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창조론 연구 자료실/유사 창조론의 비판적 이해

유신진화론 비판 논문에 대한 논평

heojohn 2019. 3. 18. 14:54

               

-2019.03.15. 기독교학술원 포럼 발표

                                      

기독교학술원이 이번 포럼에서 유신진화론 비판을 주제로 선택한 것은 오히려 만시지탄(晩時之歎)의 감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유신진화론은 이미 로마가톨릭교회와 영국성공회를 점령했고, 국내 개혁교회 신자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이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유신진화론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1859)이 발표된 이후 여러 갈래로 등장하고 있다. 창조자인 신이 생물을 종류별로 창조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가설들은 어떤 이름을 붙여도 유신진화론의 범주에 속한다. 무신진화론은 여기서 더 나아가 물질이 스스로 우주만물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면서 신의 존재까지도 부정하는 가설이다. 그렇지만 그런 견해들을 모두 종합해보면, 결국 다윈주의에서 파생된 가설들에 다름 아니다. 유신진화론의 총체적 문제는 하나님의 종류별 창조를 부정함으로써 인간의 창조-타락-구원이라는 기독교 교리의 근본적 믿음을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유신론과 진화론이 결합된 유신진화론 비판을 위하여 기독교학술원이 두 가지 관점 신학적 측면에서 보는 관점과 과학적 측면에서 보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은 적절하다.

 

기독교가 신학적 관점으로 교회 안에서 유신진화론을 비판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기독교가 강조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사랑, 인간의 범죄에 대한 자책, 회개의 효력에 대한 믿음, 미래의 구원에 대한 소망 등에 관련한 교리와 진화론의 방법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속성은 결국 모순된다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유신진화론에 대한 신학적 비판은 신과 인간의 속성, 그리고 그 관계에서 나타나는 부조리(不條理)만 열거하면 그것으로 충분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적 관점에서는 우주의 기원, 화학작용에 의한 생명의 발생, 그리고 생물학적 종의 진화에 대한 가설을 조목조목 비판해야 한다. ‘창조냐, 진화냐라는 근본적 문제로 거슬러 올라가면, 어떤 형태의 진화론이나 창조론도 모두 한곳에서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과학적 관점에서는 무신진화론과 유신진화론을 굳이 따로 구분할 필요가 없어진다.

 

논평자는 기독교 창조론자들이 진화론을 비판하는 글을 읽을 때면, 지적하고 싶은 점이 한 가지 있다. 진화론자들보다 훨씬 일찍부터 교회 지도자들(신학자와 목회자 등)이 신의 창조를 주장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이 이토록 발흥하게 된 배경에는 기독교 창조론이 진화론 비판에 실패했다는 사실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와 현재의 교회 지도자들이나 창조론자들이 자기에게는 일말의 책임도 없는지에 대한 성찰을 왜 하지 않는가? 이런 측면에서 기독교 창조론이 그동안 진화론과의 논쟁에서 실패한 과정을 개괄적으로나마 살펴보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이 된다.

 

다윈(Charles Darwin)종의 기원을 발표한 다음 해 6월 옥스퍼드대학교 자연사박물관에서 열린 영국과학진흥협회 정례 토론회에서 기독교 창조론과 다윈의 진화론이 맞붙는 공개 논쟁이 처음으로 벌어졌다. 그 논쟁의 대략을 살펴보면, 창조론의 대표는 영국 성공회 옥스퍼드 대주교 사무엘 윌버포스(Samuel Wilberforce)였고, 진화론의 대표는 장차 다윈의 불독(bulldog)으로 불리게 될 헉슬리(Thomas H. Huxley)였다. 알려진 바로는 윌버포스가 당신들의 조상이 원숭이라면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느 쪽인가요?’라고 조롱했다. 그러자 헉슬리가 내 조상은 원숭이가 맞지만, 당신처럼 재능을 가지고 진실을 왜곡하는 사람과 공통조상을 가졌다는 것이 부끄럽소라고 반격하여 윌버포스를 침묵시켰다고 한다. 이 논쟁이 가지는 중요한 의미는 당시 언론이 헉슬리의 승리로 평가했고, 그런 패턴은 그 뒤에 청교도들에 의하여 건국된 미국에 건너가서도 그대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기독교에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왜 창조론은 진화론과의 논쟁에서 승리하지 못하고 있는가?

 

당시 서구사회를 지배하던 기독교가 다윈주의 비판에 성공하지 못하면서 유물론과 결합한 무신진화론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진화론은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는 우생학과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가 된 사회진화론을 파생시키는 한편, 대륙으로 건너가서는 독일에서 사신(死神)철학을 낳았고, 정치적으로는 반유대주의 파시즘과 구소련의 코뮤니즘 정권이 수립되는 바탕이 되었다. 그 영향은 극동에 위치한 한반도에까지 미쳐서 한민족이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비운을 겪었다. 그리고 세계 최대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서는 교회에서 다윈주의를 수용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었다. 당시 다윈주의는 지질학의 동일과정설과 맞물리면서 견고하게 틀을 짜고 있었고, 교회에서는 성경의 축자영감설에 의존하여 성경의 무오성과 문자적 해석을 주장하는 근본주의가 다윈주의와의 논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근본주의 한 분파인 밀러주의자들(Millerite groups)은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의 문자적 해석에 따라 예수 재림의 시기를 예언했으나, 모두 빗나가고 말았다. 그들 대부분이 안식교회(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 합류함으로써 20세기 초반의 반진화론 운동은 안식교회가 주도하게 되었다.

 

아직 청교도 전통이 남아 있던 1920년대까지 미국 일부 주에서 실시했던 진화론 교육 금지법에 진화론자들의 반격으로 법원에서 위헌 판결이 내려졌다. 이로 인하여 기독교는 교회 밖에서 유력한 선교의 수단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열렬한 안식교회 신자인 조지 맥그리디 프라이스(George McGready Price)는 교주 엘렌 지 화이트(Ellen G. White)의 창세기 해석에 따라, 창조연대 6,000년설(또는 젊은 지구론)과 노아홍수 단일격변설(또는 홍수지질학)을 주장하는 신지질학(1923)을 저술하여 주류 지질학과 진화론 무너뜨리기에 도전했다. 프라이스는 그의 신지질학이 오랜 지구연대를 주장하는 주류 지질학의 동일과정설을 무너뜨리면, 역시 오랜 연대를 필요로 하는 진화론은 저절로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주장은 반진화론 기독교인 그룹 안에서는 환영을 받았으나, 과학계로부터는 오히려 더 거센 반격을 받았다. 프라이스는 진화론 무너뜨리기에 남은 생을 바쳤으나, 1957년에 소련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 발사 성공에 쇼크를 받은 미국이 과학 교육에 진화론을 대폭 반영하는 쪽으로 전환하면서 한계에 다다랐다. 프라이스는 그의 신지질학을 거의 그대로 답습한 창세기 대홍수(1961)가 출간되는 것을 보고 눈을 감았다(1963).

 

창세기 대홍수에 공저자로 참여한 헨리 모리스(Henry M. Morris)에 의하여 창조과학연구소(ICR: Institue for Creation Research)가 설립(1970)되면서 개신교 반진화론 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과학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ICR의 창조과학적 창조론은 기독교 창조론 운동의 선봉에 나섰으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진화론을 무너뜨리는 목표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창세기 대홍수에 기반한 창조과학적 창조론의 문제점은 신학적 논쟁점과 과학적 논쟁점이 서로 얽혀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비판의 대상인 진화론을 직접 겨냥하지 않고, 엉뚱하게 지질학을 공격하는데 헛심을 쏟아 붓는다. 더욱이 창세기 대홍수의 울타리에 갇혀 젊은 우주론이나 홍수지질학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문제이다. 결국 아직까지 사실성을 입증하지 못한 창조과학적 창조론은 현대 일반인들에게는 물론 기독교인들에게도 설득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제까지의 기독교 창조론 운동이 총체적으로 실패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교회 안에서 유신진화론이 확산되고 있다는 현실이다. 그렇게 생겨난 유신진화론에 대해 비판하는 논문들을 논평해보기로 한다.


논문1: 유신진화론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비평(김병훈, 합신)

 

유신진화론을 비판하는 저자의 신학적 관점에 대해 논평자도 신학자의 입장에서 대부분 동의한다. 다만 논평자는 창조론이 교회 안의 신자들보다 교회 밖의 일반인들을 선교하는데 더 필요한 것이라고 본다. 저자의 논문이 교회 안에서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하는 경우에는 문제가 없을지라도, 교회 밖에서 일반인들을 상대로 하는 경우에는 상당한 반론과 질문들에 대답해야 할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사실 교회 안에 존재하는 유신진화론은 기독교 창조론이 진화론 반론에 실패함으로써 일부 신자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으로 기독교의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유신진화론은 창조론이 무신진화론에 승리하는 때에 저절로 소멸될 것이라고 본다.

 

논평자는 이 논문의 말미에서 유신진화론이 기독교 신앙에 미치는 사례가 뜻밖에도 논평자의 칼럼을 인용한 것임을 보고 솔직히 놀랐다. 그 내용을 보면 저자는 논평자가 성경의 하나님이 스스로 있는 자라는 단어에서 진화의 원리를 끌어낸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으로 저자는 논평자를 유신진화론자로 간주하는 듯하다. 그러나 저자의 해석은 전말(顚末)을 거꾸로 세운 것이다. 원문의 내용을 제대로 읽어보면, “진화론의 원리를 ()이용하면, 하나님이 스스로 있는 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뜻으로 옳게 해석될 것이다. 저자는 유신진화론 검증에 신 존재증명 방법까지 사용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논평자는 인터넷에서 기독교 창조과학 비판에 올인(all-in)하면서 스꿩크 works’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는 진화론자를 소개하고, 스꿩크가 저자와 같은 방식으로 논평자를 비판한 것에 대해 반박했던 댓글로 논평을 대신하겠다. [스꿩크 (sinhj2003) : 사이비 과학인 창조과학에 대한 블로그입니다] “열역학 제1법칙이 유신론을 증명한다고?” 이에 대해 논평자는 댓글을 달아 반박했다. “인용하신 글을 잘 읽어보시면, 열역학 제1법칙이 입증하는 영원불변의 에너지 세계가 있고, 그 안에서 신이 진화했다는 것입니다. 그 신이 영원한 시간 동안 진화해서 창조의 능력까지 얻게 되었고, 그곳의 에너지를 이용해서 빅뱅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물질적 우주를 만들었다는 설명이네요. 이런 관점에서 다시 비판해보시지요.” 2019.2.24. 01:22. (그러나 스꿩크는 댓글에 답글 빨리 달기 선수인데 아직 답글이 올라오지 오지 않았다).

 

논문 2: 유신진화론의 아담론 비판: 데니스 알렉산더의 견해를 중심으로

(우병훈: 고신대학교 신학과)

 

논평자는 아담(인간)을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신 인류의 공통조상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공감한다. 기독교 창조론에서 아담론은 잘 다루는 분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데니스 알렉산더의 Creation or Evolution: Do We Have to Choose?(2nd ed.) 다른 여러 문헌들과 함께 꼼꼼히 읽고 비교 분석하여 이 논문을 썼다. 그 덕분에 이 논문은 국내 아담론 연구에 큰 기여를 할 것이라고 본다. 다만 아담과 이브와 관련한 창세기의 해석에는 문자 그대로의 해석보다는 은유적 의미를 찾는 관점이 더 많이 있다는 사실을 덧붙여 두고 싶다.

 

논문 3: 타협이론에 대한 과학적 비평

(한윤봉: 창조과학회 회장, 전북대학교 화학공학부 교수)

 

저자는 전북대 화학공학부 교수이시고, 세계 100대 과학자이심을 자랑하는 한국창조과학회 회장으로 연임에도 성공하여 금년부터 제8대 회장의 임기를 새로 시작하셨다. 저자는 취임사에서 무신론이 갈수록 득세하는 요즘, 하나님의 창조와 복음을 잘 지켜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고 했다. 논평자는 저자의 취임사에 공감한다. 저자는 논문 서두에 첨단 과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진화론은 과학적 사실이다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시대에 무너진 성벽, 창조신앙에 안타까움을 나타내면서 진화론, 지질시대표, 방사성 동위원소 측정법, 빅뱅우주론은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타협이론에 대한 비평에 들어가서 양승훈 교수의 창조와 격변에 실린 다중격변론’,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을 쓴 우종학 교수가 주장하는 진화적 창조론을 비판하고, 이어서 논평자의 과학과 신의 전쟁3과학적 유신론타협이론으로 간주하여 비판 대상으로 올려놓았다. 논평자에게 저자가 뜻하는 타협 이론은 유신진화론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저자의 창조론과 무신진화론 사이에 있는 다른 이론들을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앞의 두 분은 그동안 한국창조과학회의 타협이론비판에 단골 메뉴로 올라 있었으므로 새로울 것이 없다고 보고 지나치려고 했다 그러나 논평자의 눈에 한 가지 심각한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저자는 “2. 진화적 창조론을 비판하면서 히브리 맛소라본창세기 1:6-8절을 인용하였다. 저자에 의하면 하나님은 물 한가운데 둥근 공간이 생겨 물을 둘로 나누어라고 말씀했다. 저자는 이 말씀을 성경 어디에도 움직이지 않는 지구를 묘사하는 곳이 없다면서 창조 때부터의 지동설을 주장하는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인용구의 둥근 공간에는 우종학 교수가 지적한 고대 히브리인들의 천동설 우주관을 부정하기 위하여 성경에서 천동설을 주장할 근거를 말살하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논평자가 국내에서 히브리 맛소라본을 대조본으로 수록하고 있는 전수성경을 찾아 확인한 바에 의하면, 창세기 1:6절에는 다른 히브리어 판본들과 똑 같이 라키아(רקיע)가 포함되어 있으며, 한글 대역본에는 이를 다른 번역 판본들과 똑 같이 궁창이라고 번역하고 있다(영어 대역본에는 firmament로 번역되어 있다). 히브리어 라키아두드려 펴서 얇게 만든 판을 의미하는 것으로 둥근 공간이라는 말로는 도저히 번역될 수 없는 말이다. 창조과학적 창조론자들이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면서 세상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그 단체의 회장이 직접 기독교 학술포럼에서 성경문자를 허위로 인용하여 신앙의 형제들을 공격하는 것은 기독교적 윤리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행위이다. 더욱이 지동설이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와 갈릴레이(Galileo Galilei)에 의하여 제기되기 이전에는 물론 이후에도 오랫동안 로마가톨릭교회에서 천동설을 설교했고, 종교개혁자들도 천동설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저자의 과학적 유신론에 대한 비평을 논평하기로 한다. 저자는 과학적 유신론타협이론의 범주에 넣고 비판하기 위하여 논평자가 쓴 과학과 신의 전쟁칼럼에서 4개의 인용문을 가져왔다. 첫째는 주45: 과학과 신의 전쟁(p.249-491)에서 과학적 유신론을 제안하는 이유와 창조론을 다시 써야 한다고 주장한 부분을 인용하였다. 논평자가 과학적 유신론을 제안하는 이유는 저자의 인용문에 나와 있는 대로 과학적 무신론을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하여인 것이 맞다. 그리고 창조론을 다시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앞에서 설면했듯이 이제까지의 기독교 창조론 운동이 실패했다는 성찰에서 나온 것이다.

 

둘째는 주46: [크리스천 투데이] 인터뷰 기사(20171017일자) “성경은 역사책이 아닌데 어째서 창조과학인가?”에서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서술은 말 그대로 신화이죠. 이 신화 속에 감추어진 신비적 의미를 현대적 의미로 풀어내려면, 고대의 신화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통섭적인 이해를 갖추어야 해요라고 말했다. 저자는 이 부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는 신화와 통섭적 이해라는 한 구절로 줄여 놓고 비판한다. 저자에 의하면 신화라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를 신화로 폄훼하는 것이고, 통섭적 이해는 엉뚱한 자기주장을 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평자가 보기에는 저자의 비판은 문장의 맥락을 잘못 끊어서 전체의 의미를 몰이해한 것이다. 전체 문맥에서 보면 앞에 나온 신화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어체(神話)로 말한 것이고, 저자가 주장하는 신화의 의미로 말한 것은 뒤이어 나오는 고대의 신화이다. 논평자는 저자의 어떤 원인에 대한 결론은 해석자의 믿음과 세계관과 지식수준에 따라 달라진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다만 논평자가 이 구절을 나름대로의 통섭적 지식을 가지고, 수준에 따라읽었던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저자와 같이 해석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셋째는 주47: 과학과 신의 전쟁(p.268-269, 273-274)과 주48: [크리스천 투데이] 칼럼 기사(2018103) “하나님은 무엇을 창조하셨을까?(2)”에서 일부분을 인용한 문장이다. 이 부분은 놀랍게도 앞에서 논평자의 칼럼을 인용하여 비평한 김병훈 교수의 유신진화론이 기독교 신앙에 미치는 사례와 거의 동일한 내용이다. 두 분은 아마 비슷한 지식수준과 비슷한 해석적 관점을 가지신 것 같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논평도 앞에서 제시한 것으로 갈음하겠다. 여기에다 논평자는 다만 열역학 제1법칙의 에너지는 피조물이라는 주장에 대한 논평만을 추가하겠다. 열역학 제1법칙은 에너지 총량이 증감 없이영원불변하게 보존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에너지는 창조자에 의하여 어느 순간에 창조될 수 있는 피조물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세계 100대 과학자 중의 1명이라고 자랑하는 분이 한 번의 주저함도 없이 이것을 피조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논평자는 놀랍다 못해 경악스럽다. 열역학 제1법칙에 위반하여 에너지를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는 과학자는 아마 저자 빼고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저자는 앞에서 성경 문자를 허위로 인용하고 역사적 사실을 부정했듯이, 여기서는 과학법칙을 왜곡하여 기독교인들은 물로 일반인들까지 기망(欺罔)하고 있다.

 

기독교 창조론은 무엇보다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종류별 창조까지 믿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창세기 기사는 과학적으로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럼에도 이를 무시하면서 창세기를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고 문자 그대로해석해야 한다고 계속 우기는 것이 기독교에 무슨 유익이 된다는 말인가? 일반인들은 물론 기독교인들조차 믿지 않는 창조론은 성경해석 방법을 바꿔서라도 다시 써야 한다. 논평자는 그것만이 기독교가 미래에도 존속할 수 있는 길이라고 본다. 그리고 논평자는 저자에게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적 사실, 역사적 사실, 그리고 과학법칙을 부정할 수 있는 객관적 근거자료의 제시를 요구한다., 만약 그런 자료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기독교 윤리뿐만 아니라, 학술적 윤리까지 저버린 행동을 한 저자는 마땅히 공개적으로 문책되어야 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