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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C 문화변혁과 개혁신앙] 읽기

heojohn 2020. 4. 5. 13:00

1. 서론

 

기독교문화는 인간사회의 세속문화와 상충하면서도 동시에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다. 이러한 모순적인 긴장관계는 세속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역할에 대해 서로 상반되면서도 다양한 입장이 나오게 하는 원인이다. 기독교문화와 세속문화의 상충관계에 초점을 맞추면 기독교가 인간사회를 대적해야 하는 극단적 이분법으로 가기 십상이다. 또 그리스도의 복음에 기반한 기독교문화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기독교 문화를 세속문화를 구성하는 하나의 하위문화로만 본다면, 기독교문화에다 다양한 타문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다원론으로 빠지기 쉽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21c 문화변역과 개혁신앙은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설정에 대한 복음주의 신학의 정통노선을 따르고 있는 저작이라고 하겠다. 저자는 기독교 영성의 네 가지 유형을 들어 극단적 이분법에 해당하는 은둔주의를 배격하고, 동시에 방만한 다원론에 속하는 범신론”, 그리고 기독 문화의 특수성을 소멸시키는 세속주의를 반대한다. 그리고 기독교 문화가 세상문화 속에서 자리 잡고 세상문화를 바꾸어 나가는 변혁주의를 지지한다. 그리고 그 동안 문화선교학에서 논의된 토착화개념이 아닌 칼빈의 개혁주의적 영성에 기반한 새로운 문화 변혁이론을 개진하면서, 소위 변혁주의의 기독학문적인 타당성을 입증한다. 이러한 논의는 책 전체에 걸쳐 관통하는 저자의 기독교 세계관적인 입장에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세속문화에 대한 기독문화의 변혁적 접근을 구체화하면서, 저자는 첨단 문화, 문명론, 이슬람과의 비교종교학적 분석, 미국정치, 윤리학, 조직신학, 철학의 인간론, () 사상, 사회학 등 자칫하면 서로 이질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는 여러 가지 카테고리를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비판하고 풀어서 훌륭한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낸다. 이 카테고리는 사실 기독문화가 세속문화에 대하여 변혁적인 영향을 끼쳐야만 하는 분야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카테고리에서 개진되는 논의의 흐름을 살펴보면, 저자는 기독교 문화의 특수성에 큰 비중을 두면서 기독교가 사회적 선()의 수호자로서 기능해야 하고, 일반 문화 혹은 타 종교문화는 계도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기독교를 위협하는 존재라고 믿는 보수적인 신학자들의 견해 쪽으로 조금 더 기울어져 있다는 인상도 받는다. 이를테면 이슬람과 기독교의 대립적 관계에 대한 해법을 풀어놓은 3-4장이나, 현대사회 속에서 매몰되어 가는 교회의 정체성을 다룬 13장이 그 예이다.

 

그렇지만 기독교와 이슬람교라는 서구 기독교의 과제에 가까운 주제를 큰 비중으로 다룬 반면, 한국 기독교 문화를 겨냥한 주제들은 찾기 어렵다는 것이 아쉬운 점이라고 하겠다. 다시 말해서 한국기독교가 한국적인 문화 현실에서 당면한 과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비중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성령론으로 동양의 기 사상으로부터 영향 받은 뉴에이지 운동을 비판하는 부분도 현대 서구 기독교의 관심사에 해당하며 한국 기독교 주류 문화가 크게 공명할 주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타문화적 흐름들이 한국에 상륙하여 초기 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저자의 연구와 비판은 시의적절한 것으로 긍정할 수 있으며, 오히려 선각자적인 활동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서 저자의 선구자적인 안목은 이 책의 군데군데에서 사회와 교회의 일치를 추구했던 16세기 개혁교회의 이상과 거리가 먼 한국교회의 현실에 대한 비판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분파적 대립, 교단내의 자리다툼, 신학적 갈등과 이단논쟁, 그리고 일반 교인들은 개인적 행복 추구(영적이든 물질적이든)에 매몰된 것 같은 한국 기독교사회에서, 누구나 말하기를 꺼려하는 부분을 소신 있게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교인들이 교회 밖의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사회봉사를 하는 것이 기독교의 필수적인 요소이고, 신학적으로도 충분한 근거가 있다는 주장 등이 바로 저자 자신의 소신의 범주에 속한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각 장별로 따라가면서 간략히 살펴본다.

 

2. Chapter 1. 21세기 첨단문명과 개혁신앙

 

이 장에서 이야기하는 첨단문명은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사이버문화와 생명과학을 가리킨다. 저자는 인터넷과 생명과학이 가져다준 문화적 혜택보다는 그것들이 노정한 부정적인 변화 및 위협을 다룬다. 그리고 기독교가 이 가운데 선()기능을 해야 할 당위성 및 방법을 제시한다.

 

저자는 사이버 문화의 위협요소로서, 소유욕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는 접속에 대한 과도한 욕망, 그리고 인간을 매몰시키는 검증되지 않은 과잉 정보를 든다. 이러한 논의는 사이버 문화의 탄생 초기에 구미에서 일종의 붐을 이루며 출간되던 비판적인 저서들의 주장과 맥을 같이한다. 이런 종류의 불안감은 사이버 문화가 인간생활의 한 영역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현대에는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기독교 역시 사이버 문화를 적극 수용하여 인터넷 상에서 교회를 홍보하고 선교활동의 네트워크로 사용하거나 예배를 중계하기도 한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긍정적인 효과를 인정하면서도, 가상공간의 종교 활동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을 드러낸다. 가상 종교에서는 만지고 맛보고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이나 모임이 없으며, “개인적인 변화와 헌신이 일어나지 않는다. 종교 체험이란 역사적인 시공간이라는 구체적인 장소에서 일어나야 하는데, 웹 공간은 그것을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어서 생명과학에 대해서는 유전자 조작 및 생명복제가 가져오는 생명 가치의 훼손에 대하여 우려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권을 가진 생명의 생성에 인간이 개입하는 것은 죄라는 전제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견해를 일방적으로 대변하는 감이 있다. 유전자공학이 가져온 혁명적인 성과, 이를테면 식량 생산량의 증대 및 불임시술 역시 같은 전제에 근거하여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일 수 있음에도 이미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생명관에 근거하여 낙태와 안락사를 반대하는 입장도 개진된다. 낙태와 안락사 에 대한 찬반양론은 개인의 자유와 생명 존중의 두 가지 논리가 상충하면서 의료계와 종교계에서 뜨거운 감자가 된지 오래이다. 보수기독교에서는 개인의 자유보다 생명 존중의 입장에 서서 낙태와 안락사를 반대하고 있고 저자의 견해도 그러하나, 개인의 자유를 지지하는 주장도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성폭행으로 인한 임신의 경우라든지, 병의 치료 때문에 가족들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병자 역시 고통을 끝내고 더 이상 가족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경우 등 개인의 자유를 지지하는 입장 역시 공감이 가는 여러 가지 케이스를 가지고 있다.

 

이상의 견해들을 살펴볼 때, 저자가 바라보는 칼빈주의 개혁신앙의 노선은 여타 보수적 기독교 교단의 성향과 비슷하다. 칼빈이 당시의 대세이던 천주교로부터의 개혁을 추구하면서 급진적 진보의 노선으로 달려간 것과는 달리, 칼빈 이후의 개혁교단은 보수적인 대세를 따른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대세는 문화를 바꾸는 것보다는 기존에 있는 것들을 방어하는 쪽이었다. 특히 새로 등장하는 문화에 관해서는 방어적인 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분야이다.

 

3. Chapter 2. 문명의 충돌과 문명의 공존

 

저자는 레이건 이래 미국의 집권층을 이루었던 네오콘의 이념적 토대를 제공한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충돌 이론을 소개한다. 미국 정부는 문명충돌 이론에 따라 이슬람 세력에 대하여 강경한 노선을 취해왔으며 몇 번의 전쟁을 통해 그들이 믿고 있는 세계 질서를 위한 미국의 소명을 이루려고 시도해왔다. 그리고 결국은 명분 없는 이라크 침략전쟁과 억압정책으로 인기를 잃고 민주당에게 정권을 잃는 계기가 되었다.

 

저자는 헌팅턴에게 반대하며, 충돌하는 것은 문명이 아닌 종교, 그 중에서도 각 종교의 근본주의라고 주장한다. 문명을 낳는 것은 종교이며 종교적 신념에 따라 각 문명의 정치적 의사결정이 이루어진다는 시각이다. 그리고 9.11 테러를 일으킨 오사마 빈 라덴이 이슬람 근본주의 계파인 와하비즘의 절대적인 추종자이며 그의 행동이 종교적인 신념에 기반한 것임을 예로 든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결정론적인 시각이 문명충돌론과 유사한 또 다른 단순 이분법적 대립 논리를 낳는 것 같다. 그것은 종교와 정치의 미묘한 함수관계를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종교는 정치적 행위의 명분을 제공하는 수단으로서 집권층에 의해 사용되어 온 사례가 많이 있다. 미국이 기독교적 소명의식에 기반한 소위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론을 주장하면서 타국을 좌지우지하고 세계패권을 장악해온 것도, 네오콘이 보수기독교와 결탁하여 기독교 신앙을 외교정책의 근거로 끌어들인 것도, 모두 이러한 사례에 해당한다. 또한 서구의 역사는 각 시대의 집권층이 피지배층의 불만을 대외적으로 해소하고 정치적인 이득을 얻고자 이슬람 세력에 대한 적대감을 의도적으로 조장해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중세후기 십자군 전쟁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현대사회에 들어서는 발달된 매스컴을 사용하여 잘못된 정보와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흘리면서 정치적 어젠다를 좇아왔다.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잘못된 정보로 이라크를 침공을 정당화했던 것도 하나의 예이다

 

4. Chapter 3. 이슬람과 기독교, 교리적 차이

 

이슬람은 그들의 신 알라에 대하여 헌신, 굴복한다는 뜻이며, 이슬람교를 믿는 신자, 즉 무슬림은 알라의 노예에 불과하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사랑과 구원의 하나님이며, 기독교 신자들은 그의 아들 예수와 형제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이것은 이슬람과 기독교의 교리적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슬람은 아브라함의 두루마리, 모세의 율법, 다윗의 시편, 예수의 복음서, 그리고 코란 등 다섯 가지를 경전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은 코란만이 알라의 마지막 완성 계시로서의 권위를 지닌 원본 경전이라고 주장하며, 코란을 뺀 나머지들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원본이 변조되었다고 비판한다. 코란을 보면, ‘구약성서의 내용, 당시 아라비아 반도에서 유행하던 기독교 전설, 교리와 위경에서 나온 자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코란에는 유대교적 특징과 기독교 이단적인 요소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그럼에도 마호메트는 실로 알라는 한 분이시니 그분에게는 아들이 있을 수 없음이니라고 말한다.

 

이슬람은 예수를 단지 알라의 선지자’, ‘창조된 말씀내지 인간적으로 활동하는 알라의 창조된 영으로 격하시켜버리고 있다. 이슬람과 기독교와의 차이는 그 종교의 창시자인 마호메트(무함마드)와 예수의 차이이다.


5. Chapter 4.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의 공존

 

저자는 지하드나 반인권적인 관습을 근거로 이슬람이란 종교 자체를 폭력적이라고 규정한다. 저자는 기독교 근본주의적 프리즘을 사용하여 이슬람교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영을 보복과 파괴의 영그리고 기독교의 영을 용서와 화해의 영으로 정의함으로써 둘 사이의 완전한 대조를 부각시킨다.

 

그러나 기독교에도 과격한 근본주의와 온건한 합리주의 성향이 공존하듯 이슬람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서구의 통신사들을 통해 매스컴에 보도되는 내용은 이슬람의 가장 안 좋은 면만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어 전체적인 실체를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다. 이로 인해 조장된 왜곡된 이미지에 의존하여 이슬람을 정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코란에는 비이슬람교에 대한 살상을 명한 것이 있고, 이를 비판의 근거를 삼고 있지만, 기독교 종교개혁가들 역시 반대파들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을 허용하는 성전 (holy war)’을 합리화했었다. 기독교 역시 교리가 충돌할 경우 폭력을 통해 해결해왔던 오랜 역사가 있다. 기독교 역사도 마녀사냥과 십자군 전쟁, 개혁시대의 종교전쟁 등 기독교 정신과 동떨어진 행위로 점철되어 있어 타종교의 눈에는 우호적으로만 보일 상황은 아니다.

 

이슬람을 포용하고 기독교 정신으로서 사랑을 베풀며 종교간에 화합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상대에 대한 공정한 시각이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공정하지 않은 시각으로 상대를 어떤 틀 안에 낙인찍어 놓고 자신과의 차별성을 한껏 부각시킨 이후에는 그 상대와의 발전적인 대화가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이슬람교의 태생으로부터 그 역사를 조명하면서 이슬람교에 대한 이해를 도모한다. 초기 무슬림들이 기독교에 대해 가졌던 호감, 서구의 식민지로 지냈던 경험이 서구문명에 대한 증오를 증폭시켜 온 역사 등을 제시하며 이슬람교를 보다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서구우월주의를 내면화한 흔적이 간간히 엿보이기는 하지만 이슬람에 대한 열린 접근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가치가 있다.

 

또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이슬람교에 대한 무차별적 증오를 발산하는 원인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과 중도 복음주의적인 제안 대시도 담겨 있다. “이슬람 문명과의 공존을 위해서는 종교로서의 이슬람과 문화로서의 이슬람을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종교로서의 이슬람에 대해서는 기독교와의 차이를 명료히 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가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거하는데 타협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문화로서의 이슬람에 대해서는 상호이해와 관용과 협력을 다하면서 공존하기 위해 최대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대화를 위해서는 중도적이고 개방적인 이슬람과의 교류를 널리고 이들과의 관계를 넓혀나가야 할 것이다.” , 이슬람이란 종교와 문화에 대해 서로 다른 접근법을 취하여,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대해서는 비타협을, 타 종교와 관계에 대해서는 관용과 포용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6. Chapter 5. 기독교 관점에서 본 이라크 전쟁

 

이슬람과의 갈등을 다룬 이후에 저자는 이라크 전쟁을 들어 전쟁의 정당성에 관한 논의를 개진한다. 기독교윤리학의 주된 주제 중 하나인 정의로운 전쟁 (righteous war) 개념에 비추어 이라크 전쟁은 결코 정의로운 전쟁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와 그들이 주도한 이라크 전쟁에 대한 저자의 입장을 종합해보면 비판적 지지에 가까운 듯 보인다. 저자는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전쟁을 수행하며 갖고 있던 의도와 그 정책이 가져오는 역사적 의의에는 긍정적이다.

부시 행정부는 선과 악의 구분이 허물어지고 선이 악이 되고, 악이 선이 되어 버리 는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인류사회가 지켜온 전통적인 가치체계를 수호하고자 하였다. 부시 행정부는 사담 후세인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리하여 미국은 지구상에서 국민을 우롱하는 북한 같은 독재정권 체제와 지도자들에게 유연성과 변화의 경고를 주고 있다. 그렇지만 저자는 부시 행정부의 한계를 인정하고 패인을 인지하고 있다. 부시 행정부는 너무나 단순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역사를 빛과 어두움의 대결로 보며, 어두움은 미국 서부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모든 악을 자행한 한 사람으로 구현된다고 본다.

 

부시 행정부 신보수주의 정책의 실책은 하나님이 하실 일을 자기 국가의 군사력으로 밀어부치는 오만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정책의 실천과정이 너무나 독선적이었고, 일방주의로 밀고 나갔기 때문에 유럽연합을 위시한 국제정서와 마찰을 일으킨 것이다. 이러한 부시 행정부의 교훈은 냉전 시대의 영향에서 차마 벗어나지 못한 한국사회에서도 적용할 수 있다. 90년대 후반 공산권이 붕괴하면서 역사는 자본주의의 승리를 선언했지만 한국은 북한과의 대치상황이 유지되고 있다. 또한 과거 냉전시대에 통용되었던 극우적인 반공주의로 정치적인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아직 존재한다. 이러한 제반 조건은 한국 사회를 불관용과 흑백논리에 취약하게 만들고 대화와 이해에 인색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7. Chapter 6. 기독교 문화와 영성

 

기독교 문화는 영성의 표현 내지 형식이요, 영성은 기독교 문화의 원천 내지 실체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문화는 그 영성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 문화는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지며, 네 가지 영성이 지배한다. 그 첫째는 세속문화로부터 도피하는 도피적 영성이다. 둘째는 세속문화에 혼합하는 범신적 영성이다. 셋째는 세속문화에 영합하는 세속적 영성이 다. 넷째는 문화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변혁적 영성이다.

 

현대신학은 지나치게 중세의 스콜라주의에 빠져 영성의 보고인 신앙을 상실하고 있다. 신앙은 사변적 이론이 아니라, 삶이다. 개혁신앙은 영성의 보고를 찾아내야 한다. 그것은 네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기독교 영성의 개념이 올바로 정립되어야 한다. 초대교회의 기독교 영성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었다. 둘째, 중세의 수도원 정신을 변혁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셋째, 수도원 운동에 담겨진 영성의 보고를 발견해야 한다. 그것은 초대교회처럼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다. 넷째, 반기독교적인 새로운 시대적 사조를 이겨나가는 영성사상의 발전이 필요하다.

 

 

8. Chapter 7. 보편윤리와 기독교 문화

 

보편문화로서의 전지구촌 문화가 없듯 보편윤리라는 것도 없다. 다만 보편윤리는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상황 속에서 적용되고 그 가치를 실현하는 윤리이다. 그것은 나는 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다는 칸트의 범주적 명령이 아니라, “나는 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할 수 없다는 명제를 따른다. 그러므로 보편윤리는 마음은 선을 행하고자 하나몸이 따르지 않는다는 바울의 고백처럼 기독교적 인간의 한계를 지닌 윤리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보편적 윤리의 문제는 이상적 가능성의 당위와 현실적 불가능성에 빠져 있는 존재와의 불일치이다. 그러나 기독교 윤리는 불가능적 가능성에 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새롭게 태어나게 됨으로써 가능한 윤리이다. 보편윤리가 자연윤리라고 한다면, 기독교 윤리는 은총의 윤리이다. 기독교는 보편윤리의 불가능성을 이렇게 가능성의 기독교 윤리로 전환한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사회의 왜곡된 부분을 먼저 인지하고 선도적으로 교정해나가는 개혁적인 역할을 해야한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주제가 비기독교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보편윤리의 경직성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독교 윤리 역시 이러한 사회 전반적인 병리에 빛과 소금 역할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으며, 때로는 더욱 조장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점에 대해서는 기독교 윤리가 먼저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고 내부에서의 개혁을 이룬 다음에 사회의 보편적 윤리로 그 개혁의 불을 들고 나갈 수 있을 것으로 본다.

 

 

9. Chapter 8. 예수문화와 개혁신앙

 

기독교인으로서 세상문화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문화를 바꾸어 나가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이곳에서도 다시 한 번 강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러한 소명은 비단 전문사역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가 각자의 영역에서 이루어가야 하는 것임을 분명히 지적하고 잇다.

 

한국의 학교에는 10만의 기독 교사들이 있다고 한다. 이들은 전체 교사 40만 명의 25%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그런데도 이들이 학교와 교실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오늘날 우리의 학원은 소수 교사들의 폭력과 촌지 수수 등 사학의 비리가 한데 묶여 교사들이 학부모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문화와 기독교의 관계 설정에 대한 고민도 드러나는데, 세속 문화가 하나님의 일반 은총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버렸다. 그러므로 세속문화로부터 도피하거나 세속문화를 무시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으며, 세속문화를 기독교적인 방향으로 개혁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또한 복음 전도 역시 문화적인 측면에서 고려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저자는 세속문화에 대한 대안적 문화 패러다임으로 예수 문화를 제시한다. 예수 문화는 전통문화를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으로 재해석하고 기독화한다. 예수 문화는 대중문화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 양식으로 이해하고 복음으로 구속한다. 예수 문화는 첨단기술 문화를 바람직하게 이용하여 기독교 활동에 반영한다. 예수 문화는 세속문화에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문화전략을 개발하고 전문적인 기독교 문화 사역자를 양성한다. 예수 문화는 교육일선에 있는 교사와 교수들이 예수문화의 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함을 인지한다. 예수 문화는 이웃과 사회의 필요를 돌보고, 그들을 섬기는 공동체 문화이다. 예수 문화는 사회 속에서 기독교를 접할 수 있는 공간을 확대하고, 관련 프로그램을 활발히 펼친다. 마지막으로, 예수 문화는 환경문제와 세계평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지원한다.

 

이러한 예수 문화의 패러다임에 비추어볼 때, 예수 문화의 이상과 한국교회의 현실 사이에 놓여 있는 거리감이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한국의 신자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기독교와 그 외의 모든 문화를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선과 악의 흑백논리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한 듯하다. 또한 청소년들에게 세속문화만큼 매력적인 아이템들을 내놓지 못하고, 도리어 기독교 지도자들이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서 기독교 전체를 지탄받게 하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마지막으로, 환경문제와 세계평화에 관해서는 진보적인 비기독교 단체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있으며, 심지어 그들의 진보적 성향을 경계하며 이념적으로 매도하는 경향마저도 보인다.

 

이 책에서 제시되는 예수문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서의 삶을 모방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당시 유대인 사회문화를 비판하면서 어떻게 사셨는지를 비교해서 살펴보는 것도 가치 있을 것이다. 그분이 당시의 사회통념을 깨뜨리고, 그 당시 사람들로부터 지탄받을 만한 급진적인 언행을 보이셨던 배후에는 억압과 고통을 받고 있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관용이 있었다. 예수문화의 기저에는 이러한 사랑과 관용이 비기독교인들에게 실제로 전달되는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변증은 개혁신앙으로 사는 기독 지성이의 시대적 과제이다.

 

10. Chapter 9. 교회의 사회봉사의 신학적 근거

 

이 장에서 저자는 교회가 사회봉사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복음주의와 진보주의가 기독교의 사회봉사에 대하여 서로 상반되는 입장을 취해왔지만, 1970년대 로잔(Lausanne) 총회에서 복음주의 신학 진영이 복음 선포와 사회봉사 두 가지 모두를 교회의 과제로 인정함으로써 두 진영 사이의 간극은 상당부분 줄어들었다. 이장에서 저자는 사회봉사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로드맵보다는 교회의 사회봉사를 이해하는 신학적 관점을 제공하는데 주력한다.

 

저자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적 근거에 따라 교회의 사회봉사의 의무를 증거한다. 성부가 인간과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아들을 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는 세계를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으로 섬기고자 사회봉사에 참여한다. 이때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을 잊어서는 안 되며, 어느 종교, 계층, 인종에 상관없는 봉사여야 한다. 또한 교회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종으로서 섬김의 모범을 보이셨고, 전인격적인 구속을 위하여 사역하였으며, 타인을 위한 삶을 사신 것을 모방한다. 따라서 교회도 섬김의 공동체로서 타인의 필요를 채우고 봉사한다. 그리고 성령이 인간을 감화시키고, 교제와 사귐을 조성하듯, 교회의 사회참여의 성격도 위에서 내려주는 시혜적인 것이 아니라, 형제 또는 친구로서 돕는 것이어야 한다. 더군다나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회에 대해서는 이와 같은 관계적 접근방법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렇게 성령을 모방하는 사회봉사는 결국 앞으로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선취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교회의 사회봉사는 사회사업과는 다르다. 교회의 사회봉사는 일종의 선교이며, 물질적 차원을 넘어서 영혼의 구원을 염두에 두는 활동이다. 또한 교회의 사회봉사는 단발적인 프로그램이나 이벤트가 아니다. 교회는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부조리에 관심을 기울이고, 국가의 정책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교회의 사회봉사는 교회의 본질적인 기능이며, 따라서 교회의 표식이기도 하다. 단지 예배와 제사를 실제로 드리는 행위만이 아니라, 사회봉사 자체가 교회가 드리는 예배요, 제사가 되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이상의 사회봉사를 실천에 옮기는 소규모 기독교 공동체들이 있는 반면, 한국 교계를 이끄는 대형교회는 사회봉사보다는 보수 성향의 종교 활동을 하는 경향이 강하다.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부조리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체계를 옹호하고 신도들이 사회나 국가정책에 불만을 갖지 않고 인내하고 관용하는 것을 미덕으로 설교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기독교계가 한국사회의 가장 보수적인 집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이제는 한국 교계에서 교회와 사회의 관계, 그리고 사회에 속하였지만, 사회 내에 속하지 않는 교회의 역할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할 때이다.

 

11. Chapter 10. , 죽음, 생명과 개혁신앙

 

이 장은 다소 철학적인 접근으로 기독교적 관점의 육체, 죽음, 그리고 영혼과 생명을 논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기독교는 영과 육을 하나의 통합체로 보며, 구약과 신약에서 이러한 관점이 일관성 있게 유지되었으며, 이러한 관점은 영을 육보다 우월시하고 육을 적대시하는 헬라의 이분법적 이해와 분명히 차별된다고 한다. 저자는 초기 기독교에서 육을 경시한 경향은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유대-기독교 본래의 관점과는 거리가 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가 육과 영을 구분하는 헬라 철학과는 본래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은 좀 더 엄밀하게 검증되어야 한다. 기독교가 탄생하던 시점에 이미 유대지역은 헬라화가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고, 기독교 신학의 주춧돌을 놓은 바울 역시 헬라 문화와 학문 속에서 자랐던 사람이다. 구약성경은 유대적인 영/육 통합체의 관점에서 쓰였으나, 유대민족이 헬라 문화권에 들어간 한참 이후 탄생한 신약성경에서는 육의 저속함, 영의 숭고함을 논하는 부분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플라톤적 경향은 특히 바울 서신에서 두드러진다. 두 성서가 그 저작 시기의 당시에 문화적 흐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 장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논지가 무엇인지가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저자의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구절들을 찾아서 이를 통하여 추론해 보면, 다음과 같은 주장이 성립한다.

 

첫째, 영과 육에 대한 기독교의 본래적인 관점이 현대 문화에서 경시되고 있다. “근대의 견해는 인간 생명의 거처를 뇌의 활동에 있다고 봄으로써 정신우위의 생명관을 대변한다. 그리하여 성경적인 견해에서 이탈하였다. 사람의 삶의 행위를 사유와 의욕으로 제한하고, 그것이 영혼이나 뇌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구약성경에 있어서는 낯선 것이다. 영혼의 우위란 것은 없다.” 말하자면 영과 육은 구분되나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영과 육은 일체이다.

둘째, 세속문화의 죽음에 대한 개념과 달리 기독교는 육체의 죽음이 끝이 아니며, 영생과 이어지는 부활을 바라본다. “기독교는 그리하여 영의 실재나 실체성을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견해를 거부하며, 몸의 실재와 의미성을 거부하는 신령주의나 신비주의를 거부한다. 몸의 부활과 구원 가운데 있는 영원한 삶의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현대 인간의 소망이다.”

 

12. Chapter 11. ()와 성령

 

이 장에서는 동양의 기 철학과 기독교의 성령 개념을 비교, 대조한다. 저자는 기() 사상이 말하는 기를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령과 상관시켜서 설명 해석하고자 한다. 동양의 기()는 물질을 이루는 기본 입자와 그들의 작용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나아가서 모든 사물에 내재하는 힘이다. 노자의 사상에서는 기는 태초의 근본이며, 이를 도()라고 한다. 성리학적 관점에서는 기의 작동원리를 이()라고 한다. 기는 모든 사물에 내재하며 또한 생명체가 사망하면, 다시 땅의 만물로 돌아가 환원되어 버린다. 만물은 기의 이합집산에 따라 이루어진다. 따라서 기철학은 범신론적 입장을 갖고 있다.

 

한편, 기독교의 성령은 기와 유사하게 모든 사물에 내재하면서도, 기와 달리 동시에 초월한다. 그리고 단순한 힘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으로서 세상만물을 창조하고 관리하며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하나님의 영이다. 또한 만물의 근원은 도가 아닌 하나님 자신이다. 동양 기철학의 이()에 대응하는 것은, 요한복음의 말씀, 즉 로고스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는 기사상과 달리 범신론이 아닌 일원론적 유일신론을 신봉한다. 인간은 영혼을 갖고 있어 인간육체의 사망 후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저자는 서구세계에서 동양의 사상과 종교에 관심을 보이는 현상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David Bohm)은 현대물리학과 동양 기사상의 유사성을 논하면서 만물의 원천인 기를 양자물리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봄은 현대서구사회의 문제점인 개인적 삶의 분열과 원자화에 대하여 동양 종교의 자아의 합일 개념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비단 봄 뿐 아니라 동양 사상에 대한 관심은 서구에서 꽤 보편적이어서, 뉴에이지 운동 역시 동양 철학에 기반한 종교운동이다. 뉴에이지 운동은 범신론 사상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곧 세계요 우주,” “모든 것은 영이요 의식이라는 의식일원론을 주장한다. “인간은 잠재된 신 의식을 일깨워 우주적 영과 합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본다.” 뉴에이지 운동도 기사상이 주장하는 기 일원론과 유사하면서, 적극적인 수도활동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보다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다.

그리고 뉴에이지 운동은 하나님과 그분의 구속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력구원을 신봉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와 대립점에 서 있다. 저자는 기독교인으로서 이러한 철학과 사상들이 사회에 퍼지면서 하나님에 대한 필요성을 제거하는 현상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있다.

 

13. Chapter 12. 인문학의 위기와 기독교

 

저자는 기계화와 정보화로 인하여 실용과 효율이란 가치가 최고가 된 현대사회에서 위기를 맞은 인문학에 대하여 논한다. 교육계에서 인문학을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상황, 그리고 인문학자들 스스로 현실에 안주해버리는 상황을 질책한다.

인문학은 다른 학문과 다른 중차대한 의의가 있는 분야이다. 그것은 인문학이 인간의 궁극적 질문인 의미와 목적에 대한 것들을 다룬다는 점이다. 이러한 성격상 인문학은 곧 종교적인 질문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 인문학은 종교라는 이슈를 배제하고 논의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인 논의는 유신론과 무신론의 양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 스피노자(Spinoza)나 니체(Nietsche) 같은 무신론자 철학자들은 범신론이나 자연주의로 귀결하여 허무주의로 떨어진다. 반면, 파스칼(Pascal)이나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유신론적 인문학의 입장에서 기독교 실존주의를 주장한다. 인간의 무지와 비참함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실존을 발견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역사를 돌이켜 보건데, 기독교와 인문학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영향을 주고받았다. 저자는 기독교야말로 진정한 인문주의라고 단언한다. 종교개혁 지도자들이 공유했던 인문학의 바탕이 그 예이다. 칼빈이 수용한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에 대한 관심과 탐구정신을 수용하였다.

둘째, 희랍과 로마의 고전을 수용하고 탐구하였다.

셋째, 타당성과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 권위나 무모한 사변을 거부하고 고전이라는 텍스트를 존중하였다.

넷째, 권위에 맹종하지 않고 독립적이며 실제적이며, 합리적인 정신태도를 가지고자 하였다.

 

이렇듯 저자는 인문학과 개신교의 불가분한 관계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인문학의 위기 시대에 기독교 인문학이 해야 할 역할이 있음을 주장한다. 신을 잃어버린 무신론적 인문학이 허무주의나 회의주의로 빠지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근본이요, 진리와 가치의 기준임을 제시하는 기독교적 인문학이 대안으로 자리매김해야 함을 역설한다.

 

14. Chapter 13. 현대사회와 교회의 정체성

 

이 장에서 저자는 현대사회 속의 교회의 정체성의 위기를 말하고 있다. 그 증거로 저자는 다음과 같은 현실을 든다. 세속 대중문화 속에서 사람들의 감각이 마비되고 예배에 대한 존중이 없다. 전통 종교는 쇠퇴하여 자유주의 신학과 연결된 비정통주의, 상대주의, 도덕폐기주의, 보편주의 그리고 혼합주의로 나아가는 신흥교회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은사가 조작되고 잘못된 영을 성령으로 착각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인격성을 부정한다.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를 통해서도 종교적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역사의 목적을 부정하고 성경의 권위에 도전한다. 뉴에이지 운동은 인간의 힘으로 신에 이르는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사이비 종말론이 대중을 미혹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다.

 

이러한 제반 증상을 볼 때 기독교의 권위가 흔들리는 현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와 비슷한 증상은 비단 현대사회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의 탄생 초기부터, 윤리적 타락과 잘못된 신학과의 싸움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고, 지금의 기독교 정체성이란 것 역시 그러한 싸움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다. 기독교가 정립된 이후로, 모든 세대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자기 세대의 세태를 개탄하며 교회의 위기를 부르짖어왔던 것이다.

 

또한 기독교 정체성을 위협한다고 지목되는 각종 현상들은 기독교에서 선한 방향으로 수용하여 변증법적인 발전을 이룰만한 재료가 되기도 한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를 종교 개혁가들이 받아들여 천주교의 모순점을 딛고 개신교를 탄생시켰듯이, 지금의 기독교가 경계하는 현상들 역시 그러한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를테면 포스트모더니즘의 텍스트 접근 방법은 성경을 새로운 각도로 보게 함으로써. 그 동안 묻혀 있었거나 경시했던 가르침을 새롭게 발견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도전들에 열려 있거나 닫혀있는 것은 결국 기독교인 개개인의 보수적 또는 진보적인 성향의 문제이다. 이러한 도전들에 대한 반응을 놓고, 참된 기독교의 수호자와 기독교를 흔드는 잘못된 신자의 이분법적 구도로 파악하는 일이 상당히 많다. 보수적 성향이 강한 한국 개신교에서는 입장이 다른 사람들을 이단으로 낙인찍고 공격하는 경우가 가끔 일어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교회의 핵심적인 믿음과 정체성을 수호하기 위해 교회는 최선을 다하여야 하고, 또한 동시에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여 스스로 변화시키는 작업에도 열려 있어야 한다. 현재의 기독교 역시 2천년의 역사 속에 그러한 과정을 겪으며 만들어진 것이고, 처음부터 지금의 모습대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음을 주지해야 한다. 물론, 체계의 변화에는 혼란이 따르고 파괴와 신축이 따르므로 변화를 두려워하고 주저할 수 있지만, 적어도 변화의 필요성에 대한 열린 마인드는 필요하다.

 

15. 결 론

 

이 책은 21세기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으로서 새롭고 다양한 현대 문화의 출현을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제시합니다. 또한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영적인 이야기만 나누고 개인의 행복과 영성, 그리고 교회의 발전에만 관심을 가질 수는 없다는 메시지를 강렬하게 전달한다. 그리고 기독교가 세속문화에 영향을 끼치고 세속문화의 발전적인 변혁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점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가장 중요한 가치는 타종교를 포함한 타문화를 바라보는 관점의 융통성을 주문했다는 것에 있다. 문화변혁이라는 행동으로 옮아가기 전에 우선 기독교인의 관점이 바뀌어야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에서, 관점을 바꾸는 시도는 그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구한 빛과 소금의 역할이 결국 세속적 문화 속에 뛰어들어 그 일부이면서 그와는 다른 존재로서 선한 영향력을 미치라는 뜻이기 때문에, 이 책이 드러낸 입장이야말로 개혁주의 기독교의 정통인 문화 변혁주의에 해당할 것이다. 저자가 제시한 변혁주의는 모든 개신교인들에게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는 종교개혁의 원리를 다시 한 번 깨우쳐주고 있다.

(숭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