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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 세계관과 기독교

heojohn 2020. 4. 5. 23:34

 

 

[1] 포스트모던 세계관의 두 가지 측면

 

포스트모더니티는 모더니즘에 대한 회의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모더니즘이 합리성의 미명 아래 저질렀던 비윤리성을 폭로함으로써 그것의 한계성을 보여주었다. "진보와 질서에 대한 신념, 합리성과 도덕적 투명성의 바탕에서 출발했던 모더니티의 기획은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참혹히 무너졌다.” 이 포스트모더니티는 하나의 지적 내지는 대중 문화적 현상인데, 이를 확장하여 전체적인 세계관에 조명하여 볼 수 있다. 그리하여 포스트모던 세계관은 첫째, 보편적, 종합적 관점을 거부한다. 의미와 목적을 거부하며 이를 정치적 의도의 산물이라고 간주한다. 둘째, 포스트모던 세계관은 스타일의 혼합이며 각각의 파편들은 서로 우월을 가늠할 수 없다. 그리하여 전체는 부분의 집합으로서 일관성이 결여된 한 덩어리가 된다. 셋째, 개인과 그 독특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다름을 존중하는 가치관을 갖는다. 넷째, 객관성을 지양하고 주관성을 찬미하며, 사물을 자신과 연관시켜 파악한다. “진리나 실재란 객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관이 이 순간, 경험하고 느끼는 것이다.” 다섯째, 권력과 파워 게임에 대한 인식이 강하다. 푸코는 지식을 권력의 산물로 보며 진리가 강자의 의도에 따라 그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다고 파악한다. 여섯째, 지식의 권력관계는 풍자를 야기한다. 모든 지식이나 결정은 권력관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일곱째, 반세계관적이며 운명론적이다. 역사와 우주가 의미를 상실한 채 개인의 주장은 넋두리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상대주의와 허무주의에 맞닿아 있다. 여덟째 포스트모던 과학은 포스트모더니티의 일반적 특징과 달리 세계를 총체적으로 보고 생태학적 관점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포스트모던 세계관은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다. 포스트모던 세계관은 과학주의가 가진 절대성에 대한 신념을 신봉하지 않는다. 자연과학의 언어는 이제 더 이상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언어일 수 없다는 것이 후기 현대과학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그리고 이성적 합리주의와 이것이 주장하는 객관성의 실재에 대해서도 회의한다. 도덕적 불의와 폭력에 대해 반발하고 비판한다. 현대적 인간주의를 비판하며 인간이 진리를 인식하고 책임지는 주체가 되지 못함을 주장한다. 사회 모든 영역에서 다원화된 가치를 존중한다. 서로 다른 차원을 전체적으로 조망한다. 이 전체적인 조망은 인류의 사고를 과학 기술적인 차원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여 인간의 정서와 감정에 상응하고 환경에 친화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상은 포스트모던 세계관이 가져온 긍정적 요소이자 변화이다. 한편, 포스트모던 세계관이 가져온 부정적 요소를 부인할 수 없다. 우선, 포스트모던 세계관은 신을 부정한다. 따라서 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인격과 신의 존재를 기반으로 한 서구적 역사관을 부정하는 결과로 빠진다. 또한 포스트모던 세계관은 진리와 가치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리하여 주어진 객관적인 실제와 가치세계를 무너뜨리는 혼돈에 빠지게 된다. 텍스트 세계에서 원본은 없고 모두가 사본이다. 텍스트 세계에서 순수함이란 있을 수 없다. 이미 각자는 상대방에 의하여 영향을 받고 있다. 윤리와 공동체와 체계가 부정되면서 인생과 세계는 목적과 의미를 상실한다. 텍스트의 해석에 있어서도 포스트모더니즘은 저자와 독자를 부정하여 텍스트의 객관적 의미를 해체해버린다. 이러한 시대는 세계관의 종말이 선언되는 시대이며 해체주의가 대세를 이루는 시대이다. 기독교 세계관에서 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의 부정적인 특성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2] 가이아 사상의 세계관

 

가이아 사상 (Gaia Thought)은 포스트모던 세계관의 하나로서 생태계와 지구환경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된 유기체적 생태 사상의 세계관이며 자연주의적이다. 가이아란 지구와 지구에 살고 있는 생물, 대기권, 대양, 토양까지를 포함하는 하나의 범지구적 실체로서, 가이아 사상은 과학시대에 사라진 어머니 대지 사상에 기반하여 최첨단 현대과학의 생태학과 미생물학 분야에서의 발전을 덧입고 있다. 가이아 사상에 따르면 지구는 수많은 생명체를 품은 물체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통 털어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 바라보는 이론이다. 그리고 그 속에 속한 모든 생명체와 토양, 대양, 대기 등 자연요소는 하나의 유기적 관계로 얽힌 공동운명체이다.

이러한 시스템에서 인간은 특별한 위치에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하며 지구의 주인도 청지기도 아니다. 가이아의 부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은 가이아의 입장에서 볼 때 상당히 예외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지구의 항상성과 균형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그리고 실제로 파괴해온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이아 사상은 그 초점을 인간에서 가이아로 이동시킨다. 인간의 의미와 목적은 단지 가이아에 기생하는 것에 불과하게 된다.

가이아 사상의 긍정적인 면이라면, 지구 생명체의 공동운명체로서의 관계를 각성하게 한다.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친화적인 동양의 가치관을 바탕으로 하며, 생태계 보호에 대한 필요성을 일깨워준다. 생태중심의 세계관을 심어주며, 통합하고 공생하는 방식으로의 전환을 호소한다. 그러나 가이아 이론의 약점도 있다. 가이아 스스로 자기조절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파괴는 가이아의 관점에서 보면 큰 문제가 되지 않으며, 인간 역시 큰 책임을 질 이유가 없어진다. 여기서 인간의 청지기적 소명이 소멸된다. 그리고 지구 자체를 신격화함으로서 일종의 종교화 경향을 보인다. 이는 일종의 범신론적 관점으로서 자연신비주의를 태동케 한다. 또한 인간 개체를 지구 속에 매몰시켜, 전체 가이아에 대비해 인간의 가치를 한없이 미미하게 만든다.

 

 

[3] 뉴에이지 세계관 (1)

 

뉴에이지 사상은 미국에서 1875년 창설된 신지학(Theosophical Society)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뉴에이지 사상은 자아는 우주의식의 일부이므로 우주와 일체를 얻는 신비로운 인식을 구하도록 촉구한다. , “인간 속에 내재된 초월적인 능력을 개발, 고양하여 우주와 합일하고 신과 합일하려고 하는 비의적 인본주의 사상이다.

뉴에이지 사상은 물활론(animism)을 바탕으로 하여 우주와 세상 만물이 영을 갖고 있다고 본다. 또한 요가와 명상 등의 힌두교의 비의적 방법을 통하여 인간 속의 우주에너지를 일깨워 결국 우주와 합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힌두교에서 우주적 본체인 브라만, 그리고 자아인 아트만이 하나라고 이야기하듯, 뉴에이지 사상 역시 인간의 진정한 자아는 결국 우주적 본체와 하나라고 믿는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자의식을 깨워 신의 본질을 지닌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수많은 뉴에이지 작가들이 한층 높은 자아를 만남 경험을 기술한다. 셜리 맥클레인(Shirly MacLain)이 만난 자아는 나는 너의 보다 수준 높은 무제한의 자아이다라고 대답했다 한다. 자아 안에서 우주와 하나가 되는 경험을 마릴린 퍼거슨(Marilyn Ferguson)의 설명을 빌리면 자아 경계의 상실, 모든 생명과의 갑작스런 동일시, 빛들, 변화된 색 개념, 전율, 강렬한 감각, 거품처럼 또는 위로 튀어 오르는 듯한 확장된 느낌, 공포의 사라짐, 으르렁 대는 소리, 바람, 육체적 자아로부터 분열되는 느낌, 행복, 패턴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 자유감, 혼감된 감정, 색이 귀로 들릴 때와 광경이 청각화 될 때, 대양과 같은 느낌을 깨달았다는 신념, 경험은 오직 실체일 뿐이며 평범한 인식은 단지 어설픈 그림자일 뿐, 사건과 공간을 초월하는 느낌.”

뉴에이지는 우주적 인식을 경험할 때 죽음의 공포가 제거된다고 주장한다. 죽음이란 생명의 또 다른 단계로의 전이에 불과하다. 또한 뉴에이지 사상은 인간이 아닌 영들과의 접촉을 시도한다. 영매, 마녀, 마법사, 주술가의 도움을 빌어 인간의 다른 면과 말하고 영들과 대화한다. 또한 자동 기록 (Automatic Writing)을 신봉하며, 고대의 경전을 믿는다. 동시에 기독교의 복음서를 영지주의적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축지법, 텔레파시와 같은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한다고 주장하며, , , , 바람 등의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뉴에이지 사상은 바이오 피드백 이론을 활용하는데, 이 이론에 따르면 뇌, 마음, 신체는 하나의 연속체로서 인간의 마음과 의지는 두뇌와 몸의 작용을 바꾼다는 것이다. 뉴에이지는 자아를 개방하는데 환각제를 사용하기도 하며 심지어 죽어가는 환자들이 우주와 합일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환각제를 투여하기도 한다.

뉴에이지 사상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비판받을 만하다. 첫째 비교주의적이다. 뿐만 아니라 힌두교를 근저로 하여, 불교, 신플라톤주의, 기독교영지주의와 각종 비교를 혼합한 종교이다. 둘째, ‘우주와 나는 하나라는 범신론적 사상에 기반한다. 하나님이 곧 세계와 우주이며 모든 것이 영이요 의식이며, 나는 곧 우주라는 믿음을 가진다. 여기서 하나님은 인격성이 거세되며 비인격적인 우주의 보편적 영으로 전락한다. 또한 예수는 영적 깨달음의 문을 여는 안내자에 불과하다. 뉴에이지 사상은 예수가 인간이 자각을 통하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나라 역시 자각의 상태, 변화된 의식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한다. 이러한 뉴에이지 사상은 인본적 신령주의이다. 인간을 신으로 만들고 성경이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한 가르침을 정면으로 위반한다. 또한 뉴에이지 사상은 필연적으로 역사의식의 부재로 귀결된다. 직선적인 역사를 부정하고 순환적이고 주기적인 역사만이 존재하며, 현실과 실재의 가치는 소멸된다. 따라서 사회의 불의와 거짓은 존재론적인 허상에 불과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의 윤리적 책임은 필요 없는 것이 되며 죄와 악의 개념도 희석된다. 죽음에 있어서도 죽음의 가공성과 치명성이 무시되며 단지 다른 상태로의 전이로 축소된다. 그리고 뉴에이지 사고는 우주적 인식에 맞닿기 위해 악한 영이나 선한 영을 도구적으로 사용하는데, 이는 곧 일종의 강신술이다. 이는 성경에서 금기시한 것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뉴에이지 사상은 인간과 우주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론에 빠져있으며 인식론적으로서는 허무주의로 귀결되는 약점이 있다.

 

 

[4] 뉴에이지 세계관(II)

 

뉴에이지 운동은 개별 자아를 최고의 실재로 본다. 우주는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자아에 의하여 내부로부터 존재한다. 큰 자아는 우주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큰 자아가 시공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우주는 인위적인 방법으로 접근 가능한 우주이다. 이 우주에 접근하여 경험할 때 도덕성과 같은 모든 범주는 사라지고 자아는 모든 실재를 넘어서 자아가 모든 실재의 창조자임을 의식하게 되는 데, 이를 우주의식이라 한다. 뉴에이지 운동은 죽음을 단지 다른 단계의 생명으로 전이되는 것이라 본다. 또한 실재에 대하여 비의적 해석, 환각적 해석, 개념적 상대주의에 기반한 해석을 한다. 비의적 해석은 규제할 수 없는 다른 영역을 인정하는 것이고, 환각적 해석은 LSD 같은 약물을 투여함으로써 환각상태에서 세계를 보는 것이요, 개념적 상대주의는 세계를 상징체계의 산물로서 해석하는 것이다. 또한 뉴에이지 운동은 실재에 이르는 안내자로서의 이성을 부정하고 황홀한 사고(stoned thinking)를 추구한다. 우주 안에 있는 위계질서를 이루는 수많은 영적 존재를 인정하는 물활론을 바탕으로 하지만 인격적인 창조주는 인정하지 않는다.

뉴에이지 사상은 다음과 같은 약점을 가진다. 뉴에이지 사상은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위험한 자기기만이다. 심리적 우주론이 창조적 우주론으로 확대되면서 인간 하나하나를 창조신의 자리로 승격시킨다. 뉴에이지 사상가들이 만났다고 하는 상위의 자아에 대해서도 의심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 따르면 신자의 인도자는 하나님의 천사이지 또 다른 자신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사실에 접할 때 인간은 우주적 자아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세계에서 놀라움에 사로잡히게 되고 두려움에 직면한다. 또한 확장된 자아가 도덕을 초월한 경지에 이르는 것과 달리, 예수께서는 선과 악을 구분할 뿐 아니라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영벌이 있다고 가르치셨다. 뉴에이지 사상은 인간의 유한성을 간과하고 자아 신격화를 시도하는데, 물론 뉴에이지 사상가들의 범신론적 체험이 그렇게 느끼도록 할 수도 있지만 이들은 죽음에 직면하여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인간 자아의 모습을 간과한다. 그리고 이들 역시 이러한 체험 가운데 불쾌한 경험도 있었음을 고백함으로써 성경이 말하는 지옥을 증언하고 있다는 의심을 할 수 있다. 뉴에이지 사상가들의 경험은 두 자아로서 인격분열을 일으키거나, 여러 영들이 가면을 쓰고 동시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파악된다. 그들이 말하는 환생은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나며, 이들이 비의적 체험을 통해 만난 외부적 영들은 그들이 자아를 절대시하는 것과 모순되며, 물활론을 바탕으로 각종 영들을 불러내고 접하는 것은 성경에 의해 철저히 금지된 바이다.

 

 

[5] 종교다원주의 세계관

 

자유주의 기독교에 의하면 하나님의 내재적, 구원적 계시는 모든 세대와 문화에서 가능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증된다. 그리고 포괄주의 유형은 다른 문화권에서 신적 생명에 이르는 독립적인 구원의 길이 있음을 인정한다. 이러한 자유주의, 포괄주의 유형은 그리스도의 구원적 은혜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인간관계에 대한 여러 많은 범례들 중의 하나의 범례로 본다. 더 나아가서 다원주의적 입장은 모든 종교적 신념과 실천의 중심에는 하나의 신적 실재가 있으며 모든 주요 종교들은 이 실재에 대하여 역사적, 문화적으로 제약된 인간의 반응이라고 주장한다. 각 종교에서 믿는 신은 초월적인 실재 자체가 아니라 그 실재가 인간에게 나타난 현현 중의 하나이며 인간은 그 현현을 예배하는 것이다.

다원주의자 존 힉(John Hick)은 역사적 예수가 성육신 교리를 가르치지 않았으며, 예수가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가졌다는 교리(양성교리)는 수용될 수 없고, 증명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힉은 성육신 교리와 양성교리를 문자적 의미가 아닌 은유적인 의미로 해석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 하나님이 인간의 행위 안에서 성육신하시는 것이다. 즉 예수는 신적 영에 반응하여 그 뜻에 복종하였기에 성육신했고 신성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힉은 전통적 삼위일체 교리를 존재론적이 아닌 기능적 관점에서 이해한다. 삼위일체는 세 위격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와 구속, 내재라는 역할을 가리키는 것이다. 힉은 대속교리를 부정하는데, 예수는 구세주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사는 법을 보여준 영적 지도자요, 모델에 불과하다고 한다. 힉의 기독론은 영감 기독론이라고 불리는데, 여기서 예수는 신적 영으로 충만하여 신의 뜻을 따랐던 위대한 지도자이다.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존 힉의 종교다원주의는 다음과 같이 비판된다. 첫째, 종교다원주의에서 이야기하는 종교적 초월자는 기독교의 신과 다르며, 종교적 초월자에 대한 각 종교의 상이한 개념을 검증할 만한 기준이 없다. 둘째, 종교적 초월자란 철학적으로 가설된 추상적 존재일 뿐이다. 각 종교의 궁극자에 대한 이해는 서로 상충된다. 셋째, 각 종교의 추상적인 본질은 없으며, 일반화할 수 없는 독특성을 지닌다. 넷째, 힉은 기독교인이 도덕적으로 우월하지 않기 때문에 종교적인 우월성을 주장할 수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기독교의 우월성은 도덕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증거하는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기인한다. 다섯째, 각 종교가 추구하는 구원의 개념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여섯째 힉은 대속의 교리를 은유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결국 구속개념을 부인하는데 이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복음주의적 결론으로서 다음을 제시한다. 삶의 방식으로서의 다원주의와 이데올로기로서의 다원주의를 구분하여 전자를 인정하고 후자를 지양한다. 이는 다른 종교를 존중하되, “모든 종교적 경험을 넘어서는 초월적 실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형이상학적이고 회의적 주장에 그친다고 보는 것이다. 각 종교가 가진 특징과 차이를 무시하고 공통성만 추구하는 자유주의적 대화를 지양하고, 다름을 존중하는 진정한 대화를 추구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창조자인 동시에 구속자로 받아들이는 기독교적인 관점을 유지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범위는 보편적이지만, 기독교의 구원은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구원은 하나님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잡았을 때에만 가능한 특수한 것이다.

 

 

[6] 포스트구조주의 세계관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가 말하는 추상적 구조나 체계에 대해 불신한다. 그리고 구조주의가 주장하는 과학적 방법론이 지닌 한계를 지적한다. 그러나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와 공통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데, 양자는 언어를 인간의 행위 가운데 핵심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언어의 제도적 성격과 언어의 무한한 생산성을 인정한다. 또한 양자는 인간행위의 의미를 중요시하지 않으며, 비역사적인 사고를 가진다. 포스트구조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하부개념으로 간주되지만 좁게는 철학이나 사회과학에 나타난 포스트모더니즘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구조주의가 제시하는 세계는 관념과 사상이 파편적으로 얽힌 결집체이다. 포스트구조주의는 서구의 로고스중심주의를 부정하고 인간주의적 사고의 이항대립과 이분법적 대립을 깨뜨리고자 한다. 또한 상대주의적 세계관을 가지면서 텍스트의 다원적 의미를 강조한다. 포스트구조주의는 무신론적 세계관과 닮아있으며 "신적 주체의 속성을 인간적 자아로 환원시킨다.” 그리하여 포스트구조주의는 허무주의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개혁신학적 관점에서 포스트구조주의의 공헌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포스트구조주의는 헤겔적, 마르크스적, 이성주의적 역사관이 빠질 수 있는 전체주의적 경향을 비판하면서도 인간 이성의 한계와 도덕성의 모순을 드러내었다. 둘째, 조직적 이성과 전체성을 숭배하는 현대성의 획일성을 지적하고 비판하였지만, 메타 내러티브에 담겨있는 폭력적 기능을 나타냈다. 셋째, 다원성을 수용하며 개체의 존엄성과 특성을 존중한다. 넷째, 모더니즘의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성향을 벗어난 개방성을 제시하여 다른 사고나 체계에 대하여 경청하는 사고를 견지한다. 다섯째, 관용성을 제시하며 타인의 자유에 해당하는 영역을 침해하지 않는다. 여섯째, 온건한 태도를 견지하며 획일성을 강요하기 위한 폭력을 반대한다.

그러나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포스트구조주의는 다음과 같이 비판받아야 한다. 첫째, 포스트구조주의는 언어의 지시적 기능을 부인하면서 인간 사이의 규범과 이해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다. 둘째, 포스트구조주의는 인간주체와 자아가 분산되었고 해체되었다고 하지만, 자아와 주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죄로 인해 일그러진 모습으로 존재한다. 셋째, 포스트구조주의는 텍스트의 내재적 구조를 벗어남으로써 창조적 상상력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텍스트를 유명무실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넷째, 체계성을 극도로 부정하는 경우 상대주의와 허무주의의 함정에 빠져 버린다. 다섯째, 과거를 전적으로 해체하고 현재나 미래와 단절시켜버리려는 시도는 불가능하며 있을 수 없다. 개혁주의 정신은 현재 상황을 끊임없이 하나님 말씀에 조명하고 이를 미래에 적용하는 것이다.

 

 

[7] 푸코, 데리다, 료타르의 해체적 세계관

 

푸코는 근현대 서구의 인식론적 객관주의와 가치론적 일원주의를 비판한다. 푸코의 사상적 흐름은 크게 세 시기로 분류되는데, 첫째 시기는 서양적 주체가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과정을 밝히는 시기이다. 정신적 질환, 신체적 질병을 연구하면서 과거와 다른 개념으로 정신질환과 질병에 접근하게 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근대성의 구속성을 다룬다. 둘째 시기는 권력의 대상으로 주체가 구성되는 과정을 밝히는 시기이다. 푸코는 권력이란 제도나 구조가 아니라 다양한 힘의 관계라고 파악하였다. 감옥, 공장, 병원, 군대, 학교 등의 영역에서 권력과 지식의 관계를 분석하고, 성을 사회적인 관리의 대상으로 편입시킨 권력의 어젠다를 노출하였다. 셋째 시기는 윤리의 대상으로서 주체가 구성되어가는 과정을 밝히는 시기이다. 이제 푸코는 자아가 지식이나 권력과의 관계로 환원될 수 없는 독립된 축임을 피력한다.

푸코의 세계관은 몇 가지 문제점을 노정한다. 첫째, 반이성주의적이다. 푸코는 진리의 객관성과 보편성을 부인하며 이성과 지식을 제도화된 권력관계의 산물로서만 이해한다. 둘째, 편견이 극도화된 회의주의적 시각이다. 그는 역사의 과정과 사회제도를 권력에 의한 산물로 봄으로써 역사과정에 작용하는 인간의 이성적 노력을 간과하고 있다. 셋째, 반인간주의의 시각이다. 푸코는 개별적 주체를 사회의 실질적인 구성요소로 인정하지 않으며 주체는 다양한 힘의 관계로 구성될 뿐이다. 넷째, 반역사주의 시각이다. “푸코는 니체를 계승하면서 목적론적 역사 해석을 거부함으로써 역사의 인과성과 연속성을 거부한다.” 다섯째, 진리와 가치에 대한 규범을 부정한다. 그러나 푸코의 주장 이면에는 그 자신에만 수용되는 숨겨진 도덕관이 있으며, 그러한 본인의 입장에 대한 반박에는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다. 여섯째, 푸코는 결국 윤리의 무정부 상태로 빠진다. 그에 따르면 윤리가 개인의 사사로운 창작물이므로 보편타상성과 효력을 상실한다.

한편, 데리다는 서구 전통적 사고를 해체하고자 하였다. 이항대립이나 이분법을 파괴하고 전통적 철학적 로고스중심주의를 거부한다. 그는 현존의 형이상학이 언어를 통하여 현존의 의미와 가능성을 실현하고자 한다고 진단하고, 이는 허구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차연(difference)'이란 개념을 도입하여 현존이란 분열하고 항상 연기됨으로써만 성취된다는 그의 관점을 설명한다. 또한 독립된 사유의 주체를 부정하며 텍스트 이외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극단적인 텍스트주의에 빠진다.

료타르는 근대성을 일종의 거대담론으로 보고 이를 불신하며 해체하고자 한다. 이성중심주의와 보편성에 대해 회의한다. 료타르에게 있어 존재는 서로 소통할 수 없는 다원성을 가진 다도해와 같다. 그리하여 존재는 대표될 수 없다. 주체성은 근대성이 말하는 것처럼 다양한 언어유희를 통합하고 전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주체성이 맺는 다양한 관계에 의해 형성되며 주체성의 중심은 언어의 그물망으로 분산되어 버린다. 료타르가 주장하는 정신과 사유는 서술할 수 없는 것을 서술해야만 하는 태도와 감수성이다. 그리하여 타자에 대한 개방성을 발전시킨다. 이러한 료타르의 세계상은 다양한 관점이 단편적으로 모여진 세계이다.

료타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첫째, 보편적 진리 인식의 다양성이 보편적 진리에 대한 회의와 동일할 수는 없다. 둘째, 이성은 한계가 있지만, 이성의 가치와 기능은 전적으로 부인할 수 없다. 셋째, 료타르가 합의를 포기하지만 정의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모순이며 논리의 일관성을 상실한다. 넷째, 료타르는 경험과학에 일어나는 지식의 합의성을 무시하고 과학적 지식에 대한 이해를 상대주의적으로만 몰아간다. 다섯째, 료타르가 언급하는 역사의 종말에 대한 묵시론적 관점은 그의 역사 불가지론과 모순된다.

그리하여 푸코, 데리다, 료타르의 해체적 포스트모던 세계관은 다음과 같은 약점을 가진다. 첫째, 신의 죽음을 주장하지만 사실은 신에 관한 인간의 관념이 죽은 것일 뿐이다. 둘째, 자아는 실재하며, 오직 절대적 인식과 보편성과 전체성을 마음대로 장악할 수 있다고 주장한 절대적 주체에 대한 신념이 와해되었다는 사실만을 인정할 수 있다. 셋째, 헤겔적, 마르크스적인 낙관주의적 역사관이 잘못된 것은 분명하지만, 역사에 합목적적인 가치가 있으며 인간이 역사 과정에 대해 책임질 부분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넷째, 이성은 오류 덩어리이나 그렇다고 하여 이성이 현실세계의 실재를 전혀 인식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반이성주의는 옳지 않다. 다섯째, 윤리적 규범은 그 존재와 가치를 부인하기 어려우며 포스트모더니즘의 인식론적 상대주의는 윤리의 아노미 상태로 귀착된다. 여섯째, 인간의 역사는 이해할 수 있으며 성경에서 역사의 과정과 종말에 대한 해석학적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일곱째, 보편적 진리와 가치는 비록 인간이 그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더라도 엄연하게 실재한다. 여덟째, 해체주의는 주체를 분산시켜 공동체의 해체를 가져온다.

 

 

[8] 이슬람의 세계관 I

 

이슬람교는 마호메트 이전에 있던 카바의 석신 알라를 유일신으로 삼아 만들어진 종교이다. 마호메트는 유대교와 기독교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유대교와 기독교의 핵심 교리는 거부한다. 코란은 마호메트가 받은 계시로서 전설과 묵시문학이 혼합되어 있다. 이는 구약성서와 기독교 전설, 교리, 위경의 혼합체로서 유대교적 요소와 기독교 이단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하디스는 선지자의 전승으로, 코란해석의 준거가 되는 마호메트 언행집이다. 한편 이슬람교는 예수를 마호메트보다 낮은 선지자 중의 하나로 보며 그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며 십자가에 못 박히지도 않았으며 중보자도 아니라고 본다. 또한 이슬람교는 유대교와 비슷하게 많은 의무와 규정을 부과하는 율법종교일 뿐이다.

코란과 더불어 마호메트의 관습인 순나(sunna), 각 율법교사들의 의견에 해당하는 이지마(idima), 그리고 유비추론인 키야(kiyas)가 의무의 근거가 된다. 문헌적으로는 코란, 하디스, 사히(전승 모음), 피크(통찰, 합리성), 사리아(윤리체계)가 율법을 증거한다. 또한 이슬람 문화의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공법으로 지하드, 형법, 상법, 노예법, 혼인법 등이 있다. 지하드는 정복전쟁을 중시한 초기에 한정되며, 피의 보복을 정당시하는 탈리오법이 형법의 기초가 된다. 상법은 과도한 이자금지를 유대법에서 빌려왔다. 또한 노예법에 대해서 마호메트는 과거로부터 내려온 노예제도를 인정하되 보다 인도주의적으로 개선하였다. 혼인법은 신부를 사오는 옛 관습을 유지하되 완화하였다. 이슬람교의 종말 사상은 죽음 뒤의 인간에 중간 상태에서 최후 심판까지 보존된다고 믿는다. 그리고 나팔 소리와 함께 우주적인 표적이 일어나고 부활이 일어나며 미혹자가 나타나지만 멸절된다. 알라는 하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심판을 하는데 이때 인간을 위한 중보를 하는 자는 예수가 아닌 마호메트이다. 모든 무슬림의 행복이 오직 마호메트의 중보기도에 빚지고 있으며 중보기도 없이 죽는 것은 불신자의 숙명이다. 그리고 낙원에 입성한 자들은 새로운 배우자와 함께 열락을 누린다.

 

 

[9] 이슬람의 세계관 II

 

이슬람 공동체는 다섯 기초 위에 세워지는데 신앙고백, 기도, 구제, 순례, 라마단 달의 금식이며 때로는 여섯 번째 기둥으로 지하드를 추가한다.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은 알라는 한 분이며 마호메트는 그의 보내신 자라는 것이다. 기도는 하루에 다섯 번 행하며 금요일 정오에는 집단 예배를 드린다. 이슬람력 아홉 번째 달인 라마단 동안에는 해가 떠있는 동안은 음식과 음료를 자제한다. 구제는 일종의 종교세로서 공동체를 위한 자원이다. 순례는 일생에 한번 이상 메카를 다녀오고 제물을 바치도록 요구한다. 마지막으로 지하드는 영적 내면적 투쟁이 아닌 비 이슬람교를 박멸하는 것으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이 지하드를 글자 그대로 실현하고자 한다.

한편, 이슬람은 일종의 삶의 제도로서 샤리아(Scharia)라는 규범을 갖는다. 샤리아는 두 가지 원전에 기초하는데 하나는 코란이요 다른 하나는 순나이다. 샤리아는 최상위개념의 규범으로서 모든 종교적인 실천, 종교교육, 윤리와 법을 총괄한다. 고전적 샤리아는 형법의 영역, 특히 결혼, 가정, 유산법 부분에서 인간의 동등권에 대한 현대 서구적 관점과 상충된다. 따라서 이슬람 사회에서는 때때로 전근대적인 폭력과 불평등이 정당화되기도 한다. 이슬람교가 남녀의 비동등을 전제로 하고, 또한 이슬람 법체계에서 이를 반영한 결과이다.

이슬람은 네 가지 의미에서 일종의 이데올로기이다. 첫째, 종교와 정치를 일치시키며 이슬람법인 샤리아에 기초한 이슬람 국가가 되기를 추구한다. 둘째, 이슬람이라는 단 하나의 종교만을 믿어야 한다는 단일 종교론을 주장하며 종교의 다원성을 거부한다. 셋째, 이슬람은 실패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대체하는 대안 이데올로기로서 부상한다. 이는 1970년대 호메이니에 의한 이란의 부흥으로 강화된다. 넷째, 이슬람은 미국이나 서구세계에 적대감정을 지니는데, 이는 종교영역을 벗어난 정치적 행동이다.

근본주의 이슬람은 이 이슬람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한다. 이슬람 근본주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열렬 지지층은 교육받은 청년과 엘리트계층으로 서구문화를 접했지만 서구화를 세속주의라 보고 거부한다. 둘째, 이들은 복고주의자들로서 과거의 이슬람 황금시대로 돌아가기 위해 현 상태를 바꾸고 이슬람 종교를 전파해야한다고 믿는다. 셋째, 이들은 코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을 취사선택하여 사용한다. 넷째, 자신들만이 선택받은 인간이라 믿는 배타주의적 사고이며, 상반되는 견해를 가진 자을 불의하다고 낙인찍는다. 이러한 근본주의 이슬람 사상의 목표는 이슬람 신정국가를 목표로 지하드를 정당화한다. 메카 시기 유대교와 기독교에 대하여 우호적이었던 코란은 메디나 시기로 옮겨가면서 두 종교에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었다. 이후 이슬람 집단은 국가로 발전하면서 타종교에 대한 무력정복을 기조로 삼게 된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몇 가지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첫째, 종교적 전체주의에 빠져 신정국가를 건설하는 목표 아래 세속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즉 각종 제도와 기관을 통제한다. 둘째, 종교적 절대주의에 빠져 개개인이 종교를 선택할 권리와 자유를 불허한다. 그리고 타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셋째, 종교적 집단주의로서 개인은 오직 공동체에 소속함으로써 의미가 있고 공동체에 헌신할 의무가 무엇보다 강조된다. 이는 호메이니 치하의 이란에서 잘 확인되는 현상이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이슬람 근본주의 체제하에서는 여성에 대한 성차별을 당연시하고 여성의 인권이 부당하게 유린된다. 이는 기독교가 여성의 권리를 존중하고 여권신장에 기여해온 모습과 대비된다. 또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와 달리 기독교 근본주의는 교리적 배타주의이지 사회적 배타주의는 아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기독교 근본주의는 그 초기에 미국 사회에 도덕적 재무장을 요구하였고, 이후 지나치게 분리적인 편향성 때문에 와해되어 신복음주의로 대체되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타종교와 화해하고 대화하고자 하는 이슬람 지도자들을 위협하거나 실제로 살해하면서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한다. 이슬람 전문가의 따르면, “무슬림들은 신앙이 깊어질수록, 코란을 더 잘 이해할수록, 무함마드의 행동 모범인 하디스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가지게 될수록, 이슬람의 역사를 더 잘 이해하게 될수록, 무슬림이 아닌 이교도들을 눈에 보이는 대로 죽이라는 코란 95절이 진정한 지하드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 코란의 절대적 권위가 계속되는 이상,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폭력적 경향도 계속될 확률이 높게 보인다.

 

 

[10] 생태학적 세계관

 

지난 50년간 진행된 급속한 산업화 도시화로 이미 지구상 생태계의 약 3분의 2가 손상되었다. 린 화이트 (Lynn White)는 생태파괴의 책임을 기독교의 창조명령에 돌린다. 그러나 창세기 1:28정복하라라는 명령의 뜻은 착취하라는 것이 아니다. 일각에서는 오히려 음식물에 대한 명령으로서, 인간은 땅의 식물과 남들이 생산하는 열매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여기서 1:281: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에 나오는 지배의 명령과 연관된다. 여기서의 지배는 관리자가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상응과 결부되어 있고 이 상응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표현되어 있다.” 또한 128절은 215절의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와 연관되어,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서 돌보고 유지해야 할 에덴동산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결국 창세기는 하나님 중심적인 자연관을 보여준다.

창조 신앙은 자연과 은혜의 이분법을 거부하고 모든 자연을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하나로 간주한다. 그리고 창조신앙은 자연을 하나님의 창조물로 봄으로써 비신격화며 동시에 인간이 그에 대해 소유권을 갖고 있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 따라서 창조신앙은 자연을 신성시하는 가이아 사상을 비판하며 동시에 만물을 신과 동일시하는 범재신론도 거부한다. 창조 신앙은 하나님 중심의 창조를 신봉하고 그분의 선한 창조를 천명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노아와 맺으신 언약은 생태학적 언약이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영구히 보존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에는 창조의 구속에 대한 언약이 내포되어 있다. 또한 창세기 1:26-28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위임한 통치권은 착취를 허용한 것이 아니며, 자애로운 보살핌을 베풀라는 의미에 가깝다. 그리하여 죄는 생태학 관점에서 청지기의 사명을 다하지 않고 창조물을 착취하며 남용하는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생태계의 대표성이란 의미를 가지는데,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창조 물질세계에 들어오시고, 이 세계를 끌어안으신 것을 뜻한다. 이 창조된 자연세계는 성례전적 특성을 가지며, “자연적인 것 안에 기적인 것이 가득 차 있으며, 일상적인 것 안에 비범한 것이 가득 차 있다.” 성례전에 사용되는 물질처럼 자연은 하나님의 일부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성례전적 존재이다. 그리고 창조의 성만찬 공동체에서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거나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교통한다.

생태학적 사고를 위해 자연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데카르트적 사고를 극복한다. 대신 전체를 보고 전체의 관점에서 스스로를 바라본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인간의 발견을 통해 창조세계를 깨닫는다. 생태학적 사고는 세계의 근원에 대한 신앙으로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관리하는 창조도 필요함을 인정하며, 구속을 통해 허무와 썩어짐에서 벗어나야 하는 종말론적 생태학을 수용한다. 그리하여 생태학적 세계관은 자연과의 공감을 회복한 관계를 영위하는 세계상이라 할 수 있다.

 

 

[11] 포스트모던 기독교 세계관

 

이 장은 개혁주의 관점에서 포스트모던 세계관의 대안을 제시한다. 포스트모던 기독교 세계관의 특성 중 하나는 하나님 주권의 세계관이다. 하나님의 우주와 역사 섭리에 의하여 만물이 창조되고 전개되고 결국에는 그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대인과 대화하고 협력하는 하나님을 신봉하는 열린 유신론에 대항한다. 열린 유신론은 사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철저한 무능,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의 필요성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또한 포스트모던 기독교 세계관은 삼위일체론적 유신론적 일원론에 기반한 세계관이다. 이는 하나님과 악마, 선과 악,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을 주장하지 않으며 세계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고 그분께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정한다. 삼위일체론적 유신론은 이슬람의 단일신론에 대한 대안이 된다. 또한 포스트모던 기독교 세계관은 창조론적 세계관이다. 피조물들이 서로 의존하고 연계되어야 살 수 있도록 지음 받았으며 따라서 남용과 착취가 불가함을 주장한다. 이는 범신론적 세계관에 대한 대안인데, 세계를 신과 동일시하고 세계를 신격화하는 범신론이 아니라 세계가 인간의 활동에 의존하며 궁극적으로는 신적 섭리에 의존함을 믿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기독교 세계관은 문화에 대한 창조명령을 수용하는 문화변혁의 세계관이다. 문화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으로 인간에게 선물된 것으로 문화를 만들고 선하게 가꾸는 것은 인간의 소명이다. 그러나 인간 문화 활동이 죄로 빠지면 심판받고 돌이켜야 한다. 문화변혁 세계관은 근본주의 세계관에 대한 대안으로, 보수교회가 지니는 근본주의 성향이 성과 속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현실과 사회에 대한 무관심 속에 고립되는 모습을 비판한다. 포스트모던 기독교 세계관은 구속사적 세계관이다. 세상은 힌두교에서 보듯 신기루 같은 환상이 아니고, 역사는 관념론에서 보듯 무의미하지도 않다. 세상과 역사는 메시야적 구속의 대상이다. 이는 그리스도에 대한 대속과 심판을 믿지 않는 인본주의 세계관에 대한 대안이다. 포스트모던 기독교 세계관은 변혁주의 세계관이다. 여기서의 변혁이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에 의한 부패되고 자율성을 지향하는 인간 존재의 실존적 변혁을 가리킨다. 이는 운명론적 세계관에 대한 대안으로 체념하고 휩쓸려가는 것이 아닌 참여하고 바꾸는 존재로서 세상을 접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포스트모던 기독교 세계관은 종말론적 세계관이다. 인본주의적 이상향을 거부하며, 환생신드롬에 대항하고, 독립된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과정신론을 비판하고, 과학기술에 의한 이상향을 추구하는 과학중심주의 세계관과 차별화한다.

 

 

[12] 개혁주의 문화와 세계관

 

개혁주의 관점의 포스트모던 기독교 세계관의 방향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연주의 세계관과 결별한다. 자연주의 세계관은 창조주의 지속적 개입을 인정하지 않는 기계론적 세계관인 과학주의, 그리고 자연과 경험을 낭만화하는 신비주의적 낭만주의를 포함한다. 그리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결별한다. 플라톤은 지상경험을 평가절하하고 청지기적 소명과 삶의 물리적 향유를 등한시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체를 보편적 형상이라는 원형 속에 소멸되게 하여 개성과 자유를 위태롭게 하였다. 둘째, 인간중심주의와 결별한다. 신본적 휴머니즘을 정립하여 인류박애주의에 하나님의 절대적 존재성과 주권을 수용한다. 셋째, 유신론적 인격주의를 신봉한다. 칸트의 비판정신을 수용하되 선험적 관념론에 빠질 위험성을 지양하고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자각함으로서 인식론적 겸허를 유지한다. 그리고 인식론적 회의주의에 대항하여 우리의 해석은 최종적은 아니지만 해석의 오류는 정정가능하다는 인식론적 소망을 가지며, 부단한 노력에 의하여 진리와 가치에 대한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인식론적 헌신을 견지한다. 넷째, 개혁주의 세계관에 기반한다. 그리하여 헬무트 틸리케가 이야기한 심판하시는 의지의롭다 인정하시는 의지의 변증법적 길항작용을 직시한다. 예수의 산상수훈을 불가능한 가능성으로 보고, 인간이 실천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실천가능한 패러독스를 받아들인다. 또한 아더 홈스의 해석적 실재론을 받아들여, 우리의 인식이 해석학적이며 실재론적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알빈 플란팅가의 노선을 따라 개혁주의적 세계관이 각종 유사세계관의 대안임을 믿는다. 다섯째, 기독교적 문화이념으로서 신본적 휴머니즘을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학문과 지식에 중립성이 없으며 하나님을 수용하거나 그렇지 않은 선택이 있음을 인정하고, 신앙의 관점을 활용하여 전인격적 믿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를 취한다. 또한 인간문화의 부패성을 인지하며 문화에 대하여 종말론적인 조망을 하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부분적으로 실현시켜 궁극적이고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예고해야 한다.

(숭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