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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케의 삼위일체론적 신 인식 연구

heojohn 2020. 4. 5. 23:27

 

 

목차

 

1. 서론

2. 성부 : 계시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자기 드러냄으로서의 계시/ ‘신 질문 일반으로서의 계시 / ‘역사 설립의 말씀으로서의 계시

3. 성자 :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그리스도, 메시아의 칭호 / 예수 인격과의 만남 /그리스도의 직무와 인성 / 화해론 / 부활론 / 기독론 평가

4. 성령 : 의인을 만드시는 하나님

진정한 인간-의인으로서의 성령 / 성경론 / 교회론과 선교론 / 종말론

5. 삼위일체 총론

6. 결론적 평가

 

 

 

1. 서론

 

틸리케는 교의학의 서론을 성령론으로 시작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관습적인 순서를 따라 그의 신론의 바탕인 신()인식을 고찰하고자 한다. 그의 교의학의 대전제는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를 통하지 않고는 우리 인간의 신()인식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계시는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시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방법으로써만이 신인식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진리 안에 존재하시며, 진리 그 자체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진리 그 자체를 알 수 없다. 틸리케는 하나님이 인간의식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신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틸리케에게 하나님은 초월해 계시면서, 또한 인간 각자의 마음속에 내주(內住)하시게 된다. 신의 계시는 말씀으로 주어지며, 말씀은 이해의 영인 성령의 도움 없이는 해석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 자체로서 진리이시므로 그의 계시의 말씀도 진리인 것이다.

 

틸리케는 진리 안의 존재에 인간이 포함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그에 의하여 창조된 자, 도피하고 있는 자, 되돌아가고 있는 자, 의롭게 된 자이다. 그러므로 틸리케는 신학을 인간학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인간의 하나님이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진술은 전적으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진술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신학적인 진술 속에 현재해 있고, 이 진술에 인간학적인 연관을 준다.”

 

틸리케는 복음주의적 토대 위에 서서 신앙을 요청하는 사고를 중요시한다. 신앙을 요청하는 사고란 계시에 의존하는 사고를 말한다. 하나의 교리로서 하나님의 현존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실존이 진리로 이끌려지고 자기포기와 하나님을 향한 개방성으로의 변화를 경험하도록 수행하며, 이러한 변화에서 바로 신앙이 시작된다.

그렇다고 신앙은 자율적인 사고를 배격하거나, 반성하는 방법에서 엄격성을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 물론 틸리케는 신앙은 신학에 우선한다고 보았지만, 그렇다고 신앙이 몽매주의를 요구한다고 보지는 않았다. "생각하지 않는 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 “신앙은 오히려 지성을 부른다고 틸리케는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이해 없는 신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틸리케의 관점에서 신학은 계시의 해석이 된다. 그러나 신학은 항상 타락한 인간의 시도이다. 인간의 죄 상태는 그의 사고 기능의 구조적인 소여에서도 표현된다.” 짧은 논문에서 틸리케의 신학 전체를 세밀하게 검토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므로 이 논문은 틸리케의 관점에 따라 타락한 인간의 시도로서 위에 제시한 목차와 같이, (계시의 근원으로서의) 성부 하나님, (계시의 형식으로서의) 성자 하나님, (계시의 현재와 미래로서의) 성령 하나님, 그리고 독립적으로 삼위일체론을 분리해서 그의 신앙 인식에 관하여 간략하게 고찰하고자 한다.

 

2. 성부: 계시하시는 하나님

 

틸리케도 바르트도 모두 신론을 계시론으로 전개한다. 틸리케에게 성부 하나님은 계시의 근원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인 인간에게 자기를 알려주고자 계시를 주시는데, 그 계시는 인간이 하나님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인간은 계시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하나님을 이해하고 파악할 수가 없다. 이러한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서 틸리케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모습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는 계시를 이해한다.

 

2.1 ‘하나님의 자기 드러냄으로서의 계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서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본질이다. 역사와 자연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직접적인 자기 증시가 아니라 간접적인 자기 증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계시를 통해 드러내신다. “역사의 주는 그의 행위 속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는 형식인 말씀으로서의 계시는 누구에게나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현존은 직관되지 않고 신앙 속에서만 파악된다.”고 하는 틸리케의 말은 옳다. 예수님도 사람들 앞에서 말씀하실 때 귀 있는 자는 들어라고 하셨다. 이 말은 듣는 귀를 가진 인간 모두가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듣고 믿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자만 알아들을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2.2 ‘신 질문 일반으로의 지시로서의 계시

 

틸리케는 신 질문이 외적으로는 제기되지 않은 소크라테스적인 간접적인 질문으로서 들추어내는 기능을 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신 질문으로부터 나오는 대답이 계시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을 말한다. 틸리케는 계시로서의 신 질문이 가지는 두 가지 측면, 즉 잘못된 신 질문을 반론하고, 정당한 신학적인 진술을 8가지로 제시한다.

틸리케는 잘못 제기되는 4가지 신 질문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이런 종류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는 신을 정당하게 인식할 수 없다.

 

첫째, 전통적인 유신론의 신 질문이다. 이 경우에는 전승이나 종교적인 관례를 무비판적으 로 쫓는 오류를 범하게 되며, 결코 신에 대한 실존적인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둘째, 자연계시에 대한 정통 교리의 신 질문이다. 현실의 부조리한 경험으로 인하여 역사적 인 경험 가운데에서는 신의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셋째, 존재론의 신 질문이다. 신이 존재의 근거로 파악되어 존재의 차원과 동일시된다.

넷째, 인본주의자의 신 질문이다. 이 경우는 하나님이 인간 실존의 내면에 있는 자로서 나 타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네 가지 신유형의 신 질문은 신의 초월성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네 가지 질문은 결국 하나님의 실체를 적절히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잘못된 생각을 심어줄 수 있다. 이렇게 틸리케는 하나님에 대한 부적절한 관점을 차근차근 기각하고,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학적인 신 진술을 서술한다.

 

첫째, 하나님은 인간의 선() 규범과 동일하지 않고, 인간의 선 규범을 초월하신다.

둘째, 하나님은 인간이 생각하는 선() 이념을 초월하여 계신다.

셋째, 하나님은 종교적인 질문 밖에 계시면서 종교적인 질문 자체를 훼파한다.

넷째, 인간의 변증법적 사고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다섯째, 신 질문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질문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질문이 선 행되어야 한다.

여섯째, 하나님은 우리의 규범과 가치로는 천착할 수 없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인간의 규범 과 가치를 넘어서 그것들을 만드신 분이시다.

일곱째, 인간이 사용하는 신 개념은 하나님을 드러내기에 불충분하다.

여덟째, 하나님에 대하여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개념은 때로는 위험하다.

 

이러한 틸리케의 신학적인 주장은 당대에 맹위를 떨친 주류 신학에 대한 비판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틸리케가 특별히 비판했던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경우 존재론적인 신 탐구에 큰 비중을 두었던 학자였다. 틸리히는 그의 말 그대로 덧없음, 그들의 유한성을 깨닫게 하는 불안, 비존재의 위협 등이 주는 충격을 경험한 사람들만이 비로소 하나님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틸리히에게 있어 하나님은 인간의 유한성 안에 암시된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그러나 틸리히에게 하나님은 하나의 존재에 국한될 수가 없는 무한한 존재이며 존재의 힘, 존재의 근거에 더 가깝다. 이러한 사유의 흐름은 결국 인격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게 되는 결과를 맞이한다. 틸리케는 하나님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틸리히의 신인식에 맞서, 존재론적인 질문으로는 하나님을 파악하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2.3 ‘역사설립의 말씀으로서의 계시

 

창조주로서 역사적인 계시 안에 계시는 하나님은, “있으라!”는 말씀으로 창조(

바라)를 하신 분이시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초월적 존재이신 하나님에게 이르지 못한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이해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자신을 창조주로 계시하자면, 인간에게 다가오시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인간에게 하나님의 계시는 바깥으로부터 다가오는 것이다. 이때 하나님의 자기 계시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본질이다. 역사와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직접적인 자기 증시(證示)가 아니라, 간접적인 자기 증시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기 드러냄을 이해하지 못하고 성령의 증언이 필요한 것이다.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하나님의 드러내심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틸리히의 존재론적인 하나님 인식뿐만 아니라, 그의 스승 알타우스(P. Althaus)의 원계시론조차 거부한다. 알타우스의 원계시론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특별계시 없이도 자연에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틸리케의 신인식은 역사와 괴리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역사를 계시의 형식으로 파악한다. 틸리케의 역사관은 다소 이차원적인데 하나님은 역사 속에 직-간접으로 드러나지는 않되, 하나님의 계시가 역사라는 형식을 빌려서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말씀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하여 역사라는 형식을 택한다.”는 것이다.

 

그의 역사관은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와 비교할 때 가장 적확히 표현할 수 있다. 판넨베르크 역시 하나님이 먼저 계시하지 않으면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하는데, 그에게 있어 하나님은 창조와 역사가 공존하는 장이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역사 가운데 내재하며 동시에 초월한다. 또한 역사의 행위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은 자신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신다. 이에 반하여, 틸리케는 단순 역사와 자연을 통해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 속에 계시되므로 말씀을 통해서만 그에게로 갈 수 있다. 말씀 가운데 진술된 것은 실존을 변화시키는 선포라는 말씀의 테두리 안에서만 현재적인 것이며, 그런 범위 내에서 사건들은 계시로 화하여 다가오게 된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오직 계시사건 속에서 그를 역사의 주로 파악할 수 있다.

 

판넨베르크는 케리그마 속에서의 하나님의 현현(顯現)을 단지 이나 고지로 파악하지만, 틸리케는 하나님은 말씀의 직접성 속에서 자신을 은폐하지 않고 말씀 가운데 계신다고 본다. 인간에게 다가오기 위한 말씀 속에서 낮아지신 하나님의 현현은 자기를 드러내는 사랑의 모습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본성이다.

 

이러한 하나님 인식에서 틸리케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본질과 존재 속에서, 관계 속의 하나님이기를 결단하시고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루터의 주장을 따르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알리심 배후에 있을 뿐, 알리심을 도외시하고 우리가 알 수 없는 전적인 타자는 아니다. 하나님은 역사적인 우리를 향함 속에서 존재한다.

 

여기서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하여 알리는 방법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의지가 중요한데, 틸리케에게 있어 하나님의 의지와 본질은 결국 하나이다. “말씀과 행위 속에서, 그의 의지가 드러나는 곳에서, 그는 자신의 본질 속에 계신다.”

그리고 그의 의지와 본질이 함께 드러나는 곳에서 그의 존재는 역사적으로 되어감속에 들어오신다. “하나님의 활동성과 그의 명령은 무시간성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서 성취되는 현재성을 의미한다.”

 

3. 성자: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틸리케는 성자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의 형식으로서 이해한다. 틸리케는 또한 위로부터의 기독론을 거부한다. 그의 기독론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객관적 진술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았던 인간 예수의 인격을 영접함으로 인하여 그가 구주되심을 믿는 믿음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 예수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자 신성을 가지셨음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 역사에 등장했던 예수라는 한 존재를 신앙의 출발점에 놓는 것이다. 기독신자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로서 성자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보내신 그의 아들로서 신성과 인성을 지닌 채 이 세상에서 그의 직무를 완성하셨다. 그는 인격적으로 사람들을 만나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고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십자가에 처형됨으로써 자신을 인류구속의 제물로 주시고,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화해시켰다. 그는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선교명령을 남기고 승천하셨다. 하늘에 올라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신 그는 성령을 보내어 제자들로 하여금 교회를 세우게 하셨고 종말에는 재림하셔서 그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3.1 그리스도, 메시아의 칭호

 

예수는 자신이 기적의 능력과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가졌다는 사실, 변화산의 사건,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 (16:21), 등을 생전에 밖으로 알리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예수는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나타내는 것을 지극히 꺼려하셨기 때문에, 그에게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는 칭호는 부활 후에 붙여진 것이다. 전통적으로 피압박 민족인 유대인사회에서 메시아의 의미는 유대민족을 구원해서 새로운 유대민족 국가, 곧 다윗왕국을 건설하는 자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세례 요한의 옥중 질문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당시 예수의 생전 활동은 유대민족이 기대하는 메시아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세례 요한조차 의심했던 것이다. 예수의 지상 사역의 목적은 십자가 사건을 통한 인류의 구원이었지,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로서의 출현이 아니었다. 예수도 처음부터 이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의 생전에 그런 뜻의 메시아라는 말의 사용을 금지했을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금지를 신약학자 브레데(W. Wrede)메시아 비밀로 불렀고, 디베리우스는(M. Dibelius)비밀의 신현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틸리케는 메시아 칭호를 신앙고백으로 파악한다. 여기서 먼저 메시아라는 말이 예수에게 적용되려면 이 말의 개념이 바뀌어져야 할 필요성이 생긴다. 즉 예수의 생애를 통해 이 말의 의미가 곧 예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틸리케에 의하면, 이 말의 개념들은 세례를 받아 이제까지의 의미내용이 제거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메시아에 이르는 적법한 길은 인격적으로 예수를 만나는 것, 예수를 믿고 그를 따르는 것이다. 메시아 신앙고백은 예수와 인격적으로 만남의 결과로서 일어나는 것이지, 만남의 전제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예수 부활 이후의 예수 공동체는 나사렛 예수를 자신들에 의해 세례 받은 고유용어로서 그리스도, 메시아라고 불렀다.

 

3.2 예수 인격과의 만남

 

틸리케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성적인 접근방식을 거부한다. 그에게 있어 그리스도를 파악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신앙의 눈으로 그리스도의 인격을 만나는 방법뿐이다. 복음서가 진술하는 예수의 인격적인 인상은 역사적인 전기(傳記)인 것과 초월적인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평범한 것전적으로 다른 것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대립적인 요소들은 신앙에 의해서가 아니면 포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틸리케에 따르면,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자만이 역설(逆說)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열쇠를 얻는다. 이러한 것들이 결합된 예수라는 존재가 오직 한 개인의 신앙의 능력으로 구주로서 자리매김하고, 동시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역사 속에 양립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틸리케는 초월적인 것, 신적인 것, 전적으로 다른 것을 역사적인 것과 결합시키려하는데 이는 판넨베르크가 역사적인 것, 인간적인 것, 평범한 것에 대하여 역사이성적인 반성과 통찰을 시도하는 것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동시에 틸리케는 바르트와 같은 신앙 지상주의도 거부한다: “사고가 시도하지 않은 것은 결코 믿을 수 없다.” 틸리케는 자유주의 신학이 이성과 신앙의 조화라는 명제 앞에서 신앙을 실존적인 선택으로 파악하거나, 그리스도를 역사적인 논구의 대상으로 간주하던 흐름에 반대하여 복음주의적인 신앙의 회복을 들고 나온 신학자이다. 그러나 틸리케의 신학을 신앙 지상주의로 이해하지 않기에는 부분적으로 어려움이 따른다. 예수를 개인의 신앙으로서만 구주로 영접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에 대한 기록의 신빙성을 저해하는 여러 가지 가설들에 대한 이성적인 입증을 뛰어넘어야 예수의 인격을 만날 수 있다고 주장하면, 신앙 지상주의적인 경향은 피할 수없는 것이다.

 

판넨베르크가 계시를 초월적이고 초이성적인 것으로 보는 반면, 틸리케는 역사적인 예수가 바로 계시적인 존재라고 주장한다. 틸리케에게 있어서 계시에 대한 논구는 바로 예수라는 인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틸리케는 판넨베르크처럼 역사적인 예수에서 출발하여 기독론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판넨베르크가 역사적 예수의 행위, 즉 그의 사역 내용에 관심을 두는 데 반하여, 틸리케는 그의 인격에 더욱 비중을 둔다. 같은 맥락에서 틸리케는 예수의 그리스도적 지위 역시 그의 행위가 아닌 그의 본질로부터 입증된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틸리케는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예수를 그리스도, 즉 구속자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그는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있다.”

둘째, “그는 연대함에 있어서 우리의 형제가 되기 때문에 우리의 구속자이시다.”

셋째,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은 서로 불가분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 세 가지의 측면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구속사적 행위가 아닌 그의 본질적인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지위를 찾고 있는 것이다.

 

3.3 그리스도의 직무와 인성

 

틸리케는 그리스도의 세 직무론을 기독론의 체계적 원리로 제시한다. , 선지자적 직무, 제사장적 직무, 왕적 직무이다. 틸리케에게 있어 세 직무는 그리스도의 메시아적인 인격과 분리할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또한 이 세 직무는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간의 직무의 연속선상에 있으면서, 동시에 불연속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 이를테면 구약의 제사의식과 다르게 그리스도는 제사장뿐만이 아니라 스스로 제물이다. 나아가 왕일뿐만 아니라 죄수이다. 또 선지자이면서 동시에 집행자이시다. 그리스도는 선지자적인 직무를 통해 하나님의 편에 서서 인간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그러한 직무를 완수하는 집행자이시다. 그는 세상의 권역을 벗어난 낯선 인격을 지니고 있기에 기존의 선지자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초월적 존재인 것이다. 동시에 그리스도는 제사장으로서 십자가를 매고 음부에 내려가셨다. 제사장 직에 있어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대리자로 서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는 죄수로서 처형되었다가 왕으로서 부활하고 있다. 그러나 부활은 십자가 사건에 종속된다. 부활한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못 자국을 가지고 있듯, 부활이 선행한 십자가 사건과 별개로 이해될 수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왕 되심은 영광으로 가득 찬 것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이 병행한 것이다.

 

한편, 틸리케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융합에 관해서는 여타 신학자만큼의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대신 그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서 논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특징이 그의 인성을 설명한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섬기는 모습을 지닌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깊이이다. 목자의 고귀성은 양을 위하여 자신을 수단으로 바치는 낮아지심에 있다. 그리고 그가 선한 목자가 되신다는 유비는 그가 인간을 위해 섬기며 희생하셨다는 점에 근거하며, 그가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에게 보내심을 받았다는 점에 근거하지 않는다.

 

둘째는 그리스도가 당한 시험이다. 틸리케는 히브리서의 우리와 같이 시험받았다는 구절을 근거로 그리스도는 인간성의 본래적인 요소를 갖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리스도가 사단에 의해 시험을 받았다는 사실이 바로 그의 성육신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혹 가능성은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지 않았다는 가현주의의 주장을 배격한다. 죄에 대한 저항 역시 그리스도에 대한 죄의 유혹이 실재였다는 것을 말하며 그리스도의 역사적 실재를 증거한다. 그리스도는 기도 가운데 유혹가능성의 상황을 극복했지만, 유혹의 한가운데를 걸어갔던 존재이다.

 

3.4 화해론

 

틸리케는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화해라는 사명을 완수한 존재라는 것을 긍정한다. 틸리케에 따르면 화해사건의 상징물은 각기 중요한 유비적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로 골고다의 십자가는 양의 피와 연결되며,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관계를 끊고자 하는 위협으로부터 인간을 지키는 것이다.

둘째로 상징물인 속죄물에 대한 논구에서 틸리케는 안셀무스의 대리충족설을 긍정하는 동 시에 부정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드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대신 충족시켰고 이는 구약의 제물과 비슷한 기능이었다.

셋째로 식사공동체는 유대교의 유월절 의식으로부터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억하는 공동 식 사로서 발전한다.

넷째로 출발 준비됨은 유월절 식사를 하고 애굽을 떠나는 이스라엘처럼 성만찬을 한 후 파송 받는 선교적 상징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즉 그리스도의 희생은 공의뿐만이 아닌 사랑의 사역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틸리케는 안셀무스의 대리충족설에 루터의 하나님 사랑의 동기를 연결시킨다. “하나님의 공의는 훼손된 공의와 훼손된 존엄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다. 이에 반해,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을 위하여 스스로 보상이 되시는 구속적인 사랑, 즉 자기를 무조건적으로 주심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유비적인 관계에도 불구, 틸리케는 신약과 구약의 화해사건은 불연속적이라 단언한다. 구약의 제물은 복음에 의하여 능가된다. “인간이 신에게 제물을 드리지 않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제물을 드린다.” 이것이 율법으로부터 복음으로의 전환이다. 히브리서가 옛 언약의 불완전성과 능가됨을 말하듯, 옛 언약은 매일 그리고 매년마다 제사가 드려졌으나, 하나님과의 궁극적인 질서와 평화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단번에 스스로 제물이 되어 궁극적인 평화를 이루고 분리를 제거하였다.

 

또한 틸리케는 하나님을 떠나서 실존적 불안에 빠져있는 독일인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불안을 극복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불안과 도피의 흔적을 갖지 않는 현대생활이 별로 없다. 이러한 위장적 탈출 대신에 진정한 불안의 극복이 있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우리에게 닥친다. 기독신자들은 너는 세상에서 불안할 것이다. 그러나 즐거워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말씀하신 그분을 생각지 않고는 이러한 극복을 말할 수 없다.”

 

또한 틸리케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대리는 단지 죄의 대속함의 차원을 넘어서 공증적이고 포괄적인 성격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리스도인과 함께 죽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부활 역시 그리스도인과 함께 부활하는 것이다. 십자가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정의는 분배적이고 수동적인 정의가 아니며, 능동적이고 참여적인 정의를 요구한다. “그리스도의 대리는 우리의 참여가 필요 없는 사실적인 전환이 아니라 우리의 따름을 요구하는 사랑의 인격적인 희사인 것이다.”

이러한 틸리케의 화해론은 바르트의 은총 일원주의와 좋은 대비를 이룬다. 바르트가 십자가 사건을 하나님의 은총에 따른 원결정 하에 이루어진 약속의 실현으로 보는 반면, 틸리케는 그리스도의 대리적 죽음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복음주의적인 메시지를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바르트는 형벌과 심판에 의미를 두지 않는 반면, 틸리케는 심판의 실재성을 강조한다.

 

3.5 부활론

 

틸리케는 예수의 부활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본다. 고전 15:20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첫 열매라는 바울의 증언을 틸리케는 의심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그는 예수의 부활을 그리스도의 왕직에 넣는다. 부활론에 있어서 틸리케는 불트만을 비롯한 실존주의적 신학의 노선이 그리스도 사건의 의미성만을 중요시하고, 십자가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사실은 도외시 하는 것을 비판 한다. 불트만의 케리그마 신학은 부활사건의 역사성에 무관심하고 그 사건을 초월하여 인격적인 선택을 통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자 한 반면, 틸리케는 부활사건을 하나의 역사적 실재로 굳게 믿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지상적인 삶의 예수와 부활 후에 높아지신 그리스도의 연속성이 지닌 존재적인 배경에서 찾는다. 두 상태의 연속성의 존재적인 배경은 부활한 자가 못 자국을 지닌 채 그의 제자들과 식사(20:20)를 반복한다는 사실에서 입증된다.

틸리케는 부활사건을 인식함에 있어서 역사적 인식보다는 신앙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역사 비평을 통해 부활사건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그것의 사실성을 깨닫고 믿음에 이르는 노선을 취한다. 그는 부활사건을 역사적인 증명의 대상으로 삼는 객관주의와 부활사건의 존재사건에 대하여 무관심한 실존주의를 모두 배척한다. 불트만의 스승 빌헬름 헤르만 (W. Herrmann)은 예수의 내적 삶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부활을 이해하고자 했으며, 판넨베르크는 예수의 부활을 원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검증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과는 확연히 대비된다.

 

틸리케는 부활한 자에 대한 신앙을 가질 때에만 비로소 역사적인 예수를 바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이해에서 신앙을 정초하려는 틸리케의 입장은 부활사건을 내적 체험으로 이해하는 헤르만이나 부활의 사실적인 지식에 신앙을 정초하려는 판네베르크의 입장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부활하신 예수의 본래적인 것과의 알고도 모르는 만남에서 우리의 마음은 뜨거워진다. 틸리케는 그의 설교에서 예수의 십자가 부활을 알지 못하면 존재의 자리가 없다고까지 말한다.

 

우리는 이렇게 침묵하셨던 골고다의 밤의 능력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없다면 우리 는 어디에서 존재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침묵의 깊음과 그 골짜기에서 우리에게 보 내신 것과 그가 죽음 안에서 우리의 동료인 것과 그가 진실로 높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과 그 것들이 부활일에 능력으로 우리의 모든 기대를 뛰어넘는 영광의 성취를 실현했다는 것을 알지 못 한다면, 우리가 어디에서 존재해야 합니까?”

 

3.6 기독론 평가

 

틸리케의 기독론은 이상의 짧은 논구에서도 보듯 틸리케 신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이 역사 가운데 침입하여 인간이 알 수 있는 방법으로 인간에게 자신의 존재를 현현하고, 구원의 메시지를 드러낸 통로이자, 하나님 그 자신인 것이다. 틸리케의 기독론적 지향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틸리케는 자유주의 신학에 의하여 부정당한 예수의 메시아적 지위를 복원하고자 하였다. 그는 리츨과 같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예수를 윤리적인 스승으로 축소시키는데 반대하였다. 동시에 틸리케는 예수를 이성적 탐구의 대상으로 제한하는 데에도 반발하였다. 그는 성서적 근거에 입각하여 예수의 대속사역 및 신성을 긍정하고 십자가사건을 구원사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긍정하였다.

둘째, 틸리케는 예수의 행적과 사역에 초점을 맞춘 현대적, 역사적 분석으로부터 눈을 돌려 예수의 인격에 주목하도록 한다. 그는 예수의 탄생에서부터 부활에 이르기까지, 복음서가 증거하는 예수의 본성에 기반하여 그에 대한 신앙을 정립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이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교조적인 선포가 아닌, 그의 삶에서 보이는 그의 인격을 신앙의 눈으로 보며 그의 구원자 되심을 저절로 수긍하게 되는 과정인 것이다. 이렇듯 틸리케는 현대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굳게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또한 틸리케의 기독론은 성령론과 상보적인 관계이다. 틸리케가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데 있어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성령의 힘이 아니고서는 믿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인간의 이성과 지식으로 이해하거나 설명하기 어려운 성령의 힘이 예수의 구주되심을 믿게 하고, 그의 신성과 부활 사건 역시 받아들이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틸리케의 기독론은 성령론을 빼고서는 제대로 이해되기 어렵다.

 

그러나 틸리케의 기독론이 주는 모호함에 대한 비판도 피할 수 없다. 앞서 언급했듯, 이성의 눈으로 복음서를 바라볼 때 밀려들 수밖에 없는 비판적 의문들이 있음에도, 틸리케는 사실명제가 아닌 당위명제로서 의문 자체를 봉쇄한다. , 그러한 의문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하면서도, 의문을 정면으로 해결할만한 논거는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접근은 그의 주장의 핵심 전제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간의 구원자라는 명제를 바닥부터 흔든다는 점에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반론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구조적인 한계 안에 머물고 있다.

 

4. 성령: 의인을 만드시는 하나님

 

틸리케는 성령 하나님을 신앙, 사랑, 소망의 근거이자 현재화의 힘으로 본다. 성령이 사용하는 현재화의 수단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령이 수행하는 현재화의 모습은 교회요, 현재화의 배타성은 다원종교 사회에서의 복음 선포이며, 현재화의 추월은 종말론이다. 그러므로 성령론이라는 범주 안에 성경론, 교회론, 선교론, 종말론 등의 굵직한 주제를 포괄시킨다. 왜냐하면, 성령은 하나님의 현재적 표현이요, 그리스도의 육신이 이 땅을 떠난 이후에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진정한 인간-의인을 만드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4.1 ‘진정한 인간-의인으로서의 성령

 

틸리케는 오로지 믿음이라는 종교개혁의 구호를 받아들이는데 그치지 않고 종교개혁적 신학을 더 보완한 것은 성령의 안내와 도움을 강조한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틸리케에게 있어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현재 활동하는 성령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신앙은 말씀과 성령의 증거에 대한 관계에서만 이해된다.”성령에 의하여 드러나고 구속사에 들어온 영은 하나님에 의하여 의도된 창조기획에 유비적인 진정한 인간이라고 하면서, 그는 루터의 옛 사람-새 사람 공식을 보충하고 있다.

 

틸리케는 루터교도이면서 전통적 루터 사상과는 다른 주장을 하는 안드레아 오시안더(Andrea Osiander)를 비판했다. 믿는 자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이미 의인이라고 주장하는 오시안더의 열광주의를 경계하며, ‘새 사람일지라도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고 단언한다. 새 사람에게 주어진 의는 단지 법정적인 의일 뿐이고, 실질적으로 완벽한 의를 구현하며 살아갈 능력이 생긴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오시안더는 믿는 자는 성령의 내주를 통해 완전한 성결을 획득했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새 사람의 죄인됨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틸리케는 오시안더를 철저히 비판하고, 루터의 칭의론-믿는 자는 의인인 동시에 죄인임-을 수용한다.

 

그러나 신앙은 말씀과 성령의 증거에 대한 관계에서만 이해된다고 말한 바와 같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씀을 깨닫고 믿음이 생긴다고 강조했던 틸리케가 성령의 도움으로 얻은 신앙에도 죄의 요소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본다면, 성령에 대해 어느 정도는 회의적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4.2 성경론

 

한편 틸리케에게 있어 성경은 성령 하나님의 작품이다. 따라서 말씀은 영적이며 단순한 지적 분석을 통해서는 그 영적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 그리고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말씀의 의미를 해석해 낼 수 없다. 같은 맥락에서, 틸리케는 그가 주장하는 성경과 성령의 불가분한 관계를 기반으로 불트만의 실존론적인 접근을 비판한다. 성령의 능력을 거세한 성경해석은 부당하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틸리케는 동시에 축자영감설의 맹목적인 성경 신성화에도 반대한다. 틸리케에게 있어 축자영감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불트만의 그것과 동일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접함에 있어 성령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구술을 기록한 문자의 의미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결국 문자를 죽은 문자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틸리케는 축자영감설이 인격적 영감을 거부하고 기계적인 영감에 빠짐으로써, 인간의 이성과 자유와 지성을 사용하는 성령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문자로 고정화시켰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기계적 영감설 비판은 유기적 영감설에는 적용될 수 없다. 유기적 영감설은 하나님의 말씀이 시대에 제약된 언어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졌으며, 따라서 성경무오에 대해서도 기계적인 무오가 아니라, 유기적인 무오를 주장하는 것이다.

 

틸리케는 또한 성경 연구에서의 역사비판학적인 접근도 반대한다. 그러나 그는 역사비판의 상대적인 장점을 인정하며 수용하는 것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그에 따르면 역사비판학에는 다음 세 가지 과제가 있다.

 

첫째로 편집과 추고와 구전 등, 다양하게 변양된 텍스트의 근원적인 모습을 찾는 것이다.

둘째로 근원적인 텍스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며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를 찾아야 한다.

셋째로 역사적인 성경분석에서 예수에 대한 보고는 역사적인 보고가 아니라 케리그마적인 보고이다. 케리그마적인 예수는 역사적인 예수에 근거한다. 역사적인 예수의 삶에 대한 보고는 회상(回想), 말하자면, 부활 이후에 공동체 안에서 형성된 것이다.

 

틸리케가 역사비판적인 접근과 첨예하게 대립하는 부분은 부활을 둘러싼 논란이다. 그는 부활 이전의 역사적인 예수와 부활 이후의 그리스도를 분리해서는 안 된다는 마르틴 켈러(Martin Kahler)의 주장을 따른다. 불트만이 케리그마와 역사를 분리하고자 했지만, 예수의 역사적인 삶에 대한 기술은 이미 케리그마와 분리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것은 회상(回想), 말하자면 부활 이후의 신앙 공동체에 의해 쓰인 역사적 예수의 삶에 역투영된 것이었다. 틸리케의 관점에서 불트만의 비신화론화의 시도는 시대정신에 대한 양보의 양식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타협이었다. 틸리케는 성경을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로 보고 있다.

 

첫째, 성경은 창조자이자 역사인 주 하나님을 드러내는 계시이다.

둘째, 성경은 구속자 하나님의 계시로 그가 보낸 그리스도에 관하여 계시한다.

셋째, 성경은 성령 하나님의 계시로 성령을 통해 계시와 말씀을 적용케 하는 현재적 기능을 수행하며 동시에 내적 증언을 통해서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상황으로 전이(轉移)시킨다”.

 

그러나 틸리케가 역사와 케리그마가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신약성서 속에 혼재한다는 것을 인정한 시점에서, 그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중요한 전제를 인정해 버리는 셈이 된다. 그러한 혼재는 결국 사실이 아닌 것이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가능성을 크게 내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혼재를 전제한다면, 불트만이 신약성서의 중요한 기록에 대한 사실유무를 따지는 활동을 포기하고, 믿음이라는 초월적인 선택을 통해 신앙을 추구하자고 촉구했다는 지적은 어쩔 수 없는 것이 된다.

 

4.3 교회론과 선교론

 

성경이 성령의 작품이자 계시라면, 교회는 성령의 현재화된 모습이다. “교회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현재이다. 그리스도의 현재란 성령을 통해 수행되는 그의 말씀과 사역의 현재화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의 현재인데, 이는 말씀의 선포와 성례전을 통해서 매개된다.

 

그러나 틸리케는 동시에 교회의 현실을 직시하며 이를 비판적으로 극복하고자 한다. 그는 서구 교회사 속에 나타난 교회의 허물을 언급하며,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의 눈에 있는 것이지 교회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교회는 사실과 소망 사이에 서서 소망을 추구하며 나아가는 존재로서 자족적인 안일함에 빠지거나 현재 권력의 단맛을 추구하다가는 교회의 본질조차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의 역할 중 하나는 선교인데, 틸리케는 이 선교 역시 성령의 현재적인 활동으로 파악한다. 선교는 본질적으로 배타적인데 그것은 복음의 유일성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타 종교에 대한 불인정을 통해 갈등을 유발하는 일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타인의 선택을 존중하며 타종교를 관용적인 정신으로 대해야 하는데, 이것은 신앙이 강제될 수 없는 자유로운 선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타종교 포용론에 대하여 틸리케는 네 가지 관점을 제시한다.

 

첫째, 기독교 신앙의 진리는 인간의 요구나 추구에서 얻어지는 진리가 아닌 드러나는 진리, 주어지는 진리이다.

둘째, 복음의 본질은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여 이웃사랑의 형태로 확장되는 것이고 이것은 타인의 자발성을 존중하는 것도 포함한다.

셋째, 강요된 신앙은 인간적인 이데올로기가 섞여 있어 순전한 복음을 위배한다.

넷째, 이상의 명제들로 인하여 관용과 종교의 자유가 요구된다.

 

틸리케의 타종교에 대한 관용적인 자세는 복음주의 일각에서 드러나는 기독교 근본주의적인 선교활동에 경종을 울린다. 특히 한국 기독교의 몇몇 열성적인 그룹들이 보여주는 과격한 모습은 타인의 선택권에 대한 인정이 조금도 없다는 점이다. 틸리케와 같은 복음주의 신학자가 신앙과 선교의 중요성을 무너뜨리지 않고 동시에 종교적 관용을 중시했다는 사실은 이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렇다면 복음의 절대성 내지는 배타성과 민주적인 종교관 사이에는 양립할 수 없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간과한 틸리케에게는 중간의 회색 지대에 서있다는 비판도 가능하게 된다. 왜냐하면 복음이 가져오는 구원이라는 중대한 결과와 복음이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계시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 계시를 접할 기회를 주기 위해 발생하는 어느 정도의 강제성조차도 용납할 수 없는 부분으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과거에 세속군주들이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기독교를 강요한 결과에서 현재의 기독교의 위상이 정립되었는데, 이러한 역사적 강요는 하나님의 경륜과 과연 무관한가? 라는 질문을 통해서 보듯, 복음의 절대성과 민주적인 종교관의 장점만을 두루 취하면서 서로 모순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언제나 무리가 따른다.

 

그의 신학은 민주적이고 인간존중의 배경이 짙게 깔려있는데, 나치 정권의 반민주적, 반인간적인 모습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종교적 관용론의 주장 역시 당시의 시대정신과 틸리케의 신학적 사색의 결과로 나타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틸리케의 종교적 관용론은 그가 줄기차게 주장했던 커뮤니케이션을 원하는 하나님의 성부론, 그리고 대속물이자 인간의 참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의 기독론, 그리고 하나님 혹은 그리스도의 현재적인 표현인 성령론과 일관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점에서, 그의 신학적 입장으로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4.4 종말론

 

틸리케의 종말은 하나님 영의 현재화의 추월로서의 개념이다. 종말의 시간은 세 가지 차원의 의미가 있는데 첫째로 세상의 시간에서의 종말이며, 둘째로 부활사건 속에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 그리고 셋째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정립된 종말의 목표이다.

 

틸리케는 종말에 대한 불트만의 실존론적인 접근이 세계에 대한 정상적인 관점을 흔들어놓고 있다고 보고 비판한다. 그리고 자신의 종말론을 개진함에 있어서, 그것은 현재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이 아닌, 미래의 시간적인 과정에서 다가오는 사건으로서의 종말이다. 그리하여 틸리케의 종말론은 개인적인 종말론과 보편적인 종말론의 두 가지 차원에서 개진된다.

개인적인 종말론은 죽음과 그 이후의 영생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죽음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초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구주되심에 대한 확신이 성령의 증거를 통해서만 발견된다. 그리고 영생은 현세와 내세를 포괄한다. 현세와 내세를 연결하는 두 가지 연속성은 말씀과 사랑이다.

 

보편적인 종말론은 우주적이고 대변혁적인 사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재림을 논구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오는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현재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알려지고 시작되기는 하였으나, 이 시대 밖으로부터, 다른 곳에서부터 찾아오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틸리케는 리츨과 같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참여적인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반대한다. 또한 하나님 나라가 직선적으로 발전하는 유토피아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주장하는 과정사상을 비판한다. 이 점에서 틸리케는 기존의 일관된 민주주의적, 참여적인 신학의 관점보다는 루터의 관점에서 인간의 한계와 근본적인 죄성에 주목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에 대한 비관론이나 회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간의 실체를 겸허히 인정하는 방향을 추구한다.

 

기독교적 종말과 함께 오는 최후의 심판에 관하여 틸리케는 정통적인 이원론적 심판론을 지지하며 바르트, 틸리히, 몰트만 등과 노선을 달리한다. 그에게 있어서는 현재의 결단이 중요하며, 이는 무제약성의 비중을 갖는 중차대한 결단이다. “영원은 순간에 달려있다. 따라서 이 순간은 종말론적인 질()을 얻는다.”

 

또한 그의 영생과 영벌의 이원론을 부정하는 시도를 비판함에 있어서 틸리케는 이러한 시도의 변증법적 방법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한다. 여기서 그는 핵심이 되는 명제의 사실 여부에 대한 논구에서 벗어나 방법적 정당성에 대한 비판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강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사랑이 초극적으로 모든 대립을 포괄하므로 이원론을 반대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이런 주장은 헤겔의 변증법적 도식이라는 논리로 대응하고 있다.

 

5. 삼위일체론

 

틸리케는 삼위일체론을 계시의 주체이신 하나님과 말씀, 그리고 행위의 저자이신 자신과의 관계로 본다. 삼위일체론은 계시, 즉 역사를 정립하는 말씀과 더불어 나타나는 하나님의 문제에 대한 보조구성의 의미를 지닌다. 틸리케는 삼위일체의 선()역사를 개관한 후에 오늘날 수용된 삼위일체의 형식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을 제거하고 단순히 이성에 접근시킨 부당한 시도라고 파악한다. “엄격히 말해서 삼위일체는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모든 해결책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틸리케는 하나님을 신비에 내맡기지 않고 역사를 정립하는 유일한 주체로서 사고하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긍정하기도 한다.

 

삼위일체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말은 개혁신학적 삼위일체론을 표준적으로 압축하여 나타내고 있다.

 

"聖父, 聖子 그리고 聖靈이라는 표현들은 聖三位가 실제적으로 구분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표현들을 하나님의 상이한 활동들을 따라 하나님을 言表한 그 때 그 때의 別稱 정도로 이해해 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성삼위가 상호 구분되시는 것 이지 분리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이 성부로부터 구분되심이, 성령이 성부로부터 發 出하신다는 말씀 가운데 암시되고 있다. 그리고 성령이 성자로부터 구분되심은 성령이 다른 보혜 사로 불리우심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틸리케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동기에 기반하여 삼위일체 신()사상을 전개한다. 이제까지 논구한 틸리케의 성부, 성자, 성령론을 종합해보면, 이러한 사상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인간을 사랑하는 성부께서 인간의 죄를 구속하기 위하여 아들을 보내셨고, 그 아들은 인류 역사에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설파하며 그분의 나라를 시작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하여 승천하신 이후에는, 성령을 보내셔서 사랑하는 인간들에게 계시하고 가르치고 믿는 자를 인도하신다. 또한 성부, 성자, 성령은 역사적 흐름 속에서 내재하면서 동시에 역사를 초월하여 계시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에 개입하여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양식으로 본인을 계시하셨고, 현재에도 성령을 통해 인간의 내면에 신비하게 작용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날 수 있었고, 인간은 오직 이 가능성을 붙잡아야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이룰 수 있게 된다.

 

틸리케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은 관계 속의 하나님이라는 명제에 바탕을 두어야,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해진다. 관계의 개방성은 그리스도의 아버지와의 유대성과 그리스도의 인간에 대한 유대성이라는 이중적 유대성에서 드러난다.” 삼위일체는 사랑으로 표현되는 상호소통적인 관계이며 우리라는 표현에서도 그러한 관계성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 유대성은 세 위격이 별격의 존재라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 이 세 위격은 사실 하나이며 구속사의 어느 단계에서나 동일한 분이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을 향하여 창조자 하나님이여 오소서!”라고 기도해야지, 성부 하나님이 부여하는 무언가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예수님의 성령에 대한 가르침은 요한복음에 잘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보면,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시는데, 제자들에게 오신 성령은 그들과 함께 거하고 또 그들 속에 계시며 가르치신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 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실 것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 라."(14:15-17).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 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14:26).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삼위일체론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일체(一體)를 의미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요한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이들 인격체의 숫자가 하나라는 것은 아니다. 인격적인 다름 가운데서 의지와 뜻과 활동의 목적에서 동일(同一)한 하나라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해서 잞 살펴보면,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과 아들과 성령과 제자들의 사위일체(四位一體)를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아버 지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 십시오."(14:20)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17:21-23).

 

바울은 성령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니라 ”(8:11), “우리를 살려 주는 성령”(고전15:45)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도구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바울은 더 나아가서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6,17)고도 말한다. 말하자면, 바울은 성령을 공유할 수 있는 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도구적인 의미는 베드로가 오순절 설교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그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줄 것이며”(2:17-18)라고,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여호와의 예루살렘 회복 약속을 인용한 부분에서도 잘 나타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다.”(2:33)고 한 말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베드로는 여기에서 성령은 어떤 모양이나 형상이 없이, 다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 같이 말하고 있다. 또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오순절 날의 성령강림 사건을 생생하게 잘 기록하고 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안에 가득하며 마 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2:2-4)

우리가 다 우리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된 일이냐 하며”(2:11-12)

 

우리는 이렇게 성경 기사에서도 성령에 대한 표현이 각자 서로 조금씩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제자들과 성경기자도 인식의 차이를 보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삼위일체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성령을 구체적인 인격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때문이다. 틸리케는 세분이자 한분인 인격적 삼위일체의 역설(逆說)을 지지하는 전통적인 삼위일체설에 이의 없이 동의하였다. 그러나 그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탐구될 수 있는 존재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또는 더 이상 구체적인 진술이 어려웠기에,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진술에 큰 비중을 두지 않은 듯하다. 그렇지만 관계 속의 삼위일체라는 자신만의 색깔이 담긴 개념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소통과 교제를 중요시하는 그의 신학과 일관된 조화를 이루는 삼위일체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틸리케를 비판적으로 자세히 보면, 그가 인격적 삼위일체론에 동의한 것과는 달리 성령이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도구적 성격을 어느 정도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혼선은 그가 성령이 그리스도의 현재적인 모습으로 존재한다고 말하면서도 인간에게 신앙을 갖게 하는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나타나는 결과이다. 틸리케에게 성령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인간의 마음의 눈을 여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아니면 인간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능력의 한 매개체이다. 만일 성령이 임재해야만 말씀을 깨달을 수 있고 그리스도와 더욱 밀접해 질 수 있다면, 그분을 더욱 요구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제삼위 성령 하나님의 신적 위상을 도구적으로 격하하는 행위가 아닌가? 성령이 기독신자에게 내주(來駐-內住)한다고 말한다면, 인간은 결국 다중인격체인데 무엇이 진정한 자아인가? 이런 점들을 생각하면, 성령을 이성으로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가능해 보인다. 신학자들은 물론 목회자들의 설명이 각각 서로 틀릴 뿐만 아니라 때로는 모순적이다. 성령은 우선 믿음으로 접근하는 길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러므로 성령에 대한 연구는 더욱 진전되어야할 소명이 요청된다.

 

6. 결론적 평가

 

틸리케가 살았던 시대는 독일 나치의 전횡에 사람들이 극심한 정신적 물질적 고통을 겪고 있었으며, 기독교적인 메시지를 통해 그 상황을 어떻게든 수습해야 했던 시대이다. 그는 나치와 타협하였던 독일 국가교회를 반대하였던 목사로서, 그러한 교회의 역사적인 과오와 현대적 신학의 오류를 체험하면서, 고백교회의 역할에 앞장설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 아마도 이러한 시대적 배경의 결과로서, 틸리케의 소통적, 민주적, 참여적인 신학 노선이 탄생하였으리라 생각된다. 틸리케의 성부론, 성자론, 성령론, 삼위일체론을 보면, 그의 독특한 색깔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정통 루터교적인 기반을 떠나지 않는 복음주의 신학자였다. 그런 까닭에 진보적인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내세우는 한발 더 나아간, 소통적, 민주적, 참여적인 노선과는 분명한 선을 긋는다. 이를테면 틸리케는 부활사건에 대한 이성적인 회의의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또한 인간이 참여하여 이루어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또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증언에 대하여 사실상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현대적인 성서비판론과 노선을 달리하고 있다. 비록 틸리케 본인은 성서비판론의 학문적인 가치를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회의의 가능성이라는 자유주의 신학의 다양한 기본 전제를 전면 부인하였다.

 

이에 대하여 그의 대안은 성령을 힘입은 신앙의 눈으로 예수의 인격을 만나고, 그의 구주되심을 확신하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신학적이기보다는 목회적인 입장에 치우치는 감이 없지 않으며, 그보다는 오히려 심리적인 차원의 주장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고 하겠다. 실제로 틸리케는 성령은 과연 어떤 이들에게 신앙의 눈을 띄워주는가내지는 인간은 그러한 과정을 촉진할 능력이 있는가하는 문제에는 함구하고 그 이상의 논구는 진행하지 않고 있다.

 

그의 신학이 가지는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틸리케의 민주적이고 참여적인 노선은 기독교 일각에서 현대 복음주의가 근본주의로 역행하는 흐름에 크게 경종을 울린다고 하겠다. 그리고 기독교회가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사리를 취하는 몇몇 나라들에 있어서 현실적으로 제시하는 몇몇 올바른 방향의 정당함은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틸리케의 신()인식을 통해 살펴본 그의 신학이 소통과 사랑의 관계를 하나님의 본질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소통과 권위주의가 지배하는 한국 신학계에 더욱 큰 의미를 던져준다고 할 것이다.

(숭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