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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후의 과학

heojohn 2020. 3. 9. 01:15

 

 

(1) 17세기 후기

 

17세기에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이 되살아난 것은 프랑스의 철학자 가생디(Pierre Gassendi, 1592-1655)에 의해서였다. 그는 원자의 필연적이며 기계역학적인 운동이 자연의 기본원리라고 인식했다. 그러나 그는 원자의 창조자와 운동의 궁극 원인자를 동일시하면서 신적 존재를 부정하지는 아니하였다. 1665년에 프란체스코 레디(Francesco Redi, 1626-1697)썩은 고기에서 구더기가 자연발생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를 반박하는 실험을 했다. 그는 두 가지 실험을 실시하고 그 결과를 비교하여 결론을 내렸다. 그는 두 개의 병에 죽은 물고기를 넣고, 한쪽 병은 뚜껑을 덮지 않고, 한쪽 병은 머슬린으로 덮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그대로 며칠 방치해두면, 뚜껑을 덮지 않은 병 쪽에는 구더기가 발생했으나, 머슬린을 덮은 병에는 파리가 알을 까지 못했으므로 구더기가 발생하지 않았다. 이 실험으로 레디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적 자연발생론은 부정할 수 있었으나, 살아 있는 생명체에 기생하는 기생충은 자연발생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반증하지 못했다.

그러나 레벤후크(Antonie van Leeuwenhoek, 1632-1723)가 현미경을 발명하자 많은 미생물이 관찰되면서 레디의 실험은 반론되었다. 현미경으로 많은 미생물이 새로 관찰되었지만, 미생물의 발생 원인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전적 자연발생론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부터 자연발생론은 육안보다는 현미경에 의한 관찰 자료를 근거로 과학적으로 새롭게 논의되어야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의 고전적 자연발생설의 범주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과학이란 성능이 그다지 좋지 않은 현미경으로 관찰한 자료를 근거로 때로는 귀납적으로 때로는 추론으로 이론을 꿰맞추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뉴턴(Newton, 1643-1727)프린키피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1687)에서 우주는 수학적 자연법칙에 의해 운행하는 기계와 같다고 설명함으로써 기계철학이 강화되었다. 뉴턴의 과학에 의해서 일상사에 개입하는 인격적 신의 역할은 더욱 축소되었다.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를 연구하고자 했던 뉴턴의 의도와는 달리, 그의 과학적 견해는 기계적 유물론에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독일에서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는 단자론을 새롭게 제안하였다. 기독교도였던 그의 단자(monad) 개념은 이제까지의 물활론적인 자연발생설 개념을 넘어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게 우주에 충만한 원자 또는 극미(極微)의 원형체(原形体) 같은 것이 자연의 순환적 조건에 따라 우주에 변화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은 동양사상과 같은 것이다. 실제로 그는 동양의 이신론적 역경(易經)에 심취해서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2) 18세기의 철학과 실증주의

 

18세기에 들어 라이프니츠의 단자론적 자연발생론은 프랑스에서 뷔퐁(G. L. Buffon, 1707-1788)과 영국에서 로마가톨릭 사제 니덤(Needham, 1718-1781)에 의하여 약간씩 수정되어서 계승되었다. 그러나 레디의 실험 이후 100년 뒤인 1765년에 고전적 자연발생설을 부정하는 실험이 이탈리아의 동물학자 라자로 스팔란차니(Lazzaro Spallanzani, 1729-1799)에 의해 시행되었다. 그는 유기물 용액을 가열한 뒤에 공기에 접촉시키지 않고 밀폐된 용기에 보관하면, 그 용액에서는 미생물이 자연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실험으로 증명했다. 그는 공기에 있던 미생물이 유기물 용액에 접촉하는 순간에 용액 안으로 침투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실험에 대해 고대 자연발생론 지지자들은, 스팔란차니가 유기물 용액을 너무 강하게 가열해서 생명력을 사라지게 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밀폐된 용기 안으로 산소가 공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미생물이 자연발생했다가 사멸했다고 반론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도 생명 발생의 원인은 형이상학적인 것에도, 형이하학적인 것에도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이 논쟁을 거들었다.

18세기가 끝나는 무렵에 다윈의 할아버지 에라스무스 다윈(Erasmus Darwin, 1731-1802)동물계보 또는 생물의 법칙, Zoonomia or the Laws of Organic Life(1794-96)에서, ‘부모 없이 태어난 생물은 환경에 적응하면서 합목적적으로 변화해 나간다는 자연발생론적 진화 개념을 진술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다음 세기에 라마르크(Jean Baptiste Pierre Antonie Lamarck, 1744-1829)에 의해 후천적 획득형질 유전설에 비슷하게 반영되었다. 이렇게 자연발생론에 대한 찬반 양 진영에서 실험과 논쟁이 계속되면서 자연발생론은 19세기로 넘어가서도 생명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고전적 철학 수준에서가 아니라, 보다 엄밀한 과학적인 수준에서 논의하는 것으로 변하게 되었다. 베이컨이 창시한 귀납적 방법은 이렇게 과학주의로의 전환을 가져오면서 결국 과학이 사상적 패러다임 전쟁에서 주도권을 잡는 계기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