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유신론 이해

자연 이해 패러다임 전환(轉換)의 필요성

heojohn 2020. 3. 13. 23:48

1. 과학주의 패러다암에 대한 비판

 

과학주의 시대에는 과학이 진리 입증의 최종적 도구이며 방법이라는 것

이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런데 과학에서는 우주자연에서 신 존재의

증거를 찾을 수 없으므로 우주는 물질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신에 대해서 신학은 초월적 존재로 인간사에 개입하는, 그리고 철학은

형이상학적 존재로 세상사에 불개입하는 존재라고 주장했지만 과학은 이
런 주장들을 모두 인정하지 않았다. 과학과 신학, 그리고 철학이 상
호 충돌하는 학문의 전쟁에서 과학이 승리자가 된 것이 사실이고, 현
대인의 사고방식이 과학주의에 경도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
적인 공헌도에 따라 과학이 학문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주도권
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부정하거나 역전(逆轉)시킨다는 것
은 불가능하다. 일부 사이비 과학자에 의해 과학적 방법이 오용되었
던 사실도 있지만, 과학이 학문적으로 승리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동물은 승리자에게 모든 것을 양도한다. 인간 또한 승리자에게
지배권을 부여한다. 학문에서도 승리자에게 그의 방법을 바꾸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이제 ‘과학적 유신론’은 과학의 방법에 따라 과학
적 무신론을 향하여 도전의 장도(壯途)에 나서야 한다.


과학과 신학의 갈등 관계를 해소하는 방법을 연구한 이안 바버(Ian
Barbour)는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에서 대화나 독립 또는 공존이나
통합의 길이 있다고 주장했다 존 호트(John Haught)는 『과학과 종
교, 상생의 길을 가다』에서 과학과 종교 사이에 네 가지 접근법-갈등
(conflict)과 분리(contrast), 그리고 접촉(contact)과 지지(confirmation)
을 제시하고 있다 폴킹혼(Sir John Polkinghorne)은 신학이 과학의
지적 모체이고 기독교인들이 초기 과학의 탄생에 기초를 제공한 은
혜가 있으므로 양자는 가족관계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과학이 열린
마음으로 진리를 추구한다면, 궁극적으로는 만물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이 삼위일체 신학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동일한 대상을 연구하는 각 학문들은 방법적으로는
다를지라도 대화는 계속하자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바르게 이해한
자연과학은 기독교 신학의 가장 분명하고 믿을 만한 대화 상대”이기
때문이다. 맥그라스는 화학과 분자생물학을 공부하던 학부에서는
‘기독교와 자연과학이 양립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르크스
주의에 경도되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의 무신론에 대해 지적 변론
의 근거가 매우 빈약하다는 것을 깨닫고, 옥스퍼드에서 분자생물학 박
사과정을, 케임브리지에서 역사신학 박사과정을 거쳐 마침내 두 개의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기독교를 변증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신학과 유신론 철학을 일방적으로 배척하고
아예 상대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학문은 전제와 방법을 달리 하면 결
론도 달라지는 것이다. 방법과 전제를 달리하면서 이해를 같이 할 수
있는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망상이 아닐 수 없다. 잘못된
결과를 상호 인정하고 공존하자는 주장은 진리의 부정에 다름 아니
다. 진리는 협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과학적 무신론은 스
스로 진리라고 주장하면서 신의 존재를 그림자까지 말살하려고 획책
하기 때문이다. 학문에서 갈등을 없애는 길은 대화나 독립이 아니라,
결국에는 진리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반증가능성(反證可能性)의 기
준’(criterion of falsifiability)으로 ‘진정한’ 과학발전을 추구하면서 사이
비 과학을 제거했던 칼 포퍼 (Karl Raimund Popper, 1902-1994)의 명제는
매우 잘 알려져 있다. 이 기준에 의하면 과학적 무신론은 결코 과학이
아니다. 토머스 쿤(Thomas Samuel Kuhn, 1922-1996)은 과학이 패러다임
의 전환(paradigm shift)을 통해 혁명적 발전을 이루어나간다고 주장했
다.

 

과학혁명을 촉발했던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은 그 대표적
인 사례로 회자(膾炙)된다. 과학적 유신론은 과학이 자연에서 몰아낸
신을 과학적 방법으로 다시 찾아야 한다. 과학적 유신론은 과학적 무
신론과 논쟁해야 한다. 포퍼나 쿤의 어느 한 사람의 방법만으로는 성
공할 수 없다. 과학적 유신론은 이 두 가지를 모두 필요로 한다. 두 가
지 방법 모두를 사용하는 노고를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진정한’ 과학적 방법을 따르
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현대에 이르러 과학이 학문의 진정한 승리자
라면, 과학은 신학의 신론(神論)적 질문이나 철학의 존재론적 질문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사실대로 답변해야 하는 책임을 가져야 한다. 그
러나 오류에 빠져 있는 자들이 스스로 오류를 시정하는 것을 기대하
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와 다름없는 노릇이다. 뜻있는 유신론자라
면 과학적 방법으로 무신론을 타파하는 과학적 유신론의 길에 동참해
야 한다.

 

2. 노자의 자연에서 신(神)을 찾다

 

이제 과학적 자연 이해 패러다임의 전환점을 동양철학의 시조 노자의 자연에 대한 
과학적 이해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동양철학의 시조 노자가 남긴 저술은 짤막한

『도덕경,道德經』 한 권 뿐이다. 노자는 여기에서 그의 도(道)사상을 서술하고 있다.

노자의 도(道)사상을 일반적으로 대표하는 말은 ‘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말에서 무위(無爲)는 『도덕경』에서 자주 나오는 말이다. 무위는 작위(作爲)의

반대어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작위하지 말라’고 해석된다. 다시 말하면 자
연은 스스로 되어 가는 것이므로, ‘작위하지 말고 자연에 따라 살라’
는 뜻이다. 여기서 작위의 주체는 인간이다. 그러나 『도덕경』을 좀
더 깊이 읽어보면, 노자의 도(道)사상에서 핵심어가 ‘도상무위이무불
위’(道常無爲而無不爲- 『도덕경』37장)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말은 문
자적으로 ‘도(道)는 하지 않아도 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을 뜻하는 말
이다. 그렇지만 이 말에서 도(道)는 인간이 아닌 ‘창조자’를 의미한다.
‘창조자’는 전능자이며 곧 신이다. 노자에게 신은 이미 자연에 존재하
고 있고, 신의 작위는 도(道)이다. 노자의 도는 창조자인 신이 자연에
서 이미 하지 않은 일이 없으므로 인간이 더하지 말라는 것이다. 『도
덕경』에서는 문장에 따라서 작위의 주체가 인간과 신으로 각각 다르
게 해석해야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노자의 도(道)를 바르게 이
해하는 열쇄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도를 따라야 한다. 정치적으로 해
석하면 신을 황제라고 생각해도 좋다. 어차피 황제는 지상에서 무소
불위의 권력을 가진 신의 대리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의 대리자
는 이제 민주주의에 의해 추방되었다. 그러니 과학적 무신론은 인간
을 신으로 만들려고 획책하고 있다.


노자의 철학도 고대 서양 철학자들처럼 관념적이지만, 그의 이성
적 사유는 서양철학보다 훨씬 깊게 진리의 심연에 도달하고 있다. 노
자는 BC. 6세기에 서양철학과는 다른 관점으로 자연을 이해하고 있
다. 노자에게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제자가 있어서 그의
도(道)사상을 제대로 전수해주었더라면, 세계의 역사는 다르게 발전
했을 것이다. 이로 인해 동양의 학문이 서양에 뒤떨어지게 된 것은 필
연적 결과이지만, 과학에서 신의 존재가 부정되는 사태가 초래된 것
은 애석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과학이 자연에서 신의 존재를 부
정한 것은 과학이 서양에서 먼저 발전한 것이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
러나 인간들이 과학의 이름으로 존재를 부정하든 말든, 신은 태초부
터 존재하셨다는 사실이 노자의 자연이해에서 입증되고 있다.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통섭적인 관점에서 과학적 유신론을 정립하고, 과
학적 무신론을 격파해야 할 것이다. 노자의 자연을 과학적으로 이해
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과학적 유신론에는 물론 모든 현대인에게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