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연구/기독교 역사 이야기

경건주의 초기 역사에 대한 고찰

heojohn 2020. 4. 9. 00:21

필립 야콥 스페너

1. 서론

 

경건주의에 대해서는 독일의 슈페너(Philipp Jakob Spener, 1635-1705)와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 1663-1727), 친첸도르프(Nikolaus Ludwig Grafvon ZinZendoef, 1700-1760)를 주로 다루면서 독일 루터교회 내의 종파적 운동으로 보는 교회사가들의 견해가 일반적이다. 칼 호이시(Karl Heussi)나 쿠르트 알란트(Kurt Aland) 등이 대표적으로 이와 같은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유스토 곤잘레스(Justo L. Gonzalez)는 앞의 독일 경건주의자들에 더하여 영국의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를 포함하고 있다. 더욱이 윌리스턴 워커(Williston Walker)는 여기에다 청교도들이 대량 이주한 신대륙 미국의 대각성 운동까지 포괄하고 있다. 그러나 솜머(W. Sommer)는 정치사적 입장과 신학사적 입장을 나누어보기도 한다. 그에 의하면, 정치사적으로는 독일의 “30년 전쟁(1618-1648)을 종식한 1648년 베스트팔렌 종교평화협약으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이 몰락한 1806년까지를, 신학사적으로는 슈페너가 경건한 소원들(Pia Desideria)을 출판한 1675년을 기점으로 1799년에 슐라이에르마허가 종교강화를 발표한 시기까지로 본다. 이렇게 경건주의 역사에 대한 교회사가들의 견해는 다양하다. 경건주의를 독일 안에서 일어난 것으로만 보려는 몇몇 독일 신학자들의 견해들도 아직 일치하지 않고 있다. 이런 신학자들에게는 공통적으로 경건주의의 초기 역사를 너무 간과하는 측면이 있다.

 

그런데 에르네스트 슈투플러(F. Ernest Stoeffler)는 이 부분에 대한 상세한 연구를 통해 경건주의 초기역사를 저술했다. 슈투플러가 이 책을 통해 경건주의의 발생과 초기 역사(1590-1690)를 상세하게 밝혀줌으로써, 한층 깊게 경건주의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슈투플러는 이러한 경건주의의 초기 역사를 살피면서, 17세기의 개신교의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경건주의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경건주의는 일반적으로 오해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소개한다. 사실 종교는 기본적으로 경건한 것이라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어떤 종교에서 경건주의를 비판한다는 것은 매우 이상하게 보인다. 그런데 비판의 이유는 경건주의자들이 교리 또는 신학적 논증의 정확성보다는 십자가적 경건의 삶을 실천하는데 가치를 두면서, 개신교에 대한 외부적 박해에도 수동적이고 평화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경건주의가 세상에 안이하게 동화되는 개신교회에 대해서 내부적으로는 오히려 저항했기 때문이다. 이런 개혁적 성향은 강력하게 표출되었지만, 오히려 설교와 저술을 통해서일 뿐이었다. 그러나 경건주의는 이런 활동에만 머물지 않고, 근대 선교운동을 먼저 시작했으며, 경건의 실천을 강조함으로써 루터교와 개혁교회의 변화를 이끌어냈고, 나아가서는 미국 개신교를 형성하는 요인이 되었다.

 

슈투플러는 경건주의라는 용어를 독일 루터교 안의 운동에만 적용하려는 입장에 반대하여, 사도시대 이래로 있어온 경험적 전통“17세기 동안의 개신교 안에서경건주의 운동으로 표출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말하자면 경건주의는 “4가지 큰 설명적 개념(Interpretative concepts)”으로 아우르는 기독교 공동체 전체의 교회사에서 일관된 하나의 정신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슈투플러는 에른스트 트뢸치(Ernst Troeltsch, 1865-1923)와 같이, 경건주의가 역사적으로는 영국의 퓨리턴들(puritans)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견해에서 출발한다.

 

이렇게 시작한 초기 경건주의는 앞에서 말한 오해뿐만 아니라, 비난을 받는 몇 가지 본성을 가지고 있다. 경건주의는 주관주의의 문제감정적 즐거움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오해와 함께 금욕주의극단주의 혹은 열광주의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리츨(Albrecht Ritschl, 1822-1889)에의하면, “경건주의자들은 본질적으로 특별집회(conventicles)를 통하여 수도원적 경건을 개신교 교회에 적용해 보려한, 괴상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또한 트뢸취는 경건주의자들은 교회형태(Church type)의 기독교에 대항해서 종파 형태(sect type)의 작은 종교집회를 선택한 이들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런 비난은 경건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경건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4가지 특성을 알아야 한다. 슈투플러에 의하면, 그것은 첫째로 개인과 하나님 사이에 인격적 관계에서의 내적인 동일화또는 접붙임(ingrafting)”이라는 개인의 체험적요소이다. 둘째는 종교적 이상주의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현실과 이상 사이, 즉 멸망 또는 생명으로 가는 두 길 사이에서 긴장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개인의 중생을 통하여 교회와 국가의 개혁을 목표로 하도록 이끈 것이다. 셋째로 경건주의는 성서를 강조했다. 특히 퓨리턴적 경건주의는 당시의 합리주의적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이 지적 동의(assensus) 수준으로 축소시킨 정통주의적 믿음을 성서에서 찾아지는 기독교의 본질의 수준에까지 회복시키고자 했다. 넷째로 경건주의에는 어떤 ‘--주의(--ism)’라는 용어의 개념에서 보이는 저항의 요소가 있다. 이것은 종교 개혁가들이 주장했던 개혁의 원리를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역으로 확대 적용하는 것이다. 그들의 말로 말하자면 경건주의는 종교개혁의 두 번째 국면이었다.”

 

이러한 초기 경건주의의 발전상을 요약하면, 그것이 곧 경건주의에 대한 정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슈투플러에 의하면, “초기 경건주의는 개신교 종교개혁에 뿌리를 두고, 종교개혁의 기본적 교리를 충실히 고수하면서도, 그것에 영적인 활력을 제공하였으며, 경건주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17, 18세기 동안 개신교의 다양한 국면에서 나타났고, 그 후로도 전 세계의 역동적인 개신교 신앙 운동이 등장할 때마다 중요한 근원의 역할을 해주는 영향력 있는 개혁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경건주의는 영국의 퓨리탄들(Puritans)로부터 시작되었다. 앞에서 진술한 교회사가들의 견해를 종합해보면, 경건주의는 퓨리턴들에서 시작되었고 네덜란드를 거쳐 독일에서 꽃을 피웠으며, 다시 영국을 거쳐 신대륙으로 건너간 역사적 과정에서 총체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영국에서 발생한 퓨리턴적 경건주의가 네덜란드로 건너가서 독일에 이르기 직전까지의 과정(1590-1690)까지만 다루고자 한다. 왜냐하면 독일에서 꽃을 피웠던 경건주의는 이후 위대한 경건주의자자들을 다수 배출하였으며, 이들을 다루자면 각각 별도의 긴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 영국의 청교도주의

 

1534년 영국에서는 헨리 8(Henry VIII, 1491-1547. 재위 1509-1547)가 그의 이혼을 불허하는 로마 교황으로부터 법적인 종교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영국 국교회를 설립하고 그 수장이 되었다. 그가 죽은 뒤에 왕위를 물려받은 그의 아들 에드워드 6(Edward VI, 1537-1553. 재위 1547-1553)조차 재위 6년 만에 죽자, 그의 이복누나인 메리 1(Mary I, 1516-1558. 재위 1553-1558)가 왕위를 계승했다. 메리는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가 세운 국교회를 폐지하고 로마 가톨릭으로 복귀하고자 했다. 여왕은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함으로써 피의 메리(Blood Mary)라는 악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메리가 5년 만에 죽자 왕위는 다시 엘리자베스 1(Elizabeth I, 1533-1603. 재위 1558-1603)에게 넘어 갔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종교 정책은 아버지가 세웠고, 그녀가 수장이 되는 국교회를 로마 가톨릭과 대륙의 개혁교회로부터 독립적으로 확고하게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종교적 혼란이 거듭되는 과정에서 국가적 통일성은 결여될 수밖에 없었다. 슈투플러는 할러(W. Haller)를 인용하여, 엘리자베스 여왕이 통치하고 있던 16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에, 퓨리턴 설교자들이 이런 현상들을 비난하는 설교를 했으며, “지극히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이들의 설교는 특징적으로 직설적이고 단순했으며, 일반적 인식과는 판이하게 극히 실제적이고 현세적이었다.”

 

그렇다면 퓨리터니즘과 경건주의는 다른 것인가? 퓨리턴의 분파를 분류하는 학설들을 검토한 뒤에 슈투플러는, 그 중에서 정치에 무관심하면서 개인적 경건에 주안점을 두었던 한 분파에게 경건주의적 퓨리턴들(Pietistic Puritans)”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있다. 그는 이어서 영국의 퓨리턴들 중에 일어난 경건주의대륙의 경건주의를 구별할 수 있는 차이점은 없다고 말했다. 슈투플러는 이런 입장에서 퓨리턴의 경건의 뿌리가 주로 대륙의 종교개혁에 있었다는 견해가 더 정확한 것 같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이런 사실을 입증하기 위하여 슈투플러는 그의 책에서 역사적으로 전개된 사실들과 인물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부터 그의 설명을 요약해보기로 한다.

 

2.1. 경건주의에는 이르지 못했던 초기 퓨리턴들

 

대륙의 종교개혁 추종자들이 에드워드 6세의 우호적인 종교정책의 소문을 듣고 영국으로 건너왔다가 메리여왕의 복고정책에 쫓겨 대륙 각지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을 때, 일부의 영국 사람들도 같이 갔었다. 이들은 메리가 죽고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하자 바뀐 종교정책을 믿고 되돌아왔지만, 엘리자베스가 곧 국교회 정책을 추진하고 퓨리터니즘에 대한 탄압을 실시하자 이들은 비교적 자유로운 칼빈파의 나라 네덜란드를 도피처로 선택했다. 이 시기의 퓨리턴들 중에서 존 후퍼(John Hooper)와 존 브레드포드(John Bradford)가 돋보인다.

 

존 후퍼1519년에 옥스퍼드에서 신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스위스의 개혁자들인 츠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531)와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의 글을 읽으면서 로마 가톨릭과 갈등관계에 빠지게 되었고, 1539년 파리로 탈주하였다. 이후 그는 대륙과 영국을 오가면서, 주로 츄리히에서, 저작 활동을 시작했다. 1549년에 영국으로 귀환한 그는 당시 영국에 와 있던 마틴 부처(Martin Bucer, 1491-1551) 등과도 교류했다. 그는 에드워드 6세의 어전에서도 종교개혁적인 설교를 했고, 감동을 받은 그로부터 글로스터 주교좌를 얻었으나 실제 사역은 하지 못했다. 후에 위체스타 주교에 취임했으나 곧 피의 메리 여왕의 박해를 받게 되어 1555년 화형 당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십계명, A Declaration of the Ten Holy Commandments of Almighty God이 있다. 그는 유기(遺棄) 내지 정죄의 원인은 인간의 범죄에 있다는 사실과 그리스도인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에 머무르려 한다면, 진정한 의미의 회개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끝없이 강조하면서, 기독교 지도자들에게는 그대들의 영혼을 신언의 건전한 꼴 외의 다른 고기로 먹이지 아니하도록 주의하시오라고 경고했다. 그는 그의 퓨리턴적 경건의 신앙을 죽음으로 확증했지만, 슈투플러는 그를 아직 경건주의적 퓨리터니즘의 진정한 대표주자로 여기지는 않고 있다.

 

존 브래드포드의 출생년도는 정확하지 않으나 존 후퍼보다 나이가 어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너 템플(Inner Temple)에서 민법을 공부하다가 회심을 체험하고 캠브리지 대학으로 옮겨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여기서 마틴 부처의 제자가 되었고, 그로부터 성직자가 되라는 권고를 받았다. 그러나 피의 메리 여왕에 의하여 투옥되었다가 1555년 후퍼보다 몇 달 뒤에 화형 당했다. 그는 짧은 생애 중에 많지 않은 설교와 논문과 옥중 서신을 남겼는데, 그가 강조한 것은 회개에의 고취와 금욕과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으며, 상황에 맞는 묵상과 기도문들을 만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브래포드를, 존 후퍼와 마찬가지로, 경건주의적 퓨리턴으로 간주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개인적 경건에의 욕구를 제도적 정화에의 욕구보다 더 중시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2.2 경건주의적 퓨리터니즘 제1-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와 그의 동시대 사람들

 

윌리엄 퍼킨스(1558-1602)의 시기인 1561년에 칼빈의 기독교 강요가 영어본으로 출판되는 것을 계기로 초기 퓨리턴들에 미쳤던 츠빙글리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칼빈주의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칼빈주의 사상이 아니라 칼빈주의 경건, 신적으로 규정된 생활윤리였다. 이렇게 칼빈주의 경건을 받아들인 이들을 대표하는 사람은 윌리엄 퍼킨스였다. 그는 케임브리지 크라이스트 칼리지에 자비생으로 입학하였으나, 음주와 방탕에 빠졌다가 한 여인의 충격적 비난을 듣고 변화를 겪게 되었다. 1584년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안수를 받아 성 앤드류스 교회에서 설교자로 일했다. 비록 44세에 요절하였지만, 그는 생전에 대학에서 칼빈과 후커 바로 다음이라는 두려울 정도의 권위를 누렸다. 또한 그는 오른손이 불구였기 때문에 에훗(3:12-31)”으로 불리면서 왼손의 붓으로 로마 가톨릭의 대의명분에 치명상을 입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저서는 사후 현대 기독교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다수의 외국어로도 출판되었다. 그의 대표작은 가장 먼저 경건주의적 퓨리턴 그룹의 정신을 구상화한황금사슬, A Golden Chain이다. 이 책은 성서 자체가 선한 삶을 영위하기에 충분한 교리이다는 말로 시작하여 신학을 모든 학문의 주인으로 선포한다. 그는 칼빈의 신학적 체계를 따르고 있지만, 강조점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인다. 그의 핵심적 관심사는 인간의 구원인데, 그것은 두 가지 언약 곧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설명된다. 전자는 율법 속에 포함된 모든 명령을 실행하는 사람에게 영생을 약속하며, 후자는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약속하는 것이다. 그에게 신학은 복된 영생의 학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최우선적인 노력은 사람들에게 사망으로부터 생명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고 그들이 경건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영적 전투에 비유하기를 즐겼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그것은 생사가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 이외의 인물들과 제1기 퓨리터니즘의 발전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에 퍼킨스와 그의 동시대 퓨리턴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은 하나님의 율법을 삶의 제 여건에 합리적으로 적용하는 것이었으며, 그 결과로서 나타난 경건의 성향은 무수한 계율에 의해 세세한 부분까지 규제되는 생활습관으로 변화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것을 가리켜서 영국에서는 경건(godliness)”으로, 대륙에서는 엄밀성(preciseness)”으로 호칭했다. 이 시기에 이런 경건을 추구했던 퓨리턴들은 다음과 같다.

 

리차드 그린햄(Richard Greenham)은 교시적인 소요리 문답을 썼는데, 복음을 모조리 무시하고 오직 십계명에만 치중하고 있다. 그는 안식일 준수를 강조한 랜슬롯 앤드류스(Lanclelot Andrewes)의 발자취를 따라 자신의안식일론, Treatise of Sabbath를 썼다. 여기에서 그는 하나님이 7일을 당신을 봉사하기 위해 성별하셨으니, 이는 곧 우리 시간의 십일조인 것이다고 주장하고, “공적 예배를 빠뜨리지 말 것거룩하고 영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야한다고 강조했다.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gers)는 체계화된 개신교 최초의 결의론(決疑論, casuistry) 법전이라는 일곱 논무집을 내놓았다. 여기에는 9가지의 매일의 생활 지침들이 나열되어 있고, 끝에는 8페이지를 상회하는 기도문을 싣고 있다. 이것은 일상적 생활을 엄격한 지침에 의하여 통제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 것이다.

 

존 도드(John Dodd)는 십계명 도드(Decalogue Dodd)라고도 불리는데 십계명에 관한 친숙한 해설, A Plain and Familiar Exposition of the Ten Commandments)를 썼다. 그는 십계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말씀을 좀 더 선별한 것이며, 주님은 이들 율법을 지키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고 주장했다.

 

니콜라스 바운드(Nicholas Bound)1595년에 평이하게 서술되고 건전하게 증명되어진 안식일 교리, The Doctrine of the Sabbath, Plainly Laid and Soundly Proved을 출판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불멸의 복음중에서도 안식일에 관한 그의 교리는 모든 민족,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영원히 구속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안식일을 극단화시킨 교리는 토마스 로저스(thomas Rogers)39개조항 해설, Exposition of the Thirty Nine Articles을 출판할 때까지 아무런 반박을 받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한 안식일 논쟁은 끝날 수 없었다. 튜더 왕조의 마지막 엘리자베스 여왕의 뒤를 이어 스튜어트 왕가의 제임스 1(James I, 재위 1567-1625)가 즉위했으나 그는 1618년 유명한 오락칙령(Declarstion of Sports)을 반포하였다가 취소했다. 그러나 찰스 1(재위 1625-1649)치하에서 1633년 로오드 대주교(Arch Bishop Laud)가 이것을 다시 선포한 것은 청교도 혁명운동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다. 결국 1642년 청교도 혁명의 성공으로 집권한 호국경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의 의회에는, 독립파(그 중에서, 안식일 엄격 준수론 지지자들)에 의하여 주일에는 교회 경내를 산책하는 것뿐만 아니라, “대문이나 방문 등의 장소에 할 일 없이 공공연히 앉아 있는행위까지도 금지하는 법률안이 상정될 정도였다. 이러한 사실은 동시대적인 영국의 제1기 퓨리터니즘적 기독교와 기독교 신앙의 체험적 측면을 떠나는 경향을 보인 대륙의 개혁자 2세대 그룹 간의 종교적 차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2.3 퓨리터니즘 후기의 발전

 

경건의 최고조에 도달

 

17세기 초에 종교적 갈등으로 야기된 정치사회적 분열은 영국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마침 네덜란드로부터 건너온 알미니우스주의는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의 표면 아래에서는 이성을 신앙의 시녀로 보는 퓨리턴적 견해에 대항하여 자율적 이성의 권리를 강조하는 움직임이 리차드 후커(Richard Hooker)교회정책법론, Laws of Ecclesiastical Polity에 의하여 1594년부터 주장되기 시작했다. 1632년 이탈리아에서 갈릴레오가 태양중심설을 지지하는 2개의 천문체계프톨레마이오와 코페르니쿠스에 관한 대화를 출판한 죄로 교황 법정의 심문을 받았다는 소식은 영국인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또한 동시대의 철학에서도 프란시스 베이컨의 신기관론, Novum Organon,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Discours on Method, 스피노자의 윤리학, Ethics, 그리고 토마스 홉스가 리바이던, Leviathan등이 출판 소개되었으며, 존 밀턴(John Milton)이 이들의 조류에 합류했다. 이 시기의 도덕적, 종교적 냉담성에 관한 묘사는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자서전, Autobiography에서 나타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경건주의적 퓨리터니즘은 그 최고의 발전단계에 도달하였다.

 

존 도네임(John Downame)기독교인의 투쟁, Christian Warfare에서 기독교인의 삶을 천상의 본향을 향해 가는 순례자의 상으로 보고 있다.

루이스 베일리(Lewis Bayly)경건의 실천: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한 지침, Practice of Piety: Directing a Christian how to Walk that He May Please God을 써서, “인간은 지옥으로 가는 도중에 있거나,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에로의 여정을 하고 있거나, 그 어느 하나에 있다고 주장했다.

다니엘 다이크(Daniel Dyke, d.1614)자기 기만의 비밀, 혹은 인간 심성의 기만성에 대한 강화(講話)와 발견, Mystery of Self-Deceiving, oa, A Discourse and Discovery of the Deceitfulness of Man's Heart에서 인간의 신앙적 난제는 먼저 이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죄인에 대한 망치와 거울로 비유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인간의 심성을 낱낱이 해부하면서 죄의 심리학을 다룬 논문으로서는 가장 철저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로버트 볼턴(Robert Bolton, 1572-1631)은 옥스퍼드에서 신학사 학위를 받고 도덕철하과 자연철학 및 논리학을 강의했다. 그는 몇몇 심각한 시험에 대한 특별한 해결책과 함께 고통 받는 양심을 올바로 위로하기 위한 지침서, Instructions for a Right Comforting Afflicted Consciences with Special Antidotes against Some Grievous Temptations를 저술하고, “상처 입은 영혼을 위로하는 일로 너무나 유명해지게 되었다. 그는 목회심리학에서 뛰어나서 스스로를 영혼의 의사로 자처하면서, “영적 감독자가 곤고한 심령들을 적절하게 다룰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무수한 세부적 내용들을 이 책에 수록하고 있다.

 

경건과 신비주의의 종합

 

청교도 혁명이 진행되는 크롬웰 집권시대의 혼란 속에서 대중적 경건의 분야에서는 주관주의로 기울어지면서 내적 조명주의(illuministic)적인 분파가 등장했다. 17세기 중엽에 퓨리턴들은 경건의 본성을 다르게 이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경건이 그 의미에서부터 실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미묘한 변화를 겪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제 그것의 본질은 더 이상 무엇인가 행하는 데 있지 않고 무언가 되어지는(being) 데에 있는 것으로 바뀌어졌다. 그래서 경건이라는 용어 대신에 거룩(holiness)”이라는 말이 점점 더 널리 쓰였다.주께서 내게 이같이 말씀하셨다는 주장을 용납할 정도로 주관주의로 흐르면서 신비주의가 퓨리턴적 경건 속으로 침입했다.

 

폴 베인즈(Paul Baynes, d.1617)신성한 독백, Holy Soliloquy등의 저서를 내고 옛 경건과 새로운 신비적 발전의 가교 역할을 했다.

리차드 십스(Richard Sibbes, 1577-1633)하나님에 대한 갈망, Breathing after God등에서 기독교인이 궁극적으로 소원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이며, 그 수단은 기도이고, 그 결과는 열렬한 사랑이라고 주장했다.

조셉 홀(Josep Hall, 1574-1656)신성한 명상의 기술, The Art of Divine Meditation등에서 경건한 기독교인에게서 중요한 것은 원하는 목표인 하나님과의 연합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랜시스 루스(Francis Rous, 1579-1659)는 이튼 칼리지의 학장으로서 노골적으로 신비주의에 헌신한 경건주의적 퓨리턴이다. 그는 신비적 결혼, Mystical Marrige에서 기독교인의 삶을 그리스도와의 결혼생활로 비유하고 있다.

 

율법적 경건과 신비적 명상의 종합은 회중교회의 제레미아 버로우(Jeremiah Barrough, 1599-1646)와 토마스 굳윈(Thomas Goodwin, 1600-1680), 국교도인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 그리고 침례교도인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에 의해서 달성되었다. 이들 중에서도 극히 중요한 인물은 백스터와 번연이다. 이들을 차례로 살펴보자.

 

리차드 백스타가 영국인들의 신앙생활에 중요하게 공헌한 사실은 호국경 크롬웰과 국왕, 그리고 하원도 인정하였다. 그는 개신교 강단 역사에서 백스터보다 뛰어난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뛰어난 목회자였다. 그는 목회에서 실제로 영육 전부의 의사 노릇을 했다. 그러나 그의 주된 작업은 저술이었다. 그는 옛 퓨리턴 정신이 잘 나타나 있는 기독교 지침서, Christian Directory와 목회자의 과업을 옛 퓨리턴 정신으로 기술한 개혁된 목회자, Reformed Pastor를 내놓았다. 그리고 회개치 않은 자들에게 고함. 회개하고 자비를 받을 만한 때에 자비를 받아 들이라: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Call to the Unconverted to Turn and Live, and Accept of Mercy While Mercy May Be had, as Ever They Would Find Mercy in the Day of Their Extremity: From the Living God 등의 저술에서 율법과 복음 양면을 다루면서 지성과 심정에 모두 호소하고, 하나님과 인간의 행복을 모두 지향함으로써 영국 국교도들에게는 물론, “냉랭하고 국외적인 신앙고백자들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문외한들모두에게 엄청난 인기를 모았다.

 

존 번연은 퓨리턴의 일반적 경력과 같이 12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는 출옥하고 나서 베드포드 침례교회의 전임목사가 되었고, 순회목사로서 인근 침례교회들에서도 설교했다. 그러나 그는 교훈적 저서들을 출판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특히 그의 대표작인 천로역정, The Pilgrim's Progress from This World to That Which is to Come은 당시 개신교도들은 물론 몇 군데를 수정한 판으로 가톨릭 신자들까지도 읽을 정도였다. 또한 이 책은 현대에 이르러서는 영문학의 고전으로서도 읽혀지고 있다. 이 책은 순례자의 길에 기독교 용어를 의인화한 인물들이 하나님의 도성에 이를 때까지 계속 등장하여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나타나는 것은 율법의 엄격한 요구복음이 제공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마음 깊은 감사사이에 이루어진 아름다운 균형이다. 그는 이로써 경건주의 교훈적 문학을 신앙에서의 유익성뿐만 아니라, 재미있는 것으로도 만들었다.

 

영국 경건주의의 마지막 단계: 열광주의에서 심미화(審美化)

 

1640년대 초에 구질서가 붕괴되면서 영국인들의 생활은 혼란상태에 빠졌다. 이때야말로 종교적 광신자들의 전성시대라고 불릴 만했다. 이런 열광주의는 경건주의 후기 발전 단계에 나타난 것으로 경건주의적 퓨리터니즘과는 달리 지극히 조명주의적이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퓨리턴 경건에서는 윤리적 기초를 성서 속에 계시되고 이성에 의해 해석되며 자연법의 지지를 받는 신적 율법에 기초하지만, 열광주의는 신적 율법이 인간의 마음 속에 씌어져 있는 것으로 보며, 이것은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한 예언자에게 특별히 임한 영감을 통해 밝혀지는 것이다.” 당시에 나타난 수많은 집단들 가운데 아직 유지되고 있는 것은 필라델피아파와 친우회(Friends)가 있을 뿐이다. 크롬웰 시대의 열광주의는 모든 기성체제에 대해저항적이었다는 점에서 경건주의적 퓨리터니즘과는 달랐다.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 1613-1667)에 의하여 심미화된 경건주의라고 불릴 수 있는 발전이 이루어졌다. 영국인들은 이제 엄한 명령적 설교호령하는 예언자들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옛 퓨리턴 경건은 이제 그의 교화적 저서인 거룩한 삶, Holy Living거룩한 죽음, Holy Dying을 통해 국교회 성당의 성화가 아름답게 미화되는 단계와 같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는 세네카의 경구인 세상에는 잘 살거나 잘 죽기에 지나치게 어려운 학문은 없다.”는 말을 인용하여 이 작품들의 목적을 내비치고 있다. 그의 사상에 영향을 미친 것은 십계명을 중요시하는 경건주의적 퓨리터니즘뿐만 아니라 국교회 전통과 신앙적 자유주의(iatutudianarianism)도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이 책들을 집필했던 골든 그로우브(행두 Grove) 지역의 아름다운 경관도 한 몫을 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는 점차 교회론적으로는 고교회파 쪽으로 기울었고 신학적으로는 알미니우스주의 쪽으로 나아갔다. 그의 핵심적 관심사는 거룩한 생활이었다. 그에게는 죽음이나 삶을 향한 아무런 갈망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개신교 신앙의 핵심에 양심적으로 충실하고자 했으나, “영국적 신앙의 현저한 실천적 성향자신의 심미적 선호에 이끌려 경건에 대한 지나친 강조교리 경시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그가 성결의 아름다움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려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보아야겠다.

영국에서의 이러한 흐름에 동참한 사람들은 다른 종교적 이념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경건을 특히 간조했으므로 이를 가리켜 경건주의라는 이름은 대단히 정확하고 유용하다. 개신교는 대륙으로부터 건너온 것이었으나, 영국에서 자라난 퓨리턴적 경건주의는 거꾸로 대륙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3. 네델란드의 경건주의

 

리츨은 대륙의 경건주의는 독일보다 네덜란드에서 먼저 시작된 것으로 본다. 그의 주장에는 다수의 교회사가들이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슈투플러는 대륙의 개혁교회 경건주의가 영국의 경건주의적 퓨리터니즘의 산물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견해라고 주장한다. 네덜란드와 영국의 개신교도들의 접촉은 앞에서 진술했듯이 이미 튜더 왕조시대부터 있었다. 로마 교황의 지지 세력이었던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네덜란드가 독립한 것은 1588년이었다. 이때로부터 네덜란드는 점차 칼빈주의 교회가 대세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독일은 30년 전쟁으로 황폐화되었고, 프랑스는 로마 가톨릭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영국은 왕조의 갈등과 시민전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다수의 칼빈주의자들의 힘과 세계무역 및 식민지 건설로 안정된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 네덜란드는 종교적 관용 정책을 실시할 수 있었고, 지적 또는 종교적 망명자들을 수용하여 세계의 지적 및 신학적 중심지로 발전할 수 있었다. 또한 나더레 레포르마띠”(nadere reformate)라는 개혁교회의 청교도적 갱신 운동이 푸치우스(Gisbert Voetius, 1589-1676)에 의하여 일어났다.

 

이런 탓으로 아르미니우스주의 논쟁과 코케이우스 신학 논쟁이 이곳에서 벌어진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논쟁의 원인은 폴케르츠존 코른헤르트(Diryck Volckertszoon Coornhert, 1522-1590)의 반칼빈주의적 신학이 원인이었고, 이를 반박하기 위해 연구한 신학자는 아르미니우스(Jacob Arminius, 1560-1609)로서 그는 제네바의 베자(Theodore Beza, 1519-1605) 밑에서 수학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공식적인 논쟁은 아르미니아누스가 오히려 코른헤르트의 사상의 추종자로 전향하고 죽은 다음 1610년에 그의 제자들이 “5개 조항의 항의서(Remonstrance)”를 헤이그의 국회에 제출함으로써 촉발되었다. 도르트 종교회의(Synod of Dort, 1618-19)에서 칼빈주의 5대강령으로 응답하기까지 이 문제는 수많은 토론을 거쳐야 했으며, 결국 이 항의자들(Remonstrants)은 정죄되었다.

 

3.1. 논쟁 속에서의 발전

 

코른헤르트(Diryck Volckertszoon Coornhert, 1522-1590)는 네덜란드에서 실천적 형태의 신비주의와 경건주의를 연결시킨인물이었다. 그는 우리의 삶은 행하는 것 아니면 아니면 행하지 않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람은 선이나 악을 행동으로 옮기거나 그대로 둔다는 말로 시작하는 마음의 거울, Hertspiegel에서 구원은 하나님이 주도하시지만, 인간의 역할의 중요성도 주장했다. 이런 것들이 개혁교회 정통주의자들의 비위를 거슬렀지만, 어쨌든 그는 네덜란드의 뚜렷한 현상이었던 신비적 경향의 경건주의가 출현하는 데 기여하였다.” 영국의 경건주의적 퓨리터니즘이 대륙의 개혁교회의 경건주의에 영향을 미친 사실은 이미 언급했지만, 바로 코른헤르트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개혁교회 경건주의가 영국에 의존하여서만 발생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중대한 착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코케이우스(Coccejus)로 더 많이 알려진 요한네스 코흐(Johannes Koch, 1603-1669)에 의해서 네덜란드에서는 또 다른 논쟁이 촉발되었다. 그는 1629년에 그의 고향 브레멘에서 교수가 되었고, 1650년에는 라이덴 대학에서 교숙로 청빙되어 죽을 때까지 가르쳤다. 그는 계약신학을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시켰다. 그는 은총의 계약이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완성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선택교리에서는 타락후예정론자(Infralapsalian)였으며, 모든 성서는 그 상황 안에서 그리스도 중심성의 원리에 따라 해석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신학에서 스콜라적 사상체계 안으로 변형된칼빈주의의 엄격한 율법주의(Legalism)는 설 자리가 없었다. 이런 것들이 정통주의자들의 반박을 받으면서 두 진영의 논쟁은 세기를 이어 계속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이런 논쟁의 와중에서도 경건주의는 발전하고 있었다.

 

타펭과 우데만스에 의한 초기적 발전

 

장 드 타펭(Jean de Taffin, 1529?-1602)은 격렬해지는 알미니안 논쟁으로 논증이 넘쳐나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설교에서 경건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표지들, The Marks of the Children do God에서 우리 안에 거룩한 감정과 갈망들을 가지고 있다면, “성령이 거하신다는 것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자고 역설했다. 그는 당시의 설교자들과 달리 내면적으로 체험되는 경건과 기도를 특히 강조했다.

 

고트프리드 코르넬리우스 우데만스(Gottfried Cornelius Udemans, 1580?-1649?)는 타펭보다 나이는 어리나 동시대의 인물이다. 그에게서는 경건의 실천이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라는 엄격주의(precicianism)” 형태의 경건주의를 볼 수 있다. 그는 야곱의 사닥다리, Jacob's Ladder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발전되는 여러 단계를 설명하고 있다.

 

3.2. 탁월한 세 경건주의자들

 

이 장에서 설명되는 세 사람은 네덜란드 역사가들에 의하여경건주의 운동의 원조로 평가된다.

윌리엄 테링크(William Teellinck, 1579-1629)는 영국에서 머문 적이 있었는데, 그의 일기, Housebook에 의하면, 이때 한 퓨리턴의 집에서 감동을 받고 회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퓨리턴 경건주의자들과 교제하였는데, 특히 도드(John Dodd)와도 접촉하였다. 법학을 공부하던 그는 마음을 바꾸어 라이덴으로 가서 신학을 다시 공부했고, 저술과 설교자로 일생을 마쳤다. 그는 격렬한 교리논쟁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비록 양쪽으로부터 의혹을 받긴 했지만, 개개인들을 회개로 이끌고 교리와 정치적 개혁보다는 개인적 삶의 개혁 쪽으로 교회를 움직이고자 했다. 그가 언제나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이었다. 대화 형태로 쓴 헌신의 거울, Mirror of Devotion에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우치는 역사가 없으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장뿐만 아니라 애당초 시작도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앞에서 나온 타펭의 행복에 대한 강조와 우데만스의 규칙성에 대한 신념을 하나의 통일적 구조 속에 결합시켰다는 평가를 듣는다.

 

윌리엄 아메지우스(William Amesius, 1576-1633)는 영국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에서 윌리엄 퍼킨스의 제자가 되었으나,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로 망명하였다. 그는 그곳의 프라네커 대학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신학의 정수를 썼다. 퍼킨스가 신학은 영원 안에서 행복하게 사는 학문이라고 가르쳤지만, 그는 신학이란 살아 계신 하나님에 관한 가르침이라고 썼다. 그에게 참된 삶은 성서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사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반형이상학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는데, “악마는 최고의 형이상학자이다고 공격했다. 그는 회개를 가장 강조했는데, 교회에 대해서는 선택된 사람들로 구성되지만, “선택된 모든 사람들이 지금 현재 교회에 있는 것은 아니다고 했다.

 

야코부스 판 로덴스테인(Jacobus van Lodensteyn, 1620-1677)은 프라네커에서 코케이우스 밑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신학적 사변에는 흥미가 없었고, 16세기 교리개혁의 뒤를 이어 참다운 기독교적 삶의 개혁을 이루고자 온 힘을 기울였다. 그것은 자기부정을 통해 실현될 수 있을 것이었다. 자기부정이 결여되어 있는 기독교를 상정하고 영적 각성을 외치는 자는 죽었고 생명이 없다, Spiritual Awakener, Meant for a Christendom which Lacks in Self-Denial, is Dead이라는 제목의 책은 그대로 로덴스타인의 경건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의 회심에 대한 견해는 매우 독특한데, “우리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의 뜻과 이익을 구하지 않고 전적으로 심지어 천국을 바라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리스도를 위해 살 때에야 비로소 회심한 것이다고 할 정도로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 없는 천국은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그의 시대와 그 후로도 얼마간경건주의자들의 지도자로 인정되었다.

 

3.3 후기의 경건주의자들

 

이 장에서 언급되는 경던주의자들은 후기 경건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데오도르 브라켈(Theodore Geraldi a' Brakel, 1608-1669)는 일찌 어머니를 잃고 외할머니 밑에서 성경과 경건문학을 읽으면서 자랐다. 그래서 일찍부터 하나님의 집을 사모하게 되었고,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는 고린도전서 6장의 말에 따라 사회적 접촉을 피하면서 기도하고 간구하여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는 프라네커에서 공부하고 목회자가 되었다. 그는 인생의 최고목적을 끝없는 행복감이라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단계들, Steps of the Christian Life를 써서 경건의 삶의 이유와 수단과 함께 위로와 영감을 주고자 했다. 그는 이 책에서 경건의 본질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교제였으며 영적 훈련을 중요하게 설명하고 있다.

요한 테링크(-1633)는 윌리엄 테링크의 아들이다. 그는 탁월한 설교가였고, 그의 아버지의 경건과 동일하게규칙성과 행복 사이의 균형을 보여준다.

 

윌리엄 브라켈(William a Brakel, 1635-1711)은 테오도르 브라켈의 아들이다. 그가 저술한 진정한 하나님 섬김, True Service of God은 개혁교회 경건주의의 교과서를 제공하는 것이었으며, 신비적 요소와 윤리적 요소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영국 해협 양편의 경건주의자들이 생각하고 말해왔던 모든 것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윌리엄 잘데누스(William A. Saldenus, 1627-1694)는 매우 박식한 인물로 그리스도인의 비참한 상태, 영적인 것들에 대한 마음의 무기력과 무감각성, The Very Sad State of a Christian, Consisting in the Deadness and Insensibility of His heart Concerning Spiritual Things을 써서 하나님의 신뢰성뿐만 아니라 죄의 심각성, 법의 신적 권위 등을 의심하게 하는, 지성의 유혹을 분석하였다. 말하자면 경건주의적 경향을 가진 사람들이 흔히 체험하는 신앙적 병리(religious short comings)의 심리학에 공헌하였으며, 아직까지도 이 분야에서 중요한 저서로 꼽히고 있다. 그는 불신자와 쓸데없는 접촉을 피하고 회심의 체험이 있는 동료 경건주의자에 대해 형제 사랑으로 대하라고 가르쳤다.

페터 비테브롱엘(Peter Wittenwrongel, 1609-1662)은 성경을 기독교 가정을 위한 나침반으로 생각하고, 이 나침반에 의하여 가정이 개혁됨으로써 교회가 개혁되기를 희망했다. 그는 영국의 퓨리턴적 율법주의와 네덜란드의 규칙성(preciseness)의 전통을 철저하게 따른 경건주의자였다.

 

3.4. 라바디와 그의 추종자들

 

장 드 라바디(Jean de Labadie, 1610-1674)는 어려서 예수회 학교에서 공부했고 수도견습생이 되어 철학과 신학을 연구했다. 그는 경건주의 서적을 읽으면서 신자에게 직접 역사하는 성령을 믿게 되었고, 또한 내면적 기도의 효과를 믿게 되었다.” 그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읽고 예수회를 떠나 개혁교회의 일원이 되어서 안수를 받았으며, 신학교수를 하다가 목회를 했다. 그러나 라바디 경건주의의 특별한 형태는 기독교 사회의 가장 이상적인 생활을 공유제도(communitarianism)에 의한 집단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것에 있다고 보는 얀센주의를 배경으로 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그는 신생의 진정성이 거룩한 삶에 의하여 증명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목사들이 구원에 대하여 설교하면서 이것에 반드시 뒤따르는 행위를 강조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였다. 그는 목회를 통한 교회의 개혁, The Reform of the Church Through the Pastorate을 저술하여 목사들에 의한 교회개혁의 프로그람을 제시했다. 그리고 신학교를 만들어 제자 교육에 착수하였다. 노회와 불화를 일으키고 정죄를 당하자 결국 분리를 택한 그는 그의 열렬한 추종자들을 이끌고 암스텔담에서 가정교회(huiskerk)를 조직했다. 이러한 라바디 공동체운동은 공유의 원리(communitarian principle)에 따라 라바디주의자들에 의하여 네덜란드 각지와 외국에서도 운영되었다. 이 운동은 1680년대에 절정을 이루었으나, 18세기 초에는 사라졌다. 어쨌든 그의 영향은 대륙의 분리주의적 경건주의 운동의 아버지가 되었으며 다음 세기에도 상당한 미쳤다. 특히 독일 경건주의의 창시자로 알려진 스페너에 미친 영향은 과소평가될 수 없다고 하겠다. 스페너는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루터교 정통주의 신학을 공부했었다. 그러나 그는 제네바에서 라바디의 설교를 듣고 독일로 돌아가 경건주의 운동을 시작했다. 물론 요한 아른트의 참 기독교와 함께 청교도 경건서적을 읽으면서 자란 스페너가 전적으로 라바디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에는 틀림없다고 하겠다. 경건주의는 스페너로 인하여 독일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4. 결론

 

이제까지 유럽 대륙에서 시작한 개혁교회가 영국에 들어와 퓨리턴들에 의하여 어떻게 경건주의적 요소를 더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것이 다시 대륙의 네덜란드로 건너가서 어떻게 그곳의 개혁교회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의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인간이 초월적 존재이신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그분을 기쁘게 한다거나 또는 그분으로부터 구원을 얻으려고 생각하는 방법에서의 차이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엿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한 여기서 알 수 있었던 것은 경건주의는 나름대로의 뚜렷한 신학적 주장을 가지고 그들의 주장을 실천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주장을 전파하기 위해 선교에 나서기도 했고, 교회를 개혁하려고 했고, 박해에 맞서 순교하거나 도피하기도 했다. 도피한 그들은 새로운 곳에서 그들의 교리를 전파했다. 영국과 대륙의 개혁교회들과 신학자들은 서로의 교리와 신학을 주고받으면서, 동시에 서로 영향을 끼치면서, 발전했다. 이런 발전에서 라바디주의 같은 분파는 교회 안에서의 개혁 또는 저항이라는 경건주의의 경계를 넘어 분리로 나아가기까지 했다. 경건주의가 끼친 이러한 영향은 개혁교회에서뿐만 아니라, 기독교 전반의 곳곳에 스며들어 오늘날까지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경건주의 신학을 살펴보면, 그것의 가장 큰 특징은 스콜라적 정통주의 신학과 대비되면서 드러난다. 이것은 서론에서 보았던 것과 같이 정통주의자들의 비난이 곧 경건주의자들을 구별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하는 기독교라면, 모두 수용해야 할 것들이라고 본다. 비록 경건의 실천이 어떤 사람에게는 현실생활에서 제약을 받을 수 있는 것이거나, 또는 수용 불가능한 요소가 있다 하더라도, 필자의 견해로서는, 그것은 서로 이해하고 존중해주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의 최종적 심판은 초월자이신 하나님의 판단에 맡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종류의 경건주의적 실천이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데 조금도 필요 없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기독교인은 아마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주도홍 편, 독일의 경건주의,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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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nzalez, Justo L., 서영일 역, 현대교회사, 서울: 은성,2004.

Heussi, Karl, 손규태 역, 세계교회사,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12.

Walker, Williston, 송인설 역, 기독교회사,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12.

 

김문기, “경건주의의 목회적인 적용”, 평택대학교 논문집10, 2, 평택대학교, 1998, (1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