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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유신론’의 정립을 위한 ‘자연’이해 패러다임의 전환

heojohn 2020. 3. 31. 22:51

-노자(老子)의 자연 이해를 중심으로

 

I. 시작하면서: ‘과학적 유신론은 왜 주장되어야 하는가?

 

이 논문은 인간사회를 동물사회로 격하시키는 과학적 무신론에 대응하여 과학적 방법으로 과학적 유신론을 정립하고자 하는데 있다. 이 목적을 위해서는 과학이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는 자연이해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먼저 과학적 무신론이 나오게 된 과정을 살펴본 다음에 노자와 과학의 자연 이해를 비교해보면서 우주와 생명의 기원이 창조사건임을 밝혀보고자 한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신화에서 발전한 신학에서 철학이 파생되었고, 철학에서 과학이 파생되었다. 철학은 과학이 분리되기 이전에는 자연을 연구하는 자연철학을 의미했다. 자연철학은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2-1727)1687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에서, 우주는 신이 만든 기계와 같은 것으로 주장함으로써 종결되었다. 뉴턴 이후 실증주의가 확립되기 이전까지 과학은 주로 관찰에 의존하여, 자연만물의 발전상을 연구하면서 ‘Natural History’라고 불리기도 했다. 현재 쓰이는 과학(Science)’이라는 말은 자연과학(natural science)을 줄여서 부르는 것이다. ‘science’라는 말은 체계적인 학식이라는 뜻의 라틴어 스키엔티아(scientia)에 어원을 두고 있다. 현대과학의 뿌리인 물리학을 가리키는 ‘physics’는 자연을 뜻하는 그리스어이며, 학문적으로는 우주의 시동자(First mover), 또는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의 존재를 주장했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BC 322)가 운동과 운동의 원인에 대해 쓴 8권의 책의 이름(자연학)에 처음 쓰였다. 이렇게 과학의 역사를 보면 과학은 자연을 대상으로 탐구하면서 생겨난 학문이다. 그러나 19세기 이전의 과학에는 여전히 우주자연은 신이 창조한 것이라는 인식과 그리스의 전통적 물활론이 내재되어 있었다.

 

과학에서 신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게 된 것은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와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의 공산주의 사적 유물론의 영향 때문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8공산당 선언에서, 공산주의는 그동안 사회적으로 인정되었던 영원한 진리, 모든 종교나 도덕 등을 아예 폐기하고 과거의 모든 역사적 경험과 모순적으로 움직일 것이라고 선언했다.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1859년 출판된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종의 기원을 읽고,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계급투쟁은 동물사회의 생존투쟁이 훨씬 더 증폭된 힘으로 자연에서 인간사회로 옮겨온 것이라고 보았다. 사회주의 이론에 과학적이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은 공산주의 이론서 반듀링론을 출판했던 엥겔스가 3개의 장을 따로 편집하여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 발전이라고 이름 붙인데서 시작되었다. 이후 두 사람은 다윈을 적극 찬양하고 그의 생물학적 진화론을 여러 곳에 인용하면서 공산주의 이론을과학적 사회주의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엥겔스가 반듀링론에서 생명은 단백질 의 존재양식이라고 했던 말은 사적 유물론의 교조(敎條)가 되었다. 그러므로 과학적 사회주의사회에서는 인간의 문제를 신에게 질문할 것이 아니라, ‘단백질 의 존재양식인 인간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과학적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

 

사적 유물론은 물질 일원론이다. 그러므로 물질이 물질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인간의 윤리적 가치는 전혀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마르크스·엥겔스의 교조주의자인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1924)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에 성공한 이후, 볼셰비키 과학자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바탕은 과학적 무신론이라고 주장하였다. 1922년 알렉산더 오파린(Aleksandr Ivanovich Oparin, 1894-1980)은 생명이 빅뱅이후 생겨난 우주물질의 화학작용에서 생겨났다는 화학적 진화론을 제안하고, 1936년 공산주의 독재자 스탈린(Joseph Stalin, 1879-1953) 치하에서 생명의 기원을 출판했다. 그는 이 책에서 물질을 이용하여 인공적으로 생명체를 제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론을 주장하면서 이를 입증하기 위해 온갖 방법으로 실험했다. 인공생명체 제조는 유물론의 완성이자 공산주의자인 그의 필생의 야망이었다. 만약 물질에서 인공생명체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 사실로 증명된다면, 그것은 신의 존재와 창조를 부정할 수 있는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파린의 야심은 그의 평생 80여년 생존기간에는 물론 그가 죽고 35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성공하지 못했다. 과학적 무신론의 증거를 찾으려는 인공생명체 제조 실험은 과학적 무신론자들에 의해서 계속 시도되었지만, 결국 실패하였을 뿐이다. 과학적 무신론을 주장하던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의 종주국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이 1991년에 붕괴되는 사태를 맞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생명의 기원이라는 측면에서 검토해보면,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보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유신론이 과학적 진리에 더욱 가까울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아직도 오파린의 망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이로 인하여 무신론 사상이 만연하게 되면서 단백질의 존재 양식에 불과한 인간사회는 정신적으로 황폐화되었다.

 

그동안 과학은 전기 및 광학기구의 도움으로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현대 문명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인간의 생활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현대과학은 불완전했던 고대 의술을 현대 의학으로 탈바꿈시키면서 인간의 건강과 수명을 증진하는데 엄청나게 기여하고 있다. 바로 이런 업적 때문에 과학은 무너질 수 없는 신뢰를 구축해놓았다. 과학이라는 용어는 모체인 철학에서 과학철학이라는 곁가지를 만들어내는가 하면, 자연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사회학 분야에서도 사회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제는 과학의 이름이 붙지 아니한 것은 신뢰를 얻지 못하는 것이 될 정도로 보편화되어 신학에서도 과학적 신학또는 과학신학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있다. 이 사이에 러시아에서 혁명에 성공했던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의과학적 무신론은 과학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보편적인 세계관으로 자리 잡고 말았다. 따라서 유신론은 사실상 오늘날의 학문세계에서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이제 유신론이 기사회생하는 방법은 과학적 유신론을 정립하는 길밖에는 없어 보인다.

 

 

II. 과학적 유신론 정립을 위한 방법

 

1. 신학과 철학과 과학의 역사적 관계

 

과학적 유신론은 먼저 신학과 철학과 과학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역사적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바탕 위에서 정립되어야 한다.

 

첫째, 과학의 옛 이름인 자연철학은 원시종교가 종교적 교리로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신학을 회의(懷疑)함에서 발생하였다는 사실이다. 자연철학은 신학에 대하여 다양한 비판론을 전개했으나 백가쟁명(百家爭鳴)에 그쳤을 뿐이다. 왜냐하면 자연철학 역시 신학과 마찬가지로 신의 존재를 관념적으로만 논의했기 때문이다. 과학혁명 이후 학문의 주도권이 실증주의 과학으로 넘어가자 우주와 생명의 기원 문제는 과학의 영역에서도 다루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결국 이 문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의 영향으로 과학적 무신론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현대에 이르러서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다윈주의 진화론을 상표로 삼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주장하는 진화론적 생명의 기원 문제는 아직까지 실험과 입증에 실패하고 있을 뿐이다. 그 결과 과학적 무신론이나 진화론은 허위 증거와 이론으로 구성된 사이비 과학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과학적 유신론을 탐구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로 유신론은 종교에서는 의심할 수 없는 진리였으나 철학에서는 논쟁거리였다. 신학은 일반적인 자연현상조차 신의 개입이라고 주장하였고, 과학은 귀납(歸納)적으로 신화적 유신론을 비판하였다. 논쟁에서는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논리를 제시해야 한다. 과학적 유신론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우주와 생명을 신이 창조했다는 사실을 과학적 방법으로 논증해야 한다. 과학은 전통적으로 자연이 물질로 구성되어 있고 물질은 부피와 질량을 가진 것으로 이해했다. 부피와 질량을 가진 물질은 보이지 않을 수 없다. 과학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실재(實在)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한다. 문제는 인간의 눈이 우주에서 신의 존재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과학적 유신론은 창조신에 의한 우주 창조와 생명의 창조라는 사건이 없었다면, 우주와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신의 존재를 감지(感知)하여 주관적으로 신학과 철학을 진술할 수 있지만, 과학적 유신론은 생명과 우주를 증거로 삼아 과학적으로 진술해야 한다. 다행하게도 최근 발전한 양자(量子)과학의 수준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실재(實在)를 부정하는 주장은 결코 과학적인 것으로 인정될 수 없다.

 

셋째로 과학은 그동안 점점 발전한 최첨단 망원경과 현미경으로 우주자연을 구석구석 탐사해보고, 물질의 원자까지 분해하여 살펴보았다. 과학은 그동안 지동설을 입증하여 천동설(天動說)을 주장했던 신학과 철학을 패퇴시켰다. 과학은 이렇게 학문적으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거대 우주 또는 원자 이하의 미시세계를 완전히 탐구하지는 못하였다. 양자과학에 의하면, 거시적 세계는 물론 미시적 세계도 아직 제대로 관측하지 못한 부분이 더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점점 더 확실해지고 있다. 과학은 자연을 연구하는 동안 자연에는 비약이 없다(Natura non facit saltum)’는 원칙을 확정했다.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말도 이 원칙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 원칙은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과학이론에서 비약이나 우연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적용된다. 과학적 무신론에 앞서 있었던 기계적 유물론은 우주는 신이 만든 자동기계와 같은 것이라는 뉴턴의 우주 개념을 전제하였다. 과학적 무신론의 원조 엥겔스는 그의 포이어바흐와 독일 관념론 철학의 종말에서, ‘기계적 유물론이나 헤겔의 변증법적 관념론을 극복한 포이어바흐의 유물론 등에는 아직도 신적 관념이 잔재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생명은 단백질의 존재양식이라고 주장했다. 오파린은 생명의 기원에서 생명은 빅뱅에서 생겨난 물질의 화학작용에 의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것을 변증법적 비약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빅뱅이론에서 말하는 우연과 다른 말이 아니다. 실제로 현대 진화론자들도 진화의 원인을 우연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과학적 무신론은 과학적 자료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엥겔스의 사적 유물론 철학과 레닌의 정치적 주장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과학적 무신론은 과학적 증거도 없고 이론을 입증하려는 과학적 실험에서는 모두 실패한 허구적 논리임이 밝혀진 것이다.

 

넷째로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이론이나 증거들을 조작하여 유물론적 생명의 기원설을 주장하고 기만적으로 과학적 무신론의 승리를 선언하였음에도 신학과 철학은 이런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였다. 전통적 고대종교 창시자들이 신화적인 교리를 만들었다고 해도, 현대의 신학조차 신화적인 신학에 머물러 있는 것은 시한부 생명을 사는 것에 다름 아니다. 신학이 유일한 창조신의 존재와 창조사건을 아직도 역사적 사실로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면, 모든 신학이 아직 진리에 기초를 두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제까지의 모든 신학이 틀렸거나 아직 진리를 말하는 신학이 나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 이유는 신학의 밑바탕이 되는 유신론이 아직 견고하게 진리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신학일수록 신을 인간의 목적에 이용하는 종교 사업가에게 비위를 맞추거나 뒷바라지하는 일에 목을 매고 있다. 이러한 종교와 신학은 현재도 만들어지고 있고, 과학적 유신론이 정립되기 전에는 앞으로도 계속 만들어질 것이다. 이제 철학에서 과학철학이 신조류가 되어 있는 것과 같이, 신학에서도 과학신학이라는 신조류가 새롭게 등장하고 있음은 의미가 적지 않다고 본다. 앞으로 과학적 유신론을 바탕으로 하는 신학만이 진리를 발견하는 신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하게 통섭적으로 탐구하여 신의 존재와 창조의 사건을 사실로 입증하는 과학적 유신론을 정립해야 한다.

다섯째로 과학적 무신론이 과학적으로 허위 이론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그렇다고 과학적 유신론도 허위 이론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인간은 원시시대부터 씨족·부족 단위로 각자의 신을 믿고 살았다. 그리고 각자의 신을 그린 깃발을 들고 전쟁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에서 승자는 패자의 신을 몰아내고, 승자의 신이 그려진 깃발을 내걸 수 있는 권리를 행사했다. 이런 전통에 따라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그들의 점령지에서 유신론을 몰아냈다.

 

그러나 이제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스스로 물러난 점령지의 잔해를 살펴보면, 그들은 공산주의로 물든 깃발을 들고 증거 없이 허위 이론으로 신의 존재를 이 세상에서 몰아내려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렇다 해도 현대 과학주의 사회에서 과학적 유신론을 주장하자면, 보이지 않는 신의 존재와 보지 못했던 신의 창조에 의한 기원론을 과학적으로 진술해야 설득력을 얻을 것이다. 과학은 전통적으로 측정과 관찰이 가능한 물질만으로 우주가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러한 주장은 아직도 대부분의 현대인에게 과학적 상식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은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며, 따라서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은 실체가 없으므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하게 된다. 과학적 유신론은 각 종교의 경전이나 교리적 신학에 근거를 두고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신의 창조 사건이 남겨놓은 우주와 생명에서 증거를 찾아 과학적으로 서술함으로써 설득력을 확보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특징은 동물적인 본능 이상의 이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인간에게 설득력을 갖는 것은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논리여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특징적으로 각자 진리라고 믿는 것으로 구성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각자의 세계관은 그 사람의 믿음의 체계로서 곧 그 사람의 종교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성적인 인간에게는 각자의 종교와 각자의 신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각자가 믿는 종교와 신을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이름은 같아도 실제로는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비록 그것이 오류라고 할지라도,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각자가 제멋대로 상상한 신의 깃발아래 살아가고 있다. 이런 상황을 간파한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그럴 듯한 이론을 내놓고 종교를 공격하면서 신의 존재를 부인하게 만들고 있다. 도킨스 (Richard Dawkins, 1941- )가 주장하는 것처럼, 현실적으로 신은 사람들이 제멋대로 상상하는 것이 되었고, 각자는 제멋대로 상상해서 만들어낸 신을 믿고 있다. 결국 사적 유물론을 교리로 하는 과학적 무신론자들의 종교가 공산주의 깃발 아래 세계적으로 확산된 것이다. 그렇다면 진리를 추구하는 신학과 철학과 과학은 이제 따로따로 연구를 할 것이 아니라 통섭적인 연구를 통해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 토마스 토렌스(Thomas F. Torrence)는 신적 초월성이 창조한 세계의 우연성은 우리에게 세계의 비밀을 직접 풀기 위해 세계를 연구할 것을 요구하며, 신에 대한 그 어떤 관념적 지름길이나 계시도 경험적 연구를 대신할 수는 없다고 했다. 이와 같이 과학적 무신론에 승리하기 위해 우리는 직접 현대인이 과학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과학적 유신론을 정립하지 않을 수 없다. 과학적 유신론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과학의 대상인 자연의 이해에 오류가 없는지를 검증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의 존재와 실험으로 입증할 수 없는 창조의 사건이 자연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임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자연 이해의 패러다임(paradigm)을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자연 이해 패러다임 전환(轉換)의 필요성

 

우리는 이제 과학이 진리 입증의 최종적 도구이며 방법이라는 것이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과학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과학에서는 물질로 구성된 우주자연에서 신 존재의 증거를 찾을 수 없다고 한다. 그동안 신학은 신론(神論)에서, 그리고 철학은 비물질적인 것도 존재할 수 있다는 형이상학, 즉 관념적 존재론(存在論)에서 신의 존재를 주장했지만 과학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과학과 신학, 그리고 철학이 상호 충돌하는 근본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동안 학문의 전쟁에서 과학이 승리한 것이 사실이고, 현대인의 사고방식이 과학주의에 경도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과학이 학문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승리자가 된 것이다. 이런 사실을 부정하거나 역전(逆轉)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부 사이비 과학자에 의해 과학적 방법이 오용되었던 사실도 있지만, ‘진정한과학이 전통적 신학과 철학에 대해서 학문적으로 승리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동물은 승리자에게 모든 것을 양도한다. 인간 또한 승리자에게 지배권을 부여한다. 학문에서도 승리자에게 그의 방법을 바꾸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이제 과학적 유신론은 과학의 방법에 따라 승리의 길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과학이 자연에서 신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한 이유가 과학이 자연의 범위를 너무 협소하게 이해하였음에 기인하지 않았는지를 검토해야 한다.

 

과학과 신학의 갈등 관계를 해소하는 방법을 연구한 이안 바버(Ian Barbour)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를 저술하여 대화나 독립 또는 공존이나 통합의 길이 있다고 주장했다. 존 호트(John Haught)과학과 종교, 상생의 길을 가다에서 과학과 종교 사이에 갈등(conflict)과 분리(contrast), 그리고 접촉(contact)과 지지(confirmation)의 네 가지 접근법을 제시하고 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동일한 대상을 연구하는 각 학문들은 방법적으로는 다를지라도 대화는 계속하자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바르게 이해한 자연과학은 기독교 신학의 가장 분명하고 믿을 만한 대화 상대이기 때문이다. 폴킹혼(Sir John Polkinghorne)은 신학이 과학의 지적 모체이고 기독교인들이 초기 과학의 탄생에 기초를 제공한 은혜가 있으므로 양자는 가족관계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과학이 열린 마음으로 진리를 추구한다면, 궁극적으로는 만물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이 삼위일체 신학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과학적 무신론자들을 향한 일방적인 구애일 뿐이다. 그동안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유신론적 철학 또는 신학적 주장들을 일방적으로 폐기해버리고 상대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방법이 다르면 결과도 달라지는 것이다. 방법과 전제를 달리하면서 이해를 같이 할 수 있는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망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결과를 상호 인정하고 그대로 두자는 주장은 진리를 협상하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진리는 협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학문에서 갈등을 없애는 길은 대화나 독립이 아니라, 결국에는 연구의 결과에 따라 통합의 길로 가야 하는 것이다. 통합은 통섭(統攝)이 전제되어야 한다.

 

과학적 유신론은 철학이나 신학이 현대인이 공감할 수 있는 진리를 탐구하면서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는데 기초한다. 신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하여 철학이 형이상학(形而上學)과 형이하학(形而下學)을 구분하고, 신학이 애매모호한 비과학적 또는 신화적 주장을 하는 것은 공론(空論)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주의 시대에서 과학과 신학 그리고 철학이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이 되려면, 각각 과학적 방법으로 과거의 주장들을 재검토하고 대립적 관계를 청산해야 한다. 신학, 철학, 과학이 통합의 길로 나아가자면, 먼저 자연과 물질에 대해 과학적 방법으로 공통적인 이해를 가지도록 해야 한다. 과학주의 시대에서 신을 실재(實在)로 진술하자면, 과학적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신의 존재에 대해서 제대로 탐구하지도 않고, 증거와 이론을 조작하기까지 하면서 섣불리 무신론을 주장했던 역사적 오류가 있다.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과학의 대상인 자연의 개념과 법칙을 왜곡하여 사람들이 사실을 오해하게 만들었다. 그 대표적 사례로는 공산주의자인 오파린이 생명의 기원을 출판하여 생명은 물질의 화학작용으로변증법적 비약을 통해서 생겨났다고 주장했던 일이다. 오파린은 과학적 무신론을 주장하는 공산주의를 옹호하기 위하여 증거와 이론을 조작했으나, 철학자, 신학자, 그리고 일반인들은 물론 상당수의 과학자들도 그런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고 그의 추종자가 되었다.

 

과학철학에서 반증가능성(反證可能性, falsifiability)’을 척도로 사이비 과학을 제거하면서 진정한 과학발전을 추구했던 칼 포퍼 (Karl Raimund Popper, 1902-1994)와 패러다임의 전환(paradigm shift)을 통해 혁명적 과학발전을 주장했던 토머스 쿤(Thomas Samuel Kuhn), 1922-1996)의 명제는 매우 잘 알려져 있다. 부분적으로는 상호 비판적인 논쟁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는 모두 필요하고 신뢰할 수 있는 방법이다. 자연이해에 기초하는 과학적 방법으로 신의 존재에 관해 과학적 무신론과 논쟁해야 하는 과학적 유신론은 어느 한 쪽 방법만 채택할 것이 아니라 양쪽 방법 모두를 수용하는 노고를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을 함에 있어서 진정한과학적 방법을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현대에 이르러 과학이 학문의 진정한 승리자라면, 신학의 신론(神論)적 질문이나 철학의 존재론적 질문에 대해서 명확하게 모두 사실대로 답변해야 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오류에 빠져 있는 자들이 스스로 오류를 시정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나무숲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다름없는 노릇이다. 유신론 철학자와 신학자들은 학문적 연구에서 스스로 과학적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통합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과학적 유신론은 형이상학의 초월적 세계에서가 아니라, 노자의 자연에서 우리와 함께 존재하시는 창조신을 진술해야 한다.

 

노자의 도()사상에서 자연은 태초에 존재했던 무위자연(無爲自然)’이며, 무위자연은 창조신의 작위에 의하여 되어 가는 것이다. 노자의 철학도 고대 서양 철학자들처럼 관념적이지만, 그의 이성적 사유는 서양철학의 깊이보다 훨씬 깊게 진리의 심연에 도달하고 있다. 노자에게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제자가 있어 그의 도()사상을 제대로 전수해주었더라면, 동양의 철학과 과학이 서양의 철학과 과학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동양이 서양에 뒤떨어지게 된 것은 동양의 세계에서 노자의 도()보다 공자(公子)의 도()가 득세함으로써 나타난 필연적 결과이지만, 애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제 새로 발견한 노자의 자연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동양의 과학과 신학과 철학은 통섭적인 과학적 유신론을 정립하고, 서양에서 발전한 과학적 무신론 주장을 비판하면서 노자철학의 선진적 우수성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과학적 자연 이해의 패러다임을 노자가 이해하는 자연에까지 확장해야 한다. 노자는 그의 도()사상에서 인간의 눈에는 작위가 없는 것처럼 보여도 작위하지 않은 것이 없는(無爲而無不爲-도덕경48)’ 창조신이 자연에 존재하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자가 이렇게 BC. 6세기에 서양철학과는 다른 관점으로 이해했던 자연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한 사실과 최근의 양자과학의 발전은 과학적인 자연 이해에 반증가능성과 패러다임 전환의 시기에 도달했다는 신호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 노자와 과학의 자연 이해 비교

 

 

 

 

 

                                                                                                                

                                                                                                                   출처: 다음 블로그: 지정초(펌)

 

1. 노자의 자연이해

 

노자는 도덕경(道德經)에서 도()사상을 논의하고 있다. 그의 도()사상은 과학의 연구대상인 자연(自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우주 창조 이전 태초의 자연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그는 자연이 태초에는 유무(有無)의 형태로 존재했다고 본다. 여기서 말하는 유()는 최초의 존재(the First Being)를 나타내는 것이며, ()는 비존재(Not-Being)를 나타낸다. “이 두 가지는 동시에 나온 것이나 이름은 다르다(此兩者同出而異名-도덕경1).”그리고 유무는 서로 같이 살아야 하는 것(故有無相生-도덕경2)’이다. 노자에 의하면 유()가 존재하면 무()도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고, ()가 존재하지 않으면 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노자에게는 무()도 자연의 부분으로 존재한다. 노자의 도()사상은 애초부터 스스로 존재하지 않았다면 존재할 수 없는 태초의 자연의 모습을 누구보다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이다. 창조 이전에 창조신은 비존재의 영역인 무한(無限)의 무(=0)와 함께 유일한 유(=1)로 존재하셨으며, 이러한 유무의 상태(1+0)가 자연의 원형이다. 이를 과학의 언어인 수학으로 표시하면, ‘1+0=1’이다.

 

노자의 도()이름이 없어도 천지의 시작이고, 이름이 있으니 만물의 어미(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도덕경1)”라는 말에서 가장 잘 나타나고 있다. 노자는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의 태초에서부터 유무(有無)의 상태인 제1차 자연과 만물이 창조된 이후의 제2차 자연을 구분해서 보고 있다. 유무(有無)는 창조 이전부터 영원히 공존해 온 제1차 자연이다. 따라서 노자의 자연에는 태초부터 창조신이 스스로 존재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유()이신 창조신은 무()와 함께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신은 영원이라는 시간적 개념 속에 나타나는 영원한 존재이다. 이것이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이다. 그동안 국내외에서 노자의 도()사상을 연구한 학자는 많이 있었고, 연구서도 많이 나와 있다. 그러나 노자의 도()사상에서 홀로 계신 창조신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했다. 노자의 자연이해에는 서양철학의 물활론이 의미하는 범신론 또는 범재신론적인 신과는 다른 창조의 신이 분명히 근본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노자는 도는 함이 없음이나 하지 않음은 아니라(道常無爲而無不爲-도덕경37)”고 지적했다. 이 말은 창조신의 창조 작업이 무불위(無不爲)라는 점에 강조점이 주어져있다. 그렇지 않다면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창조신은 유무(有無)의 자연에서 유()로 불리는 유일한 일자(一者: the one)였으며, 창조신이 제2차 자연을 창조했다. 노자의 무불위는 창조신의 작위(作爲)를 의미한다. 노자는 일자(一者)이신 창조신의 작위(作爲)를 창조라고 보고, 창조신의 작위에 의하여 제2차 자연이 창조되었다고 이해했다. 만물은 일자(一者)에서 비롯되었다는 신플라톤적 주장도 노자의 도()사상과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노자의 도()는 창조신과 그의 작위에 의하여 창조된 우주의 법칙과 우주만물까지를 포괄한다. 따라서 제2차 자연에서 모든 사물(事物)은 창조신의 작위에 의해서 되어가야 하는것이다. 그러나 노자는 제2차 자연에서 인간의 작위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다. 인간은 말 그대로 무위(無爲)해야 한다. 왜냐하면 첫째로 인간은 창조신처럼 무불위의 무위를 할 수 없기 때문이고, 둘째로 인간은 매우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므로 도()를 따르는 삶조차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자는 인간에게 도()에 비해 훨씬 낮은 수준의 덕()이라도 행하라고 가르친다.

 

한편으로 노자의 유무(有無)는 동양철학에서 태양과 태음으로 이루어진 태극(太極)사상으로도 일컬어지는 것이다. 태극은 태초를 말하며, 태극의 태양(太陽)과 태음(太陰)은 노자의 유무(有無)에 다름 아니다. 노자의 도()사상은 음양을 태극(太極)사상에서와 같이 만물에 내재하는 양극성(兩極性)과 자연의 생성(生成)원리로 보고 있다. “도는 하나로 나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으니 만물이 이에서 나오느니라(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도덕경42). 그리고 만물은 음을 지고 양을 안고 있으며, 기가 참에 따라 조화를 이룬다(萬物負陰而抱陽 冲氣以爲和_).” 하지만 음양론(陰陽論)은 우주자연의 모든 변화를 음양(陰陽)의 성쇠(盛衰)에 따르는 기계적 법칙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이 동양적 운명학(運命學)의 바탕을 이루는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노자의 도()에는 최초의 자연에서 유일(唯一)하게 변화를 작위(作爲)할 수 있는 창조신이 존재하고 있다. 창조신은 부동(不動)의 동자(動子)였고, 우주만물의 시원(始源)이었다. 그러므로 노자의 자연에서 창조신은 영원히 살아있는 지적(知的) 존재로서 우주만물을 창조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2. 과학의 자연이해

 

현대의 과학적 무신론을 보면, 1차적으로특이점이라는 작은 물질 덩어리가 있었고, 여기에서 빅뱅이 일어나 제2차적으로 만들어진 물질에서 우주자연이 형성되었으며, 이것에서 생명이 발생하여 현재의 세계로 진화되었다는 빅뱅이론진화론을 정설로 주장한다. 과학은 빅뱅과 생명의 발생에 대해서는, 어느 날 우연히 일어난 사건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특이점이라는 작은 물질 덩어리에서 저절로 우연히 빅뱅이 발생하여 우주만물의 기원이 되었다는 이론은, 마술(魔術)이라면 몰라도 사실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주장이다. 이런 마술적 주장은 무()에서 우주가 저절로 생겨났다는 신화와 사실 별로 다른 것이 아니다. 하지만 과학은 빅뱅에 의해서 우주가 생겨났다는 설명 이외에 다른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빅뱅이론은 전우주적 대사건으로 관측과 실험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과학적 이론으로 납득할 수는 없으나, 이외에 달리 대안이 없으므로 잠정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지구에 존재하는 생명체가 물질의 화학작용에 의해 발생했다는 진화론적 주장까지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구에서 화학작용에 의한 생명체 발생 현상이 관측되었거나, 실험에서 성공한 사례가 없다는 것이 사실적인 반증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학문적 주장도 사실과 다른 것은 폐기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현재 우리가 우주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에서 보면, 물리적으로는 도저히 발생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빅뱅사건과 지구에서 인간이 어떤 방법으로도 할 수 없는 생명이 발생사건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과학이 이 사건들의 원인을 우연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런 과학은 사실 신화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비판 받아야 마땅하다. 과학은 물질세계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원인을 모를 수는 있지만, 원인 없이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는다고 본다. 그러므로 우연은 과학적인 용어로 쓰일 수 없는 말이다. 과학에서는 우연에 반대되는 필연이라는 말도 쓰지 않고 법칙 또는 원리 등의 말을 일반적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작크 모노는 그의 진화론적인 유전암호의 분자론을 서술하는 우연과 필연에서, 생물권의 기원은 우연이지만 필연으로 전환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모노의 이 말은 그대로 우주의 기원에 적용해도 좋은 말이다. 과학의 이론이 항상 잠재적인 것이라는 사실은 다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물리적으로 발생한 사건을 과학적으로 도저히 원인을 규명할 수 없는 사건이라면, 그런 사건에 대해서는 과학적으로 원인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차라리 신의 작위에 의한 것이라고 인정하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과학이 그렇게 인정한다면 적어도 거짓말이나 증거를 조작하는 일은 저지르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과학이 빅뱅이나 생명의 발생을 우연이라고 한다면, 그런 우연의 해석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384-322)를 따라 신적인것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과학이 우연한 사건의 발생 원인을 신적인것으로 인정할 수 없다면, 과학적으로 원인을 규명하는 일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3. 자연의 발생 원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렇다면 노자의 제1차 자연과 빅뱅의 발생 이전에 존재했던 특이점이라는 물질 한 덩어리가 동일한 것으로 이해될 것이다. 그리고 빅뱅이나 창조사건도 동일사건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빅뱅이나 창조사건 이전에 태초의 존재는 하나밖에 없었고, 지금도 우주는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우주를 낳게 한 사건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열역학 제1법칙에 의하면, ‘특이점의 질량이나 제1차 자연의 질량은 창조나 빅뱅에 의하여 증감(增減)되지 않고 제2차 자연의 연장선상에 있는 현재의 우주에도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에 에너지와 물질은 상호 전환될 수 있는 것이라는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1879-1955)의 유명한 에너지·질량 등가의 법칙(E=mc²)을 연결하면, 빅뱅과 창조사건이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동일 사건이며, 2차 자연이 이 사건 이후의 우주를 지시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과학적으로 이런 사실을 이해하는 바탕 위에서, 과학적 유신론은 과학적 무신론과 통섭적 논의를 통하여 과학적 유신론으로 통합되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노자는 창조신이 처음으로 작위를 행하기 이전의 제1차 자연과 창조신의 작위가 가해진 제2차 자연을 구분하여 이해했다. 노자에게 무위(無爲)의 자연은 1차적으로는 창조신 자체이거나 창조신이 존재하는 곳이며, 2차적으로는 그가 창조한 자연법칙과 우주만물을 포함하는 것이다. 노자의 도()의 범위는 여기까지이다. 그러므로 노자는 인간이 창조신의 도()에 무위(無爲)적으로 순응해야 하고 함부로 작위를 행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노자에게 인간은 탐욕적이고 오만해서 언제나 도()를 거스르고 있는 존재로 보이기 때문이다. 노자가 인간에게 덕()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은 도()에 반()하는 인간의 작위를 최대한 줄이자는 목적에서일 뿐이다. 노자의 도()사상으로 보면 인간의 작위가 나타난 자연은 노자에게 제3차 자연이 되는 셈이다. 이와 같은 노자의 도()사상에 근거하여 살펴볼 때, 자연에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과학적 무신론의 주장은 폐기되어야 마땅한 허구적 이론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주장할 수 있다.

 

우주와 생명의 기원이 빅뱅과 물질의 화학작용이라고 설명하는 과학의 주장과 비교하면, 노자의 자연 이해가 훨씬 이성적이고 통섭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노자의 자연은 인간이 보지 못했던 창조신의 존재와 그의 창조에 의한 자연의 법칙과 우주만물을 모두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실 노자의 자연에서 창조신과 함께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우주가 빅뱅에서 발생한 물질만으로 형성되었고,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학적 무신론자들의 오만이 저지른 작위적 주장이다. 인간의 작위는 결국 창조신이 창조한 자연에서 창조신을 추방하고 말았다. 이것은 노자의 도()사상으로 보면 창조신이 추빙된 제4차 자연의 모습이다. 과학이 진리를 발견하려는 진정한 학문이 되려면, 노자의 자연 전체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과학이 노자의 자연 전체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는 저명한 분자생물학자 자크 모노(Jacques Monod, 1910-1976)의 말에서도 나타난다. 자크 모노는 과학이 무한한 다양성 속에서 불변한 것을 탐구하는 일밖에는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렇게 되면 과학은 노자의 자연에서 무한한 다양성을 창조한 불변의 신의 존재를 만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바로 창조신이다. 이제 신학은 물론 철학과 과학이 신의 존재를 통섭적으로 논의하자면, 노자의 자연 이해에 토대를 두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노자의 자연 이해로부터 어떻게 과학적 유신론으로 창조사건을 설명할 수 있을까?

 

. 창조 사건

 

현대과학은 대체로 우주가 약 140억 년 전에 빅뱅(Big Bang)의 방법으로 생겨났다고 본다. 그리고 지구가 속한 태양계의 형성 시기는 약 45억 년 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학은 빅뱅 이전에는 어떤 상황이었는지, 그리고 빅뱅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다만 과학적 무신론을 간단히 정리해보면, 처음에 특이점이라는 물질 덩어리가 하나 있었으며, 이 물질 덩어리에서 어느 순간 우연히 일어난 대폭발이 우주물질을 생성했고, 지구에서는 이 물질들의 화학작용에 의해 우연히 생명이 발생해서 오늘날 우주로 진화했다고 설명한다. 이와 같이 현대과학에서 물질주의적으로 우주기원론과 생명발생설을 주장하는 것은 과학적 방법으로 자연에서 신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이유와 함께 과학적 무신론에 반대하여 우주와 생명이 신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빅뱅과 생명에 대해서 유신론자는 신에 의한 창조사건이라고 말하고, 무신론자는 하나의 물질 덩어리에서 우연히 발생된 우주자연의 진화적 현상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물질 덩어리가 아무런 원인도 없이 폭발했고, 이 사건이 우주와 생명의 기원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논리이다. 왜냐하면 과학에서는 원인과 과정에 대한 설명 없이 우연으로 결론을 내리는 이론에 대해서는 과학적 이론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이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없는 이론을 정설로 주장하는 것은 신화를 사실이라고 우기는 것보다 오히려 유치한 노릇이다. 그렇다면 빅뱅과 생명의 발생 원인도 모르는 이론을 과학적 이론이라고 주장하는 무신론자가 그 사건들의 발생 원인을 창조신에 의한 창조 사건이라고 주장하는 유신론자를 공격하는 것이 과연 과학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과학적 무신론자의 우연이라는 용어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해석으로 이해하면, 빅뱅은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게 창조신에 의한 창조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와 같이 무신론적 우주와 생명의 기원설을 유신론적으로 바꾸어 이해하는 것이 보다 이성적이고 과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과학적 유신론의 방법은 바로 이렇게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과학적 무신론의 주장을 과학적 논리로 반증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창조사건을 과학적으로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노자의 도()사상에서 유무상생(有無相生)을 다시 검토해보기로 한다. 유무(有無)의 공존(共存) 상태를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1+0=1’이다. 노자에 의하면 우주만물은 유무의 상태(‘1+0=1’)에 기원을 두고 있다. 알다시피 수학은 과학보다 더 정확하게 진리를 나타내는 수단이다. 수학적으로 무()의 크기는 무한(無限)하고 유()의 크기는 유한(有限)하다. 태초에 하나의 유()와 무한의 무()가 공존하는 자연이 있었다. 앞에서 노자가 이해하는 태초의 자연에 창조신이 존재하였고, 창조신이 현재의 우주를 창조했다는 것을 과학적 사실로 증명하였다. 그리고 창조신이 창조한 우주에 현재 우리가 살고 있다. 그러므로 창조사건은 이제 과학적으로 부정될 수 없다. 과학에서 주장하는 빅뱅은 실제로는 유일하신 존재이셨던 창조신에 의한 창조사건이다. 그렇다면 창조신은 무한의 무()에서 유한한 유()로 홀로 외롭게 존재하는 지적 생명체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빅뱅 또는 창조사건은 창조신이 그가 가진 지적 능력을 사용하여 스스로 작위(作爲)한 일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신학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의 선지자 모세가 신에게 이름을 묻자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라고 대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출애굽기 3:13-22). 태초 이전부터 스스로 있는 자이신 창조신만이 처음으로 창조적인 작위를 행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이제 신학과 과학과 철학에서도 부정될 수 없는 진리로 판명되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노자의 도()사상에 의하면, 영원불변의 질량을 보존하고 있는 자연은 제1차 자연에서 창조신의 작위에 의한 창조사건이 일어나서 제2차 자연으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노자는 도()여러 오묘한 것의 문(衆妙之門-도덕경1)”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빅뱅이나 창조사건은 태초의 제1차 자연에서 모든 오묘한 것이 생겨나 제2차 자연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창조신은 노자의 제1차 자연에서 오묘한 모든 것을 창조한 실재(實在)적 생명체였다. 그러므로 과학이 빅뱅 이전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특이점이라는 물질 덩어리는 노자의 제1차 자연과 같은 것이고, 빅뱅은 창조신의 작위에 의해서 발생한 창조 사건이다. 창조신은 제2차 자연에서 그가 창조한 자연법칙에 따라 우주만물과 함께 존재하신다.

 

고대 서양철학에서 물질에 내재되어 있다고 말하는 물활론적 생명력(아르케, 프시케, 엔텔레키 등), 노자의 유() 또는 태극에서의 양()이라는 말도,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고대 동서양의 철학에서 신의 존재는 표현하는 용어가 달랐을지라도 사실상 모두 인정하고 있었다. 다만 노자의 도()사상에서는 창조신이 존재하고 그의 작위가 곧 도이다. 그래서 이루고 나면 물러나는 하늘의 도(功遂身退天之道-도덕경9)”를 말한다. 이 말은 한 마디로 창조신은 곧 도()라는 의미와 함께, 창조신이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노자는 도()낳고 키우나(生之畜之),” 낳고도 제 소유로 하지 않고(生而不有), 위하되 의지하지 않고(爲而不恃), 우두머리이나 주재하지 않는다(長而不宰-도덕경10)”라고 했다. 신과 인간을 어미와 자식의 관계로 인식하고 있는 노자는 창조신의 작위를 현묘한 덕(是爲玄德)”이라고 했다. ‘현묘한 덕은 창조신이 오직 인간을 위하여 작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미치지 못하는 덕이며, ()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노자에게 자연은 신과 인간이 같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다. 어릴 적 자식은 어미를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제 장성하여 어미를 떠난 인간은 많은 자유를 누리게 되면서 어미가 같이 있으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어미 없는 자식을 자처하고 있기까지 하다.

 

노자는 태초의 상황을 혼돈(混沌)이라고 말하는 각 신화에 대하여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천하에서 모두 아름다운 것으로 알고 있는 것에는 이미 악이 그 안에 있고(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모두 선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것에는 이미 선하지 않는 것이 그 안에 있다(皆知善之爲善斯不善已-도덕경2).”이어서 노자는 유무가 서로 살아(有無相生) 있어야 하듯이, 애초부터 모든 사물은 어렵고 쉬운 것(難易), 길고 짧은 것(長短), 높고 낮은 것(高下), 앞과 뒤(前後)가 있는 것과 같이 양 극단(兩 極端)적 성질을 동시에 가지고 있음을 지적했다. 노자에 의하면 창조신이 홀로 존재했던 제1차 자연과 창조신이 창조한 제2차 자연에 혼돈이라는 것은 애당초부터 없는 것이다. 사실 유일한 존재였던 창조신이 어찌 혼돈일 수 있으며, 창조신이 왜 혼돈을 창조했으랴? 혼돈은 창조의 법칙에 따라 운행하는 자연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신화시대 이후에도 서양철학의 전통은 최초의 신이 혼돈 가운데 존재했던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관념의 혼돈에 빠지고 말았다. 이 영향이 신학에도 미쳤다. 노자의 자연에는 결코 혼돈이란 없다. 다만 인간이 창조신의 창조질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스스로 혼돈에 빠질 뿐이다. 그러나 노자의 말은 이렇게도 이해할 수는 있다. 이미 도()를 벗어난 탐욕적인 인간에게는 신이 작위한 자연의 법칙조차 혼돈일 수 있다! 그러나 창조신이 스스로 혼돈에 빠지거나 혼돈을 창조할 이유는 없다.

 

이제 과학적 유신론의 중심 주제인 창조사건에 대해서는 140억 년 전 어느 날, 유무(有無)의 상태인 제1차 자연에서, 스스로 존재하고 있던 창조신(1+0=1一者),빅뱅과 같은 작위적 방법으로, 자신의 존재와 관련된 문제(추정하건데 고독)를 해결하기 위해, 2차 자연인 우주만물을, 창조했다고 육하원칙에 따라서 간략하게 정리해볼 수 있다.

 

 

 

. 끝내면서: 자연에는 이미 창조신이 존재한다

 

과학적 유신론은 과학적 무신론에 비해 더욱 설득력 있는 과학적 이론의 토대 위에 정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까지 이를 위한 방법론의 전제로서 과학적 자연이해를 노자의 자연 이해로 전환할 것을 논의하였다. 노자는 일찍이 태초의 자연이 유무(有無)의 상태였다고 이해했다. 노자에게 유무는 제1차 자연이다. 노자는 제1차 자연에서 이름이 없어도 스스로 존재했던 일자(一者)를 파악하고 도()라 칭()하였다. 이것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1+0=1’이라는 공식이 된다. 여기서 ‘1’은 곧 창조신을 뜻한다. ‘빅뱅이론에서 물질 한 덩어리에서 빅뱅이 일어나 우주가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특이점이라는 것도 이와 동일하게 이해된다. 그러고 보면 노자의 유()나 과학의 특이점이나 실제적으로는 동일한 실체이다. 이제 어느 누가 창조신의 존재를 믿든 안 믿든, 우주만물이 이 ‘1’(一者)에서 시작된 것은 과학적으로도 사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과학이 진정한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라면, ‘특이점이 노자의 제1차 자연과 동일 실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과학은 특이점과 동일한 노자의 제1차 자연까지 연구 대상으로 삼아야 할 의무가 있다. 그렇다면 과학이 자연에서 스스로 있는 자이신 창조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과학이 자연에서 우연히 일어난 사건들을 사실로 인정한다면,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우연의 개념에 따라서 창조신의 작위적 창조사건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보면 신학과 철학과 과학은 통섭적으로 통합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과학적 유신론과학적 무신론자체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이므로, 과학적 유신론은 빅뱅이나 변증법적 비약이 아닌 과학적 방법으로 과학적 무신론을 극복할 수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참고문헌

 

 

1차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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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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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초록

과학적 유신론의 정립을 위한 노자(老子)의 자연 이해 살펴보기

 

이 논문은 과학적 무신론에 대응하기 위해서 과학적 유신론을 정립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연 이해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과학은 자연이 보이는 물질만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이해하고, 연구 대상을 보이는 자연으로 한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자는 일찍이 태초의 자연이 유무(有無)의 상태였다고 이해했다. 이것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1+0=1’이라는 공식이 나온다. 노자에게 태초의 자연을 의미하는 ‘1’은 도()이자 창조의 신()이며, 우주만물의 근원이다. 과학은 특이점이라는 물질 한 덩어리에서 빅뱅이 일어나 물질적 자연이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태초에 노자의 유무(有無)상태의 자연과 과학의 특이점이 동일한 자연적 실체라는 사실이 인정된다. 그러므로 과학은 자연 이해의 패러다임을 전환하고, 과학 연구의 대상을 노자의 자연에까지 확장해야 한다. 왜냐하면 노자의 자연 이해는 과학적 무신론과 과학적 유신론이 통합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Abstract

A Study on the Laotzu’s Understanding of Nature

for the Founding of Scientific Theism

 

 

Heo, Jung Yoon

Seoul, Korea

 

This assertion aims to found Scientific Theism as a response to Scientific Atheism. For the goal, the paradigm shift of the understanding of Nature is necessary. Because the science assumes Nature consists only of visible materials, and has limited objects of scientific study within Nature. Laotzu, however, thought in the early times that the beginning Nature consists of Being and Not-Being. The idea is mathematically expressed in a formula, ‘1+0=1.’ In Laotzu’s view the ‘1’ existing in the beginning Nature is Tao(the Way), the Creator and the source of everything in Nature. Science says everything in Nature came into being from the Big Bang occurred in a lump of materials called ‘Singularity’. Then, it can be accepted ‘Singularity’ is the same natural subject as Laotzu’s Nature of Being and Not-Being. Accordingly Science has to shift the paradigm of understanding of Nature, and to extend it’s objects of study to Laotzu’s Nature. For Laotzu’s understanding of Nature provides the foundation to unify Scientific Theism and Scientific Athe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