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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독일신학-[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

heojohn 2020. 4. 6. 06:35

  -현대 독일신학의 종교 개혁적 조명

 

이 책은 바르트에서 몰트만에 이르는 독일 현대 신학자 7명에 대해 종교개혁적인 관점에서 검토하면서, 성경의 범위를 벗어나는 부분을 비판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 그것도 어느 한 부분을 놓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각 신학자의 전 생애를 통해 나타난 신학사상을 총체적으로 조명하고, 문제가 되는 부분을 드러내어 비평작업을 하는 것이므로 내용이 방대하고 이해가 쉽지 않을 수밖에 없다.

 

1장 칼 바르트: 기독론적 보편주의적 계시 신학

 

칼 바르트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저항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귀하고 그 말씀에 기반하여 절대적이고 불가지(不可知)한 하나님을 정립하고자 한 신정통주의(Neo-Orthodox)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자들로부터 사사했고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9141차 세계대전의 발발 및 독일이 주도하는 전쟁에 찬성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모습을 보며 회의를 느꼈다. 그 결과 자유주의 신학이 이야기하는 사랑과 평화의 왕국의 꿈을 버리고 인간 중심의 해석학으로부터 탈피하여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접하고자하였다.

 

바르트는 그의 대표적 저서 [로마서 강해]를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변증법적 신학을 펼친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대별되는 분이며, 인간의 역사와 사상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으로 오신 분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지상에서의 완성을 향하여 나아간다. 이러한 바르트 초기의 변증법적 신론은 로마서 강해 2판에서 방향을 바꾸어, 하나님과 인간역사의 범신론적 연결을 단절하고 완전한 전적 타자로서의 하나님을 추구하게 된다.

 

이제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론의 의미는 하나님과 그분의 계시에 대한 인간적, 신학적 진술의 비적합성, 혹은 인간적인 이해와 개념을 뛰어넘는 하나님을 드러내는데 있다. 하나님은 내재하는 것보다 초월하며 하나님의 계시는 드러내는 것보다 은폐하는 것이 많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 역시 자기 시대의 사람들에게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구애받지 않고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인 말씀을 선포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객관적인 신조를 선포하고 정립할 수 있다고 믿었고 이에 따라 [교회교의학]이라는 그 자신의 신학을 집대성한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이 책에 따르면, 하나님은 충만한 사랑이 넘치는 힘과 자유이며, 그가 태초에 그리스도 안의 자기 존재에 대하여 결정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구원과 관계된 원결정(原決定)”을 수행함으로써 칼빈적인 은총의 선택을 하였다. 그러나 바르트는 칼빈의 선택-유기라는 이원론적인 예정설과 달리, 하나님의 전적인 자유에 기반(基盤)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유기를 당하고 인간은 선택을 당한다고 주장하며, 이미 모든 인간이 잠재적으로 선택되었다는 보편 예정설을 암시한다.

또한 바르트는 전통적인 형벌 대리설을 떠나, 그리스도의 죽음이 인간에게 내려져야 하는 형벌과 저주 자체를 삭제해 버리는 행위로 파악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사건을 원죄에 대한 하나님의 대속행위가 아니라 영원 가운데 주신 은총의 약속의 실현으로 규정한다. 은총만이 구원의 근원이다. 이 은총을 그저 받을 뿐인 인간은 그리스도의 화해사건을 믿는 여부에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하나님과 화해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라고 함으로써 만인 구원설과 만인 화해설을 구별하고 있다.

 

바르트에게 있어 인간의 믿음은 한없이 왜소하다. 그의 신학에서 믿음은 인간의 운명에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며, 인간 존재의 종말론적 결단이라는 중요성을 상실한다. 인간의 구원을 가져오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이고 그 가운데 베풀어진 은총이며 인간의 일부가 이를 그저 받아들이기만 할 뿐이다. 이는 그의 극단적인 은총 일원주의의 불가피한 종착역이었다.

 

또한 바르트의 신학은 앎보다 모름을, 긍정보다 부정을 강조하였기에 신학의 모든 명제선언을 거부하는 회의론에 빠져들 위험이 있었다. 또한 그의 하나님과 역사에 대한 이원론적 이해 역시 무의미한 관념론으로 흐를 여지가 있었다. 그가 파악하는 구속사건은 사실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원역사적 사건으로 역사를 초월하여 이루어진 일이다. 이 사건은 신앙자에게만 접근되는 영역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세속사 속에 있었던 구속사가 무시되는 경향이 있고 그 시대성에 대한 논의가 무의미해저 버린다. 마지막으로 만인 화해론을 지지하는 바르트 신학은 인간의 신앙 및 불신앙의 가치를 한없이 작게 만든다. 바르트처럼 변증법적 신학을 견지했던 고가르텐, 브루너 등의 신학자들은 바르트 신학의 약점에 주목하고 그와 변론하였다.

 

2장 에밀 브루너: 인격주의 신학

 

에밀 브루너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근처에서 출생하였으며, 그곳에서 자유스럽고 진보적인 성향을 자연스럽게 내면화하면서 성장했다. 그가 주장하는 하나님에 대한 나-너의 인격적인 만남에 기반한 복음은 이러한 성장 배경과 관련이 있다. 브루너는 주관적인 진리에 기반한 신조를 강조하며, 복음의 전파와 적응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의 신학에서는 인간의 관점에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형태가 중요하다. 따라서 브루너의 신학은 바르트의 절대적, 객관적 계시와 진리를 중요시하는 신학과 뚜렷하게 대척점을 이룬다.

 

신앙과 신학의 모색에서도 바르트의 불가지(不可知)함과 대비되어 대화와 논쟁을 통하여 해답을 찾는 길을 선택한다. 이러한 방법론적인 특성은 비단 신학의 방법 뿐 아니라 그가 평생 시도했던 기독교와 철학의 만남, 사회사상과의 논쟁, 세계정세 속의 사회정의에 관한 담론에서도 발견된다.  이렇듯 대화와 논쟁을 중시하는 브루너 신학의 기저에는 인격주의가 깔려있다. 인간이 복음을 받아들일 때 그의 구체적인 인격에 와 닿는 복음을 접하고 결단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이 복음을 수용할 때, 복음의 접촉점은 인간의 인간됨, 즉 하나님의 형상을 띄는 인간의 본질이다. 이러한 인간의 본질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 말씀에 기반하여 사는 존재여야만 한다.

 

동시에 인간은 스스로 어떻게 살지 선택할 수 있는 자기 책임성의 자유를 갖고 있다. 인간은 이 자유를 남용하여 스스로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하여 주권을 갖는 반역을 행한다. 인간은 자신의 자립성에 대하여 오해하며, 자신의 자립성을 주장하고, 하나님과 별개로 자율적으로 살려고 하며, 스스로 가지려고 하고 무언가 되려고 한다. 인간이 행하는 이러한 오해가 죄의 근원을 만든다. 원죄의 정체는 이러한 방종한 자율성의 추구이다. 그리고 브루너에게 있어 인간은 자율성의 추구와 하나님에의 의존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순적 존재이다.

 

결과적으로 구원이란 자율성의 인간이 신율(神律)성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은 브루너 신학의 핵심적인 관심사인데, 그는 바르트와 달리 구원에 있어 인간 쪽의 역할을 중요시하였다. 그는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 방식에 대해 인식할 수 없으나 계시 사실은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구원은 신적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기반하여 인간의 인격과 책임이 작용할 때 이루어진다. 또한 구원은 인간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신뢰와 순종의 결과를 낳는다.

브루너는 교회에 대해서도 인격적 접근을 시도한다. 인간은 교회를 일종의 기구로 오해하지만 기구(機構)화된 교회로부터 구별되는 성서적 에클레시아는 인격 공동체이자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 정초되는 공동적 삶이다. 브루너는 삶 가운데 신약에 구현된 교회적 삶을 살아내야 한다며 교회의 재발견을 주장, 칼빈과 루터의 이원론적 교회론과 차별된 독특한 교회론을 선보이고 있다.

 

브루너는 또한 인간의 오해의 체계를 쌓는 속세 철학과 구별된 기독교 철학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의 기독교 철학은 인간의 유한성과 타락을 직시하고 그 모순된 존재성을 수용함으로써 출발하고, “신앙적 사고 안에서 이성과 신앙이 상호 조화되는 길을 제시한다. 세속 철학이 인간의 잘못된 자율성을 부추기는 바, 기독교 철학은 자율화의 망상에서 인간을 해방시켜 참된 비판적인 사고를 하도록 한다.

 

브루너의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며 동시에 사랑이다. 그의 신론은 삼위일체론이 아닌 하나님의 이러한 본성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오로지 신앙 안에서 신앙의 눈으로만 이해된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나님의 실재적인 진노를 달래기 위한 일종의 충족행위이다. 브루너는 바르트와 달리 화해 사건의 객관성뿐 아니라 주관성을 강조한다. 십자가 사건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인 반응에 따른 회개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결국 있을 심판이 바로 인간의 책임성의 근거가 된다.

 

브루너는 다음 문장으로 그의 교의학을 끝맺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이제 이미 약속의 방식으로 선사된 하나님의 자녀 신분은 완성에서 하나님의 영광에의 참여로 실현될 것이다. 그래서 성서적 목표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soli Dgloria)’은 도달된다. 그래서 기독교 가르침도 그것의 목적과 끝에 도달하였다.”15) 

 

3장 루돌프 불트만: 실존론적 신학

 

루돌프 불트만은 역사 비판적 자유주의, 바르트의 변증법적 계시신학, 하이데거의 실존철학, 루터의 개혁주의적 의인론의 영향을 골고루 받은 학자이다. 역사 비판적 자유주의의 전통을 받아, 불트만은 허만 궁켈이 구약에 대해 수행한 성서비판적인 연구를 신약에 적용하고, 복음 전승이 문서화되는 과정을 추적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전승 과정에서 왜곡, 변경된 내용을 인정하고, 이러한 왜곡, 변경으로 인한 신화적 요소가 현대 사회에 받아들여지기 어려움에 주목하여 비신화론을 주장하였다.

 

또한 바르트의 영향을 받아 변증법적 신학을 받아들였다. “하나님은 인간의 전적인 지양이며 인간의 부정, 인간에 대한 문제 설정, 인간에 대한 심판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모든 상태에 대한 도전이자 위기로서, 인간의 안일과 안주함에 어느 날 급습하여 찾아온다. 그러나 불트만은 바르트와 달리 하나님의 전권적인 은혜에 더한 인간적인 반응을 중요시하였다. 인간 입장에서 이미 갖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중요시하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인 인간학적 선이해를 주장하였다. 또한 하나님 존재의 주관적 체험을 강조한다.

 

불트만은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의 불안정하고 죄된 상황을 신학적 인간론에 적용하였다. 이러한 상태를 극복하는 길은, 선이해를 통해 하나님을 인지하고 신앙의 실존적 결단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트만은 근본적으로는 루터적인 은총론의 기반에 서서,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만 불가지한 하나님을 만나고 인식할 수 있다고 하였다.

 

불트만에 있어 신앙과 이해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신앙은 신화론적 사건의 소박한 수용이 아니라, 그것이 함의하고 있는 세계이해와 자기이해를 드러내는 것으로, 실존이해의 변화를 필연적으로 추구한다. 이 점에서 불트만은 바르트와 차별성을 보인다고 하겠다. 바르트가 인간의 전적인 무능과 무지를 주장한 반면, 불트만은 인간 차원에서의 이해에 관심을 기울였다.  불트만적인 신앙과 이해의 연결을 위해서 선이해의 역할이 필요하다. 이 선이해는 하나님에 대한 실존적 지식으로, 모든 인간에게 존재한다. 선이해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접점이 된다. 인간은 선이해를 통해 성서본문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선이해를 통해 성서에 기록된 구원사건에 담긴 신화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이를 초월하여 그 가운데 있는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다.

 

불트만은 성서비판론에서 비신화 담론을 도입하였고 비신화가 성서의 권위를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승은 형성되고 전달되는 과정에서 바뀌고 교체되어 지금은 그 신뢰적인 상을 얻을 수가 없다. 성서에 적힌 있는 그리스도와 그와 관련된 사건들은 일종의 신화이다. 이 신화는 현대인의 세계상에 비추어 받아들여지기 어렵고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를 갖지 못한다. 따라서 신화는 비신화되어야 하며 신화를 넘어선 그 뒤를 보아야 한다.

이 비신화 주장을 통해 불트만은 자유주의 신학과 신정통파 양자를 부정하는 길을 간다. 자유주의 신학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윤리적인 가르침으로 축소시키고, 신정통파가 성서에 담긴 신화와 본질을 구분하지 않는 반면, 불트만은 자유주의적인 역사비판의 연구성과를 인정하여 성서의 신화성을 직시하면서도 이를 초월의 대상으로 규정하여 케리그마 신학의 노선을 유지하고 있다.

 

신화의 초월에 관한 담론에서 불트만의 실존철학적인 입장이 드러난다. 신화 속의 케리그마를 받아들이고 결단하는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신화 속에 내재하는 하나님의 행위가 보인다. 불트만의 신학은 케리그마 신학으로 불리는데, 이때의 케리그마는 그리스도 사건이며, 그리스도의 사건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다기보다는 케리그마의 선포 가운데 일어난다. , 십자가 사건이라는 사건은 역사적으로 실재했지만, 신화론적 표상에 의해서 표현된 사건으로, 역사에 구애받지 않고 십자가와 부활의 케리그마를 듣는 실존,” 즉 설교라는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의미론적 사건이다.

설교는 듣는 자의 양심에 현재에 매 시각 수행되는 사건으로, 계시 역시 여기 지금 나에게 말하는 사건이다. “세계 창조에서 이스라엘의 선택, 예수의 탄생, 사역, 죽음과 부활, 승천, 오순절, 재림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구속사건은 설교의 말씀 속에 응축된다. 설교 없는 구속 사실은 없다.

 

불트만의 케리그마 신학은 계시의 사건을 케리그마의 현재에 국한시킨다. 따라서 성서의 역사적 신빙성에 대한 탐구의 필요성을 배제한다. 결과적으로 불트만의 비신화 이론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정체성을 흔든다는 비판에 직면한다. 신앙의 역사적 근거를 부정하고 역사로부터 괴리되어 하나님과의 실존적인 만남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인지 논란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불트만은 신화론적인 세계상이 현대인이 신앙을 갖는데 있어 장애물이라고 지적했는데, 그의 비신화론화된 케리그마는 역시 현대인이 자기 결단을 통해 받아들여야 하는 장애물이다. 이점에서 불트만은 자신이 해결하고자 한 장애물을 제거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불트만이 인정하는 하나님의 행위 역시 일종의 신화론적인 세계상의 일부이다.

 

4장 칼 하임: 복음주의적 변증신학

 

하임은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은 복음주의 신학자이다. 그는 은혜라는 주제보다 인간이 행하는 기독교적 사고에 관심을 두었다. 그는 현대인의 현실적인 사고와 이를 무너뜨리는 그리스도적 현실 사이에 있는 깊은 괴리에 주목하였다. 이러한 괴리는 오직 사고과정이 전적이 바뀌어야만 극복될 수 있는 것으로, 그리스도가 요구하는 의지방향 대로 사고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하임은 이러한 사고방향을 메타노이아(metanoia)라고 불렀다.

 

하임의 시간이론은 그 독특함으로 인하여 시선을 끈다. 그는 시간의 흐름 뒤에 화염 유동적인 상태를 결정으로 이끄는의지의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인다. 시간의 흐름 속에 놓인 개개인들은 항상 신께 열리든지 아니면 반항하든지 선택을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개개인에게 허락된 에너지 원천이며 하나님과 연결되는 길이다.

이 연결점을 발견하는 길에 대하여 하임은 다음 같이 말한다. “우리는 그것에 관하여 아는 것 없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아니한 공간 속에서 살 수 있다. 우리의 눈이 새로운 공간으로 나아가게 되기까지, 우리 전 실존의 심각한 동요 속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여태까지 알려지지 아니한 현존재의 흐름이 열려질 때까지 신약성서가 표현하는 것처럼 우리의 눈은 닫혀질 수 있는 것이다.” , 메타노이아에 수반한 각성이 있어야 비로소 그리스도에 대하여 볼 수 있다.

 

그는 회심과 중생을 강조하면서 현대신학에서 독특한 입장을 형성하였다. 그는 영혼 상담자이며 선교적인 관심을 보인다. 그러한 관심을 배경으로, 진화론과 기독교 신앙 사이에서 갈등하는 학생들에게 대응방향을 조언하기도 하였다.

동시에 신학에의 접근방법에 있어 자연과학적인 접근을 사용하였다. 이를테면, 신앙의 단계에 관하여 아무런 전제 없이 한 걸음씩 나아가는 네 단계를 제시하였는데,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기, 현실에 대하여 신앙적 사고와 설명하기, 총체적 실험에 근거한 전도, 마지막으로 전체적인 직관이 이루어지는 단계를 의미한다.

 

또한 하임은 자연과학과 신학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에 따르면 자연적 현실과 성서적 현실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성서의 기적은 자연이 아닌 인간 고통의 배후에 있는 의지들에 대항하여 일어난 것이다. 사실 자연과 신학 사이에는 구조적인 관련이 있으며, 이는 역사비판적 탐구가 아닌 기도를 통한 통찰을 통해 파악된다. 또한 기도의 힘으로 자연적 현실에 대항하고 이를 움직일 수 있다. 그리하여 하임은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기도를 통해 영적인 무장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이는 하임의 사탄 실재주의와 연결되어 있는데 하임은 사탄적인 것, 악과의 영적 의지적 대결을 피력하고 있다. 신앙하는 인간은 기도 속에서 타락한 자연현실과 투쟁한다. 이는 곧 자연법칙의 훼파가 아니라 생명 대적적인 힘과의 투쟁이다.

 

이렇게 하임은 자연과학의 인식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나 사변적인 차원을 넘어서 선교적, 목회적 관점에서 응용하기 원하였다. 그의 조교에 따르면 하임은 자연과학자들이 신앙을 갖지 못하는 걸림돌을 제거하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이를테면 미래의 세계상은 자연과학과 대결하면서 자연과학의 영역을 신앙적으로 포용하기 위하여 쓰여진 그의 대표작이다. 이 책에서 하임은 초월을 강조하면서 일원론이 가져오는 허무주의 혹은 범신론을 대적하고 자연과 초자연을 분리하는 신학적 이원론 역시 기각한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로 신앙확신을 강조하면서 아인슈타인이 초래한 사고 혁명이 이야기하는 객관적 사고란 있을 수 없으며, 객관적 세계상은 결국 종교의 대용임을 설파한다. 결국 종교적인 확신은 객관적, 분석적 사고로는 찾을 수 없으며 회개의 행위를 통해서만 개시되는 비밀이다.

 

신학과 여타 학문의 조화에 대한 하임의 관심은 계속되어, 신학을 전체에 관한 학으로 규정하고 세속학문에 뺏긴 자연과학을 다시 찾아와 신학 속에 융합시키기 원했다. 하임은 신 변증학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신 변증학의 근본단계는 철학적 사고의 난관-양자택일 앞에 섬-결단-신앙의 확신이다. 철학적 사고의 난관 단계에서 인간은 객관화의 한계에 봉착한다. 그리하여 신앙과 자연과학을 양자택일해야 하는 위기에 놓인 것으로 보이는데 결국 신앙 없는 자연과학이나 자연과학과 괴리된 신앙 둘다 허무주의로 흐르기 십상이다.

 

그러나 사실 신앙은 자연과학 혹은 철학으로 거부되거나 지지될 수 없다. 오히려 주관과 객관의 대립을 초극하여야 한다. 초월을 통해 하나님께로 결단을 하며, 그 반대로 허무주의에 빠질 수도 있다. 하나님께 이르는 신앙의 확신은 삶 전체 실험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고 회심의 결과로 나온다. 이러한 변증신학적 과정은 하임이 자신의 삶을 통해 실험을 펼치고 정립한 것이었다.

 

하임의 변증신학은 현대 자연과학적 세계상의 황혼 속에서 기독교적 세계상을 제시하는 의미가 있었다. 하임의 신학은 지속적 효용성과 현대적 타당성을 갖고 있다. 하임은 객관적 사고에서 발견되는 세계관적인 우상에 대응하여 객관화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한계를 신학적으로 타당화시키고자 했다.

 

그밖에 하임은 목회론에도 관심을 두었는데, 그는 신학생들이 자기가 가진 소명과 신앙에 대하여 불신자들에게 내어놓을만큼 강한 확신과 준비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자연과학의 도전에 대하여 흔들리지 않을만한 책임성이 필요하며 또한 신학도들이 형제애를 갖고 참회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세속화된 신앙과는 달리, 신앙과 신학이 일치하는 삶을 강조하였다.

 

5장 오스카 쿨만: 구속사 신학

 

쿨만은 구속사에 대한 일관적인 관심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구속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이미 일어났던 구속사건과 앞으로 찾아올 종말까지를 관통하여 주목한다. 구속사란 하나님이 특수한 시간적 사건과 관련지어서 그분의 계획을 시행하는 것으로, 쿨만의 구속사는 보편사의 흐름 속에서 선적으로 다가오는 최후의 심판을 향한다.

구속사는 창조-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종말론적 완성의 삼단계를 거친다. 또한 과거적 단계, 현재적 단계, 미래적 단계로도 구분이 가능하다. 과거적 단계 즉 구약시대는 성육신에 대하여 준비하는 단계이다. 현재의 단계는 그리스도의 지상의 몸인 교회의 시기로, 종말 전의 마지막 때이다. 또한 이미 종말의 때이나 아직도 그 종말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미래적 단계가 있는데, 이 미래는 이미 그리스도 구속사건에 의하여 결정된 미래이다.

 

그러나 구속사의 선적 흐름은 전방과 후방의 한계가 없이 영원으로 트여 있다. 그리스도 사건은 구속사의 흐름 가운데 한 시점에서 일회적인 사건인데, 이는 역사적으로 단 한번 일어났다는 의미와 동시에 모든 사람과 모든 시간의 구속에 대해 결정적으로 유일한 사건이라는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 쿨만에 따르면, 구속사와 세속사는 구별되는데, 구속사의 영역은 역사와 신화의 연관성을 포함한다. , 역사적으로 확증 가능한 사건과 확증 불가능한 사건이 같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속사는 세속사와 별개가 아니며, 세속사 안에서 드러난다.

 

쿨만의 구속사 개념은 고정된 신적 계획에 주목하지 않으며, 우연적인 사건이 겹치어 발전되는 임의성을 선호한다.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하여 우연적으로 구원의 수단이 된 이스라엘이 그러한 우연 요소이다. 하나님은 전 인류의 구원이라는 보편적인 목적하에 세속사를 구속사의 영역에 들어가게 하신다. 그리하여 회심한 이스라엘과 회심한 이방인을 포함하는 구원의 전 이스라엘만이 존재한다. 이러한 목표 설정은 현재나 과거의 사건으로 하여금 구속사에 속하지는 아니하지만 구속사와의 관계를 설정하게 한다. 구약시대의 이방 통치자는 야훼의 무의식적인 도구로서 신적 구원계획을 수행한다.

 

또한 쿨만은 불트만과 달리 구속사의 사건에 부착된 신화를 실존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성서 내에서 이미 비신화한 바, 즉 역사화된 신화를 인정한다. 역사화된 신화의 예는 예수의 부활인데, 역사적인 규제로서 접근될 수 없는 사건이 예수의 나타나심과 빈 무덤이라는 역사적인 사실로 증명된다. 신화는 구속사의 중심을 이루는 역사적 사건의 위치를 절대적 범위에서 정하여 역사적 사건을 원사건으로 승격시킨다. 역사화된 신화는 역사적 중심부분을 통과하는 선을 역사적 영역 안에서 스스로 해석하고 강조한다. 동시에 다른 편으로는 종말론적 끝 시간으로 확장한다. 이러한 이중 구조가 쿨만의 역사화된 신화의 특징이다.

 

따라서 역사화된 신화란 이론에서 성서 내용의 역사적인 면과 비역사적인 면을 구분할 필요성은 없다. 역사적 구속 사건이 모든 사건의 중심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주요관심사이다. 그럼에도 현대적인 사고에서 역사와 비역사를 구분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쿨만 역시 이점을 인정하고 역사화된 신화가 사건을 비역사적 차원으로 확장시키면서 어떻게 역사적 사건의 해석에 기여하는가를 밝혀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종말론에 관해서 쿨만은 임박한 종말을 강조하는 쉬바이처의 철저적 종말론이나 도드의 실현된 종말론, 그리고 바르트의 실존적 종말론을 부인하며, 이미 이루어진 일과 아직 되지 않은 일을 모두 수용하는 종말 개념을 선호한다. 이때의 이미 이루어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한하지 아니하고, 이를 포괄하여 구속의 때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구조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미 이루어진 일과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 사이의 중간 시기는 신자들을 쇄신하는 성령의 시간, 교회의 시간, 세상에 복음을 전파할 시기이다.

 

쿨만은 구속사의 관점에서 기독론을 전개한다. 초기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심을 두었지만,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사변이 필요하며, 그 인격이 바로 창조로부터 계시와 구속의 전 역사와 연결된다. 쿨만은 신약 기독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기 위해 기독론적 칭호들을 분석하였다. 유대교와 헬레니즘으로부터 온 ’ (the Lord, Kyrios)구원자’ (the Savour)를 가리켜, 초대 교회 사람들이 이 용어를 수용하고 그리스도의 역사적 실재를 가리키기 위한 용어로 사용했음을 논증하였다. 그러나 헬레니즘에서 황제를 가리키던 라는 용어는, 헬레니즘과 다른 의미를 지닌다. ‘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경험한 부활하여 그들 가운데 실재했었고 동시에 영원히 하나님과 하나인 그리스도이다.

 

쿨만의 신학적 공헌은 신구약 중심사상을 구속사라는 테마 아래 꿰어 내었다는 데 있다. 그는 신학적으로 대세였던 유럽의 비신화론화에 대항하여 신약 구속사를 변호했다. 바르트가 구속사를 역사로부터 분리해내었던 반면, 쿨만은 구속사를 다시 역사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종말론 역시 현실적인 시간의 흐름 내에서 이미(already)와 아직 아님(not yet)의 긴장관계로 풀이하였다. 기독론적으로는 예수의 실재성을 복원하여 바르트와 불트만 이래로 약화된 역사적 예수의 위상을 다시 높였다. 그러나 쿨만에 대한 비판의 여지 역시 존재한다. 우선 그가 제시하는 무한한 시간의 개념이 과연 성서적인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또한 초기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식으로부터 출발하여 그리스도의 사역의 중요성을 약화시키고 그리스도의 본성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6장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보편사 신학

 

판넨베르크는 역사 전체를 하나님의 계시로 간주하는 보편사 신학을 주장하였다. 그는 게르하르트 폰 라트로부터 야훼의 계시가 역사 속의 구체적인 사건으로서 드러난다는 주장을 물려 받아 이를 구약을 넘어서서 역사 전체로 확장시켰다. 그에 따르면 오로지 하나의 보편사만 존재하고 일반 역사와 구별되는 구속사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계시를 실존적 차원에서의 수용으로 전환하는 불트만 학파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입장에 있다. 또한 신학의 보편성을 주장하여, 제 학문과 신학의 대화를 주장하고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도 하였다. 이는 기독교와 현대성의 대립을 제거하고 융합시키고자 하는 그의 의도와도 관련 있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그는 과거보다 미래를 우위에 놓고 과거와 현재는 다가오는 미래의 존재론적 힘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바뀌는 것으로 본다. 그에게 있어 미래성이 근본적인 것이다. 쿨만과 달리 판넨베르크는 이미아직도 아님사이에서 아직도 아님에 무게를 둔다. 또한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오고 있는 현재를 설파한 것이다. 종말론 역시 판넨베르크 사상의 중요한 부분이다. 진리는 시간의 흐름 배후에 있는 불변의 무엇이 아닌, “본질적으로 역사적이며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인 것이라고 선언한다. 종말에 이르기까지 진리는 부분적이며 논란의 대상으로 남는다. 오직 미래가 진리의 해답을 갖고 있다. 하나님도 미래와 관련되어 그 존재의 성격을 표출한다. 하나님은 세계의 미래이다. 미래가 현재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힘이기에, 미래는 창조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판넨베르크의 사상은 종말론적 창조론으로 불린다.

 

판넨베르크에 따르면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속-성취 도식이라는 종래의 개념으로는 불충분하며, 전승사적인 관점에서 구속사와 보편사의 일치를 바라보아야 한다. 전승사 관점에서는 전승된 약속들이 새로운 역사 경험의 빛 속에서 새롭게 해석될 수 있다. 그렇지만그 해석의 개인의 임의에 맡겨지는 것은 아니며, 모든 개별 사건의 의미를 총체성의 관점에서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미래는 아직도 완전히 오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총체성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계시의 실체인 예수에 대하여, 판넨베르크는 예수의 당 시대의 삶 가운데 드러나는 의의로부터 출발하여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밝히고 나아가 보편사 가운데 나타난 계시의 의미를 찾는다. “예수의 인격은 그 자체에 고립되지 않고 그 숙명이 수행된 역사적인 연관 속에 있다.” 예수의 삶 속에 주장된 신적 권위는 예수의 부활 이전에는 증명될 수 없었으나, 역사 가운데 유일무이한 부활을 통하여 유대교적인 기대에 부응하고 또한 세계의 모든 사건에 대하여 추월될 수 없는 종말의 예기를 정립하였다.

 

판넨베르크는 진리와 계시를 이해하기 위하여 성령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인간의 힘만으로 가능하다고 보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에게 이해시키는 것은 바로 사건의 힘이다. 종말에 대한 역사적 예기 사건에 담긴 힘을 통해 역사를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이것이 모든 역사적 이해와 진리 추구의 필연적 조건이다.

결과적으로 판넨베르크는 계시구조와 역사구조를 동일시한다. 계시를 역사적 사건의 일반 구조에서 밝히려고 하여, 예수부활의 역사적 증명에 큰 비중을 둔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판넨베르크는 하나님 계시의 초월성을 약화시키고 말씀의 선포, 신앙, 성령을 간과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판넨베르크에 따르면 예수의 부활은 죽음 후 현현, 그리고 빈 무덤의 사실을 이루는 제자들의 체험 등이 역사적으로 증명해준다. 그리고 그가 역사적 부활을 중요시한 이유는 그는 부활을 인간학적으로 의미있게 분석하고자 시도하였던 사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그의 삶의 한계에 관심을 두며, 이를 뛰어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그러므로 부활에 대한 성서적 사고는 현대성 가운데에서도 유효하다.

 

그의 교회론 역사 보편사의 지평에서 논의된다. 교회는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그 존재 근거를 둔다. 하나님 나라라는 미래는 곧 세계의 미래이기도 하다. 이 다가오는 나라에 대한 대망으로 인해 교회와 세계는 불가분의 관계가 된다. 교회는 세계 가운데 있지만 세계사의 목표인 하나님 나라 앞에 선다. 교회는 다가오는 정의와 사랑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를 증거해야 한다. 또한 교회는 제도로서의 교회가 아니다. 조직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통치가 오기 전까지의 잠정적인 제도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적인 것들의 잠정성을 밝히고 스스로를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와 관련지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 내의 권위주의적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본래 기독교 전통의 정통성을 보장하기 위한 권위주의가 교회 내에 자라왔으나, 판넨베르크는 이를 위한 권위주의라면 역사적 연구와 학문적 연구로서 대체할 수 있다고 믿었다.

 

판넨베르크는 또한 성부왕권적 삼위일체론을 주장하였다. 성부에 대한 예수의 아들로서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순종인데 노예적인 굴종이 아니라 아들의 자유로운 순종이다. 아들이 하늘 아버지의 왕권을 선포하고 실제로 전파하는 사명에 대해 순종한 것은 왕권을 가진 성부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는 행동이다. 판넨베르크의 삼위일체론이 이룩한 공헌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성육신 기독론이 아니라 보편사에 나타난 역사적 예수로부터 올라가는 삼위일체론을 전개한 점이다. 또한 성서적 유일신론을 통하여 삼위일체가 서로 조화롭게 협력하는 하나님의 왕국을 주장하였다. 하나님은 로고스인 아들과 성령을 통하여 세계 내에 현존하는 유일신이다. 그러나 본질적 삼위일체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보편사의 종말에 가서야 하나님의 신성과 그의 삼위일체성이 확증된다. 하나님의 존재와 신성은 미래의 종말에 있기에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판넨베르크는 경륜적 삼위일체만을 말하고 본질적 삼위일체는 아직도 완성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판넨베르크에 있어서 예수의 성육신과 부활과 재림과 종말이란 하나의 신화적이거나 그 역사성이 의문시되는 오리무중의 사건이 아니라 보편사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구속사건이다. 판넨베르크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실재성과 더불어 이 재림이 심판과 더불어 구원을 가져줄 것을 피력하고 있다. 판넨베르크의 종말론의 독특성은 종말을 구원의 사건이요, 또한 심판의 사건으로 파악하는데 있다. 그가 심판의 기준을 그리스도로 보는 점에 있어서는 종교개혁적 의인론을 확고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나, 다른 편으로는 불신자나 그리스도 이전의 죽은 자들을 위해서는 선한 행위를 심판의 기준으로 들고 있다. 여기서 그는 심판을 정화의 과정으로서 해석하면서 종교개혁적 의인론의 입장에서 이탈하고 있다. 판넨베르크의 보편인간들의 선한 의지와 종교성에 호소하는 구원에의 기준은 비록 이들이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구원에의 기준에 미흡하다는 바울의 견해와 성서전체, 그리고 교부들과 종교 개혁자들의 견해와 모순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익명의 기독교인을 말하는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의 사상에 근접하는 것 같이 보인다.

 

7장 위르겐 몰트만: 삼위일체적 소망의 신학

 

몰트만은 바르틑 이후 신학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신학자이다. 그는 2차 세계대저의 참화 속에서 포로 생활을 통한 인간 실존의 한계상황을 경험하였다. 이 경험 때문에 그는 처음에 수학과 원자 물리학을 전공하고자 했던 계획을 포기하고, 신학수업으로 전환하였다. 그의 소망신학의 착상은 바로 포로 생활에서의 고난의 실존적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몰트만에게 있어 종말론에 기반한 미래의 소망은 그의 신학의 핵심이다. 그는 종말론이 기독교의 많은 교리 중의 하나가 아니라, 기독교 자체가 본질적으로 종말론이라는 것을 역설하면서 종말론의 핵심이 바로 소망이요, 이것이 바로 성서적 테마라고 강조한다. 몰트만의 소망의 사고를 지배하는 것은 하나의 관점, 창조적 제자도의 관점 안에서 역사적 해방과 종말론적 구원을 함께 보는 시각이었다. 그리고 그 종말은 우울하고 비관적인 것이 아니며 소망을 갖게 하고 현실을 바꾸게 하는 힘으로써 논의된다. 종말론적 소망은 신의 약속된 미래에 직면하여 고통당한 인간에 대한 사랑과 성취되지 않은 세계의 창조적인 이상향을 위한 역사적 추진력이 된다.

 

그리스도를 희망하는 자는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고난 받고, 대항한다. 종말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구원에 적극적으로 실천적으로 참여한다. 이는 단지 선교활동이 아니라 정의와 희망의 실현, 피조물의 평화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여기서 몰트만의 정치신학 성향이 드러난다. 또한 몰트만의 종말론은 묵시록적 종말 없는 우주적 재난과 상관없는 현실 변혁적 종말론으로 바뀐다. 따라서 몰트만의 종말론은 역설적으로 종말 없는 종말론이다.

 

몰트만은 [소망의 신학](1964)에서 기독교 신학과 종말론은 십자가의 신학이요 종말론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는 소망의 신학이 십자가에 달린 자에게서만 이 신학의 비약하는 점에 도달한다고 생각한다.44) 몰트만은 칼빈의 영향을 받아 신의 주권과, 고통스런 현실에 대항하는 열정을 배웠다. 그러나 인간의 죄에 대하여는 칼빈과 대립각을 세워, 칼빈의 신정론을 비판하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비상대책으로서의 화해자로 세워졌다는 칼빈적 의견을 부정하였다.45) 대신 몰트만은 고난당하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모습을 제시한다. 골고다에서 예수와 하나님 사이에 일어난 사건은 삼위일체적이다. 아들이 버림받은 속에서 죽임 당할 때 아버지 역시 아들의 죽음을 경험한다. 몰트만은 이 십자가의 사건을 성부 역시 고통당하고 죽었다는 성부 수난설은 아니라고 한다. “아들의 아버지 부재에 아버지의 아들 부재가 상응한다.”

 

몰트만은 유물론 철학자 블로흐의 희망의 철학을 메타 종교”, 유산의 종교라고 규정한다. 몰트만은 희망의 철학과 소망의 종교와의 차이를 숨겨진 인간과 숨겨진 신()”, “동일성의 고향과 하나님의 나라”, “죽음에의 탈영역성과 죽은 자들의 부활”, “이상향의 희망과 약속의 소망이라는 네 가지의 근본 개념을 대조하면서 밝힌다. 몰트만은 현현종교와 약속의 신앙을 대립시키면서 기독교의 본질을 설파하였다. 현현종교는 그 섬기는 신을 신의 현현의 장소에 묶어놓는다. 반면 이스라엘 종교는 야훼의 현현을 신적 약속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현현종교는 신비적이고 마술적 의식을 통해 거룩한 원사건으로 돌아감으로써 역사를 무효화시키는 반역사적 종교이다. 이에 반해 약속의 종교는 약속 사건에 있어 미래의 범주 안에서 역사의 의미를 제시하고 역사화한다. 이스라엘의 약속의 신앙이 출애굽으로 이끌고 민족적 위기를 계속적으로 넘어가게 하였다.

 

몰트만은 계시 개념이 갖는 약속의 성격을 강조하면서 그 특성을 열거 한다. 첫째 부활한 자의 계시는 그의 미래의 영광과 주권의 신현과 약속이다. 둘째로 부활 사건의 계시는 근본적으로 종말론적인 약속의 성격이 있다. 약속의 기능은 세계와 인간의 존재하는 현실을 해명하는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현존하는 현실과의 모순 속에서 세계와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의 미래를 향한 스스로의 과정을 여는 것이다. 따라서 계시는 희망과 약속의 성격을 지니며, 현실의 고난과 모순을 약속의 미래의 힘에 의해서 수납하여 변혁하여 보냄의 성격을 가진다. 셋째로 그리스도 미래의 계시는 감추어져 있고 미완결이다. 이 은폐성은 미래의 드러남을 향해 지향한다. 그리스도의 미래는 감추인 것이 드러나고 약속된 것이 충족된다. 넷째, 약속 사건에 있어 신의 계시는 보냄이 만드는 역사적 과정에 연관된다. “역사 의식은 보냄 의식이며, 역사에 관한 지식은 변혁의 지식이다.” 다섯째, 계시 개념은 소망의 지식으로 이해된다. 이 소망의 지식은 다가오는 약속의 사건의 빛 아래서 지식의 잠정성과 추월성을 인정하며 현실의 미래를 향한 개방된 지평과 인간 경험의 유한성을 인정한다.

 

몰트만의 소망의 신학이 신론이요, 십자가 신학이 기독론이라면 교회론은 성령론에 해당한다. 교회라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성령 안에서 생성된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교회가 그 선포에 있어 하나님 미래의 도래이며,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 희망의 표시이다.” 교회의 메시아적 공동체라는 성격은 교회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메시아적으로 보냄 받았고 또 교회를 보냄에 근거한다. 예수의 보냄에 참여함으로써 교회는 예수의 숙명을 공유하며 그의 고난과 연합하면서 그의 부활능력을 함께 경험한다.

 

몰트만에 따르면 메시아적 교회론의 차원은 네 가지가 있다. 첫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그리스도의 유일한 통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해야 한다. 둘째, 교회는 선교적 교회로서의 본질을 유지한다. 그런데 몰트만적인 선교 개념은 종래의 신앙적 차원이 아니라 사회정치적인 차원까지 확장된다. 셋째, 교회는 연합적인 교회로서, 그리스도 교회를 가시적인 통일을 목표로 한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정치적인 교회이다. 여기서의 몰트만의 의도는 그리스도의 표준과 척도에 따른 교회 정치의 기독교화이다. 몰트만은 정치신학적인 입장의 개진을 위해 해방신학 개념을 받아들인다. 그의 해방의 개념은 열린 개념으로서 정치적인 것보다 더욱 확장되어 경제, 종교, 현재, 미래와 소망을 포괄한다.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는 속죄한 죄에 대해서는 심판의 법이 집행되지 않는다고 해석한다. 몰트만은 전통적인 최후 심판론을 인간의 놀라운 자기 신뢰라고 표현하고, 자기가 주장하는 만유화해론하나님에 대한 무한신뢰라고 표현한다. 그는 인간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골고다에서의 단일회적 영원한 전환과 결단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결국에는 이러한 사고에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무한신뢰를 표방하면서 만유의 보편적 구원이라는 가설을 주장하는 새로운 인본주의가 도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숭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