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유신론 이해

아이슈타인-태극론을 몰랐던 천재 무신론자를 회고함

heojohn 2008. 6. 15. 23:48

[아인슈타인의 편지] 신문기사를 보고

 

    얼마 전 신문기사에 아인슈타인이 죽기 1년 전에 쓴 편지 한 통이 경매에 붙여진다고 해서 화제에 올랐었다. 그 편지의 내용이 그의 생전에 알려졌던 세계관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라서 더욱 주목을 받았었다.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와 같고,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과 같다”고 과학과 종교 사이에 균형 잡힌 양립성이 있음을 갈파했던 그가, 이 편지에서는 “내게 신-God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약점을 드러내는 표현, 또는 산물에 불과하다”고 써놓았으니 세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지 않았겠는가? 무신론자들이 얼마나 열광적으로 이 편지를 사려고 했는지는 결국 이 편지의 낙찰가격이 4십만불(한화 약 4억원)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면 알만하지 않는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무신론자 도킨스도 이 편지를 사려고 경매에 참가했으나 실패했다는 소식이다. 아인슈타인의 이 편지가 무신론자들에게 정통성을 부여하는 권위가 있는 것처럼 보였는지, 서로 간에 경매전이 치열해서 예상가보다 다섯 배나 비싸게 팔렸다고 한다. 어쨌든 재미있었던 기사였다. 아인슈타인의 편지에 있는 말은 그의 세계관에서 보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의 견해는 물리과학자의 인식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음도 사실이다.

 

    옛날부터 신과 인간존재를 탐구해온 다수의 철학자들은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종교적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것은 진화론이 등장하기 이전이나 이후에도 같은 결론이다. 긴 철학적 설명을 줄여서 말하자면, ‘종교적 본성’이란 자기보다 위대한 타자에 의존하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인간이 스스로 유한한 존재임을 인식하는 순간에 불안을 느끼는 본성이 있음을 발견한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내린 결론이다. 물론 ‘유한한’ 정도는 사람마다 다른 것이긴 하다. 인간은 사회적인 처지에 따라서 과장하고 허세를 부리고 때로는 힘-폭력, 금력 또는 권력 등-을 행사하지만, 홀로 고립되는 순간 한없이 무력한 존재임을 자각한다고 한다. 이때가 ‘종교적 본성’이 나타나는 순간이다. 

    인간은 태어나서 젖을 얻어먹지 못하면 죽는 불안한 존재로부터 삶을 시작한다. 젖을 주지 않으면 울어서라도 얻어먹어야 사는, 이런 의존성은 아이가 이미 태어날 때부터 근본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관계이다. 젖먹이 시절의 의존성은 전적으로 젖을 주는 어머니에게 쏠려 있다. 그러나 점차 성장하고 사회적으로 독립하여 살게 되면서 이런 인간적 의존관계를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이고, 부침과 굴곡이 많은 인간사회에서 그런 상황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결코 없어 보인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해탈의 경지에 이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종교를 부정하는 사람들에게도 의존적 감정은 잠복해 있는 것이며, 그 증거로서는 무의식적으로 또는 남몰래 그들이  미신적 행위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의존적 감정은 인간의 상황에 따라서 본능적으로 언제나 다시 떠오를 수 있는 감정이다. 그 때는 대개 그 사람이 한계상황에서 절망하고 무력감을 느끼게 되는 순간일 것이다. 그 때에는 어렸을 때 전적으로 의존했던 어머니 뿐만아니라 같은 종류의 모든 인간에 대한 의존을 벗어나, 자신의 입장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절대타자-신,God-에게 의존하려는 좀 더 절실한 감정이 떠오르게 된다. 이 때가 한계를 절감한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종교적 본성이 나타나는 때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내면에 종교적인 본성이 잠재해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아인슈타인이 이 기사에 난 편지를 쓰고도 1년을 넘게 살다가 죽었다고 했으니, 그가 마지막에 어떻게 생각하면서 죽었는지 나로서는 잘 알지 못한다. 과학자들은 실험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것은 믿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음을 볼 때, 그도 신의 존재를 의문하며 최후의 순간을 맞았으리라고 생각한다. 과학자들의 두뇌는 구체적으로 계량화되는 자료만을 가지고 결론을 만든다.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적인 과학자라고 해도 가시적인 물질자료가 없으면 아무런 결론을 만들지 못한다. 그것은 과학의 대상이 이 물질적 우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한 말이다. 그것은 과학을 바탕으로 하는 현대 서구사상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동양에서는 관념을 통해서 우주 너머에 또 다른 차원이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것을 계량화할 수 있는 자료를 만들지 못한 이유 때문에 과학주의적 시각을 가진 서구인들로부터 비웃음을 당해 왔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이성적 논증으로 풀어낼 수 있는 문제였음에도 이제껏 몰랐다. 신 존재의 증명 문제의 마지막 해법은 우리의 태극론에 숨어 있었다. 태극을 제대로 해석하면 태초에 무한한 하나의 비존재--무한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안에 또 하나의 존재가 내재되어 있는, 즉 두 개가 하나로 합일되어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대칭적 개념인 존재와 비존재가 하나의 무한에 합일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지금도 그 상황은 같다. 중요한 것은 바깥은 무한한 비존재의 영역이고, 존재의 영역은 그 안에서 유한하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존재는 비존재의 영역에 포괄되는 부분적 존재인 것이다. 존재와 비존재의 대칭 개념은 서양철학에도 있어온 논리이다. 중국에서는 유무의 개념으로 보고 이것을 발전시켜 음양론으로 나갔다. 

  문제는 최초의 존재가 생명이었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음에 있었다. 태초부터 존재의 본질은 생명이다. 서구과학에서는 태초의 존재를 물질적인 것으로 보고 있었으니, 물리적 이론으로만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다. 생명의 기원을 증명하려는 과학계의 노력은 결국 우연한 물리적 현상에서 생명이 시작했다는 오답을 작성하고 말았다. 엉뚱하게 샛길로 빠져버린 과학은 뼈다귀 몇개를 꿰맞추어 보고 진화론을 상상하게 되었고, 그것을 과학이라고 우기고 있다..
 
  구약성경 창세기에서는 우주만물을 처음 생명적 존재이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으로 말하고 있다. 맞는 말이다. 하나님은 태초이전의 무한(태극)에서 홀로 유일한 존재로서 그의 권능으로 창조의 일을 해내셨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의 영역인 하늘과 땅(우주)이 우리가 아무리 큰 배율을 가진 천체망원경을 가지고도 다 보지 못하는,우리 인간에게는 무한과 같이, 큰 우주로 확장된 오늘날에도 그  너머에는 무한한 비존재의 영역이 펼쳐져 있음을 이해한다면, 감히 하나님--우주를 창조하신 분--이 계시지 않는다는 무신론을 주장하지 못할 것이다.  무한한 비존재의 영역 안에 갇혀 있는 유한한 존재의 구조를 깨달을 수 있다면(관념적으로),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도 존재의 영역 안에서만 유효하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으리라.아인슈타인이 이런 사실적 진리를 깨달았다면, 그런 천재가 무신론을 그대로 두고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수를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로 내세우는 기독교의 신약성경은 좀 더 검토해 보아야 하지만,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분명히 계신다고 나는 믿고 주장한다.

 

참조: 더 이상 무신론에 빠지지 않으려면 [흑암 전설]을 읽어보거나, www.goodbrothers.or.kr을 방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