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연구/기독교 역사 이야기

루터의 “칭의에 관한 토론문” 읽기

heojohn 2020. 4. 8. 02:22

  -로마서 3:28절에 관한 마틴 루터 박사의

세 번째 및 네 번째 논제에 대한 토론

 

서 론

 

칭의에 관한 토론문1535년 야콥 쉔크(Jacob Schenk)와 필립 모쯔(Philipp Motz)의 박사 자격 심사를 위하여 실시된 것이다. 이 토론문을 보면, 루터 박사가 로마서 3:28에 관련하여 세 번째와 네 번째로 작성한 논제들과 그것에 대하여 박사 후보자들과의 논쟁으로 구성되어 있다. “논쟁의 기록문을 보면, 이것 역시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는 칭의에 대한 루터의 토론이고, 두 번째는 믿음이 의롭게 하는가에 대한 루터의 토론이다. 논쟁의 진행은 먼저 논제에 관한 반론이 제시되고, 그 다음에는 대체적으로 보충적 설명에 이어서 루터의 답변이 이어진다. 여기에 편집된 루터의 답변은 LW 34:151-196을 대본으로 하였고, 추가적으로 다른 사본(여기서는 WA 39-182-126)의 기록 내용을 [ ]안에 참고자료로서 수록해놓았다. 이 토론문에서 보면, 루터의 칭의에 대한 이해는 1515년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로마서를 강의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20년 이상 변하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로마서에서 새롭게 이해한 죄인으로서의 인간은 오직 믿음으로만의롭게 된다는 교리에 대해, 그것이 그에게 종교개혁운동의 동인(動因)으로서 얼마나 확신에 찬 믿음이었는지를 입증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그는 여기서 그의 칭의에 관한 교리를 다양한 시각으로 논증하려고 했다. 특히 그는 살았을 때 인간들 앞에서 칭의를 취급하는 인간의 사고 형태와 죽어서 하나님 현전에서 인간의 칭의를 취급하는 인간의 사고 형태를 구분해서 살펴보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의 칭의에 관한 토론은 결국 행위 없는 믿음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지에 초점이 모아지게 된다.

 

논 쟁

 

칭의에 대한 루터의 토론(논쟁 I-)

 

[말틴 루터 박사의 서문]

 

루터는 토론을 위해 제출한 서문에서 믿음에 대해 믿음은 그렇게도 큰 것이고 어려운 것이므로 따라서 논쟁은 그렇게도 날카로운 것이 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루터는 칭의에 관한 논쟁을 다룰 때 좀 안다고 말할 수 있을지라도신학자가 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루터는 우리의 학문은 바울이 말한 것처럼 아직 초등 학문 수준에 머물러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사상들 대신 거짓된 것을 따르지 않기 위하여토론을 통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완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논쟁 I]

 

바울이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3:28)에서 사용한 λογιζόμεσα(로기조메타: 우리가 인정하노라)의 의미에서 보면, 이 구절은 바울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루터) 또는 누구일지라도 이 구절에 대해서 나름대로 해석하고 가르치는 것은 하나의 의견에 불과한 불확실한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루터는, 이 구절은 하나님과 성령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바울이 권위 있게 인정하는 것이므로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 답변한다.

 

[논쟁 ] 논제 , 1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의롭게 하는 방법과 사람들 앞에서 사람을 의롭게 하는 방법은 달라야 함을 명백하게 나타내고 있다는 논제의 진술대로라면, 믿음에 의한 칭의는 두 가지가 된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를 의롭게 하는 자라면, 하나님 이외에도 믿어야 하는가?’라는 또 하나의 의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논제에 대해서는, 하나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조 등과 모순되는 것 같다는 반론이 나왔다. 이 반론에 대해서는 행위가 칭의의 요소가 아니라는 것은 칭의의 존재도 아니요 칭의의 긍정적인 요소도아닌 사람의 자체적인 모순이지 홀로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문제가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믿는 자와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관계는 긍정적인 관계에 기초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논쟁 ] 논제 , 2에 대하여

 

바울은 행위와 믿음을 대조하면서 행위를 떠나서 믿음에 칭의를 돌리고 있다는 논제에 대해, 한 사람에게 믿음과 반대되는 행위가 동시에 있을 수 없으므로 믿음은 행위를 결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루터 박사는 바울의 말씀(3:28)에 의해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것에 관한한 믿음이 할 뿐이므로 행위는 배제된다고 답했다.

 

[논쟁 ] 논제 , 4에 대하여

 

사람은 진정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며 행위가 의롭게 하지 못한다고 하는 논제는 틀린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믿음은 율법의 첫 계명에 대한 행위이고, 따라서 믿음과 행위는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에 대해 실상 믿음은 그 본연의 위치에서는 행위라 불리고 있지만, 칭의의 교리에서는 성서에 따라 믿음을 행위라고 부르지 말아야한다고 했다. 덧붙여 그는 믿음은 약속을 바라보는 것이며, 율법의 행위는 믿음이 아니라고 말했다.

 

[논쟁 ] 논제 , 29에 대하여

 

누가복음 7:47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사랑도 사죄를 마땅히 받을 만한 것이므로 믿음만이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반론에 대해 루터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 사함을 받는 내적 의와 죄를 사함 받은 후에 따라오는 사랑으로 의롭다고 선포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 외적 의라고 구별한다. 순서적으로 앞의 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동인으로서 작용하는 내적 칭의이고 뒤의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외적 칭의이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죄 사함을 받고 눈물을 흘린 여인이 바로 이런 실례이다.

 

[논쟁 ] 논제 , 2932에 대하여

 

구원받기 위해서는 믿음 이외에도 외형적인 복종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부분적으로는 칭의의 다른 요인이 있을 수 있다. 루터는 이런 주장에 대해 그의 논적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의 주장과 같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말하자면 현세에서 믿음은 죄 사함을 시작하나 행위는 구원 또는 공적과 하늘나라 또는 영원한 생명을 획득한다는 말이다. 이런 오해는 분명 로마서 10:10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에 기인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에라스무스의 논증은 첫째로 칭의를 위한 가장 작은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고 그런 후 마치 우리의 구원을 위한 가장 중요한 이유로 복종을 필요로 한다고 하는 것과 같이 우스운 일이다. 루터는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면서, “죄는 전가됨으로 말미암아 면죄된 것뿐이요, 우리가 죽을 때에야 본질적으로 없어진다고 했다. 이것을 모르는 에라스무스의 두 번째 논증은 우습게도 원죄는 세례로 제거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세례를 받은 사람은 죄가 없다고 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이해했다. 그러나 루터는 에라스무스의 논증에 대해 복종을 비롯한 행위가 구원에 필연적이긴 하나 그것들로 인해서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고 비판했다.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은 믿음만이다. 루터에 의하면, 이것은 마치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 수 있는 것처럼외적인 행위는 내적인 믿음이 현존함을 보여주는증거이다. 원죄는 단지 사상이나 말 또는 하나님의 율법에 위배되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어거스틴은 죄가 없어졌다고 보기보다는 전가되었(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죄는 사해졌다고 말했다. 루터는 행위가 구원에 필연적인 것이기는 하나 그것들로 인해서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고 단언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들이 내적인 상태의 죄를 이해했다면, 그것을 격정(passionem)일 뿐만 아니라 기질(habitum)”이라고 말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루터에 의하면, “원죄는 이 육체가 완전히 죽어지고 불로 깨끗해지고 개조될 때만 끝이 오는 뿌리요 타고난 악이라고 했다. 믿음만이 우리를 홀로 위롭게 하고 홀로 구원하고 위선자들의 견해와는 반대로 그 나라로 인도한다.” 그렇지만 행위는 우리가 의롭다는 것을 증명해보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논쟁 ] 논제 , 29에 대하여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어도 죄는 여전히 우리 육체에 남아 있다고 하기 때문에 믿음이 의롭게 한다는 명제는 참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명제는 사상과 실재가 일치해야 한다는 진리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반론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이 반론에 대해서는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믿음의 효력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 오해라고 답변되었다. 말하자면 죄의 본질은 제거되지 않으나 하나님은 그의 자비로 우리의 죄를 전가하고 우리를 의롭게 여기실 수가 있는 것이다. 루터는 덧붙여, 죄는 비록 그 본성에 있어서나 본질에 있어서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죄를 가리우는 그리스도 때문에 덮어두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죄는 사하여질 것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우리를 용서하신다.” 죄는 언제나 이 세상에 남아 있을 것이나, “최후의 심판이 올 때 그때 마침내 우리는 완전히 의롭게 될 것이다.” 이 논쟁을 정리하면, “사람이 의롭게 된다는 말은 의롭게 여겨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논쟁 ] 논제 , 2433에 대하여

 

이 두 개의 논제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15:9에서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셨느니라는 베드로의 말을 인용하여, 의롭다는 것은 마음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처럼 새로운 자질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는 반론이 제시되었다. 이 반론에 대해서는 바울의 말(4:3, 5, 23, 24)을 인용하여 의롭게 하는 것은 전가하는 것이라고 재차 설명되었다. 그리고 다른 답변으로서는 할례 받지 못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이방인들을 하나님이 정하게 하셨다는 베드로의 증언(10:10-20)이 인용되었다. 즉 율법에 따라 죄인들인 것을 믿음을 통하여 전가함으로 깨끗하게하셨고, 이후에 성령이 더 깨끗하게 하신다.” 루터는 이에 대해 그들이 참으로 죄인들이기는 하지만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깨끗하다고 여기신다고 말했다. 그에 의하면,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 보낸 믿음과 성령으로 된 하나님의 정결이요 정화다.” 의를 자질이라고 부르는 철학자들은 이러한 영적인 신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방인들의 마음은 참으로 부정하나 하나님은 그것을 정하게 여기신다.”

 

[논쟁 IX] 논제 , 2434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의에 대해서는 보상하시나 죄에 대해서는 보상하지 않으신다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의는 우리의 죄가 아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만 알고 있으면 잘못된 이해이다. 루터는 바벨론 왕이 시돈과 두로를 폐허로 만들고 애굽을 상급으로 받았으므로(25:9, 29:18-20), 우리가 이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바빌론 왕을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추론하는 것은 그럴 듯한 것이긴 하지만 잘못된 관점이라고 본다. 이것은 교황주의자들처럼 하나님의 선하심과 긍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루터는 하나님이 시민의 평화를 위하여 위정자들의 행위가 비록 경건치 못해도 때로는 바빌론이나 로마처럼 왕국을 보상해주신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만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죄까지도 상주시고 위선자에게까지도크신 선과 긍휼을 베푸심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보상은 육체적인 상이지 영적인 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루터가 보기에 이러한 주장은 이성을 매우 거스른다.”

 

[논쟁 X] 논제 , 32에 대하여

 

칭의와 사죄(赦罪)는 회개에 달려 있으므로 우리는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반론에 대해 루터는 이렇게 답변한다: 회개가 사죄에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회개가 사죄를 가져오는 원인은 아니다. 그는 스콜라 신학을 인용하여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 참 회개”(contritio)형벌의 공포에서 하는공포의 회개(attritio), 말하자면 절반의 회개를 나누어 보면서, 어떤 회개도 사죄를 가져오는 원인은 될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사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어느 곳에서도 숨을 내뿜는 성령”(3:8)이 원인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그를 뒤돌아보는(22:61) 긍휼을 베풀지 않았던들 베드로조차 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참회하는 자를 붙들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이끄시고 의롭게 하신다. 로마 가톨릭 신학에서는 사죄의 원인으로서 응보적 공적’(Meritum condigni)자비에 힘입은 공적’(meritum congrui)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루터는 참 회개가 사죄의 조건이라면 이것은 응보적 공적을 말하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는 무용한 것이 되고 말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도 참 회개가 필요한 것은 그것이 내 양심에 느껴지는 하나님의 진노의 우레요 번개로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터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의 예속물이요 재료이기 때문에 그가 의롭게 하시고자 하는 자를 그는 자유로이 의롭게 하신다.” 결국 우리는 참 회개가 사실 요구되기도 하고 필요하기도 하나 그래도 그것은 사죄의 공적도 결과도 될 수 없다고 대답해야 한다.”

 

[논쟁 XI]

 

히브리서 6:4-6에서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는 말씀은, 타락한 자는 은혜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죄 뒤에 계속적인 행위가 뒤따라야 한다는 논제는 잘못된 것이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여기에 대해 그리스도는 형제의 죄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용서해주라고 하셨으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이 구절은 복음을 모독하는 자에 대한 하신 말씀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루터는 이에 대해, 교황주의자들이 히브리서의 이 구절을 다르게 해석하여 타락한 자의 죄를 사해주지 않으려는 것은 잘못이라고 답변한다. 루터에 의하면, 이 구절은 복음 전체를 버리고 다른 교훈을 따라가는 자에 대한 경고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다른 교훈을 통하여서는 구원을 베풀지 않으시고,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서만 속죄 베푸시기를 워하시기 때문이다.

 

[논쟁 ] 논제 , 32에 대하여

 

야고보서 2:1726에 의하면, “행위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죽은 믿음이 의롭게 한다는 반론이 성립된다는 주장에 대해 루터는 궤변적인 반론이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행위 없이 존재하는 믿음은 거짓된 믿음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행위 없이 의롭게 한다는 전체적인 말에서 보면, ‘믿음의 의미는 언제나 행위의 열매를 맺는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논쟁 ⅩⅢ] 논제 , 5에 대하여

 

사람은 고백해서 죄 사함 받기를 갈망하므로 시편513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에서처럼 죄를 자인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말하자면 정말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근본적인 죄는 이 세상에서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는 논제(, 5)에 대해 반론인 것이다. 이에 대해 루터는 사람들이 죄를 보고는 있으나이것을 죄로 인정하려고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도 우리가 죄인임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논쟁 ⅪⅤ] 논제 , 1417에 대하여

 

인간의 본성적인 능력이 타락 이후에도 남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경하다는 논제에 대한 반박이 제기되었다. 이 반박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가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존하시므로, 흠 없고 완전하게 창조하신 인간의 본성은 타락 이후에도 더럽혀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보존되었다. 그러나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이 변할 수 있게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창조 이후에 피조물이 타락하였고, 또 타락 이후에 본성이 변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창조를 보전하신다는 것을 반박하는 논증의 증거가 되지 않는다.

 

[논쟁 ⅩⅤ] 논제 , 15에 대하여

 

아담의 죄로 사람의 본성이 타락했다는 논제에 대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1:27)는 구절을 근거로 이 논제에 대해 반론이 제기되었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라는 바울의 말(고전 11:7)도 반론의 논거로서 인용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어찌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할 수 있다고 말하는가?’라고 반문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루터는 모세의 말에 대해서는 전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으나 이 형상은 변할 수 있도록 지어진 실질적인 형상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므로 루터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낙원에서 잃어버렸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하였다고 말할 수 있었다. 또한 루터는 바울의 말에 대해서는 남자에서의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은,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하는 지배와 통치의 개념에 근거한 것이지, 의의 개념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논쟁 ⅩⅥ] 논제 , 3032에 대하여

 

하나님의 칭의의 역사는 너무도 위대하므로 어떠한 인간의 역사나 행사로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논제에 대해서, 칭의는 인간의 행위이지 하나님의 행위가 아니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왜냐하면 칭의에 관련해서 우리는 이 순간까지 도상 또는 과정에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반론에 대해서는, “칭의의 운동은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행위라고 설명되었다.

 

[논쟁 ⅩⅦ] 논제 , 27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 밖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낯선 것이라는 논제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이므로 우리의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울의 밖에 있거나 낯선 것이 아니라고 하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이 반론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되었다.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에게 긍휼로 주어진 것이므로 우리의 것이 된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이 낯선 까닭은 우리가 그것을 받을 만한 아무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논쟁 ⅩⅧ]

 

경건한 자들이 율법의 의무를 수행하는 일을 찬미할 수 있다는 논제에 대해서 찬성과 반대 양론이 대립하게 되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루터는 바울이 고린도 전서 15:10에서 자랑스럽게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노라고 자랑하는 말을 인용하여, 의롭게 된 자들은 자신을 경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면, 그들의 역사를 자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바울이 이 구절에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말한 뜻을 이해하여, 하나님의 긍휼이 하늘처럼 엄청나게 우리를 덮으시기 때문하나님의 긍휼의 보호 하에서라는 전제를 제시한다.

결국 경건한 자들이 자랑하는 그들의 의는 그 자체에 무슨 자랑할 만한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하나님이 그의 무한하신 선하심과 긍휼하심으로 본래적으로는 무가치한 그들의 행위를 인정해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성취의 가치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자랑해야 한다.”

 

[반론 XIX] 논제 , 8에 대하여

 

천주교의 교리는 세례를 받으면 원죄가 제거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교리에 의하면, 세례 이후에는 죄가 남아 있지 않지만, 이후에 자기 스스로 지은 죄에 대해서는 보상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죄를 보상하려고 시도하는 그 방법이 수도원들과 미사와 순례와 성자들의 중보기도 등이라는 것인데, 루터에 의하면 이는 잘못된 교리이다. 그동안 오직 어거스틴이 세례에 의해서 죄는 제거된 것이 아니라 전가된 것이라고 올바르게 주장했다. 원죄는 그 본질에 관한 한 죽을 때까지남아 있으나, “하나님의 긍휼로 이루어지는 전가에 의해서우리로부터 그것은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루터는 전가에 관한 한 죄가 머물러 있지 않으나 그 본질에 관한 한 그것은 남아 있다고 대답했다.

 

[논쟁 XX]

 

원죄가 제거되지 않는 것이라면, 인간은 누구도 의롭게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원죄 외에도 실범죄(實犯罪)까지 저지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느 것도 사실상 제거되지 않는다.” 이러한 반론에 대해서 루터는 원죄를 그 자체의 결과를 가져오는 실제성과 끊임없이 활동하는 악이라고 설명한다. 루터에 의하면, 원죄는 바울이 로마서 7:22-23에서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고 말한 것처럼 젊은 여인들이 욕정에 사로잡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원죄는 위궤양에서 계속적으로 흐르는 독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의사인 그리스도의 보호아래 그의 치료를 경험하고 말씀을 듣고 기도하면서 심판 날 모든 것이 불로 깨끗해질 때까지 언제나 씻어야 하고 깨끗하게 하여야 한다.” 루터는 이 일은 최후의 심판에서 생기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는 무덤 속에서도 계속된다고 말했다.

 

[논쟁 XXI]

 

고린도 전서 13:2에 의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믿음만으로는 사람을 의롭게 하지 못한다는 반론에 대하여, 루터는 바울이 한 그 말은 크리챤이라고 하면서 실제는 아닌 자들에게 외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루터는 바울이 행위나 사랑으로 사람이 의롭게 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말하자면 거짓된 믿음을 가진 자들은 게으르지만, 참 믿음을 가진 자들은 게으르지 않으므로, 참 크리스챤에게 사랑과 행위는 믿음에 뒤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루터에 의하면, “우리는 결과를 보아서 또는 뒤따르는 것을 보아서 참 믿음을 가진 자들을 확인하고 인정할 수 있다.

 

[논쟁 XX]

 

예수님은 가장 큰 계명을 사랑이라고 대답하셨다.(22:36-39). 그러므로 인간을 의롭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은 사랑(고전 13:13)이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사랑은 믿음보다 선행한다. 그러나 루터는 바울의 말을 풀어 죄를 사하는 것은 믿음이다. 사랑은 이 세상에서 참으로 죄를 사할만한 것은 못 된다고 말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논쟁 XX]

 

칭의가 모두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면, 하나님은 불공평한 분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키는 주장이 된다. 따라서 우리의 의지가 칭의에 약간은 기여하는 바가 있다고 전제되어야 한다. 이 반론에 대해 루터는 하나님이 칭의를 어떤 사람에게는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는 이유를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하나님이 결함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어쨌든 사람의 의지는 칭의에 아무 것도 기여할 수 없다.”

 

[논쟁 XX]

 

시민적 의는 하나님의 법령처럼 불경건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루터는 이런 주장에 대해 하나님의 분뇨와 같은 우리의 의를 돋보이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수도관에 햇빛이 비치는 것과 같은 것으로, 그렇게 한다고 해서 해와 같은 하나님의 영광이 바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논쟁 XXV]

 

아담은 타락 이전에는 원죄가 없었으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을 수가 없었다. 루터는 이 반론에 대해서 아담은 타락하기 전에는 그리스도를 소유할 필요가 없었고, 나아가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가 될 필요도 없었다고 인정한다.

 

[논쟁 XX]

 

스콜라 철학에서 정의하는 원죄의 정의는 그 한계성을 잘 설명하고 있으므로 좋은 정의이다. 이 반론에 대해 루터는 스콜라 철학에서 원죄를 탐욕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적당치 않으며, 또한 안셀름(Anselm)이 원죄를 우리 안에 있어야 할 원의(原義, institie originalis)의 결핍이라고 하는 것도 바르게 정의하지 못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본성의 부패라고 보았으며, 어거스틴은 그것을 우리에게 성령을 거스르게 하는 타고난 악이라고 보았다. 루터는 콜라 철학자들이 원죄를 탐욕이라고 하면서 세례 이후에는 이것을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하나의 아디아포라”(adiaphora)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비난했다.

 

[논쟁 XX]

 

마가복음 10:17-19에서 십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칭의와 영원한 생명을 약속했으므로 십계명을 지키는 자의 죄는 용서를 받는다. 루터는 이 주장에 대해 인정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어서 십계명을 지키는 자가 있느냐고 반문하면서 그렇지 않다”, “아담의 타락 이후 진정 율법을 지킨 것으로 발견된 자는 하나도 없었다고 말한다. 교황주의자들은 세례 이후 행위의 본질인 이성에 따라 십계명을 지킬 수 있다고 하며, 또한 오캄(Occam)과 같이 성령이 없이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주장과 친절함에 불과한 사랑을 십계명을 넘어서는 공적으로 여기고 있는 자들의 주장들은, 루터에 의하면, “변증법적인 환상이나 의견들이다.” 이렇게 원죄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들은 사람의 본성은 원죄에 의하여 더렵혀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결국 십계명을 지키는 자는 구원을 얻지만, 누구도 그것을 지키는 자는 없는 것이다. 루터에 의하면, 창세기 3:15에서 하나님이 예언하신 대로 뱀의 머리를 짓부순 그 씨만 계명을 지켰다.” 바로 그가 그리스도 예수다......아멘.”

 

믿음이 의롭게 하는가에 대한 루터의 토론

 

이 부분은 그동안 진행되었던 논쟁에 대한 보충적인 토론에서 루터가 답변한 것을 기록한 내용이다.

 

[논쟁 에 대하여]

 

믿음과 행위가 반대되는 것이라면, 칭의를 위해서 하는 율법적 행위는 믿음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것에 관하여 반대되는 것들은 하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논쟁 에 대하여]

 

믿음도 하나의 행위라고 보는 견해에 대하여 루터는 믿음은 성서에 따라 행위라 부르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약속과 율법의 두 교리에서 믿음은 하나님의 역사이고 행위는 인간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음은 약속을 바라보고, 행위는 율법을 바라는 것이므로,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것이다.

 

[논쟁 V에 대하여]

 

누가복음 7:47에서 죄 많은 여인을 두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죄의 용서를 받게 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죄의 용서를 받는 것이 믿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반론에 대해 루터는 여기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믿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랑을 말씀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그것은 이중적인 의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사람에게 행위는 안에 있는 참 믿음을 겉으로 드러내는 나무의 열매와 같다. 그러므로 사람들 앞에서는 행위가 의롭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칭의 그리고 사죄의 선언이 된다.

 

[논쟁 에 대하여]

 

우리의 복종은 영원한 생명의 시작르서 칭의의 외형적인 원인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서는 우리의 복종이 필요하며, “적어도 구원의 부분적인 원인이다라는 반론에 대해 루터는 이렇게 대답한다. “믿음만으로 모든 좋은 축복을 얻는다.” 그것도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닌 믿음이 이러한 은혜를 가져 오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원죄는 범죄의 뿌리이며, “멈추지 않는다.” 그러므로 죄의 용서는 우리가 죽기까지 멈추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루터는 어거스틴을 인용하여, “원죄가 세례에서 사함 받으나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죄가 돌려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의 네가 없이 너를 지으신 이는 너 없이는 너를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는 말을 덧붙인다.

 

[논제 에 대하여]

 

진정한 제의(提議)는 실재(cum re)와 부합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는데도 죄가 남아 있다고 하면, 어느 하나의 제의는 거짓된 것이다. 이러한 반론에 대해 루터는 하나님의 긍휼은 모든 죄를 무로 만드시는데 이는 마치 그가 무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것과 같다고 한다. 칭의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가 존재함을 보여주기 때문에하나님이 죄를 전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일 우리는 죄를 범하고 매일 우리는 계속적으로 의롭게 되어간다.”

 

[논쟁 에 대하여]

 

사도행전 16:9를 고려할 때 의롭게 된다는 용어는 새롭게 되는 것또는 새로운 자질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루터는 이 말씀 속에는 의심할 여지없이 전가의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루터에 의하면, 그의 답변은 사도행전 10:15에서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된다 하지 말라는 말씀과 같이 이방인들은 정하게 되어유대인들과 같아지게 된다.

 

[논쟁 에 대하여]

 

하나님은 인간의 의에 대해서는 보상하시나 죄에 대해서는 보상하지 않으신다. 그런데 하나님은 불경건한 느부갓네살 왕을 그의 종이라 선언하셨으며, 두로와 시돈을 멸망시킨 그에게 애굽을 상급으로 주셨다(25:9, 29:18-20). 이렇게 인간의 죄도 보상받는다는 주장에 대해 루터는 느부갓네살 왕의 시민적인 행위 또는 통치자의 행위로 본다. 하나님은 이러한 정죄된 자들의 시민적인 행위에 대해 세상적인 상급을 주시는 한편, 죄들에 대해서는 다른 형벌로 처리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하나님 자신이 그 죄를 갚으시는 것이지 사람들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다.”

 

[논쟁 X에 대하여]

 

회개는 칭의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는 반론에 대해서 루터는 그리스도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4:17)는 말씀을 인용하여 그것은 필요한 것이고 하나의 원인이므로 공적으로서의 가치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칭의의 원인이며, 칭의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므로 그것은 칭의에는 쓸모가 없는 것이다. 오직 내가 진정 후회할 때 그때는 긍휼과 은혜가 있다.”

 

[논쟁 에 대하여]

 

노바티안(Novatian)을 인용하여 한 번 믿음에서 떨어진 자는 구원이 불가능하다고 했다는 반론에 대해 루터는은혜는 세례받은 후에도 타락한 자에게 남아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루터가 엄격주의를 분명하게 반대하는 견해를 보여주는 것이다.

 

[논쟁 ⅩⅣ에 대하여]

 

칭의는 행위 없이 생긴다반론에 대해 루터는 행위는 믿음의 결과라고 답변한다.

 

[논쟁 ⅩⅤ에 대하여]

 

하나님은 사람을 그의 형상대로 지으셨으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다는 주장에 대하여 루터는 아담의 타락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와 진리의 형상을 잃어버렸으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하였다고 말한다.

 

[논쟁 ⅩⅦ에 대하여]

 

의는 우리 안에 있으므로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는 반론에 대해 루터는 그와 같은 논리는 보상 개념에 매우 가깝다고 비판한다.

 

[논쟁 ⅩⅧ에 대하여]

 

경건한 사람은 위선을 자랑하지 않으므로, 경건한 다윗이 그의 의를 자랑했던 것은 위선이 아니다. 이런 반론을 놓고 우리에게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자랑할 것이 허용되었다고 루터는 말한다. 그는 다시 하나님의 주권적 긍휼의 보호 아래서 우리가 어떤 공적이 조금 있다고 해서 자랑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논쟁 ⅪⅩ에 대하여]

 

교황주의자들은 원죄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본질적으로 제거된다는 교리를 주장한다. 그러므로 세례 후에 지은 죄는 그리스도의 피에 속한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속한 것이므로 우리가 보상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루터는 어거스틴의 원죄는 세례를 통하여 죄이기를 그친다는 말을 인용하여 이러한 견해를 반박한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이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관용은 죄를 용서하시고, 사람은 언제나 그 밑에서 머물러 있다.

 

[논쟁 ⅩⅩ에 대하여]

 

루터는 원죄를 살아 있는 실제성으로 본다. 그러므로 그것은 마치 상처 속의 독과 같아서 고름을 닦아내는 것만으로는 치유되지 않고, 아물 때까지 계속 고약을 붙여 독을 제거해야 한다.

 

[논쟁 ⅩⅪ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3:2에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믿음만으로는 의롭게 하지 못한다. 이런 주장에 대하여 루터는 참 그리스도인은 믿음뿐만 아니라 사랑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논쟁 ⅩⅫ에 대하여]

 

사람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최대한의 능력이 필요한데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반론에 대해 루터는 사랑은 넓이에 관해서 큰 것이지 강도에 관해서는 더 큰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칭의의 조건에서는 믿음이 더 크기 때문이다.” 루터에 의하면 현세에서의 사랑의 공적으로는 믿음을 얻을 수 없으나 믿음의 공적으로는 사랑도 얻을 수 있다.”

 

[논쟁 ⅩⅩⅢ에 대하여]

 

성서에서 하나님이 의지를 용인하는 이상 우리의 의지가 칭의의 또 하나의 다른 원인이라는 것이 증명된자는 주장에 대해 루터는 의지는 원인이 아니다고 하면서 그것을 통하여서는 은혜를 받는 정도로 평가한다.

 

[ⅩⅩⅣ에 대하여]

 

시민적 의는 하나님의 법령이므로 이는 불경건하지 않다는 주장에 대해 루터는 하나님에 관해서만 그것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타락과 불경건으로 인하여 우리 내부에서 더럽혀져 있기 때문이다.”

 

[논쟁 ⅩⅩⅤ에 대하여]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는 본성이 의로왔고 완전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필요 없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

 

[논쟁 ⅩⅩⅥ에 대하여]

 

원죄는 의의 상실뿐만 아니라 성령을 항거하고 율법을 배척하는 동작이요 하나님의 율법에 항거하여 행하는 마음의 충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동일한 애정이 악으로도 또는 덕으로도 변할 수 있음을 지적했다.

 

[논쟁 ⅩⅩⅦ에 대하여]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19:17)는 말씀과 같이, 영원한 생명은 십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주어진다. 십계명을 바라보는 것은 행위이므로, 영원한 생명은 그리스도 없이도십계명을 지키는 행위 때문에 주어진다.” 이런 주장에 대해 루터는 누가 계명을 지키는 자로 발견되는가라고 묻겠다라는 말로 오히려 반문한다.

 

결 론

 

이렇게 루터의 칭의에 관한 토론문을 읽고 나서 정리해보면, 루터가 얼마나 칭의의 교리를 중시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칭의는 물론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복합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 토론문을 읽는 것만으로도 그 중요한 핵심은 잡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 토론문이 주제로 삼고 있는 칭의를 설명하기 위하여 루터는 로마서 3: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는 말씀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칭의론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구절을 주제로 한 루터의 다른 토론문 믿음과 율법에 관한 초론문인간에 관한 토론문을 더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이 칭의에 관한 토론문읽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