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탁 3

"나는 죽을지라도.. 한국 동포를 구하라" 어느 영국인의 유언

김건주 입력 2020. 12. 22. 11:48 댓글 294개 키워드로 보는 외국인 독립유공자, '어니스트 베델' [김건주 기자] "동서고금에 문화 수준이 높은 나라가 낮은 나라에 영원히 합병된 역사는 없다. 그것이 바로 문화의 힘이다." 구한말 애국 계몽 운동가 위창 오세창이 한 말이다. 요컨대, '높은 문화의 힘'이 나라를 지킨다는 말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수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았음에도 민족성을 잃지 않고 살아남은 국가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민족의 얼과 혼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 민족만의 노력은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존립을 위해 힘쓴 외국인들도 있다. 영국 언론인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은 한국에서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받아 독립유공자로 지정됐다. ..

신민회 망명자들의 분열

신민회 발기인들을 중심으로 망명의 진행과 망명자들의 활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제1차 망명자들: 안창호, 이갑, 유동열 등은 중국 청도에 도착하여 청도회의를 열었다. 여기에서는 독립운동 기지건설을 논의하던 중에 유동열 등이 이종호가 가지고 있는 약 3,000달러의 자금으로 청도에서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자는 안을 제안하여 다수가 찬성하는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당시 청도를 조차지로 관리하고 있던 독일 총독의 불허로 이 제안은 폐기되었다. 결국 당초 계획대로 중러의 접경지역인 밀산(密山)에 토지를 사서 신한민촌을 만들고, 그곳에서 무관학교를 세우는 한편, 농업경영을 병행하면서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각자의 역할을 정한 다음에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세부계획을 다시 논의하기로 했..

일제 초기 한민족 독립운동과 사상적 동향-신민회의 발기

1910년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되면서부터 조국을 잃은 한민족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특히 만주 지방), 러시아 극동지역, 미국 및 일본 등 곳곳에서 흩어져 살고 있었다. 망국의 한을 품은 한민족의 국권회복 운동은 세계 각지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하면서 살든지, 일본제국의 지배를 벗어나 한민족의 근거지 한반도에 독립국가를 세우려는 염원을 품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당시 한민족은 누구나 독립운동에 관련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당시 러시아 극동지역과 만주에는 한민족 이주자들이 많았고, 독립운동가들도 망명하여 살고 있었다. 합병을 전후한 시기에 먼저 이곳으로 망명한 사람들은 대부분 의병이었거나 무관 출신들이었다. 이들이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일제가 국내에서 이들의 반일활동을 철저히 봉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