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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의 삼위일체론 일고(一考)

heojohn 2020. 4. 5. 07:43

목차

1. 서론

2. 삼위일체 총론

3. 성부 하나님

4.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5. 성령 하나님

6. 맺는 말

 

1. 서론

 

진실한 기독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신론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말처럼 잘 이해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의 역사에서 보아도 그렇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유일신 여호와의 선택을 받아, 그가 모세를 통해 주신 십계명으로 된 율법을 지키며 살았다. 그 율법의 첫째가 하나님 여호와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되어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와의 종으로서 여호와를 위해 살았다. 율법을 통해서 드러난 여호와는 심판자의 모습이었다. 율법을 어기는 자에게는 여호와의 심판에 따라 가혹한 처벌이 내려졌다. 그러므로 율법은 신성하고 두려운 것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은 개인과 민족의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했다. 여호와는 율법의 제정자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여호와가 율법의 심판자로 변해버렸다.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를 아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역사가 흐르면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까지 멸망하고,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고난에 처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예언자를 통해 구원자 메시아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이 약속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었다. 여호와는 약속대로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 앞에 나타난 메시아는 그들이 기대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예수가 나타나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아이고, 그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는 사랑임을 선포했다. 메시아가 오시면, 그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세상에 가장 영광스러운 민족이 되게 하리라는 그들의 희망은 낮은 곳에서 보통 사람으로 오신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할 수가 없었다.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은 그들의 율법에 따라 예수를 신성모독으로 정죄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스스로 왕을 참칭한다고 로마법정에 고소하여 예수를 반역죄로 십자가에 처형시켰다. 그러나 예수는 부활하였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자는 하나님과 예수의 성령을 받고 그들 안에서 하나가 될 것이라고 선포한다. 그리고 하나님 우편에 있다가 때가 되면, 재림하겠다고 약속하고 승천한다. 예수는 그때 땅 끝까지 온 민족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전파하라는 전도의 명령을 제자들에게 남겼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는 신이며, 2위의 하나님이 되었다.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시나 메시아, 즉 그리스도로서 이 땅에 오셨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셨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믿는 자들을 위해 보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의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부어진다. 성령은 제3위의 하나님이시나, 예수 그리스도와 달리 인격적으로 정체성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문제와 함께 삼위일체신의 이해에 있어서 최대의 난점인 것이다. 이 논문은 개혁신학에서 이러한 난점을 해명하기 위하여 칼빈 신학을 전공한 안 봉호 교수의 강의 논문에서 간략하게 요약 작성되었다.

 

2. 삼위일체-오직 주 성삼위 하나님(sola Tri-universitas)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복수로 이해하는 표현으로서 엘로힘이라는 복수명사로 언급한 것이 창세기에서 세군데, 그리고 이사야서에 한군데 있다.(1:26, 3:22, 11:7, 6:8) 이 복수명사에 대해 특이하게도 그에 대한 동사는 단수로 쓰고 있다. 하지만 구약시대에는 삼위(三位)라는 신적 그룹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때이다. 삼위일체(Trinitas, Trinity)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 신학자는 교부 시대에 알렉산드리아 터툴리안으로 알려져 있다. 삼위일체 신론을 이해하자면, 이 말이 뜻하는 개념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오늘날의 신학적 개념으로 이 말이 쓰이게 되는 과정은 길고도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역사가 아니라 신학적 개념용어로서 이 말을 잘 이해하는데 목적이 있다. 칼빈은 삼위일체를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을 유일하신 분으로, 곧 세 구분되어지시는 位格들로서 고찰되기를 원하시는 유일하신 분으로 알리신다."

"聖子에게와 聖靈에게 하나님의 全的인 본질이 고유하게 속해 있다. 사실이 그럴진대 聖父는 그 본질에 있어서 聖子로부터 구별되실 수가 없다, 왜냐하면 오직 한 (神的) 본질만이 있기 때문이다."

"聖父, 聖子 그리고 聖靈이라는 표현들은 聖三位가 실제적으로 구분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표현들을 하나님의 상이한 활동들을 따라 하나님을 言表한 그 때 그 때의 別稱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성삼위가 상호 구분되시는 것이지 분리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말씀은 하나님 곁에 없을 것이다, 말씀이 성부와 다른 존재가 아니라면. 그리고 말씀은 성부 곁에 자기의 영광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말씀이 성부로부터 구분되시지 않는다면. 성령이 성부로부터 구분되심이, 성령이 성부로부터 發出하신다는 말씀 가운데 암시되고 있다. 그리고 성령이 성자로부터 구분되심은 성령이 다른 보혜사로 불리우심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

 

한편 “4 sola”를 주장하는 안봉호 교수는 "칼빈주의와 Pietas sacro-sancta(4sola)"라는 논문에서 오직 주 성삼위 하나님(sola Tri-universitas)’으로 이해한다. 그는 어거스틴의 사랑하시는 자(amans), 사랑받으시는 k(amatus), 사랑(amor)”의 삼위일체적인 비유를 인용하면서, 하나님이 사랑이심으로 하여 당신 안에 머무르시지만 않으시고, 이 사랑을 나누시기 원하시는것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성삼위일체내적(聖三位一體神內的)으로만이 아니라 성삼위일체외적(聖三位一體神外的)으로도 <영원한 예수사랑의 공동체>를 건설하시기를 원하신다고 본다. 안봉호 교수는 이 논문에서 삼위일체론을 관념적인 신학에서보다 실천적인 측면에서 고찰하고 있다.

 

 

성부 하나님-오직 은혜(sola Gratia)

 

여기서 어거스틴이 적절하게 비유한 바와 같이 성삼위의 제1위는 사랑하시는 성부 하나님이시다. 칼빈은 하나님이 예정에 따라 구속사를 섭리하신다고 본다. 이점은 칼빈이 너무도 강조하여 칼빈 신학은 하나님의 예정론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칼빈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강조도 잊지 않았다. 칼빈은 오히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고전적으로, 더욱 철저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는 만사가 주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본다.

 

"하나님은 세계라는 기계와 그 모든 부분들을 일반적으로 움직이시는 것만이 아니라, 각각의 피조물들을 심지어는 지극히 작은 새들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지탱하시고 먹이시며 보우하심으로써 세계를 유지하신다."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을 할 때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이 하늘에 앉아서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를 느긋이 감찰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마치 뱃사공처럼 노를 잡 고 모든 것을 운행하심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입으로부터 우리의 머리터럭까지도 세인 바 됨을 가르침 받은 자들은, 사물들의 심연을 보는 가운데, 그것이 무엇이든지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은밀한 경륜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음에 대하여 추호의 의심이 없다."

 

그러나 안봉호 교수는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니라”(1:8)고 하신 말에 근거를 두고 하나님을 이해한다. 그러므로 칼빈의 절대주권에서 더 나아가 영원무궁절대주체(永遠無窮絶對主體)라고까지 강조한다.

 

우리 주 하나님이 <알파와 오메가>이시라는 말은 - 말하자면 시간의 차원에서 보면 - 永遠하시다는 말이요, - 말하자면 공간의 차원에서 보면 - 無窮하시다는 말이며, - 말하자면 관계의 차원에서 보면 - 絶對하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 하나님이 <알파와 오메가>시라는 말은 우리 주 하나님은 永遠無窮絶對하신 분이라는 말이다. 거듭 다시 말하면 우리 주 하나님은 永遠無窮絶對主體이시라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안봉호 교수는 주 성삼위 하나님을 참 신()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특은(特恩)이 아닐 수 없다고 한다. 기독신자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시는 성삼위 하나님을 은혜의 하나님(sola Gratia)이시라고 보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렇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게 될 때 우리는 우선 두 가지로 나누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선인과 악인의 구별이 없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시는 일반 은혜가 있는가 하면, 당신을 믿어 우러러 사랑하는 믿음을 주시는 특별한 은혜가 그것이다. 물론 이와 같이 주 성삼위 하나님을 믿어 우러러 사랑함에로 인도하는 특별 은혜 가운데도 여러 가지를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발목에 오는 은혜가 있는가 하면 무릎까지 미치는 은혜가 있고, 허리까지 오르는 은혜가 있는가 하면 헤엄치지 않고는 베길 수 없는 가득한 은혜 등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4.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주 예수 믿음(sola Fides Jesu crucis et resurrectionis)

 

우리가 성삼위의 제2위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참으로 하나님이시고 참으로 사람이시기 때문이다. 이 말에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뜻이 함축되어 있다. 보통 인간으로 살던 사람이 어떻게 신()이 됨을 믿을 수 있는가? 성경에서는 이것을 여러 가지로 설명한다. 여러 민족의 신화에서도 나타나는 것과 같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신()은 보편적인 개념으로도 쉽게 이해하고 믿을 수 있다. 또 신과 인간의 관계는 여러 가지 비유로 표현되기도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신의 대리자로서 지상 통치권을 가진 왕으로서 이해되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상은 국가도 없고 왕도 없던 바빌론 포로기에 나타난 것이다.

 

이 사상은 예수의 출현 당시에까지 이어졌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포는 그의 실존적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의 보냄을 받아 이 세상에 왔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가 그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와 그는 하나라고 했다.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그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했다. 비록 유대인들의 믿음을 얻지는 못했지만, 예수는 이렇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언하고 있다. 그는 아버지의 시키신 일을 한다고 했다. 그는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자신을 증언하게 했다. 그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다가 다시 올 것이라고 말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로서 또는 왕으로서 예수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신성 모독죄로 예수를 죽이기로 하고, 로마법을 빌려 십자가에 처형하게 한 것이다. 예수는 처형 직전에 유대인의 왕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에 동의했다. 반역죄의 혐의를 벗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는 그렇게 사라졌고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십자가에서 처형된 예수가 부활함으로써 자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예수는 구약성경의 예언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이루어낸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는 신약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자기 증언과 행동 외에도 그의 제자들의 증언과 활동에서도 알 수 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말을 실천하기 위해 모두 아낌없이 생명을 내버렸다는 사실에 의해서 알 수 있다. 직접 보고 들은 그들이 거짓 또는 무의미한 것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내던졌겠는가? 또 그들이 실제적인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성경 이외에 역사적인 문서들에 의해서도 언급되어 있으므로, 신약성경의 기록은 역사적인 사실로서 그대로 믿을 수 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을 수 있다면, 예수의 신성도 믿어야하지 않겠는가? 예수가 신약성경에 남긴 말은 그대로 진리로 수용되어야 한다. 그는 하나님 앞에 인류를 속죄하는 제물이 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사람들을 가르쳤다. 좀 더 정확하게는 예수를 믿는 신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여기서 구원의 조건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이다. 이에 대해 안봉호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믿음은 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임과 동시에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 하니까 우리는 거저 수수방관만 해서도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도 힘써 믿을만한 증거를 가지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제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17,31) 다시 말하면 믿음은 우리에게 은혜로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우리로 하여금 믿을 만한 증거를 주시는 가운데 믿도록 하심이니 우리 또한 의식적으로, 주시는 그 증거를 붙들고 믿음의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야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 계신 모습으로 이해해야 우리의 신앙 실존을 위하여 도움이 될 줄 안다. 그래서 우리가 믿어야 할 聖三位一體神을 다음과 같이 現存的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지금은 昇天하시사 아버지 하나님[聖父]의 우편에서 이 순간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우리를 살리시는 聖靈"(고전15,45)으로 부르시는 주 예수[聖子]님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산 믿음이 역사할 때만이 우리는 진실한 基督徒(크리스챤)가 되는 것이며 구원을, 영생복락을, 얻게 됨을 믿는다. 이렇게 기독 신앙의 핵심 혹은 신비는 우리로 하여금 구원 얻는 유일무이한 생명의 길인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독 신앙의 핵심 혹은 신비는 다름 아닌 <십자가와 부활의 주 예수 믿음(sola Fides Jesu crucis et resurrectionis)>이 아닌가? 그러니까 <십자가와 부활의 주 예수 믿음(sola Fides Jesu crucis et resurrectionis)> 안에는 기독 신앙의 핵심 혹은 기독 신앙의 신비가 다 들어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구원 곧 영생복락을 얻고자 하는 자는 <십자가와 부활의 주 예수 믿음(sola Fides Jesu crucis et resurrectionis)>을 가져야 한다고. 그렇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 예수 믿음(sola Fides Jesu crucis et resurrectionis)>엔 우리를 구원할 믿음의 신비가 핵심적으로 뿐만 아니라 포괄적으로 다 포함되어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주어 오직 주 성삼위 하나님)>을 주창할 뿐만 아니라 오직 은혜)>를 주창하고 바야흐로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주 예수 믿음)>을 주창하는 바이다.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주 예수 믿음>이야말로 우리를 저 영생복락의 하늘 나라에로 인도할 것이므로.

 

"우리는 주 예수 안으로 접붙이어 들어가 주님을 덧입었다. 우리가 주님과 하나가 되기까지는 주께서 소유하신 바 어떤 것도 우리에게 속하여지지 않는다." 주 예수 안으로 접붙이어 들어감(insitio in Christum)은 그러니까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구속의 은혜를 받아 누림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인 것이다. 물론 이 때 주님과 이렇게 연합한다 할 때 신비주의처럼 우리 인간의 주체성을 소멸시킴이거나 우리 주 예수님의 주 되심을 亡失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주께서는 우리의 생명과 친교를 맺기 원하신다. 하여 주께서 소유하신 모든 것이 우리 것이 되게 하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 안에 사시기를 원하신다, 다만 상상력으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렇다고 지상적인 방식이 아니라 영적인 방식으로. 하여 한 몸의 지체들 사이보다 더 주님과 우리가 긴밀하게 연합되는 것이다." 이 영적인 연합은 육체와 영혼을 가진 全人에 미친다 : "그리스도와의 우리의 영적인 一致[하나 됨]는 다만 우리 영혼에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와도 관계한다. 하여 우리는 주님의 살의 살이 되고 주님의 뼈의 뼈가 된다(5,30)"

 

안봉호 교수는 칼빈이 생에 마지막에 이르러 사무엘상 227-30절까지의 말씀을 본문으로 한 설교를 인용하면서 이렇게도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통하여 주의 몸에로 접속되어 주님의 지체들이 되고 우리는 주님과 공동적인 생명을 가지게 됨으로, 주님과 아버지와 하나이신 것처럼 우리는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 되신 주님과의 우리의 연합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가슴 안에 그리스도께서 內住하심 즉 우리가 주님을 누리게 되는 바 거룩한 일치[하나 됨]를 나는 최상의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 되실 때, 주님께서 넘치시게 소유하시는 善益들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주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기 위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멀찌감치 혹은 우리 밖에서 주목하여야 함을 나(칼빈)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주님을 덧입어 주의 몸 안으로 접붙이어 들어갔음을, 간단히 말해, 주님은 우리와 자신을 하나 되게 하시고자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음을 말하는 것이다."

 

5. 성령 하나님-오지 거룩한 성도의 삶(sola vita sancta)

 

신약성경에서 성령에 대한 첫 언급은 요셉의 약혼녀 마리아에게 수태고지를 하러 나타난 천사가 한 말(1:18)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두 번째로 성령은 세례를 받는 예수의 머리 위에 비둘기 같이 나타나고, 이때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 안에서 내가 기뻐한다고 말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린다.(3:16-17) 그 이후로 성령은 예수의 사역에서 질병 치료와 이적 능력의 원천이 되었다.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흘러나와서 아들 예수에게 무한히 부어지고 있었다.

 

예수는 최후의 만찬에서 고별설교를 통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진리의 영인 그를 세상은 알지 못하겠고”(14:16-17)라고 말씀하시면서, 성령을 다른 보혜사(알로스 파라클레토스)’, ‘진리의 영이라고 말한다. 부활 후에 예수가 성령으로 침례를 주겠다고 약속하신 성령은 오순절 날에 모여 있던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났다(2:2). 성령은 강풍 같은 소리와 불같이 갈라진 혀 모양으로 나타나 예수가 말씀하신대로 제자들에게 방언의 능력을 주었다.

 

이것을 보고 놀란 유대인들에게 베드로는 선지자 요엘을 인용하면서 강론했다(2:14-41).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는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다고 말한다. 성령은 성부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예수가 이를 받아서 신자들에게 부어주시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여기에서 강론하는 바와 같이 성령은 어떤 모양이나 형상이 없이, 다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바울은 성령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니라 ”(8:11), “우리를 살려 주는 성령”(고전15:45)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성령이 능력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바울은 더 나아가서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6,17)고도 말했다. 말하자면, 바울은 성령을 공유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각자 성령에 대한 인식이 서로 조금씩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령을 인격적으로, 또 구체적인 한가지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에 대한 연구는 더욱 진전되어 나가야할 소명으로서 요청된다.

성령은 기독교 신학 삼위일체론에서 제3위이신 하나님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칼빈은 성령에 대해서 깊이 다루지 않았다. 이점에 대해서 안봉호 고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먼저 아쉬운 점부터 말하면 칼빈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성도의 삶을 말하면서 성령의 하시는 일을 상당히 축소시켰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가 강조하여 말하는 바 성도의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차원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새로남의 삶은 중요한 부분이다. 매우 생명적으로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이 부분 내지는 차원만을 말하고 다른 부분 혹은 차원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는 것은 유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점이 칼빈의 미흡한 점이 아닌가 한다.

 

안봉호 교수는 고린도 전서 6:17절을 해설하면서 다음과 같이 성령에 대하여 진술한다.

 

그러면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 單刀直入的으로 말하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 속으로 들어감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4,14) 속으로 들어감이라는 말이겠다. 같은 내용을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신다 : "(십자가와 부활의 주 예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7,38). 여기에서 예수 충만은 성령 충만이라는 진리를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예수님과 성령님은 구분되시는 위격들이시다. 그러나 사역에 있어서는 하나로 나타나신다. 바로 여기에서 바울은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바울에게 있어서도 주 예수님과 성령님은 구분되시는 위격들이시다. 그러나 경험되는 차원에서는 하나 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모든 성숙해 가는 성도들이 바야흐로 進入하게 되는 <십자가와 부활의 주 예수와의 신령한 연합>(칼빈 역시도 그렇게 강조하여 마지않는 바)은 우리에게 성령의 생수를 마시게 하는데, 이 때 성령은 臨在能力으로 나타나신다.

 

칼빈을 깊이 연구한 안봉호 교수는 자신의 주장이 칼빈과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면서, 성령으로 말미암은 성도의 삶을 말한다. 이것은 안봉호 교수의 실천적 신학의 핵심이다. 그는 <십자가와 부활의 주 예수와 신령한 연합>의 결과로 나타나는 성령의 임재와 그 능력의 나타남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1). 우리는 성도의 삶을 말하면서 인간을 넘어서는(supra nos) 성령의 은사들 또한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침묵한다면 부지부식 간에 성경이 다음과 같이 성경이 증거하는 성령의 은사에 침묵하고 있음을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12, 7-11).

 

그러니까 성령으로 말미암는 성도의 삶에는 이와 같은 성령의 나타남이 있음을 우리는 일순이라도 잊으면 안 될 것이다. 성도의 삶은 바로 이와 같은 성령의 나타남이기도 함을 우리는 적극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불신과 자유주의가 횡행하여 도전 받고 있는 복음 선포를 강력하게 수행할 수 있기 위하여서, 주의 크신 은혜를 구하는 가운데 성령의 나타남을 선양(宣揚)하고 사모하기를 마지않아야 할 것이다. 초월(超越)을 상실한 세대에 초월의 세계를 지시하는 성령의 나타남을 보임으로써 기존 성도들의 신앙을 강화시켜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회의(懷疑)하는 불신자들에게 주의 복음의 실체성을 보여주고 믿음의 세계로 진입하게 만드는데 많은 유익이 있을 것이다.

 

2).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새 술'에 취한다. 술 취한 자는 맨 정신의 사람과는 여러 가지로 다르다. 마찬가지로 성령으로 취하여 성령의 사람이 되면 그는 신령한 노래의 사람이 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3,16)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말씀을 풍성히 하여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충만히 거하게 되실 때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 되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바울은 또 말한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5,18-21).

 

그러니까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와 찬송과 감사의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되는 성도의 삶을 말하면서 찬양과 경배의 삶을 사는 성도의 삶을 침묵한다면 그것은 성도의 삶 가운데 나타나는 성령의 나타남을 무시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만일 노래하고 찬양하는 것은 '엄숙주의'에 맞지 않다는 말인가? 그런 '엄숙주의'(주를) 찬양하는 공동체인 교회 생활에 오히려 불일치함이 아닌가? 물론 우리는 진정성을 결여한 기교적인 노래나 춤사위는 적극 삼가야 할 것이다. 오히려 민망함과 공허함을 일으킬 따름이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으로 터져 나오고 성령의 임재를 선포하는 찬양과 경배는 높이 평가되고 적극 수용하여 실천할 것이다.

 

3). 성도의 생활에는 이렇게 성령의 나타남으로서 성령의 은사들이 역사하기도 하고 또 신령한 노래와 찬양이 피어오른다. 그러나 동시에 성도의 생활은 이제 성령으로 말미암은 새로 남 혹은 거듭 남의 생활이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성화(聖化)의 과정을 밟는 생활이지 않을 수 없다. 육을 죽이고(mortificatio carnis), 성령의 역사 안에서 영을 살리는(vivificatio spiritus) 성화의 과정, 그리고 영화(榮化)의 과정이지 않을 수 없다. 여기 성도의 성화에 즈음하여는 기독교 윤리를 성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적어도 성도의 영화와 관련하여 기독교의 특별한 영성 곧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으로서의 영성을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8)

 

또 성화와 관련해서는 우리 주님의 자기 비우심처럼 우리 또한 자기 비움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 사람처럼 아만(我慢)의 악취를 발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말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성도의 삶은 바로 주 예수를 좇는 삶(Nachfolge Jesu)이지 않을 수 없다. 십자가를 지는 고난의 행군 같은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을 좇음으로서의 삼대사역(三大 使役-복음 선포와 교육과 치유)을 성도의 삶으로서 실천해야 할 것이다. 물론 전문 사역자들도 있는 것이지만, 살아 있고 성숙한 성도라면 누구든지 '누가 우리에게 우리가 가지는 바 소망에 대하여 물으면 대답해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기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주의 복음을 나름으로 증거하며 또 설명하며 그리고 주의 돕는 은사로 주의 은혜를 나누는 성도의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부지런히 기도하신 것처럼 성도도 부지런히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가능한 대로 우리 주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주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자 하는 성도의 길을 가야 할 것임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6. 맺는말

 

삼위일체의 실제적인 이해는 어렵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은 개념 정립에 구체적인 논리성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실재(實在)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는 신()을 인간이성의 능력으로 인식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시기 위하여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주셨다고 믿는다. 예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보여주심, 즉 현현(顯現)이다. 예수의 생애와 말씀은 성경에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을 성경을 통해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느낄 때, 우리는 예수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말씀을 그대로 믿는 믿음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믿음에는 실천이 따라야 한다. 실천에는 지식보다 믿음이 더 많이 작용한다. 위대하신 신 적 존재이신 성삼위를 진정으로 믿는 믿음은 신자들에게 경건한 삶을 살게 하는 힘이 있다. 신자의 믿음은 실천에서 성장한다. 이러한 실천적 믿음을 안봉호 교수는 지극히 거룩한 경건(Pietus sacro sancta)라고 표현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의 주 성삼위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경건'을 그야말로 '지극히 거룩한 경건'(Pietas sacro-sancta)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극히 거룩 거룩 거룩하신주 성삼위 하나님으로부터 비롯하고 말미암으로 돌아가는 경건이므로. 여기에서 '지극히 거룩한 경건'(Pietas sacro-sancta)은 다름 아닌 '주 성삼위 하나님의 경건'(Pietas Tri-universitatis)임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을 믿어 우러러 사랑하는 믿음이 주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으면 우리를 구원하고 복되게 하며 부요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구원의 한 소식, 곧 경건(Pietas)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직 더욱 가득하신 - 알파와 오메가 (永遠無窮絶對主體)이신 - 주 성삼위 하나님(sola Tri-universitas/)의 진리와 생명과 사랑 가운데 聖父의 절대 주권적 은혜 아래 (sola Gratia)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주 예수 믿음(sola Fides Jesu crucis et resurrectionis)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는 성도의 거룩한 삶( sola Vita sancta)이 우리를 구원하는 진리요 생명임을 발견한다. 이 진리와 생명이야말로 우리 인류를 구원할 北極星인 것이다. 이 진리와 생명이야말로 우리 인생이 나아갈 살 길을 指路하는 나침반인 것이다. 이 길만이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며 이 길만이 우리를 저 永生福樂의 은혜의 바다에로 인도한다. 바로 이 진리는 '주 성삼위 하나님의 경건'(Pietas Tri-universitatis)이요 거룩 거룩 거룩한 경건'(Pietas sacro-sancta)이다'.

 

그리고 안봉호 교수는 그의 신학을 성경신학(誠敬神學)으로 부른다. 여기에서 그는 절대적인 성삼위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경건한 기독신자의 삶을 가르친다. 칼빈이 소홀히 했던 실천을 강조하는 신학이다. 이해의 부족에도 불구하고기독신자로서는 당연히 그의 성경신학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숭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