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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신(神)과 창조의 새로운 이해

heojohn 2010. 2. 8. 00:27

하나님 신(神)과 창조의 새로운 이해

New Understanding of God the Creator and Creationism

 

이 논문은 창조론 오픈 포럼에서 발표한 것으로, 동양적인 사고의 바탕에서 과학적인 방법으로 하나님 神을 이해하고자 한 것이다. 이곳에 옮겨 싣다보니 각주가 빠져 있다.

참고로 논문 원문은 www.goodbrothers.or.kr 에 실려 있다.   

 

Abstract: Christianity is the religion to believe in God the Creator and His Son, Jesus Christ whom He sent. Therefore a Christian has to believe in the creation by God first and foremost. However, the creation story by God in the Genesis was written in the ancient time, thus being no more than a myth in the eyes of the modern people who think scientifically. Accordingly there is a stagnation of the growth of Christianity in the modern times. When a scientific view prevails, anything requires scientific verification. It also needs to be reasonable from the philosophical view. Modern man have the characteristic of making much of scientific rationality. This is the reason the creation story in the Bible which a Christian understand as historical needs to be re-interpreted so that it might invoke sympathy of the modern people. Needless to say, the job is not easy, but Christians have not to give it up. This paper intends to set a cornerstone of re-interpreting the creation story for the modern people. The work is, in other words, to criticize the evolution theory which has been dominating the modern science and philosophy, and to shed light on the creation theory from the view of the Eastern thought.

 

목차

 

1. 들어가는 말

2. 하나님 신(神)에 대한 인식론

2.1 신인식의 개요

2.2 일반계시를 통한 신인식과 한계

2.3 특별계시를 통한 신인식과 질문

3. 하나님 신(神)의 창조 서론

3.1 하늘나라

3.2 무(無)로부터의 창조

3.3 창조론의 당위성

3.4 창조의 빅뱅

4. 창조기사의 과학적 이해

4.1 건축 공사 3일

4.1.1 첫째 날

4.1.2 둘째 날

4.1.3 셋째 날

4.2 입주자 창조 3일

4.2.1 넷째 날

4.2.2 다섯째 날

4.2.3 여섯째 날

5. 맺는 말

 

 

1. 들어가는 말

 

기독교 신앙은 나를 포함한 우주만물이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믿음에서 자라야 한다. 이 말은 기독교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아직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믿음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신자행세를 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을 함축한다.

이제까지 나온 주석이나 설교에서 창세기 원역사 부분에 대한 해석은 현대인들에게 신화를 얘기하면서 역사적 실화로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 같다. 오늘날 기독교는 이로 인해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요즈음 대학교 입시 준비생 수준 이상의 젊은이들이 교회출석을 기피하는 상당한 이유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학교에서 교육 받고 이해하는 방식으로는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것이 기독교 창조론이다.

사실 하나님의 창조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 기독교 신자의 신앙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서, 어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팔복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을 가질 수 가 없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선행되어야 진정한 기독교 신앙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이 논문은 하나님의 창조론에 대한 이해를 좀 더 지성적인 현대인들의 수준에 맞추기 위한 시안으로 작성되었다. 물론 기존 창조론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제안이 담긴 내용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작은 이 논문이 모든 것을 해결하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논문을 통해서 진지한 기독교 신자들의 고민에 참여하고, 새로운 기독교 선교의 길을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 필자의 진의임을 먼저 알아주시기 부탁드린다.

 

2. 하나님 신(神)에 대한 인식론

 

2.1 신(神)인식의 개요

우리는 대개 신에 대해 초자연적인 존재, 즉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분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개념은 성경을 읽지 않고 기독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신(神)인식이다. 신(神)이 있다면 당연히 그런 존재일 것이라는 상식적 의미이기도 하다. 인간의 신에 대한 인식은 인간이 다른 생물과 다르다는 독특성을 나타는 것이기도 하다. 신에 대한 인식은 처음에는 신화로 구성되어 있었다. 신화는 문자로 기록되기 전에는 구전으로 발전했었음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같은 신화는 문화의 동질성을 나타내고 공동체를 분류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민족신, 종족신, 부족신 등은 공동체의 신인식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거품처럼 무수한 신화가 존재했다가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신화의 대부분은 신을 인간보다 초월적인 힘을 가진 지배자로서 인식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나는 곧 나, 스스로 있는 자”라고 자신을 계시하셨다. 이렇게 신이 인간에게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계시하고 있는 신화는 달리 없다. 성경을 바탕으로 하는 기독교적 신(神)인식은, 하나님은 역사적으로 살아계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 독특성으로 인하여 신화에 속하지 않으며, 최고의 이성이신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것을 인정받을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철학과 과학은 좀 더 발전된 논리로 구성된 신이 빠진 신화일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신의 정체성을 보다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하여 인간의 신(神)인식을 간단히 분류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불가지론을 포함하지 않은 것은 잠정적인 주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유신론이나 무신론의 하나인 것이다. 물론 필자의 이러한 분류체계에 대해서 각자의 주장은 다를 수도 있다.

 

유신론 계열

유일신 종교: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다신 종교: 인도의 힌두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다른 종교

이신론(理神論): 신이 우주만물을 만들었으나 법칙에 내맡겼으므로 종교 불필요

무신론 계열

진화론 주장: 우주만물은 우연적 발생이고, 생명은 이기적 생존을 위한 경쟁적 존 재. 인본주의 도덕사회 추구하는 경향

유물론 주장: 모든 것은 변증법적이고 물질적인 현상일 뿐. 무목적적인 인간의 공 산주의 사회의 건설에 실패. 이제는 인본주의적 사회 건설 추구

 

인간은 자신에게 복을 줄 수도 있고, 해악도 끼칠 수 있는 신을 상정하고 신앙한다. 그런 신앙이 종교로 발전한다. 종교는 인간을 초월하여 살아 있고, 힘 있는 신에 대한 신앙을 제도화한 것이다. 다신교는 인간만사의 각 분야를 담당하는 신을 모두 섬기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하나님은 이 모든 권능을 홀로 가지신 분이시고, 우주만물의 유일하신 창조주이시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은 자기의 창조물인 자연에서 모든 피조물에게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일반계시를 하셨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믿는 자를 위해서 성경을 통해 특별계시를 전하고 계시는 분으로 본다.

 

2.2 일반계시를 통한 신(神)인식과 한계

 

일반적인 계시를 통한 신인식의 노력은 신화를 비판하는 그리스 철학을 통해 가장 먼저 진행되었다. 자연주의 철학은 신화에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연의 법칙성에 주목했고, 자연만을 실체로 보았다. 그들은 인간도 자연의 일부일 뿐이며, 자연의 법칙 아래 종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연의 법칙을 초월하는 존재는 없다. 즉, 신은 없다.

그러나 보다 온건한 자연주의자들의 입장은 인간을 포함한 자연을 창조한 신이 드러나지 않게 다스리고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들로서는 자연법칙성이나 존재의 이유 같은 궁극적인 질문들에 대해서 초월적인 신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들에게 신은 인간을 특별대우하지 않는 대답 없는 신이다. 신은 자연을 창조해놓고는 자연을 떠나 초월세계로 사라져버렸다. 그러므로 인간은 더 이상 신을 만날 수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니체의 말처럼 “신은 죽었다.” 동양의 도교사상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다. 이러한 견해는 인간이 신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없는, 또한 만날 필요도 없는, 그저 이름뿐인, 한계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만든다. 신이 부재하는 자리에서 인간은 스스로 신이 되어야 한다.

 

2.3 특별계시를 통한 신(神)인식과 질문

 

그러나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기록한 특별한 책이 있다. 바로 성경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대하여 자신을 계시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창세기에는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와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을 지키도록 이 세상에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의 초기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유대교 경전인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권능으로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시며, 절대주권자로서 유일하신 우주의 왕으로 나타나신다.

전지전능하시며 절대주권자이신 창조주 하나님 신(神)에 대해서는 철학으로부터 많은 질문들이 있었다. 그러한 질문은 과학에서도 이어졌고 오늘날에는 일반인들도 계속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네 가지를 보자.

첫째, 절대주권 아래 놓여 있는 인간에게 자유와 책임이 있는가?

둘째, 무소부재하시다면, 인간의 고난의 현장에서 보고만 계시는가?

셋째, 전지전능하시다면, 인간의 범죄를 예방할 수도 있지 아니하신가?

넷째, 심판하신다면, 부자유한 조건에서 인간의 죄는 단독범행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이 논문에서 직접 다룰 문제가 아니지만, 모든 신학적 질문에 창조론이 연관성을 갖지 아니할 수 없다는 뜻을 암시한다. 이것은 앞으로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 창조론에 포함되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3. 하나님 신(神)의 창조 서론

3.1 하늘나라

창세기 첫 장을 읽으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지’가 의미하는 땅(에레츠)은 지구를 말하고, ‘천’이 의미하는 하늘(솨마임)은 지구를 제외한 우주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늘(솨마임)은 물질적인 우주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하늘까지 범위를 확장해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물질적 존재를 위한 우주를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영적인 존재들의 처소로서 하늘나라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천사들이 왕래했음을 기록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하나님 아들 예수 자신이 언급한 증언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이 우주창조 이전에 창조하신 영적 존재들과 창조주 하나님이 거주하는 곳이다. 그곳은 분명 물질적인 우주에 속한 곳이 아니다. 하늘나라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곳이다. 그곳은 구원받은 기독신자들의 영혼이 사후에 돌아가야 하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그곳의 어느 구석에 심판받은 영혼들이 버려지는 곳도 반드시 있음을 알 수 있다.

 

3.2 무(無)로부터의 창조

 

물질적인 우주창조를 말하자면, ‘무(無)로부터의 창조’와 ‘무(無)의 창조’에 대한 문제가 나타난다. 기독교신학에서 ‘아무런 존재가 없는’ 무(無)라는 개념은 그리스 철학의 질문에서 빌려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일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주권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다면, 그때에는 다른 존재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오직 무(無)인 상태에서 창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만물은 ‘무(無)로부터 창조’되었다는 논리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無)도 하나님이 창조하셨는가? 그것은 태초에 하나님의 유일한 존재성으로 부정된다. 그러므로 유일한 존재로서 하나님과 무는 태초의 때에 함께 존재했다.

무(無)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태극론을 발전시킨 신태극론(新太極論)이 잘 설명해 준다. 신태극의 형상은 태초의 유무(有無)를 나타낸다. 무(無)는 영원히 무한한 영역이고, 유(有)는 그 안에 있는 유일하신 하나님 존재를 나타낸다. 창조는 무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확장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창조는 하나님의 하늘나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성경의 창세기는 다만 물질적인 우주의 창조, 그것도 지구를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3.3 창조론의 당위성

 

인간의 이성에 인식의 바탕을 두는 철학의 문제는 우주법칙에 강제적이면서도 질서정연하게 작용하는 힘의 원천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고, 물리과학에서의 문제는 우주만물의 존재적 관계에서 나타나는 상호 작용력을 완전하게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원히 존재하는 우주에 창조의 신은 없다’라고 주장하는 무신론자로서는, 그들의 주장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능력 또는 생명능력으로 나타나는 힘, 즉 물질적인 우주만물의 힘의 원천과 물체들의 상호 작용력을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것들을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하고자 필생의 노력을 기울였던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도 상대성 이론의 공식은 발견했지만, 우주의 대통합 이론은 완성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인간 사유의 한계점에 이르러 양심적인 철학자나 과학자들은 창조신의 존재를 감지하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우주에서 작용하는 힘의 원천은, 우리 기독신자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 권능인 것이다. 만물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적 자연주의자들의 입장은 오히려 과학의 발전에 따라 점점 좁아지고 있다.

자연주의 생물학은 생명의 기원을 우연에서 찾는다. 우연은 법칙성에서 벗어나는 예외적인 경우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연에서 나타나는 생명의 법칙성이 창조자의 존재를 부정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상호 검증하면 엄청난 모순을 지닌 이론을 자연주의자들은 따로 분리해놓고 각각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양자역학에서 우리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만날 수 있다. 불확정성은 물질이 법칙성에만 의존하지 않고 있음을 반증한다. 자연이 법칙성에 의존하지 않고 있는데도 내버려둔다면, 물리적인 자연은 곧 무질서에 빠지고 파괴되고 말 것이다.

우연은 가능성의 요소를 이미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에서 법칙성을 벗어나는 우연 또는 불확정성의 틈새 부분을 기독교 신자들은 하나님이 미세한 개입을 통하여 통제하시는 것으로 믿는다. 그러므로 우연은 하나님의 개입이고 기적으로 불릴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전지전능(全知全能)성에서 이미 혼돈의 가능성을 예견하시므로, 예방이 가능한 단계에서 미세한 조작으로 개입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큰 개입을 필요로 하는 큰 틈새는 많지 않고, 극적으로 드러나는 기적은 더욱 드물다. 하나님은 크게 개입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법칙을 만들어 주셨고, 인간에게는 자율성을 위임해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미세조정의 가능성은 아주 작은 원인이 훨씬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카오스 이론으로 반증된다. 로마의 점령지 한구석에서 이름도 없이 일어났던 예수 사건이 그 후 엄청난 세계변혁의 기폭제가 되었던 것도 카오스적인 결과이다. 그러나 카오스는 공산주의자가 이야기하는 혁명적 대량파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카오스가 새로운 질서를 낳는다고 하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증명되는 것이다. 작은 카오스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섭리는 보고도 지나쳐버리기 쉬운 것이며, 듣고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당장 눈앞에서 큰 기적을 보아야 믿겠다는 바리새인들은 결국 믿지 못하고 말았다.

과학은 인간의 눈이 밝아지면서 발전해 왔다. 오늘날의 발달된 천체망원경과 전자현미경은 인간의 눈을 얼마나 밝게 만들었으며, 그렇게 하여 인간은 하나님에 견줄 만큼 과학적 지식을 많이 알게 되지 않았는가? 그렇지만 과학자들은 하나님을 아는 진리를 떠나 하나님을 부정하는 거짓 진리를 만들기에 몰두하고 있지 아니한가? 이것은 창3:5에서 뱀이 선과 악의 지식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이브에게 먹으라고 꾀면서 예견한 것이다. 그것은 사탄의 예언, 곧 저주였다. 바야흐로 인간은 악한 지식의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이다. 이 바벨탑이 무너지는 순간이 현대 인류의 종말의 때가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존재와 창조를 부정하는 과학이론이라면 어떠한 것도 사탄이 예언한 궤변에 속하는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창조론은 진리로서 당위성을 가지는 것이다.

 

3.4 창조의 빅뱅

성경에 하나님의 “바라” 말씀으로 창조하신 처음 창조물은 창세기 1:3에 나타난 ‘빛’이다. 그렇다면 창 1:2절에서 창조의 말씀 이전에 있었던 땅과 물은 어떻게 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불거진다. 땅과 물은 이미 창조되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 속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무엇을 뜻하는가? 잘 살펴보면, 이 상황은 우주의 무질서를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학계에서 말하는 빅뱅 사건 뒤에 나타난 상황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우연히 빅뱅이 발생되었다고 주장하는 과학계는 빅뱅을 일으킨 힘의 원천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성경을 믿는 기독신자는 빅뱅의 힘의 원천을 하나님의 권능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님은 빅뱅 뒤의 흩어진 별들의 무질서를 다스리기 위해서, 빛이라는 말로 표현된 질서를 가장 먼저 창조하셨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빅뱅은 하나님이 창조권능으로 터뜨린 것이며, 우주는 빅뱅에서 시작되었다고 설명하는 과학계의 주장을 수용할 수 있다. 빅뱅설은 우주가 영원 전부터 존재했다고 하는 무신론적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다. 진화론을 부정하기 위하여 젊은 우주론을 지지하는 일부 창조론 진영도 150억 년 전에 일어났다는 빅뱅설을 무조건 외면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150억년 기간에서는 복잡한 유전자 정보조직인 생명체가 우연히 발생할 가능성이 없다는 확률적 논증이 나오면서 진화론자들의 주장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빅뱅설은 오하려 하나님의 창조권능을 지지하는 증거이다.

하나님은 물질적 우주를 창조하시기 전에 하늘나라에서 창조를 계획하고 준비하셨다. 그렇다면 물과 흙은 하늘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그것을 빅뱅을 통하여 터뜨려서 우주창조를 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창조과정을 결과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천사들과 같은 영적 존재들은 우주만물의 창조를 준비하는 존재였고, 우주만물은 이 땅의 인간생명을 위하여 준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창조는 하나님의 창조목표였고, 하늘나라 전체가 동원된 대역사였다. 빅뱅은 물질적 우주를 만들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4. 창조기사의 과학적 이해

 

이제 창세기에서 창조기사의 이해 문제를 과학적으로 검토해야겠다. 종교와 과학의 만남은 몇 가지 상황을 연출한다. 이에 대해 이안 바버(Ian Barbour)는 갈등, 대화, 독립, 통합의 네 가지 이론유형을 제시하고 있다. 어쨌거나 우주만물이 하나님의 창조에서 나온 것을 믿는다면, 종교가 과학을 피하거나 배척해야 할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 된다. 기독교는 세상의 모든 학문에 개방적이고 친화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기독교는 진리에서 벗어나 독단적으로 흐르고, 세상과 멀어지게 된다. 이성은 이제 이 세상에서 인식의 방법에서 기준이 되었고, 과학은 진리에 이르는 학문적 방법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과학계에서는 빅뱅이 150억 년 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지구의 나이는 45억 년 전에 태양으로부터 분리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과학계의 설명은 일련의 그럴 듯한 논리로 구성되어 있지만, 내용을 검증해보면 의문투성이다. 불타고 있는 태양에서 분리되었다면, 어떻게 물이 지구에 있을 수 있는가? 여러 개의 태양계 행성 가운데서 왜 지구에만 생명이 살 수 있도록 환경이 조성되었는가? 등등의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과학의 역사는 스스로 오류가 많이 있었음을 증언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과학적인 사고방식과 도전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성경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가 성경을 기록된 대로만 무조건 믿고, 그렇게만 알고 있으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에서 진리는 과학에도, 신학에도 하나일 뿐이다. 과학은 진리를 찾는 작업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로서 진리를 이미 제시하고 있다. 다만, 성경은 원본의 부재에 따라 사본의 전승과 번역본 제작에서 피할 수 없이 나타났던 오류를 제외한다면, 둘은 진리를 향하여 같이 서 있다. 그러므로 과학은 성경을 부분적으로 왜곡해서 전체를 부정하지 말아야 하며, 성경을 믿는 기독신자는 과학적 지식을 외면하거나 배척하지 말고 오히려 이용해야 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기독신자는 성경을 과학적 방법으로 이해하기 위한 재해석의 필요성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자면 먼저 과학지식을 습득해야 한다. 필자가 이 논문을 통해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렇다고 성경 전체를 이곳에서 과학적으로 재해석할 수는 없다. 우선 창조기사에서 몇 가지에 대해 과학적 이해와 검증을 개괄적으로 시도한다.

4.1 건축 공사 3일

 

창조6일의 기사를 이해하는 방법으로 창조 6일을 전후 3일씩 나누어보는 방법이 일반적이다. 전 3일은 이른바 거주공간을 건축하는 과정으로 본다. 이 해석은 하나님이 우주의 왕이시고,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백성으로 창조되었다는 견해를 강력히 뒷받침한다. 그렇게 되면 이 땅에는 왕국 백성의 주거환경을 위한 건축이 필요한 것이다. 자연주의자들은 이 견해를 부인하나, 기독신자들은 전통적으로 이 견해를 지지한다.

4.1.1 첫째 날, “빛과 어둠을 나누사”(창1:4)

 

하나님의 첫째 날 창조기사는 빅뱅 뒤에 우주질서를 만드시는 하나님을 기록한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빛과 어둠을 나누시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나눔은 하나를 둘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큰 것에서 작은 몫을 분리해내는 방식이다. 즉, 혼돈한 큰 덩어리에서 질서 있는 작은 덩어리를 만들어 내신다. 이것은 존재론적으로 무한적인 무(無)에 유한적인 유(有)가 내포된 태초의 신태극적 존재구조에서 창조가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창조를 시작하면서부터 하나님은 언제나 작은 몫을 취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빛은 무질서의 흑암에서 분리한 하나님 몫, 즉 질서(秩序)의 영역이다. 영어번역문은 이런 의미를 잘 나타내고 있다.

 

KJB 1:4 .... and God divided the light from the darkness.

그리고 하나님은 흑암에서 빛을 나누셨다.

 

4.1.2 둘째 날, “물과 물로 나뉘게 하사”(창1:6)

 

하나님은 둘째 날에는 위의 물에서 아래 물을 나누어내셨다. 그런데 여기서 잘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이 같은 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처음에 전체적인 물은 기체 형태의 원시 가스구름이었다. 하나님이 궁창을 만들어서 이것을 분리하시자 아래의 물은 냉각되면서 바닷물이 되었고, 궁창 위의 물은 기체로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 여기서 사용된 궁창이라는 말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인식에서 온 개념어라고 본다. 창세기 저자는 기체로 된 위의 물과 액체로 된 아래의 물 사이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얇은 막(궁창)으로 경계선을 만들어 놓으셨다고 본 것이다. 이 막은 투명하고 걸리지 않으므로 의미가 확장되어서 하늘로도 불리게 되었다.

KJB 1:7 And God made the firmament, and divided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firmament from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firmament.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셨고, 그리고 궁창 위의 물로부터 궁창 아래의 물을 나 누셨다.

 

그러니까 이때까지 땅은 아직 마그마 형태로 혼돈하고 공허하고 깜깜한 원시 가스구름에 휩싸여 있었으나, 둘째 날에는 액체가 된 바닷물에 잠겨 있게 되었다. 위에 남아 있던 기체는 그대로 지구의 대기가 된 것이다.

지구에서 물의 총량과 땅의 총량 비율은 70:30 정도이다. 이것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물과 땅의 크기를 그렇게 맞춰놓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때 모자란 땅을 보충하기 위해 소행성들을 끌어오신 것 같다. 그 흔적이 판구조로 된 지구의 형태에 남아 있다. 태양계의 다른 행성은 지구와 같은 대기와 지각(地殼) 구조가 아니다. 일례로 지구와 가장 가까우며 비슷한 탄생과정을 가졌다는 금성에 대한 탐사 자료와 설명을 보면, 대기는 이산화탄소 가스의 구름으로 덮여 있고, 땅은 하나의 통 감자 같은 바위덩어리로 되어 있다고 한다. 또, 지구의 바다 같은 것이 다른 행성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4.1.3 셋째 날

 

셋째 날에 하나님은 두 가지 일을 하셨다.

 

4.1.3.1 “뭍을 땅이라, 물을 바다라”(창1:10)

셋째 날 첫 번째 하신 일은 바다에 잠겨 있는 땅을 드러내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바다에서 땅을 나누어내셨다. 물의 양이 땅보다 두 배 이상 많으므로 처음에는 땅이 저절로 물속에 잠겨 있었다. 생명체들의 생활터전으로 쓰일 땅을 물속에서 끄집어내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여기서 우리는 생명체 창조에 앞서 하나님이 권능으로 땅을 바닷물위에 드러나게 하신 것을 알 수 있다.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unto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창1:9)

여기서 지구의 생성과정을 좀 더 과학적으로 이해하자면, 흙의 생성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지표의 형성에 대해서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초기 지구의 지표는 마그마가 식은 기반암으로 형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기반암의 오랜 풍화작용과 초기 화산 폭발에 의해서 흙이 만들어지기도 했겠지만, 더 많은 부분이 소행성과 운석의 충돌로 만들어졌다고 본다. 하나님은 대규모의 소행성과 운석 충돌로 거친 기반암을 부수어서 흙으로 만들고 퇴적층을 이루게 하셨을 것이다. 태양계의 다른 행성에는 이런 흙이 지구처럼 대규모로 발견되지 않는다. 그저 우주먼지가 쌓인 정도이다. 지구의 흙은 인간과 다른 생명들의 터전을 위해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이다. 지구 지표에 소행성과 운석들이 충돌한 흔적은 많이 남아 있다. 어떤 경우에는 퇴적층의 흙이 퇴적암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은 오늘날의 지구가 단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알게 해준다. 여기서 결론적인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설계에 의해 하나님의 손으로 지구는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창조의 목적을 가지셨기 때문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4.1.3.2 “땅은 땅위에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창1:12)

두 번째 일은 동물들의 먹이 식물을 예비하신 것이다. 식물의 광합성 작용에 필요한 태양이 아직 만들어지기 전이었으므로, 이때의 식물들은 씨앗으로 창조되었다. 씨앗은 완전히 성장한 형상을 그 자체 속에 이미 간직하고 있다. 씨앗은 하나님의 창조권능으로 일순간에 만들어진 완전한 생명체로서 물질구조와 유전자로 되어 있다. 이는 생물학에서 생명의 기본단위라고 보는 세포의 기능적 구조와 같다. 그러나 씨앗은 아직 태양을 기다리면서 발아하기 전에 있다.

이제부터 시작하시는 생물의 창조과정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셋째 날에 땅에게 명령하여 식물 종류를 만들어내셨으며, 다섯 째 날에 물에게 명령하여 물고기 종류와 하늘에 날아다니는 날개 달린 새 종류를 만들어내셨고, 마지막 여섯째 날에는 다시 땅에게 명령하여 땅의 생물을 만들어내셨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여기서 말하는 땅은 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셋째 날에 말하고 있는 땅과 식물은 바다 밑에 있는 흙과 바닷물 속에 있는 식물들을 포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식물 종류는 바다에서나 땅에서나 모든 동물 종류의 먹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풀”이라고 하는 것에는 미생물류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가장 하위 생명체인 단세포 박테리아는 식물의 씨앗과 생명구조가 별로 다르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생명체가 흙에서 났다가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필자의 한 가지 견해를 밝히자면, 생명의 기본단위인 세포 구조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기생체로만 살아가야 하는 바이러스는 하나님이 이 땅에서 창조하신 것 같지 않다. 이러한 불완전한 생명체가 어떻게 생겨났고 아직도 생존하고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하늘나라에서 처벌을 받고 쫓겨난 사탄무리의 변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살펴보면, 생물의 기원을 진화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구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우연히 생명체를 만들어냈다는 진화론은 하나님의 창조를 믿지 못하는 불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브리태니커 사전에서 보면, 생명의 기원은 바이러스에서 시작했고, 바이러스에서 식물이 진화했으며, 이것이 계통발생의 과정을 거치면서 각종 동물로 진화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를 완전히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생명을 만든 힘, 즉 생명발생의 원인력(原因力)에 대해서는 번개나 화산폭발 등의 우연한 자연의 작용으로 설명한다. 이런 설명을 하는 진화론이 창조론보다 더 과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생명은 한꺼번에 완전하게 기록된 유전자정보에 따라 생성된다는 것이 창조론의 정설이다. 진화론이 틀렸다는 것은 오늘날의 발전된 유전자 생물학에서 보아도 알 수 있다. 유전자 생물학은 자기의 유전자 정보에 대해서 변이보다는 원형보존을 선택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즉, 생명체는 유전자 정보를 보호하기 위한 감지기능이 있어서 이상한 침입이나 변형이 일어나면 즉시 퇴치 또는 복구 메커니즘이 작동되는 구조이다. 그러므로 변형된 유전자 정보가 다음 세대로 전달되어서 종의 한계를 넘는 일, 즉 돌연변이가 일어나기는 어렵다. 다만 하나님은 생물에 대해서 종류의 다양성과 개체의 독특성을 창조원리로 세우셨으므로, 종의 범위 안에서의 변이, 즉 소진화는 가능하다고 인정해야 한다.

4.1.3.3 “날(욤)”의 문제-첫째 날에서 셋째 날까지

여기서 “날(욤-히브리어)”에 관한 문제를 짚고 넘어가기로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날”들을 오늘날의 24시간과 같은 날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창조의 “날”들에 대해서 이러한 견해는 한마디로 문자주의적이며, 무리한 억지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백보를 양보한다 해도 3일간의 건축공사는 지구의 24시간 자전주기를 결정하는 태양과 달이 없었던 때에 이루어졌다. 그것들은 다음날인 제4일에 만들어졌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이때의 “날”을 오늘날과 같은 날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성경에서 글자만 같을 뿐이지, 실제적으로 다른 조건은 같지 않았다는 점에서 동의하기 어렵다. 성경의 기록도 ‘첫째’, ‘둘째’, ‘셋째’라는 한정 수식어를 붙여 보통 날과는 다른 특정한 날을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백두산과 남산과 한라산은 보통 명사적으로는 같은 산으로 이해되지만, 각각 역사적, 질량적인 면에서 본다면 엄청나 차이를 가진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날들은 고유명사처럼 이해해야 한다. 축자적으로만 이해한다면, 베드로가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벧후3:8)고 한 말과 같은 비유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기독신자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날들이 오늘날의 보통 24시간의 날과 같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날들의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오늘날 우리들은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4.2 입주자 창조 3일

건축공사가 끝났으면 거주할 입주자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제4일부터 사흘 동안 왕궁에 거주할 존재들을 창조하신다. 그것들은 어떤 면에서는 인간 입주자의 생존을 위한 필수품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보조적인 장식물이기도 하다.

 

4.2.1 넷째 날

4.2.1.1 “궁창에 광명체들”(창1:14)

여기서 “큰 광명, 작은 광명”이라고 하는 말은 바로 해와 달로 이해할 수 있으며, 우주를 나타낸 것이라고 본다. 이런 표현은 창세기 기록 당시에 저자의 인식을 따라 눈에 보이는 대로 기록된 것이므로, 오늘날 우리가 발달한 천체 망원경으로 보는 우주와는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의미의 범위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태양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본다.

광명체들이 초기 태양계에 입주하여 광명체로 기능을 하기 시작하면서 그동안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완전히 사라졌다. 광명체들은 이 땅을 위해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도 했지만, 앞으로 살아갈 인간들에게는 창조주 하나님의 솜씨를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며,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는 자연계시이기도 하다.

이 날에 기록되지 아니한 사건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태양계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리법칙에 따라 질서 있게 최초의 작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전날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심어놓으신 씨앗들도 태양 빛을 받기 시작하면서 생물학적인 발아를 시작했다고 본다.

여기에서 진화론적 과학의 가장 큰 난제인 우주법칙의 원동력(제1원인)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창조권능이라고 풀어야 한다. 진화론자들이 원동력에 대해 과학적 설명이라고 하는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저 추측이고 추론일 뿐이다. 진화론적 과학은 우연이라는 말을 빼면 우주의 최초 상황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지구의 형성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지구는 넷째 날에 하나님이 세우신 태양계의 법칙에 따라 최초의 공전과 자전을 시작했다. 이에 따라 자기장이 형성되었고, 지구 인력에 잡힌 대기에는 바람의 순환이, 바다에는 파도와 조석(潮汐)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권능으로 최초의 지구작동이 시작되었고, 이후에는 우주법칙에 따라 운행된 것이 현재 우리가 보는 우주자연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주법칙에만 맡겨두시고 초월적으로 계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미세한 조정이 없이 우주법칙에만 맡겨놓는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우주는 물리적인 공차에 의해 궤도를 벗어나고 필연적으로 충돌과 무질서가 야기될 것이다. 하나님은 오직 자기의 권능으로 쉬지 않고 우주만물을 돌보신다.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기 위하여 악의적으로 ‘우연’이라는 말을 쓰는 진화론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아야 하며, 진화론에서 우연이라는 말을 폐기해야 마땅하다. 대신에 ‘하나님의 권능에 의하여’라는 말을 대입해야 진정한 진리의 과학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악의적인 인간들의 온갖 음모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이미 예정하신 섭리를 진행하신다. 그러므로 마땅히 진화론은 폐기되고 하나님의 창조론으로 바뀌어야 한다.

진화론자들은 그들의 전용어인 ‘우연’을 빼고는 모든 기원을 설명하지 못한다. 사실 법칙의 예외적인 부분인 그런 ‘우연’ 자체가 법칙의 틈새를 메우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적인 부분이다. 기독신자에게 우연은 기적이라고 이해된다. 기적은 인간이 이해하는 법칙성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만물에게 하나님의 권능을 벗어나는 우연은 있을 수 없다. 우주가 연속적인 우연에 의해서 겨우 지탱되고 있는 것이라면, 우주는 멀지 않아 파멸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와 우주의 모든 법칙을 만드신 분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를 믿으므로 하나님 우주를 섭리하신다고 믿는다.

 

4.2.1.2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창1:14)

해와 달과 별들은 물리적인 우주법칙에 따라 운행을 하면서, 기능적으로는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어 우주공간의 시간법칙을 구성한다. 여기서 ‘징조’라는 말은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기 전에 우주자연을 통해서 알려주신다는 뜻을 가진다. 징조로 번역된 히브리어 ‘오토트’는 복수 개념으로서 ‘나타냄’, ‘계시’ 등을 뜻한다. 우리는 날자와 일기와 계절과 기후의 변화 등 우주법칙을 알면 다음 단계에 나타날 변화를 예견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이 의미하는 징조이다. 그러므로 ‘징조’를 우주질서 또는 법칙에 따른 자연의 변화를 예견한다는 범위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징조는 자연에서 보는 하나님의 일반계시이다.

그러나 일부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늘에서 별들의 빛과 움직임은 하늘나라 존재들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것이 바로 이 땅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별빛들이 나타내는 징조를 해석하고자 했다. 이것이 점성술로 발전하였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이 되었다. 우주만물은 오직 하나님의 창조법칙과 섭리에 따라 움직일 뿐이지, 그 이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연에서 하나님의 창조흔적과 솜씨를 감상하면서 자연에 감추어진 복을 누리도록 만들었다. 이런 하나님의 뜻에 다른 무엇이 더 있겠는가? 하나님이 인간에게 특별히 알려줄 일이 있다면, 특별계시를 통해서 직접 알려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에서 특별한 징조를 찾고 이상한 해석을 하는 것은 헛된 시도이다. 그것은 확률적 예측에 따른 도박에 불과하다. 성경 기록을 보면 이러한 점술이나 도참설에 빠지는 것을 절대 금지하고 있다. 진화론도 자연을 잘못 해석하는 것에 불과하다.

 

4.2.2 다섯째 날(창1:20),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궁창에는 새가 날 으라”

 

이제 지구에는 바다와 하늘에도 거주자가 입주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번성하라고 하셨다. 바다 생물에게는 ‘바닷물에 충만하라’는 말을 더해주셨다. 이것은 바다 생물이 인간에게 중요한 식물로 쓰이도록 예비하셨음을 암시하는 말이라고 본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지 아니하는 진화론자들은 우주 어느 곳에서나 생명이 자연적으로 생겨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생명체는 물을 필요로 한다. 생명체가 존재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 물과 산소가 있는 대기라는 점은 진화론자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물과 산소는 진화론이 설명하는 방식으로 생명체가 출현될 수 없음을 증명한다. 생명체가 아닌 유기물은 물과 산소에 닿으면 바로 분해되기 시작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따뜻하고 작은 원시 연못에서 원시생명이 출현했다고 주장하던 진화론자들은 그 후에 그 연못에 물이 아닌 화학물질이 있었다고 주장을 바꾸었다. 이것이 현대적으로 탈바꿈한 화학진화론이다. 진화론자들은 자기들의 이론이 틀린 것으로 증명되면, 또 다른 가설을 들고 나오는 습성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바꾸어도 진화론적인 생명 탄생가설이 증명될 리는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들의 가설을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거짓 이론은 그들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그들은 진화론을 고수하기 위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기독교의 창조론을 진화론으로 반증하기 위한 증거로서 다른 행성에서 우선 물을 찾고자 했다. 왜냐하면 물은 생명체의 필수요소로서 물이 있으면, 그곳에는 생명존재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곳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생명이 진화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그동안 계속 우주선을 보내 달을 탐사했으며, 다른 별의 탐사선에도 물의 존재여부를 확인하는 장비를 실어 보냈다. 몇 년 전에는 화성 표면을 찍은 사진을 판독하여 물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달의 표면에서도 얼음 형태로 물이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더 이상 진전된 설명은 아직 없다. 그런데 진화론 과학자들의 우주적 음모의 목적은 다른 별에서 생명존재의 간접증거일 수 있는 물을 찾아 창조론을 공격하려는 것이다. 그렇지만 설혹 다른 별에 물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생명존재의 직접적 증거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생명은 물 이외에도 다양한 환경조건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얼음으로 되어 있는 기후에서 생명은 살기 어렵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사람들은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이 인간을 오직 이 땅에서만 창조하신 것으로 믿는다. 그렇다고 넓은 우주의 어느 곳에도 지구와 같은 별이 없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에 그것에 대해 언급한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소한 같은 태양계 안에는 없을 것으로 믿는다. 기독신자들은 이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위해 설계하시고 생존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도록 만드신 곳은 지구밖에는 없다고 믿는다. 만약 어딘가에 있다고 해도 그것은 E.T.일 뿐이며 인간은 아니다. 진화론자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증거를 조작하고 헛소문을 만들어내면서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존엄성과 기독신자들의 신앙을 훼손하려고 사탄적인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다. 인간사회에 무신론을 퍼뜨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진화론자들은 마침내 사탄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퇴화한 것처럼 보이는 바이러스와 닮아 가고 있다.

4.2.3 여섯째 날

 

여섯째 날은 창조 6일의 마지막 날이다. 가장 중요한 창조의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땅의 입주자를 종류대로 만들어 내신다. 이 날에 하나님은 땅의 거주자를 만들고, 또 지구의 모든 것들을 다스리는 자로서 인간을 만들어내신다. 창세기 기자는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땅의 생물을 종류대로 분류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의 분류를 보면, 매우 포괄적이라 오늘날의 개념으로서는 막연한 점이 없지 않다. 성경에서 말하는 종류의 개념은 암수가 교배하여 생식 가능한 것이 기준인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생식 유전자의 동질성을 기준으로 분류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모든 종류들 가운데에서 최고의 작품은 우리 인간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습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다윈은 사람이 다른 영장류와 같은 조상에서 진화된 동물이라고 주장한다. 다윈은 진화를 자연에서의 생존경쟁, 즉 적응의 원리로 설명한다.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도태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한 생물의 멸종은 환경의 격변도 있지만, 먹이 부족이라는 조건과 가장 연관이 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같은 종류의 생물은 먹이 특성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다윈은 생존경쟁에서 “한번 소멸한 종은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인간이 생존경쟁에서 진화된 승자로 나타난 후에는 진화하지 못한 다른 영장류는 자연도태로 다 사라졌어야 한다. 아니면 인간은 처음부터 다른 영장류와 달랐어야 한다. 더욱이 이제까지 이 땅에서 진화의 경쟁이 계속 진행되는 동안에 최후의 승리자인 인간 이외의 모든 서식자는 도태의 대상이므로 단계적으로 다 소멸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영장류와 먹이 특성이 같지 않을뿐더러, 처음부터 훨씬 우수한 특성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또 진화론자의 주장대로라면 인간은 처음 미생물에서 수 십 억년 동안 진화를 했다는 것이 된다. 다윈주의자 헥켈(Ernst Haeckel)은 그가 그린 계통수와 같은 형태로 모든 생물이 단계별로 진화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직까지 하위단계에서 진화하지 못하고 있는 생물들은 왜 그냥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 아닌가? 또 아직도 전혀 진화하지 않고 고대의 화석 형태와 똑 같은 생물이 생존하고 있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진화론자들은 그들의 진화이론에 맞추기 위하여 지구의 환경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고 주장한다. 진화론은 같은 환경조건에서 다른 종과 같이 진화하지 못했거나, 새로운 환경조건에 적응하지 못한 종은 자연 도태되어야 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생물은 환경조건에 따라 쉽게 변할 수 있는 단순한 물질의 집적체가 아니며, 생명활동은 기계론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물질재료를 조합할 수는 있어도 그것으로 생명을 창조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능력으로는 죽은 생명체를 다시 살리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최고의 인간지능을 장착한 로봇이라고 해도 프로그램화되지 않은 사유를 수행하거나, 로봇이 스스로 생생한 생명의 감정을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또 오늘날의 현대 과학이 생명체를 복제할 수 있다고 해서 창조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무(無)에서 창조하셨지, 복제하지 아니하셨다. 과학자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법칙을 연구하여 모방할 수는 있었지만, 창조하지는 못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능력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과학자들이 생명기원의 본질적인 문제를 가려놓고는, 진화론이 사실인양 방법론적으로만 떠들어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인간이 다스리는 자로서 살도록 가장 우월한 존재로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헛된 진화론을 버리고 하나님의 창조를 알아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 성경의 진리를 바로 이해하고 믿을 수 있다. 창조론은 기독교 신앙의 첫 걸음이고, 가장 먼저 올바르게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부여하신 각 종류대로의 생물의 특성은 진화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각 종류의 생물은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하지 않고 도태당하지 않으면서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특성은 하나님을 닮게 만드셨다.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을 그려보려면 남자와 여자의 특성을 합쳐보아야 한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두 가지 특성이 합쳐진다면, 과연 어떤 형상과 모습일까? 하나님은 왜 그런 방식으로 창조하셨는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의 창조에 대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기독신자들의 어려움이다. 더욱이 분자 생물학의 발전은 인간의 유전자에서 진화의 증거를 찾았다고 하면서 진화론에 꿰맞추어낸 서적들이 계속 출판되고 있다. 이에 반해서 기독신자들의 반론은 과학지식의 부족으로 입을 다물고 있는 형편이다. 진화론의 확산에 대한 기독교계 창조론의 대응이 계속 이대로 침묵하거나 미흡하다면, 기독교는 멀지 않아 몰락할 위기에 몰리고 말 것이다.

 

5. 맺는 말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외부를 향한 전쟁 못지않게 내부를 향한 전쟁도 치러왔다. 신학적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온갖 신학적 논쟁은 결국 분열을 가져왔음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신학적 논쟁에서 나타난 양쪽의 주장이 모두 진리일 수는 없다. 새로운 논쟁은 오히려 양쪽 모두 틀렸을 가능성이 더 많다. 인간의 오류는 인간의 불완전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므로, 오류는 항상 가능성의 범위 안에 있다. 그렇다고 인간이 학문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류는 인간에게 감기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과 같이 일상적인 것이다. 오류가 발견되면 고치면 된다. 그러나 오류임이 증명되었음에도 이를 받아들여 수정하기를 거부하고, 자기의 주장이 진리라고 고집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님의 창조를 제대로 알고 깊이 믿는 기독신자라면, 근본적인 진리를 알고 서로 일치를 발견할 수 있다. 다양하게 드러나는 작은 차이는 작은 오류일 수도 있고 상황에 적응하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다. 근본이 일치하면, 작은 오류는 수정하게 하고, 적응하기 위한 다양성은 인정해야 한다. 논쟁이 지나쳐서 분열로 가는 것은 대부분 논쟁의 주제를 잘못 선택했거나 분열을 위한 수단으로 논쟁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그렇게 낭비할 시간과 자원을 아껴야 할 현실적 상황에 처해 있다.

외부적으로 눈을 돌려보면, 오늘날 대학교, 특히 이공계 학과에서는 학위논문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쓰지 않으면 통과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세력이 학문적으로 얼마나 강대해졌는가를 증명하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공산주의 정치세력이 몰락하여 종교적 자유지역이 넓어졌다고 하지만, 그 후에 일어난 문화적 변화를 보면 결코 기독교에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대승적 단결뿐만 아니라, 진화론으로 기울어진 현대 지식문화에 대응하기 위해 기독교 신학의 발전을 더욱 촉구하는 것이다.

살펴보면, 우주 빅뱅에 대해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해석은 과학의 발전이 결코 창조론에 부정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는 또 과학이 우주만물의 존재법칙을 발견할 수는 있을지라도, 그 법칙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신학이 과학을 포용해야 할 필요성을 알게 하는 말이다. 필자는 그동안 우주가 빅뱅을 통하여 창조되었다는 과학계의 주장에 공감하면서 신태극론, 즉 동양 사상에 기초한 창조주 하나님 이해의 방법을 제안하였다. 하나님은 무한한 허무의 공간에서 유일한 존재로서 계시다가 빅뱅을 통하여 우주창조를 하셨다는 이해이다. 필자는 창세기의 창조기사를 그런 바탕 위에서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현대인들의 이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창세기의 새로운 과학적 해석이 적극적으로 필요하다고 본다. 어렸을 때 들었던 동화 수준의 해석을 성인들에게 반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기독교는 그렇게 함으로써만 현대인들에게 진리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창조론의 업 그레이드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그것은 기독신자들의 몫으로 남는다. 오늘 이 작은 논문이 일으키는 나비효과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