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연구/기독교 역사 이야기

신민회 망명자들의 분열

heojohn 2020. 3. 11. 22:33

 

 

신민회 발기인들을 중심으로 망명의 진행과 망명자들의 활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1차 망명자들:

 

안창호, 이갑, 유동열 등은 중국 청도에 도착하여 청도회의를 열었다. 여기에서는 독립운동 기지건설을 논의하던 중에 유동열 등이 이종호가 가지고 있는 약 3,000달러의 자금으로 청도에서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자는 안을 제안하여 다수가 찬성하는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당시 청도를 조차지로 관리하고 있던 독일 총독의 불허로 이 제안은 폐기되었다. 결국 당초 계획대로 중러의 접경지역인 밀산(密山)에 토지를 사서 신한민촌을 만들고, 그곳에서 무관학교를 세우는 한편, 농업경영을 병행하면서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각자의 역할을 정한 다음에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세부계획을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9월초에 이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 갔을 때, 한일합병조약이 조인되어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완전히 병탄(倂呑)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국내에서는 829일 발표). 이 바람에 여기서 열린 회의에서는 나라가 망한 마당에 당장 독립군을 조직하여 국내로 진공해야한다는 유동열 등 급진파의 주장과 당초 계획대로 시간이 걸리더라도 독립군 기지로서의 신한민촌과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하면서 때를 기다리자는 안창호, 이갑 등의 점진파의 주장이 맞붙었다. 이때 자금을 가진 이종호가 유동열의 급진파의 안을 지지했으므로 급진파의 의견대로 당장 독립군 조직에 나서기로 했다. 그러나 독립군 조직을 위해 만주를 거쳐 연대(煙台)로 갔던 급진파 유동열 등이 곧 체포되는 바람에 제1차 망명자들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이갑은 안창호와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갔다가 헤어져 러시아 일대를 둘러보며 정세를 살펴보기로 했다. 안창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런던-뉴욕-로스앤젤레스를 거쳐 그의 망명지역인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했다. 안창호는 이후 미국에서 한인들을 대표하는 기구로 공식 인정받은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회장으로 취임해서 업무를 시작했다. 1913년에는 청년들을 위한 흥사단도 조직했다. 흥사단은 국내외 한인 청년들이 무실역행(務實力行)하여 우리 민족의 전도(前道)에 대업의 기초를 준비하도록 고취하자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흥사단은 정치운동을 초월하고 기본적인 민족부흥운동으로 발전할 것 등을 행동강령으로 채택했다. 안창호는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상해로 갈 때까지 가족들과 미국에서 생활하며 미국에서 한인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단체로서의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 조직 확대에 진력했다.

이갑은 안창호와 헤어질 무렵에 손가락에서부터 근육마비 증세가 발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럼에도 이갑은 치타에 가서 정교보(正敎報)를 발행하면서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과 계몽활동을 시작했다. 일제의 첩보서에 의하면, 이갑은 1916년 만주의 밀산(密山) 봉밀산자(蜂蜜山子)에서 밀산무관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근육마비 증세가 점점 온 몸으로 번지면서 활동을 할 수가 없게 되었고, 이 소식을 듣게 된 안창호는 이갑이 미국에서 치료를 받게 하기 위하여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주필로 초청했다. 이갑은 미국에 도착했으나 입국허가를 받지 못했다. 이갑은 다시 치타로 돌아가서 미국 대한인국민회 원동지방회(遠東地方會) 회장을 맡았다. 안창호가 부인이 저축한 500달러를 치료비로 보냈으나, 이갑은 회복되지 못하고 1917년 중국의 목릉현(穆陵縣)에서 멀지 않은 시베리아 지역 니콜리스크에서 별세했다.

 

유동열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안창호, 이갑 등의 의견을 물리치고 만주로 내려가서 독립군 모집에 나섰다. 그러나 연태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유동열은 이 사건의 혐의에서는 곧 풀려났으나, 국내에서 자금을 모으려고 체류하던 중에 19119월에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다시 체포되었다. 그는 ‘105인 사건’ 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으나, 19133월 항소심 판결에서 무죄 방면되었다. 신민회의 1차 망명계획을 실패하게 만들었던 유동열은 석방되자 곧 비밀리에 자신의 두 번째 망명에 성공하여 북경으로 갔다.

 

 (2) 서간도 망명자들:

 

이동녕과 이회영 5형제 등이 신민회의 서간도 망명계획에 따라 신영토로 선택한 곳은 봉천성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추가가(鄒家街)라는 곳이었다. 이동녕은 처음에 그의 책임지역인 연해주로 가지 않고 가족들까지 데려와서 이곳에 눌러 앉았다. 이동녕과 서간도 망명자들은 농업경영을 하는 경학사(耕學社: 사장 이철영, 재무 이동녕)와 독립군을 양성하는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교장 이동녕)를 세워 한민족 독립운동기지로 삼고자 했다. 여기서 쓰인 신흥’(新興)이라는 말에는 신민회가 추구하는 신국민과 신국의 흥()함을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 깃들어 있다. 어쨌든 이곳은 땅이 너무 척박하고 겨울에는 너무 혹한이었다. 또 마침 흉년이 들어 경학사의 농업경영은 실패하고 말았다. 더욱이 수토(水土)병이 유행하여 인명 피해도 많이 생겼다. 따라서 신흥강습소의 운영도 어려워졌다. 일이 이렇게 되자 이회영 등은 1913년에 따로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에 땅을 매입하고 옮겨갔다. 그러나 이곳에서 교회를 설립하고 기독교를 전도했던 이동녕은 합니하에 가지 않고, 가족을 국내로 보낸 뒤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넘어갔다.

 

이동녕은 당초 그의 책임지역인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에 갔다 돌아온 이상설과 합류했다. 대종교 신도인 이상설은 이곳에서 권업회를 조직했다. 이동녕은 여기서 기독교를 버리고, 이상설을 따라 대종교에 입교했다. 이동녕은 이상설의 대한광복군정부 조직에도 참여했다. 이동녕은 1914년 이곳에서 무관학교 설립을 추진하다가 러시아 당국에 체포되어 3개월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 이동녕은 해조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다. 이동녕은 이상설이 대한광복군정부 정도령 자리를 이동휘에게 넘기고 상해로 가서 유동열 등과 조직한 신한혁명당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신한혁명당은 고종황제를 당수로 추대하여 북경에 본부를 두고, 고종황제의 위임장을 받아 중국정부와 군사동맹조약을 체결하고자 했으나 성사되지 못하자 해산되었다. 이동녕은 러시아 공산당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동휘와 유동열의 한인사회당 창립을 강력히 반대했다. 이동녕은 1918년 말경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이동휘, 유동열 등과 함께 독립운동가 39명이 서명한 무오독립선언서에는 공동으로 참여하였다. 이동녕은 이 무렵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건너온 여운형으로부터 당시 미국 대통령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설명을 듣고, 세계정세에 대한 전망과 독립운동의 방향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19192월 이동녕은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열린 대한국민의회에 참석하여 임시정부 행정수도를 러시아 또는 간도에 두자는 주장에 반대하고, 상해가 적지라고 주장했다. 그는 곧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수립을 준비했다.

 

한편 합니하로 옮겨간 서간도 망명자들은 추가가의 경학사를 부민단으로,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로 체제를 바꿔서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이주민들이 계속 늘어나면서 합니하에 세운 신한민촌은 거대한 마을을 이루었다. 신흥무관학교는 19193.1운동 직후에는 넘쳐나는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유하현 고산자(孤山子) 하동대두자(河東大逗子)로 옮겼다. 신흥무관학교는 계속 발전하여 1917년에는 통화현(通化縣) 8(8) 팔리초(八里哨) 오관하(五菅下) 소백차(小白岔)란 곳에 분교를 세우고, 신흥무관학교 백서농장 분교라고 불렀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후에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 등의 무장 독립군을 조직하는 데 주도 세력이 되었고, 이후에도 항일 독립군의 주력이 되었다.

 

 (3) 북간도 망명자들:

 

이동휘는 인천 무의도에 구금되어 있다가 19129월에 풀려났다. 그는 19132월 북간도에 있는 연길현(延吉縣) 국자가(局子街)로 망명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독립운동과 전도를 위해 북간도지역에 계속 드나들고 있었다. 그는 1913년 말경에는 목릉에서 병중에 있는 이갑과 유동열을 만나 이갑이 맡고 있던 중노령(中露領)의 신민회 총괄대표를 이동녕에게 대리케 하는 결정에 참여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일제의 추적을 받게 되자, 9월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으로 넘어가서 권업회와 대한광복군정부에도 참여했다. 이 단체들은 모두 이동휘와 같은 함경도 지역 출신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이종호의 지원으로 이상설이 사퇴한 최고사령관(正都領)을 이동휘가 계승하게 되었다. 이동휘는 당시 러일전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소문에 편승하여 곧바로 독립전쟁에 뛰어들 급진적 계획을 세우고, 대한광복군정부를 개편했다. 이것이 이동녕, 이갑, 그리고 미국에 있는 안창호 등의 신민회의 정통인 점진파와 독립운동의 방법론에서 분열되는 갈림길이 되었다. 그러나 1914년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은 이동휘 등의 급진파의 예상과는 달리 러시아와 같은 편에 서게 되었다. 일본은 동맹국이 된 러시아의 지방정부에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추방을 요청하였고, 러시아 당국의 추방령에 따라 이동휘는 만주로 귀환했다. 이 기회에 이동휘는 북간도 왕청현(汪清县) 나자구(羅子溝) 한인촌에서 무관학교를 설립했다.

 

1915년 중국과 21개조 중일조약을 체결한 일본은 중국에 한인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제지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1916년에는 러일조약이 체결되었다. 여기에는 각각 한민족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금지한다는 조항이 들어있었다. 일본의 요청에 따라 러시아 정부는 전국적으로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금지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당시 러시아가 관할하고 있던 동중철도를 한인들이 파괴하려 한다는 일제의 조작된 정보가 큰 몫을 했다. 이로 인하여 중국과 러시아 양국에서 독립운동은 위기를 맞아 잠복하게 되었다. 이동휘가 세운 나자구무관학교도 폐쇄되었다. 이에 따라 이동휘는 가족을 데리고 러중 국경지역 오지인 왕청현 나자구 하마탕(蛤蟆塘)으로 이주하였다. 이동휘는 이곳에서 학교설립과 기독교 전도활동을 계속하던 중에 집에 들렀다가 일제의 기습을 간신히 피하기도 했다. 그가 이때 얻은 상처를 치료하고 활동을 재개하자, 가족들은 목릉현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19172월에 러시아 2월 혁명이 일어나자, 블라디보스토크에 갔던 이동휘는 기독교연합전도회에 참석했다가 다음날 독일 정탐꾼으로 체포되어 하바롭스크 군옥으로 이감되었다. 10월 혁명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성공하자 한인 2세인 김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가 하바롭스크에서 볼셰비키당 시당비서로 파견되었다. 한인 볼셰비키당을 조직하려는 김알렉산드라의 노력으로 이동휘는 12월에 석방될 수 있었다. 이동휘는 석방되자 곧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서 한인신보주필로 취임하러 온 양기탁을 환영식장에서 만나고, 목릉현 팔면둔(八面屯) 자택으로 넘어갔다. 이곳에서 이갑과 유동열을 만나 신민회 재건을 논의했다. 이갑은 이후 곧 서거했다.

 

이동휘는 19183월에 같은 급진파 유동열을 대동하고 하바롭스크로 다시 갔다. 이동휘는 볼셰비키당 하바롭스크시 당비서인 김알렉산드라의 후원으로 볼셰비키즘 노선을 따라 한인사회당을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유동열은 군사부장 겸 군사학교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 회의에 참석했던 이동녕 등은 이동휘가 제안한 볼셰비키파와 동맹하는 방식으로 추진하는 독립운동을 적극 반대했고, 양기탁은 중도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를 계기로 이동휘는 신민회와 결별했다. 동시에 열렬했던 기독교 신앙도 버렸다.

 

(4) 양기탁의 망명 활동:

 

양기탁이 국내에서 4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1915년 출감했을 때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있었다. 전시체제인 일제의 감시 속에서 국내 활동에 한계를 느낀 그는 11월에 북경으로 탈출했다. 중국 사정을 살펴본 그는 곧 옛 신민회 동지들과 이주민들이 많이 모여 있는 만주지역 봉천성 유하현 고산자(孤山子) 신흥무관하교 백서농원 분교 근처에 자리를 잡고 가족을 불러들였다. 그는 과거의 명망에 힘입어 곧 만주지역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구심점으로 자리 잡았다. 양기탁은 대한광복회 지부 설립을 위해 만주에 온 박상진(朴尚鎮) 총사령을 만나 의열(義烈)투쟁에 협력하기로 하는 등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누구와 어떤 일에든지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대한광복회는 국내에서 일제와 친일인사들을 처단하거나, 양기탁 명의로 경고문을 보내거나,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한편 양기탁은 안창호 등과 연락하면서 각기 활동하고 있는 독립운동 단체들을 규합하는 통일세력으로 각 지역에 신민회 총감부를 설치하고, 중앙 총감부까지 설치할 계획을 밝혔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이제 그의 뜻대로 쉽게 될 일이 아니었다. 그 무렵에 신민회와는 별도로 그와 같은 주장을 하는 [대동단결선언](1917.7.)이 발표되었다.

 

191712월에 한인신보주필로 일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간 양기탁은 19183월에 열린 한인정치망명자대회에서 볼셰비키주의로 고려혁명을 촉진시키자는 이동휘의 주장에 찬동했다. 5월에 그는 이동휘가 주도하는 한인사회당 결성식에 참석했으나, 당 직책을 맡는 것은 거부했다. 다만 그는 만주에서 선발한 독립군들을 한인사회당 군사부장 겸 군사학교장 유동열에게 보내서 교육을 받게 하는 것에는 동의했다. 그것은 그가 한민족 독립운동에 볼셰비키의 무력투쟁 방법만을 적용하기로 동의했다는 의미였다. 양기탁은 신흥무관학교 백서농원 분교 학생들 50여 명을 유동열에게 보내 훈련을 받도록 했다. 그러나 이때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이 내란에 휩싸이면서 적위대에 동원된 대다수 학생들이 희생되는 참변을 겪었다. 이후 그는 곧 북간도 동녕현에 있는 소수분(小愁芬) 팔리평(八里坪)으로 옮겼다. 이곳은 목릉현(穆陵縣) 과 멀지 않다. 이곳에서 그는 한인 이주자들의 생계를 돕기 위하여 동성한족생계회(東省韓族生計會)를 조직했다.

 

양기탁이 망명했을 때 중국의 정세는 손문(孫文)1917년 광동군정부 대원수로 취임하여 형식적으로는 중국의 군통수권자가 되어 있었다. 손문은 신해혁명에 성공했으나 원세개(袁世凱)에게 속아서 정권을 내주고 일본에 망명했었다. 원세개가 죽자 손문이 정권을 다시 찾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군정부의 실체는 서남지방 군벌세력들의 연합체적 성격을 가진 조직이었고, 북쪽의 군벌들은 그에게 반기를 들고 있었다. 양기탁은 이러한 군벌 가운데 독립국 건설을 꿈꾸던 주사형(朱士衡)과 알게 되었다. 그는 주사형과 협력하면서 만주에서 동성한족생계회를 기반으로 고려국건립계획을 추진했다. 그는 이 계획을 추진하던 중 191812월 천진에서 일경에 의해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그 바람에 그는 1919년을 대부분 유배지 전남 고금도에서 보내고, 12월에야 석방되었다. 따라서 3.1독립만세사건과 임시정부 수립은 그와 무관한 일이 되었다.

 

 (5) 유동열의 망명 활동:

 

유동열은 자신의 제2차 망명지인 북경에서 머물다가 1915년에 신한혁명당 창당에 참여하기 위하여 상해로 갔다. 이상설이 주도하여 설립한 신한혁명당의 계획은 중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한중동맹군으로 일제를 몰아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수로 모셔오려던 광무황제가 예상치 못하게 급서하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한동안 유동열은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면서 독립운동단체를 순방했던 것으로 보인다. 19181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발표되자, 이동휘, 이동영 등과 함께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이동휘의 한인사회당 조직에 참여하여 군사부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직후 러시아 혁명의 와중에서 벌어진 내전이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번졌다. 유동열은 양기탁이 교육생으로 보내준 백서학교 학생들이 포함된 한인적위군을 지휘하였다. 적위군은 궤멸되었으나, 유동열은 도주하던 중 체포의 위기 순간에 중국인 노동자로 행세하여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다음 해에 볼셰비키파가 승리함으로써 유동열은 다시 돌아왔다. 유동열은 김규면의 신민단과 합동한 한인사회당에는 참여하지 않고, 국무총리로 취임하는 이동휘를 따라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하기로 했다.

 

(6) 망명지에서 일어난 분열

 

신민회는 19103월 긴급전략회의에서 목적 달성의 최고 전략으로 독립전쟁론을 채택하였다, [대한신민회취지서]에 나타난 신정신을 환성하야 신단체를 조직한 후 신국을 건설하려는 실천적 방법이 독립전쟁론으로 바뀐 것이다. 이것은 신민회 간부들이 당시 대한제국의 망국이 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판단했고, 따라서 신국을 건설하는 일이 일제와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후에야 가능하다는 현실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이후에 신민회 발기인들에게 닥친 일제의 탄압과 망명지에서의 현실 속에서 독립전쟁론은 각자에게 다른 의미를 가진 것이 되었다. 그 결과는 신민회의 분열로 나타나면서 이후 항일 독립운동과 해방 이후에도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상해임시정부 수립 이전까지 망명지에서 일어난 분열의 과정과 이유를 살펴보면, 개괄적으로 4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단계의 분열은 1차 망명자 그룹의 청도회의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안창호와 이갑 등은 신민회의 당초 독립전쟁론의 전략대로 토지를 매입해서 신한민촌과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들은 점진파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유동열 등은 당장 청도에서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자는 안을 주장했다(이들은 급진파로 불리게 되었다). 청도회의에서 처음에는 급진파의 안이 채택되었으나, 현실적인 제약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한 회의에서도 점진파의 주장이 부결되고 당장 독립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급진파의 안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독립군을 모집하러 나섰던 유동열 등이 곧바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됨으로써 결국 좌절되었다. 1차 망명그룹에서 급진파의 성급한 행동주의는 자금만 탕진했고, 안창호와 이갑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남으로써 분열로 끝나고 말았다. 이로써 제1차 망명그룹의 모든 계획은 실패했다. 시베리아에서 활동하던 이갑은 몇 년 뒤에 별세했고, 안창호는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상해임시정부로 복귀해서는 실력양성론을 주장했다.

 

둘째 단계의 분열은 이동녕이 이회영 형제들과 망명하여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 세운 첫 신한민촌에서 일어났다. 이동녕이 이회영 형제들과 같이 세운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는 흉년과 괴질이 덮치면서 운영이 어려워졌다. 이회영 형제 일부가 인근 합니하에 땅을 매입하고 새로운 신한민촌을 개척하여 옮겨가자, 이동녕은 가족을 국내로 돌려보내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넘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이상설과 합류하여 대종교인으로 개종하고 말았다. 이후 이동녕은 이상설과 함께 신민회와 유사한 전략을 가진 대종교의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므로 이동녕은 이후에도 방법적인 면에서는 신민회와 공동보조를 취할 수 있었다. 이 무렵에 국내에서 병상목회를 하던 전덕기 목사가 별세했다.

셋째 단계는 이동휘에 의한 분열이었다. 이동휘는 하바롭스크 군옥에서 남모르게 그를 구해준 하바롭스크시 볼셰비키당위원장 김알렉산드라의 후원으로 한인사회당을 조직하고 당위원장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신민회와 기독교를 완전히 버리고 볼셰비키즘으로 기울었다. 이때 유동열도 합류했다. 양기탁은 당 창립대회에는 참석했으나, 당직을 맡지는 않고, 군사훈련에만 협조하기로 했다.

 

넷째 단계는 신민회의 총감독이었던 양기탁에 의한 분열이었다. 양기탁이 신민회와 관계가 끊어진 계기를 살펴보면, 그가 한인사회당 군사부장 유동열에게 훈련차 보냈던 무관학교 학생들이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번진 러시아 내전에서 희생된 사건이 원인이었다. 이후 양기탁의 독립운동의 방법은 신민회의 독립전쟁론보다는 중국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중국의 힘을 빌려 고려국 건설을 추진하던 중에 천진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그는 19208월 국내에서 투옥 중에 모친상으로 방면되었다, 양기탁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는 ‘105인 사건기록에서 장로교인으로 분류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이미 1905년에 종교개혁이 위정치개혁의 원인이라는 글을 대한매일신보에 싣고 종교가 국가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리고 19105월에는 같은 신문에 3일간 종교에 대하여 게재한 글이 있다. 그것들을 종합하면, 그에게 종교는 자국을 숭배하게 하는 것이어야 했다. 심지어 그는 국내에서 석방되자 곧 통천교를 창시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양기탁에게는 처음부터 신민회의 바탕인 기독교와 종교적으로는 맞지 않았던 면이 있었던 것이다.

 

신민회 발기인들은 위와 같이 분열된 이후에도 유신한 국민이 통일연합하야 유신한 자유문명국을 성립케 함이라는 신민회의 목적을 잊지는 않았다. 덜 유신한 국민은 그만큼 덜 유신한 자유문명국을 성립케 할 것이다. 그래도 어떠랴? 그런 국민에게도 국가는 있어야 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래서 그들은 분열했어도 끊임없이 통일연합을 시도했다. 신민회 발기인들을 포함한 망명 독립운동가들은 19193.1운동 이후 설립된 상해임시정부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위해 다시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