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연구/기독교 역사 이야기

현대교회사( 후스토 L. 곤잘레스) 요약 -제1부

heojohn 2008. 11. 25. 23:48

현대교회사( 후스토 L. 곤잘레스) 요약

제1부 정통, 합리주의, 그리고 경건주의

제1장

도그마와 회의의 시대-13

합리주의가 유럽을 휩쓸게 되었다. 모든 인간들이 공유하고 있는 재능인 자유이성이 하나님과 인간의 본성에 관한 근본적 문제들에 관해 답을 줄 수 있는데, 왜 분쟁과 편견만을 낳기 마련인 기독교리의 세밀한 문제 때문에 골치를 썩어야 하느냐는 것이 이 운동의 주장이었다.

도그마가 신앙을, 그리고 정통교리가 사랑을 대체했다. 개혁파, 루터란, 그리고 가토릭들은 모두 신자들이 고수해야할 정통 신조들을 발전시켰으며, 이에 순복하지 않으면 진정한 신자로 인정하지 않는 모습까지도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감리주의자들과 대륙의 경건주의자들은 기존 교회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 않은 채, 보다 열정적이고 개인적인 신앙과 경건성을 배양하는 길을 택했다.

제2장

30년 전쟁-17

16세기 독일 내의 종교전쟁을 종식시켰던 아우그스부르그 종교화의는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종교적 이유로 평화는 양측에서 서로 무력으로 상대방을 이길 자신이 없을 때만 유지될 수 있는 잠정적 휴전에 불과했다.

폭풍의 예고-18: 가톨릭 측인 페르디난드 국왕의 프라하 왕실위원회가 주민들의 반대에 귀를 기울이기를 거부하자 보헤미아의 프로테스탄트들은 반란을 일으켜 왕의 고문 두 명을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흔히 ‘프라하의 폭동’으로 알려진 이 사건이야말로 20세기 이전까지 가장 처참하고 처절한 유럽전쟁이었던 30년 전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전쟁의 진행-20: 보헤미아에서는 가톨릭 신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그곳을 떠나라는 칙령이 반포되었다. 이 포고령으로 시작된 유럽 종교인들의 이동은 유럽전역에서 전쟁으로 번졌다. 잉글랜드, 네덜란드, 덴마크는 프로테스탄트 동맹을 결성하고 독일로 침공하여 가톨릭 황제 페르디난드 2세를 상대로 전쟁을 개시했고, 뒤에 스웨덴이 동맹군으로 참전하고 마침내 프랑스까지 가세하는 30년 전쟁이 되었다.

웨스트팔리아 화약-25: 독일인들은 프로테스탄트 동맹군에 의하여 국토가 짓밟히는 것을 보고 탄식했다. 인간들은 이 전쟁을 통하여 종교적인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얼마나 처참한 고통을 가져오는지를 알게 되었다. 따라서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기독교리에 관한 회의적인 태도는 정교분리라는 세속국가를 발전시키게 했다. 30년 전쟁을 끝내는 웨스트팔리아 화약은 종교자유의 원칙을 나타냈다.

제3장

광야교회-29

프랑스 왕 헨리 4세의 암살은 프로테스탄트의 자유와 생명을 보장했던 낭트 칙령을 위태롭게 했다. 문제는 30년 전쟁 동안 프로테스탄트 동맹군을 비밀리에 지원했던 가톨릭 추기경 리슐리에가 왕의 고문관이 되면서 터졌다. 그는 이른바 폰텐블루 칙령을 반포하여 아트칙령을 취소하고, 프랑스 국내 프로테스탄트인 위그노를 탄압하고 학살하고 강제로 개종하게 했다. 이때 대부분 상인과 전문직 기술자들인 위그노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 독일로 스위스로 영국으로 신대륙으로 망명했으며, 이로 인해 프랑스에 심대한 경제적 타격이 초래되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정책은 태양왕 루이14세가 중앙집권제를 강화하는 정책을 실시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비밀리에 건물이 아닌 야외에서 예배를 보기 시작했다. 이를 광야교회라고 불렀는데, 안토안 코트가 제1회 총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온갖 탄압을 이겨내면서 스위스 로잔에 망명 신학교를 세우고, 목회자들을 길러서 프랑스 내에 개혁파의 뿌리를 내리게 했다.

제4장

청교도 혁명-39

제임스 1세-40: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자식이 없었으나 후계자로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를 지명했다. 그가 영국의 제임스 1세로 취임하면서 두 왕국은 하나로 통일되었다. 이때 청교도라고 불리는 잉글랜드의 칼빈 개혁파들이 교회는 성경만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영국국교-성공회에 대항했다. 이런 불화는 제임스1세의 재위기간 내내 발전되었으나, 흠정역 영어 성경(King James Version)은 이때에 번역되었다.

찰스 1세-47: 찰스는 부친으로부터 의회와의 대결을 그대로 세습했다. 이 당시 청교도주의에 가장 열렬한 반대자였던 윌리엄 로드가 캔터베리 대주교에 올랐다. 대주교는 스코틀랜드에서도 영국 성공회 예배의식을 강요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교회의 총회가 이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전쟁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찰스왕은 스코틀랜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의회를 소집했으나 의회는 오히려 반란군에 동조했다.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이른바 ‘단기의회’사건을 일으켰다.

장기의회(The Long Parliament)-50: 수년 동안의 계속된 불경기를 겪고 나서 찰스 왕은 의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장기의회’로 불리는 새로운 의회는 이전의 의회보다 더 힘든 상대였다. 의회는 청교도주의를 파괴하려 했던 왕의 측근들을 축출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왕과 의회의 대립은 내란을 불러 왔다.

내란-54: 찰스 왕은 아일랜드 가톨릭에 원조를 요청했고, 의회는 스코틀랜드에 원조를 바랐다. 의회는 국왕의 지원세력이던 감독 제도를 폐지하고 장로교적 제도를 실시했다. 의회는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를 소집하고, 유명한 칼빈주의의 토대가 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채택했다. 전쟁에서 이긴 의회는 청교도적인 정책을 실시하고, 장로교적인 정부형태를 주장했으나 군부의 반발에 부딪쳤다. 의회는 자체 숙정을 실시하고 이른바 ‘잔부회의’에서 찰스 왕을 참수했다.

호민관 제도-58: 잔부회의에서 실권을 잡은 크롬웰은 잔부회의의 이름으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평정했다. 그는 스스로 호민관이 되어 왕이 없는 정부를 장악했다. 그는 공화국의 수립을 꿈꾸었으나, 그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왕정복고-60: 호민관 제도가 실패함에 따라 다시 왕정복고가 될 수밖에 없었다. 찰스 왕의 아들 찰스 2세가 왕이 되었다. 왕은 국교 안에 장로교를 용인했으나 나중에는 감독 제도를 부활하고 장로교를 불법화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측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진압되고 말았다. 찰스가 죽고 제임스가 왕이 되었으나 그는 가톨릭을 복원하고자 했다. 또 다시 반란이 일어나서 제임스는 프랑스로 도망가고, 윌리엄과 메리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장악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교가 공식 종교가 되었고 잉글랜드에는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이 시기에 유명한 존 번연과 존 밀튼은 각각 [천로역정]과 [실락원]을 썼다.

제5장

가톨릭 정통

고올주의와 교황 권력에 대한 반대-64: 트렌트 종교회의 당시에는 국가주의가 융성해가고 절대군주 제도가 강화되고 있었다. 따라서 국왕과 국가주의자들은 교황의 권위 아래 중앙집권화된 교회의 개념을 반대하고 있었다. 반대를 주도했던 프랑스의 이름을 따서 이를 고올주의라 한다. 교황의 권위를 주장했던 자들은 교황권 지상주의자라고 불렀다. 특히 교황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예수회가 클레멘트 교황에 의해서 해산되자, 전 세계를 통치영역으로 주장하던 교황권은 크게 약화되었다.

얀센주의(Jansenism)-67: 트렌트 종교회의는 은혜와 예정론에 관한 루터와 칼빈의 일체의 입장들을 정죄했다. 그러나 1640년 얀세니우스의 [어거스틴]이 출판되자 논쟁은 다시 살아났다. 얀세니우스가 발견한 어거스틴의 은혜와 예정에 대한 가르침은 칼빈의 신조들과 너무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얀센주의는 교황 우르반 8세에 의하여 정죄 받았지만, 얀센주의 지도자들이 뒤를 이어 나왔다. 마침내 얀센주의는 정죄당하고 핍박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의 특징과 형태를 상실했기 때문에 사라지고 말았다.

정적주의(Quietism)-72: 가톨릭 내에서는 ‘정적주의’ 운동이 큰 논쟁을 일으켰다. 스페인인 몰리노스는 {영혼의 안내서]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수동성을 주장했다. 기독교의 명상은 순수한 정신적인 것이어야 하므로, 육체와 영혼을 막론하고 일체의 행동주의는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로 들어간 정적주의는 마담 기욘의 극단적인 운동이 있었으나, 캄부레이 대주교 페네론은 정적주의에 동의하고 실천했다. 그는 빅톨 유고의 [레 미제라블]의 밀리엘 신부의 모델이라고 추정되는 인물이다. 트렌트 종교회의는 이런 모든 사건들을 정리하고 가톨릭 정통신앙을 정의했으며, 교황을 교회 권력의 중심에 세웠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세력들 때문에 가톨릭은 약화되었으며, 이 때문에 프랑스 혁명의 도전에 대응하는 것이 더욱 힘들게 되었다.

제6장

루터란 정통주의

필립파와 엄수 루터란-78: 루터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읽은 후 매우 호의적인 평을 했다. 그러나 루터란의 다음 세대는 분열되고 있었다. 멜란히톤이 [신학강요]를 내고 루터를 계승했으나 어떤 이들은 그를 루터의 충실한 후계자가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루터가 이성을 더러운 이성이라고 말하면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와 결별한 뒤에도 멜란히톤은 그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멜란히톤은 루터의 이신득의 교리를 인정하는 동시에 선행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물론 선행이 구원의 방법은 아니지만 그 열매이자 증거로서 중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차이점들은 곧 “필립파”와 “엄수 루터란”이라는 양 진영의 대치상태를 가져왔다.

가톨릭과 타협을 이루고자 시도했던 아우구스부르그 잠정협정이라는 문제가 이런 사태를 표면화시켰다. 이에 대해 플라키우스가 이끄는 엄수파 루터란들은 반대하고 서명을 거부했으나, 멜란히톤이 이끄는 비텐베르그 필립파들은 수정안에 서명했다. 멜란히톤은 이에 대해 복음의 진수는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지켜야 하나, ‘아디아포라’로 불리는 부수적인 요소들은 타협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그러나 플라키우스는 명백하게 자기 신앙을 증거하고 고백하는 자들은 부수적인 것도 포기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 엄수파 루터란들은 구원에 있어서 필립파가 인간의 역할을 너무 중시한다고 비난했다. 처음부터 ‘노예화한 의지’라는 루터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던 멜란히톤은 인간의지에 보다 많은 자유를 허용하는 입장으로 옮아갔으며, 결국에는 성령 말씀 그리고 인간의지의 협동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엄수파 루터란들은 죄의 결과로서의 인간본성의 부패를 강조했으며, 플라키우스는 타락한 인간본성 자체가 부패라고 인정했다.성찬에 주님께서 어떻게 임재하시는가의 문제를 놓고도 대립했으나, 이런 논쟁적인 문제들은 결국 ‘콘코드 신조’를 성립하게 했다.

정통주의의 승리-81: 가톨릭과 여러 형태의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차이점들을 강조하는 한편, 루터란 내에서는 여러 가지 의견의 타협을 모색하는 프로테스탄트 스콜라주의 학파들이 루터란 신학을 주도했다. 루터는 진정한 신학자가 되려고 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루터란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기초로 신학을 했던 예수잇들과 같은 논리학과 형이상학적 신학방법을 사용했다. 프로테스탄트 스콜라주의는 곧 사라졌으나, 성경영감의 교리와 엄격한 고백주의 정신을 뒤에 남겼다. 루터는 구체적으로 성경영감설을 거론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성경의 본분이 아니라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신적 행위였던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경은 독자들을 그에게로 이끌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다. 루터란 스콜라 학자들은 성경이 문자적으로 영감 되었음을 강조했다.

게오르그 칼릭스투스와 “혼합절충주의”-84: 갈릭투스는 신실한 루터란으로서, 비록 루터란 교리가 성경을 가장 잘 해석하고 있지만, 이 때문에 모든 다른 이들을 이단, 혹은 가짜 신자들이라고 규정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는 다른 신앙고백들을 믿고 있는 신자들 사이의 화해를 촉구했다. 그는 멜란히톤과 비슷하게 중추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들을 구별하고 중추적인 것들로서는 ‘처음 5세기 동안의 합의’를 제시했다. 기독교 5세기 동안에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을 나중에 와서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루터에 의해 주자된 이신득의의 교리가 옳은 것이긴 하지만, 이 때문에 가톨릭이 이단으로 정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성찬에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는 방법에 관한 루터란ㄷ과 칼빈주의자들 사이에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선구자의 하나로 꼽힌다. 이러한 칼릭툿의 입장은 혼합절충주의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그의 노력은 아무런 결실도 얻지 못하고 망각되었다. 왜냐하면 각 교파의 정통 신학자들이 교리들의 모든 점에 있어서 자기들과 동의하는 인물들만을 진정한 신자들로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7장

개혁주의 전통

17세기에 개혁주의 전통은 그후 정통으로 받아들여질 신학을 정립했다. 이는 두 개의 종교회의를 통해 이루어졌으니, 곧 도르트 종교회의와 웨스트민스터 총회이다.

알미니우스주의와 도르트 회의-89: 알미니우스는 제네바에서 칼빈의 후계자인 베자에게서도 교육을 받았던 인물이다. 조국 네델란드에 돌아온 그는 칼빈의 예정론을 부인하는 쿠른헤르트 의 이론을 반박해주도록 요청을 받았다. 그는 두 사람의 신학을 비교한 결과 상당한 양심의 갈등 끝에 오히려 쿠른헤르트의 주장이 옳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 반대하는 동료교수 고마루스와 예정론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들은 예정의 근거에 대해서 의견을 달리 했다. 90. 고마루스와 알미니우스 사이의 논쟁의 초점은 과연 예정이 존재하는가의 여부가 아니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양자가 동의했다. 왜냐하면 이에 관한 성경의 언급을 충분히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예정의 근거에 관해 의견을 달리했다. 알미니우스에 의하면, 예정은 과연 누가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할 것인가를 미리 알고 계신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한다고 했다. 반면 고마루스는 신앙 자체가 예정의 결과로서, 세계의 기초가 놓이기 이전부터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가 과연 누가 신앙을 가질 것인가 말 것인가 자체를 결정한 것이라 주장했다.

알미니우스는 이에 대해 예정이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중보자이자 구세주로서 결정한 사실이라고 응답했다. 이러한 결정자체는 어떤 의미에서도 인간의 반응에 의존하지 않는 주권적 명령이다. 그러나 각 개인의 궁극적 운명에 관련된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가 아니라, 그의 신적 예지에 기초한다고 했다. 신적 예지란 물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구속의 기초에 대해 각 개인들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미리 알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알미니우스주의의 가장 중요한 유산은 이 교회에서가 아니라 다른 교파들-특히 감리교-를 통해 계속 남아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95: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야말로 칼빈주의 정통신학을 가장 확실하게 표현한 중요한 문서이다. 제1장은 모든 종교 논쟁의 ‘지존의 심판관’인 성경의 권위를 취급하고 있다. 즉“성경을 해석하는 가장 올바른 규칙은 성경 자체이다”고 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의 깊은 뜻대로 장래의 모든 사건들을 전혀 착오 없이 미리 정하셨다”고 인정하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예정은 장래 행동이나 개인들의 반응에 관한 하나님의 예지에 의거하지 않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은 일체의 선행을 하고자 않으며, 할 수도 없으며, 반대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악들을 추종하게 되었다’고 인정하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원하신 모든 이들을 구원하신다고 표현하여 제한적 구속을 주장했다. 구원의 여부는 하나님의 “효력 있는 부르심”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며, 이러한 택자들은 성령께서 적당한 시간에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들에게 적용하심으로 치유함을 받게 하신다. 그 후에는 비록 이승에서는 완전할 수 없으나 분명히 성화가 뒤따르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은혜의 상태로부터 완전히 혹은 궁극적으로 떨어져 나갈 수가 없으며, 반드시 끝까지 견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된다.”

그 후에는 청교도 혁명 당시 잉글랜드에서 문제가 되었던 여러 가지 사항들을 취급하고 있으며, 그 내용이나 엄격한 정통신학에 충실하고자 했던 점에서 도르트 회의의 성격과 같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제8장

이성주의자들의 선택

18, 19세기에 극성기에 달했던 이성주의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이성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그 특징으로 한다.

데카르트와 그의 이성주의-100: 데카르트주의가 보다 깊은 철학적 신학적 발전을 낳은 분야는 정신과 물체의 관계에 관한 문제였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주제의 문제는 데카르트가 이들 두 개의 존재가 서로 어떻게 관련되는가에 관해 만족할 만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 데 있었다. 이 어려운 질문에 관해 세 가지 해답이 제시되었으니, 곧 기회원인론(Arnold Geulincx, Nicholas Malebranche), 일원론(Baruch de Spinoza), 예정조화론(Gottfried Wilhelm Leibniz) 등이었다.

경험론-105: 존 로크는 모든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경험은 감각을 통한 '외부적 경험'과 우리 자신과 우리 지성의 기능을 알게 해 주는 '내면적 경험'을 둘 다 포함한다. 이는 곧 유일한 진정한 지식은 우리들의 세 가지 차원의 경험에 기초한 것들임을 의미한다. 세 가지 경험의 차원이란 곧 그 존재를 우리들이 계속 경험하고 있는 우리들 자신, 바로 우리들 눈 앞에 펼쳐진 외부의 실재, 그리고 그 존재가 자신과 그 경험에 의해 매순간 증명되는 하나님이다. 이 세가지 차원을 떠나서는 확실한 지식이 있을 수 없다.

록크는 [기독교의 합리성]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그 가운데서 기독교야말로 종교들 가운데에 가장 합리적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의 진수는 하나님의 존재와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다. 마지막으로 분석해 볼 때, 기독교란 결국 인간들이 자연적 능력을 통해서만 알 수 있었던 진리와 법칙들의 보다 명료한 표현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신론-106: 17세기에 영국에서 일어난 수많은 분파들의 끝없는 논쟁과 갈등에 지친 사람들은 편협한 정통성을 초월하는 방향으로 종교를 이해하고자 했다. 이들을 흔히 이신론자라고 부르는데, 무신론자들과 구별하기 위함이었다. 이신론자들은 당시 대부분의 기독교를 점하고 있던 편협한 교리우선주의를 반대하게 되었다.

데이비드 흄과 경험주의 비판-108: 흄에 의한 이러한 경험론적 이성주의에 대한 비판 때문에 이신론은 종식되었다. 만약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가 진정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면, 이신론자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 즉 누군가가 이 세계를 야기시켰다는 이론은 더 이상 성립되지 못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단지 속성들에 관해서만 합리적으로 논할 수 있고, 이것들을 초월한 실체에 관해 논할 수 없다면, '영혼, 그리고 '하나님' 등의 개념들은 별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프랑스의 새로운 사조들-111: 프랑스에서는 새로운 철학이 발전하고 있었으며, 가장 뛰어난 인물은 볼테르였다. 그는 당시에 유행하던 낙관적 이성주의에 대해 깊은 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때 데카르트주의는 마치 소설과 같아서 모든 주장들이 그럴 듯하지만 진리는 하나도 없다고 언급했다. 또한 이신론자들은 인간이성의 한계 이상으로 하나님과 여온에 대해 안다고 주장한다고 야유했다. 그와 동시대인으로서 몽테스큐는 국가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므로 삼권분립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소는 원래의 자연 질서로 돌아가는 것이 진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하나님, 영혼의 불멸, 그리고 도덕적 질서들로 구성된 자연종교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결국 프랑스 혁명의 길을 닦고 있었다.

임마누엘 칸트-113: 그는 그의 저서 [순수이성비판]을 통하여 종교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하나님, 영혼, 영원 등에 관한 것은 우리 눈이 볼 수 없고, 귀가 들을 수가 없으므로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곧 [실천이성비판]을 통해서는 비록 순수이성은 하나님과 영혼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으나 종교의 기초로서 도덕성을 제시했다. 실천이성은 “당신의 행동을 위한 규칙이 우주적 규칙이 될 수 있는 형태로 행동하라”는 근본원칙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실천이성은 하나님의 존재를 도덕적 행동을 위한 조건으로서, 죽은 이후에 선행에 대한 상급과 악행에 대한 형벌의 재판관으로서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제9장

신비주의자들의 행로

끝없이 게속되는 것처럼 보였던 도그마에 관한 논쟁들, 그리고 기독교신자들 사이의 편협성으로 말미암아 많은 이들은 신비주의적 경향으로 치닫게 되었다. 또한 정확한 교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보다 많은 교육을 받을 기회를 가지고 있었던 상류층만 선호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교육기회가 없었으므로 신학의 복잡한 문제들을 의논하고 이해할 능력이 없는 자들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간주되었다. 그리하여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복잡한 도그마의 미로 속을 누군가가 인도해 주어야 할 대상으로 비치게 된 것이다

야곱 뵈메-118: 그는 제화공이었다. 그는 환상을 보면서 이해할 수 없는 책을 썼다. 그의 저서는 나중에 영국에서 ‘뵈메주의자 운동’이라는 신비주의 운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조지 폭스와 퀘이커 교도-121: 당시 영국에서는 수많은 종교적 분파들이 있었으며, 폭스는 이들을 모두 섭렵해보았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마다 ‘내면의 빛’이 있어 이를 통해 성경을 이해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다고 했다. 교회를 위선자들과 삯꾼들로 가득 찼다고 비난했다. 그가 자기의 메시지를 전하자 추종자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종교적 감정으로 마구 떨었는데, 이로 인하여 ‘퀘이커-떠는 자’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폭스는 어떤 설교가가 궁극적 진리는 성경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을 보고, 이를 반박하여 궁극적 진리는 성경에 영감을 준 성령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 일 때문에 감옥에 가기도 했다.

그러나 퀘이커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은 펜실바니아주의 이름을 탄생시킨 윌리암 펜이었다. 그의 부친은 해군제독이었으며, 그에게 최고의 교육 기회를 제공했다. 여러 종교를 거쳐 퀘이커 신자가 된 그는 집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나중에 국왕으로부터 받을 빚 대신에 그는 현재의 펜실바니아주의 땅을 받기로 했다. 그는 다시 이 땅에 대해 인디안들에게 다시 값을 지불했다. 그리고 이 땅에 퀘이커주의자들을 정착시키고 종교의 자유를 가진 도시를 만들었다. 그 중심지는 형제사랑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필라델파아가 되었다. 그의 신성한 실험의 하나였던 종교 자유의 원리는 이제 많은 국가들의 헌법 속에 반영되었다.

임마누엘 스웨덴 보리-128: 세 사람의 신비주의자 가운데 앞의 뵈메와 폭스는 평민이었는데, 스웨덴보리는 귀족가문 태생이었다. 또한 뵈메와 폭스는 어려서부터 종교적 경향을 보였는데, 스웨덴보리는 청녀시절 학문에 몰두했으며, 결국은 이를 통해 종교적 확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는 영계로 옮겨지는 환상을 보았다고 했는데, 이때 영원한 진리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그에 의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속성의 반영이며, 따라서 눈에 보이는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와 상응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었으며, 영계에 들어가 본 사람만이 진정으로 성경을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신비주의 운동은 내세 지향적이고 개인주의적이었기 때문에 퀘이커들을 제외하고는 전체 교회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제10장

경건주의 운동

경건주의라 하면 스페너와 프란케가 이끌었던 독일에서의 움직임을 의미하지만 여기에서는 진젠돌프와 웨슬리도 포함시켜보자

독일의 경건주의-132: 스페너를 경건주의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합당하다. 그는 ‘경건의 모임들’을 만들고, [피아 데시데리아]라는 경건주의 교과서를 만들었다. 이 책에서 그는 루터의 만인제사장 설을 통하여 평신도와 성직자 간의 차이점들을 강조하지 말고, 오히려 모든 기독교 신자들의 공동책임에 중점을 두도록 제안했다. 그리하여 그는 새로운 종교개혁-16세기에 시작되었다가 교리적 논쟁들에 의해 중단된-을 완성할 것을 제안했다. 전통적인 설교가들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단지 정확한 교리와 일반적 사회규범에 맞는 도덕적 생활만을 요구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건주의자들은 사회가 시민들에게 요구하는 것과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일한 주장은 안정을 누리고 있던 교회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도전이었다.

스페너의 가장 뛰어난 추종자는 프란케였다. 그는 기독교인의 생활이 가져야할 기쁨을 강조했다. 이런 기쁨이야말로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라고 했다. 스페너와 프란케는 루터란 출신이었으나 경건주의 운동은 독일 개혁파 사이에 많은 추종자를 낳았다. 경거주의가 기독교 역사에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젠돌프와 모라비안-137: 열렬한 경건주의자 진젠돌프는 어렸을 때부터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박해를 피해 고향 모라비아를 떠난 후스파 모라비안들을 만났는데, 이들에게 사유지를 제공하고 정착지를 주었다. 이들의 경건한 생활 공동체인 헤른후트를 보고 깊은 감명을 느낀 그는 궁정에서의 직위를 사임하고 이들과 합류했다. 그는 루터란 선교사에 의해 개종한 일단의 에스키모인들을 만나보고 선교에 열정을 불태운다. 이들의 열정은 19세기의 선교 열정에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존 웨슬리와 감리교에게 미친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죤 웨슬리와 감리파-139: 존 웨슬리는 1735년 인디안 사역을 위해 미국으로 가던 배에서 폭풍을 만났다. 그는 난파의 위기 앞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고 찬송가를 부르던 경건주의 모라비안들의 깊은 신앙심을 보고 자신의 신앙에 회의를 경험한다. 목사인 아버지와 목사의 딸인 어머니의 양육을 받고 자란 그는 화재 속에서 기적적으로 구출되었던 그의 경험과 정결한 신앙생활을 했던 탓에 항상 자신을 모법적인 기독교인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난파의 위기 앞에서 자기의 목숨에 연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조지아에서 사역을 하다가 중도에 좌절하고 그만둔 그는 영국으로 귀국했다. 그는 어떤 모임에서 로마서 주석을 낭독하는 것을 들었을 때 구원을 경험한다. 신앙의 확신을 얻은 그는 다시 모라비안들과 연락해서 그들의 공동체가 있는 헤른후트를 방문했다.

한편 그의 동료였던 조지 휘필드는 유명한 설고가가 되어 있었다. 그는 혼자 사역을 감당할 수 없어 웨슬리를 초청했다. 비록 웨슬리가 휘필드의 초청을 수락하기는 했지만 휘필드의 감정적 방법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옥외에서 설교하는 것을 반대했다. 웨슬리와 휘필드는 한동안 함께 사역했다. 그러나 그들은 신학적 차이 때문에 갈라서게 되었다. 휘필드는 칼빈주의 감리교회를 조직했다.

웨슬리는 새로운 교파를 만들 생각이 없었으나 그의 추종자들은 협회를 조직하였다. 그런데 이 협회가 너무도 급성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 가운데 난관이 뒤따랐다. 웨슬리가 속해 있고 남아 있기를 원했던 앵글리칸교회와의 갈등이 벌어졌고, 추종자들은 갈라서기를 원했다. 미합중국의 독립은 이러한 갈등을 더욱 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앵글리칸 사제들이 영국으로 귀환하는 바람에 미합중국 교회에서는 성찬을 받을 수가 없었는데, 웨슬리가 그에게 소속된 성직자들을 파견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는 합중국 주민들의 영국 정부에 대한 반란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1784년 이 신생국가를 위해 두 사람의 평신도 설교가들을 장로로서 안수하고 앵글리칸 사제였던 토마스 코크(Thomas Coke)를 '감독'(superintendent)에 임명하였다. 그는 물론 이 단어가 헬라어로 '감독', 혹은 '주교'를 의미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 후에 그는 다시 스코틀랜드 및 다른 지방에서 사역할 자들을 성직에 임명했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러한 조처들을 행한 후에도 계속 영국국교와 결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동생 찰스는 신세계를 위한 교역자들의 성직 임명 자체가 이미 영국 국교와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밝혀 주었다.  감리주의가 성공했던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당시의 산업혁명 때문에 야기되었던 새로운 필요에 적절하게 대응했기 때문이었다.

18세기 후반 영국은 산업화라는 과정을 겪고 있었다. 이에 따라 수많은 인구가 공업중심지로 이동해 갔다. 여러 가지 경제사정으로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이들은 당시의 교구체제로서는 도시인구의 필요성을 충족시키지 못했던 교회로부터 이탈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러한 대중들 가운데 감리주의는 그 수요를 충족시켜 주면서 추종자들을 만들어 갔던 것이다. 그런데 북아메리카에서는 완전히 다른 과정을 보여 주고 있었다. 정착민들은 이들에게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없었으므로, 수많은 인구가 전통적인 교회와의 관계를 상실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개척민들 가운데서 감리교가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북아메리카감리교는 영국의 감리교가 일찍이 공식적으로 독립교회가 되었다.

177년 웨슬리는 평신도설교자 프란시스 애즈베리(Francis Asbury)를 식민지에 파견했다. 감리교가 계속 서쪽으로 이동하는 국경과 보조를 맞추도록 조처한 것은 애즈베리였다. 13개식민주가 독립을 선언했을 때, 웨슬리는 이들의 반란에 반대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국 내 감리교 설교가들은 독립운동을 지지했으며, 최소한 중도적 입장을 취했다. 그 결과 미합중국내의 감리교신자들은 계속 웨슬리를 존경하면서도 더 이상 그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미합중국내의 감리파가 결국 감리주의 감독교회를 조직한 것도 웨슬리의 뜻을 어기는 줄 알면서도 앵글리칸 성직자들이 부족했던 현지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감독'이라는 명칭 자체가 웨슬리의 뜻과는 정면으로 상치되는 것이었다. 웨슬리는 자신과 코크를 가리켜 감독이라는 의미를 지니기는 하지만, 보다 평범한 용어인 'superintendent'라고 칭했다. 그는 코크와 애즈베리가 자기를 가리켜 '감독'(bishop)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듣고는 크게 분노를 터뜨렸다. 이때부터 아메리카 감리교는 영국의 감리교와는 달리 감독을 가지게 되었다.

제11장

13개의 식민주

하나님께서는 결코 문명국가에서 종교가 강제로 성행되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강제로 성립된 획일성은 조만간 내란을 일으키고 양심을 짓밟으며, 그리스도와 그의 종들을 박해하고, 수백만 영혼들의 위선과 파괴를 불러오게 된다.(로저 윌리엄스)

16세기에스페인과 포르투칼이 거대한 식민지 건설에 착수하여 대제국을 이루었다. 그러나 대영제국의 식민지 확장정책은 17세기에 시작되어 19세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이들의 해외 영토에는 후에 미합중국으로 독립하는 북아메리카의 13개주가 있었다.

버지니아-153: 영국 국교 내에서 청교도들이 영향력이 한창 극성이었을 때에, 버지니아 식민지가 창설되었으므로 많은 주주들과 정착민들은 이곳 식민지를 청교도적 원칙에 의해서 통치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처럼 거룩한 식민지 건설의 꿈은 정치적 현실 앞에서 무산되었다. 국왕 제임스는 청교도주의를 혐오했으므로 1622년 발생한 인디언들과의 전쟁을 구실로 1624년에는 이곳 식민지를 자기의 직접 통치 아래 두었다. 이때 본국에서는 청교도들의 영향력이 감소되고 있었다.

후에 찰스 1세도 버지니아 일대의 청교도들을 배격했던 제임스정책을 답습하여 버지니아 중 거대한 지역을 빼앗아 매릴랜드 식민지를 건설하고, 이를 가톨릭 신자에게 양도해 주었다. 이곳 식민지들에서 담배가 경작되고 수출됨으로써 상당한 수입을 올리게 되었다. 그런데 담배경작에는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으므로 1619년부터 이곳 식민지에서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정착민들이 대부분은 계속 영국국교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이는 더 이상 과거의 청교도적 앵글리칸주의가 아니라, 보다 귀족적인 앵글리칸주의로서 대농장 소유주들에게는 적당한 것이었지만, 노예들이나 대부분 빈곤층들과는 서로 잘 맞지 않는 것이었다. 영국국교는 노예들의 개종에 별로 관심을 쏟지 않았다. 그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원래 초대교회로부터의 전통이 기독교인들은 같은 신자들을 노예로 삼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어떤 이들은 아직도 이러한 원칙이 유효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노예소유주들은 차라리 노예들이 세례 받지 않기를 원했다.

1667년에는 세례 때문에 노예의 신분이 변화하지는 않는다는 법률이 통과되었다. 이는 곧 기성종교가 기득권층의 이해관계에 따라 얼마나 기꺼이 타협하는가를 보여주는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법률이 통과된 후에도 노예들이 개종을 위한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많은 소유주들이 노예들을 무지 속에 버려두는 것만이 이들의 복종을 보장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버지니아 남부에도 다른 식민지들이 건설되었다. 캐롤라이나주에서 발전한 사회는 상류층은 영국 국교에 속했으며 하류층의 대부분은 퀘이커 혹은 침례파가 되었다.

조지아주는 두 가지 목적으로 설립되었는데, 남아메리카를 정복한 스페인의 북진을 저지하는 것과 감옥으로 보냈던 채무불이행자들에게 기회를 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앵글리칸 교회가 공식 종교였지만 식민지에서는 별 세력을 얻지 못했다. 웨슬리 형제와 휘필드가 가장 중요한 종교적 운동을 이끌었으며, 후에 감리교와 침례교 등이 이들이 뿌린 씨앗의 열매를 거두었다.

북부의 청교도 식민주-157: 청교도주의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곳은 북쪽 지방이었다. 잉글랜드를 떠나 네델란드로 갔던 일단의 반체제적 청교도 인사들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신세계로 떠났다. 이들은 잉글랜드 국왕 아래 있으나 ‘메이플라워 협정’을 통해 자치권을 주장했다. 그들은 일단 케이프 코드에 상륙했다가 플리머스에 정착했다. 이들이 정착한 이후 1,000명 이상의 영국 청교도들이 로드 대주교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해서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했다. 그의 박해 기간 중에 10,000명 이상의 청교도들이 뉴잉글랜드로 도주하여 코네티컷과 뉴 헤이븐을 건설했다. 이처럼 날로 강성해 가던 청교도주의의 중심지들을 파괴해 버릴 계획을 하던 찰스1세는 내란에 말려들어 왕위와 목숨을 빼앗기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 자체와 청교도들의 승리는 이주의 물결을 멈추게 했다. 왜냐하면 이제 미지의 대륙이 아니라 잉글랜드 자체 내에 청교도들이 꿈꾸는 거룩한 왕국을 건설할 수 있다는 소망이 보였기 때문이다. 신세계의 정착민들은 중립을 지켰으며 자기들의 영토를 넓히고 사회조직을 강화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스튜어트의 왕조복고가 잉글랜드의 퓨리턴주의에 극심한 박해를 가져왔지만 이곳 정착민들에게까지 미치지는 않았다.

곧 왕실의 결정으로 종교의 자유가 반포되었다. 그런데 청교도 식민지들에서 신학적 논쟁들이 일어났다.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회심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관련하여, 유아세례를 두고 벌어진 논쟁이었다. 옛 이스라엘이 유아들에게 할례를 베풀었듯이 언약의 자녀들에게 유아세례를 베풀어야한다는 주장과 회심을 경험한 뒤에 세례를 받은 자들만이 진정한 교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결국은 반 길 성약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낳았다.

한편으로는 인디안들에 대한 선교도 시작되었다. 1641년 모히칸족 사이에서 전도했던 존 엘리옷의 사역이었다. 그는 인디언들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사라진 10지파라고 확신했으므로, 이들을 개종시키기만 하면 성경의 예언들이 성취될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개종자들을 모세의 율법에 따라 통치했던 촌락들 안에 수용했다. 그러나 인디안들을 적으로 간주했던 백인들에게 수많은 인디안들이 살해당하고, 노예로 팔렸다.

로드 아일랜드와 침례파-163: 청교도들이 통치했던 식민들에서 시행된 종교획일주의 때문에 이곳을 떠나는 인사들이 나타나고 있었다.로저 윌리암스는 보스턴에서 목회자로 사역하기를 거부하고, 인디안들에게서 토지를 구입하여 프로비던스 식민주를 건설했다. 그에 의하여 프로비던스에 세워진 교회는 침례교가 되었다. 대부분의 침례교도들은 재세례파가 아니라 자기들 나름대로의 신약연구를 통해 교리를 추출한 것이었다. 네델란드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일단의 침례교도들이 알미니우스주의의 영향을 받고, 영국으로 이 사상을 가지고 돌아갔다. 영국에 남아 있던 이들은 청교도 운동의 기반이었다고 할 수 있는 엄격한 칼빈주의를 계속 신봉하고 있었다. 이렇게 나누어진 두 파는 일반 침례주의자들과 특정 침례주의자들이 되었다. 전자는 알미니우스주의자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오직 구원받기로 택함을 입은 자들만을 위해서 죽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대각성 운동을 거치면서 칼빈주의를 따르는 특정 침례파들이 주류를 차지하게 된다.

메릴랜드의 가톨릭-166: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가톨릭 중심지는 메릴랜드였다. 식민주는 가톨릭 지주들에 의하여 운용되었으나 주민의 대부분은 프로테스탄트였다. 퀘이커들이 건설한 펜실바니아주에서도 읠리암 펜이 주장한 종교자유의 원칙에 따라 상당한 숫자의 가톨릭들이 거주했다.

대서양 연안의 식민주들-167: 대영제국은 북아메리카 일대에 일련의 식민주를 건설했다. 이 식민주들은 로드 아닐랜드와 펜실바니아의 모법을 쫓아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다. 이러한 정책은 몇 번이나 유럽을 황폐화하는 전쟁으로 몰아넣었던 종교적 편견보다는 바람직한 모습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노예제도의 도입, 증가하는 사회적 불평등, 인디어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토지를 빼앗는 만행들이 나타나면서 최초의 정착민들을 고무했던 종교적 열정과 성한 왕국 건설의 소망은 점차 희미해져가고 있었다.대각성169: 독일이나 영국과 마찬가지로 북아메리카에도 경건주의 물결이 밀어닥쳤다. 철저한 칼빈주의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개인적인 회심의 필요성을 확신하고 있던 인물로서 이러한 물결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 자신은 회중파 목사였으나, 그는 앵글리칸이었던 휘필드를 자기 교회에서 설교하도록 초청했고, 휘필드가 설교하는 동안 에드워즈는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이는 당시 부흥에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신파에 속한 장로교 목사들과 이에 동조하는 인사들도 합류했다. 침례교에서는 처음에 이 운동을 저급하다고 간주하여 반대했다. 그러나 대각성 운동의 목적은 신자들 각 개인을 깊은 영적 경건과 철저한 성경연구로 이끌고자 함에 치중했다. 따라서 이 운동은 많은 이들에게 침례교에 유리한 결론에 도달하도록 만들었다. 회심의 경험이 기독교인의 생활에서 그토록 중요한 것이라면 이는 유아세례를 의심하도록 이끌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대각성 운동이 강조한 개인적 경험의 중요성을 받아들인 많은 회중파와 장로교인들은, 유아세례를 부인하고 침례교신자들이 되었다. 한 교회의 전체 회중들이 이 길을 택한 경우들도 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대각성 운동은 또한 심대한 정치적 영향을 남기게 되었다. 대각성 운동이야말로 후에 미합중국을 결성하게 된 13개 식민주 전체를 포용한 최초의 움직임이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서로 다른 식민주들 가운데 일체감이 발생하게 되었다. 동시에 인권과 정부의 성격에 관한 새로운 사상들이 유포되었다. 바로 이러한 사상들이 식민주들 간에 날로 성장해 가던 일체감과 어울려 거대한 역사적 사건들을 낳게 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