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 A 창조론 과 오메가Ω 창조론/알파 창조론 연구

창세기 1:26-27에 관련한 해석 연구(논문 연재) 5

heojohn 2023. 5. 6. 23:33

. “하나님의 형상대로만 창조된 사람

 

1. 하나님의 형상모양에 대한 해석 논쟁

 

기독교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사람의 창조 계획을 선포하실 때 스스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형상모양의 해석을 두고 초기 교회 때부터 논쟁하고 있다.

 

(1) 초기 교회의 전통적 해석

초기 교회는 인간에게 주어진 선한 특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인간이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성품과 거룩과 영원을 향한 염원을 가질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은 하나님의 형상은 신체적 특징으로, 하나님의 모양은 영적인 특성으로 구분해서 이해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Clement)와 오리겐(Origen)은 신체적 유비를 거부했다. 그들은 인간의 인간다운 특성으로 나타나

는 것이 형상이며, “모양은 본래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은 자질들로서 계발되기도 하고 상실되기도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관점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암브로스(Ambrose), 어거스틴(Augustine) 등에게 이어졌다. 펠라기우스(Pelagius)와 그의 추종자들은 형상을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과 인간의 자유의지, 그리고 피조물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 등의 이성적인 면에서 찾을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사변 신학자들은 형상을 인간에게 주어진 지적 능력으로, “모양을 원의(原義)라고 구분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 하나의 구분으로는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주어지는 자연적 은사를 형상으로 보며, 그 위에 하급한 본질을 제어하는 초자연적 은사로 주어지는 선물을 모양으로 보기도 한다. “모양으로 간주되는 원의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永生)도 포함한다.

 

(2) 종교개혁 이후에 등장한 관점

 

종교개혁 시대에 등장한 개혁파 신학자들은 형상모양의 구분을 반대하고, 두 말의 개념을 단일화하여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로 통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원의를 강조하면서 아담의 범죄로 완전히 상실했다고 해석했다. 여기서 원의는 모양에 내포되는 초자연적 은사이며,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다. 원의의 3가지 구성요소와 성경적 근거는 참된 지식(3:10)과 의와 거룩(4:24)이다. 원의는 아담의 범죄로 훼손되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될 수 있다. 원의의 3가지 요소 이외에도 영성과 불멸성이 추가되기도 한다.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에 가졌던 완전성이라고 보았는데, 그 안에는 자연적인 자질과 원의라고 불리는 영적인 자질들이 내포되었다. 그렇다면 형상모형이라는 두 개의 말의 해석에 하나님과 사람의 속성들에 관련하여 끌어넣지 못하는 개념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루터와 칼빈이 형상모양에 대한 관점의 일치를 이루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형상모양과 분리된 기존의 개념으로 되돌아갔고, 그에 대한 해석은 교파별로 다른 관점에서 따로 논의되어야 하는 것이 되었다. 그들의 견해가 일치하는 것은 아담의 타락으로 훼손된 하나님의 형상이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하여 회복될 수 있다는 점뿐이다.

 

독일의 자유주의 종교학자 슐라이어마흐(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1834)는 칼빈의 완전성 개념을 비판하면서 완전성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노력하여 얻을 수 있는 발전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슐라이어마허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 안에서 신적인 것을 수납하는 모종의 능력이며, 거룩한 이상에 응답하여 하나님의 형상에까지 자라가는 능력이라고 보았다. 신정통주의자로 불리는 칼 바르트(Karl Barth)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접촉점에서 있다고 본다. 문법적 관점으로는 형상모양이라는 두 개의 단어 앞에 붙은 전치사가 다르므로 두 말의 쓰임이 다르고, 따라서 의미의 표현도 다르다고 본다.

 

(3) 개혁교회의 일반적 이해와 제언

개혁교회의 관점이 비판을 받지 않는 것도 아니고, 다른 관점의 신학자들이 없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개혁교회의 관점은 하나님이 처음 만드신 제1 아담은 그의 자손들에게 물려준 죄의 조상이고, 그 죄를 사해 주시려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제2 아담으로 구원자가 되셨으며, 그를 믿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모든 죄에서 구원을 받게 된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게 한다. 따라서 개혁교회의 특징은 제1 아담의 자손들은 이 세상에 구세주로 오신 제2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기초로 삼는 것이다.

따라서 개혁교회 신자들 대부분은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서 하나님이 아담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으나, 아담이 죄를 지어 그 ‘형상’을 잃어버렸다고 이해한다. 그 결과 아담의 자손들은 그의 원죄를 유전적으로 이어 받게 되었고, 그것을 대속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고 믿는다. 그리스도는 아담의 원죄와 그 자손들의 자범죄까지 대속하심으로써 그를 믿는 자에게 사망의 죄에서 구원 받음과 영생의 길로 가는 권세를 주신다는 교리의 성립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형상”과모양”이  같은 뜻의 동의어라는 해석은 정당한 것이 될 수 없다고 본다. 그 이유는 먼저 루터와 칼빈이 두 말을 동의어로 보자는 주장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음에도 해석은 전혀 달랐다는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의미가 다른 말이 동의어일 수는 없다. 히브리어 원무문으로는  두 명사의 앞에 쓰인 전치사와 성이 다르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요소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형상”을 육신적인 것으로, “모양”은 “영과 혼”에 관계되는 것이라 보는 초대교회의 견해가 되살아난다. 여기서 필자는 사람의 창조 계획을 선포하시는 말씀에서 형상모양이 하나님이 사람의 창조를 실행하신 다음에는 하나님의 형상만으로 서술한 점에 주목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형상모양으로 남성 한 사람(아담)을 만들기로 선포하셨지만, 만들어진 사람은 “모양”이 빠진 채 남자와 여자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 창세기 저자가 “모양”을 빼놓은 이유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남자와 여자의 창조에 관련된 구절들을 더 탐색해보아야 한다. 그것은  뒤에 설명될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형상모양에 대한 논쟁을 종식시키는 길은 근대에 발전한 조직신학에서  형상을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으로, 모양을 비공유적 속성으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제안한다. 두 가지에 대한 해석과 쟁점을 비교해보면, 필자의 제안에  불합리한 점은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