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 A 창조론 과 오메가Ω 창조론/알파 창조론 연구

창세기 1:26-27에 관련한 해석 연구 (논문 연재) 3

heojohn 2023. 4. 22. 21:23

2. 1:26우리의 해석에 대한 다양한 관점

 

기독교 신학자들은 창1:26에서 하나님이 사람의 창조계획을 선포하시는 말씀 중에서 처음 등장하는 우리를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식하는 첫 번째 근거로 본다. 그러나 같은 구약성경을 경전으로 사용하고 있는 유대교 등에서는 기독교의 이해를 거부하고 있다. 기독교에서 파생한 이단 교회들은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을 정통 교회와 달리 제멋대로 해석하여 하나님의 정체성을 왜곡한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지식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지식의 기초는 바로 이 구절의 우리를 삼위일체 창조주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히브리어 원문 성경에는 창 1:26의 어느 문장에도 주어를 표현하는 우리가 따로 나타나지 않는다. 동사 뒤에 주어가 나오는 히브리어 문법에서 주어가 나오지 않으면, 그 문장에 쓰인 동사를 분석해서 주어를 찾아야 한다. 한국어 성경을 비롯한 번역 성경은 대개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가 ...... 사람을 만들고라고 말씀하시는 문장에서 만들고의 히브리어 동사(나아세: נַעֲשֶׂהֶ)를 분석해보면, ‘---1-으로 나온다. ‘-는 동사 자체의 형태(칼 동사형과 미래 시제)를 나타내고, ‘-1-은 동사의 주어가 공성-1인칭 대명사복수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유일신 하나님이 하신 우리라는 말씀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정체성을 스스로 표현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이 말씀은 6일 창조의 마지막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땅과 생물을 다스리는 자로 만드시겠다는 선포이다.

 

창세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구절은 두 곳이 더 있다. 3:22에서 선악과를 먹은 아담을 가리켜서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라고 하신 말씀과 창11:7에서 한 언어로 소통하는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는 것을 막으려고 언어를 혼잡하게 만들기 위해 땅에 우리가 내려가서라고 하신 말씀이다. 1:26우리를 올바로 이해하면, 나머지 두 곳의 우리도 같은 의미로 해석하면 된다. 따라서 창1:26절에서 사용된 복수 대명사 우리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을 검토하는 것이 올바른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본다(이하 부분은 전 총신대 김정우 교수의 논문 삼위일쳉 대한 구약성경적 근거"에 빚지고 있다.)

 

(1) 초대교회로부터의 전통적 관점: 신성의 복수형(Plural of Fullness)에서 삼위일체 발견

 

전통적 교회는 초대교회부터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우리를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왔다. 이 복수 대명사 속에 바나바 서신과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는 그리스도를 보았으며, 터툴리안(Tertullian)은 성육한 말씀, 즉 그리스도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고, 이레니우스(Irenius)는 성자와 성령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Hasel 1975:58).

 

구약신학자 페인(D. Payne 1978: 167)은 여기에서 삼위일체적 해석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설명도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형상으로만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본문 속에 "삼위일체가 내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하젤(G. Hasel)을 이어 클라인스(David J.A. Clines)우리를 신성의 틀 안에서의 복수형(plurality within the Godhead)으로 해석한다. 창세기 1장의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이미 창세기 12절에 하나님의 신에 대한 언급이 있기 때문에 이 해석은 가능하게 보인다. 구약성경에서 성령은 창조의 수단으로 나타난다(33:4, 104:30, 37). 그렇다면 창조의 첫째 날 하나님의 창조명령인 빛이 있으라에서 빛을 신적 인격, 즉 성자로 볼 수 있게 된다.

 

(2) 히브리어 문법학자들의 관점:

 

위엄의 복수형(Plural of Maiesty)

카일(C. Keil)과 드라이버(G. Driver)우리를 위엄(혹은 장엄)의 복수형으로 본다. 이것은 신성 안에 있는 속성과 능력의 충만함이다(Driver 1904:14). 히브리어와 셈어에서는 단수개념이 복수형으로 강화된다. 예로서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엘로힘(Elohim)은 수적인 복수가 아니라 높고 강하고 존귀한 하나님을 뜻한다. 데라빔(teraphim)도 하나의 신상이지만 복수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위엄의 복수형은 명사에만 나타나고 대명사에는 그렇지 않으므로 이 입장은 문법적으로 정당하지 않다(P. Joüon 1923:309). 더구나 만들자(asa)”라는 동사는 한 번도 위엄의 복수형으로 사용된 적이 없다.

 

의사표현형 복수형(Plural of Self-deliberation):

게세니우스(W. Gesenius)-카우치(E. Kautzsch, #124f,n.3)와 쥬옹(P. Joueon, #ll4e), 브로켈만(C. Brockelmann, 24,14a)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복수형으로 보며, 카수토(U. Cassuto 55)는 스스로 격려하는 형식(self-encouragement)으로 본다. 최근에는 베스터만(Claus Westermann, 1909-2000)과 몇몇 학자들이 지지한다

 

이 입장은 문법적으로 가능하다. 문법학자들은 이사야 68절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와 사무엘하 2414절의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이 두 본문에 따르면, “우리가 평행을 이룬다. 창세기 117절도 중요한 근거로 사용된다. 사실 창세기 117절은 의사표현형 복수형으로 보기에 아주 적절하다. 그러나 문법적으로 이런 용법은 지극히 희소하며 문맥을 볼 때 의사표현형 복수형은 창세기 322절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다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사야 68절도 마찬가지다.

 

(3) 성서비평학자들의 관점: 신화의 파편

 

게블러(Gabler 1795, Hasel 59쪽에서 인용됨)로부터 시작하여 대부분의 현대 비평학자들은 이 창세기의 본문이 신화의 파편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고대 근동아시아의 창조신화에서 신들이 서로 상의하여 인간을 창조하는 사상이 우리라는 복수형으로 아직도 창세기의 본문 속에 남아 있다는 주장이다. 에누마 엘리쉬에는 마르둑이 에아와 상의하고. 아트라하시스 서사시에는 여러 신들이 상의한 뒤 인간을 만든다. 헤르만 궁켈(Hermann Gunkel)은 이 복수형이 P기자가 이전에 있었던 다신론적 기사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반영해준다고 한다(1901:101). 그러나 문서가설의 정당성을 제쳐놓고서라도 창세기 1장은 고대 근동아시아의 다신론을 비판하며 그 신화적인 사고방식에 대해 철저하게 논쟁하고 있으므로 다신론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4) 유대교 랍비들의 관점: 천상의 총회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Philo Judaeus)로부터 유대인 랍비들(Bereshith Rabba viii 3-7)과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우리라는 복수형의 말을 하나님께서 천상의 총회에 있는 천사들을 향하여 우리가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해석해 왔다. 최근 이런 해석을 주장하는 개신교 학자들도 많이 있다. (폰 라드(Gerhard von Rad), 침멀리(Walter Zimmerli), 베스터만 144에서 인용됨).

 

그러나 이 해석에 대해 카수토(U. CAssuto)는 세 가지 관점에서 비판하고 있다(1961: 55). 즉 이 해석은 첫째로 창세기 1장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온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중심 사상과 상치되는 것으로 보이며, 둘째로 우리가 만들자는 표현은 천사들과 상의하는 말투가 아니다. 셋째로 만약 하나님께서 상의하는 투로 말씀하셨다면 하나님께서 누구와 상의하셨는지 더 구체적으로 시사했을 것이다(왕상 22:19;6:1-8; 1-2). 카수토의 비판이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지만, 김정우는 이상의 여러 해석 가운데 천상의 총회를 가리킨다고 보는 해석이 아래에 제시된 네 가지 논거에 근거하여 구약 자체의 맥락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