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무신론 비판(진화론+유물론)/유물(무신)론의 발전과 비판

철학적 무신론: 생물의 자연발생론

heojohn 2020. 3. 9. 01:03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관념론과 유물론, 또는 유신론과 무신론이다. 관념론은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으로 생명의 본질이 신적 존재와 연결되는 정신에 있는 것으로 보면서 유신론을 주장한다. 유물론은 물질 일원론으로 몸은 물론 정신도 물질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보면서 무신론으로 나아간다. 이 두 가지 관점은 우주의 기원과 신의 존재에 관련하여 어떤 믿음을 가지느냐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유신론은 신이 우주의 물질과 생명을 창조했고 이후에도 신의 법칙 또는 섭리를 믿는 입장으로 원칙적으로 모든 종교적 교리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반면에 무신론은 신의 존재는 물론 그의 창조와 섭리를 부정하고 자연의 법칙만을 믿는 입장으로 우주 물질이 스스로 조합해서 생명을 비롯한 만물의 형상을 발생케 했다고 주장하는 자연주의적 입장이다. 말하자면 무신론의 특징은 우주와 생명이 자연법칙에 의해서 오직 물질로부터 발생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유신론은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어떤 형태로든지 신의 섭리가 개입되어 있다고 믿는 것이다. 따라서 무신론과 유신론의 세계관을 구분하는 기준은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대해 신의 개입여부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현대 유물론 철학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러시아과학아카데미는 세계관의 기준에서 정신, 의식, 사고, 감각을 근원적이라고 생각하는 철학은 관념론의 진영으로, 물질, 자연, 존재를 근원적이라고 인정하는 철학은 유물론의 진영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 책은 유물론에 속하는 과학적 무신론의 오류를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적 무신론 발전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살펴보려는 이 책에서는 이 장에서 고대 신화적 유신론이 생물의 자연발생론에 의해 철학적 무신론으로 발전하는 과정, 그리고 과학적 무신론의 발전의 전 단계인 과학주의로의 전환과정을 개략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1) 고대 신화에 대한 회의

 

유신론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것은 세계의 각 민족들이 가지고 있는 고대신화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각 민족의 고대 신화는 예외 없이 신이 인간을 비롯한 만물을 만들었고 또 인간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고 있는 인격적 실체로 서술되고 있다. 그러므로 유신론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계 각 민족의 고대 조상들로부터 전승된 것이라는 사실이 입증된다. 고대 인류사회에서 인간은 신의 존재와 창조를 의심하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던 것이며, 무신론은 훨씬 뒤에 그리스의 철학사상에서 발전한 것이다. 그래서 세계 각 민족의 고대 신화를 널리 연구했던 비교종교학자이며 신화학자로서 저명한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9)는 유신론적 입장을 강력하게 지지하면서, “창세 신화가 진실인 이유는 세계의 존재가 그것을 증명해주기 때문이고, 죽음의 기원 신화가 진실인 것은 인간이 필멸하기 때문이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각 민족의 창세 신화의 바탕 위에서 어떤 것은 제도적인 종교 체제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무신론을 주장하는 유물론자들은, 종교는 고대로부터 계급사회의 발생과 발전에 따라 원시적인 신화적 관념들이 정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유물론자들은 유신론자들의 종교적 신앙이 영혼 불멸과 신에 의한 세계창조를 주장하면서 세계를 신의 의지의 구현이라고 설명하는 허구일 뿐이며, 또한 신을 지상의 왕 또는 지배자와 같은 것으로 보면서 이들의 종교적 신앙은 노예를 소유한 상층권력을 신격화하고 노예제도를 찬미하는 신학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2) 그리스 철학의 자연발생론

 

고대 동방에서 원시 종교가 정착하는 동안에 신의 존재와 신을 숭배하는 종교에 대해 회의하는 철학은 그리스에서 처음 발생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과연 고대 신화와 종교에서처럼 인간사에 간섭하는 인격적 신이 있는가? 그런 신이 있다면 세상사에 어디까지 개입하는가? 고대 그리스의 식민지 밀레투스에서 철학의 비조(鼻祖) 탈레스(Thales of Miletus, B.C. 624-545)는 이렇게 신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 가장 먼저 회의적 사유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하여 처음으로 물이 변화하는 현상을 신의 개입 없이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액체에서 기체로 또는 고체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에는 신이 부여한 생명력이 이미 함유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동방의 이집트를 여행하는 기회에 나일강의 진흙에서 작은 생물들이 많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면서 이런 사유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그의 친구이자 제자인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er, B.C. 610-546)는 만물이 어떤 근원적인 실체로부터 유래했지만,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또 한 사람의 밀레투스 철학자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B.C. 585-528)는 공기(Pneuma)가 만물의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영혼도 공기이며, 공기가 탁해지면 물질이 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오니아학파(Ionian School)로 불리는 이 세 사람의 주장은 유신론을 벗어나지는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사고는 물질 자체에 이미 신의 생명력이 주입되어 있다고 하는 생기론(生起論) 또는 물활론(物活論)에 바탕을 둔 것이었고, 이런 사고는 범신론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처음으로 관찰의 방법에 의해 자연적 발생을 주장한 것이므로 최초의 자연발생론(spontaneous generation)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유물론자들에 의해서는 유물론의 창시자로 여겨지고 있다.

 

데모크리토스(Democritus, B.C. 460-370)와 에피쿠로스(Epicurus, B.C. 342-271)는 신의 존재와 창조를 좀 더 회의하는 입장에서 사색한 철학자들이었다. 원자론자로 불리는 데모크리토스는 생명은 태고의 진흙으로부터 생겨났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의 뒤를 이은 에피쿠로스는 인간에게 최고의 선은 신에게 봉사가 아니라 자신의 쾌락일 뿐이라고 좀 더 무신론으로 나아가는 주장을 할 수 있었다.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os, B.C. 540-480)는 만물이 유전(流轉)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만물의 원소인 불이 만물의 변화를 만들어낸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만물은 일자(一者, the One)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며 이 일자가 곧 신이다. 그러나 만물의 실재성(實在性)은 일자보다 적다고 보았다. 그에게 만물은 대립물이며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나 만물은 통일된다. 그의 가장 유명한 명제는 인간은 같은 시냇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헤겔에 의해 변증법 철학의 창시자로 여겨졌고,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레닌도 그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리스 철학자들의 주장은 세상사에 신의 개입을 축소하는 쪽으로 더 나아가긴 했지만, 역시 신의 존재와 개입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한 것이었다. 이들의 견해는 이신론적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소크라테스(Socrates, B.C. 469-399)와 그의 제자 플라톤(Platon, B.C. 427-347)은 그리스 철학의 기초를 만들어놓은 철학자였다. 플라톤에 의하면,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만물의 기초는 영혼이며, 영혼은 불멸하는 것이며, 죽음은 육체로부터 영혼의 분리에 불과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영혼이 생명의 주체가 되는 너 자신을 알라고 가르치면서 악법조차 거부하지 않고 기꺼이 죽음의 독배를 마셨다. 플라톤은 스승의 사상과 그보다 앞선 엠페도클레스(Empedoklcles, 493-433 B.C.)4원소설을 받아들였으나, 거기에다 이데아설을 추가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 B.C.)는 그의 스승 플라톤의 이데아설을 비판함으로써 더욱 유명해졌다. 그는 사물을 질료와 형상으로 나누어 보았다. 여기서 질료는 물질이며, 형상은 보이지 않는 유명론적 실재이다. 그에 의하면 만물은 형상에 따라 4원소의 질료가 조합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는 윤리학에서 목적론(目的論)의 주체인 신은 부동의 동자로서 제1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의 모든 철학사상을 종합했다. 그래서 서양의 학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사상에 기초되지 않은 것이 없으며, 특히 삼단논법을 제시함으로써 이성적인 자연철학으로의 길을 열었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눈으로 썩은 고기에서 자연적으로 구더기가 나오는현상을 보았고, 생물은 형상에 따라 자연적으로 발생한다고 생각하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의 자연발생론은 자연을 육안으로 관찰하면서 얻은 경험을 철학적으로 진술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물질 자체에 이미 생명력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의 다양한 자연발생론적 사고는 플로티누스(Plotinus, 205-270)에 의하여 정리되었다. 태초에 신에게서 흘러넘친 신적 생명력이 물질에 이미 주입되어 있다가 형상에 따라 각종 생명으로 발생했다는 유출설(流出說)을 주장한 것이다. 애당초 신으로부터 유출된 아르케(Arche), 엔텔레키(Entelechy), 프시케(Psyche) 등의 신적 생명력에 의한 자연발생론은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신학을 연결하는 이론이 되면서 신플라톤주의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신은 이제 신화시대의 인격적인 존재로 만사에 개입하는 분이 아니라, 물질에다 생명력을 흘려놓고 우주를 법칙에다 맡겨놓은 초월적 존재로 회의되기 시작했다.

 

3) 동양의 자연철학

 

철학적 사고의 변화는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라의 시조 문왕(文王: 1152-1056 B.C.)에 의해 저술된 것으로 알려진 주역(周易)은 동양에서의 신화시대를 마감하는 작품으로 꼽힌다. 이것은 명백하게 이원론적인 음양(陰陽)의 법칙으로서 그것의 순환에 따라 64개의 괘를 설정하고 길흉화복을 점치는 자연철학적 점서(占書)였다. 이것은 점차 오행론(五行論)과 결합하여 자연철학적인 동양사상의 핵심이 되었다. 중국의 자연철학은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교사상, 공자의 천명(天命)에 따르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윤리학적 유교로 이어졌다.

인도에서 발생한 석가모니(釋迦牟尼)의 불교는 업보(業報)에 의한 윤회(輪回)의 법칙을 주장하는 자연철학적 교리에 기초하는 것이다. 그러나 힌두교는 여전히 고대신화적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동양 각국의 무속신앙은 아직 신화적인 요소를 간직하고 있다.

 

4) 기독교 창조론에서의 자연발생론

 

1세기에 로마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창립된 기독교는 처음에는 모진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4세기 초에 이르러서 기독교는 콘스탄틴 대제(Constantine the Great, 재위 306-337)의 밀라노 칙령(313)에 의해 로마제국에서 하나의 종교로 공인되었다. 그리고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I, 재위 379-395) 황제에 의해서 국교가 되었으며, 유스티아누스(Justinianus , 재위 527-565) 황제는 기독교의 자랑이었던 콘스탄티노플의 소피아 성당을 건축하였다. 그는 또 이교도적인 그리스 철학에 대해서는 아예 서적을 읽는 것조차 금지했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는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중세기 동안 창세기적 창조론과 성삼위론(聖三位論)으로 서양사상을 지배할 수 있었다.

 

기독교적 창조론은 바실리우스(Basilius, 315-379)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에 의해 창세기에 기록된 신의 창조 명령이 태초에 일회적으로 시행되고 끝난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영원히 반영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물의 자연발생은 언제든지 가능한 것이다.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인간을 괴롭히는 해충들이 부패물과 인간의 죄로부터 자연발생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들에 의하여 물활론적인 자연발생론은 기독교에서도 인정하는 교리가 되었다. 기독교가 전성기를 누리는 동안에 서양의 중세철학은 기독교의 교리를 넘어서는 주장을 하지 못하고 오직 신학의 시녀로서 기능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