멀어지고 하늘 문이 열리는구나.”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사느니라.”*(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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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병학 지음, 신앙위인 전기시리즈 15-[DL 무디] (규장-2005) p.28

*(2). 전게서, p.57

*(3). 전게서, p.73

*(4). 전게서, p.118

*(5). 전게서, p.138

*(6). 전게서, p.171

*(7). 전게서, P.178-179

무디의 신앙-신학적 메시지

무디는 죽을 때까지 영국과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전도 집회를 계속했다. 무디는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 그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무디는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의 관계를 강조하는 단순한 복음의 메시지를 전했다. 무디는 전 천년설과 세대주의를 받아들였다. 정규 신학적 훈련을 받지 않았던 그로서는 철저히 성경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무디의 신앙은 대체적으로 3R로 요약할 수 있다.

(1). Ruined: 인간은 죄로 멸망 받는 존재이다. 무디는 인간의 완전 타락과 부패를 믿었다. 이 세상은 좌초한 배와 같은데, 하나님께서 무디에게 구조선을 주시고 할 수 있는 만큼 많이 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영혼들을 구원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믿었다.

(2). Redeemed: 죄인이 된 인간이지만, ‘예수님의 피로 구원 받을 수 있다’고 무디는 믿었다. 무디는 예수의 죽음에 대해 늘 설교했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죄로 죽을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은 대신 죽으셨다고 믿었다.

(3). Regenerated: ‘인간은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무디는 믿었다. 그는 청중들에게 인위적인 압력이나 다른 부흥사들이 하는 것처럼 교묘하게 속이지 않았다. 그는 성령께서 청중들에게 확신을 주시고 회개에 이르도록 하였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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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김인섭 [선교신학] p.118-119

디의 전도집회의 방법

어느 날 한 사람이 무디에게 물었을 때 무디가 대답하는 일화에서 무디의 전도의 방법을 엿볼 수 있다. “대개 유명한 인사들은 개인 비서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그를 만나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닌데, 무디 당신은 누구라도 언제나 마음만 내키면 만날 수 있고, 거의 무제한의 사람들이 항상 당신 곁에 있으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무디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나는 절대로 유명한 인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나의 가족들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언제나 모든 사람을 향해 마음을 열어두고 있을 뿐입니다.” 무디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여든 내면적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9)  

그의 전도 집회의 방법을 살펴본다. 먼저 그는 사전에 조직 활동을 통해서 철저하게 준비를 했다.

***각 도시의 목회자와 저명한 평신도가 위원회를 구성해서 무디의 전도 집회를 초청하도록 했다.

***재정, 기도, 심방, 홍보, 음악 등과 관련된 준비를 위해 분과위원회를 구성했다.

***헌금위원, 성가대, 그리고 상담위원들이 사전에 훈련되었다.

***위원회는 사전에 대형 체육관을 예약하거나 임시로 사용할 집회장소를 만들었다.

***무디는 필요한 재정을 공개적으로 요청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소요되는 자금은 위원회가 모금하도록 맡겼다. 무디 자신은 매우 검소한 생활을 했다.

그리고 계획이 정해지면 일정한 진행절차를 따르고 있었다.

첫째, 전도 집회를 매우 광범위하게 알렸다. 이점에 대해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집회장소가 비어 있는 것보다는 선전하고 채우는 것이 좋다고 무디는 생각했다.

둘째, ‘구도자들을 위한 방’을 만들어 놓고 구원의 문제를 더 알기 원하는 사람들을 이 방으로 초대해서 상담요원들이 상담하게 했다.

셋째, ‘결신카드’를 만들어 사용했다. 집회 시작 전에 나누어주고 이름, 주소, 교회배경 등을 쓰게 했다. 나중에 거둔 ‘결신카드’는 지역 목회자들이 보고 이들을 심방하고 영적으로 도움을 주는데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또 집회의 결과를 집계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넷째, 음악을 사용했다. 생키가 그와 함께 했다. 생키의 음악적 달란트는 많은 사람들을 집회로 끌어들였다. 무디는 이것을 두고, “생키의 음악을 들으러 사람들이 집회에 몰려오면, 나는 복음의 그물로 그들을 낚는다.”고 말할 정도로 생키의 음악을 은혜롭게 생각했다. 집회광고는 “무디는 복음을 전하고, 생키는 목음을 노래할 것입니다”라고 되어 있었다. 집회 초반에 생키가 30분 정도 찬양으로 청중들을 인도하였고, 그 다음에는 잘 훈련된 성가대가 여러 가지 특송을 했고, 설교 직전에는 생키가 솔로를 하였다. 설교가 끝나면 생키가 초청찬송을 불러서, 사람들을 ‘구도자들을 위한 방’으로 인도했다. 이를 위해 생키는 수많은 복음성가를 작곡했다.

다섯째, 단순한 설교를 했다. 그는 가게 점원들도 쉽게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설교를 했다. 그의 문법수준은 매우 낮아서 짧고 쉬운 단문을 사용했지만, 전하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나타냈다. 무디는 많은 예화들을 사용했는데, 이 예화들이 청중들의 심령을 울렸다. 무디가 설교를 하는 동안 그의 진지함은 청중들에게 잘 전달되었다. 때로는 설교 도중에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무디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그의 설교 중 많은 설교가 성경의 이야기를 다시 하였고, 그 이야기들은 현재의 삶에 적용되는 것이었다. 무디는 깨끗한 유머와 농담을 즐겨 사용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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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오병학 [DL 무디] p.149

*(10). 김인섭 [선교신학] p120-121

[무디의 십계명 해설]과 전도의 전략적 방법

무디는 전도 집회를 도시에서 성공시킨 인물입니다. 그는 복음주의자들에게 도시선교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전도자였습니다. 무디는 신학을 공하지도 않았고, 정규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지만, 그는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했고, 진심으로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평신도를 훈련시켜 조직 활동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개발한 전도자였습니다. 무디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긴 사명을 다하였습니다. 무디가 그렇게 성공적으로 하나님의 쓰임을 받은 요인들을 그의 생활에서 살펴보기로 합니다.

1. 철저하게 성경을 사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신학 공부를 하지 않았으면서도 오직 성경에 의지하여 복음 전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2. 철저하게 하나님께 무릎을 꿇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회심한 이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최대한 이용했습니다.

3. 매우 겸손하고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운영하는 어린이 선교회 및 주일학교 아 이들 같이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4. 구원의 뜨거운 열정으로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영혼 구원을 위한 뜨거운 열정 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전도했습니다.

5. 돈을 사랑하지 않고 사람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매우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돈에 대해 서는 남에게 맡겼습니다. 그는 오직 사람들을 사랑하고 전도에 열중했습니다.

하나님은 무디를 도구로 쓰셔서 수많은 영혼들을 죄에서 건져내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한 무디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의 삶을 철저하게 복종하면서 살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무디는 그의 삶 전부를 가지고 전도의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쓴 [무디의 십계명 해설]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무디는 다니엘서 5장에 나오는 갈대아왕 벨사살의 이야기를 가지고 이 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왕의 연회가 벌어지는 중에 사람의 손이 나타나서 맞은 편 분벽에다가 쓴 알 수 없는 글자를 써놓자, 이를 해석하기 위해 다니엘이 불려오고, 다니엘이 글자를 읽어 왕의 시대가 끝났고,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보였다고 해석합니다. 다니엘의 해석대로 왕은 그날 밤에 죽고 맙니다. 무디는 이 본문에 나오는 저울을 하나님의 심판의 척도로 이용합니다.*(11)

무디는 십계명을 1조부터 10조까지 각 조에 따라 적절한 예화와 관련 성경 본문을 인용하면서, 당시 미국인들뿐만 아니라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양심에 비수를 들이대는 것과 같이 해설합니다. 그러나 무디는 이와 같은 그의 십계명에 대한 해설을 그냥 해설로서 끝내지 않고, 마지막에 “손가락으로 쓴 글자를 도말하심”이라는 장을 붙여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저울에서 부족한 분량을 채울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썩은 곳을 도려내고 수술 부위를 싸매주는 이러한 방법은, 전도를 위한 그의 탁월한 전략의 하나인 것입니다. 다음에서 보는 그의 책 마지막 질문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울에 달리기에 합당한 자가 될 수 없다. 나의 친구여, 당신은 당신 존재 그대로 머물러 있음으로써 부족함이 드러나게 하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부르심에 합당한 준비를 갖추겠는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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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드와이트 무디저: 권달천 옮김 [무디의 십계명 해설] 생명의말씀사 2000, p.13

*(12). 전게서, p.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