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연구/기독교 역사 이야기

“필리오크베”교리논쟁이 기독교 영성에 미친 영향

heojohn 2010. 6. 28. 01:38

필리오크베”교리논쟁이 기독교 영성에 미친 영향

                   - 동, 서 교회의 분열을 중심으로

                            



목      차


I. 시작하는 말


II. 초기교회의 교리논쟁과 공의회에서 결정한 신조들


  1. 초기 7개 공의회와 신조들

  2. 기타 회의와 신조들


III. “필리오크베” 교리논쟁이 교회 분열에 미친 영향 


  1.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에서 성령의 쌍발출설: “필리오크베”

  2. 교회분열의 전조: “포티우스 분열” vs “니콜라스 분열”

  3. 대분열(1054)

  4. 분열 이후 기독교 영성의 변화: 이슬람의 발흥과 십자군 원정의 실패


IV. 끝맺는 말



          

              


I. 시작하는 말


    교회가 교리논쟁 때문에 분열로 가는 역사적 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기독교 신자로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교회사에서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이해하지 않고는 동방 정교회와 서방 가톨릭교회, 그리고 개신교의 서로 달라진 신앙교리와 예배형식의 독특성을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신앙교리가 달라지면 예배형식은 물론 신자들의 영성1)도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필리오크베” 교리논쟁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이 논쟁이 교회가 동, 서방으로 분열하는 직접적 원인으로 작용했고. 이후 양교회의 달라진 교리는 신자들의 영성을 각각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교리논쟁이 일어나기 전에 초대교회의 영성은 매우 단순했다. 신자가 되는 일은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는 것이었다. 다만 기독교의 세례는 공개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고백을 필요로 했다. 이러한 신앙의 고백을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내용과 형식으로 적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신조 또는 신경이다. 기독교 신자를 위한 신조는 이렇게 발전된 것이며, 루터가 만인 제사장설을 주장하면서 종교개혁을 하기 전까지는 일반신자들이 알고 있는 기독교 교리는 한 개(동방교회) 또는 몇 개의 신조(서방교회)가 거의 전부였다. 왜냐하면, 중세 교회시대까지 일반신자들에게는 성경이 보급되지도 않았거니와, 문자를 독해 할 수 있는 자도 매우 제한되어 있었고, 성경해석에 있어서도 잘못하면 저주를 받으리라는 경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개신교의 모체인 가톨릭교회는 교리해석과 교회의 권위를 교황의 무오성과 지상대리권에다 가져다 놓았다. 그러나 가톨릭교회가 동방정교회와 분열하기 이전에 하나로 있었던 초기 그리스도교회는 최종적인 교리 해석과 교회의 권위를 오직 공의회에 두고 있었다. 이 소논문은 초기교회에서 벌어진 “필리오크베” 교리논쟁이 교회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초기 공의회의 소집배경과 회의에서 벌어진 교리논쟁과 최종적인 결정들을 먼저 추적해야 한다. 성경 해석의 문제, 즉 교리논쟁이나 또는 교회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교회는 최종적으로 공의회를 소집해서 결정해야 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공통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7개 공의회2)와 초기 교리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신조들을 중심적인 자료로 삼고, 교회사적인 기록들을 참고로 해서  “필리오크베” 교리논쟁이 초기 교회분열의 근본적 요소로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또한 교회분열이 기독교 영성에 어떻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 등을 비판적 시각으로 검토해보고자 한다.


II. 초기 교회의 교리논쟁과 공의회에서 결정한 신조들

    

  1. 초기 7개 공의회와 신조들


    사도들이 세운 초기 그리스도교회는 성경의 바탕 위에 세워졌다. 사도들이 죽은 후에는 사도들의 전승을 이에 추가했다. 그리고 성경과 전승에 대한 해석의 권위는 전통적으로 교회의 감독, 즉 대주교들로 구성되는 공의회에 주어졌다. 기독교의 교리는 이러한 권위의 순서에 따라 결정되어야 했다. 이러한 기독교회의 입장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분열되기 전까지는 불변의 원칙이었다. 로마 황제로서는 처음으로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공인하고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긴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면서 아리우스주의 논쟁이 벌어졌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를 처리하기 위해 제1차 공의회를 소집한다. 이때부터 초기 공의회는 황제가 소집하는 전통이 세워졌다.


    1) 제1차 공의회: (1차)니케아 공의회(325)와 신조


    이 공의회에 앞서 알렉산드리아의 장로 아리우스(Arius, 250-336?)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이단적 주장을 한다는 이유로 그가 소속한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알렉산더(Alexander)에 의하여 파문당했다. 이에 아리우스는 그의 친구이자 콘스탄티누스 황제(Emperor Constantinus I, 274-337)의 종교 고문이며 『교회사』의 저자인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s)에게로 가서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유세비우스로부터 이런 사실을 보고 받은 황제는 자신의 제국 내에서 기독교의 갈등이 일어남을 원치 않았으므로 특별히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하여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1차 니케아 공의회로 불리는 것은 니케아에서 처음 열린 공의회라는 뜻이다. 이 공의회에서는 성자는 성부에 의해 났으므로 성자는 성부와 같은 본질이 아니라는 아리우스의 주장과, 알렉산더 대주교의 집사이며 그의 후임자가 된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7-373)의 동일본질론, 즉 성자는 만들어지지 않고 출생했으므로 성부와 성자는 본질에 있어서 완전하게 같다고 하는 주장이 팽팽하게 부딪쳤다. 이때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일치하여 성자의 신성을 훼손하는 아리우스주의를 단호하게 일축하였다. 여기에 대해 가톨릭교회사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두 편의 신경(信經)이 제출되었는데, 아리우스파(派)인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Eusebius of Nicomedia)가 제출한 것은 폐기되었으며, 팔레스티나 공동체의 세례 신경을 기초로 하여 ‘동질’(同質, homoousios)이라는 용어를 보완한 체사리아의 에우세비오(Eusebius of Caesarea)의 신경이 채택되어 이를 기준으로 니체아신경이 공포되었으며, 그 결과 4명의 아리우스파가 파문되었다. 부제 아타나시오(Athanasius)도 참석하여 정통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하였다”3)고 기록하고 있다. 니케아 신조(Nicea Creed)에는 아리우스주의를 반박하기 위하여 성자의 신성을 강조하는 내용이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전능자시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유일하신 하나님 아버지      를 믿노라. 우리는 또한, 유일하신 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노니, 이는 성      부에게서, 곧 성부의 본질로부터 태어나신 독생자시며,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 빛에서 나온       빛, 참된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된 하나님이시고, 출생하셨으나, 창조되지는 않으셨으며, 성부와 동      일본질이시고, 이를 통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지은 바 되었으니, 이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려오사, 육신을 입고 인간이 되셨으며, 고난당하신 지 사      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하늘에 오르셨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우리는 또한, 성      령을 믿노라. 그러나  “성자께서 안 계신 때가 있었다"든지, "그가 태어나시기 전에는 그가 계시      지 않았다"든지, "그가 무로부터 생성되었다"고 말하거나, "성자가 다른 본체나 본질로부터 유래했      다"든지 "피조물"이라든지, "가변적"이라든지, "변화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보편교회가 저주하노      라.4)


    이 밖에도 이 회의에서는 부활절의 날자, 이단자에 대한 세례, 서품(敍品)의 장애, 속죄 및 사제제도 등을 결의하였다.

    

    2) 제2차 공의회: (1차)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와 신조

 

     두 번째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렸다. 앞서 니케아 공의회에서 일단 아리우스주의를 물리쳤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가 죽고 콘스탄티우스가 즉위하자 아리우스주의자들은 황제의 호의를 업고 다시 살아났다. 십여 차례의 회의가 또 열려야 했고, 이런 주장을 반박하는 정통파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7-373)는 언제나 논쟁의 한 쪽 당사자였으므로, 황제의 찬반 입장에 따라, 유배와 복권을 반복하는 생애를 보내게 된다. 더욱이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가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서 로고스와 영혼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3분설과 그리스도에게는 인성이 신성 안으로 흡수되었으므로 인성이 없다는 주장을 하여 새로운 논쟁이 일어났다. 아타나시우스가 죽은 후에도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재위 기간 동안 계속된 이 논쟁들을 처리하기 위해 새로 황제가 된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I, 347-95)가 이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공의회에서는 카파도키아 교부들(Cappadocian Fathers)5)의 그리스도가 참된 구속주가 되려면, 신성도 인성도 완전해야 한다는 주장이 채택됨으로써 아리우스주의와 아폴리나리스의 사상은 완전히 배척되었다. 이 공의회에서 결정된 신조는 니케야 신조를 좀 더 발전된 방향으로 보완해서 개정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경)라고 부르며, 현재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니케아 신조라고 하면, 이것을 줄여서 부르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성령의 활동이 니케아신조보다 명확하고 자세하게 언급되고 있다. 현재 루터교회가 사용하는 번역본을 보자.

   

      저는 유일무이하시고 전능하시며, 천지와 모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창조하신 하나       님 아버지를 믿사오며, 유일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온       우주에 앞서 나셨고 참 신이시며 참 빛이시며 참 신 가운데 신이시며 하나님에게서 나셨고, 창조      함을 받지 않으셨고, 성부 하나님과 같은 본질이시며 그로 말미암아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고, 모      든 인간들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성령으로써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인간      으로 나셨고,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는 고난을 받으시      고 장사함을 받으셨으나 제 삼일째 되는 날, 성서에 기록된 말씀에 따라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에      올라 가시사 성부의 오른편에 앉으셨으며, 장차 산 자와 죽은 자들을 심판하려,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것인데, 그의 나라는 영원무궁합니다. 저는 성령을 믿습니다. 그는 주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성부와 성자에게서 생기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며, 그에게 관      하여 이미 예언자들이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유일하시고 거룩한 그리스도인과 사도의 교회를 믿      사오며, 죄 사함을 위한 유일한 세례를 인정하며, 죽음에서의 부활을 고대하며, 장차 올 영원한       나라의 생명을 믿습니다. 아멘. 5)  

    

    여기서 “필리오크베”의 문제를 낳게 된 “저는 성령을 믿습니다....성부와 성자에게서 생기시고....”라는 구절은 이 공의회에서 결정된 원문번역이 아니다. 이 부분에 대해 동방정교회의 “신앙의 정의(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6) 번역본을 보면, “성령을 믿나니 성령은 성부께로부터 좇아나시며”라고 되어 있다. 이는 나중에 가톨릭 측이 일방적으로 “필리오크베(와 성자)”를 첨가한 때문이다. 개신교는 “필리오크베” 구절을 첨가한 서방교회의 것을 그대로 따라 사용하고 있다.  또한....그에게 관하여 이미 예언자들이 말씀하셨습니다”는 부분은 성령이 예언자들에 의하여 예언된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 신앙의 정의를 보면,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고 번역되어 있으며, 이는 성령이 예언자를 통하여 예언을 하게 하였다는 뜻이다. 전체적으로 비교해보면, 이와 같이 어순이 다른 점도 있고, 가필된 부분도 있고, 오역도 있다.


     3) 제3차 공의회: 에베소 공의회(431) 


       안디옥 학파인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네스토리우스(Nestorius, 386?-451)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성과 마리아의 아들로서의 인성을 구분하면서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강조하였다. 즉, 예수는 마리아에게서 난 사람이므로 마리아는 테오토코스(theotokos)-하나님의 어머니가 아니라, 크리스토코스(Christokos)-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예수의 신성을 더욱 강조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인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키릴(Cyril)은 서로 논쟁하고 있었다. 이 논쟁을 결론짓기 위한 3차 공의회가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에 의하여 소집되었다. 키릴은 개회 일자에 안디옥의 네스토리우스 지지파들의 도착이 지연되는 기회를 이용해서 일방적으로 회의를 열고,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결정했다. 늦게 도착한 네스토리우스 지지파는 이에 대항하여 따로 회의를 열어 키릴을 이단으로 정죄했다. 서로 정죄하고 파문한 양측은 모두 황제에게 상소하였으나, 네스토리우스로부터 생활이 문란하다는 핀잔을 듣고 앙심을 품고 있던 그의 누이의 참소를 들은 황제는, 키릴의 편을 들어 네스토리우스를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직에서 해임하고 유배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파는 이 공의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고 분열의 길을 택했다. 네스토리우스파는 중동지역에서 아직도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한때 중국에도 들어와서 경교(景敎)라고 불렸다.


   4) 제4차 공의회: 칼케돈 공의회(451)와 신조


     칼케돈 공의회에 앞서 안디옥학파와 알렉산드리아학파는 2년전 에베소회의(449)에서 충돌했다. 문제의 발단은 전통적으로 안디옥학파의 몫이었던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자리를 노리는 알렉산드리아학파의 음모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콘스탄티노플 대수도원장이던 유티케스(Eutyches, 375?~454)는 알렉산드리아학파에서도 극단적 입장이었다. 그는 그리스도는 성육신 때 그의 인성이 신적 단일본질로 흡수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유티케스의 단성론은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디오스코루스(Dioscorus)의 지지를 받았다. 그들은 같은 알렉산드리아학파로서 유티케스의 단성론을 이단이라고 주장하는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인 안디옥학파 플라비안(Flavian)과 대립하고 있었다. 에베소회의는 디오스코루스가 테오도시우스 황제에게 뇌물을 주고 소집했었다. 이 회의는 폭력으로 번져 플라비안을 사망케 하고, 결국 유티케스가 승리하여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로마교황 레오1세는 이 회의결과를 보고 받고 “강도들의 회의”라고 비난하면서 새로운 회의 소집을 요구했으나, 뇌물을 받았던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는 거부했다. 그런데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가 낙마사고로 갑자기 죽는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뒤를 이어 즉위한 그의 사위 마르키아누스(Flavius Marcianus, 396-457) 황제는 로마교황의 요구를 받아들여 새로운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이렇게 험악한 과정을 거쳐 소집된 이번 제4차 칼케돈 공의회에서는 유티케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정죄하면서 플라비안의 정통성을 확인하고, 2년 전 “강도들의 회의”에서 결정한 사항들을 모두 무효화시켰다. 그리고 칼케돈 공의회에서는 한 위격 안에 두 개의 본성-신성과 인성이 있다는 교부 터툴리안의 신학과 이전에 열린 3개 공의회에서 채택된 결정문들을 재확인했다. 여기서 결정된 내용은 다음과 같이 “신앙의 정의” 형식으로 발표되었다. 여기에는 로마와 안디옥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모든 학파들의 견해들이 망라되어 있다. 이에 대해 서방교회에는 반대가 없었다. 동방교회에서도 대부분 동의했다. 음모와 술수로 교리를 변개하고자 했던 유티케스는 결국 유배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를 끝까지 지지하는 자들은 이 “신앙의 정의”에 반대하면서 분열되었다.

                           

                            신앙의 정의


        우리들은 한 목소리로 성스러운 교부들의 뒤를 쫓아 주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유일하고 동        일하신 하나님이심을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치니, 그는 신성과 인성에 있어서 완전하시며, 진정        한 하나님이시요 진정한 인간이시고, 지성과 아울러 육체를 소유하셨으며, 신성에 있어서는 성        부와 동일하신 분이시요, 인성에 있어서는 우리들과 동일한 본질이시요, 모든 면에서 우리들과        같으시나, 죄는 없으시고, 그의 신성은 일체의 시간 이전에 성부로 말미암아 잉태되셨으며, 그        의 신성으로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잉태자이신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다. 이야말로 유일하        시고 동일하신 그리스도요, 성자시오, 주시요 독생자이시니, 추호의 혼란이나 변화나 분리나 분        열없이 두 본성으로 나타나셨다. 이러한 통일은 서로 다른 두 본성의 구분을 파괴하지 않고, 오        히려 양쪽의 속성이 보존되어 양자는 한 위격과 본체(hypostasis) 속에서 연합되었다. 이들은         두 위격으로 분리되지 않고, 유일하신 독생자, 하나님의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다. 이        러한 모든 사실은 과거의 선지자들이 이에 관해 가르친 바요, 주님께서 스스로 우리들에게 가        르치신 바요, 그리고 교부들의 신경이 우리들에게 전하는 바이다.7)


    이 칼케톤 “신앙의 정의”에 반대한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시리아의 야곱파, 이집트의 콥틱 교회, 이디오피아 교회, 아르메니아 교회 등에 남아 있다.


 5) 제5차 공의회: (2차)콘스탄틴노플 공의회(553)

  

     세월이 지나는 동안 콘스탄틴 황제가 건축한 성 소피아성당은 불에 타서 소실되었으나, 기독교 신앙이 뜨거운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527-65)) 황제는 성 소피아성당을 불에 타지 않는 석조건축으로 재건했다. 그리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칼케돈 공의회가 유티케스의 단성론을 이단으로 정죄한 결정에 반대하는 자들을 파문했다. 그러나 곧 단성론자들이 많이 남아 있는 예루살렘이나 안디옥 지역의 교회들이 황제의 결정에 불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힘이 약해진 그의 제국의 장래에 위협이 될 수 있었다. 황제는 할 수 없이 파문된 자들 가운데서 가장 강경파인 3명의 안디옥 신학자들8)의 저술에 대해서만 정죄한다는 타협적 조치를 취했다. 그래서 이 사건은 이른바 “3장 논쟁(The Controversy of the Three Chapters)”이라 불린다. 그런데 이러한 황제의 조치에 대한 찬반논쟁은 제국을 더욱 시끄럽게 했다. 일이 엉뚱한 방향으로 비화되자 황제는 제5차 공의회를 소집했다. “3장 논쟁”의 근원적 문제인 단성론이 이단이라는 결정을 취소하기로 시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황제의 기대와는 반대로 오히려 칼케돈 신조를 재확인하고 우여곡절 끝에 단성론자들을 다시 정죄하고 말았다.

    이 회의에서 정죄된 이단자의 명단에는 동방교회의 교부 오리겐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것은 동방과 서방의 교리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이때부터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때 비질리우스(Vigilius) 교황도  교황의 단일 수위권 확보를 노리고, 정략적으로 유리하게 이용하기 위해 단성론을 지지하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틀어지자 교황은 황제에게 항의하였다. 그래서 “교황과 황제는 서로 불목하였으나 황제는 교황과 반목하는 것이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고 화해하려고 노력하였다. 교황은 마침내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3장”에 대한 이전의 우호적인 결정들을 철회하였다.9) 이러한 비질리우스 교황의 행동은 교회의 교리가 순수하게 성경의 해석에 바탕을 두는 결정이 아니라,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6) 제6차 공의회: (3차)콘스탄티노플 공의회(680-681)


     단성론자들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어느 순간에 하나의 본성으로 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주장은 이단으로 정죄된 아폴리나리스와 유티케스에다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단성론(Monophysitism)이 이단으로 정죄를 받으면서 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나 그리스도의 의지는 하나라고 보는 단일의지론이 등장했다.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세르기우스(Sergius of Constantinople, 610-38재직))가 살아 있을 때 주장한 이러한 단일의지론은 당시 로마교황 호노리우스(Honorius, 625-38 재위)의 지지를 받았다. 이 논쟁은 그들이 죽은 뒤에도 결말이 나지 않았다.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하여 콘스탄틴 4세 황제에 의하여 소집된 제6차 공의회는 단일의지론을 정죄하는 결론을 내렸다. 니케아 신조에 따라서 그리스도에게는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이 있음을 재확인하고, 의지 역시 신적 의지와 인적 의지로 나누는 것이 정통이라고 결정했던 것이다. 이 회의에서는 세르기우스와 그를 지지한 호노리우스 교황을 이단으로 정죄했다. 이 논쟁은 마침 논쟁의 진원지였던 시리아와 이집트가 아랍인들에게 정복됨으로써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결국 칼케돈 신조에 반대하는 단성설로 기울어져가던 동방교회는 지지세력이 사라지자 단성론을 포기하고 서방의 로마 교회와 화해하였다. 그러나 세르기우스와 함께 이단으로 정죄된 호노리우스 교황은 교황이 무오한 존재가 아니라는 반증의 예로 남고 말았다.

  

   7) 제7차 공의회: (2차)니케아 공의회(787)


   787년에 열린 이 회의에서는 성상(聖像) 숭배를 허용하느냐, 또는 금지하느냐 하는 논쟁을 처리하기 위해 이레네 여황제가 소집하였다. 성상은 초대교회부터 사용되어 오고 있었는데, 754년에 콘스탄틴 5세 황제는 성상 사용을 금지했었다. 서방교회는 이에 반대하였으며 동방교회는 의견이 분열되어 있었다. 이때 다마섹의 존(John of Damascus)은 성상의 사용을 주장하다가 정죄되었다. 이런 논란 가운데 제7차 공의회가 소집되었고, 성상에 대해 예배하는 것은 금지하나, 앙모하는 수준에서 사용하는 것은 허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개신교는 부분적으로 성상 사용을 허용한 제7차 공의회의 이 결정을 우상숭배를 금지하고 또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성경의 말씀에 따라 아예 인정하지 않는다. 

    7차 공의회까지는 이렇게 진행되었으며, 동방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가 서로 이의 없이 인정한다. 로마 가톨릭은 그 후에도 교황의 권위로서 자기들만의 회의를 열고 공의회라고 주장하나 동방교회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다.



2. 기타 회의와 신조들


    공의회가 열리지 않았던 기간에도, 비록 공의회만큼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만, 크고 작은 많은 회의들이 열렸다. 그리고 서방교회에서는 중요한 두 가지 신조가 있다. 하나는 “사도신조”이고, 다른 하나는 “아타나시우스신조”라고 불리는 것이다. 여기서는 교리의 발전에 관련하여 중요한 몇 개의 회의와 두 개의 신조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사도신조


    초기 로마교회의 예배에서는 보편적인 신앙의 규칙으로 12사도들이 직접 한 구절씩 만들었다는 라틴어 사도신조(The Apostles' Creed)가 사용되고 있었다. 사도신조는 서방교회에서 가장 오래된 신조이다. “본래는 세례를 받기 위한 사람들의 신앙교육과 또한 신자들의 신앙고백시에 사용하도록 되었던 것”10)이다. 사도신조는 4세기 말이나 5세기 초에 이르러서 현재의 형태로 만들어졌고, 서방교회의 신조로 채택되었다. 이것은 베드로가 만들었다는 설도 있으나 모두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존하는 최고의 신경”11)으로서 180년경 로마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서방교회에서는 로마신경(Symbolum Romanum)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신조는 내용에 있어서 간결하면서도 신약성경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잘 나타내고 있으므로 널리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루터는 “기독교 진리를 이보다 더 간결하고 명쾌하게 진술할 수 없다.”(LW 37, p. 360)12)고 했다. 루터와 칼뱅은 사도신조를 가톨릭교회 [미사 전례]에서 그대로 옮겨 [교리문답서]에 넣었다. 현재 여러 가지 한국어 번역본이 있고 성경에도 실려 있으나, 여기에서는 원본에 좀 더 충실하다고 보이는 번역을 인용하여 동방교회에서 사용하는 “신앙의 신조”와 비교해서 검토한다.


                          사 도 신 조13)


      1. 나는 믿습니다. 하나님,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을

      2. 또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자, 우리 주님을

      3.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4. 본디오 빌라도 때에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박히시고, 죽어 묻히셨고

         [지옥에 내리우셨다가]

      5. 사흘 후에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시웠고

      6. 하늘에 오르셨고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계시며

      7. 거기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8. 나는 믿습니다. 성령을

      9. 거룩한 보편 교회를 [성도의 교제를]

      10. 죄의 용서를    

      11. 육신의 부활을

      12. 영원한 생명을


    12개조로 구분한 것은 열두 사도가 한 구절씩 썼다는 설에서 비롯한다. 여기서 성령을 믿는다는 고백은 니케아 신조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표현이다. 동방교회에서는 사도신조가 “플로렌스 공의회 때(1439)까지도 알려지지 않았”14)으며, 이후에도 “사도신조”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사용된 적이 없다. 동방교회에서는 오직 “신앙의 신조(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경)”15)만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제 1 차 니케아, 제 2 차 콘스탄티노플 세계 공의회에서 제정되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신앙의 신조는는 형식면에서는 사도신조와 매우 비슷하다. 그러나 가톨릭교회 및 개신교의 사도신조에 들어 있는 [ ] 안의 내용이 동방교회의 “신앙의 신조”에는 들어 있지 않다. 이 “신앙의 신조”는 서방교회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내용과는 차이가 난다. 이것은 서방교회에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필리오크베”를 첨가하면서 부분적으로 내용의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사도신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동방교회에서는 그대로 “신앙의 신조”로 사용하고 있으나, 교회분열 이후에도 동방교회의 격렬한 반대를 의식한 서방교회가 본래의 사도신조(로마신경)로 되돌아간 때문이기도 하다.

                                

                       신앙의 신조(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경)


      1.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2. 그리고 또 오직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세대에 앞서 성부로부터 나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빛으로부터 나신 빛이시오, 참 하느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일체이시며 만물이 다 이 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음을 믿나이다.

       3.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 오셔서 성령으로 또 동정녀 마            리아께 혈육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심을 믿으며

       4. 본디오 빌라도 시대에 우리를 위하여 고통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묻히심을 믿으며.

       5. 성경 말씀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6.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7.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라 믿나니 그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            다.

       8. 그리고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니 성령은 성부께로부터 좇아나시며 성자와            더불어 같은 흠숭과 같은 영광을 받으시며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9. 하나인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나이다.

       10. 죄를 사하는 하나의 세례를 알고 믿나이다.

       11. 죽은 이들의 부활과 

       12. 후세의 영생을 굳게 믿고 기다리나이다. 아멘


  2)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신조

 

    사도신조처럼 이 신조도 사실상 저자가 명확하지 않다. 4세기에 살았던 알렉산더 대주교 아타나시우스를 이 신조의 저자라고 추측하는 이유는 그의 신학적 주장인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의 삼위가 동일본질이며 외형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삼위일체론을 처음으로 가장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신조의 내용은 사도신조와 니케아 신조보다 더 분명하게 삼위일체 신앙을 고백하고 있으며, 삼위 사이에 종속적 의미를 완전히 없앴다. 그래서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에 매우 가깝다. 이 신조는 서방교회 쪽에서 5-6세기의 어느 시점에서 어거스틴의 후계자들에 의해 작성되고 유포된 것으로 보이며, 사실 이 신조는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신학을 서방교회의 교리로 채택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게 되었다. 이 신조에서는 삼위일체(Trinitas), 위(Persona) 그리고 본질(Substantia)과 같은 라틴어 용어들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특히 여기서는 “필리오크베”교리가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 신조의 라틴어 원문은 외우기 쉽도록 가사 형식으로 되어 있다. 

    특히 기독론에서는 아폴리나리스, 네스토리우스와 유티케스 등의 이단적 주장들을 분명히 배척하고 있다. 아타나시우스 신조는 공교회에서 삼위일체와 성육신을 믿는 신앙을 반대하는 자는 영원히 멸망하고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선언으로 시작과 끝을 맺는다. 그리고 교회의 일치를 통해 하나의 교회가 되어야 할 모든 교회의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 신조는 서방교회의 전통을 따르는 개신교에서도 채택하고 있으므로 교리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신조이다.


                         아타나시우스 신조16)


      구원받으려는 이는 누구든지, 우선 그리스도교의 정통신앙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누구든지      이 신앙을 완전하고 순결하게 지키지 않으면 틀림없이 영원한 멸망을 받을 것입니다.

      이 정통 신앙이란 이런 것입니다. 곧 삼위로서 일체이시고, 일체 가운데 삼위이신 유일하신 하      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 삼위를 혼동하거나, 한 본질을 분리함이 없이, 성부의 한 위가 계시고, 성자의 다른 한 위가      계시고, 또 성령의 다른 한 위가 계십니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다 하나이시며, 그의 영      광도 같으며 그의 주권도 동일하게 영원하십니다.

      성부께서 계신 것 같이 성자도 그러하시며, 성령도 그러하십니다. 곧 성부께서 창조함 받지 아      니하신 것 같이 성자도 창조함 받지 않으셨으며 성령도 창조함 받지 않으셨습니다. 성부께서 이      해할 수 없는(무한하신) 분이신 것 같이 성자도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시고 성령도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성부께서 영원하신 것 같이 성자께서도 영원하시며, 성령도 영원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 영원한 분들이 아니시며 한 영원한 분이십니다.

      세 창조함 받지 않으신 분이나 세 이해할 수 없는 분이 아니시며, 한 창조함 받지 않으신 분이      시며 한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이와 같이 성부도 전능하시고 성자도 전능하시고 성령도 전      능하십니다.

      그러나 세 전능자가 아니라 한 전능자이십니다. 이와 같이 성부도 신이시며 성자도 신이시며       성령도 신이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 주가 아니라 한 주이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진리에 의하여 삼위의 각위가 주이시며 주이심을 인증 아니 할 수 없는 것      같이 세 신, 세 주가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통 종교에 의하여 금지되었습니다. 성부는 만들어      지지 않았으니 곧 창조함 받지도 않으시고 나지도 않으셨습니다. 성자는 성부에게서만 나시며, 만      들어지셨거나 창조되신 것이 아니고 나신 것입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생기셨으며 만들      어지셨거나 창조되셨거나 나신 것이 아니고 생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성부이시고 세 성부가 아니시며, 한 성자이시고 세 성자가 아니시며, 한 성령이시      고 세 성령이 아니십니다. 이 삼위에 있어서 어느 한 위가 다른 한 위의 전이나 후가 될 수 없으      며, 어느 한 위가 다른 한 위보다 크거나 작을 수도 없습니다. 삼위의 전부가 동일하게 영원하시      며 같이 동등하시므로 상술(上述)한 것과 같이 모든 것에 있어서 삼위로서의 일체와 일체로서의       삼위가 예배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으려는 이는 삼위일체에 관하여 이와 같이 믿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동     시에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정확히 믿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른 신앙이란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이시며 인간이신 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부의 본질에서 나신 신이시며 온 우주에 앞서 나셨으며 인간으로서는 성모 마리아의 본질로      부터 나셔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성 있는 영과 인간의 육신으로서 생존하시는 완전한 신이      시며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그의 신성으로는 성부와 동등하시며 그의 인성으로는 성부보다 낮은      것입니다. 신이시며 인간이실지라도 그는 둘이 아니시며 한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됨에 있어서는 그의 신이 성육신함으로써가 아니며 그의 신성을 인성 안에 받음으로써입니      다. 온전히 하나인데 본질의 혼동으로써가 아니며 삼위의 통일로써입니다. 이성 있는 영과 육신이      한 사람인 것 같이, 신이시며 인간이신 그도 한 그리스도입니이다. 그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고      난을 받으시고 음부에 내리신지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      신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      다. 그가 오실 때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몸으로써 부활 할 것이며 각자가 행한 행위의 연고를 자      세히 진술할 것입니다. 선을 행한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것이나 악을 행한 사람은 영원한      불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것이 곧 정통 신앙입니다. 이를 진실되고 굳게 믿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멘.


  3) 예루살렘 사도회의(49~50)


    사도행전 15:1-29에 기록된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교회의 문제에 공의회의 결정이라는 전통을 만들어준 최초의 공의회라고 볼 수 있다. 교회사에서 이 회의는 49~50년에 열린 것으로 본다. 이 회의가 열리기 전에 유대교에서 개종한 유대인 신자들, 즉 에비온주의(Ebionism)자들17)은 구약의 율법들을 그대로 준수하면서, 이방인 그리스도 교인들도 그렇게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주장은 예루살렘 밖의 초대교회에서 이방인 신자들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면서 큰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 논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도들과 장로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구약의 교리는 받아들여야 하지만, 율법의 규정은 부과하지 않는다고 결의하였다. 이 회의는 역사적으로 유대교와 구별되는 그리스도교의 정통적 모습을 만들었다. 왜냐하면 이 회의에서의 결정은 또한 구약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신약에만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말시온주의자(Marcionites or Marcionists)18)들을 이단으로 구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회의에서 사도들은 그때까지 엄격하게 랍비의 권한에 속해 있던 구약의 율법 해석권을 무너뜨렸다. 따라서 이 결정은 구약성경을 신약적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이 회의는 유일하신 하나님이 주신 신성불가침한 율법을 신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비추어 교회는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는 권리를 선언하고, 공의회의 권리와 전례를 만들어 놓았다. 이 회의의 결정은 신적 본체로서의 하나님 안에 삼위가 일체로서 존재하신다는 삼위일체적 유일신론,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삼위로서 함께 자리하실 수 있는 터를 제공하는 중요한 것이었다. 물론 이 당시에는 삼위일체적인 개념이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예루살렘 회의에서 구약의 율법을 재해석하는 이러한 결정이 없이 유일신 개념에 고착되어 있는 에비온주의 유대인들의 구약적 전통을 그대로 따랐다면, 삼위일체적인 하나님의 개념은 아예 발상조차 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이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기독교리와 유대교의 전통을 같이 지키려는 그들은 유대교의 핵심사상인 유일하신 하나님이 “인간일 수 있다는 사상에 분명히 반대 의사”19)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의 사상에는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에서 요체를 이루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결코 인정할 수가 없다. 그리고 별개의 신적 존재로서 성령 또한 인정할 수가 없다. 그들에게 성령은 하나님의 능력이 발현하는 현상 또는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종속적 존재일 뿐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을 사람들의 마음에 흘려 넣어줌으로써 직접 인간들을 도우신다. 사람들의 마음에 영을 흘려 넣어주는 방식은 기도에 대한 응답일 수도 있고, 신비스러운 교제일 수도 있고, 영혼의 정상적인 호흡일 수도 있다.”20) 구약에서 시편은 인간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라고 보았다(시 104: 30). 이러한 유대교의 교리는 기독교와 만나면서 영지주의21)나 신비주의22)로 흐르기도 했지만, 바울로 이어지는 정통 기독교는 이렇게 해서 하나님과 연합된 사람은 그분과 한 영이 된다고 본다(고전 6:17). 어거스틴은 성령을 삼위일체의 틀 안에서 성부와 성령을 묶어주는 사랑의 끈으로 파악했다고 진술된다.23) 이러한 이해는 루터에게도 반영되어 로마서 2: 15의 강의에서 “사랑은 성령을 통해 마음속에 주입된다”고 했다.  


  4) 오렌지 종교회의(529)


    어거스틴의 신학은 그가 죽은(430) 후에도 서방교회에서 많은 논쟁을 낳고 있었다. 특히 그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및 선택과 유기의 이중 예정론은 논쟁의 주된 관심이었다. 이에 반해 회심은 신의 은혜와 인간의 의지가 서로 협력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예정은 인간의 공로를 예지하시는 하나님의 예지에 있다고 하는 반(半)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논쟁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계속되었다. 특히 아를레스의 케사리우스(Caesarius of Arles, ?-542)는 어거스틴 신학의 대부분을 오렌지 종교회의에서 신앙고백으로 채택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교황 보나페이스 2세가 이 회의의 결정을 승인함으로써 어거스틴 신학은 서방교회 신앙의 규범이 되었다. 이때까지는 어거스틴 신학의 삼위일체론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으나, 채택된 25개조항의 신앙규범에는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확히 말해서, 오렌지 회의는 어거스틴주의에 대한 논쟁을 종식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논쟁의 소용돌이 속에 포함되었던 제반문제들은 계속해서 장기간에 걸친 토론을 이끌어 냈으며, 또한 이 문제들은 중세 신학자들의 마음속에 복합적인 공리공론을 낳게”24) 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에서 비롯한 “필리오크베”교리논쟁이었기 때문이다.


  5) 톨레도 회의(589)


    이후 60년이 지난 589년에 톨레도에서 열린 제 3차 종교회의에서는 성령은 성부로부터 그리고 성자로부터(Filioque∶and from the Son) 발출한다”는 뜻으로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필리오크베” 삽입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동방교회는 서방교회의 “Filoque” 삽입을 거절하였다. 동방교회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 나타난 대로 “성령은 성부로부터 발출한다”를 굳게 지켰다. 그래서 서방교회는 쌍방 발출설(또는 쌍발론)을, 동방교회는 단일 발출설(또는 단발론)을 주장하게 되었다. 서방교회가 일방적으로 ‘필리오크베’라는 단어를 니케아 신조의 라틴어 판에 넣겠다고 주장한 것이다. 에큐메니칼 공의회가 결정한 신조에 서방교회가 동방교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방적으로 어떤 문구를 첨가하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후대 교황들은 동방교회가 반대하는 “필리오크베” 문구신조에 추가 삽입하는 결정의 승인을 오랫동안 보류해왔다.


  6) 아켄 회의(809)


    809년 서방교회는 단독으로 열린 아켄(Aachen) 회의에서 “필리오크베”의 삽입을 정식으로 채택하였다. 물론 동방교회는 거부하였다. 교황 레오 3세는 고대교회의 신조를 변경하는 살레만 황제의 칙령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로마교회의 예전에서 실제로 사용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III. “필리오크베”교리논쟁이 교회의 분열에 미친 영향


    아켄 회의 이후에도 동방교회가 반대하는 상황이 계속되자 로마교황들은 “필리오크베” 교리의 승인을 보류하고 있었는데, 이 교리논쟁의 바탕을 살펴보면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필리오크베”교리논쟁은 양측의 주도권 다툼과 겹쳐 점점 격렬해지고 마침내 ‘포티우스 분열 사건(867)’이 일어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서방교회측이 일방적으로 채택을 해놓고서도 오랫동안 사용하지 못하고 있던 “필리오크베”교리는 마침내 1014년 로마교회 베네딕트 교황이 집전한 하인리히 2세의 대관식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그 뒤에 동방과 서방의 교회는1054년에 끝내 ‘대분열’하고 만다. 교회가 이렇게 동서로 분열한 이후에는 이슬람 제국의 서진(西進)에 따라 비잔틴 제국과 동방교회의 세력 약화가 뒤따랐다. 교회분열은 결국 비잔틴 제국과 동방교회의 몰락에 앞서 불길한 징조로 나타난 것이었다.


1.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에서 성령의 쌍발출설: “필리오크베”


    “필리오크베”교리논쟁은 성령에 관한 문제이다. 논쟁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있을 수 있으나, 가장 직접적인 것으로는 어거스틴의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필리오크베”논쟁을 촉발한 서방교회의 삼위일체 교리는 최종적으로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에 의하여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그의 삼위일체론에서 성령을 성부와 성자를 연결하는 사랑의 끈으로 파악25)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성부와 성령은 서로 사랑하고 있으므로 사랑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똑같이 발출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므로 이렇게 발출하는 사랑을 성령이라고 보아도 좋다고 했다. 쌍발출설은 이렇게 성립된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루터에게도 반영되어 로마서 2: 15의 강의에서 “사랑은 성령을 통해 마음속에 주입된다”고 했다. 성령은 기독교 신자들의 마음에 집어넣는 하나님님의 능력이다. 성령은 기독교 영성의 근원이다.

    어거스틴 이전에 카파도키아 교부 가운데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335?-95)는 “아버지의 특성을 ‘출생되지 않으신 자’, 아들의 특성을 ‘낳으신 자’, 성령의 특성을 ‘발출’로 규정함으로써 ‘한 본질 세 본체(one ousia and three hypostases)'의 뜻을 더욱 명확히 했다.26) 그레고리와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이 여기까지는 다르지 않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의 특징은 하나의 신적 본질(God)로부터 출발해서 삼위라는 관계적 구분으로 나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중요한 차이점은 성령의 ‘발출(proceeds)’이 “성부로부터”만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로부터(and from the Son= filioque )”라는 이중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는 이해에서 나타난다. 

    어거스틴에게는 성부도, 성자도, 성령도 완전한 신성을 가지며, 삼위의 어느 한 품격이라도 삼위일체 자체보다 작지 않으며, 성부도, 성자도, 성령도 완전한 하나님, 즉 삼위로서 일체이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상호 의존적이며, 삼위 사이는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으로 교제하는 것, 즉 상호침투(相互浸透)와 상호내주(內住)하는 사랑의 관계이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삼위일체 안에서 이 사랑의 끈(Vinculum caritas)을 성령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성부와 성자 사이에 서로 주고받는 것이므로 둘에게서 공통적으로 발출할 수 있다. 이것이 서방교회가 주장하는 “필리오크베”교리의 이론적 근거가 된 것이다. 그의 신앙 형식에서 삼위일체적 성령에 대한 진술을 보자.


      그러므로 성령은 무엇이라고 하든지 아버지와 아들에 공통된 어떤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       귐(communion) 자체는 본질 공존체적(consubstantial)이며, 영원 동등(co-eternal)하다. 그리고       이것을 교제(friendship)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면 그렇게 불러도 좋다. 그렇지만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그리고 성령도 또한 본질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본질이시고, 기록       된 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27)

   

    어거스틴은 삼위일체를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인간에게도 삼위일체의 자취가 있다면서 인간을 비유로 들어서 설명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과 그 대상 사이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사랑하는 이(amans)와, 받는 이(guod amatur), 그리고 사랑 그 자체 (amor) 사이의 관계를 암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에 상응하는 관계가 신격의 성부, 성자, 성령 안에서도 발견되기 마련이다.”28) 그렇다면 어거스틴이 말하는 성령은 사랑이다. 그리고 이러한 “셋의 성질(Threeness)"은 기억-지성- 의지와 같이 인간의 영적 삶의 전체 속에 다양한 형태로 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는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각각으로 보면 셋이지만 셋은 각자가 아니라 한 인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보면, 어거스틴의 셋은 하나의 부분으로 나타난다.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들과 객관적 성례론(Ex opere operato)에 관해 논쟁하면서 은총은 초자연적인 능력이고,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실제적 임재가 아니라, 성례를 통해 인간의 영혼 속에 주입되는 어떤 신적인 힘”29)으로 보고 있다.

    “필리오크베”의 교리적 이해는 공식적인 교리로 채택되기 이전에도 어거스틴의 저서를 통해 이미 서방교회 신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나갔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상황은 이를 접촉한 동방교회 신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당시의 정식 교리인 니케아 신조를 굳게 믿고 있는 동방교회측에서 보면, 이런 교리를 사용하는 서방교회는 당연히 이단적으로 보였다. 동방교회는 이러한 이단적 행위에 대해 서방교회를 비난했으며, 이렇게 해서 필리오크베 논쟁이 더욱 확대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서방교회에서 필리오크베를 공식적인 교리로서 채택하고자 하는 것은 서방교회기 오렌지 회의(529)에서 일방적으로 이미 채택한 어거스틴주의적인 신앙고백을 모든 교회의 교리에 정식으로 반영하려는 노력에 불과하다. 서방교회의 끈질긴 시도에도 불구하고 동방교회는 반발했다.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안 황제가 죽었을 때(565)를 틈타 이탈리아 반도에는 롬바르드족이 침입(568)했다. 이로 인한 혼란기에 로마교황이 된 대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 590-630재위)는 서방교회의 “필리오크베”교리 수립에 숨은 공로가 크다. 어거스틴은 대 그레고리에게 무오한 신학 스승이었으며, 그에 의해 어거스틴은 서방교회의 위대한 스승이 될 수 있었다. 신비주의의 경향을 가진 대 그레고리에게는 “학문적 어거스틴주의를 민간 신앙의 다양한 특징들과 혼합했다”30)는 평가가 따른다.   

    

      어거스틴이 상상하고 추론했던 문제들을 대 그레고리는 확정된 진리로 받아 들였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어거스틴은 죄중에서 사망한 자들을 위해 이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그 죄를 정화     시키기 위한 장소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제안했다. 그레고리는 이러한 추측을 기초로 하여 이러     한 장소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단정함으로써 그후 연옥의 교리가 발전될 계기를 마련했다.31)


    따라서 어거스틴의 신학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대 그레고리가 그의 생전에 어거스틴의 신비적 삼위일체론을 서방교회의 금과옥조로 만들었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몇 번의 좌절을 겪긴 했지만, 마침내 589년 톨레도 공의회에서 서방교회가 일방적으로 니케아 신조에 “필리오크베” 문구의 추가적 삽입을 결정한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때는 이미 대 그레고리가 병든 펠라기우스 2세에 이어 실제로 교황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을 때였다. 비록 동방교회의 반발을 의식해서 실질적인 시행은 미루었지만 “필리오크베”교리는 서방교회에서 이미 확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2. 교회 분열의 전조: “포티우스 분열” vs “니콜라스 분열”


    제7차 종교회의(787) 이후 공의회를 중단했던 동방과 서방교회는 867년에 이른바 ‘포티우스 분열(Schism of Photius)’ 사건의 발생으로 말미암아 실제적인 분열의 길로 들어섰다. 포티우스(Photius, 820-91)는 당시의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였다. 동방교회는 이 사건을 ‘니콜라스 분열’이라고 일컫는다. 동방교회는 당시 로마교황 니콜라스 1세(Nickolas I, 858-867)에게 분열의 책임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동방교회의 포티우스(Photios of Constantinople, 820?–93)는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단일 발출한다는 교리를 수호했다. 그는 [성령의 신비에 관해서: on the Mystagogy of the Holy Spirit]에서 성령의 단일 발출설을 옹호했다. “성서의 많은 구절에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기술된다. 그러나 이것이 성령이 아들로부터 발출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of를 from과 동일시한 어거스틴에 대한 반대였다.” 또 이어서 그는 “어거스틴이 필리오크베를 주장한 것은 이단논쟁 때문이었지. 필리오크베는 어거스틴의 신학에서도 본질적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필리오크베 신앙형식은 신조에서 제거되어야 한다.”고 썼다.32) 포티우스는 니케아 신조에 ‘필리오크베’를 삽입하면, 전통적 삼위일체론을 왜곡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포티우스의 이러한 시각은 정통신앙의 울타리 안에서 성부가 성자보다 우월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우선적인 것이라고 하는 오리겐주의의 전통이 배어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니케아 신경의 변화는 맨 처음 스페인에서 발생하여 그 후 프랑크 지방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샤를마뉴의 시대에 아켄(Aachen) 지방에 소재하는 왕립 예배당에서 낭송되었던 신경 속에는 '필리오케(Filioque)가 포함되어 있었다.”33) 그래서 “동방 정교회 신자들은 과연 누가 프랑크족에게 감히 위대한 회의의 신경을 변경시킬 권한을 주었느냐고 따졌다.” 불가리아지방에서도 동방교회 선교사들과 서방교회 선교사들이 같이 선교활동을 하면서 신학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서방교회는 니케아신조 원본에 없는 ‘그리고 아들로부터’의 의미를 가진 ‘필리오크베’라는 단어를 삽입하여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아버지로부터 발출하신다”는 본문을 “성령께서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출하신다”로 고쳐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방 선교사들은 이에 대해 서방 선교사들을 맹렬히 공박했다. 포티우스는 성령의 발출(procession)에 관하여 서방교회가 이중 발출을 뜻하는 ‘필리오크베’를 삽입한 것은 이단 행위이며, 삼위의 관계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 자체가 이단적인 발상이라고 공박했다. 모든 신적 생명은 성부로부터 발출되기 때문에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동시에 발출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성자나 성령은 성부로부터 생명을 받아들인 존재이지, 스스로 생명을 부여하는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성령이 성부만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로부터도 발출한다는 것은 삼위일체의 통일성을 파괴하는 발상이라고 보았다. 동방교회의 삼위일체는 성부가 성자를 낳았고, 성령은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해 발출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 니케아신조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사도회의의 전통을 따라 신앙 문제의 최종 권위를 주교들의 공의회에 둔 동방교회는 정통신앙의 상징인 니케아 신조를 아무도 함부로 손 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그것을 변조하는 것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천사라도 할 수 없다고 보았다.

    

3. 대분열(1054)


     양 교회의 완전한 결별은 교회사에서 대분열이라고 불리며, 이는 1054년에 발생했다. 사건의 발단은 불가리아의 대감독 오크리다의 레오(Leo of Ochrida)가 서방교회의 비기독교적 행태들을 비난하는 항의문을 발송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렇게 일어난 사건의 불씨는 서방교회의 로마교황 부루노―레오 9세(Leo IX, 1049-1054)와 동방교회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마이클 케룰라리우스(Michael Cerularius, 1043-l058)사이에 옮겨 붙었다. 동방교회의 편에 서있는 불가리아 레오에 이어 콘스탄티노플의 케룰라리우스도 서방교회의 교리적 오류를 지적하는 항의문을 서방교회의 주교와 사제와 수도사와 프랑스 국민들에게 보냈다. 이 항의문에는 서방교회가 성령께서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출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이단 교리이며, 사제들의 결혼금지를 규정하는 것은 자연법칙에 어긋날 뿐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불가리아의 레오와 콘스탄티노플의 케룰라리우스의 공개 항의문을 받은 레오 9세는 1048년 황제가 주는 교황직 제의를 거절하고 맨 발로 로마에 입성하여 로마 시민의 추대로 교황이 된 시토회 수도사였던 토울의 브루노(Bruno)였다. 그는 이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3명의 사절을 콘스탄티노플에 보냈는데, 이 사절 가운데는 로마 입성에 그와 동행하였던 수도사 출신의 추기경 훔베르트(Humbert)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서방교회의 교리적 이념에 충실했으며, 성직자의 독신주의를 열렬하게 지지했다. 그는 “성직매매자들에 대항하여(Against the Simoniacs)"라는 논문을 써서 황제의 손아귀에 있는 성직 임명권을 되찾아 교회의 독립성을 유지하는 개혁을 주장했다. 그는 동방교회가 성직자의 결혼을 허용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는 헬라어를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당시 헬라어 사용 지역인 콘스탄티노플에 파견되는 사절이 되었다. 이것은 교황 레오 9세의 중대한 실책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은 로마의 사절들을 냉대했다. 1054년 어느 날 하기아소피아 대성당에서 훔베르트 일행은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를 이단자로 정죄한다는 파문장(Anathema)을 낭독하고 제단 위에 올려놓았다. 파문장에는 케룰라리우스 대주교를 “아리우스주의자, 니콜라당, 마니교도와 같은 이단자로 규정하며, 악마와 그의 천사들과 함께 저주를 받을지어다. 아멘, 아멘, 아멘” 하고 씌어있었다. 이때 로마교황 레오 9세는 이탈리아 남부 내란에 직접 나섰다가 포로로 잡혀 있었으며, 이 일이 일어나기 며칠 전에 사망하고 말았다.

    동방교회는 이에 대항하여 4일 뒤 같은 장소에서 회의를 열고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이름으로 로마교황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이단 혐의로 파문을 선언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동방과 서방은 서로 이단이 되어 돌이킬 수 없는 결렬의 길로 가게 되었다.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동방교회가 반발하고 교회분열이라는 최악의 사건이 벌어지자 서방교회 교황들은 이 사건을 무마하기 위하여 필리오크베 표현이 들어있는 로마교회용 라틴어 니케아 신조의 사용을 중지하고, 고대 로마의 전통이었던 사도신조(Old Roman Creed)를 대신 사용하게 했다. 이것이 서방교회의 전통이 되어 개신교회에까지 내려오고 있다.



4. 분열 이후 기독교 영성의 변화: 이슬람의 발흥과 십자군 원정의 실패


     한편 기독교회에서 필리오크베 논쟁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 622년 아랍 지역에서는 마호메트에 의하여 이슬람교가 성립되었다. 이후 이슬람은 중동지방에서 급속하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인접 지역에서 발생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종교적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다. 두 종교의 충돌이 기독교 국가인 비잔틴 동로마제국에 위협이 된다는 것은 1071년에 만지커르트(Manzikert)에서 이슬람 제국 셀죽 터키에 패배함으로써 현실화되었다. 이 패배는 비잔틴 로마제국을 급속한 쇠퇴의 길로 내몰았다. 이 패배는 또한 콘스탄티노플에 자리한 동방교회도 교구와 신자들을 잃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기독교 국가인 로마제국의 동, 서 분열에 뒤이어 교회의 동, 서 분열은 결국 적에 대항할 방위력에도 분열을 가져왔고, 이러한 분열이 국가의 총체적 운명을 건 전쟁에서 치명적 패배로 귀결된 것이다. 이제 동로마제국도 동방교회도, 대부분의 관할지역을 잃고 콘스탄티노플 근처에서만 살아남았으나, 그것의 운명도 폭풍 앞에 선 촛불과 같은 것이었다. 좁은 보스포러스 해협을 가운데 두고 거대한 셀죽 터키제국의 이슬람 세력을 마주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영성도 이와 같은 심각한 위기상황에 직면하여 엄청난 변화를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동로마제국의 황제는 다급하게 당시 서방세계의 실권자 그레고리 7세(1073-1085재위) 로마교황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그는 동방교회를 돌아볼 생각이 없었다. 그레고리 7세는 ‘교황은 태양이고 황제는 달’이라고 비유하면서 절대적인 교황권을 추구했다. 그는 교황이 황제를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1075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헨리 4세에게 카놋사의 굴욕을 안겨준 인물이었다. 결국 끝을 모르고 치솟던 그의 세속적 권력욕은 헨리 4세의 반격을 받아 몰락하고 만다. 다음 교황 우르반 2세의 “데우스 불트(Deus vult, God wills it: 신이 원하신다)!”라는 호소를 듣고서야 2ㅇ만 대군이 모여들었고, 1096년에 십자군의 깃발 아래 동방을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이것은 당초 서방의 도움을 단지 용병의 형태로 요청했던 비잔틴 황제의 의도와는 다른 것이었다. 어쨌거나 이렇게 출발한 제1차 십자군 원정은 1099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하였고, 1100년에는 예루살렘에 라틴 왕국을 건설했다. 이 라틴왕국은 이집트의 술탄 살라딘(Saladin)에게 패배할 때까지 존속했다. 그 동안에 이슬람의 반격으로 에데사가 함락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2차 십자군 원정(1144)이 시작되었다. 이때도 20만 대군으로 시작된 원정이었으나, 병력 수에 비해 훈련부족으로 전투에서는 별 성과를 내지 못했다. 마침내 1187년 예루살렘 왕국이 이슬람에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서방 3국의 왕들34)은 부랴부랴 3차 십자군 원정대로 출정(1187)했으나, 왕들의 속셈이 각각 달랐으므로 중도에 돌아오고 말았다. 이에 따라 예루살렘 왕국은 다시 회복되지 못했다.

    제4차 십자군은 1202년에 시작되었다. 이들은 먼저 이집트의 살라딘 공격을 목표로 했으나, 콘스탄티노플에서 진격을 멈추고 도시를 점령했다. 마침 비잔틴 제국의 알렉시우스 왕자가 형제에게 왕위를 빼앗겼는데, 십자군들에게 자신의 왕위를 되찾아 주면 보상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1204년 십자군들은 정통왕조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1182년 콘스탄티노플에 폭동이 일어나서 많은 라틴계 상인들이 약탈을 당했던 보복으로 이 도시를 점령하자는 일부 라틴계의 주장 때문이었다. 십자군들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같은 기독교 사람들을 대규모로 학살했다. 서방교회는 비잔틴 기독교인들을 학살한 그 자리에 콘스탄티노플 라틴제국을 건설했다. 중섹 교회사에는 이때의 상황을 “동방사람들은 무장한 십자군이 1204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교회와 수도원을 포함하여 도시를 약탈하고, 1261년까지 지속한 라틴제국을 세웠을 때 공포에 떨었다.”35)고 씌어 있다. 처음에는 이러한 십자군의 몰상식한 처사에 분노하였던 로마교황 인노센트 3세도 결국 이를 교회의 연합을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받아들였다.36) 이로써 외형상으로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하나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56년이 지난 1261년, 이번에는 비잔틴 제국의 잔존 세력이 라틴왕국을 멸망시켰다. 서방의 라틴 왕조와 동방의 비잔틴 제국의 전쟁으로 기독교 세력은 분열되어 약화되었다. 동방교회는 십자군이 원정에서 점령한 영토와 교회를 옛 주인에게 돌려주려고 하지 않는 서방교회의 지배욕에 대해 깊은 적개심을 가졌다.

    이후 십자군 원정은 몇 번 더 시도되었고 8차 원정까지 갔으나 더 이상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한 채 1270년에 종료되었다. 그동안에 얻은 성과로는 교황 그레고리 9세로부터 파문당했던 황제 프레데릭 2세가 제6차 원정에서 이슬람 술탄과 예루살렘을 비롯한 몇 개의 성지로 통하는 도로를 양도한다는 협정을 맺은 것이 가장 컸다. 십자군 원정은 최종적으로는 비록 패배로 끝났지만, 8차례의 십자군 원정을 통해서 로마교황은 서방 세계에서 최고의 권위를 장악했다. 또 로마교황은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스페인을 탈환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 사건들이 로마교황의 권력을 신성불가침 수준으로 강화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것은 교회의 수위권뿐만 아니라 세속의 통치권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13세기 동안에 재직했던 로마교황들은 서방에서는 최고의 지상권을 누리고 있었다. 이것은 화체설을 제정한 당시 교황 인노센트 3세(1161-1216)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보다 위대한 존재는 마치 낮처럼 영혼들을 지배하고 보다 미약한 존재는 마치 밤처럼 육체들을 지배한다. 이들은 곧 교황의 권위와 왕실의 권력이다.”37)

    그러나 동방교회는 콘스탄티노플 직할 교구지역 일부만 남기고 모든 교구를 상실했다. 비잔틴 제국이 광대한 아시아의 영토를 잃고 이제 콘스탄티노플 도시 근처에만 남아 있게 된 결과였다. 결국 양쪽 교회의 분열 사건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은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투르크족이었다. 그들은 비잔틴 동로마제국을 정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시아의 기독교 세력을 유럽으로 몰아낸 이슬람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연합세력을 구축하고 힘을 기르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4세기에 들어서면서 막강했던 교황 보니페우스가 사망하자 로마 교황권은 몰락하고  있었다. 교황청의 바빌론 포로기라고 불리는 70년간(1309-1377)의 아비뇽 유수사건은 교황을 세속 왕권의 장식품 정도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교황의 임명권을 너도나도 서로 주장하다보니 두 명, 또는 세 명의 교황이 임명되어 동시에 재위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콘스탄스 회의(1418)에서 이 사건이 겨우 해결되는 무렵에 이슬람의 셀죽 터키는 콘스탄티노플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1422년에 셀죽 터키의 이슬람 군대는 이 도시를 포위하고 있던 중에 국내의 내란 때문에 스스로 철수한 바 있었다. 위기를 느낀 동방교회는 로마교황에게 무조건적인 구원을 요청하였다. 로마교황은 교회의 통일을 대가로 요구하였으며, 1439년 펠레라-플로렌스 회의를 통해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실질적인 군대를 가진 서방의 국왕들은 교황이 결정한 전쟁에 나서기를 꺼려했다. 이 합의는 이미 적국에 위치해 있는 다른 교구-예루살렘, 안디옥,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들에 의해서도 거부되었다. 러시아 정교회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고립무원에 빠진 비잔틴 황제 콘스탄틴 11세는 로마와의 국가통일에도 동의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서방의 도움을 받기에는 너무 늦었다. 결국 1453년 하기아소피아 대성당으로 상징되던 아름다운 콘스탄티노플은 이슬람교도들에 의하여 함락되었고, 도시는 3일 동안 무자비하게 약탈당했다. 이슬람 군대는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고, 이어서 유럽 대륙의 동남부 대부분을 점령했다.


V. 끝맺는 말

    

    돌이켜보면, 이슬람이 발생한 7세기부터 비잔틴 제국과 동방교회가 서방세계와 서방교회의 방파제 역할을 하지 않았으면, 서방의 국가들과 기독교 문명은 애당초 벌써 사라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교회분열을 통해 서방교회는 자신들을 지켜주던 성벽을 스스로 허물어버린 꼴이 되었다. 그러나 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을 살펴보자면, 양쪽 기독교 고위 지도자들의 교리에 대한 편협한 이해와 권력투쟁적인 논쟁과 사리사욕을 추구한 교회 성직자들의 부패 때문이었다. 비잔틴 제국도 동방교회와 같은 운명의 길을 걸었다고 본다. 여기서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논쟁의 문제만 살펴보았을 때, 논쟁이 불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진리를 찾고 진리를 따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리를 찾기 위한 논쟁에서는 먼저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언제나 분열을 일으키는 자는 진리를 도외시하고 자기편의 이익을 위해서만 주장한다. 기독교의 교리는 성경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기독교의 진정한 영성은 성경을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기독교의 모든 권위는 “오직 성경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 영성의 원리이다. 그러므로 현대에 있어서도 성경을 해석하는 신학자나 목회자는 오직 성경과 교부들의 전승에서 영성의 샘물을 길어 올려야 한다.

    그런데 현대인은 누구나 이성적으로 발전해온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 현대인의 일반적 지식수준에 맞추어 성경의 해석도 발전해야 한다. 필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이성과 인간의 노력으로 얻은 현대적 과학지식은 성경의 진리를 찾는데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어거스틴의 세계관을 주체로 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황권의 강화에만 몰두했던 서방 로마교회의 교리는 교회분열 이후 10세기나 지난 지금에도 별로 변한 것이 없고, 이를 개혁했다는 종교개혁의 실체는 오히려 어거스틴의 신학을 더욱 강화해놓은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을 기독교의 근거로 삼는다는 주장은 분명히 옳다. 그러나 현대에서 이미 오류로 밝혀진 기독교의 해석적 규범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신학적 논쟁에서 사악한 이단적 의도가 있지 않다면, 우리는 과거의 인습적 패러다임에 매어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다시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정신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현대인의 일반적 지식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성경을 현대인의 수준에 맞게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경은 텍스트로서만이 아니라, 콘텍스트적인 이해의 대상으로서 해석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진정한 진리의 샘을 찾을 수 있다. 또한 기독교 영성은 이곳에서 솟아나는 것이어야 한다. 포괄적 텍스트인 성경에서 과학적이고 지성적으로 일치된 해석이 왜 나올 수 없단 말인가? 이 소논문에서 교회의 분열을 초래한 논쟁들을 살펴본 필자는 이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



참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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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inberg, Milton. Basic Judaism, 최명덕 역, 『유대교의 기본진리』. 서울; 한글. 2004.












후 기


    필자가 고대 동방교회의 성지였던 콘스탄티노플의 흔적을 찾아 2009년 여름 터키 이스탄불을 방문했을 때, 아름답고 웅장함을 자랑했던 소피아 성당은 이제 이슬람 사원이 되어 있었고, 콘스탄틴 황실의 토카프 궁전은 그들이 남긴 보석 박물관이 되어 있었다. 옛 도시 콘스탄티노플의 동방교회 유적은 거의 부서졌고 남은 것은 대부분 이슬람 교회인 모스크로 바뀌어 있었다. 성 소피아 성당에서 위용을 자랑했던 동방교회 본부는 구석진 곳의 조그만 건물 하나에 초라하게 남아 세계 정교회 본부라는 이름만 달랑 걸어놓고 있는 형편이었다. 번성했던 비잔틴제국 시대의 유적으로 남아 있는 석조 건축물들은 이스탄불 관광청이 여기저기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터키정부가 세계 각지로부터 몰려오는 관광객들과 기독교 성지 순례자들로부터 적지 않은 관광수입을 얻기 위해서 관광사업을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터키는 이슬람을 국교로 하면서도 명목상으로는 헌법에 종교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다. 국민의 95% 이상이 이슬람 신자이고, 이슬람 성직자인 이맘은 국가로부터 생활급여를 받고 있다고 한다. 다행하게도 세속주의 정책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근본주의 이슬람 국가들보다 덜 배타적이긴 하다. 그렇지만 이제 터키에서 초기 기독교의 자취는 관광용으로만 볼 수 있었다.



1) Sinclair B. Ferguson, & David F. Wright, eds., IVP New Dictionary og Theology, 이길상 외 역, 『아가페 신학사전』 (서울; 아가페, 2001), 747. (참조: “영성” 항목,) “기독교 영성은 거룩하신 하나님, 즉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그리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스스로를 계시하시는 하나님과 인간의 전인(全人)의 관계를 수반한다.... 기독교 영성의 표준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과 그분의 성품에 부합한 마음을 품고 사는데 있다(고전 12:3). 기독교 영성의 보증은 성령께서 신자 안에 거하시면서 그에게 능력을 베푸시고, 그로써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부합하게 살도록 하시는데 있다.”


2) “"올바른 믿음", "올바른 가르침" 이라는 의미를 지닌 정교회는 성서와 성전(Sacred Tradition)을 근원으로 사도들로부터 계승되고, 일곱번의 세계 공의회(Ecumenical Holy Synod)를 통해 확립된 교회 규범(Canon)으로 순수한 교회의 정통성을 지키고 보존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단절 없이 지금까지 지켜 오고 있습니다.” “한국정교회 신앙”  http://www.orthodox.or.kr/html/include.php?inc=hin_02_09 , (조회일자: 2010. 5. 1).


3) “니체아 공의회-제1차 니체아 공의회”, 『가톨릭 대사전』http://info.catholic.or.kr , (조회일자: 2010. 5. 4).


4)김재성, “니케아신조와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의 비교--역사적 배경을 근거로 하여” 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6&dirId=60901&docId=201526&qb=64uI7LyA7JWEIOyLoOqyvQ==&enc=utf8§ion=kin&rank=8&sort=0&spq=0 , (조회일자: 2010. 5. 13).


5)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 329-389),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332-395), 카이사라의 바실리우스(Basil of Caesarea 330-379)


5) 지원용 편역,『신앙고백서-루터교 신앙고백집』 (서울; 컨콜디아, 1999), 14-15.


6) 뒤에 전문을 수록하였음. 참조 p. 9-10.


7) Justo L. Gonzallez, The Story of Christianity, 서영일 역, 『중세교회사』 (서울; 은성, 1995), 56-57.


8)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르(Theodore of Mopsuestia), 키루스의 테오도레트 (Theodoret of Cyrus), 에데싸의 입바스 (Ibas of Edessa).


9)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dic_view.asp?ctxtIdNum=3636, 『가톨릭 대백과사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조회: 2010, 5, 5).


10) 지원용 편역, 『신앙고백서-루터교 신앙고백집』, 13.


11) Joseph H. Lynch, The Medieval Church, A brief history, 심창섭, 채천석 역,『중세 교회사』 (서울; 솔로몬, 2007), 24. 가톨릭 미사 전례에서는 사도신경이라고 한다. 이는 루터와 칼뱅의 『교리문답서』를 통해 개신교에도 들어오게 되었다. 고대 로마신경(Old Roman Creed)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동방교회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다.


12) IVP New Dictionary og Theology, eds., Sinclair B. Ferguson, & David F. Wright, 이길상 외 역, 『아가페 신학사전』 (서울; 아가페, 2001), 627.


13) Alister McGrath, Historical Theology, 소기천 외 역, 『신학의 역사-교부시대에서 현대까지 기독교 사상의 흐름』 (서울; 지와 사랑, 2005), 60.에서 인용


14) 지원용, 『신앙고백서』, 13.


15) http://www.orthodox.or.kr/html/bbs.php?table=hin_02_05&query=view&uid=71&p=1, 한국정교회, 대교구 공식 홈페이지, “교리문답”, (조회일자: 2010. 5. 24)


16) 지원용 편역, 『신앙고백서-루터교 신앙고백집』, 16-17.


17) 유대교에서 개종한 초기 유대 그리스도인들(Jewish Christians)은 스스로를 구분하여 에비온(히브리어:가난하다)이라고 부르면서, 유대교의 전통과 율법을 고수했다. 율법준수에 부정적 입장을 취하는 이방인 전도자 바울을 적대시 하였다.


18) 말시온이 창시한 이단종파로서 A.D. 144년 로마교회로부터 파문당함.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구별하면서 구약을 부정하였다. 바울만이 예수를 제대로 대변하고 있다고 보며, 신약 중에서 누가복음과 바울의 10 서신만 정경으로 인정하였다.


19)  Milton Steinberg, Basic Judaism, 최명덕 역, 유대교의 기본진리(서울; 한글, 2004), 64-65.


20) 『유대교의 기본진리』, 68-69.


21) 영지주의(靈知主意: Gnosticism)는 비밀스런 앎이나 깨달음, 또는 지식을 추구하는 초기 기독교의 이단적 종교사상을 일컫는다. 영지주의자들은 육체는 악하므로 성육신한 예수는 인간이 아니라는 가현설을 주장하였다. 교육이나 경험적 관찰이 아닌 신적 계시를 강조하고, 구원이란 예수와 같은 빛의 사자에 의해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22) 신비주의는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되고 있는데, 기독교적 의미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 즉 하나님과의 합일을 뜻하며, 그런 체험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23) 정승훈, 『종교개혁과 칼빈의 영성』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14.


24) Bengt Hagglund, History of Theology, 박희석 역, 『신학사』 (서울; 성광문화사, 1997, 4판), 201.


25) 정승훈, 『종교개혁과 칼빈의 영성』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14.


26) 정승훈, 『종교개혁과 칼빈의 영성』, 44.


27) Gonzallez,『기독교 사상사(1)-고대편』, 정승훈, 『종교개혁과 칼빈의 영성』, 61에서 재인용.


28) 헤그룬트, 『신학사』, 118.


29) 정승훈,『종교개혁과 칼빈의 영성』, 14.


30) 이길상 외 역, 『아가페 신학사전』, “대, 그레고리”항목 참조.


31) Gonzallez,『중세교회사』, 39.


32) 정승훈, 『종교개혁과 칼빈의 영성』, 60에서 인용. 


33) Gonzallez, 『중세교회사』, 71.


34) 프레드리히 바바로사 (Frederick Barbarossa)황제, 영국의 사자 왕 리차드(Richard, the Lionhearted of England), 프랑스의 필립 2세(Philip II Augustus).


35) Joseph H. Lynch, The Medieval Church, 심창섭, 채천석 역, 『중세교회사』 (서울; 솔로몬, 2007), 283.


36) Gonzallez, 『중세교회사』, 123.


37) Gonzallez, 『중세교회사』, 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