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연구/기독교 역사 이야기

상해한인교회와 독립운동

heojohn 2020. 3. 11. 22:47

상해한인교회가 시작된 것은 1914년이었다. 1910경술국치이후 망국의 한을 품고 상해로 건너간 이들은 최재학(崔在學) 외 약 30명이었다. 이들이 영국 조계지에 있는 미해군 YMCA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그곳에서 영어공부를 하다가 예배처소를 마련하게 되었고 김종상(金種商)이 예배를 인도하였다. 일제가 이에 대해 미해군에 항의를 하고 김종삼이 상해를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자 1915년 미국 선교사 피취(Fitch, 費啓澒)의 도움으로 중국인 YMCA 식당을 빌려서 예배장소를 옮겼다. 마침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선우혁(鮮于赫)이 망명해오자 그가 예배 인도자를 맡게 되었다. 1917년 교회는 임원을 새로 선출했는데, 금릉대학에 유학을 왔던 여운형(呂運亨:1886-1947)이 전도인으로 선출되었다. 망명객들이 늘어나면서 교회에도 신자들이 늘어났다. 여운형과 선우혁은 1918년 선천에서 열린 장로교 총회에 참석하여 목사파송을 요청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18년은 상해에 망명한 한민족 독립운동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왜냐하면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11. 11)되고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언과 파리강화회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피압박 민족의 독립문제가 논의될 것이라는 소식이 들렸기 때문이다. 독립의 기회가 목전에 닥친 것처럼 보였다. 당시 상해한인교회는 상해에 거류하는 한인들의 구심체 역할을 하고 있었고, 그것은 바로 선우혁과 여운형에 의하여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에 의해 독립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마련되고 있었다. 여운형은 1918년부터 미국인 회사에서 일하면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포함된 14개조 선언과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에는 승전국 정상들이 파리강화회의를 개최(1919. 1. 18.)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 소식은 윌슨 대통령의 특사 크레인(C. R. Crane)이 상해에 와서 직접 연설을 통해 전해주었고, 그의 연설을 들은 여운형은 그를 찾아가서 확인하였다.

 

상해에는 또 하나의 거류민 단체인 동제사(同濟社)의 대표 신규식(申圭植, 1879-1922)이 있었다. 여운형은 신규식에게 이 소식을 전해주고 협의하여 윌슨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발송하기 위한 단체로 신한청년당을 창당하였다. 이들은 19191월에 열릴 예정인 파리강화회의에는 김규식(金奎植, 1880-1931)을 대표로 파견하기로 하는 한편, 국내와 일본 러시아 극동지역 등 각지에도 대표를 파견해서 이 소식을 전하고 독립운동을 대대적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파리강화회의 파견 대표 김규식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국내에서 새문안교회 장로를 지냈으며, 1913년 망명하여 상해에 와서 미국인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여운형은 신한청년당 명의로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청원서를 작성하고 총무간사로 서명했다. 그러나 이 청원서는 전달을 위탁했던 미국인과 그와 동행하던 중국 대표 모두 일본을 경유하는 중에 가방을 분실하여 전달되지는 못했다.

 

한편 서울지역에는 선우혁과 김철이, 일본지역에는 장덕수와 조소앙이 대표로 파견되어 이런 소식들을 전달키로 했다. 각 대표들이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언과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한 사실을 알리고 앞으로 독립운동의 방향을 협의하기 위하여 각각 맡은 지역으로 떠났다. 여운형도 같은 임무를 가지고 국내 서북지역과 만주와 러시아 일대 순방 길에 올랐다. 각 대표들에 의하여 이런 소식이 전해지자 1918년 말경에 러시아와 만주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이 서명한 무오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고, 일본 동경 YMCA에서는 이광수가 쓴 19192.8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으며, 국내에서는 3.1독립만세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러시아 소재 독립운동 단체들은 여운형으로부터 소식을 전해 듣자 즉각 파리강화회의에 2명의 대표단을 파견하고 19192월에 대한국민의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이 대표단은 파리강화회의가 끝난 후 도착하였다. 미국지역에서는 이승만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국정부로부터 여권을 발급받지 못하여 출국조차 하지 못했다. 일본의 방해공작과 이런 저런 사정으로 어느 쪽에서도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여운형과 각 지역 파견 대표들이 각지에 소식을 전함으로써 독립운동을 촉진하는 효과가 나타났다. 동시에 각지에 있는 독립운동단체들의 중앙기구를 구성할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그 구성인원과 소재지를 정하는 문제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러시아의 지원을 얻으려는 대한국민의회 진영은 국민의회정부를 구성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본부를 둘 것을 주장했다. 국내에서는 13도 대표자의 서명으로 한성임시정부를 구성했다. 그러나 상해 거주민들을 중심으로 국제적 외교를 중시하는 인사들은 국제도시 상해에서 치외법권이 보장되는 프랑스 조계지역에 본부를 둘 것을 주장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외교적 노력으로 서방의 협력을 얻는 한편 손문의 중국국민당 정부와 동맹하여 독립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상해가 가장 유리하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들은 3. 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후에 더욱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파견 대표들이 각지에서 돌아오고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들어 상해에서는 곧 임시정부 수립계획이 추진되고 연락사무소가 마련되었다. 러시아에서 상해로 온 이동녕이 그 중심 역할을 하였다. 이동녕은 기독교인이었다가 상해에 오기 전 러시아에서 대종교에 입교한 상태였다.

 

당시 상해에는 상해한인교회와 대종교포교원이 있었다. 대종교포교원은 신규식이 맡고 있었다. 신규식은 1909년 나철이 대종교를 창시하자 가장 먼저 입교한 대종교인이었다. 신규식은 한말 무관 출신으로 을사보호조약 체결에 통분하여 음독하였으나 가족에게 구출되었다. 그는 경술년 합병조약(1910)에도 음독 자결하려 했으나 이때에는 대종교 나철(羅喆, 1863-1916) 대종사에게 구출되었다. 신규식은 아호를 예관(睨觀)이라고 지었는데 음독의 후유증으로 시신경이 손상되어 눈이 흘겨보는 것처럼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아호에는 일본을 흘겨본다는 의미를 담았다. 그는 한민족 독립운동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지만, 그의 외모 때문에 앞에 나서기보다는 뒷바라지에 헌신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대종교 종사 나철의 권유에 의해 1911년에 상해로 망명해서 포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상해에 와서 손문과 신해혁명파들로 구성된 중국혁명동맹회에 유일한 외국인 회원으로 가입하고 그들의 혁명운동을 도왔다. 중국혁명동맹회는 중국국민당의 모체이다. 신규식은 이 단체를 통하여 한중연합 항일전선을 구축하려고 했다. 이런 인연으로 이 단체의 지도자 손문과 그의 심복인 상해의 명사 두월생(杜月笙) 등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립을 적극 지원해 주었고, 임시정부 수립 후 가장 먼저 국가로 승인해주었다(1921). 신규식은 동제사, 대동보국단 등을 통해서 거류민들과 신한청년당의 여운형, 장덕수, 신철, 선우혁 등 젊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적극 도와주었다. 일본 내무성 자료에는 신규식이 19178월에 조선사회당을 조직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이 당의 목적은 스톡홀름 국제사회주의자대회에서 한국독립을 주장하기 위해서 급조된 것이었으며, 이 회의가 불발되자 사라졌다고 한다. 그는 상해에서 통합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법무총장을 맡았다. 그는 1914년에 지은 한국혼에서 우리들의 국혼國魂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위로 아래로 그리고 사방으로 이를 불러보련다......아아! 동포들이여 궐기하여라고 외치고 있다.

 

여운형은 1906년에는 양평 묘골에서 교회를 세우기도 했던 기독교 신자였다.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승동교회에서 보사를 지냈고 1911년 평양 장로교신학대학에 입학해서 2년을 마쳤다. 그는 승동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다가 1914년 언더우드 선교사의 주선으로 공부를 더 하기 위하여 중국으로 건너와 금릉대학에서 수학했다. 그는 1917년에 귀국했다가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독립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그는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하여 이범석(李範奭, 1900-1972)과 함께 망명해서 다시 상해로 오게 되었다. 여운형은 상해한인교회 전도인으로서 거류민단장과 신한청년당을 맡고 있었다.

상해에서는 이와 같이 동제사의 신규식과 신한청년당의 여운형 등이 3.1독립운동의 배후공작을 수행하였고,” 이동녕이 가세하여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산파역을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