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녕 3

상해임시정부의 지도자들

상해임정은 27년 동안 5차례의 개헌을 하고 8번을 이사하면서 존속했으나, 상해시대 초기를 제외하면 열악한 재정으로 행정비용을 충당하기에 허덕였고, 내각 인선을 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말하자면 사실상 이름뿐인 정부였다. 임정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한 주원인은 이제껏 살펴본 바와 같이 자금조달의 어려움과 지도적 인사들의 참여 거부, 그리고 공산당 진영의 분열책동 때문이었다. 그리고 중국의 국공내전, 일제에 의한 상해사변(1931)과 중일전쟁의 발발(1937-1945) 등 중국의 정치적 상황은 임정을 보따리장수처럼 옮겨 다니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이렇게 고난에 찼던 임시정부 시대의 지도자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한국 현대사회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임시정부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지도자들 5인..

신민회 망명자들의 분열

신민회 발기인들을 중심으로 망명의 진행과 망명자들의 활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제1차 망명자들: 안창호, 이갑, 유동열 등은 중국 청도에 도착하여 청도회의를 열었다. 여기에서는 독립운동 기지건설을 논의하던 중에 유동열 등이 이종호가 가지고 있는 약 3,000달러의 자금으로 청도에서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자는 안을 제안하여 다수가 찬성하는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당시 청도를 조차지로 관리하고 있던 독일 총독의 불허로 이 제안은 폐기되었다. 결국 당초 계획대로 중러의 접경지역인 밀산(密山)에 토지를 사서 신한민촌을 만들고, 그곳에서 무관학교를 세우는 한편, 농업경영을 병행하면서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각자의 역할을 정한 다음에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세부계획을 다시 논의하기로 했..

일제 초기 한민족 독립운동과 사상적 동향-신민회의 발기

1910년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되면서부터 조국을 잃은 한민족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특히 만주 지방), 러시아 극동지역, 미국 및 일본 등 곳곳에서 흩어져 살고 있었다. 망국의 한을 품은 한민족의 국권회복 운동은 세계 각지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하면서 살든지, 일본제국의 지배를 벗어나 한민족의 근거지 한반도에 독립국가를 세우려는 염원을 품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당시 한민족은 누구나 독립운동에 관련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당시 러시아 극동지역과 만주에는 한민족 이주자들이 많았고, 독립운동가들도 망명하여 살고 있었다. 합병을 전후한 시기에 먼저 이곳으로 망명한 사람들은 대부분 의병이었거나 무관 출신들이었다. 이들이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일제가 국내에서 이들의 반일활동을 철저히 봉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