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연구/기독교 역사 이야기

칼빈의 재세례파 유아세례관에 대한 비판

heojohn 2020. 4. 8. 23:29

1. 서론

 

종교개혁시대에 유아세례에 관한 논쟁은 현대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특히 재세례파가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해서는 물론 종교개혁 진영 안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목숨을 건 투쟁을 하였고, 결국 비극적인 종말을 맞고 말았다는 사실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아물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왜 종교개혁 초기부터 유아세례가 이토록 치열한 쟁점이 되어야 했던가? 이 물음에 대해서는 먼저 재세례파의 형성과정과 그들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유아세례의 반대를 지키고자 했던 대의가 그들의 신앙 어느 부분에 함의되어 있는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또한 재세례파의 비극이 된 뮌스터 왕국에 대해서도 살펴보아야겠다.

 

그리고 종교개혁을 완성했다고 평가받는 칼빈이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재세례파의 종말기에 즈음하여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파악함으로써 우리는 이 문제의 전말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신학적인 관점에서 김문기 교수의 논문 재세례파와 칼빈의 기독교강요에 나타난 유아세례에 대한 소고를 읽으면서 이 문제를 논증할 것이다.

 

2. 재세례파의 형성과 몰락

 

2.1. 재세례파의 형성

 

재세례파의 형성은 츠빙글리의 취리히 지역, 토마스 뮌처(Thomas Muntzer, ca. 1490-1525)에서 후트(Hans Hut, ca. 1490-1527)로 이어지는 중부 독일 지역, 그리고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멜히오르 호프만(Melchior Hoffman, ca. 1500-1543)에 의해 독일 북부 지역으로 옮겨가는 등의 다원적인 형태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재세례파의 초기 형성의 배후에는 인문주의의 영향이 크게 미쳤음은 츠빙글리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츠빙글리는 1516년 발간된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신약성경을 읽었고, 또한 바젤에서 에라스무스를 직접 만나기도 했다. 이러한 츠빙글리가 그의 사역 초기에 신약성경 읽기를 강조하면서 헬라어를 강습했었는데, 여기에서 학습한 일단의 신자들 중에서 유아세례의 사례가 신약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다는 문제점을 제기한 것이다. 그러나 재세례파의 이러한 주장은 츠빙글리의 취리히 지역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에 널리 확산되어 있었던 헬라어 고전 읽기와 성경연구의 바탕에서 나온 것이며, 이런 사실은 그들이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츠빙글리도 처음에는 이들의 주장에 동조했으나, 더 깊은 성경연구를 통해 곧 그의 견해를 바꾸었다. 그는 성경에서 보아 그들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했으나, 후브마이어(Balthasar Hubmaier, 1485-1528)1525년 하나님으로부터 유아세례를 폐지하라는 계시를 직접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츠빙글리와 결별하였다. 츠빙글리는 곧 이들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논증하는 세례, 재세례, 그리고 유아세례에 관하여를 써서 발표하였으나, 후브마이어 또한 재세례파의 입장을 밝히는 신자의 그리스도교적인 세례를 발표하여 츠빙글리를 반박하였다. 후브마이어는 다음 해 1526년에는 아이들이 신앙 안에서 교육을 받기까지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지 않는 대단히 오래되고 아주 새로운 선생들의 판단이라는 책을 써서 초대교회부터 5세기까지 유아세례를 주지 않았으며, 신앙세례만 주었다고 주장했다. 후브마이어는 유아세례를 성서가 금하는가에 대하여 그렇다고 답한다.” 그리고 신앙세례는 믿는 자에게만 세례를 주는 것이며, 물세례가 죄의 용서를 일으키지 못하고 믿음이 일으킨다고 하였다. 이후에 일어난 사태를 보면, 츠빙글리가 취리히 시의회를 움직여 이들을 추방하기에 이른다. 추방된 이들은 박해를 피해 각지로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세력을 확대하여 후기 형태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1527년에 재세례파를 비판하는 설교를 한 루터는 1528년 독일에 침투한 재세례파에 대해서 재세례파에 관해서 두 명의 목사에게라는 글을 써서 발표했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1528년 황제의 명령과 1529년 슈파이어(Speyer)제국회의 및 1530년 아우구스부르크 제국회의는 재세례파를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이들은 체포되면 사형을 받기까지 했다. 이러한 제국법령 및 각 나라의 정부에 의해 반역자로 몰려 처형된 재세례파의 지도자들과 신자들은 후브마이어를 비롯하여 모라비아에서 형제원을 창설했던 야콥 후터(Jakob Hutter, 1500-1536), 네델란드와 독일 북부 지역에서 세상의 종말을 예언하고 새로운 엘리야로 자칭하면서 재세례파를 이끌었던 호프만과 그의 제자들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들 가운데 1527년 쉴라이타임 신앙고백(Schleitheime Confession) 작성에 주도적 역할을 한 마이클 새틀러(Michael Satttler)의 참혹한 처형은 재세례파가 받은 박해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토록 죽음을 불사하는 용기, 어쩌면 광기라고 불러야 할 재세례파 신앙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들의 신앙은 재세례파 신앙고백이라고 할 7개조의 쉴라이타임 신앙고백에 잘 나타나 있다.

 

(1) 회개 및 개심을 경험하고 자기의 죄가 그리스도에 의해 다 소멸되었다고 진실로 믿는 이들에게 세례를 베푼다. (이런 믿음이 불가능한 유아세례는 반대한다.)

(2) 일단 아나뱁티스트의 신앙을 받아들인 후 세례까지 받은 이가 실수하거나 죄를 지었을 경우, 비록 부주의의 결과였다 하더라도 파문시킨다.

(3) 성찬식에 참여하고자 하는 이는 우선 세례를 받아야 한다.

(4) 세례 받은 이들은 사단이 이 세상에 심어놓은 악과 죄악으로부터 스스로를 성별해야 한 다.

(5) 교회의 목사는 바울이 명하듯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도 좋은 평판을 듣는 인물이어 야 한다.

(6) 교인들은 여하한 이유를 막론하고 무기를 사용할 수 없다.

(7) 교회 교인들은 누구도 맹세할 수 없다.

 

여기서 보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기까지 불사했던 재세례파들이 유아세례를 반대했던 이유는 (1)항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유아들은 이러한 회심과 개심이나 죄의 소멸을 믿는 신앙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근본적인 이유로는 전술한 바와 같이 성경에서 유아세례의 사례가 없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2.2 뮌스터 왕국의 건설과 몰락

 

초기에는 초대교회의 교회를 본받고자 했던 이들의 개혁운동은, 그들의 평화주의적인 신앙고백에도 불구하고, 1535년에 이르러 결국은 호프만의 말세적인 예언에 반응하여 재세례파 왕국을 건설하기 위한 폭력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재세례파들이 이러한 신앙적 대의를 지키기 위해 뿌린 피의 대가를 찾고자 하는 노력은, 말세의 천년왕국이 그들에 의해 실현될 것이라는 예언에 의해 발화되었다. 이들이 천년왕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곳은 뮌스터였다. 뮌스터는 네델란드에 가까운 독일 북부 지역의 작은 도시로서 로마가톨릭교회 주교의 영지였다. 이 도시에서 영주와 주민들 사이에 교회세와 봉토세를 둘러싼 갈등이 폭발한 것은 흉년과 전염병 때문이었다. 스피츠는 그의 종교개혁사에서 호전적 아나뱁티스트들이 벌인 소동들 가운데 그 광란의 극치를 이룬 것은 뭐니뭐니 해도 뮌스터 왕국(Kingdom of Munster)의 선포라 할 수 있겠다고 말한다. 재세례파들의 뮌스터 왕국은 건설과 몰락에 걸린 시간은 불과 몇 년도 되지 않는다. 그 경위는 대략 다음과 같다.

 

1532년 시의회는 주민들의 종교개혁의 압력에 못 이겨 루터파 설교가 로트만(Bernard Rothmann)에게 설교와 교회의 지도를 맡기기로 했다. 이렇게 뮌스터가 개혁파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개혁파 난민들이 몰려 왔다. 그런데 로트만은 15341월 얀 마티스(Jan Matthys)가 이 도시에 보낸 두 명의 네델란드인 재세례파 사도(바에텔 보에크빈더, 빌렘 쿠퍼)에 의해 다시 세례를 받았다. 로트만은 그가 직접 재세례를 베푸는 것을 보고 이에 반발하는 루터파 설교가들에 대해서는 그의 지도력으로 무마할 수 있었다. 로트만에게 사도를 파송하여 재세례를 받게 한 할렘 출신 얀 마티스는 뮌처와 같이 물리적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믿지 않는 다를 제거해야 한다는 과격한 사상을 가진 인물이었다. 여기에 엘리야라고 자처하던 호프만을 따라다녔던 이 도시의 유지이며 직물상인 크닙퍼돌링크(Bernt Knipperdolinck)의 협력아래 뮌스터는 빠르게 재세례파의 거점 도시가 되었다. 뮌스터가 천년왕국의 새 예루살렘이라는 예언까지 나돌면서, 이런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15342월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왔다. 네델란드에서 이 도시에 온 라이덴의 존(John of Leiden, 또는 Jan Bockelson)이 크닙퍼돌링크와 함께 시가지를 뛰어다니며 회개하라고 외치는 사건을 주동한 것이다. 온 도시가 이런 종교적 히스테리의 물결에 휩쓸리고, 중산층 루터란들은 이 도시를 떠나고 각지에서 온 무산층(proletarians)이 대신 자리를 메웠다. 이것은 이달 말경(28)에 벌어진 시의회 선거에서 아나뱁티스트들이 도시행정의 실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때에 얀 마티스가 네델란드로부터 이 도시에 왔다. 이때까지 이 도시의 지도자로 군림하던 로트만은 그의 지도권을 마티스에게 양도했다. 마티스는 이곳에 남아 있던 루터란과 로마가톨릭교회 신자들을 즉시 처형하려고 하였으나, 이는 거부되었고 대신 추방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도시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강제로 재세례파로 개종해야 했다. 그리고 모든 재산은 국가로 귀속되었고, 사회조직은 재정비되었다. 공산주의 사회가 된 것이다. 그러나 성을 포위하고 있던 주교의 군대를 물리치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성 밖으로 출격했던 마티스는 전투에서 죽고 말았다. 그렇다고 주교가 완전히 승리한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마티스가 죽고 나자 그의 자리는 이제 라이덴의 존이 물려받게 되었다. 그는 권력을 장악하자 곧 공포에 질려 복종할 수밖에 없는 정치체제를 구축하였다. 또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일부다처제를 실시하고, 스스로 약 15명의 미모의 여인들까지 아내로 거느렸다.

 

15348월에 주교의 용병들을 물리친 존은 기고만장해져서 새 예루살렘 왕국을 선포하고 왕좌에 즉위했다. 그는 로트만을 궁정 웅변가에 임명하고 크닙퍼돌링크는 수상에 임명했다. 그는 또한 그의 아내 중에서 여왕을 임명하기도 했다. 그는 시장 한복판에 금술로 만든 왕좌를 설치하고 그의 왕국을 통치했다. 그러나 왕국의 운명은 15351월에 주교의 군대가 뮌스터시를 포위함으로써 위기를 맞게 되었다. 포위가 계속되자 도시에는 식량이 떨어졌고, 인육을 먹는 상황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마침내 그 해 6월에 도시를 탈출한 시민의 협조로 주교의 군대는 도시를 함락했다. 존 왕을 비롯한 신하들은 모두 체포되어 잔혹하게 처형되었다. 이로써 재세례파 뮌스터 왕국은 몰락했고, 이 도시는 다시 주교의 손으로 넘어갔다. 살아남은 시민들은 다시 로마가톨릭교회에 합류했다.

 

3. 칼빈과 재세례파의 세례관의 차이와 비판

 

3.1 재세례파에 대한 칼빈의 비판

 

칼빈이 재세례파를 처음으로 비판한 것은 1534“Psychopannychia”에서였다. 여기에서 주된 비판의 요지는 재세례파가 주장하는 영혼수면설이었다. 칼빈은 츠빙글리와 마찬가지로 죽음과 부활 사이에 영혼이 잠잔다고 하는 영혼수면설에 동의하지 않았다.

 

칼빈이 재세례파를 본격적으로 공격한 것은 1536기독교강요초판에서부터이다. 칼빈이 기독교강요초판을 저술할 무렵은 뮌스터 왕국이 기세를 떨치고 있을 때였고, 출판할 때는 뮌스터 왕국이 몰락할 무렵이었다. 이 무렵에는 유럽의 모든 통치자와 당국자들이 재세례파들을 국가에 대해서는 반역자들이고, 교회에 대해서는 이단자들로 보고 있었다. 더욱이 프랑스의 왕 프란시스 1세는 로마교황에게 충성스런 신자였다. 칼빈이 초판의 원고를 마무리하고 프란시스1세에게 헌정사를 쓸 때에는 재세례파의 폐해가 역사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났을 때인 것이다. 칼빈은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개혁교회들이 재세례파와 같은 부류로 취급받는 것을 매우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기독교강요를 프란시스1세 왕에게 헌정하는 서문에서 참된 신앙을 가지고자 하는 종교개혁파들을 변호하고, 재세례파들에 대해서는 마귀의 도구라고까지 비난하고 있다. 나아가 칼빈은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분쟁의 원인이 대부분 재세례파에게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다른 종교개혁진영과 특징적으로 차이가 나는 재세례파의 세례관, 특히 유아세례에 대한 입장이 매우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강요2판에서부터 유아세례에 대해 한 장 분량의 진술을 추가하여 재세례파의 견해를 반박하고 있다.

 

3.2. 세례관의 차이

 

칼빈과 재세파의 세례관 차이는 크게 보면 다음 두 가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1) 집례자에 따라 세례의 효력이 좌우되는가?

재세례파는 집례자의 합당성 여부가 세례의 효력을 결정하는 요인이 되며, 로마교황의 권위 아래에서 받은 세례는 아무런 가치가 없으므로 재세례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사도행전 19:3-5에 근거하여 신앙에 의한 재세례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칼빈은 재세례파를 도나티스트라고 비난하면서, 세례의 효력은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종속된 것이므로 집례자의 권위에 상관없이 유효한 것이라고 말한다. 세례는 요한의 때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받으셨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나 그리스도의 세례는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하며, 따라서 재세례는 필요 없는 것이 된다.

(2) 세례는 개인적 신앙의 완성인가, 아니면 신앙의 과정에 필요한 외면적인 표지인가?

 

쉴라이타임 신앙고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재세례파에게 세례는 완전한 신앙을 이룬 사람에게만 주어질 수 있는 것이며, 세례 후에라도 실수하거나 죄를 지으면 그들의 공동체에서 파문되어야 한다. 재세례파의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헌신하는 신자들의 공동체였다. 그러나 칼빈에게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진 죄의 용서를 신뢰하고 하나님 앞에 그의 자녀가 되는 믿음으로 교회에의 입문을 허락받았다는 성별의 표지(signum)’이다. 동시에 이렇게 되기를 원하는 믿음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기념의 표(nota)’이며, 이에서 나아가 수세자의 고백에 대한 표식(symbolum)’이다.

 

3.3. 유아세례관의 차이와 칼빈의 비판

 

앞에서 칼빈과 재세례파의 세례관의 차이에 대해 살펴본 바와 같이 유아세례관에 대해서도 문제의 발단은 성경해석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당시 종교개혁진영의 분파로서 성경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입장에서는 같았다. 그러나 칼빈은 재세례파가 성경해석에 있어서 상황에 관한 이해 없이 성경구절을 짜 맞추거나 일반화하는 것으로 보고, 재세례파의 성경해석을 배척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의 유아세례관에 대한 차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이들이 성경의 어느 구절을 어떻게 해석해서 주장의 차이를 가져오게 되었는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게 된다.

 

(1) 먼저 재세례파는 성경에 유아세례의 근거가 없다는 점을 들어, 이는 단지 인간의 인간의 뻔뻔스러움과 호기심 그리고 어리석은 경박함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칼빈은 사도행전 16: 15-32에 나오는 가족 세례에 유아도 포함되었으며, 유아세례는 하나님이 그의 주권으로 창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칼빈은 또한 마태복음 19:13-15에서 예수님이 천국은 아이들과 같은 사람의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아이들에게 안수하신 일을 예로 들어 아이들이 세례를 받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2) 또한 칼빈은 아브라함이 처음 이삭에게 베풀었던 구약에서의 할례를 세례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할례와 세례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동일한 약속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자녀들이 그들의 부모들에 의해 베풀어진 할례를 통해 거룩해지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은 그들의 부모들에 의해 베풀어진 세례를 통해 거룩성을 받는다(고전 7:14). 칼빈은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께서 조상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들을 성취하기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다(15:8)고 말한다. 그러나 할례와 세례의 차이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할례는 생후 8일째에 하는 것이지만, 세례는 정해진 날자가 없다. 이런 사실에 대해 왜곡되게 해석하는 재세례파를 비판하면서, 칼빈은 구약에서 ‘8’이라는 숫자에 부활의 뜻이 있음을 발견했다. 여기서 칼빈은 할례와 세례에 새로운 삶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는 해석을 제시했다. 이렇게 하여 칼빈은 세례가 생의 마지막 날까지 그리고 육신의 완전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 진행되어야 할 육신을 죽이는 현재 삶의 전체과정을 뜻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루터와 같은 것이다.

(3) 재새례파는 선교명령의 두 구절(28:19, 16:16)을 인용하여 먼저 복음을 가르치고 수세자가 회개와 신앙을 고백한 다음에 세례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런 조건을 이행할 수 없는 유아들에 대한 세례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이 순서가 아브라함과 이삭의 경우에서와 같이 성인들에게는 유효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세례를 받은 신자의 자녀들에게는 이미 출생으로부터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졌으므로, 유아세례를 받은 이들에게는 성장함에 따라 믿음이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는 바울이 할례를 믿음으로 인친 것(4:11)이라고 한 말에 의해서도 보증된다.

(4) 세례가 중생의 씻음과 새롭게 하는 것(3:5)이며 영적인 중생이라고 보는 재세례파에게는, 중생이 불가능한 유아들에게 세례는 줄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칼빈은 요한이 이미 어머니 태 안에서 거룩하게 되었다(1:15)는 구절과 성령과 불의 세례(3:11) 및 성령과 물로 거듭남을 말하는 요한복음 3:5를 들어, 성령의 사역이 영혼의 죄를 태우는 불과 몸의 부정을 씻는 물과 같은 것으로 해석한다. 성령은 유아 때 주어진 표징(tessera)이 전 생애의 과정에서 역사하도록 돕는다.

(5) 재세례파는 사도행전 19:5에서와 같이 요한의 세례를 받은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세례는 그리스도의 세례라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물세례는 요한의 것과 그리스도의 것이 동일하며, 재세례파가 주장하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받은 세례(19:5)는 성령세례라고 본다. 따라서 재세례파가 이를 물세례로 보는 것은 잘못된 해석을 하는 것이다. 또한 재세례파는 세례는 진정한 씻음(5:26)을 통한 죄사함을 받는 것이라고 하면서, 유아들은 성인이 되기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칼빈은 이미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죄인인 우리는 유아 때부터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희망의 표지(signum), 즉 세례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유아에게 죄사함을 선물하며,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게 하는 것이다.

(6) 재세례파는 유아들을 성만찬에 참여시키지 않는 것을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지 않는 논증으로 활용한다. 이에 대해 칼빈은 유아들에게 성만찬을 베풀 수 있는 나이의 제한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지만(22:19, 고전 11: 25-29에 근거하여), 세례의 경우에는 성경에 이런 제한적 말씀이 없다고 논박한다. 칼빈에게 유아세례는 오직 정당할 뿐이며, 유아세례는 구약에서의 할례와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일 뿐이다.

 

4. 결론

 

우리는 이제까지 재세례파와 칼빈의 기독교강요에 나타난 유아세례에 대한 소고를 살펴보았다. 우리가 이를 통해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에 근거해서 로마가톨릭교회의 7성례를 세례와 성만찬의 2성례로 줄여야 한다는 주장에는 일치된 견해를 보였지만, 세례와 성만찬에서의 각론적 견해는 서로 달랐다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각파의 견해 차이는 끝내 합의되지 못했고, 특히 세례에 관한 견해 차이는 결국 재세례파와 루터파, 츠빙글리에서 칼빈으로 이어지는 개혁파로 분열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열은 종교개혁자들이 그토록 크게 외쳤던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의 반향(反響)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아야겠다. 먼저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소개된 헬라어 신약성경을 읽은 사람들은 로마가톨릭교회 교리의 부당성과 허위성을 쉽게 간파할 수 있었다. 종교개혁 지도자들은 이들로부터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지만, 성경 구절의 해석이 각자 다른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성경해석의 차이는 결국 각파의 특징적인 교리로 발전하면서 교리논쟁으로 이어졌다. 교리논쟁은 개혁진영 각 분파들끼리의 성경해석의 차이도 원인이 되었지만, 한편으로 그 배경에는 생존과 주도권 다툼을 위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칼빈이 재세례파의 유아세례 반대를 반박하는 교리논쟁도 이러한 것의 하나이다.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재세례파는 그들의 개혁교리를 너무 과격하게 밀고나간 끝에 결국 고립에 빠졌고, 재세례파는 그들의 천년왕국이라고 믿었던 뮌스터 왕국의 실패로 몰락하는 비운을 겪고 말았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교회가 세상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한다. 하나님은 누구의 성경해석이 옳고 어느 교파의 교리가 바르다고 하시는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역사적으로 절대적인 정답을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김문기 교수가 그의 논문의 결론에서 에큐메니칼적인 입장에서 논쟁하기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이해로서 서로 장점과 단점을 보완하여 목회 현장에서 적용하는 지혜를 강조하는 것은 옳은 견해라고 본다. 또한 그가 칼빈의 견해와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도의 자녀들이 세례를 받도록 하여 이들의 전 생애의 삶 속에서 세례에 대한 기억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계속 나타나도록 하자는 주장은 널리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김문기. “재세례파와 칼빈의 기독교강요에 나타난 유아세례에 대한 소고”, 역사신학 논총, 18, 서울: 이레서원, 2010. 8-33.

 

Calvin, John.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고영민 역. 기독교강요: 6. 서울: 기 독교문사, 2008.

 

Spits, Lewis W.., The Reformation. 서영일 역. 종교개혁사. 서울: 기독교문서선교 회,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