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 연구 페이퍼

카를 마르크스의 생애

heojohn 2020. 4. 4. 18:30

 카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1848년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공동으로 발표한 [공산당 선언]1867년 초판이 출간된 [자본론]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독일 출신의 혁명가, 철학자이며,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이다. 마르크스는 초기 사상에서부터 비판적인 철학(critical philosophy)의 경향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헤겔의 유령이 지배하는 당시 독일철학의 현실을 유물론적 변증법을 통해 본격적으로 비판했다. 말하자면 뒤집어엎은 것이다. 소련의 10월 혁명을 주도한 블라디미르 레닌은 마르크스를 이론적 기반으로 삼았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지금까지도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1. 마르크스의 철학

 

1.1 포이어바흐의 영향

 

1831년 헤겔이 콜레라로 급서한 이후, 헤겔학파는 좌우로 나누어졌다. 좌파 그룹은 혁명적인 정신의 젊은이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며 청년학파라고도 불려졌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1804-1872)가 이끄는 이 집단에 카를 마르크스가 가담하고 있었다. 좌파의 선두주자 포이어바흐는 1836년에 [그리스도교의 본질]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때는 마르크스가 베를린 대학생이었던 시기인데, 이 책은 당시 진보적인 독일 청년들에게 거의 성서와 같은 권위로 읽혀졌다고 한다. 이 책에서 포이어바흐는 인간, 그는 먹는 것이다는 그의 유명한 명제를 제시했다. 이로써 관념철학은 종언을 고하고, 현실적인 유물론이 등장했다. 이제는 사람이 먹는 것, 즉 물질적인 것이 세계와 사람의 관계, 즉 삶을 규정하는 것이 된다. 관념이란 단지 그 뒤에 따라오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헤겔의 변증법을 통해 세계의 역사와 정치적 갈등을 해석하는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적 철학의 토대였다.

 

이 책은 본래 종교에 대한 일종의 인류학적 분석을 다루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포이어바흐는 헤겔이 인간은 신의 자기 소외라고 말한 것을 뒤집어 신은 인간의 자기 소외라고 말한다. 이 말은 신이 인간의 관념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말과 같다. 이 말은 인간이 이상(理想)들을 이루는데 실패하고 좌절함으로써, 그런 이상들이 인간으로부터 소외되어 이상적인 존재, 곧 신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은 인간의 관념에서 파생한 존재이다. 인간은 곧 신이 될 수 있는데, 그러자면 전통적인 종교관을 폐지해야만 가능하다. 포이어바흐는 신성 가족의 이미지를 제거해야만 지상의 가족에게 평화와 행복, 그리고 사랑이 올 수 있다고 말한다. 포이어바흐가 이런 신성 가족에 대한 관념을 변화시켜야만 세속가족을 물질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데 반해, 마르크스는 모든 변화는 물질적 재구성의 차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젊은 마르크스는 이러한 포이어바흐의 사상에 심취하여 철학을 하려면 불의 시내(포이어바흐)를 건너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곧 스승 포이어바흐를 사이비 유물론자, 즉 스스로 유물론자라고 착각하는 관념론자라고 비판하면서 자신의 철학을 시작한다.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에서 마르크스는 신성 가족의 비밀이 밝혀진 다음에는 세속가족을 이론적으로 비판해야 하며, 실천적으로는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고고 했다. 이 소책자는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 가지로 해석해왔으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는 말로 끝맺고 있다.

 

1.2 종교비판

 

마르크스는 일단 세속가족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고 나면, 신성 가족이라는 관념은 자연히 소멸할 것으로 생각했다. 종교는 굳이 폐지하려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포이어바흐가 말한 것처럼 종교는 소외의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소외의 징후이기 때문이며, 심지어는 소외에 저항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은 문맥과 다르게 오해되는 경우가 많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그가 쓴 문장은 종교적인 고뇌는 진정한 고뇌의 표현인 동시에 진정한 고뇌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종교는 피억압자의 한숨이며, 무심한 세계의 심장이자 영혼 없는 곳의 영혼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여기서 아편은 통증을 완화하는 약으로서의 아편이다.

 

1.3 유물론

 

마르크스는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을 경제적 지배에 관한 이론으로 개조하기 시작했다. 헤겔의 세계정신에 대해서는 생산력이, 서로 대립하는 관념들에 대해서는 경쟁적인 사회경제적 계급이, 대신 들어서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관념론을 유물론의 형태로 전환시키는 작업을 통해 독특한 철학을 창조했다. 물론 그의 철학이 역사상 최초의 유물론은 아니다. 데모크리토스나 홉스에게서도 유물론 사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물질로 용해된다고 주장하면서, “물질적 실재라는 핵심적 범주를 물리학적 관점에서 정의했다.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물질적 실재라는 것은 그저 운동하는 물질에 불과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핵심 범주를 물리학이 아니라 경제학에다 두고 있다. 그는 실재 전체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실재만을 설명하려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유물론적 분석 모델을 이용한다. ‘관념적인 상부구조와 물질적인 토대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그의 수정된 견해에서도 궁극적으로 지배적인 것은 토대라고 말한다. 사회의 관념적 성격은 항상 이데올로기가 되는데, 각 시대의 지배적 관념은 언제나 지배계급의 관념이다. 다시 말하면 칼을 가진 자가 칼을 휘두르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1.4 ‘노동의 소외에 관한 문제

 

포이어바흐나 헤겔처럼 마르크스도 소외에 대한 관심이 컸다. 마르크스는 소외의 여러 가지 발현태(發現態)를 언급했지만, 철학적으로 독창성을 보인 것은 노동의 소외에 관한 설명이다. 마르크스는 생산이 인간 존재의 본성이라고 보았다. , 인간은 필요에 의해 창조한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을 가리키는 말로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생각하는 사람)라는 말보다 호모 파베르(homo faber-만드는 사람)라는 말을 더 즐겨 썼는데, 이는 인간의 앎과 생각이 인간이 하는 일에 의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존재이다. 인간은 물건을 생산하고, 인간이 생산한 물건은 또 인간을 재생산한다. 따라서 인간의 정신은 당연히 인간이 창조한 대상들의 특성을 취하게 된다. 만약 인간이 쓸모없는 물건을 창조한다면, 인간 자신도 쓸모없는 것이 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생산의 과정을 좌우하는 역사적 힘들은 늘 인간의 통제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흔히 사회-정치-경제적 힘이라고 부르는 그 힘들이 인간 개인과 그가 생산한 물건 사이에 파고들면, 그 결과로 소외된 노동이 생겨나게 된다.

 

(1) 우리가 수행하는 작업이 자연스런 창조적 욕구의 표현이 아니라, 임금이나 다른 경제적 욕구, 또는 타인의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행해질 때 인간적인 소외현상이 일어난다.

(2) 또 우리가 생산한 물건이 다른 사람에게 이득을 가져다 줄때와 그 물건이 유통되는 경제체제가 진정한 인간의 욕구가 아닌 탐욕을 충족시키는 체제일 때에도 생산물의 소외현상이 일어난다.

(3) 노동자가 생산의 분업적으로 일부과정에만 참여한 생산물이 항거할 수 없는 외부의 체제에 의해 해로운 것으로 되돌아 올 때에는 생산과정에서의 소외현상이 일어난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지금까지 역사에 존재했던 모든 사회경제 제도 중에서 노예제도를 제외하고는 자본주의가 노동의 소외를 가장 심화시키는 제도이다. 노동의 소외(alienation)는 또한 자기 소외를 낳는다. 노동자는 자기 자신을 이방인(alien)으로 여기게 되며, 나머지 인류들에 대해서도 다른 존재로 바라보는 이방인이 된다.

카를 마르크스가 말하는 공산주의의 목표는 모든 소외가 극복되고, 모든 인간이 자신이 잃어버린 호모 파베르-생산자라는 본질을 회복할 수 있는 사회를 창조하는 것이다.

 

1.5 계급투쟁-역사 결정론

 

마르크스의 이러한 유물론에다가 그의 변증법적 해석을 덧붙여 보면 계급투쟁이 나온다. 사회의 물질적 부를 특정한 사람들이 소유하면 자동적으로 계급체제가 생겨난다. , 유산자 계급과 무산자 계급으로 나누어지는데, 이들 계급은 언제나 대립하면서 영원한 갈등 속에 있게 된다. 마르크스가 주도하여 작성한 [공산당 선언]은 이렇게 시작한다.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마르크스는 오랜 세월에 걸쳐 자본주의의 구조와 내적 모순들을 분석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계급(부르주아지)과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는 노동자 계급(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 계급투쟁의 최종 단계가 벌어진다.

 

마르크스가 분석한 자본주의의 모순들을 보면 이렇다. 자본주의는 경쟁을 강조하므로, 결국에는 오히려 경쟁의 결과물인 독점을 낳는다. 그 결과 경제적 엘리트층에 속했던 사람들이 경쟁에서 패배하여 빈민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또 자본주의는 값싼 원료, 값싼 노동력, 소비시장을 확보해야 하므로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제국주의적 전쟁은 필연적이다. 또 자본주의는 실업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하므로 인플레이션을 낳게 되며, 결국에는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금융긴축과 구조조정을 실시하면) 다시 실업자를 양산하게 된다. 이러한 내적 모순들이 성숙하면서 무산계급의 생활이 악화되고, 아울러 사회적 불안이 갈수록 심화되면서 필연적으로 자본주의는 붕괴의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이 필연적으로 진행되어가는 역사결정론이다.

 

1.6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렇게 되면 노동자 계급은 봉기하여 자본가 계급을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하게 된다. 이것은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가 계급사회를 근절하기 위해 만드는 정권이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제 기능을 수행하고 나면, 저절로 권력의 정상에서 물러나 사라져버린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니버(Reinhold Niebuhr) 같은 사람들은 그가 사회주의적 유토피아에서 일어날 수 있는 권력남용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마르크스는 아마도 헤겔의 철학적 낙관주의를 물려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마르크스의 낙관주의보다는, 스탈린 시대의 소련이 보여주었듯, 액튼(Lord Acton)의 비관주의가 현실적으로 더 정확했다.

 

1.7 이상주의적 무계급 사회

 

마르크스의 말에서 보면, 지금까지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으니까, 이제부터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역사가 시작되어야 한다. 이제 인류는 원시시대 이후 처음으로 최적의 상태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지배가 사라지면 무계급 사회가 되며 갈등의 변증법은 끝나고, 그와 더불어 사적 소유와 분업은 사라진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예술가와 철학자가 될 수 있다. 즉 한 가지 일만을 평생토록 전문적으로 분업하지 않아도 된다.

 

이를테면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식사 뒤에 문학비평에 종사할 수 있다.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는 선술집에서 사교를 나누고, 무도장과 극장에 자유롭게 드나들며, 책도 사고, 그림이나 노래, 심지어 펜싱까지 사랑하고 연구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제시한 진정한 공산주의 사회의 모습은 노동자의 천국이라기보다는 부르주아지의 목가적인 풍경처럼 보인다. 키에르케골이 지적했던 바와 같이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새로운 인간존재역시 아주 낡은 인간존재처럼 보인다. 역사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신화 속의 황금기에 살았다고 하는 그런 인간존재와 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1.8 [자본론]

 

마르크스는 런던에서 대영박물관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경제학을 완성했다. 런던 망명생활은 그가 [자본론] 집필을 구상하고 연구하는 과정이었다. 1인터내셔널 결의서에 '노동계급의 성서'라고 공식 기술된 바 있는 그의 저작 [자본론]은 그러한 연구 성과가 결집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 책의 초고에서 마르크스는 자신의 지적 발전과정과 역사적 유물론의 기본적 원칙을 정리해 놓고 있다. 역사유물론은 마르크스 사상의 독특한 핵심이다.

 

[자본론]1867년 베를린에서 출판되었고, 1873년 재판(再版)되었다. 그 중 제1권만이 그의 생애에 완성되었다. 2권과 제3권은 엥겔스가 편집해서 1885년과 1894년 출간했으며, 처음 제4권으로 구상되었던 부분은 1905~10[잉여가치학설사]라는 독립된 형태로 출간되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법칙성에 관하여 사회구성체 발전과정이 자연사적(自然史的) 성격을 갖는 것으로 보고 연구했다. 그는 사회구성체의 경제적 토대, 상부구조의 이데올로기, 생산력과 생산관계 등을 연구하고, 사회구성체의 여러 요소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탐구했다. 그는 부르주아 사회는 모든 사회적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불가피한 발전의 경로를 거쳐야 한다는 유물사관과 데이비드 리카도의 고전적 경제학을 결합시켰다.

 

그는 부르주아 역사가들이 자기보다 훨씬 이전에 계급과 계급투쟁의 존재와 이와 관련한 문제들을 다루어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생산발전의 각 단계는 이에 상응하는 계급구조와 연관이 있다는 것과 계급투쟁은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낳아 무계급 사회의 도래가 실현될 것임을 주장했다. 그는 19세기 초에 통용되던 상이한 사회주의 이론들을 흡수해 하나의 이론으로 통합했고, 이는 그의 사후 50년 동안 지배적인 사회주의 이론이 되었다. 그는 역사발전에 있어서 경제구조의 영향을 강조했다.

 

[자본론]은 이윤율의 감소와 같은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들이 현저해짐에 따라 자본주의는 사라지고 더 나은 사회로의 이행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언한다. [자본론]의 내용 가운데는 노동계급의 비참한 생활을 서술한 페이지들이 있다. 마르크스는 이 비참함이 증가되고 동시에 자본의 독점이 생산에 대하여 착취로 작용하는 가운데 마침내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완성되어 부르주아 사유재산은 몰수되고 착취자가 피착취자로 전락하게 되리라고 믿었다.

 

끊임없이 완성되어가는 혁명과정을 설명하면서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그들의 처지와 욕구를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주었다. 노동자 계급의 역사적 혁명을 실현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그가 정한 필생의 목표였다. 그의 철학은 항상 사회를 변혁하는 무기로서 기능했다. 그것은 경제생활과 정치적 계급투쟁, 과학과 기술의 혁명, 그리고 노동자 인민의 사회 및 정치 발전 등과의 결합에서 생명력을 나타냈으며, 그의 사후의 역사에서 위력을 입증했다. 그의 철학은 레닌에 의해 더욱 발전되어 전 세계 공산당과 노동자 정당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으며, 혁명적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의 건설로 이어졌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강조한 것은 경제학적 문제들이었으나, 그의 철학은 경제학 못지않게 사회학과 역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회학 이론에 있어 마르크스의 가장 지대한 공헌은 모든 사회체계가 내재적 모순에서 갈등을 발생시키며, 이 갈등은 새로운 사회의 등장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그의 변증법적분석에 있다. [자본론]의 경제학적 추론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는 신마르크스주의자들도 자본주의 체제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는 그의 변증법적 분석을 따르고 있다.

 

2. 마르크스의 초기 생애

 

2.1 어린 시절

 

마르크스는 181855일 프로이센의 라인란트 지방의 유서 깊은 로마 가톨릭 도시 트리어에서 7남매 중 첫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수대에 걸친 유대교 랍비의 후예였다. 그 가문의 성은 원래는 모르데카이(Mordechai)였으나 마르쿠스(Markus)로 고쳤고 다시 마르크스(Marx)로 바꾸었다. 아버지는 명망 있는 변호사였고, 어머니는 네덜란드 출신이었다. 양친 모두 유대 혈통이었으나 아버지는 카를이 태어나기 1년 전쯤 복음주의 국교회의 세례를 받았고, 카를 역시 6세가 되던 해에 세례를 받았다. 유대인이 감당해야 하는 사회적 편견과 차별은 어린 마르크스에게 종교의 역할에 대한 의구심과 사회개혁의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1830년 카를 마르크스는 트리어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학교는 자유주의 교사와 학생들의 은신처가 되었고, 경찰의 감시가 끊이지 않았다. 이때까지 마르크스의 글 속에는 그리스도교적 봉사와 자기희생의 의지가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183510월 카를은 본대학교로부터 입학통지를 받았다. 그가 처음에 수강한 과목들은 그리스어와 로마 신화, 미술사와 같은 오로지 인문주의적인 것들이었다.

 

2.2 베를린 대학생활

 

마르크스는 본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다가 1836년 법률과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떠나갔다. 카를 마르크스가 베를린대학교를 휩쓸고 있던 헤겔철학과 만나 청년(좌파) 헤겔학파를 추종하게 된 사실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처음에 카를은 헤겔에 대해 적대감을 느꼈으나, 베를린대학 문화에서 헤겔이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인 것이었고, 카를은 새로운 지식 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박사 클럽'에 가입했다. 클럽의 중심인물은 젊은 신학강사 브루노 바우어였는데, 복음서는 실제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감성적 필요에 기인하는 환상의 기록이며 예수 또한 역사상의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획기적인 가설을 전개시키고 있었다. 카를 마르크스는 예언자 이사야에 대한 바우어의 강좌에 등록했다. 바우어는 새로운 사회적 파국, 즉 예수의 재림시에 닥칠 시련보다 더욱 무시무시한 파국이 다가오고 있다고 설파했다. 청년 헤겔학파는 급속도로 무신론에 기울어지고, 정치적 행동들도 거론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의 동료들은 박학다식함과 정연한 논리로 토론을 주도하는 청년 마르크스의 똑똑함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1836년 출간된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마르크스와 청년 헤겔학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후 마르크스의 철학적 노력은 모든 사물은 모순적인 국면의 발생과 충돌에 의해 지속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는 헤겔의 변증법과 물리적인 조건들을 관념의 상위에 두는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결합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마르크스는 후에 헤겔의 변증법과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적인 요소를 모아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정리하고, 철학에 과학적, 역사철학적 요소를 부여했다.

 

당시 독일의 대학교에서는 헤겔에 관한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헤겔은 역사와 사회의 발전은 절대정신을 향하여 나가는 것이며, 그 과정은 변증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헤겔은 국가가 절대정신의 대변자이자, 실현도구라고 보았으며, 그 보편국가가 프로이센이라고 얘기함으로써 프로이센에 철학적 기반을 제공했다. 이러한 헤겔에 대해 청년헤겔학파로부터 비판이 가해졌다. 그들은 헤겔 사상의 기본적인 틀을 수용하면서도 절대정신을 인간성의 해방과 인간의 합리적 이성이라고 파악했다. 아울러 프로이센을 보편국가라고 주장한 헤겔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로 인해 청년 헤겔학파에 대한 정치적 탄압이 가해진다.

 

청년 헤겔학파에 잠재되어 있는 정부전복 분위기에 공포를 느낀 프로이센 정부는 이들에 대한 색출작업에 착수했고, 1839년 바우어는 강사직을 박탈당했다. 저널리스트 아돌프 루텐베르크는 이 시절 마르크스에게 가장 절친한 친구로서, 보다 능동적인 사회참여를 권유했다. 마르크스는 그 사이에 예나대학교에 박사논문을 제출했다. 그의 논문은 학문적인 면에서는 별로 우수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18414월 박사학위 취득에 성공했다. 그의 논문은 헤겔주의자의 관점에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점을 분석한 것이었지만, 분명한 것은 프로메테우스적인 도전 정신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2.3 대학 졸업 후

 

박사학위 과정을 마친 후 고향으로 돌아온 마르크스는 언론에 투신하였는데, 18421월 마르크스는 쾰른에서 창간된 라인 신문-Rheinische Zeitung”의 기고가가 되었다. 쾰른은 프로이센의 산업 중심지였고, 신문사는 상인·은행가·산업가 들이 모여 만든 민주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기관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절대적인 도덕기준과 보편적인 윤리원칙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마르크스는 이즈음 언론의 자유에 관한 소논문 하나를 발표했는데, 언론에 대한 당국의 검열에 대해 민중을 염탐하는 죄악으로 단정하고 있었다. 18421015일 카를 마르크스는 라인 신문의 주필이 되었고, 베를린 빈민의 경제·사회 문제에 관한 수없이 많은 논설을 집필했다. 이 시기에 전환점, 특히 철학에서 사고의 변화를 맞이한다. 당시 독일 철학은 대단히 관념적이며 추상적이었는데, 철학적 이슈에서 사회경제적또는 정치경제적인 이슈로 방향을 전환한다. 라인 지방 농부들을 취재하던 도중 경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헤겔의 관념론은 이러한 현실과제의 해결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고, 청년 헤겔학파 동료들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규범의 한계 내에서 점진적인 변혁을 추진하는 실천적 자유주의자들을 가까이했던 마르크스는 라인 신문의 발행부수를 3배까지 늘리고 프로이센의 주요일간지로 부각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정부당국은 신문을 정간시켰다. 1843년에 라인신문은 폐간되었는데, 당시 마르크스는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편집장직을 사임합니다.'라는 광고문구와 프로메테우스(마르크스)가 독수리(프로이센)에게 괴롭힘 당하는 그림으로 저항을 나타냈다. 카를 마르크스는 약혼한 지 7년이 지난 184364세 연상이며 지성과 매력을 겸비한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결혼했다. 예니는 뛰어난 군인과 행정관들을 배출해낸 명문가의 딸이었다.

 

2.4 파리 생활

 

독일에서 급진좌파운동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마르크스는 [독일-프랑스 연보]를 발간하자는 자유 헤겔파 아르놀트 루게의 제의를 받아들인 뒤 파리로 향했다. 마르크스가 파리로 이주한 것은 결혼 후 4년이 되던 해였다. 당시의 파리는 사회주의 세력과 보다 급진적인 공산주의 혁명운동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혁명운동에 참여한 마르크스는 프랑스·독일 노동자들의 공산주의 조직들과 실제적인 관련을 맺기 시작했다. 그들의 사상은 너무나도 조잡하고 무지한 것이었지만 그들의 인성은 그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프랑스 사회주의자의 혁명적 집단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마르크스의 정치사상과 철학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여기서 의인동맹(義人同盟)이라는 비밀결사단체에 가입했다. 이 단체를 공산주의자 연맹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쓴 것이 [공산당 선언: Manifesto of the Communist Party]이다. 마르크스 사상의 특징적 일부가 이 당시 저술에 나타난다. 독일의 관념철학에서 벗어나 역사유물론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843년에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을 발표하는데, 청년 헤겔학파에서 점차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 생존에서 물질적 조건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유물론의 단초를 보여주고 있다.

 

이른바 [파리유고]로 알려진 [1844년의 경제학-철학 초고. 1844]에서 카를 마르크스는 "형제애는 그들에게 있어서 단순한 구호만이 아니고 삶의 진실이다. 노동으로 단련된 그들의 육체는 우리에게 인간의 고귀함을 일깨워준다"라고 쓰고 있다. 이 책은 이후 100년 동안 빛을 보지 못했지만, 마르크스 역사·경제 이론의 바탕을 이루는 휴머니즘과 역사유물론의 초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적 역할과 생산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노동자의 소외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인간 해방을 갈구하는 휴머니스트로서 마르크스를 강조하는 학자들의 주장 근거가 되고 있다. 실제 마르크스는 노동자는 자신의 생산물에서 소외된다고 [소외론]초판에서 주장했다.

1844년에 쓴 [유태인 문제에 관해서]에서 그는 유태인들은 프랑스 혁명을 통해 사적으로 해방된 것이지 인간으로서 해방된 것은 아니라고 서술하고 있다.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해서]는 독일의 신흥 부르주아들의 취약성을 지적하면서 프롤레타리아만이 역사적 과업을 지탱해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독일-프랑스연보]에 실린 우익 헤겔파 철학 비판에는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유명한 문구와 함께 철학의 실현을 위한 '프롤레타리아 봉기'가 제창되고 있다. [독일-프랑스 연보]가 해마다 출판되고 있는 동안 마르크스와 기고가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와의 관계는 급속도로 발전되었다. 프로이센 정부는 다시 카를 마르크스의 제재에 나섰고, 급진적 인물이 체류하는 것을 기피한 프랑스 정부에 의해 추방되었다.

 

 

2.5 브뤼셀에서의 엥겔스와의 만남

 

18452월 카를은 파리를 떠나 브뤼셀로 향했다. 카를은 벨기에에서 엥겔스와 회동한 뒤 프로이센 국적을 포기했다. 이제 그들 사이의 공통된 견해를 확인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두 사람의 지적 자원을 결합시켜 헤겔주의적 관념론에 대한 장문의 비평 [신성 가족. 1845]을 펴냈다.

 

브뤼셀에서의 다음 2년간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동 작업이 심화되던 시기였다. 엥겔스는 아버지의 직물공장이 위치해 있던 맨체스터에서 산업혁명의 암울한 현실들을 처음 접했다. 청년 헤겔학파에 속했던 그는 공산주의 랍비라 불렸던 모제스 헤스의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 영국에서는 로버트 오언의 추종자들과 교류했다.

 

1846년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 사회를 뛰어넘어 공산주의 단계로 곧장 비약할 수 없으며, 노동운동은 윤리적 구호가 아니라 과학적인 근거를 필요로 한다고 역설했다. 이 해에 그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발표한다. 600여 페이지의 방대한 저작인 이 책은 엥겔스와 공저로 되어 있으나, 사실상 마르크스의 사상으로 가득 차있다. 이 책에서 마르크스는 청년 헤겔주의자에게 결별을 선언하고 있으며, 그들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은 마르크스 사상의 발전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역사유물론에 대해 최초로 체계적으로 서술했으며,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자본주의 자체가 잉태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이 책에서 마르크스는 역사의 각 단계에서 지배계급이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사회공동체를 구조화한 방식들을 규명함으로써 역사적 유물론을 처음으로 완전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출판업자가 나서지 않아 두 사람의 일생 내내 빛을 보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주요 노동운동 지도자들과의 대결을 통해 자신의 공산주의 사상을 확립시켜나갔다.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을 논박한 것이

[철학의 빈곤 Das Elend der Philosophie. 1847]이다. 프루동은 경제체제의 대립 개념들로부터 단점을 지양하고 장점을 되살리려 노력했다. 반면에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에 상호 충족적 타결점은 있을 수 없으며, 사회공동체의 구조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역사의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맷돌은 봉건영주의 지배를, 증기기관은 산업자본가의 지배를 야기했다는 설명이다. 프루동의 추론양식은 역사의 기본법칙을 파악하는 데 실패한 소부르주아적 사회인식으로 여겨졌다.

 

2.6 초기 런던 생활

 

18476월 독일계 이민 수공업자들로 구성된 의인동맹(義人同盟)’이 런던에서 회합을 갖고 정치적 강령 채택을 결의했다. 카를 마르크스는 이들로부터 참여의 요청을 받았고, 숙고 끝에 동료 엥겔스와 동맹에 가입하기로 했다. 마르크스는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와 제휴하려는 자신의 계획이 무위로 돌아간 것을 못내 아쉬워하면서, 런던의 공산주의자 동맹에 합류했고, 1년 동안 보다 대담한 혁명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의인동맹공산주의자 동맹으로 명칭을 변경한 뒤 민주적 헌장을 제정했다.

 

184712월 중순부터 18481월까지 정강 작성을 위임받은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정강의 초안 작업에 몰두했다. [공산당선언]"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는 명제를 통해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정립된 유물사관을 요약하고 계급사회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에 따라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선언은 유토피아 사회를 지향한 공동체적 실험들은 계급투쟁을 무마시키는 '반동적 분파'로 간주해 단호히 거부하는 등, 모든 사회주의 형태를 비판하고, 상속의 폐지로부터 누진과세, 아동의 무상교육에 이르기까지 10개의 즉각적인 조치를 공산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첫 단계로서 제시했다. [공산당선언]"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속박의 사슬밖에는 없다. 그들은 세계를 얻을 것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공산당 선언 속에는 새로운 이론이 나타난 것이 아니고, 과거 마르크스가 그의 저작물에서 얘기한 것-자본주의의 필연적 몰락과 프롤레타리아의 승리에 대한 확신-을 선언문에 맞게 단순명료하게 재구성한 것이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마르크스의 초기 사상에서 보이는 휴머니즘적 철학적 고뇌는 상당히 감소하고 정치경제학적 내용의 비중이 커지게 된다. 당시 이 조직은 혁명적 젊은이들에 의한 급진적 음모와 소수의 비밀결사를 선호하던 블랑키파와 공개조직을 시도하는 마르크스파가 그 주도권 장악을 놓고 치열한 논쟁과 암투가 있었다. 결국 마르크스파가 다수가 되어 공산주의자동맹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들이 이런 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18482월 프랑스 혁명 덕분이었다. 혁명적 낙관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공개적인 단체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2.7 혁명기 대륙생활

 

1848년 초의 몇 개월 동안 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에서 갑작스럽게 발발한 혁명이 성공하자, 마르크스는 임시정부의 초청을 받아 파리로 떠났는데, 마르크스는 무력으로 조국을 해방시키자는 게오르크 헤르베크의 선동에 반대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혁명이 가열되고 있을 때 마르크스는 라인란트로 되돌아왔다. 쾰른에서 그는 노동자계급이 민주적 부르주아지와 연합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노동자동맹 지도자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노선에 제동을 가하고, 노동자계급은 프랑크푸르트 의회에 대표를 파견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마르크스의 견해는 [공산당선언]이 유보되어야 하며 공산주의자 동맹은 해체되어야 한다는 엥겔스의 견해와 일치했다.

 

18496월 카를 마르크스는 새로이 창간된 [()라인 신문 Neue Rheinische Zeitung]을 통해 입헌적 민주주의와 러시아와의 개전을 촉구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동맹의 급진파 지도자 안드레아스 고트샬크가 체포되었을 때, 그를 대신해 라인란트 민주의회를 창설했으며(1848. 8), 국왕이 베를린의 프로이센 의회를 해산시키자 지하 저항운동을 돕기 위해 무기와 병력을 모았다.

 

1849년 자유주의적 부르주아들은 [신라인 신문]에 대한 후원을 중단했고, 마르크스 자신은 납세거부 운동을 비롯한 여러 가지 혐의로 기소되었다. 법정에서 마르크스는 프로이센 왕이 불법적인 반혁명운동에 관여했다는 요지로 자신을 변호했으며, 배심원단은 호의를 가지고 만장일치로 그를 방면시켰다. 그러나 516일 카를 마르크스에게 추방령이 내려졌고, [신라인 신문]은 붉게 인쇄된 폐간호를 찍었다. 2월 혁명 이후 시대의 흐름이 거꾸로 가는 수구 반동적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었다.

 

3. 후기 생애

 

3.1 런던 망명 생활

 

19498월 추방령이 내려진 마르크스는 마지막 거처인 런던으로 망명했다. 이때 영국에서는 증기 엔진이 발명되어 사람이나 말의 힘을 이용할 때보다 속도가 빠른 운송수단으로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당시 이런 상황의 변화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분열이 생겨나게 되었다. 급진적 혁명을 주장하는 분파와 혁명의 절정기는 이미 지나갔다는 분파로 분열된 것이다. 후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이다. 급진주의자들은 마르크스가 노동자 교육동맹의 정치경제학 강사가 되었다며 그를 비꼬았고, 공산주의자 모임에 마르크스의 출석 횟수는 점차 줄어들었다. 마르크스는 18509월 이들이 유물론을 이상주의로 대체했다고 비판했다.

 

1850년대는 혁명을 즉, 사회의 변화를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시련의 시기였다. 18503월 카를과 예니, 그리고 4명의 자녀들에게 강제퇴거 명령이 내려졌고 자산은 압류되었다. 자녀들 중 몇몇은 죽었다. 그중에는 그가 '부르주아 사회의 희생자'라고 이야기한 아들과 딸이 포함되어 있었다. 예니는 아이들의 관을 살 돈을 마련하려고 거의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6년을 대부분 빵과 감자로 연명하며, 가족은 소호의 방 2칸에서 삶을 꾸려나갔다. 빚쟁이들을 피해 마르크스 자신은 맨체스터로 도망해야 했고, 아내 예니는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1851~62년 사이에 마르크스는 [뉴욕 트리뷴 The New York Tribune]지의 유럽 통신원으로 일했다. 그는 인도와 중국, 영국과 스페인의 사회운동과 소요들을 분석하고, 500편에 가까운 기사와 논설들을 기고했다.

1852년에 카를 마르크스는 쾰른에서 정부전복 혐의로 체포된 11명의 공산주의자들을 변호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으며 이를 위하여 팜플렛을 작성하기도 했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이 쓰인 것도 이 무렵인데 여기서 그는 농민계급의 지지를 바탕으로 관료주의적 절대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다.

1859년 마르크스는 경제이론에 관한 최초의 저술인 [정치경제학 비판]을 완성했다. 이 책의 서문에는 유물사관에 도달하게 된 논리과정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물질적인 생산양식은 삶의 사회적·정치적·정신적 차원들을 결정한다.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 재를 규정짓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생활이 의식을 좌우한다."

 

1850년부터 1864년까지 마르크스는 물질적인 궁핍과 정신적인 고통 속에서 살았다. 재원은 고갈되고, 단 한번을 빼고는 수입이 있는 직업을 가지지 못했다. 이러한 역경의 시간을 통해 엥겔스는 재정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처음에는 맨체스터 소재 어먼 앤드 엥겔스사()의 평사무원에 불과했으므로 급여의 액수가 많지 않았지만, 1864년 그가 동업자가 되었을 때는 급여의 규모도 커졌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와의 우정을 자랑으로 여겼고 그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용납하지 않았다.

 

3.2 1인터내셔널

 

1864년 제1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의 창설과 더불어 마르크스의 정치적 고립도 끝났다. 그는 제1인터내셔널의 창설자도 회장도 아니었지만 곧 그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1인터내셔널 창립대회는 1864928일 런던의 세인트 마틴 홀에서 영국 노동조합의 지도자들과 프랑스 노동자 대표들에 의해 소집되었다. 마르크스는 프랑스의 중개인을 통해 독일 대표 자격으로 초청받았다.

 

1인터내셔널의 강령과 헌장을 마련하기 위한 위원회가 구성되고 여러 초안이 제출되었으나 모두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러자 분과위원회에 몸담고 있던 마르크스는 풍부한 언론계의 경험을 바탕으로 강령과 헌장을 기초했다. 그가 기초한 1인터내셔널 선언 및 잠정 규약은 그의 다른 저술들과는 달리 입법투쟁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영국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경우, 장차 정치적 힘을 쌓아나간다면 국가권력을 획득할 수도 있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마르크스는 이 협회의 총회 위원이자 독일 대표로서 회합에 꾸준히 출석했으며, 몇 년 동안 다양한 정당·파벌·경향간의 입장 차이를 조율해내는 데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다. 1인터내셔널의 명성은 날로 높아졌고, 그에 따라 회원 수도 크게 늘어나 창설 5년 만인 1869년에 80만 명을 헤아렸으며, 유럽 노동조합들과 자본가의 투쟁에 개입해 여러 차례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1970년까지만 하더라도 유럽 정계에서는 아직 무명 인사였다. 그를 일약 국제적인 인물로 만든 사건은 파리 코뮌(1871)이었다.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 의회의 사회주의 세력은 전쟁공채() 투표를 거부했다. 마르크스는 파리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코뮌이 선포되자 전폭적인 지지를 표명했으며 코뮌이 진압되자 프랑스 내전이라는 제목의 조사(弔辭)에서 역사상 이처럼 위대한 사건은 일찍이 없었다..... 파리 코뮌의 순교자들은 프롤레타리아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라고 애도했다. 엥겔스는 파리 코뮌을 인류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평가했으며, 마르크스라는 이름은 파리 코뮌의 혁명정신과 동일시되었다.

 

한편 파리 코뮌의 등장은 제1인터내셔널의 내부갈등을 증폭시켜 조직의 붕괴를 불러왔다. 총회 의장을 역임한 조지 오저와 같은 조합주의자들은 파리 코뮌에 대한 마르크스의 지지에 반대했다. 또한 1867년의 선거법 개정안으로 노동계급의 참정권이 보장되고 정치참여의 폭이 넓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영국의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자유당과 제휴하면 실질적인 성과를 얻어낼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고 마르크스의 말을 듣지 않았으며, 마르크스는 이들이 자유당에 스스로를 팔아 넘겼다고 비난했다.

 

1인터내셔널 내의 일단의 좌파도 마르크스의 권위에 도전했다. 이는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바쿠닌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시베리아 유형과 숱한 감옥생활을 경험한 혁명가로서 웅변의 대가이기도 했던 바쿠닌은 마르크스의 지성에 찬사를 보내기는 했으나, 바쿠닌이 보기에 마르크스라는 인물은 제1인터내셔널 총회를 탈바꿈시켜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한 1인 지배체제를 꿈꾸는 독일 태생의 교만한 유대인이었다. 그는 특히 제1인터내셔널의 중앙집권화에 관한 마르크스의 이론 등에 강력히 반발했으며,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은 기존 의회제도 안에서 지배정당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견해와, 부르주아 국가를 먼저 전복시킨 다음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정권을 수립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신념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바쿠닌은 혁명가들의 임무는 파괴에 있다고 생각했고, 선진 산업국가의 나약한 노동자들보다 러시아 농민의 제어하기 힘든 혁명적 본능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학생들이 혁명의 중추세력이 되기를 희망했던 그는 이탈리아·스위스·프랑스에서 청년 지성인들의 많은 호응을 얻어 비밀결사인 국제사회민주주의동맹을 조직했다. 국제사회민주주의동맹은 1869년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제1인터내셔널 대회에서 총회 주도권에 도전했으나, 마르크스는 이 조직의 단체 자격 가입을 일찌감치 저지시킴으로써 이들의 도전을 봉쇄했다. 바쿠닌주의자들에게 파리 코뮌은 혁명적 직접투쟁의 본보기로서 마르크스의 권위주의적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근거가 되었다. 바쿠닌은 제1인터내셔널 내부에 자신의 조직을 구축해 이를 기반으로 마르크스와 총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마르크스 진영은 바쿠닌이 협박과 살인을 일삼아온 러시아의 학생 혁명가 세르게이 네차예프와 연루되어 있는 스파이라고 공표했다.

 

우파의 불신과 무정부주의 좌파의 반발에 직면한 마르크스는 바쿠닌에게 제1인터내셔널의 주도권을 빼앗길까 두려워했다. 창설 대회 이후 1872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1인터내셔널 대회에 처음 참석한 마르크스는 가까스로 바쿠닌주의자들의 도전을 뿌리쳤으며, 엥겔스는 런던에 있던 제1인터내셔널 총회 본부를 뉴욕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해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다. 비록 바쿠닌의 추종자들을 축출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제1인터내셔널의 영향력은 쇠퇴했고 마침내 1876년 필라델피아에서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3.3 말년

 

1인터내셔널 이후 마지막 10년 동안 마르크스의 창조적 역량은 급격하게 시들어갔다. 스스로 만성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고백한 이 시기에 그의 삶은 가정 위주로 바뀌었으며, 어떤 저작도 마무리할 수 없었다. 정치적 견해도 수시로 바뀌었다. 1875년 자신의 추종자들이 국가권력과의 협력을 통해 사회주의적 목표들을 달성할 수 있다고 신봉하는 페르디난트 라살의 추종자들과 연합전선을 구축해 고타 시에서 독일 사회민주당을 창설했다. 그러자 그는 고타 강령 비판을 통해 이들이 지나치게 현실과 타협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은 그의 반대를 묵살하면서도 개인적으로는 그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마르크스는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나 보수 반동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소련의 차르 체제가 타도되기를 바랐다. 이 전쟁으로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에너지가 다시 소생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1881년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되자 그는 암살자 나로드니키의 사심 없는 용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처럼 테러는 그에게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수단의 하나로 여겨졌다. 그는 비록 현실정치에서 사실상 한 걸음 물러서 있었지만, 엥겔스가 말했던 것처럼 사회주의 노동운동에 여전히 독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879년 쥘 게드가 프랑스 사회주의 노동자연맹의 창설에 즈음해 그의 자문을 얻기 위해 런던을 방문했을 때 그는 강령의 서문을 구술해 주며 강령의 뼈대를 만들어 주었다.

말년의 마르크스는 대부분의 시간을 휴양지에서 보내면서, 알제리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는 아내와 장녀의 죽음으로 비탄에 젖어 살다가 18833월 영국 런던에서 폐종양으로 사망했다.

 

4. 평가

 

흔히 마르크스하면 유대교와 기독교사이에서의 방황과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을 했기 때문에 종교에 반대한 반()종교적 인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사회경제적 모순으로 삶의 현실에서 고통 받는 인민들에게 종교가 현실 도피적 환상을 경험하도록 기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크스는 세속가족이 변화되면 신성가족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고, 그렇게 되면 종교는 저절로 사라질 것으로 보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프로메테우스적인 반항정신과 엄격한 지성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지적으로 교만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1846년에 열린 한 토론회에서 그를 만나 유심히 관찰했던 러시아 작가 파벨 안넨코프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의 말투는 항상 명령조에 가까웠고 반론을 용인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마치 환상 속에서나 나타날 수 있는 민주적 독재자의 화신과도 같았다.” 마르크스는 많은 청중 앞에 나서기를 꺼려했고 파벌논쟁을 벌이는 분위기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 예니 역시 그가 시위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며 공식회의 석상에서도 말을 아꼈다고 밝혔다. 그는 경쟁 상대인 다른 사회주의 집단들이 논쟁을 벌이는 제1인터내셔널 대회를 멀리했으며, 그보다는 제1인터내셔널 총회나 신문사 간부모임과 같은 소모임 분위기를 선호했다. 그는 성격상 이런 소모임을 좋아했고, 여기에 모인 동료들에게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는 명망 있는 학자들과의 회합을 기피했는데, 이는 그들 중에 영국의 외무장관 파머스턴 경 같은 사람이 러시아 정부의 첩자라는 식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부르주아 사회가 자신을 결코 돈 만드는 기계로 전락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다짐하면서도 엥겔스의 증여와 친척들의 유산에 생계를 의존했다.

 

마르크스는 예수가 어린이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를 찬양한다고 말할 정도로 자상한 아버지였지만 자신의 생활이나 건강은 돌보지 않았다. 그는 언어 습득조차 삶의 투쟁에서 새로운 무기를 획득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만큼 투쟁을 삶과 존재의 법칙으로 간주했다. 또한 소설광으로서 특히 월터 스콧 경과 발자크에 탐닉했으며, 그의 가족은 모두 셰익스피어의 예찬론자들이었다. 그와 예니는 7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세 딸만 남고 나머지는 유년기에 잃고 말았다. 또한 그와 하녀 헬레네 데무트 사이에서 프리드리히라는 사생아가 태어나 그의 가정생활을 어둡게 만들었다. 그가 총애한 딸 엘레아노르는 신경질적이고 감성적인 성격에다 고집이 세어서 아버지를 근심시켰다. 엥겔스는 세상을 떠날 때 프리드리히의 아버지가 마르크스임을 엘레아노르에게 일러 주었다고 한다. 마르크스는 똑똑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평이 있으나 고집이 너무 세고 독단적이었다고 한다.

 

런던에서 열린 장례식에서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인류역사 발전의 법칙자본주의 사회운동의 법칙을 발견해냈다고 선언했다. “무엇보다 카르 마르크스는 위대한 혁명가였다. 증오의 대상이 되어 극단적인 비방과 모략에 시달렸던 그는 이제 수백만 노동자들의 사랑과 존경, 애도 속에서 눈을 감는다.”고 적었다고 한다. 그랬기에 마르크스를 존경하는 사람은 있어도 친구는 별로 없었다. 마르크스는 엥겔스를 제외한 모든 친구를 잃었고, 떠나간 친구들은 대부분 적이 되어 돌아왔다. 또한 마르크스는 처자식에게는 자상한 가장이었지만 부모와 형제자매에게는 냉담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아버지 하인리히의 사진을 관에 묻히는 순간까지 가지고 있었다.

(숭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