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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크하르트, 베르나르, 라샤르의 신비주의

heojohn 2020. 4. 5. 12:43

1.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고독, 그리고 하나님께 도달함"

 

1) 서론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8)는 호크하임(Hochheim)에서 태어나 도미니크회의 수도사가 되었고, 파리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수도회의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독일 전체의 총장이 되었다. 탁발수도사로, 또 설교자로 스트라스부르그(Strassburg)에 있다가 쾰른(Cologne)에서 가르쳤다. 그는 말년에 이단 혐의에 휩싸여 죽을 때까지 자신을 변호해야 했다. 그러나 교황 요안네스 22(John XXII)는 그의 28개 명제를 정죄했다. 하지만 그의 신학은 교회에 많은 것을 주었을 뿐이지 불충하지 않았다고 평가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지성과 동일시된다. 또 하나님은 하나(Oneness)이므로 하나님의 속성은 통일에 있다. 그는 순수한 지성만이 순수한 통일의 자격을 가졌다고 본다. 그러므로 그는 요한복음 1:1절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지성의 활동의 동일화를 강조한다.

 

그는 또 영혼을 영적 실체로 인정하면서, “영혼 안에 있는 어떤 것으로서 창조되지 않을 뿐 아니라, 창조될 수 없는 것을 지성으로 본다. 피조물의 피조성이란 본래 무(, nulleitas)이다.”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고귀한 피조물인 영혼의 가장 높은 목표는 자아의 포기와 그것의 순수한 본질의 획득을 향한 영혼의 해방이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탄생이 영혼 안에서 이루어질 때 그리고 하나님과 영혼의 공통의 통일이라는 행복을 드러낼 때,” 사람은 모든 것들과 성례전과 심지어 하나님도 이제 포기될 수 있다.” 마이스터가 이렇게 하나님과의 은둔적 연합을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과 신성을 구분하기 때문이다. 마이스터가 사람의 고귀한 영혼을, “하나님을 초월하여 순수한 산성의 심연을 향해 가도록 초대한다는 말의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창조된 피조물은 그 사랑에 응답하고, “인간의 의지와 신적인 의지 사이의 완전한 동일성이 추구된다.

 

에크하르트는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길거리에서도 어디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단지 외적인 덕들을 향한 바리새주의와 영적 축복을 부추기는 사람들을 거부한다. 그러면서도 그 자신은 피조물을 사랑하는 봉사를 희생시키지 않는다.” 에크하르트는 명상적 삶과 활동적 삶의 균형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 본문

 

에크하르트는 사람들을 두 종류로 나누어 보았다.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내는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는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만 있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단연코 더 좋지 않다!”는 말로 대답했다. 그는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소유하면, 그리고 하나님만을 소유하면, 그때 아무 것도 그가 하나님을 생각하는 일에 훼방을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에크하르트는 그 이유로서, “그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찾지 않으며 완전한 헌신에 의해서 그와 함께 하나가 된 하나님 외에 아무 것도 기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에크하르트는 이것을 두고 하나 안에서는 모든 분리된 것들이 통일성에로 모이며 거기서는 차이가 생기지 않는다고 말한다.교회 안에서 또는 은밀한 곳어디에서나 하나님을 생각하면, “군중과 낯선 세계의 소란 중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에크하르트는 사람은 하나님의 현존을 자신의 안에서 의식 또는 소유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아 이리저리 밖으로 돌아다니거나, “어떤 활동과 사람 또는 장소와 같은 특정한 방법들에 의해서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얻을 수 없었다.” 하나님은 오직 그만을 찾고 생각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발견되고 소유된다. 이렇게 하나님을 진정으로 소유하는 것은 마음에 달려 있으며.” 하나님을 향해 돌아감에 있는 것이지, “어떤 주어진 방법에 의한 꾸준한 명상에 달려있지 않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런 생각이나 피조물을 초월하여 계신 하나님의 실재이다. 이 하나님은 그와 일치된 사람이 돌아서지 않는다면, 스스로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무엇보다도 그것을 더욱 사랑하는 그는 언제 어디서나 그것을 그의 안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신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은 세상과 사물에서 떠나 고독하게 된다고 해서 배워지지 않는다. 차라리 사람은, 어디에 있든지 누구와 함께 있든지 내적 고독을 배워야 한다.” 에크하르트는 내적 고독을 배우면, 언제 어디서나 그의 안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교회 안에서 홀로 고독하게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에크하르트는 사람의 정신 안에 하나님을 굳게 고정시키기 위해서는 사물들을 뚫고 들어가서 거기서 하나님을 찾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한다. “그것은 쓰기를 배우는 것과 같다.” 쓰기를 배우기 위해서는 많은 연습을 필요로 한다. 처음에는 어렵고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열심히 하면, 마침내 글자를 배우게 되고 쓰는 기술을 얻게 된다. 쓰는 기술을 완전히 습득하고 나면, 그는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그 기술을 사용하여 일을 할 수 있다. 에크하르트는 일을 하기 위해서 기술을 사용하듯이 그처럼 사람도 그것을 연구할 필요도 없이 거룩한 영혼과 함께 빛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또 사람은 그 안에 있는 신적 현존으로 속속들이 배어들어가야 하며, “그 안에 계신 사랑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충만해져야하며, “그래서 그 현존을 그것을 연구함이 없이 발산해야 한다는 말로 이 글을 맺는다. 에크하르트의 말은 결국 내적 고독을 배우면, 글쓰기와 같이 일상생활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2. 베르나르 하나님을 사랑하는 세 가지 방법(아가서 설교20)

 

클레르보의 베르나르(Bernard of Clalrvo, 1090-1153)는 사랑의 신비주의자다.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그는 이 설교문에서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피조물인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들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요일 4:10)는 요한사도의 말을 인용한다. 그는 여기서 그보다 더 강한 사랑의 동기는 당신이 마신 잔”, 당신에 의해 착수된 우리 구원의 위대한 사역이라고 갈파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처음 사랑은 창조의 때에 주어진 것이고, 두 번째 사랑은 그를 모욕하는 사람들을 향해 죽음의 고난을 당하신 사랑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기를 바라는피조물은 창조주이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아무 것도 아닌 피조물로서 인생을 낭비했던 그는 이러한 깨달음조차 그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게 된다.

 

베르나르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로찾아오시기 위해 육체를 취하시며” “자기를 낮추셨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나를 기꺼이 구원하셨고, 그 방법을 아셨고, 그것을 수행할 힘을 가지셨던 그분을 신뢰한다.” 그리스도는 그의 피를 우리 구원의 값으로 쏟으시면서 용감하게 죽음을 겪으셨고 그것을 극복하신 분이시다. 베르나르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모범으로부터 그리스도,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그를 다정하게 사랑하기를, 현명하게 사랑하기를, 강한 사랑으로 사랑하기를 배우라는 그의 말 속에 나타난다. 베르나르는 이러한 그의 말을 강화하기 위해 사랑은 죽음만큼 강하고, 질투는 지옥만큼 강하다는 아가서 8:6절을 인용한다(이 발췌본 설교문 내용에서 보면, 이 구절이 설교의 주제가 된 것 같다). 그에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되어야 한다.

 

베르나르는 사도 베드로의 강한 사랑에서도 현명함과 지혜가 부족했던 적이 있었음을 예화로 든다. 그런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그의 주장은 주 그리스도를 향한 세 가지 사랑의 동시적인 조화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먼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그의 일에 방해가 되는 방법으로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베르나르는 육체적 사랑의 단계와 이성적 사랑의 단계를 지난 사랑의 세 번째 단계, 즉 힘을 다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위한 순교이다.

 

베르나르는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를 입으신 것은 육체의 방식이 아니고서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점차 그들을 순수하고 영적인 사랑으로 끌어당기시기 위해서였다고 본다. 베르나르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아무 것도 이롭게 하지 못한다”(6:64)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러한 그의 견해를 뒷받침한다. 그는 육체적인 사랑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합리적이 되고. “영적인 것이 될 때 완성된다, 사랑의 단계를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리스도를 소중히 여기는 모든 정서에는 신앙의 균형(ratio fidei)”교회의 순수한 교리로부터 벗어나지 않아야 함을 강조한다. 그에게는 이것이 바로 영혼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힘을 다한 사랑을 받으시는사랑의 최종 단계로서의 영적인 사랑이다.

결국 베르나르의 세 가지 사랑의 방법은 그의 명상 속에서 신명기 6:5의 모세의 말과 마태복음 22:37(병행 눅 10:27)의 그리스도의 말씀이 변용(變容)된 것으로 보인다.

 

 

3, 리샤르(Richard, c. 1123-1173) "명상에 이르는 길"

 

1) 서론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리샤르는 성 빅토르(St. Victor) 수도원에서 수도사 생활을 했으며, 나중에는 수도원장이 되었다(1162). 여기서 리샤르는 그 시대에 2의 아우구스티누스라고 불린 대수도원장 위그(Hugh, c. 1096-1141)에게서 인정받는제자가 되었다. 리샤르는 위그로부터 자기-검토와 자기-지식이라는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것은 영혼이 이성을 사용하여 자기 자신을 더 잘 알기 시작하며”, 또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반영된 신성의 영광을 점점 더 올바르게 인식하는 길이다. 다시 말하면, “명상적 경험을 위해 영혼이 어떻게 준비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성을 신중히 사용하는 영혼은 마치 섬광처럼 다가온 하나님 자신의 시간에, 순전히 댓가 없는 거룩한 명상으로 돌입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이스라엘과 결혼한 네 여자들과 그들에게서 태어난 아들들에 비유하여 우화(알레고리)적으로 설명된다.

 

라샤르는 야곱에 의해 하나님이 이해되며, 라헬에 의해 이성이 이해되며, 레아에 의해 감정이 이해된다고 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두 가지 힘, 곧 이성과 감정은 두 아내 라헬과 레아가 각각 상징하는 것이 된다. 라헬은 이스라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으면서도 아들을 낳지 못했다. 하나님의 선물들과 영혼의 준비는 먼저 세 여자들에게서 태어난 형들이 담당하는 상징들로 나타난다. 마침내 라헬에게서 이성의 신중함을 나타내는 요셉이 태어나고, 영의 마지막 열매인 명상의 상징으로서 막내 베냐민이 태어난다. 그래서 리샤르는 사람의 영혼은 이성으로 아는 것의 빛과, 감정으로 사랑하는 것의 달콤함으로 하나님과 결혼한다고 말했다. 남편 야곱을 하나님으로 상징하는 경우라면, 인간은 아내로 상징될 수밖에 없다. 또 라헬과 레아에게 여종들이 있듯이, 이성과 감정에도 상상과 감각이라는 종들이 있다. 이성적 라헬의 종 빌하에게는 상상이 배속되고, 감정적 레아의 종 실바에게는 감각이 배속되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은총을 주듯이, 남편이 아내들에게 주는 은총으로 그들은 각각 자녀들을 낳는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17가지 은총에서 4가지는 아내들에게 주어졌다. 라샤르는 13가지 은총을 야곱이 네 여자들에게서 낳은 13명의 자녀들(12명의 아들들, 1명의 딸)에게 각각 덕의 비유로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라샤르는 라헬(이성)과 레아(감정)가 서로 대립하고 있으며, 그들의 여종 빌하(상상)와 실바(감각)는 각자 주인의 편에 예속되어 있음을 말한다.

 

2) 본문

 

라샤르는 다음과 같이 출생 순서대로 각 자녀들에 얽힌 덕의 상징과 명상의 발전단계를 연결하여 설명한다(아들들 이름 앞에 붙여진 숫자는 출생순서를 나타낸다).

 

2.1. 레아(감정)에게서 먼저 태어난 아들들

레아는 처음에 아들 4명을 낳고, 여종들이 아이를 낳는 동안에는 쉬고 있다가 아들 2명과 딸 1명을 더 낳아서 모두 7명의 자녀들을 직접 낳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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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르우벤: 고통의 두려움- 인간의 영혼 안에 마땅히 정해져 있는 감정들, 혹은 느낌 들. 이것은 사람의 감정 안에 처음 느껴지는 덕이다. 사람의 영혼은 옛날의 죄와 심판자의 권능에 대한 고찰에서 두려운 감정으로 하나님을 보기 시작 하며, 보상으로서의 연민에 의해 하나님께 보이기 시작한다.

2. 시므온: 죄의 슬픔- 두려움 뒤에 슬픔이 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애통하는 자 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5:5)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 님에게 들려지기 때문이다.

3. 레 위: 용서의 희망- 사람의 마음이 두려움으로 회개하고 슬픔으로 상한 다음에는, 용서와 희망이 더해진다. 레아가 레위를 낳고 한 말처럼, 우리 영혼은 진 정한 배우자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불타는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완전한 영혼은 감정에서 사랑의 불로 점화되고 이성 에서 지식(knowing)의 빛으로 조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4. 유 다: 의의 사랑- 유다는 감정(레아)이 여호와를 찬송하게 만드는 사랑이다. 또 유 다(사랑)는 라헬(이성)에게 자녀 잉태하기를 욕망하게 만든다.

 

2.2. 라헬(이성)의 종 빌하(상상)가 낳은 아들들

아직 수태하지 못한 라헬은 남편에게 여종 빌하를 주어 자식들을 낳게 한다. 왜냐하면, 유다(사랑)가 이성(라헬)에게 자녀 잉태하기를 욕망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영혼에서 이성이 상상의 시끄러운 말다툼을 삼가고 상상을 하나님께 복종시켜서 그녀의 앞에서 열매를 맺도록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성의 종인 상상이 낳은 것이다.

 

5. : 오는 고통에 대한 한숨- 오는 고통을 보면서 죄의 악한 제안들을 물리치는 것이 단에게 주어졌다. 그것은 불법적인 생각을 저주하고 심판하는 파멸이 다. 그래서 라헬은 아이를 못 낳는 억울함을 풀고, “나는 내 자매와 같아 졌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6. 납달리: 오는 기쁨에 대한 한숨- 납달리로 하여 라헬의 이성이 레아의 감정과 같 아졌을 때, 이성이 상상에서 오는 하늘의 기쁨의 가치와 희망과 사랑을 느 꼈을 때, 영혼은 거룩한 것들로 타오르게될 것이다.

 

2.3. 레아(감정)의 종 실바(감각, 느낌)에게서 태어난 아들들

라헬이 여종 빌하를 남편에게 주어 두 아들을 얻자, 레아도 그녀의 종 실바를 남편에게 주어 두 아들을 낳게 한다. 이는 감정은 감각의 욕망과 목마름을 삼가고 자신을 하나님께 복종시킴으로써, 느낌에서 어떤 열매를 얻는 것이다.” 그러나 레아는 빌하와 실바가 출산 경쟁을 하는 동안 아이를 갖지 못한다.

 

7. : 절제- 레아는 갓이 출생하자 복되도다고 외쳤다. “감각의 절제는 감정의 행 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한 것이다.

8. 아셀: 인내- 레아는 아셀이 태어났을 때, “기쁘도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고 하리로다고 외쳤다. 따라서 감각에서의 인내가 감정에서의 지복이라고 말 하는 것도 적절한 것이 된다.

 

2.4. 레아(감정)에게서 나중에 태어난 자녀들

 

9. 잇사갈: 내적 달콤함의 즐거움- 레아가 나중에 얻은 잇사갈은 절제와 인내 다음에 오는 보상이다. 그러므로 레아는 하나님이 내게 값을 주셨다고 말했다. 내적 달콤함의 즐거움을 느끼는 영혼은, “가까이에 있는 죽음을 버리고, 완전히는 아 니지만 가까이에 있는 죽지 않음을 얻는다.”

10. 스불론: 죄의 증오- 사람의 영혼이 육체의 타락 때문에, 언제나 신령한 기쁨의 느낌에서 지속할 수 없다면, 죄가 그 타락의 원인이다시편 기자는 내가 그들을 심히 미워하니 그들은 나의 원수들이니이다”(139:22)고 말했다. * 디나(): 정해진 수치- 디나는 정해진 수치다. 그러나 아무리 증오해도 죄 없이 살아 갈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더러운 몸보다 더러운 마음을 덜 부끄러워한다면, 그 러한 감정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아직 정해진 수치가 없다. “그들은 하나님 앞 에 계수되지 않는다.”

 

2.5. 라헬(이성)이 낳은 아들들

라헬은 앞의 세 여자들이 아들들과 딸을 다 낳고 출산을 그친 뒤에야 그 자신의 아들 요셉을 낳고,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베냐민을 낳다가 산고로 갑자기 죽고 만다..

 

11. 요 셉: 신중- 인간들은 잦은 실수에 의해 선과 덕에 실패한다. 이것이 신중을 상징하는 요셉이 늦게 태어난 이유이다. 하나님의 은총이 이성에 비추일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과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앎- , 그 후 이생에 주 어지는- 에 이른다.”

12. 베냐민: 명상- 형 요셉이 신중을 나타낸다면, 동생 베냐민은 명상을 나타낸 다.베냐민을 낳은 라헬의 죽음은 그녀의 지연된 욕망의 실현을 의미한다. 남 편 야곱(하나님)의 은총을 얻고자 한 라헬의 풍성한 욕망은 영혼을 신성의 빛 으로 타오르게 하고, “그때 분명히 모든 인간의 이성은 죽는다.”

 

3) 결론

 

신비주의자 리샤르가 그의 명상의 단계적 방법에 비유하여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의 구성원들에게 붙인 설명에는 쉽게 공감할 수 없는 면이 있다. 그의 비유를 보면, 성경에 진술된 기록들과의 체계적 연결성이 부족하고, 따라서 동떨어진 느낌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의 한계라고 본다.

그러나 리샤르가 베냐민(하나님을 봄)이라 불리는 아이를 낳는 길, 즉 명상에 이르는 실천적 방법으로서, “당신의 생각과 욕망들을 함께 불러 모으고 그들 가운데서 교회를 이루고 그 가운데에 오직 이 선한 말 예수를 사랑하는 것을 배워서, 당신의 모든 욕망들과 생각들이 예수를 사랑하는 것에만 맞춰지도록 하고 끊임없이 여기에 있도록 하라는 주장에는, 명상의 실천과 관계없이, 기독교인의 실천적 덕목이라는 점에서는 공감할 수 있겠다.

(숭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