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 연구 페이퍼

틸리케의 『세계를 부둥켜안은 기도』

heojohn 2020. 4. 4. 02:33

 1. 머리말

 

틸리케의 주기도문 설교는 독일 나치정권이 초래한 전화에 휘말려 국민들이 고통당하던 시기에 이루어졌다. 그에게는 “설교자가 그 얼굴들 속에서 읽었던 모든 것, 설교자 자신이 최후의 순간까지 그 얼굴들과 함께 할 수 있도록 해 주었던 모든 것이 의심의 여지없이 설교자의 설교 안에서도 반영" 되는 것이었다. 일부 기독교인들과 신학자들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을 과신하여 바벨탑을 쌓았으나 참담한 결과만을 낳았다고 보는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처럼, 교리신학으로 회귀하였다. 틸리케 (Helmut Thielicke, 1908-1986) 역시 인간의 오만함에 공감하였으나, 그는 방향을 달리하여 하나님과 인간 개인의 관계성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는 20세기 세계사의 방향을 틀었던 사건의 한 가운데 있던 목격자였다. 그와 독일 기독교인들이 그 사건을 보고 겪고 반응했던 내용이 그의 설교 가운데 언뜻언뜻 비춰진다.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의 상실, 인류문명에 대한 환멸, 삶의 허무함과 미래에 대한 절망감. 등등....

 

2. 주기도문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1

 

설교자 틸리케는 나치정권 치하의 절박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에 부딪힌 그의 신도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제시하고자 한다. 틸리케는 모든 고통과 비극의 시발점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틀어진데 있다고 보고, 그 관계를 제대로 놓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서 가장 중요한 일이요 모든 내적 성장의 근원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바로잡는 데 방해가 되는 잘못된 인식을 하나하나 지적하며 수정한다.

 

그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는 인간이 알아야하는 하나님의 모습,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의 성격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는 주기도문을 한 구절 한 구절씩 풀어가며 그 의미를 밝혀낸다. 복음주의 신학의 입장에 기반을 둔 하나님과의 일대일 관계라는 씨줄과, 당시의 힘든 일상으로부터 오는 내적성찰이라는 날줄이 얽혀 한편 한편의 설교가 진행된다. 그리고 그 의미는 전쟁 가운데 휩싸인 독일 기독교인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는 살아있는 메시지로 다가간다.

 

틸리케는 주기도문 첫 구절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를 풀이하며 아버지로서 계시는 하나님을 드러낸다. 그러나 틸리케는 하나님이란 분이 풍랑 속에 떠도는 돛단배와 같은 인간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아버지이며 아버지라고 인식하기도 어렵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틸리케는 우선 인간이 겪는 고통은 스스로의 죄된 선택의 결과임을 분명히 한다. “그것들은 무질서요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계획 속으로 뚫고 들어온 것들에 불과합니다. 그것들은 원죄가 낳은 어두운 결과이며 우리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불순종의 길로 접어든 서구 문화를 비판하며 나아가서 그 자신이 속한 독일이라는 국가가 하나님과 멀어진 결과 일어난 비극을 암시한다: 당시 독일 신자들이 겪는 부정적인 현실은 하나님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악이 초래한 고통스러운 삶을 변화시키는 분이다. 그분은 인간을 고통 가운데 방치하는 타인이 아니다. 그분은 사실 아버지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분이다. 인간은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숲 속에 아버지가 계심을 믿어야만 한다. 물론 세상은 아버지가 없는 세상처럼 보인다.

 

러시아나 폐허가 된 도시들의 묘지에 있는 수십만의 무덤만 봐도 이 세상은 소름끼칠 정도로 아버지가 없는곳 같지 않습니까? 저 무덤 속에 잠들어야만 하는 사람들은, 삶이란 늘 그런 것임을 어렴풋이 깨닫기도 전에 아버지라는 분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죽음과 마귀에게 포위당하여 차가운 무덤 속으로 내려간 고아처럼 보이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아버지 되신다는 사실과 아버지가 없는 듯 보이는 세상 사이의 괴리는 이성적으로 극복 가능한 것이 아니다. 틸리케는 단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실존적으로 선택할 것을 주문한다. 인간적인 현실 속에 현실을 초월한 절대자가 존재하며 그분이 나라는 개인의 아버지가 되심을 믿는 선택을 하도록 유도한다. 고통 속에 그 절대자를 원망하거나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고통에도 불구하고 절대자의 아버지 되심을 믿고 취하는 선택을 해야 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틸리케의 주장은, 인간이 아버지를 먼저 선택하고 취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먼저 자녀된 인간을 부르셨다는 것이다. “예수가 육신이 되셨다는 사실은 이 희망이란 것이 경이롭고 불가해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나아가 예수가 육신이 되셨다는 사실은 아버지의 심장이 우리를 향하여 뛰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취하는 결과로 현실이 눈에 보이게 나아지지는 않더라도, 아버지 되심을 취한 이후 일어나는 획기적인 변화가 있음을 강조한다. 틸리케는 아버지의 손이란 표현으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취한 이후에 일어나는 변화를 묘사한다.

 

우리가 아버지의 이 손을 인식하지 못하는 바람에 이 손이 무의미하고 불필요하며 멋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면, 제법 가벼운 운명의 타격도 무거운 것이 되어 버립니다. 반면에 내가 내 삶을 덮고 있는 그분의 선하신 손을 깨닫고 그 손으로부터 내 삶을 취한다면, 나는 확신을 갖고 가장 혹독한 일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이후에 인간은 새로운 방향과 확고한 격려을 얻음으로 인해 달라지는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2)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2

 

틸리케가 이러한 설교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분명하다. 그는 가족을 잃거나 하루하루를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아야 했던 그의 동시대의 독일 신도들에게 현실에 매몰되지 말고 아버지의 손을 잡을 것을 주문한다. 많은 독일 기독교인들이 눈에 보이는 비극에 시험당하여 신앙에 회의하고 하나님의 존재에 의구심을 품는 가운데 믿음의 선택으로 아버지를 대면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설교를 통해 틸리케의 사고에 실존철학과의 유사성이 드러난다. 결국 그가 제시하는 것은 홀로 서서 통로가 없이 갇혀버린 인간이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을 믿고 취하는 선택을 함으로써 얻는 초월의 길인 것이다. 인간의 현실에 대한 겸허한 수용,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조되는 인간의 결단의 중요성 등은 실존주의적인 색채를 드러낸다고 하겠다.

 

틸리케는 이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 아버지와 그 자녀된 인간의 관계를 묘사한다. 그는 어린아이와 어머니의 비유를 사용한다. “어린아이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아직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도움을 구하는 눈만 크게 뜨고서 어머니를 바라볼 뿐입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압니다. 무엇이 그 아이에게 고통을 주는지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고통을 제대로 파악하거나 그에 관해 말할 수 없더라도 하나님 아버지는 자녀된 인간의 모든 것을 이미 알고 계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기도하면서 우리의 소원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고 하셨듯, 아버지는 기도보다 앞서서 고통의 현장에 미리 계신다.

그렇게 가까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틸리케는 강조한다. 또한 이 사실을 앎으로서 얻을 수 있는 위로와 확신을 제시한다. “이것은 주기도를 시작할 때 함께하는 위로이고 우리가 기도하기 시작할 때 무엇보다도 먼저 알아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올바른 쉼을 얻게 되고, 안절부절 못한 채 공황상태에 빠져 중언부언할 필요도 없게 됩니다.”

 

만일 하나님이 기도를 듣지 않거나 기도와 다른 결과를 주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은인간을 향한 그분의 최선임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의 문제를 다루실 때 그는 즉효적인 처방전보다는 근원적인 방법을 사용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기도를 들어주지 않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자녀들을 위한 그분의 최선이다.

그렇다면 기도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틸리케는 기도란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정의한다. “인격적이고 살아 있는 모든 교제는 말을 갖고 있는 ,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때 필요한 말이 바로 기도이다. 틸리케는 하나님과 연합, 아버지의 인격과 한 몸을 이루는 교제의 밀접성을 이야기한다. 기도의 효과는 아버지와 한 몸이 되며 그분의 마음 전체를 선물로 받는 것이다.

 

이러한 설교 가운데 틸리케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해서 대화하다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잊어버린 교회를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하나님과의 그 관계를 잊어버릴 때 교회 내부에서도 서로 멀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아버지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성,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신자들의 형제관계에 대한 틸리케의 주장은 전형적인 복음주의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복음주의가 사용하는 가족의 비유는 과연 현대에 적합한지에 대하여 의문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깨어진 가정, 틀어진 부모-자식 관계가 만연한 현대사회에서 아버지 하나님은 과연 어느 정도로 강력한 메시지로 다가올 것인가? 또한 틸리케의 주장대로 인간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가 애초에 하나로 연합된다고 표현해도 될 만큼 순탄하고 조화로운 것인가?

 

보다 직접적인 문제는 인간 아버지 혹은 어머니는 자식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즉각적으로 행동하여 도움을 주려고 한다는 점에서 틸리케가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행동양식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자식의 고통을 모두 알고 있지만, 그러나 행동하지 않는 듯 보이는 하나님을 과연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틸리케의 설교는 그 세대의 독일 기독교인들에게 남다른 위로와 희망으로 다가왔을 것이 틀림없다. 틸리케가 제시하는 것은 결국 의 어려움과 의 슬픔을 형언하기도 전에 이미 알고 계신 하나님, 그 시각에 그 현장에 와 계시어 그 어려움과 슬픔의 일부가 되시는 하나님인 것이다. 틸리케는 결국 기복 신앙적으로 하나님이 취하는 행동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관점을 바꾸는 일종의 인식 전환을 통해 현실을 정신적으로 극복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2)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틸리케는 주기도문의 두 번째 구절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 관계의 또 하나의 면모를 드러낸다. 그것은 일종의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이다. 틸리케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으며 그분의 명령을 지키지 않음으로서 결과적으로 그분을 모욕하고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범하는 인간들 안에서 일종의 받아 내야할 빚을 볼 수밖에 없다. 인간은 그분에게 빚을 졌으며 인간의 삶이란 것은 일종의 빚 문서이다.

 

그런데 이 빚은 갚을 수가 없을 만큼 큰 빚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감당할만한 빚 문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빚 문서에 적힌 빚을 다 가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과감한 선택을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빚을 대리청산 하게끔 만들고 빚 문서를 찢어버린 것이다.

주기도문 두 번째 구절에 대한 틸리케의 설교는 언뜻 보면 첫 번째 구절과 상충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애로운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과 채권자로서 인간이 당신의 이름을 모욕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묻고자 하여 대리청산의 방법을 택한 하나님은 서로 모순된다고도 할 수 있을 지 모른다.

 

그러나 틸리케의 사상의 방점은 채권-채무자의 관계보다는 그 관계가 청산된 이후 가능해진 정상적인 관계에 놓여있다. 죄라는 이름의 빚을 만들어내었던 온갖 인간적인 욕망과 욕심은 낮아지고, 하나님 이름만이 인간의 삶에서 높여지는 것, 그것이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것은 철저한 자기포기 내지는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보다 나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노력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과의 외교 관계에 집중할 때에 그 외의 모든 것이 다스려 진다. 결국 인간의 삶에서 하나님이 가장 잘되는 것이 인간도 가장 잘되는 길인 것이다. “모든 사물보다 여러분을 아끼시는 그분이 유일하게 거룩하신 분이 되게 하는 것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관건입니다. 그러면 다른 모든 것은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틸리케는 이러한 하나님의 본성을 태양에 빗댄다. 태양을 멀리하는 생명체가 제대로 생명을 영위할 수 없다는 것이다. 틸리케는 이 비유로서 모든 생명과 지복의 근원으로서의 하나님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는 인간이 자신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멀리하면서 취하는 행동에 대한 통찰력도 보여준다. 바로 하나님을 대체할 인공적 자극수단들을 찾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틸리케는 이들에게 내치보다는 외교가 중요함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급선무요 최우선이다.

 

한편, 주기도문 두 번째 구절에 대한 설교는 틸리케의 관계지향적인 신론-인간론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러한 관계지향적 신론-인간론은 루터를 시작으로 개인주의를 가미한 현대 복음주의의 정통을 따르고 있다. 틸리케의 강점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하여 설교를 듣는 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이해할 수 있는 비유로 풀어내고 설득력 있는 흐름으로 차근차근 전개해 간다는 데에 있다.

 

(3)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틸리케는 주기도문 세 번째 구절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며를 풀어가면서 유달리 동세대 독일의 현실을 많이 언급한다. 아마도 나라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님 나라와 나치 독일이란 나라의 대조적인 모습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이 이룩할 수 있는 진보에 대한 신뢰, 세상의 유력자들에 대한 환상이 깨어짐을 언급한다. 그는 인본주의의 최전성기에 인간의 오만에 경고음을 울리듯 닥쳐온 세계대전의 경험자로서, 당시 세계인들이 어떤 심적인 갈등을 겪었는지 증언하고 있다.

 

틸리케는 자신의 시대를 심판의 시대로 규정한다. 당시 일어난 비극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 바벨탑을 쌓은 결과 일어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틸리케는 동시에 심판의 끝을 본다. 누구나 세상의 종말을 그릴만한 암울한 현실 가운데 마지막은 실제로 다가오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가운데서 확장되며 마지막을 향해 커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배반이 판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더욱더 단호하고 더욱더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나아가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마지막 경륜이 완성되면, 왕이신 하나님의 권세가 모든 반역자와 찬탈자를 물리치고 그들을 완전한 권세로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 나라의 성격은 역설적이다. 인간의 죄악이 만연한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곳도 커진다. 하나님 나라는 어두움이 큰 곳, 더 낮은 곳에 더욱 더 크게 임한다.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두운 곳, 낮은 곳에서 역사하셨다.

 

틸리케는 이러한 종말의 다가옴을 강조하며 기독교인으로서 지향해야할 목표점을 가리킨다. 비록 하나님의 경륜과 척도는 인간의 힘으로 다 파악할 수 없지만 그 모든 것의 완성이 되는 마지막이 있다고 강조한다. 잔인하고 비참한 현실이 눈앞에 펼쳐져도 그 마지막으로 눈을 돌려 소망을 품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인의 모습이다.

 

그 순간은 감추어진 채 잠시 엉클어진 것처럼 보이는 저 좁은 십자가의 길이 끝나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의 길을 가는 동안, 그분은 정말로 존재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혼란 중에 있는 우리의 행로에 위로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행로가 이 영광 속에서 끝나리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믿을 수 있을까? 고통스러운 현실 가운데 그저 모든 것이 함께 무저갱으로 사라져버리는 암울한 종말이 아닌, 눈물과 고통이 사라지고 지복이 기다리는 대반전의 마지막을 꿈꿀수 있을까? 틸리케는 자신의 경험담을 소개한다. 그는 슈투트가르트에서의 강연회장이 피폭당한 와중에, 남편이 포탄에 맞아 사망한 직후 구원의 확신을 얻은 어느 여인을 만난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실제로 어두움 가운데 역사하는 하나님 나라를 목격했다고 이야기한다.

 

한편 주기도문 세 번째 구절에 대한 설교는 틸리케의 역사관을 일부분 드러내고 있다. 감추어진 하나님의 경륜은 결국 마지막에 드러나며 그 마지막 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역사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이미 시원으로부터 결정된 것이요, 역사의 흐름은 그 결정된 방향과 목표에 따라 흘러간다. 틸리케는 이러한 역사관을 바탕으로 하나님 나라야말로 역사 흐름의 궁극의 방향과 목표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동시에 이 설교는 틸리케가 바라보는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드러낸다. 그것은 이 땅 가운데 보이지 않게 확장되며 종말에 온전히 드러날 나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땅에서 엶과 동시에 앞으로 다가올 온전한 나라를 엿보게 한다. 이러한 이중구조의 성격은 성경적인 기반을 갖고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와도 직결된다. 그것은 이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더욱 확장하기 위해 노력하며 다가오는 온전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이생의 탐욕을 절제하고 고난에 승리하는 삶의 자세이다.

 

(4)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틸리케의 설교는 주기도문 네 번째 구절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로 옮겨간다. 이 구절의 배경은 하나님의 뜻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세상, 인간 이 제멋대로 자신의 뜻에 따라 사는 세상이다. 전쟁의 참혹한 결과를 하루하루 목격하며 살아가는 틸리케 시대의 현실은 그러한 세상을 단적으로 예시한다.

 

민족과 민족이 대적하여 뿌리까지 멸절시키는 현실, 예배당과 집들이 잿더미로 변한 현실이 과연 하나님의 뜻이겠습니까? 우리가 도시에서 누렸던 것, 어쩌면 더 누릴 수도 있었을 것들을 이제는 폐허로 발견하는 현실이 과연 하나님의 뜻일까요? 돌아갈 고향을 잃어버린 채 홀로된 이들이 보내는 비참한 밤, 지하 깊숙한 곳의 갱도와 방공호 안에 존재하는 죽음의 고통과 공황 상태가 진정 하나님의 뜻일까요?

 

그러나 틸리케는 자신의 뜻을 좇아 살아가는 타인에게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역시 불순종과 독선으로 가득찬 내면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암울한 현실 가운데 겸허하게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함을 역설한다.

 

예수께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4:34)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자신의 본성임을 고백한 것이었다. 하나님과 완벽하게 일치된 삶을 사는 것이 그의 본성이기에 그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 역시 동일하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의 뜻에 일치하며 사는 것이 본성이지만, 자신의 의지와 욕망을 내세워 자꾸 본성을 거스려 결국 병에 이르게 된다.

 

틸리케는 니체를 인용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하는 이유를 제시한다.

반역을 단념하라!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운명에 맞서면 스스로를 파괴할 뿐이다! 이 운명이라는 적을 사랑하려고 노력해 보라. 당신은 결코 그 운명을 죽일 수 없기 때문이다. 운명을 사랑하면 적어도 당신은 균형을 되찾게 될 것이며 내면의 파괴도 멈추게 될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과 불안 가운데 하루하루 살아가는 독일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애써 구하고 그에 따라 살려고 할 수 있을까? 틸리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위로와 격려를 풀이한다. 그분의 삶이 언제나 낮은 자들 힘들어 하는 자들과 함께 했듯, 하나님의 마음이 전화에 시달리는 이들에게도 함께한다. 그리스도라는 빛을 통해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도 두려움을 잊고 걸어갈 수 있다.

 

모든 불안감을 떨치고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으로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간구할 적에 믿는 이들은 하늘과 연결된다. 답답하고 암울한 현실을 초월하여 고통을 감사와 찬미로 승화시킨다. 증오와 분노의 방향을 틀어 자기 성찰과 화해와 안식으로 나아간다.

 

그렇지만 이러한 틸리케의 주기도문 설교에서 제시하는 방법은 어떻게 보면 현실도피적이다. 나치 정권이 초래하고 독일 국민들이 동조했던 비극적인 상황에 대하여 그들은 정치적인 책임은 없는가? 그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그들이 현실적으로 취할 방법은 전무한 것인가? 기독교인들은 세파에 휩쓸린 가운데 그 세파를 바꿔나갈 방법이 오직 기도뿐인가?

설교자 틸리케의 설교만으로는 그가 어떠한 생각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자신의 설교의 범위를 영적이고 종교적인 차원으로 제한했을 수도 있고, 혹은 정말로 기독교인의 현실참여 노력을 그다지 지지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틸리케의 입장과 무관하게, 그가 제시하는 내적인 초월과 승화는 고통스러운 삶 가운데 놓인 기독교인이 취해야할 마음가짐이라는 점에서 가치를 가진다.

 

(5)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주기도문 다섯 번째 구절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에 관하여, 틸리케는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를 긍정한다. “일용할 양식으로 표현되는 의식주의 필요는 말을 꺼내기도 사소해 보이지만 실은 중요한 문제이다. 더군다나 전쟁이 초래한 물자부족의 상황에서는 더욱더 절박할 수 밖에 없다. 그는 이러한 필요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위로한다.

 

심지어 예수께서 이 사소한 필요에 대하여 얼마나 관심이 많으셨는지 제시한다. “그분은 광야에서 그분을 따르느라 허기가 진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더욱이 그분은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는 것도 염려하십니다.” 예수는 육신으로 오셔서 인간의 고단하고 늘 결핍된 삶을 직접 살아낸 분이기에 인간의 필요를 아신다.

경이로워 보이는 성탄의 겉모습도 사실은 작은 것, 곧 세상의 작은 것들에 연연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을 주님께서 친히 마중하러 나오셨다는 것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주님의 나심은 피난처도 없고 눈 붙일 자리도 없는 우리의 처지와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매한 척할 필요가 없다. 인간은 그저 있는 그대로를 하나님께 말씀드릴 수 있을 뿐이다.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 솔직한 필요를 털어놓고 간구할 수 있을 뿐이다. 틸리케는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를 하면서 사소한 필요에 지쳐 속으로 번민하지 않도록 권고한다. 하나님은 있는 그대로를 원하시며 속지 않으시는 분이다.

이렇듯 우리가 하나님께 사소한 필요를 말씀드리고 하나님이 인간의 사소한 필요에 관심을 기울이실 적에 사소한 것들은 더 이상 사소한 것이 아니게 된다. 예수께서 관심을 기울인 작고 낮은 것들이라면 그것은 사실은 매우 고귀한 것들이다. 스스로 비천함을 택한 예수 그리스도지만 그 비천함은 도리어 영광의 광채로 빛난다. 그러므로 영광의 하나님께 사소한 필요를 말씀드리는 일에 있어 자격지심을 가질 이유가 사라진다.

 

또한 틸리케는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의 필요만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동전 몇 푼을 붙잡으려고 하는 행태를 경고한다. 비록 동전 몇 푼이라도 하나님의 손을 통과하여 붙잡아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 위에서 물질에 대한 간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분에 넘치는 간구가 아니라 일용할양식을 구하여야, 즉 오늘 필요한 만큼을 구하여야 한다.

 

이러한 틸리케의 생각은 그리스도인의 사익 추구 활동에 관하여 작은 의문을 남긴다. 그리스도인이 이익을 좇는 행동은 과연 어느 범위까지 허용될 수 있는지, 또한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성공하기 위해 올리는 기도는 과연 어디까지 정당한지 등에 관한 의문이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예수의 말씀처럼 따라 부와 천국은 과연 배치되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안에서 이땅의 물질적 축복도 함께 온다는 일부 기독교 종파의 가르침, 특히 기복신앙적 성격을 많이 내포한 한국기독교의 전반적인 믿음 역시 성경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가?

여기서 틸리케의 설교는 전시 독일의 물자결핍 상황에서 동세대의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행해진 것임을 참작해야 한다. 정상적인 범주를 넘어선 부족상태에 놓인 그들에게 하루하루의 필요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이 훨씬 절실했을 터이다. 틸리케는 한 사람의 설교자로서 신자들에게 빈곤함과 결핍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며 살아낼 수 있도록 격려하고 삶의 지표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무한경쟁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틸리케의 메시지가 갖는 가치를 생각해 보게 된다. 현대 기독교인들의 가치관 가운데 혼합된 세속 자본주의와 기독교적인 재물관이 서로 모순되는 경우는 없는가? 실제로 존재하는 그러한 모순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은 아슬아슬한 양다리 걸치기에 익숙해져 모순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둔감해져 있지는 않은가?

또한 물질적인 축복에 초점을 맞추는 일부 기독교단 내지는 종파들의 성격도 역시 고려의 여지가 있다. 그들의 주장은 과연 성경적인가? 20세기에 사익추구라는 가치가 보편적이 되면서 혼합주의로 나간 기독교라고 보아야 하는가? 틸리케의 설교는 물질과 기독교 가치관에 따른 다양한 의문을 끌어낸다.

 

(6)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틸리케는 주기도문 여섯 번째 구절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에 대한 설교로 옮겨간다. 틸리케는 몇 가지 전제를 풀어놓는다. 첫째로, 죄에는 일종의 연대성이 있어 우리가 죄를 사하여 달라는 기도를 할때 단지 우리 죄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 간구를 통해 아버지 앞에 나올 때에는 우리 각 사람이 모두 죄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할 자임을 말씀드리면서 나오는 것입니다. 동시에 온 세상과 모든 민족과 모든 통치자와 모든 사람을 대표하여 그들이 지은 죄를 어마어마한 크기로 뭉쳐진 단 하나의 말씀으로 털어놓는 자로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 인용구를 볼 때 틸리케에게 있어 죄의 연대성은 타인이나 집단의 죄에 대한 실제적인 책임보다는 중재자로서의 그리스도적 사명으로 설명가능하다. 죄에 대한 자각이 있고 인간의 죄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그 대가를 치렀다는 사실을 아는 그리스도인이 인간계의 대표자로서 죄의 용서를 간구하는 것이다.

 

둘째로, 죄는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금한 것을 하는 의도적인 악행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응당 해야할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도 포함한다. 이웃에 대한 따뜻한 말 한마디 한번의 관심조차도 때를 놓지면 책임을 다하지 못한 셈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사소한 작은 일들을 간과할 때 그것이 죄로 쌓이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주님께로부터 책망받을 것이다.

 

너희에게는 사랑해야 할 책임이 주어졌다. 설령 사랑해야 할 책임이 있는 줄 몰랐다고 할지 모르나, 너희는 마땅히 그 책임을 인식했어야만 했다. 도움을 베푸는 손에서 사랑이 나오는 게 아니라, 무엇보다 먼저 깨어 있는 너희의 눈빛에서 사랑이 나오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으로 깨어 있는 눈빛을 찾고 있다.”

 

틸리케는 사랑을 찾기 어려운 절박한 시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근원으로 한 인간애를 호소한다. 타인의 어려움과 슬픔에 무덤덤해진 상황에 경종을 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회복할 것을 주문한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기 어려울 수 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와 본성에 대한 이해심을 동시에 드러낸다. 인간이 고통에 적응하고 스스로 무감각해지는 현상에 대한 설명이 바로 그것이다. “새로 부상을 입지 않으려고 우리는 단단히 갑옷을 갖춰 입습니다. 그 갑옷은 우리 몸에 달라붙어 우리와 하나가 됩니다.”

 

단 하나의 해결책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는 것이다. 그는 높은 곳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이땅의 낮은 곳에 버림받고 소외된 사람들의 슬픔에, 병들고 가난한 자들의 고통에 찾아오신다. 이러한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무감각의 담을 치고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킴으로서 타인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는 길이다.

우리는 그 모든 고통에 등을 돌린 채, 짧은 시간 내에 그것을 잊어버릴 방도만 궁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도리어 불행이 맹위를 떨치는 바로 그때에 주님이 당하신 고난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가난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것은 곧 모든 가난한 이를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형제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관심을 갖고 적절한 사랑을 베풀 수 있다. 그분이 인간의 고통에 참여했듯, 그리스도인이 이제는 작은 예수로서 형제의 고통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7)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틸리케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가 왜 1인칭인 우리의 죄에 대하여서만 간구하고 있는지에 대한 답변을 준다. 본 구절에 관한 두 번 째 설교에서 그는 세상의 악과 고통이 엄연히 타인에 의해 초래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죄를 바로 자기 자신에게 귀책해야 함을 역설한다. 죄의 집합 속에 포함된 의 죄를 직시하고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동시에 누군가가 실행에 옮겨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죄는, 어찌보면 의 마음 속에 있는 각종 더러운 욕망과 감정들이 현실화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타인을 비난할 자격은 없는 셈이다.

 

그분이 세계를 부둥켜안은 이 기도를 말씀하실 때, 이 기도는 곧 여러분과 나의 마음임을 말씀한 것이요, 그분이 세계이 구원과 심판을 우리가 그분과 맺어야 할 지극히 인격적인 관계에 붙들어 매셨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간구를 통해 우리 내면을 향해 돌진해 오는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는 말씀을 반복하고 계신 것입니다.”

 

틸리케는 이러한 성숙함을 지니지 못하고 죄와 책임을 전가하며 타인을 비난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질 경우 일어나는 비극에 대해 암시한다. “그들이 나를 괴롭히고 모해하면, 내 마음은 어두워집니다. 우리는 다만 어떻게 해서 악의 불꽃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미친 것 같은 속도로 번져 가는지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죄를 말하기 전에 언제나 자기 자신의 죄를 먼저 고백해야한다. 모든 죄와 죄의 해결의 시발점은 바로 이다. “용서해야만 하는 이는 바로 이며, 그렇게 세상을 치료하기 시작해야 할 사람이다.

 

틸리케는 소돔과 고모라 같은 세상에 단 두 명의 의인의 역할을 할 기독교인이 되자고 호소한다. 그것은 기도로서 온 세계를 살리고 세상을 떠받치는 중보자의 역할이다. 기도를 통해 모든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로 깊이 들어가 모든 이들을 대표하여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간구해야 하는 것이다.

 

틸리케의 이러한 가르침은 폭력과 착취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겨냥해 선포되었다. 어느 개인이나 집단에게 복수심과 증오를 품고 가해자-피해자 논리에 빠져들어 한없이 불행해지는 상황에 저항하여 용서와 포용으로 승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 영성에 대한 주장은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이 없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에 거대한 권력에 의해 희생되는 과정에서 성경적인 대응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실제적인 차원에서 전후 처리의 과정은 개인 영성과는 별도의 원칙에 따라 움직인다. 전범은 체포되고 처형되어 철저히 책임소재가 가려지고, 전쟁 피해자는 금전적으로 보상받는다. 그러한 사회적인 현상과 개인 영성의 논리는 어떤 면에서는 서로 모순되되, 자연스럽게 모순되어 그리스도인 역시 개인 영성과 정치 분야의 논리가 다른 사실에 대하여 큰 의미를 찾지 않는다. 현대의, 특히 한국의 그리스도인은 과연 정치사회적 차원에서도 적에게 관대하며 정치사회적 대립 상황에서 자신의 죄를 먼저 발견할 수 있는가?

 

틸리케는 이러한 간구의 결과로 일어나는 위대한 변화를 언급한다. 죄로 인해 갈라진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가 해소되고 갈라져 있던 것이 하나로 묶어지는 사랑의 역사가 일어난다. 인간은 하나님의 용서를 얻는다. 이뿐이 아니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간구 다음에는 행동이 일어난다. 틸리케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내면생활이라는 게토안에 갇혀 있지 않아야 한다. 이웃에게 실제로 용서와 사랑을 보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들을 되돌려야 하는 것이다.

 

언뜻 보면 틸리케의 주기도문 설교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화제에서 빗겨가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틸리케가 가끔 언급하는 그리스도는 하나님과의 인간을 중재하는 통로로서 전통적인 그리스도관에 입각해 있다. , 그분은 인간의 죄를 대신 지고 그 값을 치르셨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이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열어 인간이 하나님 나라를 접할 수 있도록 한 분이다. 이렇듯 틸리케는 루터-복음주의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기독관에 충실하며 그 본연을 잊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이 주기도문 설교에서 가장 크게 부각 되는 예수의 역할은 인간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르치시는 선생님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기도문을 가르치시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어떠해야하는지를 알려주셨다.예수께서는 결코 우리를 이렇게 가르치고 계시지 않습니다. 대신 그분은 우리에게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간구하도록 가르치십니다.” 틸리케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종종 인용하여 주기도문의 구절을 해석하기도 한다.

 

또한 예수는 가르칠 뿐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모범을 보였다. 그분은 인간 세상에 들어오시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어떻게 영위하는지 에 대해 모델을 제공하였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정립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장자가 되고 인간들의 형님이 되어 이끈다.

 

예수는 또한 타인과의 관계의 모범이자 근원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가 낮은 곳, 약한 자들에게 찾아와서 그들에게 사랑을 베푼 그리스도의 삶처럼, 그리스도인들 역시 타인에 대한 사랑에서 깨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타인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베푸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탄탄한 관계가 있어야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도 예수를 따라 버림받은 형제가 악한 형제 또는 방황하거나 정신병에 시달리거나 가치가 없는형제마저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8)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마귀의 시험은 인류가 역사 가운데 직면해온 잘못된 선택 가운데에서도 등장한다. 이를테면 독일 기독교가 나치에 협력함으로써 나치의 잘못된 이상에 동조하게 된 틸리케 당시의 상황이다. 독일의 이상이라는 거창한 구호에 선동되어 그들은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옳다고 믿으며 나치를 지원하였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일은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성과만 좋으면 된다는 성과숭배는 대개 우상숭배의 특유한 모습이다.”라고 적절하게 지적한 틸리케의 영성이다. 하나님이 없이 이룩한 인간들의 사회적 성과는 일시적으로 인기를 끌고 인간을 영웅시하거나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을 수도 있다. 처음에 독일 나치가 그랬다. 그러나 점점 나치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나치의 광기어린 노선을 방조해온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스스로의 선택에 좌절하고 그 선택이 초래한 현실에 환멸감을 느끼며 그들은 악으로 가득 찬 세상 속에 버려진 채 하루하루 살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동시에 독일 기독교는 나치정권 하에서 과거의 영광과 부요와 신앙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독일 기독교가 빠진 절망적인 상황에서 틸리케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한다. 하나님은 왕겨와 밀알을 갈라내듯 극심한 시련을 통해 거룩한 남은 자를 나타내 보이시고 그들로 하여금 교회를 책임지도록 하신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아야 한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 등장합니다. ‘위험투성이며 시험거리로 가득 찬 이 삶을 우리가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 야고보서 말씀을 빌려 표현하자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시험을 이겨내고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복된 삶을 살 수 있는가?”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질문을 생각할 때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기도하셨던 내용(17)에 대해 주목하는 것입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이 기도 속에는 삶의 위험이 여전히 우리를 에워싸고 있으며 우리가 이 위험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의 백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라고 간구하도록 하십니다.

 

(9) “우리를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시험의 이면에는 시험하는 자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거짓말의 이면에는 거짓말쟁이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죽음과 피흘림의 이면에는 애초부터 그 살인자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좋든 싫든 우리가 시험하는 자, 곧 마귀와 사움을 야만 하는 그곳은 우리 삶에서 가장 위험한 곳입니다. 예수께서도 그곳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 우리 옆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가르치는 간구 속에서 또한 교회가 사회 속에서 잘못된 영향력을 행사했던 부분을 드러내고 자성하도록 촉구하고 계신 것이다. 이는 순전한 복음의 선포로 회귀하도록 하는 경고이기도 하다. “갇힌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보게 될 것을, 죄의 짐에 눌린 자에게 골고다의 십자가가 준비되어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 교회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이유 없이 예수의 교회를 12년이나 고난 가운데 두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그 고난을 통해 복의 길로 교회를 인도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면서 권력과 명예를 얻는 동시에 쉽게 사역의 목표를 이루는 길을 포기하셨다는 사실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분이 권력을 부리면 지극히 작은 압력만으로도 자녀들이 아버지께 돌아오도록 만들 수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 복음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길을 선택하신 것이다.

 

인간적인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이름과 그 나라의 최선을 다하기 위한 선택들이 현실 가운데서 때로는 부당한 대접을 받는 경우도 있으며, 육신의 곤고함과 궁핍함도 각오해야 하는 상황도 만들어 내곤 한다. 여기서 틸리케의 설교는 나치 치하의 독일교회 뿐 아니라 다양한 나라, 다양한 시대의 교회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하나님께 더욱 봉사하겠다는 열심을 가장하고 횡포를 부리는 기독교인들, 또한 자신의 권력과 부, 명예를 위해 하나님의 종이라는 탈을 쓰는 사역자들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다.

 

교회 앞에는 위대한 약속들과 무시무시한 시험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교회가 권력을 쥔 자들의 영광을 흘낏흘낏 훔쳐보면서 그 영광을 좇아가는 추종자가 되지 않기를 나는 기도합니다...나아가 교회는 심판을 설교해야 합니다. 교회가 증오와 복수가 판치는 이 세상 어디에서나 진정 사랑받는 위로의 기념비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런 세상을 구원하고자 도무지 이해할 수없는 방식으로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10)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침내 틸리케의 주기도문 설교는 마지막 구절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을 다룬다. 앞서 나온 모든 간구에 근거가 되는 말이 바로 이 말이다. 이 말은 모든 간구의 결론으로서 아버지께 모든 영광을 돌리면서 기도를 마무리하게 한다. “대개라는 단어에는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이유를 밝혀주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원어적인 의미는 왜냐하면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구절의 전체 원문을 그대로 번역해보면, “왜냐하면 그 나라와 그 권세와 그 영광이 영원히 당시의 것이기 때문입니다이다. 모든 것은 창조주이신 그분의 소유이고 우리 피조물의 소유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에게서 빌려서 살아야 하고, 그러므로 언제나 간구해야 한다. 이것이 기도의 당위성이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일깨우시고자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요컨대,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보는 시각에 따라 좌우됩니다. , 보는 사람이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 무엇을 볼 수도 있고,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올바른 장소에 서 있다면 어린 아이나 미련한 자나 이 세상에서 경멸당하는 자라도 하나님 나라의 엄청난 비밀을 보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에 담긴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및 인간사의 모든 것을 두루두루 살펴본 결과, 오직 하나님께 모든 것을 올려드리고 맡겨드리는 것만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이고 또한 응당 그래야 한다는 것을 저절로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는 주기도문의 마지막 구절이 그리스도인에게 잘못된 판단을 하게 만드는 것을 경계한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모두 가진 아버지이신지라,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수 있다는 생각은 바르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분에 넘치는 사랑과 은혜에 감동하여 그분께만 찬미와 감사를 드리게 되면서 최종결론으로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는 점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분 높은 왕자로서 이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한없이 비천하게 낮은 곳으로 오셔서 그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시고 그 주변의 약하고 가난한 자들 사이에 그 나라를 심으셨다. 그리고 거창한 지식과 논리가 없는 그들이 그분의 삶을 보고 새로운 나라가 시작됨을 목도하였으며 그 나라가 바로 영원과 이어져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그 바깥에서는 알 수 없다. 그 나라 안으로 들어가야만, 예수 안에서만 깨달을 수 있는 나라이다. 그렇기에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반복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분은 이 세상의 지혜자와 권세자들에게 숨겨져 있는 그 비밀이 그분 안에 있는 미천한 자들에게는 분명히 드러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틸리케는 이러한 하나님 나라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 설교한다. 비록 하나님 나라를 알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법을 알지라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오랜 시간에 걸쳐 연마하고 그분을 체험하는 일을 게을리지 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분 안에 있는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한 소망을 바라보며 인내해야 한다. 그리할 적에 저절로 울려나오는 감사와 찬미로 하루하루 살아가야 한다.

 

평가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대면하고 그분께 간구하면서 마침내 그분께 모든 영광과 감사를 돌려드리는 영원한 대화이다. 또한 일상의 사소한 것부터 어두운 죄까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부터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까지,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대로 농축되어 있는 한편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주기도문 설교를 정독하면서, 독자는 이 작품에 녹아있는 기독교 신학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에 대해 의문을 가질지도 모른다. 언뜻 보면 틸리케의 주기도문 설교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화제에서 빗겨가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틸리케가 가끔 언급하는 그리스도는 하나님과의 인간을 중재하는 통로로서 전통적인 그리스도관에 입각해 있다. , 그분은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시고 인간들의 죄 값을 치르셨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열어 인간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신 분이다. 이렇듯 틸리케는 루터-복음주의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기독관에 충실하며 그 본연을 잊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의 이 주기도문 설교에서 가장 크게 부각 되는 예수의 역할은 인간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르치시는 선생님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기도문을 가르치시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어떠해야하는지를 알려주셨다.예수께서는 결코 우리를 이렇게 가르치고 계시지 않습니다.... 대신 그분은 우리에게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간구하도록 가르치십니다.” 틸리케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종종 인용하여 주기도문의 구절을 해석하기도 한다.

 

또한 예수는 가르칠 뿐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모범을 보였다. 그분은 인간 세상에 들어오시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어떻게 영위하는지에 대해 모델을 제공하셨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정립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장자가 되고 인간들의 형님이 되어 이끄신다.

 

예수는 또한 타인과의 관계의 모범이자 근원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가 낮은 곳, 약한 자들에게 찾아와서 그들에게 사랑을 베푼 그리스도의 삶처럼, 그리스도인들 역시 타인에 대한 사랑에서 깨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타인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베푸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탄탄한 관계가 있어야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도 예수를 따라 버림받은 형제나 악한 형제 또는 방황하거나 정신병에 시달리거나 가치가 없는형제마저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틸리케 신학의 독특한 면모와도 맞닿아 있다. 그의 신학은 성서에 기반을 둔 정통 개신교의 엑기스를 따라가면서 관계 지향적, 개인적, 실천적인 면에 강한 관심을 둔다. 교리나 전통보다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받아서 살아내는 쪽에 큰 비중을 둔다.

 

또한 그의 설교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련에 대한 현대 서구 기독교의 대응을 보여준다. 다양한 대응 방법 속에 그가 취한 노선은 온건한 비판과 용서를 결합한 것이었고, 이는 당시의 평범한 독일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호소력 있게 다가갈 만한 노선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의 설교는 정치체제와 국가적 선택에 대한 이슈에서부터, 물자결핍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세라는 개인적 이슈에 이르기까지 그 현장에서 있었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품을만한 의문에 대해 성경적 해답을 던져주고 있다. 그가 선택하는 표현과 예시에는 그 현장을 함께하면서 신앙과 삶을 조화시키고자 애썼던 한 설교자의 치열한 고민이 엿보인다.

 

모든 사람이 이 시대를 가리켜 미래도 안 보이고 소망도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알 수 없는 내일에 인생을 바치는 대신 차라리 오늘을 즐기라는 게 이 시대의 모토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틸리케의 주기도문 설교가 독일 나치시대라는 특정 시대와 장소를 뛰어 넘어 보편 교회에 대하여 던져주는 메시지 역시 놀랍도록 통찰력이 있다. 그의 설교는 인간의 깊은 내면을 성찰하고, 그 내면에 호소하며, 이 내면을 인간사 뒤에 도도히 흐르는 하나님의 구원사 섭리에 맞닿게 하고자 하는 일관된 입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적으로 혼란한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우리 자신의 내면에 뿌리 깊이 박혀 자라고 있는 미래의 불안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메시지를 던져 주고 있다.

(숭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