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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3-5절(첫째 날)의 해석연구

heojohn 2009. 7. 8. 22:43

이 글은 앞의  "신태극론과 창세기 1장1-2절의 해석"의 계속이다.

 

4. 창 1:3-5절(첫째 날)의 해석연구

 

이에 해당하는 구절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개역 개정판에 나와 있다.

 

이에 해당하는 구절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개역 개정판에 나와 있다.

 

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하시매 빛이 있었고,

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위 구절에서는 ‘이르시되’, ‘빛’, ‘어둠’, ‘좋았더라’, ‘나누사’, ‘첫째 날’이라는 여섯 개의 주제어를 선택해서 논하고자 한다.

 

4.1 이르시되

 

4.1.1 말씀 창조

 

하나님이 창조를 하신 방법은 오직 말씀뿐이었다. 하나님이 말씀만으로 창조하셨다는 해석에는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물론 성경을 읽는 모든 기독교인들 사이에 별 이견이 없다. 말은 인간에게 이해와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는 기본적 생활도구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해와 의사소통이 가능하도록 그가 하신 창조 이야기를 창세기 저자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시고 말로 들려주셨다. 하나님의 권능에 감동된 창세기 기자는 오래 전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를 보고 듣고 말로 전했다. 창조 이야기는 처음에는 말로 전해져 내려온 것이었다. 글자로 기록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기록도 처음에는 히브리 고어로 점토판, 파피루스, 양피지 등에 기록된 것이었고, 이것을 현재 우리가 읽는 글자와 종이에 인쇄된 성경으로 보게 되기까지는 험난한 전승과 보존의 과정을 겪어야 했다. 이 과정은 성경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쳤던 유대인 제사장들과 사본제작을 위하여 일생을 바쳤던 유대인 학자들의 피와 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우리는 이런 성경에 대해 또다시 번역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우리말로 된 성경을 읽을 수 있다. 우리가 우리말로 된 창조 이야기를 읽고 이해하고 해석한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어린 시절에는 도깨비 방망이로 “돈 나와라, 뚝딱!”하면, 돈 나오고, “밤 나와라, 뚝딱!”하면, 밤 나왔다는 얘기를 들으면, 신기하고 재미있고, 또 그대로 믿는다. 그렇지만 초등학교에만 들어가도 이미 꾸며낸 이야기라고 알고 웃어넘긴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이 오직 말씀으로 천지, 곧 모든 우주와 생명적 존재를 창조하셨다고 말하면, 진정 곧이곧대로 그것을 쉽게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우선 창조주 하나님이 과연 계시기나 한 것인가? 창조의 방법이 말씀만으로 가능했을까? 재료가 없이도 창조가 가능한 일인가? 등등, 창조에 관한 의문을 생각해보지 않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말씀 창조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우주자연은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그들은 유불선(儒彿仙)과 같은 동양의 자연주의 종교나 서양의 진화론으로 빠지는 길로 나아간다. 대부분의 현대 지식인들이 선택하는 길이다. 넓고 편한 쉬운 길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창조를 믿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선택하기 어려운 길이 되어버렸다.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반신반의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렇다면 신자라는 신분과 예의 때문에 믿는 척 얼버무리고,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유감스럽게도 그렇다는 것이 사실인 것 같다. 이런 의문을 확인하지 않고는 기독교에 진정한 믿음이란 없다고 본다. 그저 믿는 것과 알고 믿는 것은 믿음에 있어서 질적 차이가 크다. 그것은 친부모임을 확신하고 있는 자식의 효성과 마음 한구석에 친부모의 자격에 의문을 가지고 있는 자식의 효성은 같을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4.1.2 하나님의 권능

 

고대의 인류역사를 살펴보면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민족들은 예외 없이 기원신화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생명기원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민족은 그들이 섬기는 신의 시체에서 나온 피로, 어떤 민족은 그들의 신의 뼈로, 어떤 민족은 그들의 신이 적을 죽이고 살을 떼 내어 이 세상을 만들었다고도 한다. 신화마다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적인 것은 어떤 신적인 존재가 세상과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결코 어떤 민족에서도 인간이 자연에서 스스로 생겨났다고 말하는 기원신화는 발견되지 않았다.

 

생명이 자연에서 저절로 생겨났다는 자연발생설은 그리스의 철학자들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소박한 추론이다. 19세기에 이르러 나타난 다윈의 진화론은 이러한 추론에 과학적인 논리를 조금 더 발전시켜놓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다. 이들은 우주만물이 생장하고 소멸하는 자연적 변화의 질서만을 보고 결론을 내렸다고 보아진다. 이들은 기원에 대한 의문에 대해서 우주자연과 질서를 창조하신 창조주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엔 진화론적 결론을 이끌어낼 수밖에 없었다. 마치 부모를 보지 못하고 자란 아이가 부모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꼴이 아닌가?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무신론을 주장하는 인간들을, 부모가 없다고 말하는 불효막심한 자식과 같다고 생각해야 한다.

 

성서는 어느 민족의 기원신화보다 우수한 창조기사를 담고 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다른 민족의 기원신화보다 이야기의 전개가 이 땅에서의 역사적인 흐름과 일치하며 논리정연하다. 그러나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방법적인 것보다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그 이전에 어떻게 창조의 권능을 획득하시게 되었는가 하는 점도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전지전능하시다고 믿고 있는 하나님의 권능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하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권능을 가진 자에게는 방법은 선택의 문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권능은 인간이나 다른 어떤 존재들이 획득할 수 없는 고유한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 이전에 어떤 독특한 수련행위를 통해 하나님 자신만의 고유한 창조권능을 연마하시지 않았을까? 그러나 우리 인간이 하나님에게 속한 일을 어떻게 정확하게 알 수가 있겠는가? 자기 부모에 대해서도 과거를 정확하게 다 알 수 없는 것이 인간들이다. 알 수 없는 일은 상상을 해보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인간의 기원문제에 대해서 의견이 서로 엇갈려 있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합리적이라고 믿는 방법으로 찾아낸 결론을 믿는 수밖에 없다. 성령의 감동이 있으면 이해가 된다고 간단하게 말해버리는 것은 현대인들을 향해서는 사실 좀 삼가해야할 일이다. 기독교인은 듣는 사람들에게 깊은 이해를 통해서 스스로 진리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말해주어야 한다. 뒤에 나오는 말이지만 하나님은 자기를 닮은 형상으로 인간을 만드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해주셨던 성경기록과 자연과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비록 우주만물이 자율적인 질서를 통해 자연적으로 움직여나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그가 창조하신 우주에 최종적으로는 절대적인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두지 아니하셨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는 없다. 또한 그가 스스로 창조하신 우주만물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창조자이신 우주만물에 대해 하나님의 권능은 전지전능한 것임을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평소에는 비록 감추어져 드러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 때문에 섣불리 잘못 판단하여 무신론자가 되는 경향이 있지만, 하나님은 작정만 하시면 언제든지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보고 긍정적으로 이해해야만이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이 생긴다고 본다.

 

4.1.3 빅뱅의 가능성

 

창조 이야기가 성경에 나타난 것이 전부라면, 여기서 창조의 말씀을 하시기 이전에, 앞장에서 이미 있었던 땅과 물은 언제 누가 만들었느냐 하는 의문이 생긴다. 성경에서는 이에 대한 답을 찾을 길이 없다. 어떤 학자들은 빛의 다음 순서에 만들어진 것인데, 땅의 중요성을 강조하려고 창세기 저자가 순서를 바꾸어 놓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보게 되면 성경에는 질서가 없어진다. 창세기 저자가 쓸데없이 순서를 바꾸어 놓을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성서에 기록된 순서를 따라서 읽어가면서 해석하는 것이 원칙이다. 땅과 물의 창조 이야기에 대해서는 성경의 범주를 넘어서 상고해야 할 문제이다.

 

과학계에서는 우주만물이 빅뱅을 통하여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이런 과학계의 주장도 증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서에 언급이 없고 그것보다 더 합리적인 이론이 없을 경우에는, 과학이론을 수용하는 것이 기독교계의 열린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과학적인 논리로서 새로운 것이 밝혀지면, 종교계는 이를 다시 이성적으로 검토해서 수정할 것은 언제든지 수정할 용기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반박할 것은 반박해야 한다.

 

빅뱅으로 우주가 출현하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먼저 작은 한 덩어리 물체에서 어떻게 빅뱅이라는 대폭발이 저절로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 작은 덩어리는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인가? 그 작은 덩어리는 어떻게 이렇게 큰 우주로 확장될 수가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과학적인 설명으로 의문의 여지없이 대답할 수 있는 과학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할 수는 있다. 빅뱅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는 창조주 하나님밖에 다른 무엇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빅뱅은 하나님의 창조권능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라고 말함에 전혀 문제가 없다. 빅뱅 당시의 대폭발에 의해서 튕겨나간 수많은 파편들은 이리저리 흩어졌을 것이다. 이렇게 흩어진 파편들을 지금 우리가 보는 별들의 형태로, 하나의 우주질서 안에 잡아 놓고 운행하게 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을 달리 또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아인슈타인이 이를 대통일장 이론으로 풀어내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것은 아직도 우리에게 신비의 영역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도 빅뱅은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의 영역확장을 위해서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방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빅뱅으로 우주가 탄생되었다고 주장하는 무신론 과학자들에게 기독교는 빅뱅이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크게 말해야 한다. 우주의 태초는 하나님에 의해서 빅뱅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해도 거리낄 이유가 없다.

 

4.2 빛

 

이 구절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이 땅에서 처음으로 창조하신 것이 ‘빛’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빛이 있으라’는 하나님의 창조명령에 따라 빛이 나타났고, 하나님은 보시고 기뻐하셨다. 하나님의 계획하신 뜻대로 잘 만들어졌기 때문에 기뻐하셨을 테니, 빛의 창조는 잘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어둠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지도 않았는데 어둠은 어디서 온 것일까?

 

어둠은 하나님과 합일을 이루고 있는 신태극(1+0=1) 개념에서의 음(陰), 곧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과 같은 무(無)의 속성이다. 무는 흑암과 같다고 이미 말했다. 하나님은 흑암에서 우주창조의 빅뱅을 먼저 하셨다. 그리고 첫째 날에 창조한 빛은 말하자면 질서의 빅뱅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해야 무로부터 존재의 영역을 확보하고 생명의 터전이 될 땅과 물의 자리를 안정시킬 수가 있기 때문이다. 유일한 존재이신 하나님은 태극에서 태양을 표상한다. 하나님은 빛을 만들어서 흑암의 혼돈과 공허를 극복하셨다. 어떤 사람은 태양(해)이 제4일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서, 이 빛은 땅에 비치는 빛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창세기가 이 땅에서 일어난 창조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지, 다른 곳에서 있었던 창조를 기록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태양의 빛이 아닌 이 빛은 물질적인 빛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의 영역에 대한 주권적 영역과 질서를 표상한다고 보아야 한다. 주권적 영역과 질서가 먼저 확보되어야 창조물들을 제 위치에 안정시키고 다스릴 수 있지 않겠는가? 창조에서 가장 시급한 것이다. 앞에 나온 1장 2절에서 보면 아직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깜깜하지 아니하였는가? 여기서 빛이라는 말은, 다른 존재들의 창조에 앞서 흑암에다 주권적 영역을 확보하시려는 하나님이 창조의 권능으로 만들어낸 제1차적인 산물이다. 따라서 빛을 존재의 영역과 질서로서, 하나님이 세우신 왕국의 표상이라고 보는 것에 무리가 없다. 창세기 저자는 아직 무질서나 이에 대칭하는 질서 또는 주권에 해당하는 말을 쓸 수  없었으므로, 그것을 빛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빛 아래서 하나님은 수면 위에서 거니시며 사랑스럽게 어루만지시던 이 땅에 자리를 잡아 주시고 혼돈했던 우주에 질서를 세우셨다. 비로소 우주 가운데 제 자리를 잡은 땅은 제대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고, 하나님은 그것을 보고 기뻐하셨다. 창조계획의 순조로운 출발을 기뻐하신 것이다. 욥기 38장에서는 이때 새벽별들과 하나님의 아들들이 노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기쁨을 혼자 간직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이 빛이 있었으므로 3일째 만들어진 식물들의 광합성 작용이 가능했다는 등의 견해를 주장하기도 하고, 강력한 감마선이나 벼락 같이 짧은 순간에 나타난 빛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말하자면 이때의 빛은 하나님의 주권적 질서로서, 어둠의 무질서를 정복하고 존재의 터전을 확보하려는 창조의 질서라고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혼돈하고 공허하고 깜깜한 흑암 가운데서 창조를 함에 있어서는 질서가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빛은 하나님의 법인 것이다. 이 법이 미치는 곳이 하나님의 주권적 영역이다.

 

하나님이 이제 창조를 시작하셨으므로 창조물의 존재를 위한 터전을 확대해야 한다. 창조물은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 질서 아래 편입되는 것이므로, 창조는 하나님이 자기 소유와 영역의 확대를 목적으로 하시는 것이다. 창조는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 자신의 확장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창조하신 우주만물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알고 질서 있게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처음으로 창조하신 질서의 빛이 제대로 비춰짐을 보고 기뻐하셨다. 우주에 질서가 세워진 것이다.

 

하나님이 먼저 이 땅에서 빛의 창조를 하셨으므로 이 땅은 우주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이 땅에서 생명존재를 위해 말씀으로 우주의 질서를 선포하셨으므로, 이 땅은 우주의 수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땅이 물리적인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간들을 이 땅에서 살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관심이 이 땅에 집중되고 있으므로, 이 땅은 우주에서 가치의 중심에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지구 중심적인 시각에서 기록된 것이다. 이를 오해하고 천동설을 주장한 것은 성경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부족한 탓이었다고 본다. 해석은 해석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 맞는 말이다. 하나님은 아무리 큰 우주를 만들어도, 아무리 많은 생명을 만들어도 자기의 창조물을 버리지 않으시며, 어떤 형태로든지 연결 끈을 맺어놓으시는 분이시다. 만약 인간들이 이 연결고리를 끊어버린다면, 그것은 하나님, 곧 빛의 세계와 끊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흑암에서 소멸되고 사라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무화(無化)이다.

 

4.3 어둠

 

여기서 주의하여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어둠을 창조하셨다는 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는 서술이 나오면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 된다는 기록이다. 빛의 창조 뒤에 밤이라는 어둠이 하나님의 영역(1)에 왜 나타나는 것일까? 빛은 흑암을 이기고 존재의 영역을 확장(擴張)하고 확정(確定)한다. 흑암은 창조 이전부터 있었던 비존재적인 무(無:0)로서, 창조된 빛의 영역에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역, 곧 질서의 범위를 확장하는 것임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흑암의 형상을 닮은 어둠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어둠은 곧 밤이라고 불리는데, 어둠은 하나님의 창조를 거치지 않고 어떻게 저절로 나타난 것일까?

 

흑암(0:無)은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시지 않았던 것이었음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다. 이 점에 유의하면서 잘 살펴보면, 신태극의 유무(有無:1+0)적 구조에서, 빛의 존재가 창조됨으로써 유(有)의 영역에서 무(無)의 흑암은 어둠으로 변용(變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밤은 흑암에서 변용된 어둠인 것이다. 하나님의 영역에서 빛과 어둠의 형상은 낮과 밤의 시간적 질서를 나타내는 역(易)의 표상인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존재는 시간적 질서 아래 놓이게 되었다. 공간이 만들어짐으로써 하나님의 영역이 확보되었고, 시간이 만들어짐으로써 하나님의 질서가 생겨났다. 시간적 질서는 동양사상에서 변화를 뜻하는 생장소멸과 흥망성쇄를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 방법으로써의 진정한 역(易)이다.

 

4.4 좋았더라

 

이 말은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 성과를 보시고 만족스러워하는 감정을 표현한다.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빛이 의도하신 뜻대로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선하신 속성을 믿는 우리는 이 말에서 하나님이 피조물의 존재와 생명을 선하게 창조하신 것으로 믿게 된다.

이 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감정과 우리의 감정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오실 수 있고,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에게 인격적으로 친근하게 접근할 수가 있게 된다. 이 말은 우리가 우리의 말로 우리의 감정과 사정을 인격적이신 하나님에게 인간적으로 쉽게 호소할 수 있는 기도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

 

4.5 ‘나누사’에 담긴 의미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신 의미는 단순히 낮과 밤을 구분하기 위해 하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빛과 어둠은 그냥 두어도 같이 섞일 수 없는 이질적인 것이다. 아직까지 다른 피조물이 창조되지 아니한 상황에서 단순히 낮과 밤의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 말에는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암시하는 강력한 단서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이 빛을 만드신 목적은 주권과 질서의 확보에 있었다고 이미 말했다. 여기에서 ‘나누사’라는 말에는 하나님이 자기의 사랑하는 창조의 산물, 곧 자기의 것을 흑암의 어둠 속에 내버려두지 않으시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시는 첫 행위이시다. 자기의 것을 구분하여 찾아내시는 이 행위의 의미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내내 관통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미 빛의 창조에서부터 구속사를 예정하고 계셨다는 것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영어 성경들은 하나님이 어둠에서 빛을 나누어(분리해, 끄집어, 떼어)내신 것으로 말하고 있다(God divided the light from the darkness). 히브리어 원문 동사 (바달)은 영어로 divide, separate, set apart 등으로 번역된다. 이 말은 이미 있던 것에서 일부분을 분리해낸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빛은 이미 있던 흑암에서 분리해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은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따로따로 창조한 것처럼 그 뜻을 오해하도록 번역되어 있다. 이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바울의 말을 보자. 그는 고후 6:14에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매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어둠은 흑암의 변용이고 믿지 않는 자의 상징이고 불법이고 악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모두가 선한 목적을 가진 것이므로 흑암을 닮은 어둠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면 바울이 이런 말을 할 수가 없다. 흑암은 빛의 창조 이전에 이미 있었다. 우리는 흑암의 세력에서 분리되어 빛의 세계로 나와야 한다. 그것은 창조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이끌림을 받아야 하는 방법밖에 없는 것 같다. 흑암의 무화성(無化性)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한 바 있다. 무화는 곧 사멸이고, 죽음이다. 하나님이 무한한 흑암의 영역 안에서 흑암의 속성인 존재의 무화성을 극복하는 길은 존재의 영역을 창조하고 확장하는 방법밖에 없다. 생명을 위해서는 생명을 나누어서 널리 퍼뜨리고 번성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생명은 그렇게 함으로써만 무화성을 극복하고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빛의 창조는 그 첫 단계이다.

 

흑암은 악의 원천이다. 하나님의 속성에 없는 악은 흑암의 속성에 감염됨으로써 발생한 것이다. 흑암의 속성에 감염된 존재는 무화(無化)된다. 존재는 흑암의 무화성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님의 빛의 영역에 있지 아니하면, 이 흑암의 무화성에 감염될 수밖에 없다. 흑암의 속성에 감염된 존재는 흑암의 영역에서 무화(無化)라는 과정을 통해서 존재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다. 악은 하나님이 징벌하시지 않아도 이렇게 존재의 영역에서 비존재의 영역으로, 무화의 과정을 통해서 나누어지고 저절로 정화된다. 하나님의 징벌은 그러므로 구원의 포기를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시랑으로 창조한 존재가 이렇게 무화되지 않도록 경고하고, 가르치고, 힘써 구원의 길을 마련하신다. 이런 창조의 질서를 모르고 흑암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자들은 흑암에서 무화될 수밖에 없다. 그곳이 지옥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은 그분의 창조물이 무화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빛을 창조하시고 흑암을 닮은 어둠과 나누셨다. 빛은 하나님의 영역이고 하나님이 창조한 존재는 그곳에 있어야 존재의 능력을 잃지 않게 된다. 하나님의 빛을 떠나면 결국 흑암에서 무화되어 존재의 능력을 잃고 소멸되어버린다. 흑암의 속성은 앞으로 악의 문제와 같이 계속 검토해야 할 문제이다.

 

생명이 소멸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두려움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창조주가 인간의 내면에 만들어 놓은 신앙의 내재적 출발점이다. 다만 잘못된 신앙의 길로 들어가면 오히려 악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으므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만 경배하고 감사하는 올바른 신앙을 선택해야 한다. 세상살이에서도 잘못된 길을 선택하여 실패하는 경우는 많이 있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자는 인간사를 보면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충분히 깨달을 수 있다. 자연을 보아도 하나님의 질서가 잘 나타나 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은 창조사역을 진행하기 시작하셨다. 그것은 소우주적이며 프렉탈적이고 모나드적인 구조와 질서를 확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확대 재생산하시는 방법이다. 그러면서도 같은 것을 다시 만들지 않으신다. 이러한 창조의 권능은 하나님이 유일하게 가지고 계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창세기 원역사를 해석하는 것이 바로 신태극론에서 보는 창조론이다.

 

4.6 첫째 날

 

4.6.1 첫째 날에 일어난 일

 

창조된 빛이 있었던 첫째 날에 하나님이 하신 일은 네 가지다.

첫째,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다.

둘째, 창조된 빛을 보시고 좋아하셨다.

셋째, 빛과 어둠을 나누셨다.

넷째, 어둠을 밤이라고 하시고, 빛을 낮이라고 하셨다.

첫째 날에 대해 잘 살펴보면, 저녁이 없이 하루가 지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에서, 첫째 날의 저녁은 하나님의 창조 이전에 있었던, 창조하시지 아니한 어둠의 시간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신 즉시 아침이 시작되었다.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에 갇혀 있던 우주가 시간적 질서를 갖추고 운행을 시작하였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관찰의 시간을 가지는 동안에 낮이 지나갔다. 여기서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신 일은 빛이 창조되면서 즉시 저절로 이루어진 일이었으며, 별도의 창조활동이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이제 빛이 창조되었으니 공간적인 우주의 질서가 생겨나고 무질서한 흑암의 어둠은 바깥으로 멀리 밀려 났다. 하나님이 밤과 낮의 이름을 지으신 것은 주권의 선언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빛은 물론 흑암을 닮은 어둠조차 하나님의 주권적 질서 아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빛의 창조 이후 첫 번째 저녁이 되면서 둘째 날이 시작되었다. 이 첫 번째 저녁부터 다음 창조를 시작하는 아침까지를 시간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그 사이에 휴식하는 시간을 가지셨다고 생각할 수 있다. 휴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한 존재의 능력이다. 낮과 밤은 존재의 영역에서 활동과 휴식을 위한 것이다. 잘 보면 하나님의 휴식시간이라는 의미를 가진 둘째 날의 밤이 우주적인 질서를 시작하는 첫 밤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저녁과 밤의 어둠은 이 땅에서 우주의 시간적 질서를 위하여 빛의 다음에 나오도록 흑암이 변용된 어둠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빛에 의하여 멀리 우주의 끝까지 우주의 질서가 세워지고 있음을 보시는 하나님이 어찌 기쁘지 아니하셨을까? 그것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기쁨을 누릴 휴식시간을 원하셨다고 본다. 우리는 창조하시는 하나님에게 감사와 경배를 드리면서 겸허하게 이 구절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은 앞으로 만들어낼 인간창조의 준비를 위하여, 흑암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땀과 정성과 사랑을 쏟아 부으셨는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미 낮과 밤을 예비하고 계시지 아니한가?

 

그리고 이제 다시 보면 빛의 창조는 이 땅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이 땅을 터전으로 자신을 닮은 인간의 창조를 계획하셨다. 그리고 먼저 인간의 처소로 우주에서 가장 적합한 자리를 골라 이 땅의 자리를 선택하시고 이 땅을 만드셨다. 또 모든 우주의 운행질서를 이 땅에서 살아갈 인간들의 생활에 해를 미치지 않도록 계획하셨다. 이 땅을 중심으로 하는 우주질서를 가장 먼저 세우신 것이 곧 빛의 창조이다. 과학계에서 말하는 빅뱅의 우주폭발은 하나님이 이 땅에서 빛을 창조하심에 따라 운행의 질서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과학적인 사람들은 지구중심적인 우주관이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과학에서도 관찰자 없이 우주의 어느 곳에 중심점을 두고 우주를 논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 땅의 인간들은 우주의 관찰자로서 당연히 우주론의 중심에 서있어야 한다.

 

4.6.2 첫째 날의 시간

 

우리는 빛의 창조 이전에 긴 어둠의 시간이 있었고, 이것이 첫째 날의 저녁으로 산입(算入)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첫째 날의 낮 시간은 빛, 곧 하나님의 주권적 질서가 하나님 영역인 우주의 끝까지 미치는데 소요된 시간이었다고 하면 납득이 가는 설명이 아닐까 한다. 그 시간 동안에 하나님은 빛을 보고 기뻐하셨고, 빛과 어둠을 분리하셨고, 낮과 밤을 이름 지으셨다. 빛이 오면 어둠은 물러나고, 어둠이 오는 시간이 되면 빛이 사라지는 낮과 밤의 시간적 질서가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하루’의 시간을 두고 다양한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다. 창조론 진영 내에서도 논쟁이 대립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여기서 말하는 하루를 축자적으로 해석하여 오늘날과 같은 24시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맞지 않다. 지구 자전을 기준으로 계산하는 오늘날의 24시간 하루는 제4 창조일이 되기 전에는 아직 확립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24시간 하루를 결정하는 지구 자전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서, 태양계의 행성들과 위성들이 각각 오늘날과 같이 제자리에 위치하고 있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우주의 행성과 위성간의 거리와 위치는 서로의 인력이 영향을 미쳐서 각각의 행성과 위성의 자전과 공전의 시간에 변화를 가져온다고 하는 과학적 사실은 이제 일반적 과학상식이 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첫째 날의 시간의 길이는 다른 날 하루의 길이와는 같다고 생각할 수 없다. 만약 문자가 같다고 말하면서, 이에 집착하여 해와 달과 별의 운행이 시작되기 이전의 날까지 24시간 하루라고 계속 주장한다면, 세상은 그러한 사람을 향하여 무식하다고 말할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첫째 날의 시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24시간과 같다고 주장하는 것은 분명히 맞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산이나, 강, 또는 호수 같은 말 앞에 구체적인 지시적인 명사가 없이는 그 크기, 넓이, 길이 또는 높이 등의 구체적인 실체를 가늠하지 못한다. ‘첫째’ 날은 하나님의 창조일이라고 생각해야 하고, 이 날은 하나님이 얼마나 긴 시간을 일하셨는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해가 만들어지기 전의 3일간에 대해서는 우리가 추정조차 할 근거가 없으므로 그때의 시간적 길이를 섣불리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과학적 반론을 넘어갈 합리적인 근거가 당장 없기 때문이다. 그랜드 주석에 보면 종교개혁을 주도한 루터나 칼빈도 창조 6일간을 모두 같은 24시간이라고 보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개신교 전체가 명백한 오류를 그대로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교개혁자로서는 위대했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적 지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신앙 선배의 잘못을 바로잡아줄 후학의 용기도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무신론 과학주의에 빠진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창조론을 전파해야할 기독교가 스스로 이러한 오류에 빠져 있는 일부 사람들 때문에 오히려 무식한 바보집단으로 취급받게 된다. 틀린 것을 그대로 따라서 주장하는 것은 빨간 머리띠를 두르고 구호를 따라 외치는 데모꾼 같다. 맹신자나 광신자 아니면, 스스로 오류를 바로 잡아야 한다.

 

나아가서 성경의 무오류성을 지지하는 것도 좋지만, 불분명한 성경 자료를 인용하여 계산한 6,000년 설(젊은 우주론)에 현혹되어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할 골짜기에 갇혀 있는 것도 그렇다. 오늘날 과학계에서는 별들의 간격을 측정해보면 수백억 광년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우주의 나이가 그만큼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것도 하나의 가설이긴 하나, 현대과학의 바탕인 광학기술을 이용한 측정값이니 그대로 인정해도 좋은 것이다. 명백한 반론 근거를 제시함에도 잘못된 주장을 고집하는 것은 본인에게나 기독교 전체를 위해서도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잘못된 주장에 대해서는 때로 철회하는 용기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