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 3

코민테른 동양부와 고려공산당의 실패

(1) 극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의와 고려공산당의 실패 코민테른의 실천사업의 하나인 극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의는 우여곡절 끝에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로 옮겨 1922년 1월 말에 개최되었다. 이때 참가한 ‘조선대표단’은 김규식을 단장으로 각 단체를 대표하는 56명이었으며 여운형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동휘와 상해파 계열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유는 대회서기로 대회를 총괄하는 동양부 비서부장 슈미야츠키가 자유시참변 문제를 은폐하기 위하여 이르쿠츠크파만 참가할 수 있도록 공작했기 때문이다. 이동휘와 결별한 보이틴스키와 동양부 부장 등이 대회 준비위원이 되어 조직적으로 이동휘와 상해파를 배제하는 데 협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이르쿠츠크 한인 빨치산 부대 전권대표로 참석한 김동한은 코민테른이 아닌 러시..

상해임시정부 수립을 주도한 신민회

1919년 3.1독립만세사건은 한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대내외에 과시한 것이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6명이 기독교 인사였다. 일제의 정보기록에 의하면 이 운동은 국내에서 단독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다. 이 운동은 중국 ‘상해(上海)의 거류민’과 연결되는 통로를 갖고 있었으며, 2월 8일 동경의 한국인 YMCA에서 이광수가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동경 유학생 독립운동에도 자극을 받은 것이다. 이 당시 일본 유학생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독립청년당은 9명의 실행위원 중 7명이 기독교인으로 구성되었다. 국내에서 3.1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러시아 지역 대한국민의회는 3월 하순에 독립선언서와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명단을 발표했다. 국내에서는 3.1독립..

상해한인교회와 독립운동

상해한인교회가 시작된 것은 1914년이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망국의 한을 품고 상해로 건너간 이들은 최재학(崔在學) 외 약 30명이었다. 이들이 영국 조계지에 있는 미해군 YMCA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그곳에서 영어공부를 하다가 예배처소를 마련하게 되었고 김종상(金種商)이 예배를 인도하였다. 일제가 이에 대해 미해군에 항의를 하고 김종삼이 상해를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자 1915년 미국 선교사 피취(Fitch, 費啓澒)의 도움으로 중국인 YMCA 식당을 빌려서 예배장소를 옮겼다. 마침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선우혁(鮮于赫)이 망명해오자 그가 예배 인도자를 맡게 되었다. 1917년 교회는 임원을 새로 선출했는데, 금릉대학에 유학을 왔던 여운형(呂運亨: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