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 3

또 미국에 버림받고 중국에 무시당할 것인가

[이하경 칼럼] 이하경 주필·부사장문재인 대통령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마친 뒤 “정말 극진히 대접받았다”고 했다. 양국은 한·미 동맹의 영역을 군사·안보에서 경제·기술로 확장했다. 세계 최강국이 우리를 환대한 것은 좋은 일이다. 반도체·전기차·배터리 분야에서 44조원을 미국에 투자하기로 한 기업의 파워 덕분이다. 하지만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황제 대접은 푸대접으로 바뀔 것이다. 역사의 상처가 실증하고 있다. ‘극진 대접’이 ‘푸대접’ 될 수 있어 우리가 잘살고 강해지는 게 살길 양보 불가의 가치·전략 준비해야 강대국 눈치 보는 게 외교 아니다 우리가 미국과 최초로 수교한 것은 139년 전인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부터다. 조선은 “미국이 열강의 침략을 저지하고..

상해임시정부의 혼란과 분열

1. 대통령 이승만과 ‘국민대표회의 이후의 상해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끝나자 임정 유지파인 민족진영은 곧 국무총리 노백린과 내무총장 김구 등을 중심으로 상해임정 유지에 주력하면서도 현실적인 개혁조치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임시의정원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부재하므로 그 직무를 대행하기 위하여 이동녕을 대통령대리로 선출하였다.(1924. 6.) 그리고 그해 12월에는 이승만을 해임하고 박은식을 제2대 대통령으로 선임했다. 임시의정원의 이런 비상조치에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반대했으나 임시의정원은 1925년 3월에 정식으로 이승만을 탄핵하고 박은식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박은식은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로 체제개편을 서둘렀다. 처음에 국무령제로 출발했다가 통합을 위한 1차 개헌(1919)을 통해 ..

상해임시정부와 공산당의 내부 갈등과 분열

(1) 레닌의 자금지원과 상해임정의 갈등 모스크바에 임시정부 특사로 파견된 한형권은 레닌정부로부터 200만 루블의 지원을 받기로 하고 1차분 40만 루블을 먼저 받았다. 한형권은 박진순과 함께 옴스크로 가서 전로고려인대회(1920. 10.)에 참가한 다음 상해로 가기로 했다. 임정 국무총리를 사임했던 이동휘는 8월에 복귀하여 특사 한형권이 레닌자금을 가져오기를 기다렸다. 이동휘는 모스크바에서 귀환한 한인사회당 이한영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그의 심복 이외에는 일체 비밀로 했다. 그리고 이동휘는 비서장 김립을 파견하여 중간에서 한형권과 박진순을 만나 돈을 받아올 계획을 세웠다. 이동휘의 지시로 김립은 한인공산당으로의 개편대회 직후 임정에서 사임했다. 김립은 9월 말경에 모스크바에 보고하러 가는 것처럼 이한영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