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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극론과 창세기 1장1-2절의 해석

heojohn 2009. 6. 20. 22:22

-창조론과 신태극론의 융합을 위한 시도-------------------------------------------------

 

목 차

 

1장 서 론 -------------------------- 2

 

2장 신태극론 ------------------------- 4

2.1 태극의 소개 ------------- 4

2.2 태극론의 개념 ------------- 5

2.3 역의 영향 ------------- 5

2.4 신태극론 ------------- 7

2.4.1 신태극에서의 생명 ------- 7

2.4.2 신태극론 ------- 8

2.4.3 신태극론의 유용성 ------- 9

 

3장 창세기 1:1-2절의 신태극론적 해석------------------------ 10

3.1 태초 ------------ 10

3.2 하나님 ------------ 11

3.2.1 전통적인 이해 ------ 11

3.2.2 재래적 태극론 및 신관의 오류와 수정 ------ 11

3.2.3 신태극론에서의 하나님 ------ 12

3.3 천지 ------------ 13

3.4 창조 ------------ 14

3.5 흑암 ------------ 15

3.6 하나님의 영 ------------ 18

3.7 운행 ------------ 18

3.8 ‘깊음(테홈)위에수면(하마임)위에’ ------------ 20

 

 

1장 서 론

 

이 논문은 창세기 원역사(原歷史) 부분을 좀 더 명료하게 의미를 드러내도록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을 시도하려는 것이다. 원역사는 과학적 사고를 하는 현대인은 물론 일부 신학자들로부터도 신화로 취급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근간이 되는 창조론의 핵심내용이 모두 담겨 있어서 진화론자들과의 논쟁이 끝없이 이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나아가서 창조론자들 사이에서도 해석이 엇갈리고 있는 부분이 있다. 이제까지 수많은 해석이 있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견해차이가 많이 있고, 애매모호한 주제어들이 남아 있다. 때로는 이해를 돕고자 하는 해석들이 오히려 의미를 더욱 난해하게 만들기도 했다. 과학적인 사고를 하는 현대인들이 던지는 도전적 질문에 대해서, 기독교 교회는 신앙은 과학과 다르다는 말로 회피하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가 500년이나 된 루터와 칼빈으로 대표되는 개혁주의 신학 사상을 답습하기만 하고, 시대의 발전에 뒤처졌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뒤떨어진 상태에서 현대 사회인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을 것인가?

그런데 눈을 돌려 우리 동양인들의 고유한 선이해(先理解)(1) 속에서 성경을 보면, 새롭게 이해하는 길이 열려 있다. 그것은 동양사상의 관점에서 서양사상의 바탕이 되는 성경을 해석하는 길이다. 동양사상은 역()의 사상이다. 역은 태극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을 해설한 책으로서 역경(易經)이 있다. 그러니까 태극이란 동양사상의 원류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주제어들을 동양사상적으로 접근하면, 성서가 역사적인 하나님의 사건으로 훨씬 명료하게 드러나 보인다. 다시 말하자면, 성서의 사건들이 육하원칙(六何原則)에 따라 구체적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시도가 어쩌면 혼합주의라고 비판받을 것이 우려되기도 하나, 방법론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므로 결코 혼합주의의 의도가 아니라는 점을 밝혀둔다. 오히려 종교 비교론적으로 나아가면서 인격적 유일신 종교, 곧 기독교의 우위성을 증명하는 방법이 되리라고 본다. 이 점에서 트렘퍼 롱맨 III(Tremper Longman III)(2)의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자주 무시되는 단순한 진리는 최고의 성경 해석자는 성경뿐만 아니라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넓게는 세상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지식이 없다면, 본문이라는 고대 세계와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세계를 잇는 다리를 놓는 게 불가능하다. 이러한 다리 놓기가 없다면 해석의 과제는 완수된 게 아니다(3).

 

다시 말하자면, 서구에서 발전한 기독교 신학사상에서 더 나아가고자 하는 방법은 꼭 서구적인 것을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성경이 기록된 중동은 오리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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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re-understanding: 해석자와 저자의 시공간적 간격을 극복하고 텍스트를 해석할 수 있는 것은, 해석자가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에서 형성된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이해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가다머의 해석학적 용어

2) 미국 캘리포니아 주 산타 바바라 소재 Western College 성경학부 석좌교수. 저서에는 [어떻게 시편을 읽을 것인가?], [어떻 게 잠언을 읽을 것인가?](이상 IVP), [문학적 성경해석](솔로몬)등이 있고, [최신 구약개론](다이제스트)을 공동집필했다.

3) Tremper Longman III. [How to Read Genesis], (전영우. “창세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서울. IVP. 2006.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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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이고, 저자들은 동양인에 속한다는 점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나아가서 이제 루터와 칼빈의 개혁신학에 대해 낡고 찌든 부위를 닦아내고,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하여, 신학의 근본이 되는 성경을 재해석하는 방법을 찾고자 하는 것도 이 논문의 목적의 하나이다. 그 방법은 동양사상을 바탕으로 새롭게 과학적이고 현대적인 안목으로 해석의 문을 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서구보다 더 오랜 역사적 전통과 서구에 뒤지지 않는 과학적 지식의 선이해를 이미 가지고 있는 현대의 동양인들은 더 이상 서구에 추종적일 수 없다. 동양 기독교인들로서는 서구적 성경해석에 이질감을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거부감을 느끼기도 한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것을 믿음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목회자들의 주장과 권위에 눌려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서구신학 추종적인 주장의 권위가 이제는 한계점에 이르지 않았나 하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우리나라 청소년층에서 기독교를 비과학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종교라고 매도하고 떠나는 것이 그것을 반증한다. 그러므로 동양적인 사고에서 출발하여 새롭게 논리적인 성경해석을 시도하는 것이 기독교의 이해와 확장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시도하는 태극론적 성경해석이 동양사상과 기독교에, 가다머(Hans-Georg Gadamer) (4)가 말하는 새로운 지평의 융합(5)을 일으키는 기폭제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논문에서 제기하는 신태극론은 동양사상의 맥락(Context)에서 기독교의 창조론을 연구하는 동안 발견한 태극의 새로운 이해이며, 아직 미발표 상태이다. 그러므로 신태극론에 대해서는 성경 주제어를 해석하면서 그때마다 관련된 부분을 소개하겠다. 여기서는 우선 재래적 태극론과 신태극론을 간략하게 비교 소개하고, 신태극론적 관점에서 창세기 11-2절만 우선 해석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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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다머(1900-2002): 독일 철학자, 그의 [진리와 방법]20세기 최고의 해석학 이론서로 꼽힌다.

5) 저자와 해석자가 시공간의 거리를 극복하고 텍스트의 지평에서 만나 서로의 이해가 융합을 일으킨다는 해석학적 용어이다. Kevin J. Vanhoozer. [Is There a Meaning in This Text?]. (김재영, [이 텍스트에 의미가 있는가? 서울, 기독 학생회출판 부. 2008]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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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태극론

 

2.1 태극론의 소개

 

동양인들은 누구나 역경(易經)이라는 책과 음양오행론(陰陽五行論)을 응용한 점술에 대해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 바탕이 되는 태극론을 초보적으로는 이해하고 있다고 본다. 특히 한국인들에게 태극은 매우 친숙한 개념이다. 우리나라 국기인 태극기의 형상이 태극에 바탕을 두고 그린 것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태극론은 사실적으로 동양철학의 원류이고 동양의 우주론이며, 동양인의 세계관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이를 해설한 경전은 중국 최고의 고전으로 치는 사서삼경(四書三經)(1)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경전이다. 우리나라의 천부경(2)의 내용은 그보다 더 오래된 태극을 설명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태극론의 원류는 고대 한민족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는 일부 학자들의 일리 있는 주장도 없지 않다.

태극론에는 우주가 무극(無極)에서 시작되었다는 견해와 태극(太極)에서 시작되었다는 견해로 나누어 있다. 여기서 무극은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다.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아주 큰 것 까지 어디에도 아무 것도 없다. 무극은 영()이다. 그러나 태극론에서 보면, 태극은 일(, 하나)이므로 1에서 시작된 것으로 본다. 무극 개념은 나중에 잘못되었다는 비판을 받고, 태극과 같다(無極而太極))는 수정된 주장이 나왔다. 왜냐하면 영()으로서는 존재를 나타낼 수가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역경에서 괘상(卦象)은 약 5,000년 전에 중국의 전설적인 삼황오제(3) 중에서 복희 황제가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그때는 8괘뿐이었다. 복희를 동이족으로 보는 역사서도 많다. 괘상은 음(--)과 양()을 각각 기호로 나타내고, 그것을 이진법으로 합성하여 역의 현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디지털 과학 시대를 가능케 한 컴퓨터 이론이 2진법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면, 얼마나 뛰어난 이론임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주()나라 문왕(文王)은 복희 8괘를 64괘로 확장하면서 괘사전을 붙여 해석했다. 이것이 주역(周易) 원전이다. 은나라 말 서백의 제후였던 주 문왕(4)은 서이족이라고도 한다. 그는 아들 무왕이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건국하기 전에 죽었으나, 아들에 의해 왕으로 추서되었다. 그들은 은나라의 폭군 주를 멸하고, 주나라 건국의 당위성을 주역의 논리로 설명했다고 한다. 역경은 주역의 원전을 공자가 해설하면서 붙인 계사전을 포함하는 책을 말한다. 공자(5)에 대해서도 어떤 학자는 동이족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중국에서 최고의 경전으로 대우받고 있는 역경의 저자는 주류 중국인으로 자부하는 한족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공자는 한반도와 서해를 사이에 두고 있는 산동성 태산 밑에 있는 곡부가 고향이다. 그러나 이제는 역경이 중국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최고의 고전으로 대접받고 있으므로 모든 동양인의 정신적 자산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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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서: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 삼경: 역경(易經), 시경(詩經), 서경(書經)

2) 천부경: 고조선 단군왕검이 우주의 비밀과 홍익인간의 이념을 가르친 것을 신지 혁덕에게 녹도문으로 기록케 한 것인데, 신라 최치원이 고비(古碑)에서 발견하여 한문 81자로 적은 것이 전해옴. 대종교 등 민족종교 진영에서 경전으로 활용하고 있음.

3) [십팔사략]: 중국 고대의 전설적인 삼황; 태호 복희, 염제 신농, 치우 황제가 있고, 오제는 소호, 전욱, 제곡, 제요, 제순이다.

4) 주 문왕: BC 11세기 말 은나라 말 서백후로 이름은 창이다. 은의 마지막 왕인 폭군 주에 의해서 감옥에 있을 때, 괘사전을 썼다고 한다. 감옥에 있을 때에도 주역을 잘 활용하여 아들 무가 하여금 은나라를 물리치고 주나라를 세우게 했다고 한다. 중 국 역사에서 주나라 시대부터 패권이 서쪽 지역으로 넘어 갔다.

5) 공자: BC 551-479, 중국 주 나라 말기 춘추전국 시대 노국(지금의 산동성 지방) 사람으로 주역에 해설을 붙인 계사전을 썼 다. 인의(仁義)를 강조한 그의 가르침은 유학 또는 유교의 바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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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태극론의 개념

 

그렇다면 태극은 어떻게 모든 우주를 설명하는가? 태극이란 단순히 하나를 뜻하는가? 아니다. 태극에서 일의 개념뜻하는가아니다. 아이 내포되어 있는 하나인 것이다. 태극에서 음니다.뜻하땅과 하늘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태극은 하나의 원 안에 음니다.이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형상화된다. 원은 하늘니다땅을 포함하는 하나의 우주를 하는낸다. 우리나라 태극기가 하는가는 형상이다. 태극론니다다.의 형상에 대해서는 국가, 학파, 학자에 따라서 조금씩 견해가 다흴 하나대표적으로 우리나라에서 태극은 수평선에서 해가 뜨기 직전의 하늘니다땅의 형상을 햘는가지만, 중국은 번개가 내리치는 형상이고, 거기에다가 태음에는 양의 씨앗을, 태양에는 음의 씨앗을 넣어 놓고 있양에는 음뜻하는.이 각기 자(-소음, 소양)를 잉태하고 있는 것을 햘는가극에서 므로, 사실상 사상(四象)으로 나가극에전단계인 양의(兩儀)의 개념이다. 태극의 원형을 햘는가자면, 최초의 태음과 태양이 정자와 난자가 수정태극에서처짼국멀리와 꼬리를 서로 맞물고 있는 형상이어야는 것을 햘짰국점에서 있는 우리나라의 태극이 더다.뜻된에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태극은 태초의 역()이 시작하는 곳이다. 역은 음과 양의 생장변화(生長變化)를 뜻하는 개념이다. 역은 움직이는() 것이지 고요하게() 정지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태음은 움직이면서 태양의 기를 흡수하여 자()의 형상과 속성을 가진 새로운 개체인 소음을 낳는다. 또 태음이 자()를 낳고 쇠약해지면, 태양은 태음의 기를 흡수하여 자신의 자()를 낳는다. 이렇게 태극(1)은 양의(兩儀: 2: 태극에서의 태음과 태양이 분리된 상태)-사상(四象: 태양과 태음+첫 분열한 소음과 소양)-팔괘(八卦: , ,, 진 손, 감 간, )-64(: 주역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로 나아가면서, 끝없이 성장과 분열을 반복한다. 이것이 역의 본질이다. 음이 양을 불러들이고, 또 양은 음을 불러들이면서 음양이 결합하면 성장과 탄생이 일어나고 개체수가 늘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역이 뜻하는 생장변화이다. 태극, , 음양 등이 이렇게 활동하는 것을 운행(運行)이라고 한다. 태극기에도 팔괘 가운데 건이감곤’ 4괘를 배치하고, 태극의 운행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과정으로 태극은 운행하면서 성장 발전한다.

우리나라 천부경에서의 역사상(易思想)은 이와 좀 다르다. 천지(天地)의 음양이 역을 통하여 자를 낳는데 이것을 사람이라고 본다. 이른 바 천지인(天地人) 삼태극 개념이다. 여기서는 서구에 소개된 주역을 중심으로 하겠다.

 

2.3 역의 영향

 

역은 끊임없이 운행하면서 기의 변화가 일어나고 구체(具體)를 이룬다. 구체에서 더 나가면, 집단화하고, 조직화하면서, ()하고 쇠()한다. 이에 따라 길흉화복(吉凶禍福)이 생겨

난다. 이것이 노자(6)가 가르치는 도()이다. 동양사상은 이런 변화에 집중하여 사고를 전개시켰다. 이렇게 해서 역은 인간의 운명이 되고 역사가 되었다. 공자가 주역에 계사전을 붙여 해설하고, 2세기쯤 뒤에 추연(鄒衍)(7)이 음양에다 다섯 가지 운행의 법칙을 조합하여 음양 오행론(陰陽五行論)으로 역의 개념을 확대발전시켰다. 추연의 역()은 음양 오행론적으로 성쇠를 반복하면서 질서정연하게 운행(運行)한다고 보고 있다.

복희는 황하에서 나온 용마에 그려져 있는 하도(河圖)를 보고 팔괘를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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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노자: 공자와 같은 시대의 인물, 도교의 창시자. [도덕경]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고, 죽지 않고 신선이 되었다고도 한다.

(7) 추연: BC 340-260, 공자와 같은 지방 출신. 음양에다 오행론을 접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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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역의 원리는 자연을 관찰하여 귀납적으로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역의 사상에서 무위자연(無爲自然)하며 역의 도()를 따르는 도교(道敎), 역을 주관하는 힘을 신으로 섬기면서 점을 치고, 복을 구하는 무속적인 종교들이 파생하게 된다. 그리하여 민간에서는 점을 치는 도구로 역이 성행하였고, 운명론을 믿고 복을 비는 무속을 확산시켰다. 사실상 무속신앙은 점을 쳐서 불확실한 미래를 알고 복을 얻고자 하는 인간이 만들어낸 욕망에서 발전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역의 개념에서 인간을 자연의 일부라고 파악한 노자는 도교의 창시자가 되었다. 도교는 가장 자연주의적이다. 비슷한 시기에 공자는 역에서 천명(天命)사상을 발견하고, 맹자를 거쳐 유학과 유교로 발전하였고, 뒤에는 주자학 또는 성리학 등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조선의 선비들 사이에 이기론(理氣論)(8)을 놓고 당파를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가 무속과 혼합되면서 중국과, 한국, 일본 등지에서 토속적 불교로 변모했다. 이와 같이 동양의 유불선(儒佛仙) 종교의 근원에는 재래적 태극사상인 무속신앙이 혼입되어 있다. 여기에 동양종교가 죽은 사람을 신으로 승격시켜놓고 숭배 대상으로 삼는 특징을 보이고 있는 이유가 있다.

도교에서 보면, 태극의 개념은 자연주의적 이신론(理神論)이고 도의 원천이다. 그런데 인격적인 신, 곧 상제(上帝)가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상제라는 말은 그대로 중국어 성경과 중국 기독교에서도 쓰이고 있다. 상제는 기독교의 창조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연적인 역의 도리(道理)에 따라서 최초로 출생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역의 도리는 상제도 바꿀 수 없다. 인간은 이 도리에 따라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도리를 종교로 믿는 도교(道敎)는 그래서 자연주의자들이다. 도교의 상제는 어디까지나 도리에 따라야 한다. 상제는 창조자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최고 조상으로서 받들어진다. 그러므로 상제는 효()의 차원에서 드리는 제사에서 숭배된다. 중국 성경의 요한복음 첫 부분을 보면 이러한 중국인의 인식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太初有道 道與神同在 道就是神 這道太初與神同在......

그런데 민간에서는 어느새 상제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자로서 등극하고 있었다. 상제의 인격적인 면에 기대를 걸고, 이 상제를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결국 상제의 밑에 온갖 인간사를 다스리는 잡신들의 우상까지 만들어 내었다. 이들과 접신(接神)한다는 굿이나 또는 도통(道通)한다는 식의 주술로서 복을 비는 무속이 생겨나고, 종교적인 차원의 신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태극사상의 발전에 영향을 받은 동양인의 선의식은 그래서 역사적으로 자연주의적인 것이다. 불교가 동양인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같은 자연주의적 우주관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개인의 수행과 깨달음을 얻고자 시작한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무속신앙을 만나서 어느덧 우상을 숭배하고 복을 구하는 혼합종교가 된 것이다. 불교뿐만 아니라 동양의 종교는 이와 비슷한 신앙유형을 가지고 있다.

공자는 주역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읽고 주해를 썼으면서도, 죽기 전에 역의 진리를 다 깨닫지 못해 아쉬워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공자가 그토록 주역에서 찾고자 했던 진리는 결국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서양에서 주역을 [Book of Change]로 번역해놓은 책이 100종류도 넘는다고 한다. 이를 공부한 학자들은 그들의 학문에 역() 이론을 적극 활용했었다. 유명한 몇 사람들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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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이기론: ()는 포괄적 개념이나 음양(陰陽오행(五行)은 좀 더 구체적인 개념으로 사물의 발생과 변화를 설명. ()는 만물 생성의 근원이 되는 정신적 실재로서 기의 존재 근거이며, 동시에 만물에 내재하는 원리로서의 기의 운동 법 칙이 된다. 이와 기는 상호관계로서 서로 떠날 수도 없으며, 서로 섞이지도 않는다'(理氣不相離 理氣不相雜):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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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이프니츠: 독일 철학자, 수학자 (1646-1716) 디지털 이론의 원조로 불리는 그는 이미 17세기에 역경을 보고 이진법(二進法)의 아이디어를 얻었고, 단자론을 주장했다.

2) 독일 철학자 헤겔(1770-1831)은 역의 생장변화 개념에서 그의 역사철학에 변증법을 도입함으로써 마르크스 공산주의 이론에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

3) 저명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1879-1955)도 태극과 역에서 상대성 이론을 발견했고, 에너지와 물질의 관계를 E=mc2로 나타내는 공식을 만들어서 원자탄제조에 기초이론을 제공했다. 그는 뒤에 대통일장 이론을 만들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4) 닐스 보어(덴마크 물리학자, 1885-1962) 는 원자 모델(양성자 +,전자 -)의 개념을 증명하고 양자역학(量子力學)(9)의 개척자가 되었다.

5) 영국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양자역학이 지금까지 해 놓은 것은 동양철학의 기본 개념-음과 양, 태극, 색즉시공 등-을 과학적이라고 증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위에 열거한 사람들을 잘 살펴보면, 서구 물리학과 컴퓨터 공학의 발전에 토대를 마련한 대표적인 과학자들이 망라되어 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이진법인 역경의 음양이론, 즉 태극에서 과학의 기본 개념들을 추출한 흔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서구로 넘어간 태극의 개념이 기독교 창조론을 부정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는 점이다. 서구의 과학자들은 동시에 동양의 자연주의를 받아들여 창조론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셈이다. 동양은 태극을 잘못 이해하면서 무위자연에 사상에 젖어 있다가 문명의 정체를 초래하고, 무신론적 과학주의가 이루어 놓은 서구의 문명에 뒤처져 버렸다. 서양은 창조주 하나님을 잃어버린 꼴이나, 동양은 하나님뿐만 아니라 선진문명의 터전마저 서양에 내준 꼴이 되어버렸다.

이제 우리는 동양사상의 원천인 태극론을 제대로 알고 활용하여 서구사상의 한계를 넘어가는 지렛대로 삼아야 한다. 이제까지는 재래적 태극론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재래적 태극론이라 함은 기독교의 하나님 사상이 포함되지 아니한 기존의 태극론을 말한다.

 

2.4 신태극론(新太極論)

 

2.4.1 신태극에서의 생명

기독교는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이 모든 존재의 창조자이심을 믿는다. 우선, 창조론을 믿는 기독인들이 태극론, 즉 동양사상에서 한 가지 중요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진화론을 부정하는 단서가 있다는 점이다. 최초의 음양이 병존하고 있는 태극에는 원시생명의 개념이 포함되고 있음을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최초의 인간 조상인 상제가 최초의 역이 일어나는 순간에 출생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 개념은 기독교의 전통적 창조론과 일치하지는 않으나, 적어도 무신론 진화론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유효한 반대개념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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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양자역학(量子力學, 영어: quantum mechanics)은 분자, 원자, 전자와 같은 크기가 작은 계()를 연구하는 물리학 분야 이다. 양자역학의 결론들은 당시 과학자(및 일반인)들의 직관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기에, 이 이론이 실재에 대해서 무엇 을 말해주는지에 대해 많은 해석과 철학적 논쟁이 있었다. 양자역학을 개발한 이들 중 한 명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이 이론 의 무작위성을 좋아하지 않았고,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많은 수의 물리학자들은 닐스 보어 등이 개발한 코펜하겐 해석을 받아들이고 있다. 코펜하겐 해석은 보어의 상보성원리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Principle of Uncertainty)를 바탕으로 한다. 그들은 고전역학에서 물리적 대상을 입자나 파동 둘 중 하나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입자이면 서 파동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코펜하겐 해석은 사건에 대한 인간의 관측 활동이 사건의 현실을 변화시킨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코펜하겐 해석에서 핵심은 어떤 물리량의 값이 측정이라는 행위 이전에는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양자역학이라는 이론은 관측자와 대상 모두를 고려해야 한다. 출전: 브리태니커(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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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서구에서 태극의 생명개념을 제대로 이해했더라면, 무신론적 자연주의 과학 및 사회주의 이론에 이용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서구 기독교 신학의 발전이 현재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았으리라고 본다. 그렇게 되지 못했던 이유가 재래적 태극론의 한계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결국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동안 태극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것이 근본이유였다고 할 수 있다.

 

2.4.2 신태극론

동양사상의 가장 중요한 명제는 인간은 소우주(10)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체는 우주와 상호감응(相互感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가 순조롭지 못한 상태가 병이라는 것이, 동양 한의학의 출발점이다.

 

한의학에서 몸 표면의 경혈로 인체를 다루는데, 이는 몸 전체의 뜻이 인체표면에 반영되어 있 다는데 기초하고 있다. 또한 손이나 귀, 발등에도 인체의 축소판인 연관된 구조로 되어 있는 바, 이는 바로 프렉탈을 의미하는 것이다.(11)

 

서양에서도 수학적으로 이와 같은 이해를 가진 프렉탈 구조(12) 이론에서 보면 부분은 전체를 닮고 전체는 부분을 닮아 있다고 한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라이프니츠가 우주는 무수한 단자로 구성되어 있고, 단자에는 완전한 우주구조가 들어 있다는 그의 형이상학적인 단자론(單子論:Monadism)(13)과 연결된다.

여기에서 동서양 사상을 융합의 길로 이끌 수 있는 신태극론에로 나아가는 길이 발견된다. 그것은 태극이 영원한 유무(有無)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 존재와 비존재의 대립적 병존구조이다. 비존재는 무한하고 영원하므로 하나밖에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존재는 하나의 무한 속에 전체인 하나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신태극은 비존재와 존재의 태초의 형상이며, (0+1)의 구조로서 나타나며, 불변하며, 영원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를 형상화한 괰조이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1은 나눌 수 없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1은 존재의 전체이며, 유일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실재이다. 전체로서 태극의 형상은 변하지 않구조. 확장될 뿐이다. 부분은 전체에 포함되어야 하므로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피조물은 하나님(1) 안에 내재될 수밖에 없다. 신태극은 전체이기도 하고 부분이기도 하다. 부분이 전체를 닮아 있는 프렉탈 구조이므로, 하나님이 인간을 닮은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창세기 1:27절의 개연성은 저절로 입증되고 있다. 이것이 신태극론 개념의 핵심이다. 요한복음 14:10-11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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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인간은 소우주라는 말은 서양에서 스토아 학파의 전통적 견해이기도 하다.

11) 김승호 [주역 원론: 사물의 운명. 서울 선영사. 2006] p.342

12) 프렉탈 구조: 임의의 한 부분이 전체의 형태와 닮은 도형. 미국의 수학자 만델브로가 제시한 것으로, 컴퓨터 그래픽 분야에 널리 응용되고 있으며 자연계에서는 구름 모양이나 해안선 따위에서 볼 수 있다.-국어사전.

프랙탈이라는 용어는 '파편의', '부서진'이라는 뜻의 라틴어 fractus에서 유래했는데, 폴란드 태생 수학자 베노이트 B. 만델브 로트가 만들었다. 불규칙적인 세부나 무늬가 점차적으로 더 작은 크기로 반복되고, 순수하게 추상적인 것의 경우 무한히 계 속 반복하여 각 부분의 부분을 확대하면 전체 물체와 근본적으로 같게 된다. 실제로 자기유사체는 크기를 바꾸어도 변하지 않 는다. 즉 크기에 대해 대칭을 이룬다. 자기유사체란 구성 부분이 전체와 닮은 것이다.-출전 [브리테니커]

13) 단자론: 모나드(monad)란 원래가 수학상의 용어로 ‘1’ 또는 단위를 뜻하는 그리스어의 모나스(monas)에서 나온 말이다. 라 이프니츠에 의하면 모든 존재의 기본으로서의 실체는 단순하고 불가분(不可分)한 것이며, 이를 모나드라고 이름지었다. 모나 드는 원자와는 달리 비물질적인 실체로 그 본질적인 작용은 표상(表象)이다. 표상이란 외부의 것이 내부의 것에 포함되는 것으 로, 모나드는 이 작용에 의해 자신의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외부의 다양성에 관계를 가질 수 있다. 모나드에 의해 표상되는 다 양성이란 세계 전체를 말한다. 모나드는 우주의 살아 있는 거울이라고도 하며, ‘소우주(小宇宙)’를 이룬다. 출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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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네가 믿지 않느냐고 물으셨다. 이어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고 같은 말을 두 번씩이나 하심으로 강조했다. 이 말에는 프렉탈 구조 이론과 단자론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또 신태극에서 ‘1이 하나님이시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2.4.3 신태극론의 유용성

재래적 태극의 개념이 태극의 도에 따라 인간이 저절로 출생한 것이라고 보는데 반해, 신태극론(新太極論)은 태극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성립한다. 한다은 기독교 창조론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큰 도움 이론이 될 것으로 본다. 신태극론에서 생명은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유일한 존재로서 최초부터 존재하셨던 하나님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재래적으로는 태극에서 양의로 나가고, 사상으로, 팔괘로, 64괘로 발전해 나가는 역으로 보는데, 신태극론에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프렉탈 구조로 발전한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는 태극(0+1)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재래적 태극과 역의 이론이 서양으로 건너가서 서구과학에 끼친 공로가 적지 않지만, 그로 인해 무신론 자연주의를 확산시킨 점도 없지 않다. 현대 양자역학과 유전자 공학은 재래적 태극론과 기존 과학이론 자체를 부정해야할 단계에 와 있다. 그렇지만 신태극론적 입장에서 살펴보면, 이는 오히려 기계적인 자연과학주의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최종적인 질서라는 것을 입증해주는 길이라고 본다. 기독교와 동양사상 사이에는 인식의 차이를 볼 수 있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평융합의 가능성도 볼 수 있다. 신태극론과 서구신학의 핵융합을 통하여 보편적인 하나의 신학이라는 새로운 지평까지 나아가보기를 시도한다. 그것이 바로 신태극론적으로 성경을 해석하고자 하는 첫째 이유이다. 또한 그것이 개혁신학의 나아갈 길이라고 본다.

 

3장 창세기 1:1-2절의 신태극론적 해석

 

창세기 1:1-2절은 다음과 같이 한글 번역(개역개정판)이 되어 있다.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黑暗)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靈)은 수면(水 面) 위에 운행하시니라.

 

여기에서 여덟 개의 중요한 주제어-태초, 하나님, 천지, 창조, 흑암, 하나님의 영, 운행, ‘깊음위에’와 ‘수면위에’-들을 선택하고, 신태극론적 관점에서 차례로 해석해보고자 한다.

 

3.1 태초

 

이 말의 해석은 그 뒤에 나오는 천지(天地-하늘과 땅)창조를 시작하는 순간의 시점으로 보느냐, 아니면 그 이전부터 그때까지의 긴 시간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느냐 하는 두 가지 관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앞의 것을 채택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태초는 피조물의 창조가 시작된 특정한 시점을 뜻한다. 성경의 역사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그대로 성경을 읽어나가면 된다. 그러나 뒤의 것을 채택하면, 창조 이전때까지의 모든 시간도 태초에 속한다. 그렇게 되면 그때까지 하나님의 존재사건을 모두 검토해야 한다. 해석자는 뒤의 관점을 채택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봉사할 필요가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속성을 보다 많이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창조 이전의 사건이란, 땅에는 그에 관한 증거가 없다. 사실적으로 인간의 역사에는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그때의 사건들은 하나님의 침묵 속에 묻혀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창조 이전의 시간에도 하나님은 존재하셨고, 쉬지 않고 창조의 계획을 세우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창조의 권능을 베푸시기 이전의 시간에는 피조물들은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던 때였다. 오직 존재의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만이 유일한 존재로 계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우리가 상상하는 하늘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창조하시고, 자손들을 생산하시지 않았을까? 성경에서 하나님은 천사들을 부리고 계시는 것으로 보아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천사들은 하나님이 낳은 자손들일까? 아니면 만들어낸 피조물일까? 인간으로서는 이에 대해 오직 신화로서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1) 다만 확실한 것은 하나님 한분만이 창조주로서 창조의 권능을 가지시고,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존재를 창조를 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태초에’ 라는 말 속에는 창조 이전의 시공간뿐만 아니라 모든 차원에서 하나님의 존재론적 상황이 모두 포함되어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성경에서 눈을 돌려서 태극에 대해 살펴보면, 태극은 성경의 ‘태초’와 말은 다르지만 존재론적으로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재래적 태극(1=0.5+0.5)은 외형적으로는 음양이 합친 하나의 형태로 있으나, 태극을 깨고 나온 태음과 태양이 양의(2)로서 각각 새끼(子)를 낳음으로써 사상(四象)으로 발전한다. 그러므로 태극이 양의로 발전하기 전 단계까지를 태초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 태극에서 양의로 발전하는 과정이 애매모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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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졸작 ‘천상신화’ [흑암전설, 서울 한솜 2007] p.84-117. 여기에는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하기 전에 하늘나라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신화적으로 탐구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신화적인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창세 이전의 존재에 대한 신태극론적인 해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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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신태극(1=0+1) 은 영원불변하는 형상이며, 모든 존재를 그 안에 포괄하고 있다. 시간의 개념도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신태극은 태초와 그 전후의 모든 시간을 그 안에 가지고 있다.

 

3.2 하나님

 

3.2.1 전통적인 이해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을 이해함에 있어서는 다양한 신관(神觀)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해석학적으로 말하면 이때까지 한번이라도 하나님을 생각해본 사람들의 숫자만큼이나 많다고 할 수 있다. 태어나서 죽은 사람들까지도 포함해서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선이해(先理解)는 100%까지는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에서는 공통적인 신관을 정립하고 가르쳐야 한다. 공통적인 기독교 신관은 세세한 부분에서는 개별적인 차이를 인정한다 해도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만물의 지배자이심을 믿는 신관이다. 인간이 죄악에 빠져 들어갔을지라도 인간을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시고, 그로 인간의 죄를 대속하게 하시고, 그를 통하여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마침내 그의 나라를 완성하시는 분임을 믿는 신관이다. 이를 벗어나는 신관은 엉뚱한 신을 믿는 잘못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며 그분으로부터 창조되지 아니한 것이 없고, 모든 존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므로, 존재로서 그분보다 완전한 것이 있을 수 없다. 완전함이란 말은 모든 속성들을 포괄하는 말이고, 이 말은 하나님에게만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이 땅에 인간들의 죄악을 보고 창조를 후회하고 진노하셨으나, 사랑 때문에 참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구원의 사역을 펼치고 계시는 분이시다. 짧게 요약하면, ‘존재로서 완전하신 분이시고, 인간에게는 창조주이면서 구원자’라는 말이 될 것이다. 이 말은 신의 속성을 몇 가지로 나누어 보는 전통적인 견해들을 총합하는 말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에도 진화론의 영향으로 무신론자들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기독교를 향하여 맹렬한 공격을 퍼붓고 있다. 진화론 앞에 재래의 신 증명론들은 설득력의 한계를 노출하고 힘을 잃고 말았다. 이들의 전 방위적인 공격에 기독교는 새로운 신관과 신 존재증명을 해보여야만 할 상황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전통적인 신학들에 대한 검토보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면서 나아가고자 한다. 기독교는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시므로 전지전능하시고 그분의 권능으로 다른 모든 존재를 창조하셨다는, 창세기 1장 1절의 믿음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전지전능하신 권능으로 창조와 타락과 구원의 과정에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이해하는 문제가 실로 더 중요한 것이다.

 

3.2.2 재래적 태극론및 신관의 오류와 수정

태극은 음과 양을 내포한 하나(ㅡ)라는 진술은 이미 했다. 그런데 이를 수학적인 개념으로 바꾸어서 다시 한 번 신(神)이해를 논증하겠다. 재래적 태극론에서 무극이 태극보다 선재한다고 주장한 유파의 오류는 영(零)이 일(一)보다 앞에 있는 수학개념으로 보면,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영(零)이 무(無)와 같다는 존재론적 의미를 망각한 주장이다. 무(無)가 어떻게 존재로서 실재(實在)가 될 수 있는가? 논리 자체가 성립되지 않으므로 틀렸던 것이다.

재래적 태극이 단지 1(=0.5+0.5)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개념에서도 오류가 있다. 1에서 양의(2=1음+1양)로 나가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1이 필요한데, 그것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1뿐인데 다른 1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재래적 태극은 성장과 분열을 통하여 증식하는 것으로 본다. 성장과 분열은 생명체 현상이다. 역이 곧 생명체 현상인 것이다. 그런데 생명체가 무에서 어떻게 생존할 수가 있는가? 자력으로는 생존과 분열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태극을 새로운 개념(태극=음0+양1=1=하나님)으로 이해하면,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풀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알다시피 영(0)은 존재론적으로는 무(無)다. 영(0)은 시공간적으로 무한(無限)이다. 1은 하나다. 1은 유한한 실재이다. 1은 0의 무한과 동일한 시공간에 존재한다. 왜냐하면 태극에서 1은 하나님이시고, 영(0)은 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태극에서 1은 성장과 분열이라는 역의 전부를 전체적으로 포괄한다. 그러므로 항상 1이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은 신태극론에서 0은 1과 괄호 안에서 동시적이며 불변적인 상수(常數)(2)(0+1)로서, 또는 상호 대칭적인 존재로서 영원하다는 개념이다. 괄호 안에서 0이 생략되어서는 신태극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즉, 태극은 단순히 1만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0이 실재로서 포함되어야 한다. 0은 괄호 안에서 무한이다. 1은 유한이므로 0의 무한 안에 있다. 하나님의 창조는 태극 안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무(無)를 뜻하는 0은 하나님이 창조하지 하지 않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전통적인 기독교 창조론의 오류도 이것을 오해하는 데서 비롯하고 있다. 영(0=無)은 하나님(1)과 같이 신태극(0+1)에서 영원히 존재하며, 분리 불가능한 상수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3.2.3 신태극론에서의 하나님

태초에 유일하신 존재로서 하나님(實在=1)은 무한(無限) 개념이 표상하는 무(無=0)와 함께 신태극(0+1=1)을 이루고 계신다. 또 신태극에서 역은 음과 양의 자연적이고 기계적인 운행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이 유일한 생명으로서 프렉탈 구조적으로, 단자론적으로, 유기체(有機體)(3)적으로 창조하시는 행위를 뜻한다. 이렇게 유일신 창조론과 신태극의 개념이 지평융합을 일으킨 것이다. 여기에서 태극론과 기독교의 신관, 양측의 재래적 이해개념이 새로 바꿔지는 것이다.

역은 하나님의 원리 또는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동양적인 사고에서 이해하는 말이다. 오직 창조자는 한 분 뿐이시므로, 만물은 그분의 권능으로 만들어질 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그분은 자기의 능력대로, 자기의 뜻대로, 자기의 설계대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만물을 그분의 통제권 아래 두도록 창조하셨다. 만물은 그분의 영역 안에서 하나의 유기체이다. 그러므로 존재의 주권은 그분의 것이다.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이 전지전능한 분으로 나타나는 이유에는 이러한 창조원리 또는 역을 주관하는 자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로서 완전하신 하나님을 태극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이 창조의 권능을 행사하지 않으셨다면, 피조물은 존재하지 못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 안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피조물의 창조를 위해 하나님이 창조권능을 단독으로, 전적으로 사용하셨음을 이해할 수 있다.

둘째, 신태극론에서 보면, 하나님은 최초의 생명적인 존재로서 태극에서 존재하셨고,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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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변하지 아니하는 일정한 값을 가진 수나 양. 특정한 연산이나 논의의 일부로서 일정한 크기를 갖는 수, 값 또 는 대상. 자연에서 관찰되는 양이나 물리학의 이론방정식에 포함되는 양들 중에서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값. 이 상수들의 정확한 측정은 이론의 정당성을 검증하고 이론에 따라 현상들을 예측하는 데 필수적이다.

3) 유기체: 물질이 유기적(有機的)으로 구성되어 생활기능을 가진 된 조직체, 곧 생물체(生物體). 한 목적(目的) 아 래 많은 부분이 통일되어 부분(部分)과 전체(全體)가 필연적(必然的) 관계를 가지게 된 조직체. 국가, 사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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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창조를 시작하셨다. 그분은 지금도 모든 존재를 총체적으로 포괄하시고, 비존재와 상수(0+1)를 이루고 있다. 이는 모든 존재는 근본적으로 하나이며, 연결되어 있는 유기체라는 것이다.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유기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존재들은 부분적인 형태로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의존하는 존재이며, 존재의 총체는 비존재에 대하여 하나의 유기체이다. 하나님은 존재의 총체이시므로 내재적이시며, 동시에 부분에 대해서는 초월적이시다.

셋째, 하나님은 태초에 한 분으로 계셨으며, 직접적인 창조를 통하여 모든 존재들을 그와

연결된 유기체 안에서 만들어 내셨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들-생명이 있는 것들이나 없는 것들이나, 보이는 것들이나 보이지 않는 것들이나-의 위치와 상태와 행위까지도 그분의 권능 아래 예속된 유기체이다.

넷째, 죄악의 문제에 대해서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짐을 의미한다. 죄악의 징벌은 무(0)에로 소멸되는 것, 즉 비존재화(非存在化)(4)이다. 마태복음 10:28절에서 예수는 하나님을 가리켜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이시니 두려워하라고 말한다. 피조물이 창조자를 향해 ‘왜 이렇게 나를 죄악에 빠지게 만들었느냐?’라고 불평할 수 있을까? 죄악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함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죄악의 원인은 태극의 해석을 잘못함에 있었으며, 그 책임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귀속되는 것이다.

 

3.3 천지

 

피조물에게 있어서 존재의 능력은 스스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피조물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창조를 기다려야 했다. 창 1:1절에는 하나님의 창조를 한마디로 압축해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당연히 처음부터 믿어야 하는 말이다. 기독교는 어거스틴의 ‘알기 위해서 믿는다’는 식의 전통적 명제에서 안주하다가, ‘알기 위해서는 믿어야 하지만, 믿기 위해서는 알아야한다’는 중세시대의 도전에는 힘겹게 버텨왔다. 서구 신학자들은 초월에서 내재로, 다시 내재에서 초월로, 오고가면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왔다. 이 난제는 순환론적으로 맴돌 뿐, 풀리지 않고 있다. 현대의 과학적 사고인 ‘믿기 위해서는 알아야 한다’는 논리 앞에 기존의 교리(Dogma)는 무력하게 되었다. 현대인에게는 더 이상 설득력이 없는 말이다. 현대는 믿기 전에 증명을 요구하는 시대이다. 이것이 현대 성서해석학의 앞에 놓인 난제이다. 나는 동양사상에서 이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보고자 하는 뜻에서 신태극론과 창조론의 지평융합을 시도하고 있다.

천지라는 말에는 창세기 기자의 전 우주관이 반영되어 있다. 이 우주에 모든 피조물이 존재하고 있다. 신태극론으로 보면, 태초의 우주가 신태극 안에 있다. 창 1:1-2절을 다시 읽어보자. 창세기 기자는 1: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개괄적으로 기록하고, 이어진 1:2절에서는 천지의 한 부분으로서 인간의 가장 중요한 생활 터전인 땅의 창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창세기 기자의 관심은 땅에 있다. 그러므로 곧장 땅에다 시선을 집중한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창세기 기자는 하나님의 창조 과정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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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우리 현대인들이 불안한 원인은 바로 자신의 존재가 비존재화(非存在化)하는 것에 대한 공포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선도의 칼럼중에서-cafe.daum.net/eastgangnam/5A/7/7. 2009.6.1

철학자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Was ist Metaphysik?〉(1929)에서 "인간 실존은 무의 한가운데 머무르지 않고서는 존재와 관계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이 실존의 뛰어넘을 수 없는 가 능성(그 표지는 죽음)을 이해할 때, '진정한 실존'을 달성한다. 모두 죽음을 넘어서는 비존재의 개념을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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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 그려내고 있다. 창세기 기자가 환상으로 보고 있는 태초의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고 깊은 어둠속에 있는 상태로서, 어떤 형태로도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고 그저 비어있을 뿐이다(formless, without shape, unformed, empty, void, etc.). 땅과 함께 물이 있는 것이 보이고 있다. 아직 하나님의 창조의 말씀이 있기 전이다. 창 1:2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의 말씀이 나오기 전의 상황이다.

 

3.4 창조

 

창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바라’이다. 이 말에 대해서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다는 뜻이라고 모든 주석들이 설명하고, 별다른 이견이 없다. 그러나 창조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혼자 하신 일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3.2항’에서 제기한 악의 기원이 문제가 된다. 악에 대한 논쟁은 많이 있어 왔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절대선(絶對善)의 개념과 충돌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를 부인함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창조권능을 부정하는 것이 되고, 반대로 이를 긍정하면, 하나님의 절대선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는 문제가 남는다. 악은 하나님의 창조인가? 아니면 어디에서 온 것인가?

신태극론의 관점에서 인간들이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의 근본적 원인은, 그분의 창조과정에서 부수적인 필연성에서 부산물처럼 생겨난 것이라고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부분은 전통적인 신학과 배치되는 면이 있다(5)고 오해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전통적 신학이 악의 문제를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악의 문제를 잘 살펴보면, 악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창조 후에 금지의 말씀을 복종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애당초 하나님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셨다는 말은 비존재인 무(無)를 재료로 사용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악의 기원은 여기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창조의 과정에서 의도된 것이 아니라, 부수적인 필연성에서 발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악은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비존재성 존재이다. 여기서 비존재성은 신태극에서 음이 뜻하는 무(無=0)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무(無)는 하나님의 창조권능에 의해서 유(有)로 발현이 가능한 잠재성을 가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무(無)는 어떤 과정으로든지 창조의 재료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無)는 창조물을 비존재적인 상태로 무화(無化)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존재에 대해 악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무화성은 창조물을 해체하고, 소멸로 환원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창조권능을 무력화시키려는 악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창조과정에서 이러한 악의 문제를 알고 계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찍부터 악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는 인간에게 악의 발생 가능성을 경고하셨다. 하나님은 악에 뒤따르는 징벌은 무(無)에로 소멸하는 죽음이라는 점을 경고하시고, 악의 책임을 행위자에게로 돌리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악은 발생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생명의 원천이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복종해야할 마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이루어진다. 피조물은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따라야만 본래의 프렉탈 구조적인 유기체의 모습을 유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 아래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가 본래의 자리를 떠나면 죽을 수밖에 없다. 피조물의 운명적 구조는 이렇게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인간들이 스스로 죄악에 빠져 하나님의 품을 떠났음에도, 하나님이 구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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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전통적인 신학은 죄악의 발생을 천사, 또는 인간의 타락에서 비롯한 것으로 돌린다. (욥기34:10) ‘하나님은 단정코,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단정코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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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보내신 그의 아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창조질서를 새롭게 개정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1장 3절에서는 예수님이 바로 창조자이심을 암시하고 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3.5 흑암

 

3.5.1 구문적 해석

그런데 태초에 창조주 하나님이 창조 작업을 하시는 장소는 어디였을까? 하나의 암시가 되는 표현이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는 부분에 있다. 이 말은 매우 시적인 표현이다. 주의하면, 조금 동떨어진 느낌을 주고 있음에도 대개 그냥 지나쳐 왔던 말이다. 사실 창세기 원역사는 한 편의 장엄한 서사시다. 그런데 이 부분은 잘못 번역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이 말에 대해서 번역과정을 잘 살펴보면, 영어 성경에서 그렇게 시적(詩的)으로 번역한 것을 우리 성경 번역자도 그대로 따라서 번역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1장1-2절의 흐름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1절과 2절은 접속사(Ve=and=그리고, 그러나)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창세기 저자는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하셨다는 개괄적인 명제를 말한 다음, 문장을 끊지 않고 곧장 인간이 살아야 할 땅을 찾아 눈을 돌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히브리 사본 원문과 영문번역문을 비교해 보기로 한다.

위에 있는 것은 국내에 잘 알려진 영어 번역 3종이다. 문제가 발견된 2절만 예시한다.

 

1:2 (NIV) Now the earth was formless and empty, darkness was over the surface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was hovering over the waters

(KJV) And the earth was without form, and void; and darkness was upon the face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 of the waters.

(NASB) The earth was formless and void, and darkness was over the surface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was moving over the surface of the waters.

 

וְהָאָרֶץ, הָיְתָה תֹהוּ וָבֹהוּ, וְחֹשֶׁךְ, עַל-פְּנֵי תְהוֹם; וְרוּחַ אֱלֹהִים, מְרַחֶפֶת עַל-פְּנֵי הַמָּיִם.

[Veha'arets hayetah tohu vavohu vechoshech al-peney tehom veruach Elohim merachefet al-peney hamayim]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黑暗)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靈)은 수면(水面) 운행하시니라.

 

그러니까 2절은 땅을 주어로 하는 전반절과 하나님의 영을 주어로 가지는 후반절로 되어 있다. 여기서 ‘흑암이 깊음 위에’(공동번역: 어둠이 깊은 물위에 뒤덮여 있고)라고 되어 있는데, ‘깊음’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테홈’은 깊고 ‘깊은 바다’나, ‘깊은 지하수’ 등을 의미하며, 전반절에서 장소를 표시하는 전치사(위에) 뒤에 붙어서 부사구로 쓰이고 있다. 그런데 영어 번역에서 formless와 empty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후’와 ‘보후’는 각각 명사인데 접속사(va)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흑암에 해당하는 ‘호세크’는 ‘빛이 없는 어둠’이라는 뜻으로, 이 두개의 명사 뒤에 접속사(ve)로 연결되는 명사이다. 이 말은 창조 첫날에 빛과 어둠을 나눌 때, ‘어둠’으로 쓴 말이기도 하다. 그러면 명사 3개가 똑같이 주어 ‘땅’에 대한 보어가 됨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살펴보아야 할 것은 문장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하는 구두점(;)과 시제다. 구두점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구두점 (;)을 이와 다르게 표시한 사본들도 있다. 여기서는 위에서와 같이 ‘테홈’ 뒤에서 문장을 두 개의 절로 나누고 있는 구두점 표시를 따른다. NIV에서는 ‘Now’를 앞에 붙이고 있는데, 이는 히브리어 문법으로 보면, 1절의 시제는 2절보다 더 과거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또한 창세기 기자가 2절의 시제에서 기록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1절과 2절 사이에는 본래 접속사(KJV는 ‘And’를 앞에 붙였다.)가 있어서 두 절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까지 반영하는 번역이라면, 문맥의 흐름을 고려해서 ‘그러나’를 채택함이 더 좋다. 그렇게 해서 다시 번역해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된다. 우리말 용어들은 이미 오역에 익숙한 우리의 이해에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가능한 그대로 쓴다.

 

1절: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는데,

2절: (그러나) 땅은 깊은 물 위에서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어둠)이며;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고 있었다.

 

두 개로 나누어진 문장이 한 문장에서 병행절로 접속되어 뜻이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는가? ‘깊음 위에서’와 ‘수면 위에서’라는 어구는 절묘한 시적 대구법(對句法)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우선 전반절의 상황을 잘 생각해보자. 땅은 아직 형체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아직 빛이 없는 때이므로 위고 아래고 할 것 없이 사방 어디나 깜깜한 어둠일 수밖에 없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는 말은 독립구가 아니라, 잘못된 번역이다. 그러니까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똑 같이 땅의 상태를 수식하는 보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깊음 위에’라는 장소를 나타내는 부사구는 전반절 전체를 수식하고 있어야 한다. 이제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고 잘못 번역된 구절은, 영어 번역자가 좋게 말해서 너무 멋을 부린 번역이고, 우리도 잘못된 번역을 그대로 따라 써오고 있었음을 알았다. 그러니까 흑암은 깊은 어둠의 외면적인 속성을 나타내는 말이고, 깊음은 내면적인 속성을 표현하는 말로 이해하면 된다. 흑암(히: 코세크)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음 위의 표면적 어두움을 나타낸 말로 이해하면 된다. 흑암은 곧 깊은 어둠과 동의어적인 말로 쓰면 좋은 말이다. 앞으로는 흑암이라는 말을 그런 뜻으로 쓰겠다. 실제로 ‘깊은 곳은 빛이 닿지 않아 어두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때는 아예 빛이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위나 아래나 빛이 없었다. 영감된 창세기 기자는 그의 눈에 보이는 환상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깜깜하게 깊은 어둠 속에서 형체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는 땅덩이가 떠다니고 있는 모습을 창세기 기자는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3.5.2 깊음과 흑암의 깊은 의미

이제 후반절로 넘어가보면, 하나님의 영이 땅 위에서가 아니라 수면 위에서 운행하고 있다. 후반절의 상황을 다시 생각해보면, 깊은 어둠속에 물이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고, 땅은 물속에 가라앉은 상태에서 떠다니고 있다. 땅이 물속에 있다는 말에 좀 의아한 느낌이 올 것으로 본다. 그러나 물과 땅이 나누어진 것은 창조 3일째라는 창조기사와 연결해보면 확실하다. 땅은 아직 물속에 있다. 지구는 물과 땅으로 되어 있지만, 땅은 아직 어두운 깊은 물속에서 가라앉아 있다. 지구가 우주에 떠 있는 것을 아는 현대인들은 땅 덩어리가 물 덩어리 속에 떠있어도, 가라앉아 있어도 같은 말이라는 것을 쉽게 이해한다. 그러므로 빛이 만들어지기 전의 어두운 우주에 원시 지구가 떠다니고 있고, 땅은 아직 물속에 잠겨 있는 모습을 창세기 기자가 정확하게 기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태초에서 깊음이라는 정체불명의 존재는 무엇일까? 태초에 하나님이 그곳에 계셨으며, 그곳에서 창조 작업을 준비하셨다. 깊음은 영적 존재이신 하나님과 달리 어떤 물질적인 장소를 뜻하는 것일까? 그 해답은 흑암보다 더 깊은 묵상을 해야만 비로소 알 수 있다. 그것도 신태극론적인 해석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한마디로 그것은 비존재(非存在)의 영역을 창세기 기자가 성경적으로 표현한 특별한 개념어다. 깊음은 절대 무한의 끝없이 캄캄한 비존재의 영역이다. 그곳은 비존재의 허무의 영역, 곧 테두리 없는 비물질적이며, 비존재적인 영역이다. 수학적으로 나타내면 영(零)의 개념이 머무는 곳이다. 태극에서 (0+1)에서 나타나는 0이다. 빛도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다. 모든 존재는 그곳에서 무(無)로 돌아간다. 그래서 깊음은 캄캄한 흑암과 같다. 태극에서 0(음)과 1(양)은 깊음에서 서로 대칭하고 대립한다. 태극에서 1은 하나님이시다. 그곳에서 하나님이 홀로 계셨다. 오직 절대허무의 무한영역인 그곳에는 하나님만이 존재하실 수 있다. 왜냐하면, 다른 존재가 있을 수 없는 그곳에서 하나님은 유일하신 존재이셨으며, 그 이후에도 영원한 존재이시고, 모든 존재의 총체이신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존재의 전체이시기 때문에 유한한 존재의 영역에서는 하나님이 자리하실 곳을 따로 마련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존재를 수용할 수 있는 터는 텅 비어 있는 비존재의 영역, 곧 경계가 없는 무한한 허무의 나라, 곧 아래 위 사방이 깊은 어둠인 흑암 외에는 달리 있을 수가 없다. 바깥이 없이 열린 비존재의 영역은 무한하므로 밖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흑암의 영역 밖에서는 존재의 터를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로서 흑암의 영역에서 오직 홀로 존재하실 수 있는 권능을 가지신 분이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존재가 따로 영역을 가질 수가 없다. 흑암에서 떠돌고 있는 한 알의 형태로서, 하나님 곧 전 우주적 존재가 시작했으며, 모든 존재는 그 안에 포괄되어 있다. 흑암은 태극의 음이고, 하나님은 태극의 양이시다. (0+1)에서 괄호는 태극을 뜻하며, 또한 무한히 열려 있음을 나타낸다. 이것이 신태극론 개념이다. 태초에 하나님은 흑암에서 천지를 창조하셨다.

 

3.5.3 흑암의 속성

그렇다면 흑암의 속성은 무엇인가? 흑암, 곧 깊음은 비존재적 무(無)이며, 자체가 비어 있음에서 무한히 불변한다. 그러므로 영원성이 있다. 그리고 존재를 채울 수 있는 무한성과 존재를 소멸시키는 무화성(無化性)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존재의 지속성에서 보면 영원성을 가지신 분이시다. 왜냐하면 비존재와 하나를 이루는 존재로서 신태극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존재의 총체로서 유일하시므로 흑암의 무화성을 극복하신다. 그러므로 영원하실 수밖에 없다. 그러나 비존재의 무한영역에 내포된 존재이시므로 유한하시다. 하나님은 실재이시다. 실재적 존재는 무한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를 반증할 논리는 인간의 철학에도 없고, 과학에도 없고, 어디에도 없다.

비존재는 그 자체가 비어 있는 무(無)이므로 테두리가 없다. 도교에서는 이것을 도라 한다. 그러므로 허무이고, 무한이다. 그 안에서 하나님은 유일하신 존재이시다. 그러나 유한하다. 비존재는 무한하나 유한한 존재를 품지 않고서는, 즉 병존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가 없으면 비존재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태극이다. 그러므로 신태극에서 하나님과 흑암은 일대일로 서로 상대적인 존재이지만, 흑암은 하나님보다 크다. 왜냐하면 무한의 흑암은 하나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한을 넘어설 수 없는 존재로서의 하나님은, 그러나 전지전능하시다. 왜냐하면 권능을 가진 유일한 분이시고, 창조의 방법적 지혜를 가진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권능과 지혜를 초월할 수 있는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그분의 권능과 지혜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경배해야 하는 이유이다. 하나님은 이 땅의 만왕보다 크신 권능의 소유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흑암은 존재의 속성을 초월한다. 흑암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본래부터 유일한 존재이신 하나님의 대립적 존재로서 비존재적이다. 오직 허무이고 무한일 뿐이다. 그러나 비존재는 존재와 병존하면서도 대립적인 양극으로서 존재한다. 마치 자석 같이 양극은 어느 하나도 홀로서는 존재할 수가 없다. 하나님과 흑암은 존재와 비존재로서 절대적이며 동시적으로 공존한다. 흑암은 하나님의 창조 작업 장소이다. 그곳은 하나님의 창조 작업으로 만들어진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창조질서 안에서 존재하는 터전이다. 하나님의 질서를 벗어나는 존재는 흑암에서 무화(無化)된다. 흑암은 하나님을 떠난 존재를 무화시킨다. 이것이 존재에 대한 악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흑암은 태초의 것으로서, 성경의 다른 곳에서 나오는 흑암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시공간의 깊이를 알 수 없는 태초의 깊은 어둠을 말하고 있다.

 

3.6 하나님의 영

 

이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하고 있는 장면’을 보자 문제는 주어가 이제까지 얘기한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이라는 존재어의 성격이다. 이 말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앞으로의 성경해석의 방향을 결정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변수가 된다. 그 이유는 이 말을 해석하는 견해에 따라서 교리(dogma)가 달라질 수 있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원문에서 이 말에 쓰인 ‘루아흐’를 직역하면 하나님의 ‘바람’이다. 이것은 헬라어로는 ‘프뉴마’로 번역되지만, 영어성경과 우리 성경은 때로는 ‘영’으로, 때로는 ‘신’으로, 때로는 ‘바람’이라는 말로 번역했다.

‘영’ 또는 ‘신’으로 번역한 뜻에도 크게 두 가지의 견해가 있는데, 하나는 ‘영’ 또는 ‘신’의 뜻은 천사라는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이라는 해석이다. 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낸 때로부터 성령이 존재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영을 그대로 성령이라고 하면서, 성령은 구약시대에도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성경적 증거로서 이 구절 외에도 창 8:1절의 노아 홍수 사건에서 땅을 말리는 바람, 출 15:10절의 애굽 군대를 물에 빠뜨린 바람, 민11:31절의 고기에 굶주리는 이스라엘에게 메추라기를 몰아오는 바람(히브리어 ‘루아흐’, 헬라어 ‘프뉴마’) 등에 대해서도 모두 성령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바람은 쓰다듬는 손길처럼 부드러운 미풍에서부터 휘몰아치는 비바람, 칼날처럼 전율을 느끼게 하는 한풍(寒風), 태풍을 앞 둔 고요한 정적의 무풍(無風), 천둥벼락을 동반하는 강력한 태풍까지 종류가 수 없이 많이 있으며, 같은 종류의 바람도 밤낮이나 환경에 따라서 다르게 느껴진다. 이와 같이 바람은 상황에 따라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권능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바람이 막혔다면, 하나님의 권능이 닿지 않고 연결이 끊어진 것을 상징한다. 그런 곳은 습하고 더럽고 썩어지게 되며, 하나님의 징벌의 장소로 상징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바람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권능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좋다. 다른 동의어 구절들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이해하기가 쉽다.

여기서 본문 구절은 앞뒤 구절들과 연결하여 자세히 살펴보면, 창조의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이 창조를 하기에 앞서 창조재료인 땅과 물을 품고 보살피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인격적으로 접근하는 성령이나 천사로 보는 것은 아무래도 좀 어울리지 않는 해석이다. 이 말은 다음에서 살펴보는 운행이라는 말과 연결해서 해석해야 보다 더 잘 이해된다.

 

3.7 운행

 

‘운행한다’는 말에 대해서는 히브리어로 ‘메라헤페트’이다. ‘알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근심하고 있다’는 뜻까지 들어 있는 말이다. 신태극론에서의 하나님이 운행하시는 역(易)과 같은 말이다. 어미 닭이 병아리가 태어나기를 기다리며 달걀을 품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권능의 손길로 사랑스럽게, 조심스럽게, 혹시 잘못되지나 않을까 염려하며, 어루만지며 살펴보고 있다는 것이 보다 적절한 이해이다. 우리말 성서(개역판) 번역자는 ‘하나님의 신(神)’이 운행한다고 번역하면서, 오히려 재래적 개념의 기계적으로 운행하는 역(易)과 같은 뜻으로 사용한 것 같다. 하기는 영어 성경들은 단지 ‘움직이고 있다’고만 표현했다. 결론적으로 이 구절의 주어인 하나님의 영이 천사라고 한다면, 창조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천사가 된다는 난점이 생긴다. 아니면 천사의 개입이나 도움을 받은 것이 된다. 그래서 혹자는 이를 삼위일체의 성령이라고 하기도 한다.

여기까지 문맥(context)상으로는 아직 창조의 말씀을 하시기 전이므로, 이때 이미 있었던 물과 땅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물과 땅을 창조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권능은 크게 약화되는 문제가 있다. 신태극론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창조로 만들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으로 본다(6). 그러나 이 말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창조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물 위를 단순히 운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그의 권능으로 깊은 사랑으로 창조의 수고를 감당하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을 만들기 위하여 재료를 품고 계시면서 좀 더 나은 창조를 생각해보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품에는 바야흐로 땅을 만들고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권능뿐만 아니라, 어미 닭보다 더한 사랑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은 권능과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에는 처음부터 사랑이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우리는 권능의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을 동시에 느낄 수가 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고, 육신의 부모님처럼 보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권능의 엄위함과 사랑의 따뜻함을 같이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육신으로 자식을 낳은 어미보다도 인간을 더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

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창조의 마지막 결정은 하나님과 닮은 인간을 만들어 서로 사랑하는 것이었다. 흑암에 홀로 계시는 동안 하나님은 외로우셨던 것으로 이해된다. 하나님이 자손들과 천사들 외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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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졸저. “천상신화”. [흑암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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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필요했던 것은 그들만으로는 재미없었다는 이유도 있었지 않았을까? 어찌되었든 하나님의 인간에 대
한 사랑은 예수가 하신 말씀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요한복음 17:23절은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 감람산으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극명하게 전한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시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의 영’은 온 정성으로 땅을 품고 있는 물 덩어리를 어루만지고 살펴보시는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대로, 그분의 권능대로, 그분의 사랑으로 창조를 준비하고 계신다. 생각해보라! 창조에 앞서 창조자가 사랑하지 못할 대상을 무엇 때문에 만들려고 하겠는가? 또 창조자를 향하여 적대적인 피조물을 만들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 여기서는 그보다 칼빈의 권고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여기서 운행이라는 말은 창조의 첫 단계를 뜻한다. 우리는 이 말에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인간들이며, 인간들과 서로 사랑을 주고받기 위한 것임을 발견하면 된다. 이토록 사랑하고자 하는 창조주를 외면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비존재화하는 악일뿐이다.

 

3.8 ‘깊음(테홈)위에’와 ‘수면(하마임)위에’

 

이 두 개의 부사구는 병행구절에서 같은 전치사(알-페네이) 뒤에 붙는 목적어를 가지고 장소를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부사구의 히브리어적인 의미를 잘 검토해보면, 창조의 과정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숨어 있다. ‘테홈’에 대해서는 깊은 어둠의 내면성을 표현하는 말로서, 흑암과 동의어적인 것이라고 이미 설명했다. 그런데 ‘하마임’의 뜻은 한 덩어리의 물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것은 한 방울의 물이나 바다 크기의 물이나 상관없이 하나의 물 덩어리를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물은 최초에 창조된 한 덩어리 물이다. 그러므로 물의 총량이다. 오늘날 우리는 지구의 70%가 물이라는 과학적 지식에서 7:3의 비율로 물이 더 많기 때문에 물 덩어리가 땅 덩어리보다 크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간의 몸도 그렇게 7:3의 비율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진술한 바와 같이, 땅은 아직 수면 위에 있지 아니하고 수면 아래에 있다는 해석이 올바르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여기서 ‘위에’라고 번역한 ‘알-페네이’의 말을 한 번 더 검토할 필요가 있다. ‘알’이란 말에는 ‘위에’라는 뜻과 함께 ‘앞에’라는 뜻이 더 많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페네이’는 ‘표면’을 뜻한다. 하나님 ‘얼굴 앞에’라고 할 때에도 이 말을 쓴다. 그러므로 ‘알-페네이’는 ‘표면 위에’ 또는 ‘표면 앞에’라는 전치사구가 된다. 또 창세기 기자의 눈이 물과 땅을 보고 있는 조건도 생각해야 한다. 아직 천지사방이 온통 깜깜한 상황에서 창세기 기자의 눈앞에 땅 덩어리가 겨우 보이는데, 뒤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은 어둠이 펼쳐져 있다. 자세히 보니 땅 덩어리는 한 덩어리의 투명체인 물속에 잠겨(떠) 있는데 창세기 기자와 그것 사이에(물 표면에) 하나님의 창조권능이 바람처럼 작용하여 움직이고 있다. 이렇게 전체적인 상황을 이해하고 해석해야 태초에 혼돈하고 텅 비어 있는 땅덩어리가 큰 물 덩어리 속

에서 떠다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물위로 땅을 세워서 인간의 터전으로 만든 것은 창조 삼 일째 일이었다. 창세기 기자의 눈은 하나님이 깊은 어둠 속에서 물 덩어리의 수면을 쓰다듬으시면서 이 땅의 창조를 위해 권능의 입김(바람)을 불고 계시는 것과 물속에 떠다니는 땅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태초에 창조재료인 땅은 깊은 물속에서 하나님의 권능이 닿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알 속의 노른자위가 흰자질에 감싸여 어미 날개 밑에서 태어날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깊은 흑암에서 물속에 잠겨 있는 땅을 끌어올려 그 위에 살아갈 인간을 만드실 계획을 세우시면서 창조의 알을 품에 안고 계셨다. 이러한 하나님을 이해하면, 부모애(父母愛)의 원형은 물과 땅으로 만드실 인간을 위해 흑암의 깊음에서 보금자리를 살피시는 하나님에게서 비롯함을 알 수 있다. 창세기 저자에게 이 구절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깜깜한 흑암 속에서도 앞으로 베푸실 사랑을 보여주려고 이미 작정하심에 있다. 그동안 잘못 해석함으로써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