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연구/기독교 역사 이야기

상해임시정부와 공산당의 내부 갈등과 분열

heojohn 2020. 3. 11. 23:31

(1) 레닌의 자금지원과 상해임정의 갈등

 

모스크바에 임시정부 특사로 파견된 한형권은 레닌정부로부터 200만 루블의 지원을 받기로 하고 1차분 40만 루블을 먼저 받았다. 한형권은 박진순과 함께 옴스크로 가서 전로고려인대회(1920. 10.)에 참가한 다음 상해로 가기로 했다. 임정 국무총리를 사임했던 이동휘는 8월에 복귀하여 특사 한형권이 레닌자금을 가져오기를 기다렸다. 이동휘는 모스크바에서 귀환한 한인사회당 이한영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그의 심복 이외에는 일체 비밀로 했다. 그리고 이동휘는 비서장 김립을 파견하여 중간에서 한형권과 박진순을 만나 돈을 받아올 계획을 세웠다. 이동휘의 지시로 김립은 한인공산당으로의 개편대회 직후 임정에서 사임했다. 김립은 9월 말경에 모스크바에 보고하러 가는 것처럼 이한영과 계봉우와 함께 당 대표단으로 꾸며 상해를 떠났다. 그러나 목적은 비밀리에 한형권을 만나 레닌 자금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 무렵에는 시베리아와 극동 해안지역에 사는 한인들이 공산주의 단체를 설립하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리하여 1920년 말에는 러시아 극동지역에 16개의 한인공산당이나 단체가 생겨났고, 2,000명 이상의 당원이 있었다.

 

이동휘는 레닌자금을 받아서 상해파가 전한공산당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공작과 임시정부 인사들을 비밀리에 포섭하는 공작에 사용할 계획이었다. 이동휘의 비밀공작이 민족진영 우파인사들에게 알려지면서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민족의 독립운동단체의 항일전선을 통일하려는 여러 가지 시도가 있었지만, 결과는 공산주의 계열뿐만 아니라 민족주의 진영에서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동휘가 그동안 지도했던 무장투쟁 독립운동단체들은 만주지방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이것이 이동휘는 물론 상해임정에도 긍정적인 활력소로 작용하고 있었는데, 10월에 대규모 간도사변이 터졌다. 간도사변은 봉오동 전투(6)와 청산리 대첩(10)에서 홍범도, 김좌진 등의 한민족 무장 독립군부대의 연합작전에 패했던 일본군이 복수전을 전개하는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복수전은 도를 넘어 민간인과 어린이까지 무차별적으로 살육하는 것이었다. 지난 해 러시아 극동지역의 ‘4월 사변으로 한인사회당의 붕괴를 겪었던 이동휘로서는 새롭게 닥친 문제였다. 주로 이동휘의 지휘를 받고 있던 무장 독립군부대들은 간도사변으로 인하여 일제의 추적을 피해 만주에서 러시아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동휘의 무장투쟁론에 대해 무모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비판론과 옹호론이 대립하였으나, 이동휘는 오히려 급진적 무장투쟁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민족 독립운동이 중로(中露)지역에서 일제의 계속된 만행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상해임정은 좌우파의 갈등 속에서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임정 무용론이 등장했고, 대통령 이승만에 대해서는 해임론까지 터져 나왔다. 그동안 미국에 머무르면서 공식 취임을 미루고 있던 대통령 이승만도 이러한 사태를 더 이상 방관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2) 대통령 이승만과 ‘40만 루블 사건

 

대통령 이승만이 상해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2012월이었다. 이승만은 상해에 도착하여 취임식을 거행하고 집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상해임정 상주(常駐)와 임정 개혁을 요구하는 국무위원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갈등을 빚었다. 상해임정에서 체제개편론은 이승만이 외교 독립론을, 이동휘가 무장투쟁론을, 안창호가 실력양성(준비)론을 주장하여 독립운동의 방법에 따라 3각 편대로 갈려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주도권을 둘러싼 좌우의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머지 않아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던 이동휘가 19211월에 임정 탈퇴를 선언한 것을 시발로 좌익 계열의 김규식, 유동열 등이 동반 사직하였다. 이동휘의 사퇴원인은 체제개편론이나 좌우의 정치적 갈등이 전부는 아니다. 이외에도 이동휘가 레닌의 임시정부 지원자금을 횡령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승만과 남아있던 민족진영 인사들은 공산주의 정치이념을 거부하고 민주주의적 공화정체를 유지하고자 진력했다. 그러나 자금줄이었던 연통제가 일제의 단속으로 막히면서 임시정부는 재정난에 부딪치고 있었다.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그의 휘하에 구미위원부가 미국 교포자금을 독점하고 있는 등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있었다. 이승만의 아집과 독선에 반발하여 5월에는 우파의 기둥이었던 내무총장 안창호마저 사퇴하였다. 이제까지 통합적 상해임정을 지탱하고 있던 세 축 가운데 두 축이 빠져나감으로써 그동안 유지되었던 통합정부는 붕괴되었다.

 

그동안 비밀에 묻혀 있다가 이동휘의 사퇴를 몰고온 레닌자금 ‘40만 루불 사건의 전말은 대강 이렇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이한영의 보고를 받은 이동휘는 임정특사 한형권이 레닌정부로부터 받은 자금 40만 루블을 중도에서 비밀리에 받으려고 했다. 이동휘가 밀파한 김립과 계봉우는 10월에 옴스크에서 전로고려인대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한형권과 박진순을 치타에서 만났다. 이들은 회합하여 이 돈을 상해파 한인공산당이 받아서 동아시아 각국에 공산주의 선전과 공산당 조직을 위한 동아총국(東亞總局)의 결성에 쓰기로 결정했다. 한형권은 활동비 6만 루블을 제하고 나머지 34만 루블을 김립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돈을 받으러 모스크바로 가기 전에 치타에서 김규면을 만나 4만 루블을 건네주었다. 김립과 박진순은 레닌자금을 나누어 운반하기로 했다. 김립과 박진순은 각자 따로 가기로 하고 김립이 먼저 떠나서 1920. 12월에 상해로 돌아왔다. 김립은 상해에서 중국 공산당 창당 요원이 되는 장국도(張國燾)를 만나 “40만 루불과 원동 각국에 공산당을 조직하라는 지시를 갖고 왔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립은 한인공산당 이르쿠츠크파 계열 인사들에게는, 다만 “1만 원을 교부받아 3천원은 여비로 사용하고 7천원은 소지하고 있지만 임시정부에 교부할 필요가 없고, 고려공산당(한인사회당)에서 사용하여야 한다고 경위를 설명했다. 김립은 사임한 상태이므로 상해임정에는 나타나지도 않았고, 박진순은 19213월에야 상해에 돌아왔다. 두 사람이 상해로 가져온 레닌자금에 대해서 이르쿠츠크파가 문제를 제기하자 이동휘, 박진순, 김립 등 상해파는 한인공산당에서도 탈퇴했다. 상해파가 탈퇴하자 한인공산당에 남게 된 여운형 등은 저절로 이르쿠츠크파로 넘어가게 되었다. 한편 한형권은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가 나머지 돈을 인출하려고 했으나 겨우 20만 루블만 받을 수 있었다. 이르쿠츠크파가 이동휘와 상해파의 대표성을 부인하는 보고서를 코민테른에 접수하고 모함한 것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형권은 1921년 말경에 상해에 돌아와서 임시정부에 레닌자금에 대한 보고를 했으나 20만 루블을 내놓지는 않았다. 그는 사태를 관망하면서 한인사회당에도 레닌자금을 내놓지 않고 있다가 이르쿠츠크파에 합류하고 말았다. 이동휘 등 상해파는 레닌 자금 34만 루블을 쓰면서 한인공산당 대신 고려공산당 창립대회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형권 대신에 주러시아 대사를 새로 임명했다. 이들이 모스크바로 가서 레닌정부가 상해임정에 약속한 지원금 잔금 140만 루블 등에 대하여 외교적 교섭을 진행했으나 성과는 없었다.

 

대통령 이승만은 사퇴한 이동휘 국무총리 후임으로 법무총장 신규식을 국무총리 대리로 겸직케 하였다. 안창호 등 사퇴한 각료들의 빈자리에는 이동녕 내무총장 등 남아 있는 각료들이 겸직하거나 주변 인사들 중에서 새로 임명했다. 이렇게 해서 이승만은 와해의 위기에 직면한 상해임정 내각을 가까스로 구성하였다. 그러나 상해임정의 위상은 이전에 비해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내각을 정비한 다음날 외교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 해 연말에 열릴 예정인 태평양회의 준비를 위하여 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하고 곧바로 상해를 떠났다(1921. 5.). 이승만이 상해입정에서 대통령으로 집무한 기간은 6개월이 채 안 되었다. 이승만이 떠나버리자 구심점을 잃은 상해임정의 상황은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상해임정에서 삼각체제의 통합정부를 이루고 있던 이동휘의 급진적 무장투쟁론 세력과 안창호의 실력양성론 세력이 빠져나간 자리는 다른 사람이 메워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각지에서 오던 지원금도 일제의 탄압에 의해 오지 않았다. 상해임시정부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무능한 상해임정을 반대하고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여 새로운 통일정부기구 설립을 추진하자는 세력이 힘을 얻게 되었다. 국무총리 대리 신규식은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도 임정을 유지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신규식은 192110월에는 임정 대표단을 이끌고 손문의 중화민국 광동성정부의 북벌서사식(北伐誓詞式)에 참석하여 국가 승인과 지원을 얻어내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3) 고려공산당의 분열과 자유시 참변사건

 

192010월 간도참변을 피해 러시아로 들어온 한민족 무장독립 운동단체에게 재난은 끝이 아니었다.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두 개의 고려공산당이 대립하면서 19216자유시 참변이라는 또 다른 재앙이 이들에게 닥쳤기 때문이다. 코민테른은 19211월에 우랄산맥 이동의 한민족 관할권을 치타의 소비에트 극동공화극 러시아 공산당 한인부에서 코민테른 이르쿠츠크 동양부로 이관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은 이 지역의 한민족 문제에 관한 모든 관할권을 새로 개편한 동양부의 비서장 슈미야츠키의 관할에 둔다는 것을 의미했다. 갑자기 달라진 관할권 문제로 한민족 무장 독립군부대는 소련 공산주의자들이 서로 차지하려는 권력투쟁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슈미야츠키는 이르쿠츠크파를 절대적으로 지원하고 있었고, 극동공화국 수반 크로스노체코프와 손잡고 있는 치타 한인부는 이동휘의 상해파를 지원하였다. 양파는 각각 통합 고려공산당 창당대회 개최를 추진하면서 갈등이 노출되었다. 두 개의 고려공산당 통합대회는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정책에 따르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양파는 각각 다른 배후 세력을 등에 업고 통합대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치열한 각축전을 전개하였다. 이동휘와 상해파는 1월에는 상해임정을 탈퇴하였고, 3월에는 상해의 한인공산당대회에서도 탈퇴를 선언하면서, 오직 고려공산당 통합대회 준비에 전념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만주에서 러시아로 넘어온 이동휘 계열의 무장 독립군부대는 극동공화국 군대로 편입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르쿠츠크파 계열의 무장 독립군부대가 이를 거부했다. 이동휘파는 이르쿠츠크파의 부대를 강제 무장해제에 나섰다. 이것이 화근을 만들었다. 물론 이것은 극동공화국 수반 크로스노체코프의 뜻에 따른 것이었으나, 이를 반대하는 코민테른 동양부의 슈미야츠키는 즉시 반격에 나섰다. 그는 이르쿠츠크파가 주도하는 고려공산당 통합대회를 일방적으로 지원하면서 이르쿠츠크에 있는 상해파들을 체포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래서 상해파는 체포되거나 도피할 수밖에 없었고, 5월에 통합 고려공산당 통합대회는 이르쿠츠크파의 주도로 치러졌다.

 

이렇게 이르쿠츠크파는 이동휘의 상해파를 철저히 배제하고, 자파세력으로 통합 고려공산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상해파를 흡수하여 유일 정통고려공산당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참여한 여운형은 고려공산당 상해지부장을 맡았다. 박헌영은 고려공산청년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동휘는 러시아 지역에서의 고려공산당 통합대회 참가를 포기하고, 5월 말경에 상해에서 상해파의 고려공산당 통합대회를 따로 개최했다. 여기에는 구 한인사회당 계열과 국내에서 온 사회혁명당 세력이 참여하였다. 상해파 고려공산당 창당대회 직후 이동휘는 코민테른 승인을 얻기 위해 자파 대표단을 이끌고 모스크바로 떠났다 이동휘는 선박으로 상해를 출발하여 수에즈 운하와 유럽을 경유하는 경로를 택하여 9(또는 10)에야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이동휘에게는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과의 교섭도 중요했지만, 레닌자금 미수령 잔액의 확보도 절실한 목표였다. 양파는 각자 창당한 고려공산당을 놓고 서로 유일정통을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한 암투를 벌였다. 이 싸움은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을 상대로 외교전을 벌이는 것뿐만 아니라 극동지역 현지에서는 유혈전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결국 19216월에 초기 한민족 공산당사에서 최대의 참극으로 꼽히는 자유시참변’(‘黑河참변또는 아무르 사건이라고도 함)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이동휘가 프랑스 배를 타고 모스크바로 향해 상해를 떠난 직후 일어났다. 이르쿠츠파가 슈미야츠키의 지원으로 현지 볼셰비키 적군부대를 동원하여 상해파 간부들과 독립군무장부대를 습격하여 살해하고, 체포하여 투옥하거나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등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초기 한민족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가장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참극이 벌어진 것이다. 이 사건으로 한민족 무장 독립군부대는 사실상 궤멸되었으며, 이후 무장 독립군부대의 조직이 어려워진 원인이 되었다. 이 사건은 고려공산당의 유일정통에 눈이 먼 이르쿠츠크파가 볼셰비키 군대를 끌어들여 같은 민족인 상해파 독립군 부대를 무력으로 제거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현실적 이익 앞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공산주의자들의 속성과 비인간성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여준 것이며, 동시에 후일에 벌어질 6.25사변이라는 민족적 비극의 예고편에 다름 아니었다. 선박 편으로 유럽을 경유하여 9(또는 10)에야 모스크바에 도착한 이동휘는 그를 찾아 도망쳐 온 상해파 동지들로부터 자유시참변에 대한 보고를 들었고, 이동휘는 이 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고려공산당 창당대회 등에 대한 보고서와 함께 코민테른에 제출했다. 그러나 이르쿠츠크파는 6월에 열린 코민테른 3차대회에서 이미 창당대회 보고서를 제출하여 승인을 받았고, 자유시참변에 대해서도 자파에게 유리하게 보고서를 제출한 상태였다. 더구나 이르쿠츠크파는 레닌과 면담까지도 마친 상태였다.

 

그러나 레닌은 이미 이동휘가 극동 지역이 케렌스키 임시정부 세력에 의해 점령되고 있을 때 체포되어 일본에 넘겨질 뻔했던 정보와 최초의 한인사회당 창당 보고서 등을 검토하고 이동휘를 신뢰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에 힘입어 이동휘도 레닌과 회담할 수 있었다. 레닌은 어려운 환경에서 수고하고 있는 조선의 혁명가들인 이동휘 일행을 면담하고 치하하였다. 그리고 레닌은 양파의 보고서와 정강에 대해 이동휘와 상해파의 정강이 옳다고 평가하면서 이르쿠츠크파의 오류를 지적했다. 코민테른은 양쪽의 보고서를 다시 검토한 뒤에 조선 국내외의 제단체 대표로 소집되는 대의회까지 양파 동수로 구성된 연합중앙간부를 구성하여 양파가 연합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르쿠츠크파가 이 결정에 반발했으나 코민테른은 결정사항의 실천에 있어서 이동휘를 연합중앙간부로 임명하여 실질적인 주도권을 부여했다. 이동휘 일행은 코민테른의 지시사항 이행을 위해 모스크바를 떠나 이르쿠츠크로 향했다. 11월 말에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이동휘는 이르쿠츠크파로 넘어간 여운형을 만났다. 여운형은 이르쿠츠크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극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의에 참가하기 위하여 조선대표단의 일원으로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나 개최 일자가 다음 해 19221월로 연기되고 장소가 모스크바로 변경되자, 여운형 등은 모스크바로 떠났다. 여운형은 이르쿠츠크에 머무는 동안 자유시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상해파 무장 독립군부대원들의 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여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