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 연구 페이퍼

요한복음(7:37-44) 주석 연구

heojohn 2020. 4. 9. 00:54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1. 서 론

 

1.1. 본문(7:37-44)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40.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41.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42.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43.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44.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1.2. 서론적 검토

 

이 주석 에세이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요한복음 7: 37-44에 나오는 본문이다. 먼저 여기에 나오는 본문의 구성을 살펴보면, 37절과 38절에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소개한 다음에 39절에서는 자신의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그리고 이어진 40절과 42절에서도 저자는 청중들의 반응과 청중들 사이에서 일어난 논쟁을 소개한 다음에 43절과 44절에서는 다시 자신의 설명을 덧붙이는 구조로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이 어떤 사건을 서술한 다음에 저자의 설명을 덧붙이는 방법은 독자들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한 저자의 의도로 보인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도 이러한 두 개의 구조를 나누어 분석하고자 한다.

한편 이러한 저자의 의도는 당시의 독자들이 이해하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오늘날의 독자에게는 그렇게 충분한 것 같지 않다. 특히 오늘날의 비유대인 독자들이 이 구절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대한 종합적인 배경 지식이 필요하다. 따라서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원칙을 먼저 적용하는 것이 이러한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문화, 헬라어로 쓰인 원문의 어의를 검토하는 것이 부분적으로는 필요하리라고 본다. 또한 다른 주석서들에 대한 참조와 번역에 쓰인 우리말의 적정성도 원문과 비교해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신자로서 성경을 읽는 독자는 그 저자들의 관심사와 목적을 발견하려는 목표를 품고 성경을 읽을 의무가

있다는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 1956- )의 주장을 지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능한대로 저자의 의도에 충실한 주석을 논술하고자 시도한다.

 

2.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7:37-39)

 

2.1. (7:37)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이 구절에서는 성경에서 보통 막연하게 기록되고 있는 사건의 때를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명절은 초막절이다. 초막절은 유대인들에게 3대 명절(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의 하나이다. 이들 명절에는 예루살렘을 기준으로 32km 이내 거주하는 유대인 성인 남자는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했다. 그리고 초막절은 8일 동안 진행되는 것이다. 느헤미야서에 의하면, 초막절 기간에는 회중이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8:17), “에스라는 첫날부터 끝 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무리가 칠일 동안 절기를 지키고 제팔 일에 규례를 따라 성회를 열었”(8:18). 초막절 8일 동안에는 화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아무 노동도 하지 않았다(23:36; 29:35). 그러므로 끝 날은 초막절의 끝 날, 곧 제8일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으로 제7일설을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의 기록을 보아 8일설을 따르는 것이 보다 타당한 입장이라고 하겠다. 초막절은 여호와의 절기”(23:39)로도 불리며, 이스라엘이 출애굽 시절에 광야에서 초막에서 생활하던 일을 기억하기 위한 것(23:40-43)이었다. 또한 계절적으로 모든 농작물의 추수를 끝낸 시기(유대력으로 7번째 달 15, 1015)에 거행되는 절기이므로 추수감사절과 같은 의미로서 맥추절”(23:16, 34:22)로 불리기도 했다. 초막절의 예배는 모든 유대인들은 물론 종들과 나그네까지 참가할 수 있으며, 스가랴서에는 땅에 있는 모든 족속들이 만군의 여호와 앞에 지켜야 하는 절기(14:16-19)로 기록되어 있다. 레위기 2:40에 나오는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 가지와 시내 버들은 초막을 짓는 재료이며, 동시에 초막절에 예배의 재료로도 쓰였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초막절이 진행되는 중간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오셔서 가르치셨다(7:14).

 

그런데 끝 날에 예수님의 가르침의 서두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것이었다. 광야에서의 초막 생활을 회상하는 이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말씀은 이스라엘에게 일어났던 하나의 특별한 역사적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즉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맛사 또는 므리바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다고 원망하면서 모세에게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불평했을 때, 하나님이 목마른 이스라엘을 먹이기 위해 모세로 하여금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을 솟아나게 했던 사건(17:3-6, 20:5-11)으로 연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부르시는 목마른 자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여기서는 광야에서와 같이 육신적으로 먹을 물이 없어서 목마른 자는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목마른 자는 육신적인 목마름을 느끼는 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영혼의 갈증을 느끼는 자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아모스서 8:11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을 말하고 있다. 기갈은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때가 이르러 여호와가 땅에 보내신 기근인 것이다. 요한 저자는 이미 이 복음서 서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이 땅에 오신 분으로 진술했다(1:14). 이러한 예수님의 자기에로의 초청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 목마른 자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자기에게로 와서 그가 하는 말씀의 물을 마시라는 뜻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어서 그의 말씀을 듣고 그를 믿는 자가 마시는 물은 이제까지처럼 단순히 기갈을 면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선포하신다.

 

2.2.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ο πιστευων εις εμε καθως ειπεν η γραφη ποταμοι εκ της κοιλιας αυτου ρευσουσιν υδατος ζωντος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 본문에서 첫 번 째 나오는 중요한 단어는 믿는 자이다. 요한 저자는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에 앞서 이미 이 복음서의 두 곳에서 자신의 설명으로 믿는 자”(ο πιστευων)를 진술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2)라는 구절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3:18)고 하는 구절이다. 이러한 믿는 자에 대해 요한 저자는 이 복음서 첫 번째 구절에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참 빛으로, 또한 세상을 지으신 자로 진술하면서 믿어야 할 대상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그를 믿으면 그 대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복음서 둘 째 구절에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므로 그의 이름을 믿어 심판을 받지 말라는 뜻을 반어적으로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요한은 또 12:44-46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믿는 자를 다시 서술하고 있다: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여기서 예수께서는 자기를 믿는 자는 자기를 세상의 으로 보내신 자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믿는 대가로서 어둠에 거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믿는 자는 예수와 하나님을 동시에 믿는 자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믿으면, 그 믿음의 효력은 자동적으로 하나님에게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삽입절로 끼어 있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καθως ειπεν η γραφη)라는 말은 어느 성경을 가리키고 있는지 분명하게 연결되는 구절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성경이라는 말은 우리에게는 구약성경을 가리키는 것인데, 구약성경 어디에서도 그 배에서 생수가 흘러나오리라”(ποταμοι εκ της κοιλιας αυτου ρευσουσιν υδατος ζωντος)는 말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에스겔서 47:1절에서 하나님의 전의 동문의 문지방 밑에서 나오는 물과 이어서 47:8-12에 묘사된 이르는 곳마다 생물이 살아나는 그 물”, 또 스가랴서 14:8절에 나오는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는 구절에서 가능한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정경으로 채택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모르고 있거나 멸실된 외경 문헌 중에 이런 구절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이 구절에서 의미하는 성경의 전거를 찾지 않고 넘어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경시하는 것으로서 옳지 않다고 본다. 그래서 가장 의미 있는 연관성을 가진 구절을 찾는다면, 다시 출애굽기 17:6절에서 반석에서 솟아나오는 물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물은 하나님이 그의 권능으로 모세를 통하여 반석에서 솟아나게 한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죽음 직전에 이른 목마름을 해소했기 때문이다. 이 물을 해석한 바울 사도는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신령한 물은 그들과 함께 했던 신령한 반석인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또한 이사야서에 나오는 목마른 자들에게 값 없이주시려고 하는 ”(55:1)영혼을 살리는” “”(55:3)의 이미지와 연관해서 보면 이 구절들이 매우 정확하게 동의어적 의미를 가졌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물의 출처가 그 배에서”(εκ της κοιλιας αυτου)라고 표현되고 있기 때문에 구약에서의 구절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물이 나오는 곳들이 몇 군데 있다. 그러나 이렇게 그 배에서 나온다고 하는 표현은 없다. 그렇지만 몇 개의 구절들을 통해 의 출처에 대한 유형을 이해할 수는 있다. 앞에 나온 것들 외에 몇 개의 구절을 추가해보기로 한다: “네 근원이 되는 이 흘러나오는 에덴동산(2:10), 에스겔 7:1에서 물이 나오는 하나님의 성전 동문의 문지방 밑, 여호와가 인도하는 자는 물 댄 동산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58:11)과 같다는 진술 등. 그래서 예수께서는 앞에서 진술한 구약에서의 여러 가지 물과 관련된 구절들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 이러한 물의 이미지에서 나오는 생수”(υδατος ζωντος)를 그를 믿는 자에 대한 대가로서 약속했으리라고 본다. 이렇게 하여 믿는 자가 마신 생수는 다시 그로부터 흘러나와 세상의 목마름을 풀어주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뒤에 이어지는 39절과 연관하여 성경의 범위에서 찾아낼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생수는 예수께서 주시는 것이라는 뜻이 이미 4:10절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나타나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신 생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의 말씀을 들어보면, “생수는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주는 선물이다. 그런데 이어진 11절에서 보면, 우물에서 갓 길어낸 시원한 물을 생수인 줄 알고 있는 여자는 물 길을 그릇이 없는 걱정을 하면서 말한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여자의 이 말에는 어느 정도 빈정대는 투가 배어 있는 것인데, 이어진 12절에서 여자는 예수를 향해 이 우물을 주신 조상 야곱보다 크냐고 얕보는 듯이 반문하고 있다. 이런 여자의 말을 무시하신 예수께서는 13-14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주시는 물은 마시는 자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면, “이나 생수는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용어가 되는 것이다.

 

또한 본문의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는 말과 4;14절에서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γενησεται εν αυτω πηγη υδατος αλλομενου εις ζωην αιωνιον)고 사마리아 여자에게 하신 말씀은 표현만 다를 뿐 같은 현상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확실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의적인 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말 번역의 그 배에서는 영어성경에서 “from his inmost”(NASB), 또는 “in him”(NIV)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번역들은 유대인들이 심장과 가장 내면적인 정서와 감각의 자리이자 전인격이라고 보는 것과 일치한다. 또한 원어인 κοιλιας는 헬라 철학에서 욕망의 원천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용어이다. 이런 언어적 의미들을 살펴보고 난 우리는 하나의 주석적 의미를 도출할 수 있다: 예수께서 주시는 물을 마신 자의 속에 들어간 물은 생수가 되어 다시 충만한 강처럼 흘러나오거나 영원한 생명의 샘처럼 솟아나오게 된다. 그렇다면 생수는 무엇을 뜻하는가?

 

2.3. (7:39)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

 

τουτο δε ειπεν περι του πνευματος ου εμελλον λαμβανειν οι πιστευοντες εις αυτον ουπω γαρ ην πνευμα αγιον οτι ο ιησους ουδεπω εδοξασθη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저자는 39절에서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에서의 생수라는 말의 의미를 설명한 뒤에 괄호 안에다 한 마디 말을 덧붙여놓고 있다: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저자는 생수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이라고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으나, 괄호 안에 덧붙어 있는 말 때문에 독자들을 오히려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믿는 자곧 그가 주는 물을 마신 자의 배속에서 생수흘러나오는”(ρευσουσιν) 것을 미래형 동사로 말씀하셨으며, 요한 저자도 본문에서 생수이신 성령은 믿는 자가 받을것이라는 εμελλον(미래완료형의 동사)에 부정사 λαμβανειν을 붙여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에 따라 틀림없이 받을것이라는 의미를 강조했다. 그러나 괄호 안의 설명에서 저자는 생수를 뜻하는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니라고 진술하고 있다. 이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의 약속은 어쩌면 허언(虛言)이 될지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독자에게 제기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에게는 언제 어떻게 성령이 주어진다는 것인가의 문제를 풀어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오늘날의 독자에게 문제이지 예수님 당시에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성령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부터 알아보아야 한다. 먼저 성령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에 대한 근거로서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라고 기록되어 있는 요엘서 2:28-29을 들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은 그의 영을 만민에게 부어줄 것으로 예언하시고 있지만, 이어서 하나님은 내가 너희 가운데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30)는 말씀을 하신다. 이 말씀에 의해서 만민은 여호와 이외에는 다른 이를 하나님으로 알거나 또는 믿지 않는 사람들, 곧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하나님의 영이 부어질 것이라는 제한적인 뜻을 함축하게 되었고, “그 때는 그의 말씀이 성취되는 때의 그 후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요한 저자가 진술하고 있는 그의 때는 언제를 가리키는가? 본문에서 거꾸로 추정해보면, “그의 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신 예수를 잡고자 하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잡는 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때는 이 본문에서 활동하시는 때에는 아직 오지 않은 때이다. 여기서 진술된 그의 때는 결국 예수께서 직접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12:23)고 하신 말씀에 암시되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요한 저자는 이때를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13:1)라고 다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이야말로 그가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마침내 모든 권세를 받게 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또한 그가 이 세상에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의 성령을 보내실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 창세기 첫 장에서부터 이러한 예가 나오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하는 하나님의 영”(1:2).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 여호와의 도움으로 바로의 꿈을 해몽하고 총리로 임명되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요셉(41:38), 여호와의 명에 의하여 모세에게 안수를 받은 눈의 아들 여호수아(27:18), 여호와의 지명을 받고 사무엘의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삼상 16:13). 그리고 그 많은 사사들과 왕들, 그리고 선지자들. 이 모든 이들 곧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는 누구나 드러나게일했었다. 이들은 자기의 목숨을 위해 숨거나 도피하지 않았고, 도피할 수도 없었다. 요나 선지자의 예에서와 같이 하나님이 그런 짓을 그대로 용납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에 대한 인식은 이 복음서(7:3-4)에서 초막절에 예수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를 권하는 예수의 동생들의 말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물론 이 복음서를 기록한 저자도 구약에서의 이러한 기사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렇게 기록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다른 복음서 저자들에 의해서도 공유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에 의하여 잉태되었다는 기사(1:18-20), 세례를 받는 때에 하늘로부터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왔다는 기사(3:16), 마귀의 시험을 받을 때 예수를 이끄신 성령에 관한 기사(4:1) .

 

그리고 뒤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 자신 곧 하나님의 아들을 사랑하는 자에게 다른 보혜사 곧 진리의 성령을 보내주시도록 또한 그들이 영원히 함께 있도록 아버지 하나님에게 기도하신다(14:16-17). 그리고 다시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15:26)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고별설교에서 또 다시 그가 가면, 보혜사를 보내실 것을 약속(16:7)하신다. 그리고 보혜사에 대해 긴 설명을 하시는 중에 아버지께 있는 모든 것이 그의 것이라고 선언하신다(16:15). 이 말씀은 17:10절에서도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라고 다시 강조되고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도 그에게 속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20:22)고 말씀하시고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20:23)고 권위 있게 말씀을 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의 성령에 대한 이러한 약속은 그의 때에 성취되었으며, 사도행전 저자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기록할 수 있게 된 것이다(2:1).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경의 기록에 근거하여 성령에 관한 진리는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도 변하지 않는 진리로서 남아 있게 되었다. 이런 진리를 잘 알고 있는 요한은 3:15에서 예수가 자신을 가리켜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신 말씀을 기록한 뒤에 3:36에서는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라는 진술을 덧붙여 기록해놓았고, 여기서 이런 설명을 또 다시 기록해놓은 것이다. 이제 성령의 진리에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뜻이 담겨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은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요한은 그의 편지 요한 일서에서도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2:1),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라”(2:25),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5:11)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이 진리에 근거하여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이를 모르고 있던 당시의 청중들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 서로 논쟁하게 된다.

 

3. 유대인 청중들의 논쟁에 대해(7:40-44)

 

3.1. (7:40-43)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

 

요한 저자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들은 유대인 무리들은 두 편으로 나뉘어 서로 쟁론했다고 보도한다. 이때에 한 편은 예수를 그 선지자 혹은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무리이고, 다른 한 편은 예수가 이스라엘의 왕은 다윗의 자손이어야 한다는 조건에 부합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이는 갈릴리 출신이라는 사실에서 예수의 메시아 즉 왕 되심을 무조건 부인하는 무리로 나누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자의 경우에서도 누가복음서 저자는 예수를 큰 선지자로만 보도하고 있다: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7:16). 여기서 그 선지자또는 큰 선지자는 모세가 하나님이 보내실 것이라고 예언한 선지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서 저자는 예수가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1:18)이라고 진술하는 한편, 그의 제자가 된 안드레가 그의 형제 시몬에게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하고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1:41) 고백하는 것을 보도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마태복음서 저자는 예수를 그 선지자로 보도하면서 또한 그리스도로도 보도하고 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21:11),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1:21).

 

그러나 이렇게 예수가 선지자또는 그리스도이심을 주장하는 무리가 있는 반면에 이런 주장을 전면 부정하는 무리도 있었다. 이들은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성경에 이르지 아니하였느냐?”고 반문하면서 나사렛에서 그리스도가 나올 수 없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7:42). 그러나 누가복음서 저자는 다윗의 후손 요셉과 그의 약혼자 마리아가 호적하려고 베들레헴에 올라가서 예수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2:1-20). 누가가 이런 무리의 주장을 반론하려고 의도적으로 기록했는지는 불분명하나,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베척하는 무리의 존재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기록들을 통해서 입증된다. 오늘날 복음의 연관성을 더 깊이 연구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이런 기록들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으나, 이 주제는 이 논문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므로 다른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

 

3.2. (7:44)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이 구절에서 우리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나사렛 출신 예수는 메시아가 될 수 없다고 비하하던 무리에 속해 있는 자들일 것이다. 이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먼저 유대인들이라는 사실이 요한 저자에 의해 진술되고 있다(7:11). 그리고 이들은 예수를 죽이고자하는자들에 속해 있다(7:25). 이들은 예수에 대하여 무리가 수군거리는 것을 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잡으려고 보낸 아랫사람들”(7:32)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이유에서 예수를 잡으려고 했을까? 요한 저자는 먼저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범한 이유로 그를 죽이려고 한다고 기록했다(5:16). 왜냐하면 모세 율법에는 안식일을 범하는 자는 죽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를 죽이는 것이 율법적 의무가 되는 것이다: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31:14). 이뿐만 아니라 요한 저자는 유대인들이 예수가 하나님을 모독한 죄를 추가했다고 기록했다: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5:18). 한편 안식일을 범한 사건은 마가복음 3:1-5절 에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 사건에도 진술되고 있으며, 이 사건들은 결국 예수를 죽이려고 유대인들이 헤롯당과 협력하는 계기가 된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3:6).

 

그러나 이러한 유대인들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시도는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예수를 죽이려는 이유에는 이렇게 율법의 뒷받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층에 속해 있던 대제사장들이 보낸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요한 저자는 그 주된 이유를 7:30에서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음이러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으려고 왔으나, 예수의 말씀을 듣고 난 뒤에는 그들 중에서 아무도 예수를 잡으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앞에서 진술한 바와 같이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3. 결 론

 

이렇게 본문을 검토하고 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련해서 듣거나, 보거나, 또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알게 되었을 때,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누어짐을 알 수 있다. 믿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이 논문에서 더 이상 다룰 필요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말하는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는 예언적 말씀이 그의 때가 성취된 이후의 오늘날의 현실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결론에 이르고자 한다. 왜냐하면 요한 저자는 이 본문에서 생수가 성령을 뜻하고 있음과 이 복음서 후반부에서 예수의 그의 때가 와서 그가 영광을 받았고, 또한 그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음을 앞에서 이미 논증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성경에서도 동일한 증언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믿는 자로서 성령을 받은 자가 되는 것이므로,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는 예언적 말씀의 실현을 증명하거나, 아니면 어떻게든 다른 방법으로 설명해주어야 한다.

 

여기에서 믿는 자에 대해서는 세 가지의 견해를 열 수 있다. 하나는 믿는 자를 신자 개인으로 보는 견해와 다른 하나는 신자들의 집단인 교회로 보는 견해이다. 아니면 이 두 가지 견해를 모두 수용하는 견해를 열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고려해야 할 사항은 믿는 자의 앞 구절(37)에는, 예수에게로 와서 물을 마시는 목마른 자라는 전제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기서 말하는 믿는 자는 개인적 실체로서의 신자를 강력히 시사한다. 따라서 이 본문에 나오는 믿는 자에 대해 이와 다른 견해를 가지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그 배에서 생수가 흘러나오리라는 말은 어느 견해를 가지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든지 이 본문에서의 그 배라는 말은 신자 개인 또는 교회라는 가시적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생수는 성령을 가리키며, “그 배는 신자의 배를 가리킨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다.

 

그런데 본문에서 성령을 가리키는 생수는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실체이다. 그렇다면 이제 생수가 그 배에서 흘러나오리라고 예언된 말씀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문제는 우리의 눈으로는 이런 현상을 볼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그러므로 이 명제는 어떤 현상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보내신다는 약속을 하셨고, 그 약속이 실현되었음을 성경에서 검증했다. 그것은 성령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또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는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일반적인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은 일반적인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하시는 것이라는 명제를 이끌어낼 수 있게 된다. 이제 남은 것은 이 두 개의 명제를 어떻게 연결하느냐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그 배에서 생수가 흘러나오리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된다는 뜻을 비유적으로 예언하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필자는 또한 여기서 이러한 신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도 틀림없이 실현될 것이라는 믿음을 동시에 강조하고자 한다.

 

 

참고문헌

 

<단행본>

 

김선배, 상징으로 읽는 요한복음서(대전: 침례신학대학출판부, 2010).8

 

Volf, Miroslav, After Our Likeness: The Church as the image of the Trinity, 홍병룡 역,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서울: 국제제자훈련원, 2012).

 

<주석서>

 

양서원 편, 요한복음트리니티 말씀대전 24, (서울: 목양서원, 1991).

제자원 편, 요한복음옥스포드 원어 성경대전 110, (서울: 바이블네트, 2006).

 

Barclray, William, 요한복음 하, 사도행전바클레이 성경주석 6, (서울: 기독교문사, 2009).

Handrixon, William, 요한복음 중헨드릭슨 성경주석, (서울: 아가페출판사, 1993).

 

<학술 논문>

 

김광식, “요한복음의 성령연구”, 한영연구논문2, (한영신학대학교, 2010).

김동수, “요한복음에 나타난 삼위일체 사상”, 신약논단19권 제1(한국신약학회, 2012 ).

-----, “요한복음에 나타난 하나님과 신자의 부자 관계”, 교수논총2(성산효도대학원 대학교성산연구소, 2001. 6).

------, “성서신학, 더 이상 조직신학의 토대가 아닌가? -볼프의 성서의 신학적 해석”, 세미 나 발표 (평택대학교, 2013. 5.13).

박희규,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자인식 : ‘보냄 받은 자에 관한 선교적 연구”, 칼빈論 壇30(칼빈대학교 출판부, 2011).

배재욱, “요한복음이 말하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고”, 선교와신학14(장로회신학대 학교 세계선교연구원, 2004).

유상섭, “요한복음에서 믿음의 개념”, 神學指南257 (신학지남사, 1998. 12).

윤철원, “요한복음 해석과 유대교 문제의 중요성”, 신약논단17권 제3, (한국신약학회, 2010년 가을).

이영헌, “요한福音書에 따른 예수의 '榮光(doxa)에 대한 小考”, 神學展望132 (광주가톨릭 대학교, 2001.3).

정창욱, “복음에 사용된 '믿다' 동사 용법의 독특성 : 요한복음 주해를 위한 함의”, 신약논 단16권 제1(한국신약학회, 2009년 봄).

------, “요한복음에 사용된 '믿다' 동사 용법의 독특성 : 요한복음 주해를 위한 함의”, 신약 논단16권 제1(한국신약학회, 2009년 봄).

Fuller, Reginald H., 황성규 역, “7장 요한복음의 문제”, 現存71 (現存社, 1976).

 

<학위논문>

 

송영의, “요한복음의 성령론 연구 : 구약과의 관계에서 본 새로운 구속사적 해석의 탐구”, (총 신대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07).

안득수, “요한복음에 나타난 보혜사의 신학적 기능 연구”, (호서대 연합신학전문대학원: 박사 학위 논문, 2010).

이재성, “갈등 구조를 통해 본 요한복음의 성령의 사역에 관한 연구”, (평택대 대학원: 박사학 위 논문, 2005).

조광범, “요한복음의 생명신학”, (호서대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0)

조택현, “예수와 파라클레토스의 역사적 상관성 연구 : 요한복음의 파라클레토스 본문을 중심 으로”, (장로회신학대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07).

최영실, “요한福音 안의 歷史的 예수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