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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발생론과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비판

heojohn 2020. 3. 31. 22:14

-자연발생론 변종으로서의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에 대한 비판

 

 

1. 서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관념론과 유물론, 또는 유신론과 무신론이다. 관념론은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으로 정신에서 사물이 생겨난다고 하면서 유신론으로 연결된다. 유물론은 물질 일원론으로 물질에서 정신이 생겨난다고 하면서 무신론으로 나아간다. 이 두 가지 관점은 우주의 기원과 신의 존재에 관련하여 어떤 믿음을 가지느냐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유신론은 신이 우주의 물질과 생명을 창조했다고 주장하는 입장으로서 원칙적으로 모든 종교적 교리에 근본이 되는 것이다. 반면에 무신론은 신의 존재는 물론 그의 창조를 부정하고, 영원불멸의 우주 물질이 어떤 기회에 스스로 조합하면서 생명을 비롯한 만물이 생성되었다고 주장하는 자연주의적 입장이다. 어쨌든 모든 무신론의 특징을 살펴보면, 신의 존재와 창조를 부정하는 근거로 생명의 기원이 오직 물질로부터 자연적으로 발생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유신론은 생명의 기원에 어떤 형태로든지 신의 섭리가 개입되어 있다고 믿는 것이다. 말하자면 무신론과 유신론을 구분하는 기준은 생명의 기원에 대해 신의 개입여부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역사적 기록에서 보면, 신의 존재와 창조를 서술하는 신화(혹은 계시)가 먼저 있었고 이것이 종교로 발전했다. 다음에 신의 존재와 창조에 대해 얼마간 회의했었던 자연발생론자들이 종교와 유신론을 비판하면서 철학적으로 무신론을 제기했었다. 그동안 종교와 철학적 유신론 진영에서 철학적 무신론 진영을 공격하는 주장도 없지 않았으나, 이들은 새롭게 등장한 과학적 무신론자들에 의하여 함께 공격을 받고 동시에 위축되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과학적 준비를 미처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적 이론으로 무신론을 주장하는 과학적 무신론이 등장한 시기는 그렇게 오래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의 생물학적 진화론,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와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의 유물론, 알렉산더 이바노비치 오파린(Alexander Ivanovich Oparin, 1894-1980)의 화학적 진화론과 이후 이들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성립되었다.

 

이제 이 논문에서는 과학적 무신론을 반박하고 과학적 유신론을 주창하려고 한다. 따라서 이 논제에서 유신론과 무신론의 쟁점이 되는 생명의 자연발생론 사상의 발전사를 먼저 살펴보는 것은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어서 이 논문에서 비판하고자 하는 과학적 무신론의 발생 개요를 살펴보고 각각의 이론에 대하여 비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지면의 제한으로 우선 과학적 무신론의 비판적 토대를 마련하려는 목적에서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에 한해서 검토와 비판을 하는 것으로 마치겠다.

 

2. 자연발생론의 발전

 

1) 고대 신화시대

 

유신론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것은 인류 사회에서 각 민족들이 가지고 있는 고대신화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것이다. 각 민족의 고대신화는 예외 없이 신이 인간을 비롯한 만물을 만들었고 또 인간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고 있는 것으로 서술되고 있다. 그러므로 유신론은 고대 각 민족의 조상들로부터 전승된 것이라는 사실이 입증된다. 그러므로 무신론은 신의 존재와 창조를 의심하지 않았던 고대 시대에는 없었던 것이며, 훨씬 뒤에 나온 근대사상에서 발전한 것이다. 그래서 세계 각 민족의 고대신화를 널리 연구했던 신화학자이며 비교종교학자로서 저명한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89)는 유신론적 입장을 강력하게 지지하면서, “창세 신화가 진실인 이유는 세계의 존재가 그것을 증명해주기 때문이고, 죽음의 기원 신화가 진실인 것은 인간이 필멸하기 때문이다고 주장했다.

 

2) 그리스 철학의 자연발생론

 

그렇지만 고대 그리스의 식민지 밀레투스에서 자연철학이 생겨나면서 고대신화에서처럼 인간사에 전적으로 간섭하는 인격적 신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신이 이 세상사에 어디까지 개입하는지에 대한 회의를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철학의 비조(鼻祖) 탈레스(Thales of Miletus, c-624-c-545 B.C.)로 알려져 있다. 그는 만물의 변화의 근원을 물이라고 하여 처음으로 자연이 변화하는 현상을 신의 개입 없이 설명하였다. 그의 주장은 이집트를 여행하는 기회에 나일강의 진흙에서 작은 생물들이 많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고 나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의 생각에는 액체에서 기체로 또는 고체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에는 보이지 않는 생명력이 이미 함유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친구이자 제자인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er, 610-546 B.C.)는 만물이 어떤 근원적인 실체로부터 유래했지만,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고 주장했다. 또 한 사람의 밀레투스 철학자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585-528 B.C.)는 공기(Pneuma)가 만물의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영혼도 공기이며, 공기가 탁해지면 물질이 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오니아학파(Ionian School)로 불리는 이 세 사람의 주장에는 관념론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지만, 관찰의 방법에 의해 자연발생론을 처음 주장한 것이므로 과학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사상은 유신론적 입장에서 벗어나지는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들의 사고는 물질 자체에 이미 생명력이 주입되어 있다고 하는 물활론(物活論)에 바탕을 둔 것이었고, 이런 사고는 범신론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와 창조를 좀 더 회의하는 입장에서 사색한 철학자들은 원자론자들로 불리는 데모크리토스(Democritus, 460-370 B.C.)와 에피쿠로스(Epicurus, 342-271 B.C.)가 있었다. 데모크리토스는 생명은 태고의 진흙으로부터 생겨났다고 믿었다. 그래서 뒤에 나온 에피쿠로스는 인간에게 최고의 선은 쾌락일 뿐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이들의 주장은 세상사에 신의 개입을 부정하는 쪽으로 더 나아가긴 했지만, 역시 물활론적인 입장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것이었으므로, 이들의 견해는 이신론적인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일부 유물론자에 의해 유물론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소크라테스(Socrates, c-469-c-399 B.C.)의 제자 플라톤(Platon, 427-347 B.C.) 은 그리스 철학의 문헌적 기초를 만들어놓은 철학자였다. 플라톤은 그의 스승과 그의 철학사상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들에게는 영혼이 만물의 기초였으며, 불멸하는 것이었으며, 죽음은 육체로부터 영혼의 분리에 불과했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그의 사상을 너 자신을 알라는 말로 전파했다. 그는 악법조차 거부하지 않고 스스로 죽음의 독배를 마셨다. 이들은 앞서 엠페도클라스(Empedoklcles, 493-433 B.C.)가 주장한 4원소설을 받아들였으나, 거기에다 이데아설을 추가적으로 제안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 B.C.)는 그의 스승 플라톤의 이데아설을 비판함으로써 더욱 유명해졌다. 그는 사물을 질료와 형상으로 나누어 보았다. 여기서 질료는 물질이며, 형상은 유명론적인 실재이다. 그는 보이지 않는 형상이 있고 이것에 따라 만물은 4원소의 질료가 조합하여 만들어진다고 주장했다. 그가 윤리학에서 목적론적인 주장을 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유신론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게 신은 부동의 동자로서 제1원인일 뿐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들보다 앞서 나온 이오니아학파를 소개하기도 했으나, 그때까지 나온 그리스의 철학사상을 종합한 것도 그였다. 그래서 서양의 학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사상에 기초되지 않은 것이 없으며,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에서 삼단논법을 제시함으로써 이성적인 자연철학으로의 길을 열었다고 말해진다. 그렇다고 해도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의 사고는 애당초 아르케(Arche), 엔텔레키(Entelechy) 프시케(Psyche) 등으로 불리는 신적 생명력이 물질에 이미 주입되어 있다고 하는 물활론에 머물러 있는 것들이었다.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의 자연발생론은 자연을 육안으로 관찰하면서 얻은 경험을 이론화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눈으로 썩은 고기에서 자연적으로 구더기가 나오는현상을 보았고, 그것을 주장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결론적으로는 물활론적인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은 이제 신화시대의 인격적인 활동을 멈추고, 물질세계를 법칙에다 맡긴 채로 초월해 있으면서 더 이상 세상사에 개입하지 않는 것으로 되었다.

 

3) 동양의 자연철학

 

유신론에서 이러한 사고의 변화는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라의 시조 문왕(文王: 1152-1056 B.C.)에 의해 저술된 것으로 알려진 주역(周易)이 동양에서의 신화시대를 마감하는 작품으로 꼽힌다. 이것은 명백하게 음양(陰陽) 이원론적 법칙으로서 64개의 괘를 설정하고 그것에 의해 길흉화복을 점치는 자연철학적 점서(占書)였다. 이것은 점차 오행론(五行論)과 결합하여 동양사상의 핵심이 되었다. 이러한 이신론적인 사상은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교사상, 공자의 천명(天命)에 따르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윤리학적 유교로 이어졌다. 석가모니(釋迦牟尼)의 불교 또한 사후 신의 세계인 극락에 가기 위해서는 업()의 법칙에 의한 윤회(輪回)라는 굴레에서 해탈해야 한다는 자연철학적 교리에 기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도의 힌두교는 여전히 고대신화적인 전통을 이어갔다.

 

4) 기독교 창조론에서의 자연발생론

 

1세기에 로마제국에서 발생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처형을 받은 이후 4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콘스탄틴 대제(Constantine the Great, 재위 306-337)의 밀라노 칙령(313)에 의해 로마제국에서 종교로 공인되었고, 392년에는 데오도시우스(Theodosius I, 재위 379-395) 황제에 의해서 국교가 되었으며, 유스티아누스(Justinianus , 재위 527-565) 황제는 이교도적인 그리스 철학 서적 등은 아예 읽는 것조차 금지하고 콘스탄티노플의 소피아 성당을 건축했다. 이렇게 해서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중세기까지는 기독교의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론(聖三位論)과 창조론이 서양사상을 지배하는 시대였다. 바실리우스(Basilius, 315-379)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9)에 의한 기독교적 창조론은 신의 창조 명령이 태초에 일회적으로 시행되고 끝난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영원히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에서의 생명 발생은 언제든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인간을 괴롭히는 해충들이 부패물과 인간의 죄로부터 발생하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렇게 기독교가 전성기를 누리는 동안에 자연철학은 오직 신학의 시녀로서 기능할 뿐이었다.

 

5) 종교개혁과 과학혁명 이후 17세기 전기까지

 

그러나 16세기 유럽에서 발흥한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에 의한 종교개혁을 촉발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에서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로 이어지는 과학 혁명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이 과학 혁명가들이 주장하는 지동설은 이때까지 프톨레마이오스(Claudius Ptolemaios, c-83-c-168) 체계의 천동설을 믿고 있던 기독교에 대해 회의를 불러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것은 그리스 고전을 다시 읽고 그리스 철학자들의 사상을 재발견하면서 더욱 증폭되었다. 이 시대의 복고주의적 사조는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는 기간까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의 자연발생론(spontaneous generation)이 다시 생명력을 얻고 소생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지식이 힘이라고 믿었던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1561-1626)이 귀납적 실증주의를 강조하면서부터, 각종 논제에 대해서는 관찰이나 실험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과학적 사조가 17세기부터 확립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후에는 신의 존재와 창조에 대한 지지 또는 회의적인 주장에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는 생명의 자연발생론을 검증하기 위하여 관찰이나 실험이 갖가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자연발생론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 만든 것은 나는 생각하므로 존재한다는 명제로 유명한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 1596~1650)의 기계철학이었다. 그는 생각할 수는 있지만 알지는 못하는 어떤 자연적인 조건이 충족되면, 생물의 자연발생은 어김없이 기계적으로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이 시기에 내과의사였던 반 헬몬트(Jan Baptist Van Helmont, 1577-1644)는 어미가 낳은 것과 똑 같은 쥐를 인공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제조법을 발표하였다. 알곡과 땀으로 더러워진 셔츠를 유유와 기름이 담긴 항아리에 담아두면, 이것들이 어떤 발효를 일으켜 21일 만에 쥐가 나온다는 것이다. 또한 혈액순환의 원리를 주창한 것으로 유명한 의사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 1578-1657)조차 생물은 알에서 나온다는 생물학적 사실을 발견하고서도 그리스적 자연발생설을 완전히 부인하지 못했다. 그는 어떤 힘이 자연적 부패와 같은 과정에 작용하면 미생물들이 자연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6) 과학적 실험의 시대: 17세기 후기-18세기까지

 

(1) 17세기 후기

17세기에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을 되살린 것은 프랑스의 가생디(1592-1655)에 의해서였다. 그는 원자의 필연적이며 기계적(역학적)인 운동이 자연의 기본원리라고 인식했다. 그러나 그는 원자의 창조자와 운동의 궁극 원인자를 동일시하면서 신적 존재를 부정하지는 아니하였다. 프란체스코 레디(Francesco Redi, 1626-1697)1665년에 썩은 고기에서 구더기가 자연발생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를 반박하는 실험을 했다. 그는 두 가지 실험을 실시하고 그 결과를 비교하여 결론을 내렸다. 그는 두 개의 병에 죽은 물고기를 넣고, 한쪽 병은 뚜껑을 덮지 않고, 한쪽 병은 머슬린으로 덮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그대로 며칠 방치해두면, 뚜껑을 덮지 않은 병 쪽에는 구더기가 발생했으나, 머슬린을 덮은 병에는 파리가 알을 까지 못했으므로 구더기가 발생하지 않았다. 이 실험으로 레디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썩은 고기에서의 자연발생론은 부정할 수 있었으나, 살아 있는 생명체에 기생하는 기생충에 대해서는 자연발생한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레디의 고전적 자연발생론에 대한 반증은 곧 다시 반증되었다. 레벤후크((Antonie van Leeuwenhoek, 1632-1723)에 의해 발명된 현미경에 의해 많은 미생물이 관찰되었음에도 그 발생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레벤후크가 발견한 미생물은 자연발생론에 의해 설명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후부터 자연발생론은 육안에 의한 관찰보다는 더욱 정교해진 현미경 관찰 자료를 근거로 새롭게 과학적으로 논의되어야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의 물활론적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제 막 발명된 현미경의 성능이 그다지 좋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뉴턴(Newton, 1643-1727)이 우주는 자연법칙에 의해 운행하는 기계와 같다고 설명함으로써 기계철학이 강화되었고, 따라서 일상사에 개입하는 인격적 신의 역할은 축소되었다. 이러한 뉴턴의 견해는 낙관적 인본주의에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자연발생설을 되살리는 듯한 단자론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그의 단자(monad) 개념은 이제까지의 물활론적인 원자 또는 생명력의 개념을 넘어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게 우주에 충만한 극미(極微)의 원형체(原形体) 같은 것이다. 이러한 단자가 자연적 조건에 따라 우주의 변화를 만들어낸다는 생각은 역경(易經)에 나오는 동양사상과 같은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이러한 이신론적 동양사상에 심취해서 연구하기도 했다.

 

(2) 18세기

18세기에 들어 라이프니츠의 단자론적 자연발생론은 프랑스에서 뷔퐁(G. L. Buffon, 1707-1788)과 영국에서 로마가톨릭 사제 니덤(Needham, 1718-1781)에 의하여 약간씩 수정되어서 계승되었다. 그러나 레디 이후에 나타난 이러한 미생물의 자연발생설을 부정하는 실험이 100년 뒤 1765년에 이탈리아의 동물학자 라자로 스팔란차니(Lazzaro Spallanzani, 1729-1799)에 의해 시행되었다. 그는 유기물 용액을 가열한 뒤에 공기에 접촉시키지 않고 밀폐된 용기에 보관하면, 그 용액에서는 미생물의 자연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실험으로 증명했다. 그는 공기에 있던 미생물이 유기물 용액에 접촉하는 순간에 침투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실험에 대해 자연발생론 지지자들은, 밀폐된 용기 안으로 산소가 공급되지 않기 때문에 그 안에서 미생물이 자연발생했다가 사멸했다는 반론을 제기했다. 니덤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스팔란차니가 유기물 용액을 너무 강하게 가열해서 생명력을 사라지게 했다고 주장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도 생명 발생의 원인은 형이상학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주장하여 이 논쟁에 거들었다. 박물학으로 불렸던 과학에서는 이미 라마르크적 진화론에 유사한 동물체계, Zoonomia(1794-96)가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 에라스무스 다윈(Erasmus Darwin, 1731-1802)에 의해 출판되었다. 이렇게 양 진영에서 실험과 논쟁이 계속되면서 자연발생론은 19세기로 넘어가서도 생명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과학적인 것으로 변하게 되었다.

 

3. “과학적 무신론의 생성과 발전의 개요

 

1) 19세기 자연발생론 사상으로서의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

 

(1) 다윈 이전의 자연발생 논쟁

그렇지만 19세기에 새로운 실증주의 과학사상이 등장하면서부터 철학적 논제에 대해서조차 철저한 실험적 논증이 필요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라마르크(Jean-Baptiste de Monet, chevalier de Lamarck, 1744-1829)동물 철학(1809) 등에서 용불용설로 알려진 후천적 획득 형질의 유전에 의한 변이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라마르크의 제자로서 창조주의자이며 고생물학자로서 유명한 퀴비에(Georges Cuvier, 1769-1832)는 반창조론자인 스승에게 모욕적인 반박을 제기하여 치욕을 안겨주었다. 그의 행동은 프로테스탄트로서는 무례한 것이었고 과학적인 방법도 아니었으나, 당시 프랑스에서는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이렇게 기독교에서는 종교적 도그마에 묶여 반창조주의적인 이론들이 나오고 있음에도 과학적 반증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새로운 과학적 발전에 대해 전혀 대응하지 않고 있었다. 익명으로 창조의 자연사의 흔적이 나온 것은 1844년이었다. 이 책은 다윈의 이론과 거의 비슷한 것이었으나, 논리의 구성이 치밀하지 못하고 더구나 익명으로 발표되어 신뢰를 얻지 못하였다. 나중에 이 책은 로버트 챔버스(Robert Chambers, 1802-1883)의 것으로 밝혀졌으나, 그는 당시 사회에서 논란을 두려워하여 이름을 숨겼던 것이다. 이런 것이 원인이 되어 1859년 런던에서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판된 이후부터 자연발생론에 대한 사상적 조류의 주도권이 다윈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2) 다윈의 종의 기원

다윈은 종의 기원을 비글호의 승선에서 얻은 관찰 자료에 근거하여 직설적인 귀납법적 논리로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과학에서는 새로 등장한 방법론이었다. 그래서 그의 종의 기원에 나타난 다윈의 주장은 그 당시의 생물학적 수준에서는 반론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그런 방법으로 생물을 관찰한 사람도 없었고, 그런 방법에 의하여 생물학 이론을 구성한 전례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과학은 관찰 도구로서 저배율의 현미경과 도구 사용의 부적합성, 그리고 실험자의 부주의 등으로 미생물의 번식 과정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의 속성에 대한 무지는 눈에 보이는 생물학적 현상을 달리 설명할 이론을 만들어낼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당시의 사회적 주도권을 일방적으로 행사하는 기독교 교리에 과학주의 사상이 회의적인 반론을 제기하고 있었던 시기였음에도, 다윈의 주장은 일반적 사회에서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아직까지 생물은 두 갈래의 방법, 즉 생물의 생식에 의하여 태어날 수도 있고, 부패물로부터 자연적으로도 생겨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시로서는 종의 기원이 국교회의 성경적 창조를 부정하는 것으로서, 한편으로는 매우 새롭고 충격적인 것으로서, 폭발적인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자본주의 선진국으로서의 낙관적인 자신감과 해가 지지 않는대영제국의 빅토리아 여왕(Victoria the Queen, 1819-1901, 재위 1837-1901) 시대의 종교 관용적 분위기가 다윈의 새로운 자연발생설을 용인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다윈은 그의 종의 기원마지막 구절에서 생명은 그 몇 가지 능력과 함께 맨 처음에는 창조주(the Creator)에 의해 소수의 또는 한 개의 형태에 불어넣어졌으며” (만유인력의 법치에 따라 회전하고 있는 이 행성에서 가장 단순한 것에서 시작하여 가장 아름답고 가장 경이로운 형태로 끝없이) “진화했으며, 하고 있다는 견해에는 장엄함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윈의 주장은 이때까지 물활론적인 관념론 또는 기계론적인 유물론에 기초하여 진술될 수밖에 없었던 전통적인 자연발생론을 한 차원 격상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종류대로창조되었다는 기독교의 창조교리를 부정하는 것이었으므로 기독교 사회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되었다.

 

(3)파스퇴르와 멘델의 실험

다윈의 자연발생론에 관한 과학적인 검증은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의 실험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파스퇴르는 더욱 발달한 현미경을 사용하여 박테리아 등을 관찰하였기 때문에 그것의 속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런 지식을 바탕으로 유명한 백조목(S) 플라스크 실험을 통해 1861자연발생설 비판을 출판함으로써 유물론적인 또는 물활론적인 자연발생설에 종지부를 찍는 듯 했다. 그가 주장한 생물속생설(生物續生說, biogenesis)은 생물의 생명은 오직 그 부모의 생식에 의해서만 물려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865년에 오스트리아의 수도사 멘델(Gregor Johann Mendel, 1822-1884)이 발표한 유전법칙도 부모의 유전형질에 의해서 자손의 유전형질이 결정된다는 것으로, 후천적 형질이 유전된다는 다윈의 주장, 즉 자손에게 자연선택에 의한 변이의 축적이 종을 바꿀 수 있다는 이론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파스퇴르와 멘델의 주장은 뜻하지 않은 변수를 만나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고 뒤안길로 밀려나고 말았다. 파스퇴르와 멘델의 이론이 제대로 알려졌더라면, 다윈의 진화론은 이때 이미 과학적으로 폐기되어야 마땅한 것이었다.

 

2)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론

 

그러나 당시 19세기 중반 유럽 대륙에는 산업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분위기가 몰아치고 있었다. 1848년에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 정치사상은 노동자 혁명운동을 강력하게 선동하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의 공산주의자 덕분에 다윈의 진화론은 생명이 보존되었고 부활의 기회를 잡았다. 그들은 다윈과 동시대의 사람들로서, 그중에 엥겔스는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판되자 즉시 읽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크게 감동을 받은 나머지 마르크스에게 그들과 같은 사상을 가진 다윈의 책을 빨리 읽어보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1년이나 지나서야 이 책을 읽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즉시 다윈에게 열렬한 찬양과 추종의 뜻을 담은 편지를 보냈고 앞으로 나올 그의 책을 헌정하겠다고 제의했다. 다윈은 마르크스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으나 마르크스는 1867년 그의 자본론을 출판하자 곧바로 1권을 보내주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다윈을 인용하면서 자신들의 역사적 유물론 사상을 다윈의 진화론과 같이 매우 과학적인 이론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들의 이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진화와 변증법이 같은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이론, 다시 말하면 세상의 모든 종교를 전면 부정하는 유물사관에서의 변증법을 다윈의 진화론과 같이 매우 과학적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비해 훨씬 잘 알려지고 과학자로서 사회적 권위를 획득하고 있던 다윈을 이렇게 인용함으로써 그들의 변증법적 이론은 과학적인 것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이 마르크스 · 엥겔스의 유물론에서 물질적 진화를 보증하는 이론으로 기능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르크스 · 엥겔스의 역사적 유물론에 녹아들어갔던 다윈의 진화론은 레닌이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에 성공함으로써 공산주의 사회에서 생명력을 유지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를 과학적 무신론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과학적 무신론마르크스주의 세계관의 필수 불가결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유물론을 과학적 무신론이라고 한다면, 역사적으로 이렇게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무신론 유물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다윈의 진화론을 과학적 무신론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매우 타당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19세기 후반에 혁명의 열풍이 유럽 대륙을 휩쓸던 시기에 마르크스의 유물론 사상이 크게 주목을 끌었고, 이어서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하게 됨으로써 다윈의 이론은 살아남았고 다윈의 진화론을 반증하는 파스퇴르와 멘델의 이론은 묻혀버렸다는 점에서도 뒷받침된다. 더욱이 현대에 이르러서는 다윈이 결코 주장하지 않았던 무신론적 유물론을 다윈주의자로 자처하는 그의 추종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주장하고 있는 점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3) 오파린의 화학적 진화론

 

그리고 1917년 모스크바 국립대학을 졸업하고 동대학원에 진학하여 식물생리학을 전공했던 알렉산더 이바노비치 오파린이 1922년에 생명의 기원에 관한 짧은 논문을 발표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생명의 기원1판이 1936년에 출판되었다. 이 해에 스탈린은 그의 유명한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을 출판했다. 이것은 곧 그대로 공산주의 사회에서 최고 권위의 경전(經典)으로 읽혀졌으며, 이것에서 벗어나는 사상이나 이론을 제기하는 자는 용납되지 않고 숙청되었다. 결국 생물이 물질의 조합에 의한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담은 이 책은 유신론적 창조주의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 공산주의 사상에서 모든 종교를 부정하는 실천적 선전 자료가 되었다. 이 책은 스탈린이 죽은(1953) 후에 폐기되었지만(1956), 그동안에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사고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오파린의 생명의 기원은 그가 죽을 때(1980)까지 여섯 번 개정되었지만, 기본적 이론의 틀은 바꾸지 않았다. 그것은 물질에서 변증법적 비약이 일어나서 생명이 자연적으로 생겨났다는 이론이다. 우리는 다음 기회에 이런 주장을 자세히 검증하고 비판할 것이다.

이제까지 세 번째 과학적 무신론”, 즉 오파린의 생명의 기원까지의 계보를 간략하게 살펴본 것은 앞으로 이것들을 비판하기에 앞서 그 역사적 맥락을 개요적으로나마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이토록 인류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 사상은 그것의 역사적 배경과 그 이후의 상황을 비판적으로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주의적 생명의 기원론 또는 물질주의적 유물론의 역사적 오류를 비판하지 않는다면, “과학적 무신론의 망상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을 발견하기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과학적 무신론의 역사적 동향을 좀 더 말해보자면, 이제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철학적 유신론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형이상학적 요소로서의 목적인(目的因)을 제거함으로써 승리자가 되려고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승리자는 그 이후 시대의 패러다임을 결정한다. 결국 돌이켜보면 찰스 다윈이 1859년에 출판한 종의 기원1판은 이 세상에 과학적 무신론이 만들어낸 새로운 패러다임의 출현을 선포한 것이었다. 이제 마지막 보루로 남아 있는 과학적 유신론이 최후의 결전에서 이겨야 한다. 이러한 논제를 두고 싸우는 전쟁에서 최종적 승리는 엄밀한 검증과 비판을 통해서만이 쟁취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 세 가지 이론을 차례로 살펴보아야 할 것이나 여기서는 지면 제한으로 찰스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 비판에 그치겠다.

 

4. 찰스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 비판

 

1) 다윈의 종의 기원이 나오기까지

 

1858년에 린네학회(Linnean Society)에서 라이엘(Charles Lyell, 1797-1875)이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 1823-1913)의 논문에다 다윈의 미완성 이론을 덧붙여서 공동논문(joint paper)’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월리스의 논문 제목은 원형으로부터 무한정 멀어지려는 경향성에 관하여였고, 다윈의 이론은 미완성 원고였다. 월리스와 다윈은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으므로, 라이엘이 대신 발표한 것이다. 이 일이 있고 나서 다윈은 종의 기원을 서둘러 써서 1959년에 출판하였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의 공동논문에 나타난 이론은 종의 기원에 의해서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말레이의 어느 섬에 있던 월리스는 이 과정에서 철저히 소외되었으나, 그는 이 일에 항의하지 않고 현실을 인정하였다.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은 사실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의 변형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다윈은 획득 형질이 유전되면서 변이를 일으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처음 종의 변이를 생각하게 한 것은 생물학자 존 굴드(John Gould, 1804-1881)였다. 다윈이 비글호 여행을 끝내고 귀국했을 때 다윈은 갈라파고스 제도 세 개의 섬에서 각각 수집한 세 가지의 입내새(Mockingbird, 또는 흉내지빠귀)의 표본을 굴드에게 보냈다. 그런데 굴드는 뜻밖에도 그 세 가지 입내새는 각각 다른 종이라고 판정했다. 굴드에 의하면, 그것들은 하나의 종이 아니라 다른 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윈이 표본을 조사해보니 그것들은 남아메리카에서 날아온 입내새의 후손들이 갈라파고스 세 군데의 섬에서 살던 것이었다. 다윈은 이후 사육업자들이나 화훼업자들이 인공적인 선택으로 품종개량 작업을 하는 것을 관찰하고 나서는 자연에서도 종의 변이의 가능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자연에서 변이를 일으키는 동력으로서는 생존경쟁에서 승자가 대물림하는 유전적 특성의 축적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이것에 자연선택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이 합성어에 자연이라는 말이 들어간 것은 선택 행위의 주체가 신이 아니라 자연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주류 사조로서 이때까지 인정되었던 종류대로창조되었다는 창조주의적 유형론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윈은 제1원인으로서의 창조주를 부정하지는 아니했다. 그래서 다윈주의자로서 현대종합설 그룹의 일원에 속하는 에른스트 마이어(Ernst Mayr, 1904-2005)다윈이 생각한 종의 특징은 유형론적 종의 개념과 유명론적 종의 개념을 혼합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렇게 종의 기원이 나올 무렵의 다윈의 입장과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는 에른스트 마이어가 그의 진화론 논쟁에서 진술한 것보다 더 잘 연구한 것이 없으므로 이 부분에서는 그의 설명을 빌려보기로 한다.

 

(1)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판했을 때, 진화적 사고는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Toulmin 1972: 326). 언어학과 사회학에서는 특히 그랬다. 진화적 사고를 그럴 듯한 과학의 개념으로 만든 사람이 바로 다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주의를 다윈주의로 언급하는 잘못이 나타나고 있다. 생물학에서 진화주의의 존재는 뷔퐁(Buffon), 라마르크, 지오프로이(Geoffroy), 챔버스(Chambers)를 비롯하여 독일의 많은 학자들에 의해 유지되었다. 비록 다윈이 진화주의가 승리하도록 했지만, 명확히 그 창시자는 아니다.

 

(2) 러나 자연선택을 비롯한 다윈 패러다임의 여러 측면들은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19세기 중엽을 풍미하던 많은 이데올로기들과 완전히 상충되었다. 특수 창조에 대한 믿음 및 자연 목적론의 설계 주장과 함께 본질주의(유형론), 물리주의(환원주의), 목적원인론(목적론) 등이 다윈의 사고와는 철저히 반대되었다. 이러한 교리에 따르는 사람들은 다윈의 연구에 자신들을 경악시키는 반대가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 이 세 가지 이데올로기는 하나하나 패배했으며, 이들의 소멸과 함께 생물계에서 결정주의, 예견성, 진보, 완벽성 등의 개념들도 약해졌다.

 

(3) 다윈이 내세운 새로운 중요한 개념들 중 일부, 즉 변이진화, 자연선택, 우연과 필연의 상호관계, 진화에 있어 초자연적인 힘의 배제, 생물계에 있어서 인간의 위치 등을 비롯한 몇 가지 다른 이론들은 과학 이론일 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중요한 철학적 개념이며, 또한 이런 개념들로 이루어진 세계관을 특징적으로 만들었다.

(4) 특수 창조를 부정하는 것만으로도 이전에 널리 퍼져 있던 세계관의 붕괴를 의미한다. 이러한 점이 바로 세지위크(Sedgwick)나 아가시스(Agassiz) 등과 같은 과학자뿐만 아니라 훼웰(Whewell)과 허셜(Hershell) 등과 같은 철학자들까지도 다윈을 심하게 반대했던 이유였다. 창조주의를 대신할 세계관이 이전에 어디에 있었는가? 만약에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이었으며, 어떻게 규정지을 수 있었는가?

 

여기서 마이어의 주장을 보면, 창조주의를 반대하는 자들이 다윈의 이론에 근거하여 매우 정당하게 승리의 길을 걸어온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의 말은 창조주를 반대하는 세계관을 가진 자들은 다른 대안이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다윈의 진화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고백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입장은 이미 다윈의 불독헉슬리가 천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대안은 무엇입니까?”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에서부터 마르크스의 유물론, 그리고 오파린의 화학적 진화론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발전과 이들이 주장한 이론의 실체를 좀 더 살펴보면, 오늘날 다윈주의자 또는 진화주의자로 자처하는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자기들의 이론을 교활하게도 사실과 다르게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2) 종의 기원에 나타난 생물학적 진화론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우리에게 제시한 이론을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창조자에 의하여 숨을 쉬게 된 최초의 한 개 또는 몇 개의 생물적 개체의 자손들은, 자연선택에 의한 변이의 축적에 의하여 다른 종으로 진화했으며, 진화하고 있다. 이러한 다윈의 진화론은 종과 변이와 자연선택이라는 세 가지 중심 개념만 제대로 이해하면 복잡할 것이 없다.

 

(1)

다윈은 ’(species)이라는 말과 함께 변종, (), 초기종(공통조상) 등의 용어를 쓰고 있다. 일차적으로 종이란 서로 다르게 구분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진 생물의 분류단위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차적으로 다윈이 말하는 종의 개념은 그때까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의 개념을 바꾸어놓은 것이다. 다윈에 의하면 종이란 변이에 의해 변종이 되고 나아가 자연선택에 의한 변이의 누적에 의해 다른 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초의 생명체인 원()종 또는 어느 종의 조상 개체 이외에는 모든 생물 개체가 변종이다. 또한 새로운 종으로 분류될 수 있는 조상 개체가 나타나면 그것에는 초기종이라는 이름이 붙여져서 조상이 되고 그 후손들은 다시 변종이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다윈이 살고 있던 무렵 빅토리아 여왕의 대영제국 시대 사람들은 이란 하나님이 종류대로창조하신 것이므로 종은 불변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런 지식이 다윈에 의해 뒤집어진 것이다. 다윈의 이론대로라면, 사람은 당시의 믿음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원숭이에서 변이된 하나의 생물적 에 불과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2) 변이

생물은 어느 개체도 똑 같지 않게 태어난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생물의 다양성이 발현되는 것이다. 그런데 다윈은 이런 메커니즘(mechanism)을 변이라고 부른다. 변이가 나타나는 직접적인 실례는 과학적인 실험 이외에도 식물재배를 하는 화훼업자나 동물사육을 하는 목축업자들이 품종 개량을 위해 인공적으로 잡종교배를 하는 것에서 볼 수 있다. 다윈은 이렇게 인공적으로 품종의 변이를 일으킬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에서도 똑 같은 변이가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연에서의 종의 변이는 종내(種內)에서 일어나는 것을 넘어 종간(種間)에 변이를 일으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관찰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윈은 자연에서의 변이는 매우 느리게 진행되지만 점진적으로 누적되면서 보존된다고 한다. 이러한 변이에 의해 자손은 부모로부터 변종으로 태어나는 것이며, 사소한 변이들이 축적되면서 다른 으로 분화할 수 있다. 이렇게 되는 것이 곧 진화라는 것이다.

 

그런데 다윈의 시대에는 아직 유전자가 발견되지 않았던 때이므로 자손에게 나타나는 변이가 부와 모의 유전자의 조합 현상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신에 그는 전체적인 창조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를 사용하여 범생설(pangenesis)을 주장했다. 다윈은 범생설에서 제뮬(gemmule)이라는 부모의 형질 입자가 자손에게 유전된다고 가정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부모로부터 유전되는 제뮬에는 라마르크가 제안한 후천성 유전, 곧 후천적으로 획득된 형질이 들어 있었다. 다윈은 이러한 제뮬이 자손에게 변이를 일으키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정은, 왓슨(James Watson, 1928- )과 크릭(Francis Crick, 1916-2004)1953년에 유전자의 실체인 유전물질 즉 DNA(deoxyribo nucleic acid) 구조를 발견하고, 현대 유전학에 의해 자손에게 나타나는 형질은 부모의 DNA조합에 의해서만 발현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폐기되어야 했다. 다만 현대 유전학계 일부에서는 라마르크의 후성유전설을 다시 주장하고 있기도 하나, 이런 주장은 유전학계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3) 자연선택

생물의 각 개체는 부모를 닮은 자신의 신체적 구조와 주위의 환경에 의하여 생존 활동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먹이를 놓고는 같은 종의 개체끼리도 경쟁을 해야 한다. 또한 생존하기 위해서는 상위 포식자도 피할 수 있어야 한다. 생물은 이렇게 하고도 배우자를 만나 짝짓기하고 출산한 자손들을 안전하게 키워내는 일에 계속적으로 성공해야 한다. 이 조건을 모두 극복해야만 그 생물은 자손을 남길 수 있고 으로 생존할 수 있다. 만약 어느 하나라도 실패하면 바로 멸종되고 만다. 다윈은 이 과정에서 조상으로부터 유리한 형질을 물려받은 개체가 이러한 경쟁에서 유리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을 깔고 있다. 이러한 것이 다윈이 말하는 자연선택이라는 이론이다. 다윈이 자연선택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사육 또는 재배하는 조건하에서 인위적인 선택으로 동식물에게 품종의 변이를 일어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자연에서도 동일하게 선택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다윈은 여기에다 맬서스(Thomas R. Malthus, 1766-1834)인구론에서 생존경쟁(struggle for survival)’, 즉 제한된 환경조건에서 생존에 유리한 개체는 살아남고 불리한 개체는 도태되는 경쟁적 개념을 불어넣어 자연 선택이라는 독자적 이론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래서 자연선택과 자연도태라는 말은 동의어로 번역된다. 오늘날 우리는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말을 잘 이해하고 있는데, 이는 자연선택과 같은 개념이다. 다윈도 종의 기원개정 5(1869)에서부터는 일부 학자들의 비판과 충고를 받아들여 적자생존자연선택을 같은 뜻으로 사용하면서, 오히려 적자생존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했다. 이렇게 알고 보면 다윈의 진화론은 매우 단순한, 어쩌면 매우 엉성한 내용에서 점진적으로 진화해온 이론이다. 그런데 다윈은 물론 현대 진화론자들의 저서에서도 자연선택이라는 용어에는, 진화를 위한 어떤 신적 능력이 있는 것처럼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말하자면 현대에서의 물활론적 용어라고 말할 수 있다. 진화론이 종교적 도그마(dogma)진화해온 이유가 바로 이 말에 숨겨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에른스트 마이어(Ernst Mayr, 1904-2005)는 다윈의 진화론에 가운데 변이의 원천적 동력을 가리키는 자연선택론에 대하여, “소크라테스 이전부터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칸트에 이르기까지 모든 철학서에도 이처럼 독특한 이론은 없었다. 다윈의 이론은 사실상 목적론을 기계론적인 설명으로 밑바탕에서부터 치환하게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는 세계에 대한 그의 재해석은 정적인 상태 또는 항상상태였던 세계를 진화하는 세계로 바꾸어 놓았으며,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 우주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독특한 위치를 동물 진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한 단계로 바꾸어 놓은 점이라고 평했다.

 

3) 옥스퍼드 논쟁과 그 이후의 발전

 

토마스 헉슬리(Thomas H. Huxley, 1825-1895)다윈의 불도그라고 불릴 정도로 다윈의 자연선택설을 열렬히 지지하고 다윈을 대신하여 적극적으로 논쟁에 나섰다. 그는 다윈의 책을 처음 읽고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진작 이런 생각을 못했다니 정말 어리석었군.” 그는 1860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옥스퍼드 주교 새뮤얼 윌버포스(Samuel Wilberforce)와 논쟁을 벌인 자리에서 원숭이가 조상이라면 당신의 할머니 또는 할아버지 어느 쪽입니까?” 라고 묻는 윌버포스에게, “자기의 재능과 영향력을 과학적인 문제를 조롱하는데 쓰는 사람과 혈연관계를 맺기보다는 차라리 원숭이를 할아버지로 택하겠소라고 응수했다고 보도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의 언론 보도에서 헉슬리가 무례를 범했던 반면 윌버포스는 훌륭한 연설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당시의 평가는 후대(1899)의 사람들에 의해서는 완전히 반대되는 평가를 받게 되었고, 이러한 평가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것은 시대적 주류 사조의 패러다임에 따라 어떤 사건의 평가가 완전히 뒤바뀔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다윈의 불도그의 급진성은 다윈이 다루기를 꺼려했던 인간의 조상 문제를 이미 1863년에 자연계에서 인간의 위치라는 이름으로 출판했다는 사실에서도 나타났다. 이 책은 다윈의 종의 기원을 직설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읽혀졌다. 그는 런던시 교육위원으로 일할 때에는 과학적 교육을 강조했으나, 도덕 교육의 근거로서는 성경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기도 했다. 그는 진화와 윤리에서 생존경쟁에서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하여 무제한의 적자생존 이론인 진화론과는 모순되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을 과학자라고 말하지 않고 과학지식인이라고 말했다. 신의 존재에 관해서 그는 불가지론자라고 말했고, 다윈도 그와 같은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그는 다윈의 점진적 변이를 부정하고 돌연변이를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라이엘과 후커와는 달리 다윈의 지지자로서는 비판적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 다윈을 지지한 아사 그레이(A. Gray)도 변이를 신적 영역으로 간주해서 다윈과 다른 입장을 취했다. 헉슬리는 다윈의 이론을 가장 먼저 다윈주의라고 부르면서 자기의 것과 구별했다. 당시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사조는 진보를 향하는 자연목적론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다윈의 종의 기원을 무신론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없었다. 왜냐하면 다윈 자신도 사실상 자연 목적론의 신봉자로서 그의 자연선택론은 그렇게 서술되었고, 또 그렇게 이해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이런 것에는 그의 종의 기원의 마지막 구절에 쓰인 창조자(the Creator)라는 말도 효과적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헉슬리는 불가지론자라고 주장했지만 사실상 무신론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런 사실을 알고도 종의 기원에 나타난 공동조상이론을 다만 자연 지식 영역의 확장을 위한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서 옹호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반창조주의자로서 다윈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그렇다면 당신이 내놓을 대안은 무엇이냐?”고 공격했다고 한다. 이런 공격을 당하면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이렇게 다윈을 위한 논쟁에서 상대방을 효과적으로 공격하는 그의 순발력과 행동은 나중에 그의 손자 줄리안 헉슬리에게 진화적으로 전수되었다. 이러한 헉슬리의 생각은 후에 모든 다윈주의자들의 기본적 사고방식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이들은 자기들이 필요한 대로 다윈의 이론을 해석했고, 자연선택은 목적과 방향이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윈의 불도그의 손자인 줄리안 헉슬리는 거의 죽어있던 다윈의 진화론을 그의 진화: 현대종합설에서 다시 살려놓았다. 그동안 드 브리스(Hugo de Vries, 1848-1935) 등에 의해 파스퇴르의 생물속생설과 멘델의 유전법칙이 재발견되고 돌연변이설이 주장되면서 다윈의 점진적 변이설은 부정되었다. 또한 다소 애매한 생명기원론을 진술한 다윈의 진화론이 1917년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에 성공한 정통파 마르크스주의자 레닌에 의하여 무시되면서 다윈은 공산주의 사회에서 잊어지고 있었다. 1924년에 레닌의 후계자로 등장한 스탈린은 무신론적 진화론자인 라마르크주의를 수용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과학자를 모조리 추방 또는 숙청했다. 그런 시기에 줄리안 헉슬리는 현대종합설’(또는 진화의 종합설) 그룹이라는 새로운 다윈주의 학파를 형성한 것이다. 현대종합설그룹은 다윈의 진화론에 새로운 관심을 끌게 만드는 격심한 논쟁의 불을 붙였을 뿐만 아니라, 서방에서 과학적 무신론을 강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다윈은 이렇게 헉슬리가()의 도움으로 다시 회생했으나, 그의 진화론은 어느덧 서방에서 무신론의 근거가 되고 있었다. 왜냐하면 줄리안 헉슬리는 불가지론자임을 공표했던 할아버지와는 달리 스스로 무신론자임을 공언했기 때문이다. 줄리안 헉슬리는 이뿐만 아니라, 유네스코(UNESCO, 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 초대 사무총장을 하면서 과학교육에 진화론적 사고를 강조하여 다윈의 진화론 부활에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현대종합설 그룹이 형성되는 과정을 마이어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어떤 이론이 널리 유행하게 되면 다른 이론들은 빛을 잃고 사라지며,

몇몇 분야에서는 많은 활동적인 연구자들 사이에 나타나는 그럴 듯한

일치감을 즐기나, 다른 분야에서는 서로 격심한 반목을 일삼는 몇몇

무리의 전문가들로 나누어진다. 후자의 경우를 1859년부터 1940년대에

걸친 진화생물학계에 적용할 수 있다.

 

이 동안에 진화론 진영의 논쟁은 주로 자연선택 이론에 대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창조주의를 부정하면서 변이 발생의 기전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것의 특징은 마이어 스스로 진술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얼마나 억지스러운 이론인지를 알 수 있다.

 

진화의 종합설이 나오는 동안에 발전된 새로운 다윈주의는 자연선택과

방황 과정에 대한 균형적인 강조를 비롯하여, 이밖에 전체적으로는 진화도

아니며 특별한 경우에는 자연선택도 아닌 결정론적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이 두 가지 모두 확률론적 과정이라는 믿음, 다양성의 근원이 진화의 한

요소로 중요한 만큼 적응도 중요하다는 믿음, 그리고 생식적 성공을 위한

선택이 생존하기 위한 질적 특징의 선택만큼 진화에 있어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한다는 점으로 특징지워진다.

 

진화론적 방법이 아니면 연구를 할 수 없는 것처럼 주장하면서 억지스럽게 진화론에 매달려 있는 현대종합설 그룹의 전통은 유전자의 나선구조를 밝혀낸 왓슨과 크릭 이후 현대 유전학에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진화론적 방법이 아니면 창조주의를 수용해야 하는데 무신론자인 진화론자들이 창조주의를 수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이와 다른 관점을 가진 다윈주의학파가 멘델학파의 유전학에 접목하여 생겨났는데 이른바 돌연변이 괴물이론을 주장하는 신다윈주의 그룹이다. 오늘날에는 이 두 그룹의 다윈주의학파가 서방 과학계의 과학적 무신론을 주도하면서 경쟁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에서 가장 유명한 진화론자는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 1941- )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현대종합설 그룹의 맥을 잇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가 쓴 이기적 유전자, 만들어진 신, 눈 먼 시계공등은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다음 장에서 이런 것들이 얼마나 큰 오류에 기초하고 있는지를 검증하고 비판할 것이다.

 

4)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에 대한 검증과 비판

 

(1) ‘의 분류

다윈의 진화론을 이렇게 핵심적으로 이해하고 나면, 그 다음에 제기되는 문제는 과연 생명체의 변이가 다른 종으로 바뀔 수 있는가에 대한 생물학적 의문이다. 왜냐하면 다윈의 이론은 만물이 종류대로창조되었다는 국교회의 믿음과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다윈의 자연적 에 대한 분류는 스웨덴의 식물학자 린네(Carl von Linné, 1707-1778)의 분류 방법을 따르고 있었다. 린네는 자연계를 먼저 광물계, 식물계, 동물계의 3계로 나누고, 계 밑에 강---종이라는 5단계에 의하여 계통적으로 분류했다. 린네는 종 하위에 변종을 말하고 있었는데 이는 현대적 분류법에서는 품종 또는 아종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윈도 린네의 분류법에 따라 종과 변종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1940년대에 멘델(Gregor Johann Mendel, 1822-1884)의 고전 유전학과 다윈의 진화론을 결합하려고 했던 데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Theodosius Dobzhansky, 1900-75)나 에른스트 마이어(Ernst Mayr, 1904-2005) 등 현대종합설(modern evolutionary synthesis) 그룹은 종을 정의하면서, “종이란 실제로 또는 잠재적으로 교배가 이루어지는 개체군의 자연 집단이며, 이들은 다른 집단과 생식적으로 격리되어 있다고 하여 생물학적 종의 개념을 새로 마련했다. 이들의 말에는 생식장벽(reproductive barrier)’이라는 개념이 종 단위를 구분하는데 쓰인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필자는 이런 진화론자들과는 달리 생식장벽이라는 생물학적 실제 현상을 이용하여 다윈의 이론을 비판할 것이다.

 

(2) 생식장벽

생식장벽이라는 말은 생물은 종이 다르거나 지역과 시간, 그리고 생식기 구조 등에 차이가 있으면 생식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다윈 당시의 린네 분류법에 의하면, ‘생식장벽은 오늘날과 달리 종의 상위에 있는 속 단위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어쨌든 생물학적 진화론은 하등생물이 고등생물로 진화한다는 것이므로 이런 차이는 다윈의 진화론을 검증하는 일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하나의 종 또는 속이 생식적 장벽을 극복하고 결국에는 다른 종 또는 속으로 진화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진화론은 정당한 이론으로 성립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다윈이 주장하는 변이가 실제로 생식적 장벽을 건너 뛰어넘을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생물의 생식적 장벽은 다윈 시대에는 그 원인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었으나, 현대의 생물학계에서도 깊이 다루기를 꺼려하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와 관련한 문제는 다윈의 범생설이 틀린 가설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진화론을 무너뜨리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화론적 입장에 서있는 현대의 생물과학은 이 생식적 장벽을 종 분류의 기준에만 적용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물의 생식장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여기에는 다윈이 주장하는 변이가 소진화(=종내 변이, 품종, 변종, 아종)까지는 가능하지만, 종을 뛰어넘는 대진화(=종의 분화, 돌연변이)를 불가능하게 하는 요소가 숨어있음을 알 수 있다. 생물들에는 두 가지의 생식(reproduction) 유형이 있다. 첫째 유성 생식은 부의 정자를 모의 난자가 수정하는 순간에 부와 모의 유전자 결합이 이루어지며, 자손의 몸체가 형성된다. 유성생식에서는 부모의 유전자가 결합하여 새로 자손의 유전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변이가 일어날 수 있다. 둘째 무성 생식을 하는 생물은 부가 없이 모의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으므로 생식장벽이나 변이가 일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생식장벽은 유성생식 생물에게서만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생식장벽은 생식행위의 전(pre-zygotic)과 후(post-zygotic)로 나누어보아야 한다. 먼저 생식행위 후에는 암수의 정자와 난자의 결합이라는 수정 과정이 이어진다. 그러나 수정은 무조건 되는 것이 아니다. 암수가 생식행위를 했다고 하더라도 여러 가지 원인으로 수정이 되지 않으면, 결과는 불인으로 끝나고 자손은 태어날 수 없다. 그런데 생식행위 후에 수정이 안 되는 생식 장벽의 이유가 확실히 밝혀진 것은 1990년에 시작되어 2003년에 완료된 게놈 프로젝트(genome project) 이후이다. 여기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각 생물은 유전물질인 DNA의 구조와 수와 구성물질 및 수정과정에 개입하는 성분비물의 화학적 성분과 기능 등이 각각 다르다. 이런 것들이 다른 종과의 생식에서는 정자와 난자의 수정을 방해하기 때문에 생식장벽이라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두 가지 원인을 들 수 있다. 첫째는 어떤 종의 난자도 다른 종의 정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다른 종간에는 억지로 생식행위를 했다하더라도 앞에서 말한 이유들 때문에 수정이 일어나지 않는다. 둘째는 말과 당나귀, 그리고 호랑이와 사자 같이 근린종이 억지로 교배하여 생식에 성공하는 경우에도 그 자손은 불임이 된다. 말하자면 불구 자손이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종교배를 통해서 태어난 잡종 개체를 하나의 초기종으로 볼 수는 있지만, 자손의 번식을 가로막는 생식장벽에 의해 새로운 종으로 분화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식행위 전의 생식장벽에 대해서는 기존 종내에서의 문제는 이곳에서 논외로 하기로 하고, ‘초기종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한다. 만약 생식 가능한 하나의 초기 종이 정말 아주 우연하게태어났다고 해도, 초기 종이 자손을 생식하기 위해서는 암수의 생식기와 생식행위 방법에서 구조적 결합이 가능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실제 수정이 가능한 초기종의 암수가 서로 짝을 맞추어야 하는데, 초기종에서 구조적으로 생식 가능한 암수가 정말 동시적으로, 동일지역에서, 만들어져 나올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학적 확률의 원리에서 보면, 극히 낮은 확률의 사건이 동일 지역에서 동시적으로 겹쳐 일어나는 것은 자연적으로는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아주 우연하게하나의 초기종이 생겨났다고 해도, 이러한 생식행위 전의 생식장벽 때문에 그것은 혼자 살다가 죽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억지로 근린종과 생식행위를 한다 해도 생식행위 후의 생식장벽에 막히는 결과에 이를 것이다. 그렇다면 유전법칙과 결합한 현대종합설 그룹의 이론도 허위라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3) 돌연변이 초기종의 가능성

점진적 변이의 누적이 진화의 원동력이라고 주장한 다윈은 돌연변이진화를 적극 부정했다. 하지만 그의 추종자인 골드 슈미트(Richard Goldschmidt 1878-1958)25년 동안이나 집시나방 (gypsy moth, Lymantria)의 계대 실험을 했지만, ‘초기종은 물론 중간종조차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1940진화론의 물질적 기초, Material Basis of Evolution에서 초기종이 생겨날 수 있는 길은 돌연변이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초기종희망적 괴물(hopeful monsters)”이라고 불렀다. 이 말은 다윈의 점진적 진화론이 실제로는 불가능하지만, 희망적으로는 돌연변이에 의해서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뜻으로 절망의 역설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실험의 결과였으므로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주장은 신다윈주의(New Darwinism)라고 불리면서, 다윈의 점진적 진화론과 멘델의 유전 이론을 결합한 현대종합설과 경쟁하는 이론이 되었다. 그러나 현대의 진화론의 거장으로 추앙받고 있는 고생물학자 굴드(Stephen Jay Gould, 1941-2002) 역시 점진적 진화론의 아킬레스건인 중간 화석의 부재를 변명하기 위해서는 슈미트의 주장을 빌려야 했다. 1972년 굴드는 엘드리지(Niles Eldredge)와 공동으로 단속평형설(Punctuated equilibrium)”을 제안했다. 이것 역시 돌연변이에 의해서만 새로운 초기종의 출현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신다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돌연변이에 의해 하나의 초기 종이 출현했다고 하더라도 앞에서 설명한 생식행위 전후의 생식장벽에 막혀 새로운 종의 출현은 불가능하다는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물론 진화론자들은 아주 긴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는 이런 돌연변이가 우연하게성공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고, 무지한 일반 사람들을 속이는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구상에는 수많은 종이 있었고, 지금도 수많은 종이 살고 있는데 이것들이 하나 또는 몇 개의원시 생물에서 돌연변이된 것이라고 한다면, 특히 캄브리아기에는 수많은 종이 동시에 폭발적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에서 본다면, 그 많은 종들이 우연하게돌연변이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종의 진화가 그렇게 진행되는 것이라면, 오늘날에도 우리는 일상적으로 돌연변이가 일어난 초기종을 쉽게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본다면, 신다윈주의의 돌연변이 이론도 허구라는 사실이 드러난 셈이다. 이와 같이 다윈의 진화론을 검증하고 나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생물에게 종내 변이, 즉 품종이나 아종 수준의 소진화는 일어나도 생식장벽을 뛰어넘어 다른 이 되는 진화’(대진화)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4) 변이의 한계

현대 유전학의 발달에 따라 우리가 이미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인간의 생식 메커니즘에 관한 다윈의 변이 이론에 대해서 검증해보고자 한다. 인간은 각각 23개의 유전자를 가진 부모의 정자와 난자의 결합으로 만들어진다. 이 과정은 직접적인 생식행위를 통해서나 인공수정을 통해서나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변이에 관한 문제이다. 인간이 각각 다른 형태로 태어나는 것도 유전적인 메커니즘에서 보면 변이의 일종이다. 그런데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문제는 이 정도에 그치지 않고 다른 종으로까지 변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윈이 주장했던 점진적 변이나 신다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돌연변이의 문제가 모두 그런 것이다. 모든 변이는 수정하는 순간부터 시작하여 태어날 때까지 일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자와 난자라는 성세포가 결합하는 순간부터 배아는 자체적으로 2, 4, 816, 32....와 같이 분열하면서 배수체(倍數體)로 성장한다. 모태에서 이렇게 성장이 진행되는 동안 유전자에 기록된 유전 정보가 배아의 몸에서 표현된다. 말하자면 유전형이 표현형으로 실체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에서 이미 난자는 다른 종의 정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생식장벽 문제를 검토했기 때문에, 진화론에서의 주장이 타당한 것인지에 관해서는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부모의 유전자에 다른 종의 유전자가 들어 있지 않다면 그런 변이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손은 부모의 유전자를 물려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렇다면 변이는 부모의 유전자 형질의 범위 내에서만 가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연한 기회에 일어나는 돌연변이를 주장하는 진화론자들의 이론을 다음과 같이 반박할 수 있다: 우연한 변이는 없다. 왜냐하면 변이는 주어진 변수들의 조합에서만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변수는 부모의 성세포에 내재된 유전자 형질이다. 그것은 부모의 종에 속하는 유전형질이며 총체적으로는 유한하다. 그러므로 자손에게 일어날 수 있는 변이도 이 한계 내에서만 허용된다. 자손은 이러한 부모의 유전자 형질이 조합되는 결과에 의해서만 태어나는 표현형일 뿐이다. 부모가 인간이라면 인간 유전자 형질의 범주를 벗어나는 표현형의 자손을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물계에서 부모의 유전자 형질의 조합에 벗어나는 표현형은 결코 만들어질 수도 없고 태어날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점진적 변이든, 돌연변이든, 종간변이는 유전학적으로 결코 일어날 수 없다. 부모의 유전자적 변수의 범주를 초월한 우연한 변이가 일어난다면, 그것이야말로 신적인 개입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또한 기형(畸形)의 문제를 검토해보기로 하자 기형도 하나의 변이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기형은 유전자 형질의 조합과정에서 또는 배아 성장 과정에서 어떤 결함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밝혀진 것이다. 결함의 원인은 유전자의 결손, 부정합 등의 유전자 조합에서 일어나는 것과 체액의 부조화, X-선 조사 등 생리화학적인 충격에 의해서 유전자가 손상을 입는 경우가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제까지 기형은 모두 열등한 표현형으로 나타났다. 이런 기형아의 경우에도 정상적인 유전 형질을 가진 배우자와 결합하면, 손상된 유전형질이 회복된다. 또한 체내 유전자의 손상은 자체적으로 복구하는 기능이 있는 것도 밝혀져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진화론자들은 이런 현상을 거꾸로 해석하여 언젠가 기형이 우수한 표현형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 않느냐고 강변한다. 그러나 이제까지 검토한 바와 같이 정상적인 유전자 조합을 벗어난다는 것은 어떤 오류를 내포한 것이고, 그것이 기형으로 표현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변수가 아무리 많아도 변수의 조합은 변수의 총체적 계수(計數)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진리를 알고 있다. 다만 우리는 유전자 형질처럼 변수가 워낙 많을 경우에는 그 변수에서 나타나는 경우의 수를 정밀하게 모두 다 계산하지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유전적 형질의 변수가 아무리 많더라도 자손에게 표현되는 것은 부모의 종에 속하는 것뿐이다. 다시 말해서 자손의 변이의 한계는 부모의 유전자 형질의 범위 내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은 다양성의 발현일 뿐이다. 그러므로 종간의 변이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5. 결론

 

마이어는 진화의 종합설이 진행되는 동안과 그 이후에는 <다윈주의>라는 용어가 자연선택의 영향에서 나타나는 진화의 적응 변화와 변형 진화 대신 변이 진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고 고백했다. 이 말은 현대종합설과 신다윈주의를 거치고 나서는 다시 다윈의 본래적인 변이 진화로 환원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다윈이 주장하는 변이에는 라마르크적인 후천적 획득형질의 유전이라는 개념적 오류가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마이어의 고백은 다윈의 진화론을 통째로 사망 선고하는 것으로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진화론자답게 새로운 변명을 만들어낸다. “어떤 사건이 <흔히(usually)> 일어난다고 하여도, 반드시 항상 일어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진화적 과정이 보여주는 영원히 존재하는 다양성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마이어의 이 말은 진화이론에서 한 가지가 부정되는 사건이 일어날 수 있지만, 그에 대한 다른 변명이 새롭게 마련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그의 뒤를 잇는 진화론자들에게 새로운 비판이 제기되면 새로운 변명 이론을 만들어내라는 교시에 다름 아니다. 도브잔스키가 생물학은 진화론적 방법으로만 해야 한다는 지침을 내린 것과 마이어의 이 말을 함께 고려해보면, 진화론자들이 얼마나 강력한 도그마에 묶여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진화론자들이 이런 식으로 억지스럽게 꾸려가는 진화론을 어찌 과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과학이론은 과학자들이 검증하고 비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태에서 어찌 생물학자들 스스로가 진화론의 오류를 시정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가? 따라서 진화주의에 반대하는 우리가 이런 일을 맡아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과학이론은 검증에서 실패하면 폐기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을 이렇게 현대의 과학적 방법으로 검증해보면, 그것은 이제 오류를 도저히 부정할 수없는 19세기의 노래(가설)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자연선택론이 자연법칙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국 물활론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론이다. 다윈의 이론에 따라서 말하자면, 그의 진화론은 고대부터 내려온 자연발생론의 한 개 변종일 뿐이다. 그래도 현대의 진화론자들은 마이어의 교시대로 이런저런 새로운 이론을 덧붙이면서 누더기가 된 다윈의 진화론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화론이 부정되면 그들의 반창조주의적 무신론도 근거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다윈의 진화론은 종내에서 일어나는 다양성의 발현 곧 품종의 변화를 상위계층의 분류에까지 적용하려는 오류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진화론의 문제는 다윈을 반박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다윈이 미결의 장으로 남겨두었던 진화의 제일 원인말하자면 생명의 기원을 풀어낸 오파린(A. I. Oparin)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이론을 다루자면, 그것을 탄생시킨 배경이 되는 공산주의 유물론을 먼저 이해하는 수고를 아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론은 다윈의 진화론을 발판으로 성장한 것이고, 이것을 통과하지 않고는 오파린의 이론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지면의 제한 관계로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계속 논술하기로 하고 이 논문은 이것으로 끝을 맺고자 한다.

 

 

참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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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tl, Daniel L., Essential Genetics: A Genomics Perspective(5th), 양재섭외 역, 필수 유전학. 서울: 월드 사이언스, 2012.

Henry, John, 노태복 역, 서양과학사상사. 서울: 책과 함께, 2013.

Huxley, Thomas H., 이종민 역, 진화와 윤리. 부산: 산지니,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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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창조주이신가?”, 평택대학교 피어선 기념성경연구원 편, 11회 피어선 학술강좌(2013. 10),

               126-139.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19j3078b (검색: 2013. 7.23)

 

http://evolutionkj.wikispaces.com/Reproductive+Barriers (검색: 2013. 7. 24).

 

허 정윤

Huh, Jung Yoon

평택대학교 피어선 신학대학원

e-mail: djtelcome@hanmail.net

A series of theories which might be called "scientific atheism" had been published by Charles Darwin’s The Origin of Species, Carl Marx and Engels' works on materialism and Oparin’s The origin of Life. But this series of "scientific atheism" has been proven only academic arguments now by my verification of the theories. Then, these theories of "scientific atheism" are no more than 'variations' of spontaneous generation theories respectively in the World philosophical history. As "scientific atheism" has turned out to be a fallacy, it should be treated as empty idealism in the scientific societies. In this viewpoint, my verification will be explained in this assertion. But this paper covers only Darwin’s so-called biological evolution theory because of want of space. The other verification on two other theories would be issued in the next pap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