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 참변 2

코민테른 동양부와 고려공산당의 실패

(1) 극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의와 고려공산당의 실패 코민테른의 실천사업의 하나인 극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의는 우여곡절 끝에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로 옮겨 1922년 1월 말에 개최되었다. 이때 참가한 ‘조선대표단’은 김규식을 단장으로 각 단체를 대표하는 56명이었으며 여운형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동휘와 상해파 계열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유는 대회서기로 대회를 총괄하는 동양부 비서부장 슈미야츠키가 자유시참변 문제를 은폐하기 위하여 이르쿠츠크파만 참가할 수 있도록 공작했기 때문이다. 이동휘와 결별한 보이틴스키와 동양부 부장 등이 대회 준비위원이 되어 조직적으로 이동휘와 상해파를 배제하는 데 협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이르쿠츠크 한인 빨치산 부대 전권대표로 참석한 김동한은 코민테른이 아닌 러시..

상해임시정부와 공산당의 내부 갈등과 분열

(1) 레닌의 자금지원과 상해임정의 갈등 모스크바에 임시정부 특사로 파견된 한형권은 레닌정부로부터 200만 루블의 지원을 받기로 하고 1차분 40만 루블을 먼저 받았다. 한형권은 박진순과 함께 옴스크로 가서 전로고려인대회(1920. 10.)에 참가한 다음 상해로 가기로 했다. 임정 국무총리를 사임했던 이동휘는 8월에 복귀하여 특사 한형권이 레닌자금을 가져오기를 기다렸다. 이동휘는 모스크바에서 귀환한 한인사회당 이한영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그의 심복 이외에는 일체 비밀로 했다. 그리고 이동휘는 비서장 김립을 파견하여 중간에서 한형권과 박진순을 만나 돈을 받아올 계획을 세웠다. 이동휘의 지시로 김립은 한인공산당으로의 개편대회 직후 임정에서 사임했다. 김립은 9월 말경에 모스크바에 보고하러 가는 것처럼 이한영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