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연구/기독교 역사 이야기

코민테른 극동부와 한인 공산주의자들

heojohn 2020. 3. 11. 23:22

(1) 코민테른: 국제공산당 조직

 

러시아에서 공산당 혁명에 성공한 레닌은 19193월에 국제공산당(통칭: 코민테른, Communist International)을 창설했다. 코민테른은 이름 그대로 공산주의를 세계에 전파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제기구였다. 코민테른이 레닌에 의하여 모스크바에서 창립되었다는 것은 소비에트 러시아 공산당이 세계 공산주의 운동을 주도한다는 의미였으며, 2인터내셔널 슈트가르트 회의에서 레닌을 지지했던 그룹들이 대부분 여기에 참여했다. 이로 인하여 제2인터내셔널은 붕괴되고 코민테른이 제3인터내셔널로 불리게 되었다. 코민테른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강령을 채택했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에다 레닌의 저작물과 앞에서 언급한 슈트가르트 결의안(볼셰비키 강령이라고도 함) 등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한 가지 눈여겨 볼 것은 독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암살된 로자 함부르크의 스파르쿠스당 강령도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레닌과 앞으로 나올 소련공산당 최고지도자의 지시였다. 코민테른의 지원과 지도를 받는 각국 공산당은 레닌의 지시에 따라 제1차 대전을 종결지은 베르사이유 조약(1919)을 제국주의적 체제라고 비판하면서 거부하였다. 그러나 서유럽 사회주의자들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레닌의 정치적 주장과 이론,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코민테른을 통해 세계(특히 아시아)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정치적 교조가 되었다.

 

1920년 코민테른은 제2차 대회에서 레닌의 반대자들이 남아 있는 제2인터내셔널 그룹 공산주의자들에게 서로 적대적 관계임을 분명히 선언하는 “21개조를 발표했다. 이미 기능이 마비되어 있던 제2인터내셔널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이다. 또한 이 해에 바쿠에서 동방민족대회를 열어 서방을 제국주의적 선진국으로 동방을 식민지적 후진국으로 규정했다. 이 회의에서는 동방대학을 설립하고 동방 각국의 인재들을 모아 식민지 또는 후진국 해방운동을 지도할 공산당 지도자들을 양성하도록 지원하기로 했다. 그러나 레닌은 혁명 후 내전에서 최후의 반란마저 진압한 1921, ‘전시 공산주의체제로부터 신경제정책으로 전환하면서 정통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레닌주의로 더욱 이탈하고 있었다. 레닌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참석한 1922년의 제4차 대회에서는 통일전선을 구축하기로 결의했다. 이것은 부르주아지의 공격에 대한 방어책으로서 필요하다면, 과거에 그를 반대했던 제2인터내셔날 그룹과도 제휴를 허용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적과의 협력을 승인하는 것이다. 레닌은 죽을 때까지 마르크스주의를 이렇게 수정하면서 최고 수준의 과학적 무신론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발전시켰다.

1924년 레닌이 사망한 이후에는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의 정치사상과 정책이 오히려 더욱 중요한 것이 되었다. 스탈린이 절대적 권력을 휘두르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심한 변형이 일어났다. 이것은 1904년에 레닌의 이론을 비판하면서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1940)가 일찍이 예언했던 것이다. 레닌과 정당에 대한 이론을 놓고 격론을 벌였던 트로츠키는 이렇게 비판했다. “정당의 조직이 정당 그 자체를 대치한다. 즉 중앙위원회가 조직을 대신하고 마침내는 독재자가 중앙위원회를 대신한다.” 이 말은 이후에 세계 어느 나라 공산주의 정당에서도 그것의 기본적 특징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 레닌이 집권하고 있을 때는 마르크스보다 레닌이 더욱 중요했었다. 그리고 이제는 전권을 가진 독재자 스탈린이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스탈린은 집권 초기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 자처하면서 레닌을 철저히 추종하는 듯 했으나, 그의 권력이 공고해지자 다른 주장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의 주장은 그의 통치기간 중에는 러시아는 물론 코민테른을 통해 세계 공산주의자들이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교조가 되었다.

 

(2) 극동부 보이틴스키와 이동휘

 

이동휘는 한인사회당이 19196월 간부회의에서 결정한 대로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하기 위하여 8월말에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났다. 한인사회당은 이동휘를 따라 본부를 상해로 옮겼다. 블라디보스토크 지부에는 김규면이 남아 모든 일을 처리하기로 하였다. 한편 코민테른은 19198월에 동아시아 공산주의 세력 확장을 위한 테제를 채택하였다. 이 테제는 소비에트정부 외무위원회 동아시아 담당 전권위원인 빌렌스키(Vladimir Dmitrovich Vilenskii, 일명 시비리야코프, Sibiriakov)에 의해 제안되었다. 빌렌스키는 러시아 공산당 정치국에 의해 그의 제안이 승인을 받으면서 전권대사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박진순 일행이 당무보고를 위해 모스크바로 떠나고, 이동휘가 상해로 떠난 뒤에 이르쿠츠크에 있던 코민테른 극동부의 상황은 일변했다. 이 지역에는 1월에 러시아공산당 이르쿠츠크지부에 한인부가 설립되어 별도의 당(이르쿠츠크파) 조직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지역이 반볼셰비키 백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그동안 한인사회당에 우호적이던 쿠레콜노브(Kurekornov) 극동부장이 탈출하지 못하고 백군에 잡혀 처형됨으로써 슈미야츠키(Shumiatsky)가 그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르쿠츠크파는 슈미야츠키를 자파 지원세력으로 만들어놓고 9월에 전로(全露)한인공산당을 발족했다. 7월에 이르쿠츠크를 떠나 모스크바로 가던 한인사회당 대표단 일행은 옴스크에서 장질부사에 걸려 입원하고 박진순 혼자만 11월에 겨우 모스크바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박진순은 전권위원인 빌렌스키의 영접을 받고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리고 한인사회당원 명부와 경과 보고서를 제출했다.

 

빌렌스키는 볼셰비키 군대가 극동지역을 탈환한 1920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중국과 한민족 공산주의자들을 만나 협력관계를 다짐하였다. 그런데 4월에 일본군이 볼셰비키 혁명과 한인 독립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와 극동 해안지역을 점령하는 ‘4월사변이 발생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빌렌스키는 5월에 자신이 임시의장이 되어 집단지도체제의 코민테른 극동부를 조직하고 상해에 한인부, 중국부, 일본부를 두기로 했다. 그리고 이르쿠츠크에 있는 극동부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나와 중국공산당 조직을 공작하고 있던 보이틴스키(Gregorii N. Voitinskii)가 상해로 가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코민테른 한인부의 책임도 보이틴스키가 상해로 와서 맡게 되었다. 보이틴스키는 코민테른의 방침에 따라 서울에서 고려공산당 중앙위원회를 조직하기로 하고 한인사회당과 이동휘를 임시중앙으로 인정했다. 보이틴스키는 5월에 러시아 한인 2세 김만겸(金萬謙)을 대동하고 이르쿠츠크에서 상해로 왔다. 그들은 4만원의 선전자금과 레닌 정부의 지원 약속 및 한인들의 공산주의 사상의 수용을 촉구하는 서한 2통을 가지고 고려공산당 임시 중앙이며,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인 이동휘를 만났다.

 

이동휘는 1920년 초에 상해임시정부가 레닌 정부와 교섭하여 자금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모스크바에 특사파견을 논의하였다. 이 정보는 한형권이 알렉세이 포타포프(Alekesi Potapov)에게서 들은 것을 국무총리 이동휘에게 보고한 것이다. 이동휘와 안창호는 포타포프와 만나 정보를 확인하고 특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특사 추천자 3인의 명단에 여운형이 포함된 것을 이동휘가 반대하였고, 한 사람은 연락두절이었다. 결국 19204월에 한인사회당 간부 한형권(韓馨權)이 포타포프가 써준 문건을 휴대하고 상해임정 특사로서 혼자 떠났다. 박진순은 모스크바에 계속 머물면서 1920429일 레닌의 50회 생일 축하연에도 참석하였다. 한형권은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한인사회당 대표로 코민테른에 주재하고 있던 박진순의 소개로 레닌과 정부 인사들을 만났다.

 

이동휘는 상해임정에서 국무총리 취임 이후 대통령 이승만의 위임통치 제안과 그의 미취임 등을 이유로 해임하고, 상해임정을 그의 휘하에 장악하려고 수차 시도했다. 또한 이동휘는 보이틴스키가 상해에 온 이후로 그와 협력하여 전한(全韓)공산당 조직을 위한 비밀활동은 물론 동아시아 공산당 조직을 위한 국제적인 활동에도 관여하였다. 이동휘는 보이틴스키를 통해 중국의 사회주의자와 접촉하면서 일본에도 손을 뻗쳤다. 이동휘는 중국공산당 초대 주석이 된 진독수(陳獨秀)와 만났고, 중국의 일본유학생 출신 구국일보주필 겸 대동단(大同團) 단장인 황각(黃覺 또는 黃介民)과도 긴밀한 연락관계를 맺고 있었다. 황각은 한인 일본 유학생들과도 교류를 하고 있었는데, 그의 대동단에 여운형과 김규식 등이 관여하고 있었다. 이동휘는 보이틴스키가 상해에서 개최하려는 동아사회주의자회의(또는 극동혁명가회의)에 일본 무정부주의자 오스기 사카에(大杉榮)의 참여를 주선하도록 부탁하자, 상해 임정 군무차장으로 있는 일본 유학생 출신 이춘숙을 파견하였다(1920. 6.).

 

이승만 대통령을 축출하려는 이동휘의 쿠데타적 시도가 안창호, 이동녕, 신규식 등의 완강한 반대로 실패하자, 이동휘는 이에 반발하여 6월에 국무총리직을 사임했다. 상해임정은 통합정부의 명분이 와해될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안창호의 각별한 노력으로 양측이 협상 끝에 정치적 타협이 이루어져 이동휘는 8월에 복귀했다. 그러나 이동휘가 복귀하게 된 보다 중요한 이유는 코민테른 파견원 보이틴스키가 상해임정 특사 한형권이 모스크바에서 거액의 자금지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정보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동휘는 이런 정보를 받자 향후 사태를 검토하여 사실상 스스로 복귀를 결정했던 것이다.

 

이동휘가 임시정부를 떠나 있는 두 달 동안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상해임시정부의 특사로 모스크바에 간 한형권이 한인사회당 코민테른 파견대표 박진순의 안내로 레닌을 만나 상해임시정부의 승인, 독립군의 무기 지원과 지휘관 양성을 위한 무관학교 운영, 그리고 독립운동 자금지원을 요청하여 승인을 받은 일이다. 레닌이 한형권의 요청을 승인한 것은 결국 이동휘와 한인사회당이 상해임정을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디른 하나는 7월에 이르쿠츠크에서는 러시아공산당 내 고려공산단체 제1차대표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한인사회당 대표로 병에 걸려 뒤늦게 모스크바에 갔다가 돌아오던 박애와 이한영이 참석했다. 그러나 문제는 곧 이 회의에서 이르쿠츠크파 한인공산당 발족을 결정하면서 이동휘의 상해파 한인사회당을 인수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코민테른으로부터 받아 가지고 오던 한인사회당의 선전자금도 빼앗겼다.

 

이동휘가 임정에 귀환할 무렵에 상해에 돌아온 이한영은 모스크바와 이르쿠츠크에서 있었던 일을 이동휘에게 보고했다. 이동휘는 국무총리에 복귀하여 집무하는 한편, 코민테른 제2차대회 결의와 보이틴스키의 권유, 그리고 8월 당중앙위의 결의에 따라 19209월에 한인사회당 대회를 개최하여 조직을 확대 개편하고 한인공산당으로 개칭했다. 개편의 특징은 이동휘를 상해지역중앙위원장으로 한정한 것인데, 이것은 각 지역의 한인계 공산당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전단계 조치로서 계획된 것이었다. 실제로 상해파 한인공산당은 다음 해(1921) 51일에 치타에서 전한(全韓)공산당 창당대회를 개최한다는 계획아래 준비위원들을 선임하여 즉시 활동에 들어갔다. 여운형도 이 무렵 보이틴스키의 권유와 레닌정부의 독립운동 지원 약속을 믿고 한인공산당에 입당하여 번역부 위원이 되었다. 여운형은 공산당 선언과 그밖에 다른 공산주의 저작들을 번역 보급하였다. 여운형은 보이틴스키, 일본 공산주의자 오스기 사카에와 함께 진독수의 집에서 열린 동아총국(극동공산당동맹) 예비회담에도 참석했다(1920.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