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유신론 이해

자연에 이미 존재하는 신(神)

heojohn 2020. 3. 14. 00:25

1. 최초의 자연: 유무(有無)


노자의 도(道)사상은 과학이 연구해야 할 자연(自然)이 어떤 것인지
를 간명하게 보여준다. 노자는 우주 창조 이전 태초의 자연에서부터
서술하기 시작한다. 그는 자연이 태초에는 유무(有無)의 형태로 존재
했다고 본다. 그러나 이 말에서 무(無)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면 비존
재(非存在, Not-Being)가 존재하고 있다는 역설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노자는 무를 단지 유를 담는 그릇이라는 뜻으로 말했다는 사실을 알
면 문제는 해소된다. 다시 말하면 유(有)는 서양철학에서 최초의 존재
(the First Being) 또는 ‘최초원인’(the first Cause)의 뜻이다. 그리고 무(無)
는 비존재가 아니라 유(有)가 존재하는 터전이며, 유를 담은 그릇이
다. 그러므로 무는 유의 바깥에 자연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고 있다.


노자는 “이 두 가지는 동시에 나온 것이나 이름은 다르다”(此兩者同出而
異名 - 『도덕경』 1장)고 말했다. 노자에 의하면 “그러므로 유무는 서로 같
이 살고 있다”(故有無相生- 『도덕경』2장). 유(有)가 존재하면 무(無)도 동시
에 존재하는 것이고, 무(無)가 존재하지 않으면 유(有)도 존재하지 않
는다. 최초에 유무가 이런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다면, 다른 어떤 것
도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유무는 스스로 존재하는 ‘최초원인’이다. ‘최
초원인’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유무는 둘이 아니라 하나이
다. 노자는 최초의 자연을 누구보다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유무(有
無)는 태초부터 하나의 자연이다.


수학에서는 최초가 1에서 시작한다.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노자
의 무(無)는 0이고 유(有)는 1이다. 수학에서 무(無)의 개념으로 0을 발
견한 것은 인도에서였고,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학적으로만 이해한다면 0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한편, 십진
법의 단위를 표시하는 부호의 기능을 한다. 수학은 정확하게 또한 단
순하게 진리를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과학은 수학을 절대적
수단으로 이용한다. 서양철학에서는 만물의 ‘최초원인’을 일자(一者,
the One)로 본다. 최초원인으로서의 ‘일자’ 개념은 단지 1=1일 뿐이다.
수학과 과학에서는 1+0=1이나 1=1이나 전혀 차이가 없다. 서양철학
에서나 과학에서는 이러한 수학적 개념을 그대로 사용한다. 그러나
노자의 도(道)사상에서 최초원인은 유무(有無)이다. 그러므로 노자의
일자는1=(1+0)이다. 이러한 태초의 상태(0+1)가 노자에게는 자연의
원형이다.

 

노자의 자연등식은 1=1, 또는 0=1-1로 바뀔 수 없다는 의
미를 함축하고 있다. 노자는 무(無=0)와 유(有=1)의 공존(1+0)을 하나의
시스템(system)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자에게 자연은
영원히 하나(1+0)의 시스템적 존재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서양철학의
논리를 따르면 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고대 동서양 철학의
차이는 무(無)의 존재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있었다. 서양철학과 과
학의 오류는 무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함에서 발생했다. 노자는 도(道)
사상에서 최초의 자연이 유뿐만 아니라, 무 또한 존재하는 하나의 시
스템이라는 사실을 확정했다. 노자의 자연등식에 등장한 1과 0은 유무(有無)의

실재를 표현하는 것이며, 0으로 표현되는 무(無)는 1로 표현되는 유(有)를 담고

있는 그릇으로 공존하는 하나의 시스템이다. 그렇다면 0이 1보다 크다는 역
설이 나온다. 이 역설은 양자물리학적 현상이며, 최초의 자연에 나타
난 사실이고 진리이다. 이 역설에 아인슈타인이 질문했던 물리적 실
재인 ‘숨은 변수’가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0으로 표현
되는 무(無)가 자연을 구성하는 물리적 실재라는 사실에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역설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는 우주만물의 실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아인슈타인이 고뇌했던 말을 따른다면, 양자이론과 달리 인간이

실재를 관측하지 못하거나 또는 관측하지 않는다고 해서 실재가 없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노자의 무(無)는 관측자가 없었던 때부터 유(有)의

그릇으로 존재했던 실재이다. 따라서 인간이 무를 실재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무의 실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노자의 자연등식에서

무(無)는 테두리가 없는 무한(無限)인 반면, 유(有)는 무한에 담겨 있는 유한이다.
아인슈타인의 ‘숨은 변수’ 이론을 이해하는 사람은 노자의 자연등식
의 역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열역학 제1법칙(에너지 보존법칙)에 의하면 영원히 증감(增減)되지 않
는 우주 에너지가 태초에서부터 존재했다. 과학적으로 유(1)는 우주
에너지 총량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우주 에너지 총량은 열역학 제1법
칙에 의하여 영원히 불변하는 존재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우주만물
의 질량을 총합산한다면 우주 에너지 총량 1을 미달하거나 초과할 수
없다. 우주에 존재하는 만물의 모든 특성 또한 우주 에너지 총량에 포
함되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신의 존재도 여기에 포함
되고 있다. 따라서 모든 생명 에너지 또한 이 1에 포함되어 있다. 인
간의 지적 능력 또한 이 1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적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
실이기 때문이다.


한편 열역학 제0법칙에는 절대적인 특성이 있다. 절대온도 0K에
서는 물질도 에너지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주 안에서는 절대
온도 0K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유의 바깥인 무에서는 절대온도
0K라고 본다. 그러므로 우주 에너지의 총량이며 우주만물의 질량을
총합산한 유가 절대온도 0K인 무에서 열평형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
은 열역학 제0법칙에 위배된다. 열역학 제0법칙에도 불구하고 유무
가 하나의 시스템으로 공생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역설적인 사실인
가? 유무가 공존하는 것은 열역학의 법칙들에 유일하게 우선하는 대
칭성의 법칙을 적용받기 때문이다. 대칭성 법칙은 존재의 기본법칙
이다.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유는 무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커다란
불사조 한 마리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무한(無限)한 무의 공간에서 유
유히 날아다니는 불사조를 상상해보라! 우리는 그 불사조 안에서 살
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의 존재를 불사조의 장기 안에 서식하는 기생
충으로 오해하지는 마시라!


다시 정리하면 노자의 유무는 우주 에너지 총량이며 존재의 ‘최초
원인’이다. 이것이 모든 존재의 과학적 ‘최초원인’이며, 빅뱅 이전의
‘특이점’에 해당된다. 여기에서 노자의 도(道) 사상은 과학이 된다. 노
자의 유(有)는 우주 에너지 총량 또는 우주 전체를 의미하며 유한(有限)
의 양을 가졌다. 무(無)는 우주 에너지 총량을 포괄(包括)하는 그릇이
며 바깥이 없는 무한량(無限量)의 크기를 가지고 있다. 한 덩어리의 우
주 에너지인 유가 무의 그릇에 담겨 있는 형상이다. 유가 무의 그릇에
담겨 있다는 것은 0이 1보다 크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서양의 수학
적 관점에서는 노자의 자연 이해가 역설(逆說)이다. 유무(有無)의 역설
을 이해하지 못하면, 존재의 ‘최초원인’에서 무(無)의 존재를 부정하게
된다. 노자의 자연이 유무, 즉 1+0로 구성된 하나의 시스템이라는 사
실을 이해하면, 무(無)의 존재를 부정하는 서양철학과 과학의 한계를
탈출할 수 있다. 노자의 자연은 이 한계에 갇혀 있지 않다.

2. 자연에 존재하면서 자연을 다스리는 신(神)


노자의 도(道)사상에 의하면, 유무(有無)는 제1차 자연이다. 노자는
“무를 천지의 시작이라 일컫고, 유를 만물의 어미라고 일컫는다”(無
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도덕경』1장). 무는 천지의 시발점이므로 이
미 4차원의 시공간이다. 그러므로 무(無)는 유(有)의 그릇이고 터전
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유(有)는 만물의 어머니 노릇을 했으므로 창조
의 신이다. 만물의 어머니는 노자의 자연에서 스스로 존재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선포하셨다(출3:14).

스스로 있는 것이 자연이다. 그러므로 만물의 ‘최초원인’인 신을 자연이

아닌 곳에서 찾는 것은 잘못이다. 따라서 자연을 탐구하는 과학이 자연에서

‘최초원인’을 무시하고 원인과 과정과 결론의 법칙을 논의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노자의 도(道)사상에 의하면 제1차 자연에서 창조신의 작위에 의한 창조사건이

일어나서 제2차 자연이 생겨나게 되었다. 태초의 창조신은 노자의 제1차 자연에서

자기의식을 가지고 존재한 지적 생명체였다. 동양철학에서 노자의 도(道)와

공자의 도를 비교해보면 매우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다. 공자는 『중용, 中庸』에서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道也者不可須叟離也-천명을 성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한다. 도 를 닦는 것이 교이니 도는 잠시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고 하였다. 노자 의 도는 공자의 천(天)과 천명(天命)을 포괄하는 보다

근본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이 빅뱅 이전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특이점’은 노자의 제
1차 자연에 있었던 것이고, 빅뱅은 창조신의 작위에 의한 창조 사건
이다. 제1차 자연에서 제2차 자연으로 넘어가는 길을 뚫은 것이 빅뱅
이었다. 노자는 그 사이에 ‘온갖 오묘한 것의 문’(衆妙之門- 『도덕경』, 1
장)이 있다고 했다. 자연에 ‘온갖 기묘한 것’이 생겨난 것은 창조사건
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자의 자연은 유무(有無)의 상태인 제
1차 자연과 유(有)에서 만물이 생겨난 이후의 제2차 자연으로 구분해
서 이해해야 한다. 창조신은 빅뱅 이후 온갖 오묘한 것들로 제2차 자
연을 만드셨다. 창조신은 제2차 자연에서도 그가 창조한 온갖 오묘한
것들과 함께 존재하신다. 노자는 제2차 자연에서 인간들에게 도(道)
를 따라서 살아 가라고 가르쳤다. 만약 도를 따르는 삶이 어렵다면 덕
(德)이라도 따르라고 했다. 그런데 인간이 과학을 발전시키면서 ‘보이
지 않는다’는 이유로 창조신을 배척했다. 이제 인간은 과학적 무신론
의 영향으로 덕조차 지키지 못하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것은
노자에게 제3차 자연이다.


노자는 태초의 제1차 자연에서 이미 신의 존재를 발견했다. 노자
는 신을 인간이 사는 제2차 자연의 창조자로 이해했다. 창조신은 노
자의 제1차 자연, 즉 태초의 유무(有無)에 이미 살아계셨다. 고대에는
동서양 사회에서 신을 표현하는 용어가 달랐을지라도 신을 창조자로
진술하고 있음은 별로 다르지 않다. 고대 서양철학에서 생명력(아르
케, 프시케, 엔텔레키 등)이 물질에 내재되어 있다고 말하는 물활론도,
노자의 유(有) 라는 말도, 성경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는 말도 우주만물의 창조자인 신의 존재를 표현하는 뜻에서는 같은
것이다. 다만 노자의 도(道)사상에서는 창조신의 작위가 자연의 법칙
에 반영되어 있으며, 그것이 곧 도이니 도를 따르라고 말한다. 노자
는 신을 어머니에 비유했다. 노자는 자연에서 만물의 어머니가 우주
전체와 인간까지 만들어내셨다고 이해했다. 노자의 도(道)사상은 만
물의 어머니이신 창조신의 작위(作爲)를 설명하는 것이다. 창조신의
작위가 없었다면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노자에게 자연은 신과 인간이 어머니와 자식처럼 같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노자는 “이루고 나서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功遂身退天之道- 『도덕경』, 9장)”

라고 말한다. 이 말은 한 마디로 창조신이 보이지 않게 물러나 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노자는 어머니이신 창조신의 도(道)를 낳고 키우는 것(生之畜之)으로 본다. 그리
고 낳았으면서도 제 소유로 하지 않고(生而不有), 위하되 의지하지 않
고(爲而不恃), 우두머리이나 주재하지 않는다(長而不宰- 『도덕경』, 9장)고
했다. 장성한 인간은 어미를 떠나 많은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그래
서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굳이 어미를 찾을 필요가 없다. 이제는 오히
려 어미 없는 자식이라고 자랑까지 하고 있다.


신화들은 태초의 상황을 혼돈(混沌: Chaos)이라고 말한다. 신화시대
이후에도 서양의 신학과 철학의 전통은 ‘최초원인’이 혼돈 가운데 존
재했던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관념의 혼돈에 빠지고 말았다. 이에 비
하여 노자는 유무가 서로 살아(有無相生) 있듯이, 사물에는 이미 양 극
단(兩 極端)적 대칭성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노자
에 의하면 “천하에서 모두 아름다운 것으로 알고 있는 것에는 이미 악
이 그 안에 있고(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모두 선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것에는 이미 선하지 않는 것이 그 안에 있다.”(皆知善之爲善斯不善已-
『도덕경』, 2장). 애초부터 모든 사물에는 어렵고 쉬운 것(難易), 길고 짧
은 것(長短), 높고 낮은 것(高下), 앞과 뒤(前後)가 있다. 노자는 창조신이
홀로 존재했던 제1차 자연과 창조신이 만물을 창조한 제2차 자연에서
혼돈이라는 것은 애당초부터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사실 유일한 존
재였던 창조신이 어찌 혼돈일 수 있으며, 창조신이 왜 혼돈을 창조했
으랴? 혼돈은 창조의 신이 존재하는 자연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렇게 보일 뿐이다. 노자의 자연에는 결코 혼돈이란 없다.
존재의 최고 법칙인 대칭성 법칙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창조신의 다양한 창조질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스스로 
혼돈에 빠질 뿐이다. 그러나 노자의 말은 이렇게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도(道)를 벗어난 탐욕적인 인간에게는 신이 창조한 만물
의 다양성조차 혼돈일 수 있다! 혼돈을 해결하려면 불변하는 진리를
찾아 세워야 한다. 그 일에 과학이 나서야 한다. 자크 모노는 과학이
무한한 다양성 속에서 불변한 것을 탐구하는 일밖에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크 모노는 과학이 해야 할 목표를 분명히 제시했지만, 과
학은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만약 모노가 노자의 ‘온갖 기묘한 것
의 문’을 이해했더라면, 과학적 무신론을 극복하고 우주만물에 ‘무한
한 다양성’을 창조한 신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과학이 노자의 자연
을 이해한다면, 신이 무한한 다양성을 창조한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신학은 물론 철학과 과학이 통섭적으로 논
의할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신이 존재하는 노자의 자
연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과학적 유신론은 과학적 무신론에 대해 더욱 설득력 있는 과학적
이론의 토대 위에 정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어느 누가 창조신
의 존재를 믿든 안 믿든, 우주만물이 존재하게 된 ‘최초원인’은 ‘우주
에너지 총량’이라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우주 에
너지 총량’에는 이미 창조의 신이 존재하고 있다. 과학적 유신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창조신의 실재를 설명하는 것이다. 과학적 유신론
은 창조신의 실재를 찾는 과학적 단서를 노자의 자연이해에서뿐만 아
니라 기독교의 성경에서도 발견한다. 기독교 창조신의 첫 말씀은 “빛
이 있으라!”는 명령이었다(창세기 1:3). 이 명령은 바로 빅뱅에서 실현
되었다. 빅뱅은 인간이 신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를 암시한
다. 가장 큰 이유는 신의 처소(處所)가 우리우주와는 차원이 다른 신
의 우주에 있기 때문이다. 신이 다른 차원에 존재해야 할 이유는 분명
하다. 우주 에너지를 물질로 만들어야 하는 과정에서 빅뱅이 초고온
을 발생하기 때문이다.

 

신은 지적 생명체이므로 초고온에 휩쓸리지 않기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스스로 취했다. 그 방법은 빅뱅에 쓸 우주 에너지를 따로 나누는 것이다.

우리는 뒤에서 현대우주론을 탐구하고 나면 그런 사실을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빅뱅에 의하여 만들어진 우리 우주의 4차원 밖의 일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신의 처소가 다른 차원에 있다면 우리는 신의 존재를 알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우주 밖의 다른 차원을 관측하거나 건너갈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적 무신론은 빅뱅의 ‘특이점’을 시공간의 시작점으로 조작하며
빅뱅 이전의 신의 존재에 눈길이 미치는 것을 아예 막으려 하고 있다.
그렇지만 신의 존재는 현대 양자물리학에서 발견한 자연의 법칙에 의
하여, 또한 노자의 자연이해에서 명확한 논리로 입증되는 것이다. 과
학적 유신론은 그것에 대해 고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