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연구/기독교 역사 이야기

현대교회사(곤잘레스)-제3부

heojohn 2008. 11. 25. 23:56

현대교회사(곤잘레스)-제3부

 

제3부 20세기

제18장

격변의 시대-309

19세기에 걸쳐 서구문명은 세계를 행복과 번영의 시대로 이끌어갈 것이라는 확신에 불타고 있었다. 중국의 의화단 사건 같은 반작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활동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가까운 장래에 세계의 모든 인구가 기독교 신자가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일찍이 세계가 경험하지 못한 참혹한 전쟁을 유발시킬 흐름들이 이러한 표면 아래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러시아의 혼란은 혁명을 불러왔다. 그리하여 스스로를 ‘제 3의 로마'라고 자칭하고 있었던 러시아교회는 마치 터어키의 침략 앞에 놓여 있던 비잔틴교회의 상황과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대내외적으로 경제정책과 전쟁에서 실패한 니콜라스 황제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정책을 지향하는 온건 정부에 정권을 넘겼으나,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과격한 레닌과 볼셰비키 일당들에 의해 전복되었다. 공산당 혁명이 성공하자 그들은 교회재산을 국유화했다. 그러나 곧 국제여론과 교회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반혁명주의자들이 대항하는 내란에 빠져들게 되었다. 결국 적군이 승리하게 되었을 때, 소비에트정부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교회야말로 자기들의 숙적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미국은 뒤늦게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나 이 전쟁의 결과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미국은 외부세계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국제연맹에도 참가를 거부했다. 내부적으로 번영을 누렸으나 대공황이 닥치자 루즈벨트가 뉴딜정책을 실행해서 불황을 극복했다. 멕시코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교회재산이 압류되었다. 가톨릭교회와 혁명파 사이에 갈등이 수십 년 동안 계속되었다.

유럽에서는 많은 이들이 국제연맹을 통해 제1차 세계대전과 같은 비극적 사건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랐으나, 파시즘의 출현으로 이러한 소망은 무산되었다. 처음 무솔리니의 지도 아래 이탈리아에서 강화되었던 파시즘은 전쟁을 신성화하여 상처 입은 국가적 자존심을 이용했으며, 국가전체를 전체주의적 병기로 변화시켰다. 이들의 사회문제에 관한 정책은 혼란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처음에는 과격한 혁명분자들과 합세했으나, 곧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를 이용하여 산업자본가들과 연합하고, 권력과 경제력을 독점한 새로운 귀족층을 창출했다. 어쨌든 민족주의를 강조함으로써 국가적 자존심을 자극하고, 민주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를 증오하면서 일부 자본가들을 위한 독재국가를 형성하는 것이 파시즘의 전체적 양상이었다. 무솔리니의 표현대로 이들은 '아이를 낳는 것이 여성의 임무라면, 전쟁이야말로 남자들의 의무'라고 부르짖었다.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한 나치당은 아탈리아의 파시즘을 압도했다. 나치당의 영향으로 반유대주의가 국제 파시즘의 도그마가 되었다. 스페인에서는 프랑코가 내란에서 승리했다. 기독교에 대한 파시스트들의 태도는 여러 가지였다. 스페인의 경우 프랑코는 가톨릭교회의 충실한 아들이라고 선언했다. 무솔리니의 태도는 상황에 따라 항상 변했다. 히틀러는 인류에 대한 사랑 및 다른 뺨까지 돌려대는 기독교의 윤리의 교훈이, 정복과 권력을 부르짖는 그의 궁극적 목적에 상치된다고 생각했으나,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교회를 이용하고자 했다.

파시즘의 매력 중 하나는 그 옛날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것이었다. 무솔리니는 로마제국의 재건을 약속했다. 그리스의 파시스트들은 스파르타식 군국주의와 비잔틴제국의 영광을 약속했다. 스페인의 팔랑헤당(Falagistas)은 스페인제국의 '황금시대'를 중흥시키겠다고 했다. 물론 이러한 여러 가지 약속과 소망들은 상호 모순적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배경에 자리 잡은 전쟁의 신격화, 언론의 자유에 대한 혐오, 전체주의적 민족주의, 그리고 일체의 평등주의에 대한 반대 등을 기반으로 파시스트의 운동들은 한데 뭉쳐 일체의 민주주의, 자유주의, 혹은 평화주의에 대적했다.

1939년 6월 유럽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연합 추축국과 대항하여 다시 한 번 전화에 휩싸이게 되었다. 일본이 이에 가세하면서 세계대전으로 비화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변화 속에서 미합중국뿐만 아니라 유럽의 전통적 국가들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한편, 서구세계에서 최근까지만 해도 2등 시민으로 만족하고 있던 계층 - 특히 여성들과 흑인들 - 이 갑자가 정책결정과정에 참여하고자 했다. 이는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3차 세계대전의 예측과 관련되어 있다. 즉 기성 지도자층이 세계를 이런 참화 속에 몰아넣었다면서, 이제 또 다른 계층이 지도적 기능을 담당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합중국의 흑인들과 여성들은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종전 후 이들은 다시 원래의 피압박 상태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민권운동과 여권신장운동은 흑인들과 여성들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그때까지 세계를 지도해왔던 백인남성들에 대한 비판세력으로서도 존재했다.

이 모든 상황 속에서 교회가 존재했다. 그 어떤 국제기구나 회사나 정치적 운동보다도 교회는 국경과 계층과 정치적 이념을 초월하고 있다. 실제로 19세기가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이야말로 역사상 최초로 진정한 우주교회가 태어났다는 사실이었다. 비록 20세기의 몇몇 학자들은 전 세대의 선교사들을 비현실적인 몽상가들로 간주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바로 이 선교사들이 모든 인종과 민족을 초월하는 거대한 기독교의 연락망을 구축해 놓았다.

이러한 국제적 규모의 교회에게 있어서 20세기의 과제들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전쟁과 인종과 계층 간의 분쟁이 이전의 신학적 차이점들과는 별 상관이 없는 모습으로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교회는 박해를 받기도 했으며, 또 다른 목적을 가진 이들에게 이용당하기도 했다. 20세기의 혼란 속에서 신자들은 분열되고 방황하고 겁을 집어먹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과 박해와 혼란 속에서도 이들은 영원한 평화와 정의의 통치를 이루실 그 분을 증거했다.

제19장

동방 기독교

20세기 기독교인 모두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어떻게 '콘스탄틴 이후시대'를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른 다시 말해 교회가 어떻게 콘스탄틴 이래 당연히 누려온 정치적 지원 없이 생존해야 할까 하는 의미이다. 프랑스 혁명 때부터 서방기독교는 항상 기독교에 적대적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세속국가들의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

비잔틴 기독교-320: 교회가 비잔틴제국으로부터 전통적으로 받았던 지원들은 축복만은 아니었다. 이러한 제국과의 관계를 통해 희랍교회는 방대한 특권을 누렸으나, 동시에 그 자유는 제한받아야 했다. 서방의 경우 교황들이 국왕들보다도 더 강력했던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반해, 동방에서는 황제들이 교회를 통치했으며, 황제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총대주교들은 그 직위을 박탈당하거나 대체되곤 했다. 그리하여 황제가 자기 조직을 구원하기 위해 로마와 재결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결정했을 때, 비잔틴교회 내의 다수가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재결합이 이루어졌다. 1년 후인 1453년 콘스탄티노플은 터어키인들에게 함락 당했다. 수많은 비잔틴기독교신자들은 이 사건이 동방교회를 이단적인 로마와 강제로 연합시켰던 황제의 폭거로부터 교회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해석했다.

콘스탄티노플 시에 있는 교회들 가운데 반수가량은 모스크로 전환되었으나, 나머지 교회에서는 국가의 완전한 보장 아래 기독교의 예배를 계속할 수 있었다. 1516년 오토만제국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정복하게 되자, 그곳에 있는 기독교신자들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관할 아래 두었다. 1년 후 이집트가 터어키에게 함락되었을 때에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로 하여금 그곳의 신자들을 다스리게 했다. 이를 통해 총대주교들은 터어키제국 내에서 또 다른 별개의 기독교 국가를 통치하는 것처럼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술탄의 정책에 반대하는 총대주교들은 가차 없이 그 직위가 박탈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수세기에 걸쳐 헬라어 사용권 교회들의 신학활동은 서방의 영향 아래 있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기간 중 서방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신학적 문제들은 헬라어 사용권 교회에서도 논의되었으며, 1629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키릴 루카리스(Cyril Lucaris)가 펴낸 [신앙고백](Confession of Faith)은 짙은 프로테스탄트 색채를 띠고 있었다. 비록 루카리스는 직위를 박탈당하고 살해당했으나, 그의 이름은 계속 많은 이들에게서 존경받았다. 어떤 이들은 그의 신앙고백은 영감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결국 1672년의 종교회의는 그를 "칼빈주의적 이단자'라고 정죄했다.

오토만 터키 제국이 몰락하자, 그리스뿐만 아니라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고 루마니아 등에서 국가별로 정교회가 생겨났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유럽 다른 지역 국가 정교회의 독립을 승인했다. 이들 국가는 주로 소비에트 종교정책의 영향을 받았다.

러시아 교회-323: 러시아의 많은 신자들은 1453년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이단적인 로마와의 재결합에 동의한데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해석했다. 이러한 결론은 결국 콘스탄티노플이 '제2의 로마'로서 로마를 대체했듯이 이제 모스크바가 '제3의 로마'라고 주장하는데 까지 발전해 갔다. '제3의 로마'야말로 정통신앙을 수호할 하나님으로부터의 임무를 부여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1547년 러시아의 이반IV세는 "짜르", 즉 황제라는 칭호를 자칭했다. 이는 곧 그가 그 옛날 로마나 콘스탄티노플 황제들의 후계자임을 선언하는 행위였다. 마찬가지로 1598년 모스크바의 대주교(metropolitan)는 총대주교의 칭호를 차지했다.

피터 대제(Peter the Great, 1689-1725)는 또 따른 정책을 수행했다. 그는 그리스 정교 신자들과의 화해보다는 서구의 영향을 받아들이는데 더욱 적극적이었다. 이에 따라 교회 역시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신학에 큰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어느 쪽을 선호했든, 이들은 자기의 본래의 정교회신앙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주로 카톨릭, 혹은 프로테스탄트의 방법론 등을 도입하여 정교회 본래의 신학을 발전시킬 길을 찾았다. 논쟁의 대상이 되는 문제에 있어서도, 일부는 카톨릭적으로, 일부는 프로테스탄트적으로 기울어져 공존했다.

그러나 19세기말 민족주의적 반동이 강하게 일어나, 러시아 고유의 전통을 강조하기 시작했으니, 이것이 곧 친슬라브주의(Slvaophile)운동이다. 이 운동을 이끈 중심인물은 평신도출신의 신학자 알렉시스 코미야코프로서, 그는 헤겔의 변증법을 도입하여 정교회가 주장했던 보편성이야말로 가톨릭이 주장하는 교회의 통일과 프로테스탄트측의 주장하는 복음의 자유를 포용하는 완전한 신테제(Synthesis)임을 증명하고자 했다. 러시아 혁명은 이 모든 논쟁을 종식시켰고, 학교에서의 종교교육은 불법화되었다.

다른 동방 교회들-325: 세계전역에는 정교회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일본, 중국, 한국의 정교회는 러시아 교회가 남긴 유산이다. 동방정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한 지역 내에서는 하나의 교회만을 인정했지만, 이민을 떠나 정착한 신자들은 출신지역이 다르므로 이른바, 정교회 디아스포라가 생겨나게 되었다.

5세기에 있었던 기록논쟁 시기부터 동방 정교회 내에서도 종교회의의 결정에 대해 일치할 수 없는 입장들을 유지했다. 이전 페르시아 제국 영토내의 대부분 신자들은 마리아를 가리켜 '하나님의 어머니'라 부르기를 거부했으므로 네스토리우스파라 불리기도 했다. '앗시리안'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알려진 이러한 신자들의 역사는 상당히 복잡하다. 중세의 한 동안은 이 교회에 속한 신자들이 상당히 많았으며, 중국에까지 선교의 손을 뻗치기도 했지만, 근래에는 특히 모슬렘 신도들로부터 심각한 박해를 받았다. 20세기 초에는 핍박 때문에 신자들의 수가 격감했다. 많은 생존자들은 서구로 이주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사이프러스로 일단 이주했다가 결국은 시카고에 정착했다. 현재 10만 명에 달하는 이들 기독교신자들은 이란, 이라크, 그리고 미합중국에 흩어져 살고 있다.

칼케돈종교회의의 '신앙의 정의'가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분리하는 것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에 그 결정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던 신자들은 흔히 '단성론자'(Monophysites)라 불린다. 그러나 이러한 명칭이 이들의 기독론적 입장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 교회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이집트의 콥트교회와 여기서 파생된 이디오피아 교회이다. 후자는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경우라 할 수 있다.

또한 "야곱파"(Jacobite)라 알려진 고대의 시리아 단성론파 교회는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 야곱파의 수장인 안디옥 총대주교는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에 자리잡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이 총대주교의 관할 아래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독립을 유지하고 있는 인디아의 시리아파 교회는 사도 로마에 의해 설립되었음을 자칭하고 있으며, 토착화된 형태에서 약 50만명의 신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미 지적한 바처럼 아르메니아교회는 칼케돈 신경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가장 큰 이유는 페르시아인들이 아르메니아를 침략했을 때 로마제국이 아무런 원조도 하지 않았던 데에 있다. 이들의 영토는 터어키인들에 의해 정복되었는데, 이들은 계속하여 전통적 신앙을 고수했기 때문에 터어키인 정복자들과 계속 갈등상태에 있었다. 오토만 제국의 세력이 약화됨에 따라 이러한 갈등은 폭력사태로 나타났다. 터어키의 지배 아래 있던 아르메니아인 수천명이 학살당했다. 약100만 명이 이를 피해 이주했는데, 그 결과 시리아, 레바논, 이집트, 이란, 이라크, 그리스, 프랑스 그리고 서유럽 일대에는 상당수의 아르메니아 기독교신자들이 거주하고 있다. 현재 소련의 영토 일부가 된 아르메니아지방에서는 정교회가 영토내의 다른 교회들과 비슷한 상태로 계속 존속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교회들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두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는 이들 교회들이 눈부신 속도로 콘스탄틴 이후 시대에 돌입했기 때문에, 이제 서로 비슷한 변화를 겪어야만 했던 다른 기독교신자들에게 상당한 통찰력과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서방 기독교신자들이 동방교회로 하여금 가장 혹심한 상황 속에서도 계속 생존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들었던 예배의식의 힘을 과소평가했었다는 깨달음이라 할 수 있겠다.

제20장

로만 가톨릭교

가톨릭교회는 현대의 각종 사상과 운동들을 공포와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경계하고 있었다. 이러한 반동을 가져온 이유들 가운데는 새로운 이탈리아 공화국에게 교황령을 빼앗겼다는 것, 새로운 세속국가들이 가톨릭교회의 사역을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현대사상에 의해 신자들이 무신론적으로 물들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20세기 초반 이들 비판세력들은 계속 교회에 의해 무시되고 억압당했다. 따라서 20세기의 가톨릭교회 역사야말로, 트렌트회의와 제1차 바티칸공의회의 결정을 계속 고수하는 세력과 현대세계의 도전에 대응하여 교회를 개방시키고자 하는 세력들 사이의 갈등의 역사라 할 수 있겠다.

베네딕트 15세로부터 피우스 12세까지-330: 베네딕트15세 교황은 전임자들보다는 상당히 개방적이었으나 별로 유능한 교황은 못되었다. 그의 뒤를 이은 피우스11세는 학자인 동시에 유능한 행정가였다. 그의 재임기간 동안에 가톨릭 선교사의 숫자가 두 배로 증가했으며, 최초의 중국인 주교들을 임명한 것도 그였다. 그는 공산주의의 위험, 특히 무신론적 입장에 대해 크게 우려했으나, 초기 파시즘은 별로 적대시하지 않았다.

독일의 경우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를 겁낸 가톨릭 신자들은 당시 기세를 떨치고 있던 나치를 지지했다. 로마에서는 나치정권을 인정하는 바티칸의 입장을 천명하는 화의를 발표했다. 교황이 나치즘의 위험을 깨달은 것은 수년이 지난 뒤였다. 그는 기독교 신자는 누구도 공산주의와 협력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피우스12세는 몇 시간씩 기도와 명상에 잠기는 신비주의자이기도 했으며, 주위 사람들을 혹사하는 엄한 상전이기도 했다. 그는 개인적 매력 때문에 친구와 적들에게서 존경을 받기도 했다. 그의 재임 기간 초기는 역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얼룩져 있다. 전쟁이 발발하자 피우스 12세는 언젠가 때가 오면 중재자의 역할을 담당할 욕심으로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러한 중립의 위치 때문에 나치의 잔악한 유대인 학살사건을 방관할 수밖에 없었으니, 그는 이 때문에 후에 심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를 지지하는 이들까지도 당시 교황이 독일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살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또한 이들은 교황의 항의도 이를 방지하지 못했으리라는 구실로 그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기도 한다. 그는 비이탈리아인들도 쿠리아(교황청)에 참여시켰으며, 추기경단을 국제화하여 그의 임종 시에는 3부의 1만이 이탈리아인이었다.

요한 23세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339: 그러나 요한23세라는 칭호를 택한 나이 많은 교황의 짧은 재임기간(1958-1963) 중 역사적 변화들이 발생했다. 그가 일찍이 아비뇽 교황시대와 피사에 거주했던 반교황(anti-pope), 요한23세에 의해 얼룩진 요한이라는 칭호를 택한 것만 보아도 그가 무언가 새로운 결심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막중한 임무에 비해 나이가 너무 많았음을 자각했던 요한23세는 신속하게 행동을 개시했다. 그리하여 교황선출 후 3개월 만에 에큐메니칼 종교회의를 소집할 계획을 발표했다. 교황청 내의 많은 인사들은 이러한 생각에 반대했다. 과거의 종교회의들은 대부분 교회가 당면했던 시급한 문제들 - 특히 위험한 이단사상들 -을 처리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해 교황무오성의 교리가 반포된 이후에는, 이미 종교회의시대가 막을 내렸으니, 이제 교황은 절대적 군주로서 교회를 통치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도 많았다. 실제로 피우스9세 이루 가톨릭교회는 일련의 중앙집권화 현상을 경험했다. 그러나 교황 요한23세의 시각은 달랐다. 그는 다른 주교들을 '나의 형제들'이라 불렀으며, 이들에게 명령하기보다는 충고를 듣고 싶어 했다. 그는 또한 교회를 전면 개혁할 시기가 도래했음을 확신했으며, 이러한 작업은 전체 교회주교들의 단결된 지혜와 관심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수백 년 동안 가톨릭교를 지배해 온 고루한 사상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역시 종교의 자유 및 현대 세계 속에서의 교회의 역할에 대한 문서들이다, 전자는 집단뿐만 아니라 개인들의 종교자유가 존중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또한 모든 종교단체들은 '인간의 생활에 필수적인 공공질서를 침해하지 않는 한' 자기들의 원칙에 따라 조직체를 형성할 수 있다고 했다. ‘현대세계 속에서의 교회에 관한 목회헌법'(Pastoral Constitution on the Church in the Modern World)’은 바울6세 때 공의회에 의해 발표된 가장 긴 서류이며, 19세기에 고수되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신앙과 윤리에 관한 가톨릭교의 원칙들을 주장하는 동시에 그 내용은 현대생활의 여러 방면에 관하여 적극적 개방성을 보여 주고 있으며, 가정생활, 경제와 사회문제, 정치, 기술과 과학, 인간문화의 중요성과 다양성 등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다음과 같은 서두를 보면 그 전체 내용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압박받는 자들의 기쁨과 소망과 슬픔과 고통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이들의 기쁨이요, 소망이요, 슬픔이요 고통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고 모든 이들을 위해 마련된 구원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전진하는 이들의 공동체가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공동체는 스스로 인류 및 그 역사와 깊이 결합되어 있음을 자각한다.’

바울6세가 사망하자 최초의 비이탈리아인 교황이 탄생했다. 요한바울2세는 신부들이 정치적으로는 공식적읹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반대했으나, 교회는 정의의 문제에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학적 발전-345: 가톨릭교회의 내부사정을 잘 모르고 있었던 세계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보여준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을 낳게 한 신학적 작업은 이미 50년 이상이나 계속되고 있었다. 신부의 노동현장 개입운동과 같은 실험은 로마당국이 찬성하지 않았던 신학적 탐구의 결과였다. 무엇보다도 가톨릭신앙을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바티칸에 의해 무시되거나 부인되었던 신학자들의 존재를 잊을 수 없다.

테이야르는 종군 병사로 참전하였으며, 예수회에 가입하고, 고생물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항상 진화론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는데, 이는 창조론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력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결과였다. 그는 진화론의 일반적 원칙을 받아들이면서도 '적자생존'이 진화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라는 다윈의 제안을 부인했다. 그는 대신에 '복잡성 및 지각에 관한 우주법칙'을 제안했는데, 이는 보다 복잡하고 보다 높은 지각을 향해 진화가 이루어지도록 작용하는 힘이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스도 속에서 인성과 신성이 완전하게 결합하듯이 우리들도 최후에는 완전한 우리들 자신임과 동시에, 완전하게 하나님과 연합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야말로 종착점에 중심을 두고 있는 역사적 실재이다. 따라서 데이야르는 과학과 신학, 그리고 신비적 요소까지를 한데 결합했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신비주의적 전통과는 달리 이 세상을 인정하는 신비주의자였다.

이러한 테이야르의 전 우주를 포괄하는 체계를 다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도 그의 영향을 볼 수 있다. 진화과정을 '끝에서부터 시작하여 태초로' 관찰하고자 했던 그의 시도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망라한 현대 신학자들로 하여금 종말론에 큰 관심을 갖도록 했다. 바로 이러한 영향 때문에 현대신학에서 종말론은 다른 신학들에 첨부된 부록으로서가 아니라, 중요한 시발점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진화과정의 계속성과 이 가운데 참여하는 우리들의 의식적 노력을 강조했던 테이야르의 덕분으로 다른 신학자들도 하나님의 경륜 속에 참여하는 인간의 모습을 중요시하게 되었으며, 역사를 형성하는 과정 속에서 인간이 적극적 동인으로 간주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주창했던 이성적 신비주의는 많은 이들로 하여금 그들의 경건생활을 정치적 행동주의와 연결되도록 만들어 주었다.

루백(Henri de Lubac)은 테이야르처럼 광범위한 우주적 관심에 기울어지지는 않았으나, 초기 기독교전통에 관한 그의 심오한 지식 때문에 가톨릭신학에 보다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테이야르와 마찬가지로 인류는 한 개의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전체 역사는 이러한 목표의 관점으로부터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는데, 이 목표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의 법률적 기구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영체로서의 교회야말로 세계의 한 가운데에 존재하는 성레(sacrament)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했던 또 다른 전문가인 이브 콩가르(Yves Congar) 역시 비슷한 경향을 띠고 있었다. 그는 1939년 프랑스군 병사로 참전하여 1940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에서 전쟁포로생활을 했다. 그리하여 그 누구보다도 현대인들의 잔인함을 몸소 체득한 바 있었다. 도미니크 수도사였던 그는 후에 스트라스부르크에 있는 도미니크수도원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루백과 마찬가지로 교회가 각종 신학논쟁에 대한 반동으로 그 전통의 범위를 좁혀 왔기 때문에, 원래의 전통이 가지는 풍성함을 상실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특히 교회의 자기이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당시 지도자들 사이에 만연하고 있던 바, 교회를 법률적 계급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경향을 비판했다. 원래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이해되어 왔으며, 그 속에서 평신도야말로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20세기 초의 많은 가톨릭신학자들과는 달리 다른 교파에 속한 신자들에게도 매우 개방적 태도를 보였다.

라너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기톨릭 신학자이다. 그는 생전 3,000편 이상의 책들과 논문을 남겼다. 그 내용은 가장 심오하고 복잡한 신학 문제부터, '우리는 왜 밤에 기도하는가?' 등 평범한 일상생활까지 총망라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방법론은 모두 비슷했다. 그는 전통과 현대세계를 모두 인정하고서, 전통을 향해 일반사람들이 생각지 못했던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그는 우주의 신비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신비적 본질 자체를 확실하게 보여줌으로써 신비성을 일상생활에 도입하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와 실존주의의 지도자이자 그의 교수였던 마틴 하이덱거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그러나 그는 단지 기독교의 가르침을 전파하는데 도움이 되는 한에서만 철학에 관심을 가졌다.

또한 일반 평신도들을 위한 저술은 매우 적었으며, 주로 신학자들을 상대로 글을 쓰면서 이들로 하여금 전통의 새로운 해석에 눈을 뜨게 하고자 노력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가 그때까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전통적 해석들과는 다른 해석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프랑스인들처럼 로마 당국에 의해서 금령을 받지 않았다. 그의 영향은 직접 간접적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모든 선언문들에 미쳤으나, 가장 큰 영향을 준 분야는 역시 감독제도의 기능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실제로 수세대 동안 로마 가톨릭교회는 왕실 정치의 본을 따라 로마에 권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라너는 감독제도의 개념을 탐구하여, 로마의 우위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감독제도의 집단지도 체제적 성격을 강조했다. 이는 곧 로마가 진정한 의미에서 가톨릭, 즉 보편성을 갖게 됨을 의미했다. 로마나 서구 유럽적인 관점을 진리의 기준으로 고집하지 않고,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적응해 나간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보편성과 집단성의 개념이 단지 감독제도뿐만 아니라, 일상용어의 사용, 그리고 각양 문화의 상황에 따른 예배의식의 적용 등에 관한 공의회 결정의 배경을 이루었다.

건전한 신학적 학문과 전통의 이해와 재해석, 그리고 이러한 전통이 새로운 시대에 적용할 수 있도록 발전시킨 라너의 모습은 그 후 나타난 각종 신학들, 특히 우리가 최종적으로 살펴볼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들을 수용하고 평가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따라서 20세기 로만가톨릭의 모습은 수세기에 걸쳐 현대세계의 도전을 단지 대결과 정죄로 일관했던 입장을 벗어나, 이 세계와 새로운 대화를 모색했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대화의 결과 가톨릭 신도들뿐만 아니라 프로테스탄트신자들, 그리고 비기독교인들 까지도 기대하지 못했던 새로운 에너지를 가톨릭교회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제21장

유럽의 프로테스탄티즘

19세기에 가톨릭교가 현대세계의 도전들에 창조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결과 프랑스에서는 회의주의와 세속주의가 창궐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자유주의의 낙관적 희망의 실패로 말미암아 독일, 스칸디나비아, 영국 등 전통적으로 프로테스탄트가 득세했던 지역에서도 역시 회의주의와 세속주의의 세력이 득세한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20세기중반에는 이미 북부 유럽이 프로테스탄트의 본진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했으며, 그 지도적 위치는 다른 지역들로 이전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그 결과-354: 1914년 전쟁이 발발할 즈음,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유럽에서 고조되어가는 긴장을 감지했으며, 교회들의 국제적인 조직을 이용하여 전쟁을 방지해 보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가 실패했을 때, 이러한 지도자들 가운데 일부는 국가주의적 감정에 휘말려 들기를 거부하고, 교회를 화해의 통로로 사용해 보고자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중심인물은 1914년부터 루터란의 웁살라 대주교였던 나단 죄더블롬이었다. 그는 전쟁에 참여한 양측을 망라하는 지기들을 통해 기독교가 가지는 교제의 보편적이고 초국가적인 본질성을 과시하고자 했다. 전쟁 후, 평화애호자로서 명성과 노력을 통해 그는 초기 에큐메니칼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사실 프로테스탄트 진영에서는 시대의 사건들을 이해하고 이에 대응할 수 있는 해답을 제공할 신학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의 본질과 능력에 관하여 한없이 낙관적이었던 자유주의는 당시의 상황에 대처할 수 없었다. 죄더블롬 및 기타 스칸디나비아 신학자들은 루터 및 그의 신학에 관한 연구를 재개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했다. 19세기 독일의 자유주의학자들은 루터야말로 자유주의의 선구자이며, 독일정신의 진수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제 스칸디나비아 및 독일신학자들은 루터의 신학을 보다 깊이 탐구하면서, 그 이전의 해석과는 상이한 점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부문에서 중요한 업적들은 구스타브 아울렌의 [크리스투스 빅토르,Christus Victor]과 앤더스 니그렌의 [아가페와 에로스]라 할 수 있겠다. 이들은 모두 악의 세력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조건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했는데, 이는 그 전 세대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시대의 도전들에 대한 신학적 응답은 칼 바르트에게서 나왔다. 바르트는 제네바에서 처음 목회를 하면서 칼빈의 [기도교 강요]를 정독할 기회를 갖게 된다. 그는 빈농들과 노동자들이 사는 샤펜빌로 옮겨 목회를 하면서 사회민주당에 가입하기도 했다. 그는 처음에 auxauc 친구들을 위해 집필했던 [로마서주석]의 전면 수정된 제 2판을 끝내자마자 괴팅겐의 교수로 갔다. 그는 그후 뮌스터, 본, 그리고 바젤 등에서 계속 교수로 재직했다. 바르트의 [로마서주석] 제2판에서는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뚜렷이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시간과 영원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간격, 인간의 업적과 하나님의 행동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 등을 주장한 데서 이를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많은 이들은 바르트의 [로마서주석]개정판이야말로 일찍이 키에르케고르가 저술했던 [기독교권에 대한 비판](Attack on Christendom)의 바르트 판이라고 말해왔다.

바르트가 가르치기 시작할 때에는 이미 그가 나름대로의 새로운 학파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학파는 흔히 '변증법적 신학' 혹은 '위기신학' 혹은 '신정통주의'라 불렸다. 그의 신학은 절대로 우리들의 소유가 될 수 없이 항상 우리들에게 대치하고 있는 하나님의 신학, 이 하나님의 말씀은 동시에 “예”이면서도 “아니오”, 즉 동시에 긍정과 부정이 될 수 있다는 신학,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들의 노력에 안식과 영감이 아니라 위기를 가져다준다는 신학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불트만과 고가르텐은 바르트의 사상이 그 접근방법에 있어서 지나치게 정통적이며, 현대인들의 회의에 정면으로 해답을 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 집단을 떠나게 된다. 또한 브룬너 역시 자연과 은총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바르트와 동의하지 못했으므로 갈라서게 되었다. 브룬너는 은혜가 행동하기 위해서는 인간들 속에 '접촉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바르트는 그렇게 할 경우 자연주의신학이 다시 도입되게 될 뿐만 아니라, 은혜가 스스로 그 자체의 '접촉점'을 마련한다고 믿고 있었다.

어쨌든 바르트는 그의 신학적 순례를 계속했다. 1927년에는 [기독교교의학] 제 1권이 출판되었다. 바르트는 그 가운데에 신학의 목적은 슐라이어마허나 다른 이들이 주장했던 바처럼 기독교신앙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 했다. 그의 작품의 분위기 역시 변화했다. [로마서주석]에서는 과거의 오류를 지적하는 선지자의 모습이었으나, 이제 그는 또 다른 조직신학을 수립하고자 애쓰는 학자의 모습을 보였다. 그리하여 위기의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이 되었다. 그런데 그는 이 전체계획이 사실은 출발점에서부터 잘못되어 있었던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바르트는 안셀름을 연구하고, 19세기의 프로테스탄트신학을 살펴본 결과 자기의 [기독교교의학]이 지나치게 철학에 양보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기독교교의학]에서 신학은 우리들의 가장 깊은 실존적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준다고 제안했으며, 자기의 신학을 대신할 기본구조로서 실존주의 철학을 사용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해답뿐만 아니라 질문까지도 부여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예를 들어서 죄의 문제만 하더라도, 우리가 처음부터 죄를 자각하고 복음이 이에 응답을 주는 것이 아니다. 은혜의 말씀이 죄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모르고는 은혜도 죄도 알 수 없다. 이러한 새로운 관점 때문에 바르트는 그의 거대한 조직신학적 작업을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신학의 교회적 지표를 강조하기 위해 이를 [교회교의학]이라 이름했다. 생전에 완성하지 못했던 이 13권으로 된 저술들은 1932년에서 1967년 사이에 출판되었다.

그의 [교회교의학]이야말로 의심할 바 없이 20세기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신학 작품들 가운데 하나이다. 많은 이들이 체계화된 신학은 과거의 유물이며, 신학은 기껏해야 전공논문으로 이루어진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즈음, 바르트는 가장 뛰어난 신학을 위한 새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그의 [교의학]을 읽노라면 그가 초대교회로부터의 기독교전통에 통달하고 있음을 즉각 알게 된다. 또한 거의 40년에 걸쳐 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체작품이 일관성 있는 흐름을 유지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물론 제목에 따라 그의 강조점은 바뀌지만, 전혀 새로운 출발점은 찾아볼 수 없다. 또한 특기할 만한 것은 전체적 신학 작업에 대해 가지고 있는 바르트 자신의 자유와 비판의 정신이다. 그는 신학을 하나님의 말씀과 혼동하지 않는다. 그는 신학이란 아무리 진실하거나 정확하다 할지라도 결국은 인간의 작업에 불과하며, 그렇기 때문에 항상 자유스러움과 기쁨, 그리고 유머까지를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갈등-360: 바르트가 [교회교의학]을 준비하고 있을 즈음, 히틀러는 독일내의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을 통일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를 통해 독일민족의 우수성과 신으로부터 받은 사명이라는 그의 메시지를 전파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자유주의에 의해 재해석된 전통적 기독교신앙과 인종적 우수성의 관념과 독일민주주의를 한데 합친 '독일기독교당'(German Christian)이 출현했다. 이들의 의도들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를 유대교에 상치되는 개념으로 재해석하여 당시 독일제국의 반유대 정책에 공헌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부의 시책에 부응하여 1933년에는 연합독일복음주의교회(United German Evangelical Church)가 결성되었다.

이러한 연합교회가 택하고 있는 방향에 대하여 바르트와 불트만을 포함한 일단의 신학자들이 ‘증인들의 총회’를 개최하고 고백교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외한 다른 일체의 사건들과 권력들, 인물들이나 혹은 신조들을 마치 하나나님으로부터의 계시인양 받아들여야 한다는 잘못된 신념’을 거부했다.

히틀러 정권 아래 박해를 받은 인물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사는 디트리히 본회퍼였다. 그는 산상보훈을 상황화한 [제자도의 대가]와 [성도의 공동생활]을 출판했다. 그는 런던에 있을 때 고백교회의 요청을 받자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독일로 돌아와서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신학교는 곧 폐쇄되었고, 그는 히틀러의 암살계획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감옥에서 종전을 며칠 앞두고 처형되었다.

이때의 서신들과 그가 남긴 유작들을 통해, 그는 후세대들에게 커다란 연구과제로 남겨졌던 새로운 사상들과 씨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이 세계가 '성숙'단계에 있으며, 이러한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현명한 부모와 비슷한 것으로서, 아이들이 자람에 따라 뒷전으로 물러간다고 묘사했다. 이와 연결하여 그는 존경하고 있었던 바르트를 비판했다. 왜냐하면 바르트는 사실상 계시의 한계성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뛰어넘어 '계시의 실증주의'(positivism of revelation)을 주장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부문에서는 바르트의 주장을 수용하여 과감하게 바르트의 원칙들을 적용해 보고자 했다. 예를 들어 바르트는 종교란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숨기 위한 인간들의 노력이라고 선언한 바 있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본회퍼는 '종교 없는 기독교'를 주장했다. 후세인들은 이러한 암시들을 서로 다른 몇 가지 방법들로 따르고자 했다.

전 후-365: 국가와 교회 사이의 관계들은 지역에 따라, 그리고 시대에 따라 상이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 마르크스주의자와 기독교의 대화는 프라하 코메니우스신학원의 학장이던 요셉 로마드카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의 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헝가리가 후스의 출생지였으며, 이곳의 30년 전쟁의 피해를 극심하게 경험했던 지역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때 이후 이곳의 프로테스탄트들은 가톨릭을 자기들의 박해자로 간주했다. 따라서 공산주의 정부가 모든 교회들을 평등하게 취급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체코의 프로테스탄트들은 이를 하나의 해방으로 받아들였다. 바티칸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새 정부를 반대하고 나서자, 프로테스탄트신도들은 이를 가톨릭 측에서 상실했던 주도권을 다시 탈환하고자 하는 시도로 받아들였다. 또한 외국침략군에 대항한 후스파의 저항시대부터 기독교신앙은 개인적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보다 강렬한 정의를 수립해야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로마드카 및 그의 추종자들은 자기들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마르크스주의 정권에서 적극적으로 접근했다. 그런데 로마드카는 세계 2차 대전 이전부터도 러시아식 공산주의자야말로 세계역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것으로서, 새로운 시대에서는 사회정의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었다. 또한 1933년에 이미 그는 또한 나치주의의 위험들을 경고했다. 독일이 고국을 침공하자 그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8년간 킹스턴 신학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통해 미국에서 소위 기독교라고 칭하는 것은 단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및 자본주의의 정당화에 불과하다는 자기 원래의 신념을 재확인하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기독교신자들은 마르크스주의의 무신론에 그다지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부인하는 하나님의 존재란 상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성경과 기독교신앙이 계시하는 진정한 하나님은 공산주의가 부인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쓸데없는 마르크스주의의 무신론이 범접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교회는 또한 냉전으로 인한 세계의 양극화가 가져오는 차이점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전쟁 이전 체코슬로바키아에 존재하고 있었던 자본주의 사회의 불의를 그냥 인정해서도 안 된다.

유럽의 또 다른 지역에서도 기독교신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의 대화가 활발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대화에 참여했던 마르크스주의 인사들은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아니라, 역사와 사회의 분석에 관한 마르크스의 근본요소에 찬성하면서도, 이를 자기 나름대로의 방향으로 추구해 보고자 했던 수정주의자들이었다. 이러한 운동의 지도자는 에른스트 블로흐이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였던 그는 종교 일반, 특히 기독교가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 동안 박해자들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데에 찬성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초기사상에 나타난 이론인, 초대기독교는 또한 박해에 대항한 운동이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블로흐는 기독교신조들과 성경에 나타난 교훈들이 긍정적 가치들을 가지도록 재해석하고자 했다. 그는 이러한 가치가 소망의 메시지 속에 자리 잡고 있다고 보았다. '소망의 원칙'이야말로 초대기독교가 인간역사에 미친 가장 위대한 공헌이었다. 이러한 모습이 그토록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소망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인간들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다른 마르크스 수정주의자들의 사상과 함께, 이러한 소망의 개념은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양자 사이의 대화를 위한 통로를 열었다. 이러한 대화-특히 블로흐의 사상-는 20세기에 있어 프로테스탄트신학의 가장 중요한 특성에 공헌했으니, 이는 곧 기독교신학의 기본적인 주제로서 소망과 종말론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의 지도자는 위르겐 몰트만이었다. [소망의 신학]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출판한 몰트만은 소망이야말로 성경적 신앙의 중심 분야라고 주장했다. 우리들의 하나님은 우리들을 만나시고 우리들을 미래로 부르신다고 했다. 그리하여 소망의 신학은 신자들로 하여금 수동적으로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미래, 즉 빈곤과 박해에 대항한 투쟁에 우리를 불러들이신다는 것이다.

한편 쏘련의 영향권 밖에 있었던 서부 유럽에서는 세속화 과정이 가속화 되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교회 출석율이 10% 이하로 떨어졌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루돌프 불트만의 노문 [신약과 신화]에 의해 제공되었다. 불트만은 신학의 메시지가 신화 속에 쌓여 있으므로 오늘날 이를 듣기 위해선 “비신화화”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비신화화 과정이 없이는 신앙이 오해위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현대세계는 더 이상 초자연적인 개입이라는 관념을 수용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인간들의 용어로써 하나님을 묘사하고자 하는 노력 및 이러한 모든 관념들은 비신화화 되어야 한다고 불트만은 주장했다 불트만의 책이 출판 된지 20년 만에 앵글리칸 주교 존 로빈손의 [신에게 솔직히]가 나타났다. 불트만뿐만 아니라 본회퍼 및 폴 틸리히의 이론들을 보다 대중화시키고자 노력했던 이 책은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1936년 프랑스에서는 감리교와 회중파내의 개혁파신자들이 연합하여 프랑스 개혁교회를 결성했다. 이 교회는 특히 공업화된 지역 내에서 전도와 선교에 투신했다. 마찬가지로 서독의 경우,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13만 명의 인원들을 동원하여 독일 및 해외의 사회문제 및 구제 사업에 헌신했다. 이러한 운동 뒤에는 세속화가 아닌 순종을 가장 중요한 명제로 받아들였던 수백만 명의 헌신적 신자들이 자리 잡고 있다.

동독의 경우, 공산주의 정부가 교회출석을 탄압한지 40년 후에도 전 인구의 2/3가량이 기독교신자임을 고백하고 있다. 마침내 1978년, 정부는 교회와 합의에 도달하여 기독청년들에 대한 차별대우를 종식시키고, 지역적 전국적 집회를 허락하며, 몇몇 교회건물의 건축을 인정하기로 했다. 1983년 정부와 교회들 -로만 가톨릭을 포함하여-은 연합으로 루터의 탄생 500주년을 기념했다. 비록 20세기의 획기적, 충격적 사건들에 의해 영향을 받고, 어떤 곳에서는 소수화하기도 했으나, 유럽의 프로테스탄트주의는 그 생명과 활기를 잃지 않았다.

제22장

미국 내의 프로테스탄트주의

제1차 세계대전부터 대공황 시기까지-371: 미합중국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지만 유럽과 같은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평화운동을 지지했던 교회들은 이제 전쟁을 위한 선전에 가담했다. 자유주의와 근본주의자들을 막론하고 '문명을 구원할' 필요성을 역설했으며, 보다 극단적 근본주의자들 중에는 당시 사건들을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예언의 성취로 해석하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평화주의 노선을 고수해 온 메노나이트와 퀘이커들을 제외하고, 교회들은 전쟁의 열기와 국가적 우월감에 사로잡혔으며, 일부 강단에서 목사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체 독일국민들을 멸종시키라고 고함치기도 했다. 유명한 전도자 빌리 선데이는 '과격파'들을 추방하는 것은 충분한 처벌이 되지 못하므로, 대신 이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총살시키자고 소리 질렀다.

자유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 사이의 갈등은 전후에 특히 격화되었다. 바로 이때가 근본주의자들이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의 학습을 금지시키고자 했던 노력의 절정을 이루었던 유명한 '스코프스 재판'(Scopes trial)이 발생한 시기였다. 거의 모든 교파들이 근본주의 문제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특히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성경의 무오설이었다. 성경의 무오설이야말로 근본주의 정통신학의 근간이라 할 수 있다. 후에는 이러한 분리가 공개적인 분파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북장로교 근본주의의 지도자였던 프린스톤 대학의 교수 그레셤 메이쳔은 1929년 미국 근본주의신학의 아성이 되었던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설립했으며, 결국은 이를 중심으로 정통장로교회가 성립되었다(1936년).

세계 1차 대전과 그 후 10년 동안 미국인들은 일반적으로 미래에 대해 낙관적이었다. 전쟁과 그 참혹상은 먼 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막연한 환상에 불과했다. 미합중국 내에서는 아직도 인류의 진보를 확신하고 있었다. 교회들과 강단에서는 유럽에서 이미 전 세계들의 낙관론을 경험한 후 생성되었던 새로운 신학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하여 미국인들은 아직도 '자유인들의 나라이자 용사들의 고향'이라는 미국의 위대성을 찬양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에 불황이 닥쳐왔다.

불황과 제2차 세계대전-375: 1929년 10월 24일 미국 뉴욕의 주식시장이 파산했다. 서구시장의 대부분은 심각한 경제 불황에 시달리고 있었다. 미국도 노동인구의 1/4은 실업상태에 빠졌다. 사회주의에 물들 것을 우려했던 미국은 사회보장제도가 없었다. 미국의 실업자들은 기댈 것이 없었다. 은행이 문을 닫고 부도수표가 남발되고 개인재산은 차압되었다. 그런데도 미국정부는 불황의 존재를 부인하고 낙관적으로 대처했다. 평생 부족한 것을 몰랐고, 앞으로는 더 잘 살게 될 것을 믿었던 세대의 꿈은 산산이 부서졌다. 무제한적 낙관주의가 퇴색했다.

이제부터 보다 덜 낙관적인 신학이 대두하게 되었다.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이 미국에 소개되었고, 니버 형제의 동생 라인홀드는 [미국내의 하나님의 왕국]과 [교파주의의 사회적 기원]을 냈고, 형 라인홀드는 유명한 저서 [도덕적 인간과 부도덕한 사회]를 내고,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야말로 인류의 적이라고 규정하면서 ‘사회주의 기독자연맹’을 조직했다.

독일 신학자 폴 틸리히가 라인홀드 니버의 초청으로 미국 유니온 신학교 교수로 왔다. 그는 현대인들의 가장 심오한 실존적 질문들-궁극적 관심-을 찾아내고, 복음이 어떻게 이에 대응하는가를 보여주려고 했다. 그의 [조직신학]은 이러한 방법의 기반위에 기독교 신학의 중심주제들을 파악하려는 노력이었다.

루즈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뉴딜정책이 등장하면서 교회지도자들이 주장해온 ‘사회주의적’ 정책들이 실행에 옮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곧 이어 터진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불황을 일시에 걷어내게 만들었다.

세계가 전쟁에 의해 분리된 와중에서도 양측 기독교 신자들은 교제와 대화의 다리를 놓고자 했으며, 이러한 노력은 전쟁 후에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이어진다.

전후 시대-381: 추축국들의 패전이 확실해지자마자 보다 더 위험한 대적인 소비에트 러시아가 등장했다. 공산주의에 대한 적색공포가 절정에 달했던 메카디 시대에는 교회 등록교인이 아니면 반미국적을 가졌다고도 생각될 정도였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교회들은 급성장했다. 각처의 유복한 교인들이 아름다운 예배당과 교육관, 기타 교회건물들을 지었던 교회건축시대라 할 수 있다. 1950년대에는 빌리 그레이엄복음협회가 설립되었다. 이는 단순한 미국의 전통적 부흥회의 연장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기관은 풍부한 재정지원을 이용하여 가장 뛰어난 대중 전달매체와 기구들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빌리 그레이엄협회는 공식적으로 보수적 신앙노선을 겸비했으나, 가능한 한 다른 경향의 신자들과의 마찰을 회피했다. 동 협회는 곧 세계전역에서 사역했으며, 이를 통해 모든 대륙에 미국적 부흥회 전통의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교회의 일들이 잘 되어간 것만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대교파 교회들은 이제 가난한 자들과 소수민족들이 점거한 도시들을 포기했다. 물론 일부 예외적인 인사들은 있었으나, 대교파지도자들은 새로이 구성되기 시작한 풍요한 교외지역들의 상황에 적응해 버리고, 대도시 및 시골지방과의 접촉을 상실하게 되었다. 시골의 경우, 전통적인 교파에 계속 남아있던 신자들은 점차 새로운 지도층들을 의심하게 되었다.

도시에서는 성결교회가 이러한 공백을 메꾸고자 했으나, 주민들 대다수는 결국 모든 형태의 기성기독교와의 접촉을 상실하게 되었다.1950년대의 대부흥 현상 20년 만에 도시를 구조하자는 새로운 목소리가 높아갔다. 그러나 과연 어떻게 이 과업을 이룰 수 있을지 분명한 아이디어를 가진 이들은 별로 없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야 도시 속에서 종교적 활력이 재생되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그 현상은 상당히 부유한 층들이 다시 도시로 귀환했다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전후 기독교부흥의 또 다른 특색은 기독교신앙을 내부적 평화와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이 당시 가장 눈길을 끌었던 종교저술가들 중 하나는 노만 빈센트 필이다. 그는 정신건강과 행복에 이르는 수단으로 신앙과 '적극적 사고'를 주창했다. 역사가 시드니 알스트롬은 이 당시의 종교성을 가리켜 '신앙 자체에 대한 신앙' 즉 '마음의 평화와 자신 있는 생활'을 약속했던 신앙에 대한 동경이라고 정확하게 표현했다. 이러한 모습의 종교성은 시대와 부합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는 혼란된 세계의 한 가운데에서 평화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적 책임에 관해선 거의 언급하지 않았으며, 냉전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미국 내의 정치여론을 극우적으로 몰아갔던 이들과의 대결도 회피했다.

정부는 1949년 군대 내에서의 인종분리를 철폐하고, 1952년 역사적인 대법원판결을 통해 공립학교내의 인종통합을 명령했다. 일부 백인들도 이러한 인종분리정책을 지지했으며, 이들의 활동은 큰 힘이 되었다. 전국교회협의회(The National Council of Churches)와 여러 대교파들도 인종분리정책을 반대했다. 그러나 이 운동을 이끌고 간 것은 물론 흑인들 자신의 적극적 참여와 지도력 때문이었다.

1960년대 초까지 활약한 흑인 목사 루터 킹은 남부기독교지도자 연맹을 결성했으나, 이것만으로는 블랙 파워를 외치는 흑인들의 원한과 울분을 풀어줄 수 없었다. 킹 목사의 움직임은 인종분리의 문제를 넘어서 불의에 대한 싸움으로 번져 갔다. 그들의 투쟁은 인종을 불문하고 모든 가난한 이들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가난한 자들의 행진’을 주도하던 중에 암살당했다. 그러나 교회는 흑인 저항운동의 집회소이자 훈련소가 되었다. 마침내 ‘흑인신학’이 나타났다. 유니온 신학교 교수인 제임스 콘은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다.

"보편적으로 차별당하고 착취당하는 이들과 일체성을 갖지 못하는 기독교신학은 존재할 수 없다. 핍박당하는 자들의 공동체로부터 출발하지 않았다면, 이 신학은 복음의 신학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속에서 자기를 계시하셨던 하나님,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의 하나님, 그들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면, 이는 이스라엘 역사 속의 하나님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민권운동처럼 널래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여권신장운동이 일어났다. 교회내의 문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여성들도 안수를 받고 말씀 사역에 종사할 수 있어야 하나는 것과 이제까지 남성들이 주도해 왔던 전통적 신학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 결과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여성 안수를 시작했으며, 신학분야에서도 남성우위의 신학을 교정해보고자 하는 노력이 일어나고 있다.

이처럼 수많은 흑인들과 여성들이 관련된 움직임들과 함께 또 다른 국제, 국내정세들이 미국의 사고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동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전쟁이다. 처음에는 소규모군사작전으로 시작되었던 것이 1965년에는 미국이 참전했던 가장 장기간의 전쟁으로 화했다. 원래에는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전선에 뛰어들었던 미합중국이 부정부패로 가득 찬 정부들을 지원하게 되었고, 약소국들을 상대로 막대한 화력을 쏟아 부으면서도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언론은 전쟁의 참혹상을 국내의 각 가정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미국민과 의회는 전쟁확장의 주원인이 되었던 '통킹만 사건'에 관해 오도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실망과 좌절과 반전데모가 대학가를 휩쓸었다. 결국 학생데모를 진압하기 위해 무력이 동원되어 켄트주립대학과 잭슨주립대학에서 사망자가 발생했다. 미합중국은 전쟁을 종료하기로 했다. 역사상 최초로 패전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미국이 그 순결을 잃었다는 것이다. 국내의 자유와 정의, 그리고 해외에서의 자기방어를 상징하는 '자유인의 나라, 용자들의 고향'이라는 개념이 의심을 받게 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공업의 발전과 생활의 풍요로 인해 일부인사들은 미국이 의존하고 있는 경제체제 자체가 인위적으로 전쟁을 발발시켜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되었다. 여기에다 워터게이트사건으로 인한 미국민들의 분노와 회의 속에서 닉슨대통령이 사임했다.

세속적인 관념과 용어로 기독교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던 노력은 ‘사신신학'으로 나타났다. 하비콕스는 [세속도시]를 통해 도시사회의 측면에서 기독교 메시지를 재해석하고자 했으며, 이러한 사회가 제공하는 기회와 도전들을 평가해 보고자 했다.

이처럼 다채롭고 다양한 신학들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세 가지 공통된 주제가 존재한다. 즉 미래지향적 태도와 사회정치학적 현실에 대한 관심, 그리고 이 두 가지를 한데 묶어 조정해 보려는 노력이다. 이러한 신학들이 택했던 길은 종말론을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회복해 보고자 한 것이니, 다시 말해 현대의 사회 속으로 깊이 참여해 보고자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예배의 종말론적 차원과 그 사회적 당위성을 강조하는 예배의식의 부흥이 있었다.

1973년 이러한 사상을 함께 하는 일단의 기독교지도자들은 '시카고선언'을 채택했다. 그 내용은 미합중국내의 신자들 가운데 점차 고조되고 있는 확신을 대변하는 듯하다. 이 선언문이 서로 다른 상황 속에서 살고 있던 전 세계의 다른 기독교신자들에 의한 각종 선언문들과 비슷하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들은 서로 다른 신학적 배경 속에서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전 세계 신자들의 눈으로 볼 때, 미합중국내의 교회들이 마침내 콘스탄틴 이후 시대와 에큐메니칼 시대의 도전에 비로소 응답하는 듯 보였다. 이는 또한 교회가 '우주시대'의 새로운 비젼에 대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우리들은 이때 비로소 처음으로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볼 수 있었다. 지구는 마치 언약한 '우주선'과 같았으며, 그 속에서 우리들은 함께 공존하든지, 함께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제23장

지구의 끝으로부터

19세기 후반부터는 각 지역 교회들 간에 보다 긴밀한 협력관계를 추구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는 인종과 국적을 초월한 모든 기독교 신자들이 현대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의미를 공통적으로 추구한다는 것이다.

연합을 위한 추구-394: 1910년의 에딘버러 세계선교사 총회를 모태로 하여 세계선교사 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가 결성되었다. 총회가 거듭될수록 많은 대표들에게 교회의 본질 및 기독교 메시지의 내용이 문제가 되었다. 이들은 교회와 선교사의 관계는 절대로 분리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고, 교회의 본질적 성격 및 기타 중요한 신학 문제를 먼저 논의하지 않고 선교작업만을 취급할 수 없다는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과 규범에 관한 1차 회의를 1927년 스위스 로잔에서 개최한 것이다. 2차 회의는 1937년 에딘버러에서 열렸다. 회의에서는 만장일치를 고집하지 않고 합의된 내용들을 정리한 뒤에 합의되지 못한 의견들을 병기해 두었다. 합의되지 못한 문제들은 더 많은 대화와 설명을 통해 극복될 것으로 믿었다.

마침내 1948년 암스텔담에서 세계교회협의회 제1차 총회가 열렸다. 이들은 신앙과 규범에 관한 위원회를 통해 계속 세계회의를 조직하고 준비하도록 했다. 이후 협의회 회원들은 계속 증가했다. 제2차 총회는 1954년 미국 에반스톤에서 열렸고, 163개 회원 교회가 참가했다. 제3차 총회는 1961년 뉴델리에서 열렸으며, 197개 회원 교회가 참가했다. 이 대회에서 국제선교사협의회가 세계교회협의회에서 합류할 것이 결정되었다. 이 총회에서는 ‘모든 교회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 연합하여 공존할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이후에 교회연합은 각지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지구 끝으로부터의 선교-401: 선교 사역은 항상 세계 각처에 현지인들이 이끄는 성숙한 교회들을 설립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선교초기에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들을 막론하고 신생 교회들은 기독교신학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할 수 없으리라고 간주되었다. 기껏해야 이들 현지교회들은 자기들 고유의 문화 환경 속에서 서구적 신학을 표현할 수 있으리라는 정도로 기대되었다. 그런데 에큐메니칼 운동, 식민지주의의 종식, 그리고 신생 교회들의 자신감 획득 등에 따라 이들은 원래 피선교교회들이 예기치 못했던 모습을 보였다. 왜냐하면 이들 교회들 가운데 일부는 단순한 전통적 서구신학의 적용이 아니라 이에 대한 도전의 양상을 띤 질문과 해답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진영에서 최근 수십년 동안 이러한 기능을 담당한 저서들이 출판되었다. 아시아의 경우, 태국에 갔던 일본출신 선교사 코야마 코수케가 [물소신학,Waterbuffalo Theology]을 저술했다. 수년 후에는 중국인 초안 셍송이 [제3안의 신학: 아시아의 현실 속에서 형성되고 있는 신학,Third-Eye Theology:Theology in Formation in Asian Settings]과 [인자하신 하나님,The Compassionate God]을 출판했다. 아프리카에서는 남아프리카의 인종분리정책에 대항한 투쟁의 와중에서 알란 뵈삭이 [순수여, 안녕, Farewell to Innocence]을 저술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 아르헨티나 출신의 감리교도 호세 미구에즈 보니노가 [혁명적 상황 속에서의 신학작업[,Doing Theology in a Revolutionary Situation]과 [기독신자와 마르크스주의자,Christians and Marxists]를 저술했다.

이들은 상호간에 상당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 가지 공통점을 공유한다. 즉 기독교신학 전체를 전통적 입장과는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조망한 것이다. 대부분 이처럼 상이한 관점을 택하게 된 것은 단순히 문화적 배경들만이 아니라 피압박자들의 사회적 경제적 저항을 감안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복음이 결국 교회는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설 것을 요구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일단의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러한 '해방신학자들'의 지도자들 가운데 구스타보 구티엘레즈와 후앙 루이스 세군도가 있다. 이들이 제안했던 것은 단지 해방의 문제에 국한된 신학이 아니라, 기독교신조와 생활전체를 하나님에 의하여, 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아래로부터' 힘을 받은 가난한 자들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관점이 비록 전격적으로 새로운 모양이기는 하지만, 정통기독교신조로부터 찾아낼 수 있다고 했다. 이들은 특히 성경 속에서 전통적 신학이 무시했거나 추상화했던 요소들을 발견했다. 이리하여 그들의 활동은 라틴 아메리카의 권력자들뿐만 아니라 이들의 새로운 복음해석에 응답하여야 했던 전 세계에 걸친 기독교공동체에 대한 도전이 되었다.

그 반응은 곧 나타났다. 로마당국은 라틴아메리카주교들에게 압력을 가했으며, 주교들은 다음 회의에서는 메델리 선언으로부터 한걸음 후퇴할 것 같은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의외로 1978년 멕시코 푸에블라(Puebla) 회의에서 주교들은 자기들의 원래 입장을 고수했다. 서구의 언론에서 해방신학은 동서간의 분쟁이라는 배경 속에서 해석되어, 흔히 '마르크스신학'으로서 지나치게 단순하게 이해되었다. 라틴 아메리카 자체에서도 이에 극렬하게 반대한 인물들이 많았다. 투쟁이 점차 격화됨에 따라 반대파들도 단결했다. 엘살바도르의 대주교 오스카 로메로는 그를 기존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본 집단에 의해 피살되었다. 바젤에서는 새로운 질서를 부르짖는 주교들을 헬더 카마라와 파울로 에바리스토 아른스가 영도하고 있었다. 니카라과에서는 샌다니스타 공산정권과 기독교사이의 대결이 고조되었다. 과테말라 및 인근제국에서 수백 명의 가톨릭신자들이 반역혐의를 쓰고 살해당했다. 미국과 유럽의 일부 신학자들은 이 새로운 신학을 부인하거나 무시했으나, 수많은 신학자들과 기독교지도자들은 이를 복음이 시사하는 바를 또 다른 측면에서 표현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과연 이러한 논쟁들과 대결들이 어떠한 양상으로 진전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20세기 말은 북부와 남부 사이의 점차 증가하는 긴장 상태로 점철될 것이다. 북부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동서방 진영의 대결이다. 미국과 유럽의 많은 기독교신자들에게 있어서 이는 곧 일방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반대편의 공산주의와 전체주의 체제사이의 대결을 의미한다. 그런데, 남부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중대한 문제 자체가 달라진다. 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제3세계를 더욱 더 극심한 빈곤과 결핍으로 밀어 넣지 않을 새로운 경제질서의 확립과 국가 간의 부의 재분배, 그리고 북부에 존재하는 강대국들을 위한 대리전쟁의 참혹한 전장으로 화할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사건들이 진전되는 가운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북반구가 점차 기독교화하고 있는 반면 숫자적으로 볼 때 교회는 남반구에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중요하게 취급받지 못했던 남반구의 교회들이 새로운 활기와 활력을 보여주고 있다. 1900년에는 전체 기독교신자의 49.9%가 유럽에 거주했다. 1985년에는 그 추세가 27.2%로 추산된다. 또한 1900년에는 전체 기독교신자의 81.1%가 백인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추세로 나아가면 서기 2000년에는 그 숫자가 39.8%로 감소할 것이다. 따라서 제3세계에서 출현하고 있는 여러 가지 신학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유보한다 하더라도, 21세기에는 남반구가 북반구를 향해 거대한 서교사역을 펼칠 것이 예상된다. 그리하여 1세기 전만해도 '세계의 끝'이라고 간주되었던 나라들이 이전에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자들의 후손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끝

요약이 좀 길게 되었습니다만, 덕분에 기독교 현대사를 꼼꼼하게 살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