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 연구 페이퍼

20세기 서구 기독교의 종말론

heojohn 2020. 4. 5. 08:39

1. 개관

 

19세기에 서구는 기독교 시대였다. 19세기 말에는 기독교적 세계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관철되는 것처럼 보였다.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였고, 인도가 영국에게 점령당하였으며, 일본과 한국이 유럽에게 자신을 개방하였다. 중국은 서구 기독교인에게는 마지막 선교의 장으로 여겨졌다. 이런 상황에 도취된 서구 기독교인들이 천년왕국설을 세계사적 해석의 틀로 여긴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은 모두 천년왕국설에 도취되어 있었다. 미국에서는 새로운 세계라는 아메리카의 꿈이 수백만 명을 끌어들였으며, 그것은 차르 황제가 다스리던 러시아에서 종말적 세계구원의 러시아적 꿈으로 나타났다. 콘스탄틴이 멸망한 다음 모스크바가 기독교적-정교회적 제국의 지배를 인수하였다는 러시아적 사상을 형성한 것이다. 이런 사상은 영국의 세계제국에서 선교적 동인과 결부되었다. 스페인의 세계제국에서는 기독교 왕국을 확장함에 있어서 정복과 세례가 결합되었다. 프러시아-독일에서는 문화 프로테스탄티즘이 종말론적인 것을 역사 안으로 끌어들였다. 칸트의 윤리와 헤겔의 역사철학은 문화프로테스탄티즘의 틀을 확립시켰다.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프랑스는 자기를 제민족 문화의 선구자며 보호자라고 이해하였다. 이것이 20세기 기독교 종말론의 문제들에 대한 배경이다. 20세기 종말론의 문제들은 이론적 문제들이 아니라, 20세기 초반의 역사 경험에서 생성되었으며, 종말론의 새로운 형성을 초래한 당혹스러운 문제(Aporien)이기도 하다.

 

20세기 인류가 경험한 역사의 경악들-1차 세계대전, 러시아 10월 볼세비키 혁명을 통한 차르의 몰락, 미국의 세계분쟁 개입,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붕괴와 나치 제3제국의 등장, 그리고 아우슈비츠에서의 유태인 대학살 및 세계 제2차 대전의 패배, 히로시마의 원자폭탄 폭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누출사고 등은 19세기의 모든 천년왕국설적이나 메시아적인 설계를 철저하게 파괴해버렸다. 대신 묵시사상(Apokalyptik)이 등장하였다. 현대의 종말론적인 사고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19세기의 메시아적 비전과 20세기 역사의 묵시사상적 경악에 의하여 결정되어 있다. 현대의 종말론적인 문제들은 신학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문제이기도 하다. 그것은 역사 자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오늘날 인간의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위기의 문제는 종말의 시대를 선포한다. 모든 종말론은 그 나름의 방법으로 우리 자신을 통하여 우리 세계 위에 일어나고 있는 심판에 참여하고 있다.

 

 

 2. 근대 종말론의 시간화

 

 근대 종말론의 긴장관계는 일반적으로 미래의 종말론과 현재적 종말론 사이의 반립(Antithese)으로 생각되었다. 다시 말하여 모든 사물의 종말은 완전히 미래에 있든지, 아니면 완전히 이미 왔으며 현재적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의 근대 종말론의 범주(Kategorie)를 해명하고자 하면서 현재와 미래의 시간으르 마지막 일들에 대한 범주로 삼을 경우, 시간의 허무성으로 인하여 그 범주를 주장하기가 어렵게 된다.하나님의 나라가 기독교의 종말론적 메시지의 총괄개념이라면, 그것은 은폐된 방법으로는 이미 지금현존하지만, 명백한 방법으로는 아직 있지 않다.” 따라서 희망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될 수 있는 데에 있다. 그러나 생성하는 것은 모두 지나가버리고, “아직 있지 않은것도 지나가버린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미 지금아직 아니의 이러한 일직선상의 시간의 표상으로써는 종말론이 파악될 수 없으며, 오히려 폐기될 수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종말론의 시간화가 도대체 어떻게 있게 되어 있는가?

 

1) 위르겐 몰트만 

 

종말론의 시간화의 첫째 형태는 17세기의 위르겐 몰트만의 예언자적 종말론에서 발견되는데, 여기서 성서는 더 이상 신적 자기 계시의 원전으로 읽혀지지 않고, 미래 세계사의 신적 예언으로 읽혀진다. 성서는 오류가 없다. 그러므로 아직 성취되지 않은 종말론적 예언들은 종말에 성취될 것이다. 성서주석의 위대한 테마로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구원사의 단계, 곧 세계사의 일곱 시대를 통하여 순차적으로 완성될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핵심이라면, 구원의 신비는 하나님의 인도의 신비와 동일하다. 루터가 중요하지 않게 여긴 요한계시록이 여기서는 성서의 마지막 책으로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 속의 비밀스러운 계시의 시간사적 해석은 이와 같은 예언자적 신학의 전통으로부터 유래한다. “예언자적 신학은 역사와 종말론, 경험되는 현재와 예언되는 미래는 동일한 시간선상에 있다는 것을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다.

 

2) 알버트 슈바이처

 

둘째 형태는 철저 종말론에서 발견된다. 이것은 알버트 슈바이처의 유명한 <예수의 삶의 연구사>(1906)라는 저술과 함께 시작되었다. 슈바이처는 근대 역사적-판적 방법의 도움으로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진 그리스도론의 교의학적 성상(Ikonen)을 뚫고 들어가 기독교의 역사적 기초를 예수의 삶속에서 발견하려는 노력의 헛됨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교의학적으로 조작된 하나님-인간 그리스도 대신에 갈릴리 사람, 사실적인 나사렛 예수가 등장해야 하며, 그의 역사적 인격성은 인간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청년 슈바이처는 1894년에 이미 마가복음 10-11장에서 이 사실적 예수는 완전히 낯선 사람임을 발견하였다. 역사적 인간 예수는 그 자리에 서 있지 않고, 2천년 동안 교회의 이론에 묶여 있던 속박을 끊어버리고, 우리의 시대를 지나가서 그의 시대로 돌아가 버렸다. “메시아로 등장하였으며, 하나님 나라의 인륜을 선포하였고, 하늘의 나라를 땅 위에 세웠으며, 그리고 죽은 나사렛 예수는 결코 실존하지 않았다.

 

슈바이처에 의하면, 그 까닭은 예수의 메시지는 결코 인륜적인 것이 아니라 묵시사상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인륜적 발전이나 역사적 발전의 목적이 아니라, 초월로부터 이 세계 속으로 홀연히 들어와서 그것을 끝내버린다. 여기서 슈바이처는 리츨이 완전히 자유롭게 행한 것처럼, 현대의 관념들을 예수 안에 투입시키고 신약신학을 통하여 그것들을 예수에게서 다시금 자기의 영지로 되돌려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짓는다. 예수의 삶과 죽음이 하나님 날에 대한 종말론적-묵시사상적 기다림 속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그의 삶의 역사는 종말론적 역사이다. 그것은 종말론적 희망과 세 가지 역사적 실망으로 이루어졌다.

 

(a)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초월적으로 곧 도래하리라고 기대하고 제자 70인을 이스라엘 각 성읍들로 급해 파송했으며, 이들이 돌아오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b) 제자들이 예수의 기대를 깨고 돌아왔을 때, 예수는 자기가 받아들인 제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메시아적 재난이 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11:12에서처럼, 예수는 스스로 메시아적 고난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억지로 이끌어오고자 했다. 그러나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는 고난을 받고 죽었지만, 종말이 오지 않음으로써 두 번째 실망이 일어났다.

(c) 제자들이 부활절의 현현을 근거로 새로운 희망의 확실성과 종말의 가까움에 대한 기다림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제2세대에게도 종말이 오지 않았을 때, 제자들은 그들의 실망을 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예수의 종교를 교회적-성례전적 교회로 바꾸어버렸다. 그것은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메시아적 희망 대신 교회를 통하여 중재되는 영원의 현재가 등장이다.

 

슈바이처는 2천년 동안 계속되어온 재림지연은 기독교의 종말론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으로 본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변함없이 돌아가고 있으며, 모든 정상적인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세계사는 계속될 것이다. 이제 알버트 슈바이처는 종말론적 광신과 함께 좌절하여버린 역사의 예수를 버리고, 예수의 종말론 뒤에 숨어 있다고 믿는 윤리적 의지세계의 윤리적 완성에 대한 강한 의지를 경외하며, 우리의 시대 속에서 이 의지를 위하여 봉사하고자 한다. 수바이처는 요하네스 바이스(Johannes Weiss)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종말론을 인식하고 놀란 나머지, 낯선 원시 기독교를 버리고 그가 잘 알고 있는 19세기의 문화 기독교로 돌아갔다. 그러나 세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세계사는 어떻게 계속될 수 있는가? 왜냐하면 이제 사람들은 생명의 종말이 언제든지 가능한 마지막 시간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알버트 슈바이처와 그를 따르는 소위 철저 종말론학파는 종말론을 철저히 폐기시켜버렸다. 근대 개신교의 문화 기독교는 그것이 1차 세계대전의 경악 속에서 몰락하기 전에 이미 내적으로 공허하게 되었으며 설 수 있는 근거를 잃어버렸다.

 

3) 오스카 쿨만

 

셋째 현태는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구원사 신학에서 발견된다. 신약성서에 대한 그의 신학적 연구는 한편으로는 철저 종말론의 오류와 대결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불트만의 비신화화극단적 해결과 대결하는데 있다. 그는 이 두 가지 표상 곧 철저 종말론아직 아님과 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의 지금 이미선적인 시간 개념에서 중재하고자 시도한다. 예수는 그의 메시지를 통하여 새로운 시간 구분을 정립하였다. 기독교적 이해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시간의 중심이다. “시간의 기원이라고도 불리는 시간의 충만은 유대 묵시사상이 생각하듯이 미래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건 곧 과거에 있다. “그리스도 탄생 이후의 시간은 성취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시간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이미아직 아님의 사이에서 실존한다. 쿨만에 의하면, 시간을 여러 단계로 구분하는 것은 구원사적인 질을 가진다. 그리스도의 탄생 이후에 성령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 사이에 있는 교회의 시간이요, 구약성서의 약속의 시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과거-역자 주)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일어나게 되는 일(미래-역자 주) 사이의 중간 시간이다. 알버트 슈바이처가 내쫓은 재림지연은 원시 기독교의 신앙적 실망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신약성서 안에서 그때그때마다 수정되는(벧후 3:8) “견해의 오류에 불과하였다. 쿨만은 이미 지금아직 아님사이에 있는 시간의 긴장관계에 대하여, 언제나 다시금 전쟁에서 일어나는 최후의 결전과 적을 완전히 섬멸하는 최후 승리의 날의 상을 사용한다. 그리스도는 이미 최후의 결전에서 이미 승리했다. 그러나 성령이 세계에 충만할 때, 비로소 최후의 승리의 날이 올 것이다.

 

쿨만의 기본구상은 구원사 신학인데, 이것은 17세기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19세기에 널리 유포되었다. 구원사는 전체적으로 예언이다. 예언은 역사적으로 역사 속에서 성취된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성취된 예언인 동시에 마지막 시간의 예언자적 시작이다. 성서적 계시의 역사는 헬레니즘의 회기적 시간 이해와 대립되는 선적 시간 이해를 포함하고 있다. 쿨만은 시간의 중심인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대한 그의 통찰을 전개하는데, 구원사는 이 계획에 근거되어 있다. 구원사적 종말론은 가장 널리 알려진 기독교의 종말론이며, 여기에서 계속 진행되는 시간은 희망을 파괴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종말론의 약점은 명백하다.

 

(a) 마지막 결전과 승리의 날 사이의 시간이 너무 길어지면, 마지막 결전이 과연 있었는지, 적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는지 의심하게 된다.

(b) 선적 시간에 대한 표상은 쿨만이 생각하듯이 성서적 표상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에서 이미 발견할 수 있는 근대 자연과학적 표상이다. 이 표상과 함께 시간은 양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시간이 구원사적 질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거와 미래는 펼쳐 있지 않은 평면 위의 단계에 불과하며, 측정에 있어서 동일하다. 쿨만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적 미래를 측정될 수 있는 시간으로 표상한다. 시간은 미래로부터 과거로 흐르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최후의 날은 최후의 달력의 마지막 장이 될 수밖에 없다. 쿨만에 따르면, 이것은 견해의 오류로 표현될 수 있으며, 이 오류는 시간을 선적 평면으로 이해하는 그의 표상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c) 구원사 신학은 미리 계획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근거하는데, 그것은 계몽주의적 신학이다. 그것은 역사적 이신론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세계사의 위대한 설계자이지만, 이 설계를 이미 마쳤을 때에는 더 이상 개입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의 생동적 현존은 어디서 경험될 것인가? 오히려 우리는 거꾸로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최후의 날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이 최후의 날을 가져온다고 말이다. 그리스도는 시간과 함께 오시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변화를 위하여 오신다.

 

종말론의 구원사적 시간화도 종말론을 사실상 폐기하며, 그것을 크로노스(Chronos) 곧 허무성에 예속시킨다. “시간성이 종말론의 본질인가?”

 

2. 현대 종말론의 영원화

 

 알버트 슈바이처의  철저 종말론곧 하나님 나라의 임박함에 대한 예수의 기대는 언제나 계속되는 역사의 변함없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의하여 무산되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기독교의 역사가 대재난을 당한 후, 종말론에 대한 전혀 새로운 이해가 생겨났다. 인간의 힘으로 돌이킬 수 없는 역사가 종말론을 종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종말론이 역사를 종식시킨다는 것이다. 그것은 칼 바르트(Karl Barth)와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위기의 신학과 함께 생성되었으며, 파울 알트하우스(Paul Althaus)도 가세했다.

 

1) 칼 바르트

 

기독교의 종말론이 말하는 종말(Eschaton)인류의 마지막 날들처럼 우리의 역사적인 날들의 시간적 끝이 아니라, 이 역사의 모든 순간 속에 있는 영원의 현재이다. “최후의 답변, 최후의 결단과 최후의 나팔소리는 역사의 환상적인 마지막의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날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이 시간 속으로 돌입할 때, 하나님의 케리그마의 결단의 부르심이 인간을 마지막 결단으로 세울 때, 인간이 하나님에 관한 사상을 철저하게 끝까지 생각할 때, “지금 여기서일어난다. “영원에 대해서 오직 하나의 시간이 있다고 키에르케고르는 설명하였다. 칼 바르트도 1922년 그의 <로마서 해석> 2판에서 이같이 이해하였는데, “영원변증법적 신학의 기본 단어이다. “영원한 순간은 모든 순간에 대하여 비교할 수 없이 서 있다. 그것은 모든 순간의 초월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하나님의 놀라운 말씀을 순간 속에서 듣는 자는 미래에 대한 관심을 상실한다. 물론 역사와 자연 속에서는 재난이 일어나며 인류는 사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종말론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역사의 종말은 미래의 역사에서 경험될 수 없고, 오직 영원이라는 시간의 한계에서 경험될 수 있다. 시간의 한계는 시간들 사이에 있는 모든 순간 속에 현존한다. 모든 순간은 영원의 원자이지 시간의 계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의 모든 순간은 이 영원한 순간의 가치를 받을 수 있다. 시간의 모든 순간은 영원한 순간의 비유(Gleichnis)이기 때문이다. “모든 순간은 계시의 비밀을 본래부터 그 자신 안에 지니고 있으며, 모든 순간은 자질을 얻은(qualifizierter) 순간이 될 수 있다.”영원의 현재를 통하여 자질을 얻게 된 모든 순간에 대하여 우리는 종말이 가까웠다.”고 말할 수 있다. 시간들 사이의 순간 속에 있는 영원한 현재를 바르트는 영원한 지금(nunc aeternum)이라고 부른다. 기독교적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은 이 영원한 순간 속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현재이기 때문이다. 영원은 하나님의 드리워져 있는 벽처럼 모든 시간과 모든 시간의 내용의 지양이다. 여기서 인간 곧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인간은 마지막시간에 서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무도 가까웠다. 시간들의 벽인 예수의 현재가 우리를 억누른다.”

 

종말론이 순간 속에 있는 영원의 현재와 관계하며 시간의 이 한계 및 지양과 관계한다면, “철저종말론과 그의 역사적 실망의 체험들로부터 생성된 재림 지연의 문제는 붕괴되어버린다. 그것의 개념에 있어서 등장할수 없는 것이 어떻게 머물러 있을수 있겠는가?

 

종말이 마지막 사건을 뜻하지 않고 영원을 뜻한다면, 종말론은 더 이상 미래와 관계가 없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가까움을 선포할 때, 그는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하늘을 볼 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로부터 현재 속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주기도문에서처럼 하늘로부터 땅으로 오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생각은 신약성서 신학자 도드(Charles H. Dodd)가 주장한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에서도 발견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 메시지의 전형은 바이스와 슈바이처가 주장하는 것처럼 묵시사상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랍비신학에서 유래한다. 예수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주권이 여기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였다.’이다. 랍비적 견해에 의하면, 토라에 복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의 멍에를 짊어진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의 현재를 전제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처럼 수납하는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온다면(10:15),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현재적일 수밖에 없다. 회개로의 부름도 하나님 나라를 전제한다. 예수의 원시 기독교에서 하나님 나라는 기다림의 영역에서 경험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그것이 우주적으로 나타나는 것만이 남았을 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의 사람은 물론 과거의 사람도 포함한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하늘에 계신 왕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8:11). 예수는 하늘나라가 지금 이 땅 위에 나타나야 한다고 선포한다. 그것은 미래로부터 현재 속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영원으로부터 시간 속으로 온다.

 

2) 파울 알트하우스

 

1922년 칼 바르트가 초월적 영원의 종말론으로서 주창하던 것을, 청년 파울 알트하우스는 같은 해에 그의 저서 <마지막 사물들>의 첫 판에서 가치론적 종말론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알트하우스도 바르트와 같이 극단적으로 말한다. “역사의 결과는 그의 시간적인 마지막 상태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역사의 피안 속에서 고양된다..... ‘마지막 일들은 역사의 마지막 단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종말론은 역사의 마지막 상태에 관한 질문에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다.” 우리는 역사의 횡선 마지막 점에 이르기까지 끌어감으로써 역사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수직선을 그 위에 세움으로써 도달한다. 다시 말하여 모든 시간이 태초의 상태와 죄의 타락에 대하여 똑같이 가까운 것처럼, 모든 시간은 완성에 대하여 똑같이 직접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시간은 마지막 시간이다. 알트하우스에게 있어서 종말은 영원이며, 완성과 그리스도의 재림은 초시간적이다. 그것은 시간적으로 시간 속으로 등장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시간 속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이에 대하여 그는 신칸트학파의 가치(Axiom)개념을 사용하여 가치론적 종말론이라는 그의 종말론을 구성한다. “우리가 삶의 한 가운데서 규범을 만날 때, 마지막 일들의 가치개념이 형성되는데”, 그것은 절대적 규범을 만날 때이다. 따라서 영원한 것은 제한된 것 안에 있는 무제한적인 것으로서, 그리고 역사 안에서 초역사적인 것으로서 우리를 만난다. 뱌르트와 알트하우스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공감하고 있었다. 첫째는 인간적인 가치와 상황은 역사적인 것으로서 예외 없이 죽음으로 규정되어 있으며, 영원의 심판 아래 있다. 둘째는 기독교의 참된 근원을 찾았으며 문화 기독교를 거부하였다. 셋째는 기독교의 종말론을 근대 문화 기독교의 진보신앙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기독교의 종말론의 참된 신적 진리를 찾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천년 왕국설과 유대교의 메시아니즘을 거부하였다.

 

진보신앙과 세계사의 완성을 말하는 헤겔의 철학체계에 반하여, 바르트와 알트하우스와 그들의 동조자들은 역사학자 레오폴드 폰 랑케(Leopold von Ranke)의 말을 자주 인용하였다. “그러나 나는 주장한다. 모든 시대는 하나님에게 직접적이며, 그것의 가치는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에 있지 않고, 그의 실존 자체에, 그 자신에 있다.” 바르트는 이에 더하여 모든 역사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직접성 가운데서 비역사적이다.” 이에 연이어 알트하우스는 진보신앙에 반하여 각 시대가 지닌 그 자체의 가치를 주장하였다. “모든 시간은 심판에 대하여 직접적이며, 완성에 대하여 직접적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시간은 마지막 시대이다. 마지막 시간뿐만 아니라, 모든 시간은 계속하여 영원에 의하여 지양된다.... 모든 시간은 로마서 1312절의 여명 속에 있다 :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파울 알트하우스는 그의 초기 현재적 종말론을 가지고 미래적 종말론을 대체하려 하였다. 그는 자기의 가치론적 종말론목적론적 종말론을 첨가하였다. 가치론적으로 우리는 시간 한 가운데서 절대적 가치의 무시간적 타당성을 경험한다. 목적론적으로 우리는 절대적 가치를 우리의 의지에 대한 목적으로 인지한다. “한편으로 영원한 생명은 그 속에서 영혼이 열락 가운데 안식하는 현재적 소유 곧 하나님의 오늘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은 세계와 관계되어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동경의 깊은 긴장감 속에서 지향하는 희망의 목적이다.”

 

바울이 로마서 1312절 이하에서 사용하는 역동적 은유(Metapher) 깊은 밤가까이 다가온 낮의 은유는 바르트는 물론 알트하우스에 의하여 시간과 영원의 변증법의 통제 속으로 압착된다. “모든 시간이 로마서 1312절의 여명 속에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에 있어서 하나의 모순이다. 만일 바르트가 시간의 모든 순간이 그것으로 될 수 있는 영원한 순간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은 복음과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카이로스적인 오늘과 고린도 전서 1552절이 말하는 죽은 자들의 부활의 종말론적 순간을 혼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에 대하여 동시적이며 똑같은 의미를 가질 뿐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전도자의 좌절된 기분에 상응하는 것이지, 이사야의 메시아적 열정에 상응하지 않는다.

 

3) 루돌프 불트만

 

루돌프 불트만의 종말론도 영원한 순간에 해당된다. 그는 영원한 순간을 인간학적으로 증명하여 성서의 종말론적 진술들을 실존론적으로 해석한다. 불트만에 의하면 종말론은 묵시사상적 보고가 아니라, “종말론적 순간에 유의할 것을 가르친다. 하나님의 계시의 카이로스 속에서 인간은 마지막 철저한 결단앞에 세워지기 때문에, 이 결단의 순간은 마지막 시간이다. 케리그마의 결단의 부름 속에서 마지막의 것은 절대적인 것으로서 현재가 되었기 때문에, 이 현재는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지막인 것처럼, 그는 또한 역사의 마지막이기도 하다. 케리그마를 통하여 우리는 믿음 가운데서 과거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참으로 역사적으로 실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오늘 여기서 우리에게 열리게 된다. 예수의 선포와 기독교의 케리그마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 있음과 하나님이 그 앞에 서 있음을 가리킨다. 실존론적 종말론은 세계의 미래적 마지막에 대해 다루지 않고, 인간의 실존의 현재적 탈세계화에 대해 다룬다. “나의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5:24).

 

불트만의 종말론은 시간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영원한 의미에서 현재적이다. 그것은 미래의 종말론으로 보완될 수가 없다. 따라서 슈바이처의 철저 종말론에 대한 그의 명백한 반대 명제는 다음과 같다. “역사는 종말론에 의하여 삼켜졌다.” 역사 전체의 의미나 세계사의 마지막은 불트만의 신학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종말론적 순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모든 순간에 숨어 있다. 이리하여 재림지연의 문제는 한편으로 밀려나버렸다. 이제 우리는 역사의 종말을 알기 위하여 미래를 보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불트만이 종말론적 순간이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카이로스를 소홀히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현재적 실존의 역사성과 미래성에 대한 이런 집중으로 인하여 묵시사상적 세계종말은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만다. “최후의 날에 대한 진술은 죽음에 대한 진술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러나 요한네스 바이스가 이미 원시 기독교의 세계멸망의 종말론 대신 개인 종말론을 제시하였다: 우리는 세계가 끝나리라고 믿지 않는다. 세계는 지속될 것이고, 우리 각 사람이 세계를 곧 떠날 것이다.

 

종말론에 대한 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은 그 자신의 개인적 실존에 집중하는 점에서는 타당하지만, 세계사와 자연사를 도외시하는 점에서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미래가 개인의 미래성으로 인지된다 하여 미래가 폐기되는 것은 아니다. “최후의 날이 나의 죽음으로 대치된다 하여, 죽은 자들의 미래에 대한 질문에 답변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그 자신의 실존과 관계되는 것만이 자기에게 타당성을 가진 개체에 불과하지는 않다. 인간은 세계사적 투쟁들에 있어서 대상이기도 하다. 역사가 역사성에 근거한다면, 그 반대도 타당하다. , 역사성은 역사에 대한 참여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래성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미래는 인간 실존의 미래 개방성 속에서 주체적인 것이 된다. 인간은 그의 실존을 단지 자기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다른 사람들과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도 가지기도 한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실존에 대한 과거의 용어인 영혼에 대한 희망만을 가르치지 않는다. 신체와 공동체와 교회와 이스라엘과 우주의 희망을 가르치기도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좌절(포기)을 우리는 기독교적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온 세계가 반대하여도 나의 결단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이로써 배제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영원한 순간의 종말론은 그것의 발견자들과 대변자들이 선포한 것처럼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이미 슐라이어마허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유한성 가운데서 무한한 것과 하나가 되며 순간 속에서 영원한 것이 되는 것, 이것이 종교의 불멸성이다.”

(숭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