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연구/기독교 역사 이야기

터툴리아누스의생애와 사상

heojohn 2020. 4. 8. 01:49

1.서 론

 

우리가 고대 신학자를 짧은 시간에 연구하고자 하는 경우에 부딪히는 난점이 몇 개 있다. 언제나 부족한 것은 자료와 시간이다. 그리고 언어 능력의 부족도 한 가지 난점의 요인이 될 것이다. 특히 모르는 외국어와 번역조차 신통치 못한 경우에는 자료와 시간의 부족에 겹쳐 더욱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터(테르)툴리아누스에 대한 필자의 경우에서도 이 세 가지 난점이 모두 나타났다. 그러나 고대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인 테르툴리아누스(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를 그냥 스쳐지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또 많은 시간을 투입할 수도 없는 형편이므로, 필자로서는 제한된 짧은 시간에 최대한 요점적으로 몇 개의 책을 바탕으로 연구한 결과를 간추려보았다.

 

2. 테르툴리아누스의 생애

 

2.1. 개요

 

테르툴리아누스는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 주후 155년 경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유명한 법률가로 활약했으며, 법률뿐만 아니라, 문학과 철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래서 그를 연구한 기독교 역사가 하르낙(Adolf von Harnack, 1851-1930)에 의하면, 그는 철학하는 변호사였다. 그는 로마에서 일시 체류하기도 했는데, 이때 순교하는 기독교인들을 보고 감동하여 개종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개종은 주후 193년 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개종 후에 그는 기독교를 옹호하는 저술에 온 힘을 쏟았다. 기독교에 관련한 그의 저서들은 197년부터 임종 때까지 쓰였다. 캄펜하우젠에 의히면, “그 당시 교회에는 테르툴리아누스가 어떤 입장을 취하지 않거나, 혹은 어떤 모양으로나 의견을 내놓지 않은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뛰어난 저술가로 활동한 그는 서방적 라틴교회사에서 처음으로 윤곽이 뚜렷한 기독교 인물이 되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기독교에 대한 변증과 영지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방향으로 저술활동에 몰입하던 그가 말년에 몬타누스주의에 빠진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그러나 유의해야 할 것은 당시에는 몬타누스주의에 대해서 보편적인 교회의 태도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시기였다는 사실이다. 몬타누스주의는 2세기 말에 두 여자 예언자들과 함께 소아시아 내륙 깊숙한 프리기아(Phrigia) 지방에서 열광주의적, 묵시문학적 부흥운동에서 나온 것으로, 아프리카에는 3세기 초에 들어왔다. 그들은 신자들에게 회개와 갱신을 주장하면서 하나님 나라가 즉시 그들의 고향지방에 있는 어떤 산에 내려온다고 예언하였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몬타누스주의를 접하는 즉시 이에 가담하였다고 한다. 그는 생애 중에 많은 책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전해지지 않는 것도 있다. 그의 저술에서 몬타누스주의가 나타난 것은, 부분적으로는 프락세아스 반박문, Adversus Prxeam에서, 그리고 완전하게는 213년에 나온 박해 속에서의 도피, The Flight in Persecution에서 부터이다. 현재 전해져 내려온 그의 책은 31개가 알려져 있다. 그는 주후 220년 경에 죽었다.

 

2.2. 개종 후의 활동

 

테르툴리아누스는 당시로서는 매우 유식한 아프리카의 로마인이었다. 그의 성격은 폭풍적이고, 열혈적이며, 때로는 오히려 방약무인했다. 그의 성격은 기독교인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인내의 고상한 덕을 결코 배우지 못했다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은 성격을 바탕으로 기독교의 변증을 위해 숱한 이단들과 맞서 논쟁했다. 그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히에로니무스(Eusebius Hieronymus, 347-420)는 그를 가리켜서 언제나 작열하고 있는 사람(vir ardens)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그런 기질을 스스로 조절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의 관심은 항상 현실을 향해 있었고, “실천적인 결단에 집중하였다.” 그는 해박한 법률적 지식과 수사학적 재능을 갖추었음은 물론, 성경에 집중하여 구석에까지 정통하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활발하게 저술활동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고상한 의미에서는 학자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학자라고 하기엔 성격과 문장이 너무 거칠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을 했던 것으로 보이나, 그렇다고 성직자가 된 것도 아니었다. 그는 경제적으로도 안정된 지위를 누리고 있었으며, 결혼도 했었다. 그는 주로 저술가로서 활동했다. 그는 아프리카적 로마 문화의 특징적 성격으로서 맹종하거나 순종하기보다는 오히려 반란적인 면을 지니고 있었다.

 

정열적이고 집착하는 그의 성격에는 로마식의 규율과 법률가다운 명확성 및 군대식의 기율이 한 요소로 배어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저술에는 그가 옳게 보는 것에 대하여 분노할수록 문체가 예리해지고 더욱 적절한 재치가 살아나고 있다. 그는 생동적이고 독창적인 글을 많이 써서 그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의 문제를 해명하였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당시의 성경에 대한 보편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나, 성경이 이 세상의 모든 정신과 온갖 탁월한 지혜와도 아주 다른 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에게는 철학자들의 학술적 이론과 지혜는 무용하고 터무니없는 수다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그는 성경에 집착하여 정통한 성경지식을 이용하여 고대교회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가장 깊이 성경을 주석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라틴어는 당시 카르타고 사회의 실제 생활에서 그대로 사용되는 언어였다. 그래서 그의 표현은 생생하고 직설적이었고, 노골적이었다. 겉보기에 이러한 그의 통속주의에는 오히려 위엄과 존엄성이 배어있는 것이었다. 그는 신학자 중에서도 특이한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독자들을 지루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의 초기 저작들은 논쟁적이고, 교회의 원수와 박해자, 거짓교사와 유혹자에 반대하는 논설이었다. 그것은 이교 반박문변증서로 대표될 수 있다. 그 당시 시행되던 재판의 변론 형식을 따라서 쓴 이 변증서는 즉시 희랍어로 번역되기까지 했다. 여기에 쓰여 있는 그리스도인의 피는 씨 한 알이라오(semen est sanguis Christianorum)”라는 말과 여러분이 우리를 정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죄선고하신다오라는 말은 명언이 되었다. 이외에도 그의 저술이 계속 출간되면서 그 안에는 명언이 될 만한 말이 숱하게 담겨지게 되었다. 그러한 명언은 이단자들의 지혜를 부끄럽게 하는 하나님의 어리석음과도 같았다. “모순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est)”는 그의 유명한 명제는 테르툴리아누스의 종교관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에게 종교는 현실 속의 삶이었으나, 이단자에게 종교는 사색과 몽상의 영역이다. 그는 마르키온을 가장 위험한 적으로 보았다. 그래서 마르키온 논박, gegen Markion을 저술함에 그는 모든 힘과 능력을 쏟아 부었다. 몇 번 수정되기도 했던 이 대작은 구약의 하나님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육신을 부인하는 마르키온적 영지주의를 혹독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 일부분과 바울서신만을 정경으로 삼는 마르키온주의자 역시 당시의 보편적 기독교리와 다른 영지주의자의 방종과 망상을 경멸했다. 그들은 예수와 바울의 충실한 제자들은 자기들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누가 더 성경의 진리성에 더 부합할 것인가? 이러한 분파적 논쟁은 일종의 선명성 경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캄펜하우젠에 의하면, “급기야 그는 성서에 명시적으로 허락되어 있지 않는 것은 모두 금지된 것으로 선언하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 해도, 그는 그리스도인이 필요로 하는 완전한 확실성의 정점까지 결코 도달할 수 없다고 느꼈다.” 캄펜하우젠은 이러한 것이 “‘그에게 독특한괴로운 경험이 되었고, 이 때문에 그는 테르툴리아누스가 최종적으로 몬타누스주의자로의 전향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 예언된 보혜사의 도구로서 회개와 갱신은 물론, “윤리 도덕을 능가해서 열렬하게 순교할 각오까지 주장하는 몬타누스주의는 테르툴리아누스에게 초대교회의 산 영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예언처럼 믿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테르툴리아누스 자신에게 본시 일종의 접신술적이고 환상적이며 황홀경적인 종교현상에 애착을 가지는 성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2.3. 몬타누스주의자로서의 활동

 

몬타누스주의로 전향한 테르툴리아누스는 즉시 보편적 교회와 단절하고, 그들의 권속에 합류했다. 그 안에서 그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아무 유보 없이 전심전력할 각오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몬타누스주의자는 맹렬 프리기아인들이라는 분파로 낙인을 찍히게 되었다. 그들은 종교적 내용과 독창성을 가지지 못했으므로 자력으로 버티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었으나, 테르툴리아누스의 가담으로 일종의 신학과 정신적 체면 같은 것을 얻게 되었다.” 캄펜하우젠은 테르툴리아누스에 대해 근본적으로 그가 언제나 이미 그랬듯이 몬타누스주의자였을 뿐이다고 말하고 있다. 이 단계에서 그가 저술한 프락세아스 반박문, Adversus Prxeam은 군주론자인 프락세아스를 논박한 것이었다. 이 책은 본격적으로 몬타누스주의 저술로 분류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서 삼위일체론을 삼중성 속의 단일성이라는 형식으로 다루고 있다. 그 당시의 삼위일체론은 여기서 더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삼위일체론은 정통 신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가 말년에 쓴 황홀경론, über die Extase은 반대자들에 대항하여 몬타누스주의의 새로운 예언의 영에 대하여 특별히 변호하고 있다. 그는 몬타누스주의적 윤리를 강조하여 재혼을 음란죄로 규정하는가 하면, 가톨릭의 타락상을 점점 더 혹독하게 풍자하였다.

 

2.4. 사후의 평가

 

테르툴리아누스의 임종 무렵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그가 몬타누스파에 가담하면서 보편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했기 때문에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는 것 같다. 어쨌든 그는 늙어 꼬부라질 때까지 살고 죽었다고 한다. 그는 성격적으로 광포하고 초조해하며 격정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몬타누스파와도 갈라져서 자기의 유파를 만들었던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그로부터 약 150년 정도 지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카르타고에서 테르툴리아누스주의자들(Tertullianisten)을 발견하고, 그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고 나서 별로 호의적이지 않은 논평을 했던 사실에서 드러났다. 그 뒤에 나온 레리눔(Lerinum)의 빈첸즈(Vinzenz)나중에 저지른 그의 오류는 전에 써서 인정받았던 저서들의 신빙성까지도 박탈해버렸다고 하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대에 가톨릭 밖에서 남겨놓은 저술이 거의 그대로 전해 내려오는 유일한 신학자이다. 캄펜하우젠에 의하면, 가톨릭교회는 그보다 더 교회를 위해 투쟁한 인물을 가지지 못했으며, 본성상 그보다 더 교회에 속한 사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결국 배교자가 되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를 최후의 희랍 변증가로도 부른다. 여러 면에서 보아 그는 철두철미하게 최초의 라틴교부로 나타나고 있다. 캄펜하우젠은 그가 성서의 권위를 긍정하고, 성서의 정신적 특성을 이해하고 사도 바울을 좋아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렇지만 캄펜하우젠은 신학적으로 볼 때, 테르툴리아누스는 구약의 그리스도인이었으며, 거의 유대인이었다는 지적도 빼놓지 않았다.

 

3. 테르툴리아누스의 사상

 

테르툴리아누스는 그의 생애에서 두 번이나 개종했다. 그것도 모자라 임종 무렵에는 자신의 유파를 만들었던 것으로도 보인다. 그의 인생역정에서 이러한 변신은 그의 성격에 아프리카의 반란적인 면작열하는면이 있었던 것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힘써 추구했던 것은 완전한 신앙이었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더욱 엄격한 종교적 도덕윤리를 강요하였다. 그가 몬타누스주의에 합류하게 된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심지어 순교의 각오까지 공공연히 밝히는, 그들의 치열한 신앙적 면모에 이끌렸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은 현실적으로 일반 신자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그래서 그의 변증과 비판은 교회의 대적자 또는 이단자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었지만, 그의 주변에서도 반대자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가 말년에 스스로 고립의 길로 가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라고 보인다.

 

한 인물의 사상을 이해하는 길은, 특히 그의 생애가 뚜렷이 드러나지 않은 경우에는, 그의 저술을 연구하는 방법밖에 없다. 우리는 그가 기독교로 개종하기 이전의 사상은 알 수 없다. 다민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의 그의 저술활동에서 신학적으로 표현된 그의 사상을 부분적으로 겨우 알 수 있을 뿐이다. 그의 신학적 사상은 변증과 비판적인 방법으로 기독교의 전 영역에 걸쳐 고대 라틴어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리가 그의 원작들을 읽을 수도 없거니와 몇 가지 번역본들조차 짧은 시간에 다 읽고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일은 그를 개략적으로 이해하려는 필요성에는 적합하지도 않은 일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를 연구한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3.1. 초기-보편교회 기독교인으로서의 신학사상

 

테르툴리아누스가 라틴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유는 타당하다. 왜냐하면 그는 고대 라틴 신학에서 쓰는 용어들을 대부분 창안하고 제정했고, 초기 라틴 신학의 기초를 놓은 것으로도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년에 몬타누스파에 가담하여 이단의 정죄를 받긴 했지만, 그의 기독교적인 신학사상은 라틴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기독교적 사상은 부도덕과 무절제가 날뛰는 당시 로마의 대도시에서 교회공동체가 보여주었던 순교자의 신앙 및 신자들의 도덕적인 삶에 영향을 받아 개종하면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는 성경의 가르침에 철저히 따르는 윤리를 강조했다는 사실에서도 이런 추론은 충분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하겠다. 그의 저술에 나타나는 확실한 법률적 지식과 명확한 논리성, 적절한 용어의 구분 사용, 도덕적 엄격성 등이 그의 사상의 발전에 바탕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그의 신앙적 열정의 표현일 것이다. 그래서 그의 초기 저서들은 이교의 불신 및 모독과 유혈박해에 대항하여 기독교를 변호하는 것이었다. 이때 쓴 변증서에서 그는 진리가 바라는 것은 한 가지뿐인데, 그것은 사람들이 진리를 심판하기 전에 먼저 진리를 알아보아야 한다는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진리는 물론 기독교적 진리이고, 심판하는 사람들은 로마 관리들을 가리킨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대적자들을 향해 기독교 진리를 이렇게 열정적으로 변호하고 있는 것이다. 개종한 그에게 기독교 진리만이 그의 삶의 목표가 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삶을 이끌어가는 그의 사상은 그가 성경에서 열심히 추출한 기독교적 진리에 토대를 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세상자체를 이교로 규정하고, “철학자와 그리스도인 사이에, 그리스의 제자와 하늘의 제자 사이에또는 아덴과 예루살렘, 아카데미와 교회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가현설을 주장하는 마르키온주의자들을 비판하는 마르키온 비판, Adverus Marcionem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형은 우리의 구원이 지닌 본래적인 신비이다고 말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육체의 완전한 실재성이 우리 구원의 진지성과 현실성을 위한 보증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또한 당시의 마르키온뿐만 아니라, 모든 영지주의 이단들을 비판하면서, 보편교회를 옹호했다. 교회는 이단적 열심을 가진 자들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과 가르침에 있어서 사도적 전통을 가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은 우상에 관하여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그는 여기서 기독교국가가 되기 전에 차라리 세상의 끝이 오는 것이 빠르리라!”는 말을 하면서 기독교인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은 차라리 세상과 단절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교회생활과 현실생활의 양립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으로 반발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적 신앙의 완전한 확실성의 정점까지도달하려는 그의 노력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3세기 초의 그 무렵에 파가 그의

 

파가 그의 도시에 나타났다. 그는 몬타누스주의의 열렬한 신앙적 주장에 끌려 다시 개종하고 그들에게 가담하게 된다.

 

3.2. 후기-몬타누스주의자로서의 신학사상

 

몬타누스파로 개종하게 된 이유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들의 주장이 그의 엄격하고 열렬한 신앙적 요구와 부합하기 때문이라는 점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서 예견되는 바와 같이 이를 계기로 하여 그의 신학사상은 오히려 더욱 엄밀해지고 신자의 삶에 대한 도덕적 요구 수준도 더욱 높아졌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교리를 전파하는 옛날의 대적자들에 대한 비판도 더욱 날카로와졌다. 그런 작품으로서는 프락세아스 반박문, Adverus Praxeam이 있다. 그는 여기서 처음으로 삼위일체(trinitas)”라는 용어를 쓰면서, 양태론적 군주신론을 주장하는 프락세아스에 대한 반박을 전개하였다. 그는 이레니우스가 쓴 경세(οικονομια)라는 말의 개념을 빌려 그의 삼위일체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하나님이 영원으로부터 추론할 때에 사용해온 말씀은 하나님 자신과 아울러 두 번째의 하나님’(secondum a se)을 구성한다.” 말씀이 창조사역을 위하여 밖으로 표출되어 나온 때(外化)”, “만유의 창시자로서의 하나님이신 성부는 성자의 아버지라는 특별한 의미를 획득했다.

(2) 이렇게 출생됨으로써, 말씀 또는 성자는 성부와 함께 있는 두 번째 위격(persona)이 되었다.

(3) 그러나 세 번째 자리에는 성령, 즉 성자의 대표자 또는 대리인”(vicaria vis)이 존재한다. 성자로 말미암아 성부로부터(a patre per filium) 유출된 성령은 성부 및 성자로부터 나온 세 번째 위격이다.

 

여기서의 삼위는 구별”(distinctio) 또는 분배”(dispositio)이지 결코 "분리"(separatio)가 아니다. 이것을 표현하는 그의 신학적 진술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본질(subtance)에 있어서 하나라고 하는 것이다.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unum)”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단순한 수적인 하나가 아니라, 본질적인 하나의 동일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는 동일본질”(unius subtantiae)이고, 성자와 성령은 성부의 본질을 공유한다(consortes subtantiae patris). 그러나 이러한 경세적 삼위에서 그의 위격(personae, προσωπα)의 구분은 계시의 질서 속에서 드러난 삼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여기까지의 테르툴리아누스는 사상적으로 기독교를 변증하는 신학자로서 손색이 전혀 없었다. 그의 삼위일체론은 당시의 보편교회에서도 수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몬타누스주의에 빠진 그는, 그들의 새로운 예언의 영에 의한 종말론에 기대어 더 높은 수준의 영적 생활 질서를 목표로 했다. 그는 몬타누스파들이 주장하는 새로운 예언의 계시와 이적행위를 찬양하면서 보편교회와 감독들을 비난하였다. 그는 교회는 회중의 공동체이지 감독들이 교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성서적 율법과 교회의 규율에 순종할 것을 엄격하게 요구했다. 이와 같이 몬타누스파로 개종한 후 옛 생활을 부정하고 새로운 계시에 의한 질서를 주장하는 테르툴리아누스의 신학사상에 대해 캄펜하우젠은 중세 피에레의 요아킴((Joachim of Fiore)의 종말론과 같은 제3계시 또는 제3왕국론적 관념이라고 평가했다. 몬타누스주의자로서 그가 가지고 있는 신앙적 질문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 분의 규율대로 행하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을 원하시겠는가?”였다.

 

4. 결 론

 

테르툴리아누스의 교회사적 공헌은 이레니우스의 신학을 계승해서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박해받는 기독교회를 법률적으로 옹호하고 기독교리를 변증하는 저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발흥하고 있던 각종 영지주의적 이단사설들을 공박하여 침묵시켰다. 이러한 그가 몬타누스주의의 광신적인 종말론에 빠져 배교자의 오명을 썼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종교적 성취를 이루고자 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신앙적 열정이 모자라서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과도한 사람이 자주 저지르는 종말론적 오류에 그도 휩쓸린 것이다. 그것은 결국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율법주의에 다름 아니다. 캄펜하우젠이 평가한 대로 그는 구약의 그리스도인이었으며, 거의 유대인이었을 뿐이다. 그리스도의 율법은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하라는 것이었으나, 그는 하나님만 사랑하는데 그쳤다.

 

우리는 테르툴리아누스에게서 신앙의 구체적인 사례 한 가지를 확실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그는 고대 기독교를 위해 열성적인 변증과 선구적인 삼위일체론을 전개했었다. 그는 탁월한 신학적 성취를 이루었지만, 그의 신학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성경을 해석하는 관점에 따라 어떤 신학적 주장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가 보여준 하나님을 향한 과격한 율법적 행위는 결국 자신의 구원에 목적을 둔 한 신자의 광기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신학적 진리는 현실과 동떨어져서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몬타누스파에게서 보았듯이 종말에 일어날 일을 성급하게 앞당겨 주장하는 예언적 성경 해석은 오류로 가는 유혹의 길인 것처럼 보인다. 몬타누스는 심지어 나는 사도로서도 아니고, 사절로서도 아니고, 성부 하나님으로서 왔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몬타누스주의의 광신적 종말론과 이단적 재림론은 오늘날에도 재현되고 있다. 그렇지만 극단적 경건주의자 테르툴리아누스가 이런 이단 교리에 빠져들었다는 것은 초기 기독교 선교의 과정에서 나타난 반면교사의 한 예증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만을 보려고 위로만 향했던 그의 눈이 결국에는 그의 발 앞에 놓인 구덩이를 보지 못했고, 달려가던 그의 발이 그곳에 빠진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뛰어난 신학자였던 테르툴리아누스의 삶에서 이런 오류에 빠질 가능성을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다. 동시에 기독교 신자로서의 삶에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살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계명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에 기독교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 두 가지 중 어느 것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Campenhausen, Hans von, Lateinische Kirchenvater, 김광식 역, 라틴교부연구,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79.

 

Greenlande, S. L. , Early Latin Theology, 이상훈, 이은혜 역, 초기라틴신학, 기독교고전총서 4, 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11.

 

Kelly, ohn Norman Davidson, Early Christian Doctrines, 박희석 역, 고대교리사,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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