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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파린의 생애와 “생명의 기원” 사상에 대한 소고

heojohn 2020. 3. 30. 21:44

 

- 생명의 기원3판을 중심으로 

 

차례

 

1. 서론

2. 오파린의 생애와 사상적 배경으로서의 시대적 환경

3. 오파린의 생명의 기원에 대한 사상

3.1 오파린의 생명관과 그 기원에 대한 연구 방향

3.2 생명의 자연발생 이론에 대한 비판

3.3. 생명의 영원성에 관한 이론의 비판

3.4. 과학적 접근의 시도와 실패에 대한 논의

3.5. “최근의관념론과 진화론의 발전에 대한 논의

4. 결 론

 

Abstract

 

Oparin was undoubtedly a very famous scientist in the world. He approached the answer to the well-known but unsolved problem to men, the origin of life, by suggesting a revolutionary theory at his times. But it seems not coincidental in terms of the timing that his theory agrees perfectly with the communist dialectic materialism which has upset the Russian Empire. His theory made a considerable contribution to establish one-party dictatorship of the communist. As the rewards given to him from the Communist Party and the Government, he could enjoy the privilege and benefits all his life. Whether Oparin intended or not from the beginning, he may hardly be regarded as a pure scientist for this reason. Oparin's theory is very simple. Life on the earth is inevitably to arise at some stage by the law of matter, by which inorganic matter evolves into organic matter, more complicated organism at the next and a living body finally. This process, however, has not been fully proven in the scientific perspective. It is thus still in the stage of a scientific hypothesis. Nevertheless, his theory based on the dialectical materialism has many problems, because which thoroughly destroys the human religious tradition and the minimal cultural ethics system. The impersonality behind this theory has been revealed under the communist regime, and it is regarded that their reign had been disastrous in the history of the USSR. But there remain dangers in Oparin's theory, that the disastrous period may come again. For its followers are attempting to replace religion by it. Therefore religious people, especially Christians have to watch out for the Anti-Christ forces armed with this theory. To do so, all Christians need to study Oparin's theory and the background of the theory. Here lies the goal of this thesis.

 

 

\1. 서 론

 

오파린(Alexander Ivanovich Oparin, 1984-1980)생명의 기원, The Origin of Life in the Earth의 저자로서 유명하다. 그는 제정 러시아 시대에 태어나 소비에트연방공화국(USSR)의 시대에 살았으며, 세계적으로도 저명한 생화학자였다. 그는 평생 과학자의 길을 벗어나진 않았지만, 그의 이론은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정치 체제 확립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최초의 생명체의 출현 과정을 공산주의 이론인 변증법적 유물론에 입각하여 과학적인 체계화를 이룩해놓았기 때문이다. 이는 진화론의 원조라고 불리는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이 미해결의 장으로 남겨두었던 부분을 완성한 것이다. 그는 그의 이론을 계속 확장 선전하면서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에서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생명의 기원에 대한 많은 연구 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그의 이론을 증명할 인공 생명체를 그의 생전에 실험적으로 완성할 것을 꿈꾸었으나, 그런 꿈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86세까지 살다가 죽었다.

 

이러한 그의 생애에서 기독교적 관심이 모아지는 부분은, 정교회가 국교였던 제정 러시아에서 그의 어린 시절에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했으며, 그가 겪은 시대에서 그는 공산주의 유물론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무신론적 생명의 기원 이론을 과학적으로 정립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이론이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무신론자들에게 이용되었다는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과학이 주도하는 현대의 사상적 조류에 편승하여 그의 유물론적 진화 이론은 학계, 특히 과학계에서 종교를 배척하는 과학적 진리로 인식되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점점 확산되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에게 종교와 과학이 주장하는 진리 중에서 어느 것을 믿어야 할지를 선택하지 않으면 아니 될 상황에 처하게 만들었다. 그의 무신론적 생명 기원 이론은 각 종교의 교리에, 특히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적 교리에 치명적인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언제나 하나일 뿐이다. 진리에 대해 두 개의 대립되는 견해가 있다면, 우리는 어느 것이 진리인지 끝까지 추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리가 아닌 것을 믿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일차적으로 생명의 기원이라는 오파린의 저작들 중에서 국내에서 출판되었던 판본을 보게 된 기회에 오파린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의한 생명의 기원 이론, 다시 말하자면 화학진화론을 비판적으로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 뒤에 항상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2(1936년판)의 일본어 역본 및 제3(1957년판)의 일역본과 영역본을 입수하여 검토한 결과 생명의 기원에 대한 오파린의 사상적 배경을 추적해보지 않을 수 없다는 판단에 이르게 되었다. 왜냐하면 여기서 오파린의 학문적 연구의 사상적 추종이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와 레닌(Vladimir Lenin, 1870-1924), 그리고 스탈린(Joseph Vissarionovich Stalin, 1878-1953)에게로 점차 옮겨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데, 알다시피 이들은 모두 종교를 말살해야 한다는 공산주의 유물론을 창시하고 정치적으로 실천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오파린의 책들을 보면 서문과 앞부분, 그리고 결어 부분에서, 생명의 기원에 대해 그보다 앞서 나온 다른 이론들을 모두 비판하는 한편으로 그의 이론에 대해서는 과학적 타당성을 적극 옹호하고 있다. 그는 생명의 기원의 개정판을 내놓을 때마다 이 부분들의 내용을 조금씩 달리하고 진술의 분량을 늘려놓고 있다. 이러한 그의 의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생명의 기원에 대한 그의 이론이 최종적인 진리라고 주장함에 그 뜻을 두고 있는 것이며, 동시에 공산당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일치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그의 이론 자체보다 그의 이론이 나오게 된 생애와 사상적 배경을 먼저 탐색해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의 생명의 기원 이론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탐색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그의 이론은 과학적인 연구의 결과로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공산주의 소비에트의 정치적 환경에서 그의 생존본능에 의해 제안된 개인적 세계관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치적 환경이라고 하는 것은 공산주의의 기반 이론인 변증법적 유물론을 벗어나는 일은 반동분자로 몰려 처단될 것을 각오하지 않고는 할 수 없었다는 당시의 정치적 통제 상황을 말하는 것이고, 생존본능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조건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찾는 인간적 행동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그의 주저 생명의 기원에 나타난 진술들을 주자료로 채택하겠다. 왜냐하면 국내에서는 그에 관련한 다른 자료가 거의 없고, 러시아어 원문으로 된 책들은 구하기도 어렵지만 읽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파린의 생명의 기원에 관련해서는 일본에서는 번역된 것들이 많이 있고, 영어로 번역된 것들도 있다. 일본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과 적국이었던 관계로 1939년에 오파린의 생명의 기원1판을 번역 출판했던 출판사와 번역자가 탄압을 당한 사례까지 있을 정도였다. 이것은 1945년 패전 이전의 일본제국 시대였던 시대에 시행했던 사상검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파린에 대해서는 서구와 미국보다 오히려 일본이 더욱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고 자료도 더 많은 것은 놀라운 일이다. 어쨌든 오파린은 생명의 기원에 관련해서 여러 책들을 출판하였는데, 이런 판본들을 보면 한 결 같이 서문과 결론, 그리고 본문 앞 장들에서 그의 유물론적 사상을 피력하고 있다. 여기서 나타난 그의 주장은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에서 유물론이 과학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승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오파린의 생애와 그의 사상과 그것의 형성에 관련된 자료들을 논의해보기로 한다.

 

2. 오파린의 생애와 사상적 배경으로서의 시대적 환경

 

오파린이 모스크바 인근의 우글리치에서 출생하던 1894년에 로마노프 왕조 시대의 러시아 제국에는 니콜라이2(1868-1918, 재위 1894-1918)가 새로운 황제로 등장했다. 이전까지 농업 국가에 머물고 있었던 러시아는 알렉산더 2(1818~1881, 재위 1855-1881)에 의해 서구의 앞선 문화와 산업 체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이를 위해 1861년에 농노해방령을 선포하였다. 그러자 농노들이 새로 들어선 공장에서 일하는 공장 노동자들로 변신하면서 새로운 문제들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마르크스주의와 프랑스의 혁명사상이 러시아에 들어오게 되는 것도 당연한 결과였다. 그동안에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지에는 공업이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봉건제도에서 해방된 농노들이 처우개선, 나아가서 완전한 자유인의 신분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알렉산더2세는 이것까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봉건사회를 개혁하려는 사람들은 1881년에 알렉산더2세를 암살하고 말았다. 그런데 알렉산더 2세는 재위 동안 제국의 영토를 중앙아시아까지 확장하였고, 남쪽으로 카프카스와 카자흐스탄 및 아랄해까지, 동쪽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와 베링해를 건너 알라스카까지 세력을 확장했던 인물이다. 그가 암살되자 그의 아들 알렉산더3세가 그의 뒤를 이어 제위를 물려받았으나, 그는 더 이상의 개혁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최대 업적은 1891년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착공한 것이었다. 그는 1894년까지 통치하다가 죽었고 그의 아들 니콜라이2세가 제위를 물려받았다. 바로 이 해에 오파린이 태어난 것이다.

 

오파린의 유년시절에 러시아에는 피의 혁명을 위한 세력이 잉태되고 있었다. 1898년에 사회민주노동당이 발족하여 러시아제국의 전복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파린이 9세 때(1903)에 그가 살았던 마을에는 중등학교가 없었으므로 그의 교육을 위해 가족들은 모스크바로 이사했다. 한편 사회민주노동당은 곧 유산자 시민 계급을 중심으로 부르주아 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멘셰비키와 노동자와 농민 중심의 정부를 만들고자 하는 볼셰비키의 두 파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투쟁 끝에 러일전쟁의 기회를 잘 이용한 볼셰비키가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볼셰비키는 1904년 일본이 선전포고도 없이 러시아 극동함대의 주둔지 뤼순군항(旅順軍港)을 공격함으로써 발발한 러일전쟁(1904-1905)을 세력확장의 기회로 삼았다. 볼셰비키는 전쟁의 주원인과 무대가 된 한반도 인근에서 러시아가 연전연패하자, 그 때문에 국내에서 불만세력으로 등장한 노동자와 농민들을 시위대로 동원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피의 일요일로 불리는 1905122일 일요일, 볼셰비키가 주도하는 약 14만 명의 시위대는 황제에게 의회정치를 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니콜라이2세는 오히려 무장군인들을 동원하여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에 반발한 시위대는 파업으로 맞서면서 노동자 협의체인 소비에트를 조직했다. 물론 이를 주도한 것은 볼셰비키였다. 그러나 이것은 뒤에 일어날 공산주의 세력의 본격적인 등장을 예고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동안에 오파린은 1912년에 제2모스크바 체육학교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국립대학에 입학하여 제약회사에서 일하면서 버는 돈으로 공부하고 있었다. 이때의 제약회사 근무 경력은 후에 오파린의 인생에 중대한 계기를 만들어주게 된다. 모스크바국립대학교에서 식물생리학을 전공하면서, 그는 다윈에 정통했던 러시아의 식물생리학자 K. A. 티미리야제프의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러시아는 1914년에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문제로 심각한 진통을 겪게 되었다. 황제가 이 전쟁에 참전할 것을 결정하자 볼셰비키는 극렬하게 반대 투쟁을 전개했다. 볼셰비키가 내세운 주징은, 전쟁에서 희생되는 것은 결국 노동자와 농민들뿐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에 노동자와 농민들이 대거 호응하여 들고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이들을 초기에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17년에 오파린은 모스크바국립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들어갔다. 그는 이때부터 식물 효소에 관한 글을 전문지와 대중지에 발표하면서 연구를 계속했다. 그러나 그의 주된 관심은 생명의 기원에 있었다. 한편으로 이 해에 일어난 “4월 혁명은 로마노프왕조의 러시아제국을 전복시켰다. 모든 것이 새롭게 바뀌어야 했다. 이때 멘셰비키가 먼저 주도권을 잡고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볼셰비키의 의장으로 선출된 레닌은 러시아 사법시험에서 수석을 한 인물이었다. 레닌은 멘셰비키를 비판하고, “4월 혁명의 테제” 10개항을 발표했는데, 이는 사유재산의 금지와 토지 국유화, 그리고 소비에트”(노동자 협의회)에게 모든 권력을 이전할 것 등이었다. 멘셰비키와의 권력투쟁은 처음에는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레닌은 다시 해외로 피신해야 했다. 그러나 레닌은 비밀리에 입국하여 적위대를 조직하여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117일에 제2차 소비에트 대회를 열고 노동자, 농민, 군인 대표로 구성된 소비에트 정부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이를 러시아력에 의해 “10월 혁명이라고 하는데, 이때 구성된 혁명정부에서는 레닌을 수반으로 하여 트로츠키, 스탈린이 그 다음 가는 서열을 차지했다. 그동안에 소비에트 정부에 반대하여 다시 황제를 세우려는 백군들이 일어났으나, 소비에트의 적군들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레닌은 유배지를 전전하던 니콜라이2세와 그의 가족들의 처형을 직접 명령했다. 이들은 1918년에 사회민주노동당을 해체하고 마르크주의 소비에트 공산당을 조직했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한 이들이 실시한 정책은 성공하지 못하여 전시 공산주의 시기라고 불리는 참혹한 경제 현실을 초래했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던 1918년에 오파린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이 마련되고 있었다. 대학시절에 학비를 벌기 위해 제약회사에서 일했던 경력 때문에 그는 러시아 전국화학공업노동자연맹의 대의원이 되었고, 거기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러시아 출신으로서 제정 러시아 시절(1885)에 망명하여 제네바에서 의학과 농화학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 알렉세이 바흐(Aleksei N. Bakh, -1946)의 협조를 요청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바흐는 이미 1917년 귀국하여 혁명정부에서 국가경제계획위원회 화학분과위원회 조직책임을 맡아 있었다. 오파린은 바흐를 곧 만났으며, 바흐는 이때부터 오파린을 그의 휘하에 두었다. 그는 오파린의 자리를 그가 조직한 국가경제계획위원회 화학분과위원회(1919-1922)와 그가 설립한 중앙화학연구소(1921-1925)에 만들어주었다. 1927년에 오파린은 그의 모교에서 생화학 교수가 되었다. 바흐가 공산당에 입당하고 정부에서 승승장구하면서 그의 충복이 된 오파린에게도 같은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다. 바흐는 그가 책임자로 있는 곳에는 언제나 오파린을 부책임자로 임명했다. 오파린이 이토록 정치적인 인물인 A. N. 바흐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될 것이다.

 

1922년에 오파린은 러시아식물학회에서 생명에 관한 그의 이론을 처음으로 소개했다. 한편으로 정권을 잡은 공산당은 이 해에 제헌의회를 구성하기 위해 선거를 실시했으나 겨우 4분의 1에 불과한 의석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이런 결과에 놀란 공산당은 의회를 해산하고 공산당이 주도하는 소비에트만이 유일 합법정부라고 선언하였다. 반대파에 대해서는 체카라고 하는 비밀경찰을 동원하여 무자비한 숙청을 단행하였다. 이렇게 하여 1922년에 사회주의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USSR: Union of Socialist Soviet Republics)이 시작되었다. 소비에트는 정식 국가명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러시아는 노동자의 나라가 된 것이다. 오파린의 생명의 기원에 관한 새로운 이론도 유물론 공사주의 정권 치하에서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이 될 것이다.

 

오파린이 발표한 이론은 1924년에야 소책자로 처음 발간되었으나 아직까지는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해에 병약했던 레닌이 죽고 경쟁자 트로츠키를 물리친 스탈린의 손으로 정권이 넘어갔다. 스탈린은 레닌이 전시공산주의체제를 벗어나기 위해 실시했던 자본주의적 신경제계획(New Economic Plan) 정책을 버리고 자신의 공산주의적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의 집권은 1953년까지 이어지는데, 그동안 소비에트공화국연방에서는 이른바 피의 숙청이 끊이지 않는 시기였다. 스탈린의 눈에 벗어나는 사람은 처형 아니면 수용소에 끌려가야 했다. 그를 향해 만능의 천재”, “영원한 태양이라는 등의 칭송을 한 것도 그 시대 사람들의 생존본능의 발로이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한편 1929년에는 영국의 생화학자 할데인(J. B. S. Haldane, 1892-1964)도 초기 지구의 냉각열과 자외선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겨난 따뜻하고 묽은 수프(a hot, dilute soup)에서 생명이 기원했다는 이론을 발표했다. 그러나 할데인의 이론도 논증과 설득력이 빈약했던 탓으로 역시 별 주목을 끌지 못했다. 오파린의 이론이 새삼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그의 지구에서의 생명의 기원1판이 나온 1936년부터였다. 이 책은 그의 초기 이론을 공산당의 노선을 따라 변증법적 유물론에 기초하여 보완했을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국제적으로 진행된 우주탐사 연구 성과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오파린은 공산당의 노선에다 과학적 증거를 그의 이론에다 끼어 맞추었던 것이다. 그것은 자연발생론을 공격하고 다윈의 진화론을 변증법적 유물론에 기초하여 확장하는 것이었다. 그의 책의 후속 개정판들을 보면, 오파린은 유전자가 생명의 기원과 진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주장들을 비난하고 물질대사가 생명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논제가 점점 공산당을 위한 선전성을 드러내는 경향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과학에 도전적인 명제를 제시하는 공헌을 하였다. 왜냐하면 지구에 생명이 없던 때에 가정적이긴 하나 물질대사를 하는 생명체의 출현을 그럴 듯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오파린이 제안한 생명의 기원 이론이 곧 현대과학의 문제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한편 유전학자이며 농학자인 리센코(Trofim Denisovich Lysenko, 1898-1976)1940년에 소련과학아카데미 유전학위원회 책임자가 된 것은 오파린에게 열렬한 후원자 한 명이 더 늘어나게 되는 일이었다. 그런 중에 1941년 스탈린의 가혹한 숙청의 대가로 약화된 공산당 정부는 독일의 침공을 맞아 제2차 세계대전에 휘말려들게 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연합군이 승리한 덕분에 소련은 승전국 대열에 끼일 수 있었고, 미국의 원조도 얻을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1946년에 오파린은 그동안 그를 지극히 돌봐주던 바흐를 잃었다. 그동안에 오파린은 리센코에게 협력하여 공인된 멘델의 유전학 이론을 부정하고, 이미 오류로 판명된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을 지지하였다. 그런 덕분인지 오파린은 1948년에 소련과학아카데미의 생물학 책임자가 될 수 있었다. 리센코로 인하여 잘못된 농업정책이 수립되었고, 농민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는 일이 벌어졌다. 이를 과학사에서는 리센코이즘(lysenkoism)이라고 한다. 오파린은 이런 리센코에게 협력한 것이다. 또한 오파린은 그의 생명의 기원 이론을 스탈린의 인간개조 정책에 부응하는 이론으로 만들어 바쳤다. 공산당 정책 이론을 이렇게 뒷받침해준 대가로 스탈린과 공산당이 이들에게 특권을 부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사실은 알렉 노브의 소련경제사에도 언급되고 있다.

 

그후 1948년에 릐센꼬는 당조직의 도움으로 모든 비판자들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의 구상이 농장들에 강제된 반면 진정한 유전학자들은 쫓겨났다. (릐센꼬는 일종의

사이비 돌팔이 과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구상은 농업의 어려움으로부터 손

쉽게 탈출하는 길을 모색함으로써 오랜 기간 당관리들에게 큰 호소력이 있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언급이 뒤따르고 있다. “이 시기에 정치 지도자들은 과학과 예술의 각 분야 정상에 () 스딸린을 앉히려 하였다. 릐센꼬가 유전학을 파괴하는 것이 용인되거나 격려받은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였다.” 이런 일의 결과로 인해 소련의 과학과 농업의 발전은 심각하게 정체되었다. 이런 사태에도 불구하고 1951년에 오파린은 러시아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 연합(Russian Soviet Federated Socialist Republics)의 최고 소비에트에 임명되었으며, 1955년에는 의장이 되어 1959년까지 활약했다. 그러는 사이에 스탈린이 죽고 1953년에 후르시쵸프가 등장하자 리센코도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수백 명의 과학자들은 청원서를 만들어 과학아카데미 생물학 책임자 오파린을 축출하라고 요구했다. 1956년에 오파린은 책임자 자리에서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으나 평생 정회원 자격은 유지했다.

 

오파린은 리센코와 관련된 일로 인하여 소련 과학자들로부터 불신임을 받았지만, 국내에서 공산당 정권으로부터 비호를 받지 못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국제적으로도 그는 1950년에 세계평화위원회(World Peace Council) 소련지부를 대표하여 1959년까지 일했으며, 다른 국제과학기구 및 정치기구에서도 활동했다. 그는 1955년에 일본 생화학회의 초청으로 도일하여 일련의 강의를 진행했는데, 이 강의는 일본에서 생명의 기원과 생화학이라는 이름으로 편집 출판되었다. 1957년에 그의 생명의 기원3판은 일본어로 번역 출판되었고, 이 해에 그는 일본을 두 번 째 방문했었다. 그리고 같은 해에 그는 모스크바에서 16개국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생명의 기원에 대한 최초의 국제회의를 조직했다. 그는 1970년에 프랑스의 퐁타무송에서 새롭게 조직된 국제생명기원연구학회(The International Society for the Study of the Origin of Life) 회장에 선출되어 1980년에 죽기까지 활동했다. 1970년대를 지나면서 그의 주된 활동은 A.N. 바흐연구소에서 많은 연구원들에게 생명의 기원 문제를 연구하는 일을 지도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생전에 그의 이론이 증명되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잘 알려진 생명의 기원을 평생 동안 수정 확장하고 보완하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 외에도 식물세포 안에서의 효소반응과 외부적 요인, The External Factors in Enzyme Interactios Within a Plant Cell, 생명, 그 본질, 기원 그리고 진화, Life, its Nature, Origin and Evolution, 생명의 기원과 진화론의 역사, The History of Theory of Genesis and Evolution of Life등이 있다. 그 외에 공저로 출판한 책들도 있다. 그가 70세 생일 기념판으로 만든 진화와 공업적 생화학의 문제들, Problems in Evolutionary and Industrial Biochemistry에서는 과학과 산업의 협력문제를 다루고 있기도 하다. 그는 식품생산 공정이 생체촉매 작용과 같은 기초를 가지고 있음을 제시하여 소련의 공업적 생화학의 발전을 이끌기도 했다.

 

그는 소련 공산당 정부로부터 과학적 공훈을 인정받아 많은 상을 수상했는데, 유명한 것으로는 사회주의 노동자 영웅(1969) 및 레닌상(1974), 로모노소프 금메달(1979) 등이 있다.

 

3. 오파린의 생명의 기원에 대한 사상

 

우리는 이제까지 오파린이 어떤 시대적 환경에서 살았으며, 그가 과학자로서 어떻게 활동을 했는지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제부터는 그의 생애와 저술에서 드러난 사상을 추적해보기로 한다.

 

3.1 오파린의 생명관과 그 기원에 대한 연구 방향

 

오파린은 생명을 물질의 화학적 현상에 다름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따르는 그의 관점에 의하면, “생명은 본질적으로는 물질이므로 생명체는 비생명체와 다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지구상에서의 생명체는 원시 지구에 있던 물질의 변증법적인 진화, 다시 말하면 물질의 화학적 반응과 그 결합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나타난 결과물일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물질운동의 특수한 형태로 발생하는 것이며, 다만 생물에게만 나타나는 새로운 질()”일 뿐이다.

 

오파린은 이러한 생명체의 발생이 돌연하게일어났던 것은 아니며, “물질의 끊임없고 아주 오랜 변화의 길을 거쳐 형성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이러한 생명의 기원 문제에 대해서는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반듀링론자연변증법에서 올바른 과학적 연구 방향을 결정했다고 쓰고 있다. 그는 또 레닌의 말을 인용하여 지구상에 인간과 그 어떤 생물도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할 수도 없었던 상태의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한 다음에는 또, “그리고 나서 식물과 동물이 발생했다는 것, 생물계의 진화 결과 일정한 종류의 원숭이가 출현하고, 이러한 것이 전부 일어난 후에 잇따라 인간의 출현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이렇게 자연의 진화가 일어났던 것입니다는 스탈린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이것은 생명의 기원에 대한 그의 사상이 엥겔스와 레닌과 스탈린의 사상과 일치하고 있음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 따라서 생명의 기원에 관한 그의 연구 방향이 변증법적 유물론 창시자와 그 이론을 따르는 소련 공산주의 정권 시대의 권력자의 사상과 노선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있음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오파린은 그가 생명의 기원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초기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코마로프(의 저작 식물의 기원을 주목해야 한다고 언급한다. 그는 코마로프가 생명은 영원하며, 위성간의 공간에서 지구상의 우리들에게 생명의 종자가 날아왔다는 학설을 연구한 결과 그것을 부정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오파린의 입장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또 코마로프가 생명의 기원의 생화학적 학설, 즉 생명의 발생은 물질의 - 일반적 진화, 질소의 탄소화합물의 긴 계열의 진화에 있어서의 - 연속적 단계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라고 라고 하는 깊은 확신이야말로 유일하게 과학적인 것이다고 한 말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그는 소련의 과학자들의 유물론적 이론을 소개하는 가운데 특히 그의 후원자가 되었던 리센코가 19488월대회에서, 비과학적 관념의 포로가 되어 있는 미국이나 서유럽의 많은 과학자들이 현재 생물학의 발전을 돌아보지 않고 생명 발생의 문제를 인간의 두뇌로는 도달할 수 없는, 저주받은 해결 불가능한 문제’”로 인정하고 있음을 비판했다고 하면서, “생물학의 입장에 대하여라는 그의 강연을 소개하고 있다. 이 강연의 원고 논문은 앞에서 지적했듯이 스탈린이 사전에 수정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이 과학자가 그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는, 또는 줄 수 있는 유력한 공산주의자들의 사상과 노선을 따르고 있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음은 그의 사상이 이미 변증법적 유물론에 따르고 있음을 스스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즉 오파린은 어쩔 수 없이 그 시대의 공산주의 유물론 사상의 지배적 조건과 환경의 테두리 안에서 과학을 연구했다는 것이다.

 

3.2 생명의 자연발생 이론에 대한 비판

 

오파린에게는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벗어나는 이론은 모두 비과학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는 고대로부터의 생명 기원에 관한 이론은 모두 오류라고 비판한다. 그에게는 세계의 다양한 민족에게서 종교적으로 진술되고 있는 생명의 자연발생론은 모두 잘못된 믿음인 것이다. 이런 믿음은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철학적 이론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성립된 명백한 사실이기도 했었다. 오파린에 의하면, 이러한 자연발생론은 잘못된 경험주의자들에 의해 20세기까지 이어졌다. 어쨌든 자연발생론은 자연을 잘못 관찰하고 잘못 이해한 사람들에게서 나온 잘못된 믿음일 뿐이다. 그래서 오파린은 고대로부터 제기된 모든 자연발생론을 검토하고 이를 차례로 반박하고 있으나, 반면에 부분적이라도 유물론적인 이론을 주장한 철학자에 대해서는 매우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의 사상적 궤적을 알아보자는 뜻에서 그가 소개하고 비판한 자연발생론의 역사적인 발전 단계와 유형을 살펴보기로 한다.

 

고대 중국에서는 따뜻한 습한 기후에서 자라는 대나무 잎에서 진딧물이 저절로 생겨난다고 믿었다. 그리고 고대 이집트에서는 나일강의 범람 뒤에는 점토층에서는 개구리, , 두꺼비, 쥐 등이 태양열에 의해 생겨난다고 믿었다. 또한 인도, 바빌론, 그리고 이집트의 자연발생론은 종교적 신들의 창조적인 의지의 행위에 연결되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희곡 속에서도 나타나고 있으며, 심지어는 문화적으로 진보한 오늘에서조차 평범한 사람들의 믿음에 살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비주의적인 자연발생론을 뛰어넘은 것은 유럽 문화의 근원인 그리스에서였다. 철학의 원조로 불리는 탈레스(Thales, BC. 624-547)자연의 요체와 생명의 기원이란 문제를 신비적인 틀을 넘어 초보적인 유물론자의 입장에서 접근하였다.” 탈레스, 그리고 아낙시만더(Anaximander)와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같은 밀레시안 학파는 자연발생설의 개념을 개별 생명체의 자가 창조로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엠페도클래스(Empedocles, BC. 485-425)에 의해 발전되었으며, 데모크리토스(Democritus, BC. 460-370)에게서 분명한 모습을 드러냈다. 루크레티우스(Lucretius Carus)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보면, 에피큐로스(Epicurus, BC. 342-271)의 원자론은 원자의 운동의 원인은 그 자체에 있는 것이지 어떤 것에 의해 주도된 자극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만사에 신들이 간섭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플라톤(Plato, BC. 427-347)물질은 불멸의 영 혹은 ‘Psyche’의 주입을 통해 생명을 얻는다고 했던 주장을,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384-322)는 생명체는 수동적 원리인 실체”(matter)와 능동적 원리인 형식”(form)의 결합으로 생겨나며, “형식은 영혼(entelechy)에 나타나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실체는 생명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입받는 것이다. 또한 그는 모든 동물은 교미에서뿐만 아니라 부패한 흙과 배설물로부터도 유래한다는 것이 사실이다고 주장했다. 그의 견해는 역사적으로 생명의 기원 문제에 있어서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자들 대부분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전적으로 공유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스토아 학파(Stoics)는 동물과 식물이 정신(pneuma)의 속성인 낳는 힘의 활동으로 생겨난다고 가르쳤다. 이 견해는 여행가 포세이도니우스(Poseidonius)냐를 비롯한 철학자들과 동서양의 후기 스토아 학자들에게 널리 인정되었다. 그러나 3세기 들어 플로티누스(Plotinus)에게서 비롯한 신플라톤주의는 생명체가 땅으로부터 유래하는데, 이것은 생명을 부여하는 영에 의한 물질의 활성화의 결과로 설명하였다. 그의 사상은 현재(오파린의 시대)의 생기론자(vitalist)에게까지 생명력”(life force)의 개념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오파린은 기독교와 교부들에 대해 상당한 오해와 편견을 가지고 비판한다. 성경의 자연발생론은 이집트와 바빌론에서 차용한 것이며, 기독교도는 이것을 교리로 삼는다. 4세기에 동방교회의 성 바실(St. Basill)의 견해에 의하면, 자연발생의 모든 경우는 신적인 명령에 의해 세상의 창조로부터 오늘날까지 줄어들지 않는 힘으로 계속해서 일어났다. 그는 6일간의 천지창조, Hexaemeron에서 그들의 선조로부터 대를 이어 출산되는 생물이 있다면, 우리는 지금 땅 자체로부터도 태어나는 것들을 본다고 썼다. 서방교회의 어거스틴(St. Augustine)은 하나님은 생명체를 씨앗에서부터 태어나게 할 수도 있고, 혹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씨앗이 깃든 비활성의 물질로부터 태어나게 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의 견해는 신플라톤주의와 일치하며 서방교회의 교리가 되었다.

 

중세에서도 철학은 신학의 시녀’(ancilla theologiae)에 불과했으며, 과학은 더 낮은 차원에서 철학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bertus Magnus, 1193-1280)는 생명체는 부패과정에서 별들의 '활성화력'(animating force)에 의해 생겨난다고 했으며, 그의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어거스틴과 함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교회에 받아들인다. 아퀴나스는 땅에서는 부패한 것들에서 태양열에 의해 동물들이 자연발생하며, 지옥에서는 죄의 썩은 것에서 벌레들이 나와 죄인들을 괴롭힌다고 했다. 때로는 악마들이 계략적으로 해충을 만들어 사람들을 괴롭힌다고도 했다. 이런 그의 가르침은 중세에 해충과 악마를 퇴치하기 위한 주술과 퇴마 의식을 거행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이런 신비적인 자연발생설에 기초하여 중세에는 나무에서 거위가 생겨난다는 거위나무의 전설, 야채에서 양이 태어난다는 야채 양의 이야기, 파라켈수스(Paracelsus, 1498-1541)가 퍼뜨린 난쟁이를 연금술적인 방법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 등이 수도 없이 널리 퍼졌으며, 괴테(Johann Wolfgang Goethe, 1749-1832)는 그의 비극 파우스트, Faust에서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의 박사 가운에서 나오는 곤충들이 그를 아버지로 부르는 이야기를 썼다.

 

그러나 16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특히 17세기에는 망원경과 현미경의 발명에 힘입어 자연현상에 대한 관찰과 이해가 정확해지기 시작했다.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1475-1543), 브루노(Bruno, 1548-1600), 그리고 갈릴레오(Galileo, 1564-1642)는 프톨레미 체계(Ptolemic System)의 잘못된 천문지식을 지적하고 나섰다. (이것을 서양 과학사에서는 과학혁명이라고 부른다: 필자 주). 그러나 아직 생명에 관한 문제에서는 저명한 내과의사 반 헬몬트(van Helmont, 1577-1644)와 혈액순환 이론을 세운 하비(Harvey, 1578-1657), 그리고 철학에서의 귀납법을 제안한 영국 최초의 유물론자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조차도 자연발생론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의 철학에 의한 기계적인 우주법칙에서는 생명의 발생이 영적인 원리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자연발생은 우주 기계의 자연적인 자기형성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인데, 이는 어떤 환경조건이 충족되면 어김없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환경조건인지에 대해서는 인간이 조사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프란체스코 레디(Francesco Redi, 1626-1697)의 실험은 획기적인 시도였다. 그는 구더기는 썩은 고기에서 자연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알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오랜 전통은 잘못된 것이라도 쉽게 논박되지 않는다는 속설을 증명하듯이, 오동나무 혹에서 발견되는 구더기는 초목의 즙으로부터 발생한다고 인정하고 있다. 이 잘못된 견해는 뒤에 발리스네리(Vallisnerl, 1661-1730)에 의해서 반박되었다. 그러므로 레디의 때까지는 아직 신비주의적인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다.

 

더구나 반 레벤후크(Antony van Leeuwenhoek, 1632-1723)는 자작 현미경 관찰을 통해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미생물체를 발견하였음을 보고하면서 자연발생 이론은 18세기와 19세기에 더욱 강화되었다. 당시 아직 자연발생론을 부정하지 못하던 시대에 현미경으로 보면 아주 작은 생물인 세균이 세상의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자연발생론은 이렇게 자명한 자연현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문제는 다만 그 원인이 영적인지 물질적인지를 놓고 논쟁할 뿐이었다. 여기서 오파린은 라이프니치(G. Leibnitz, 1646-`716)의 단자론을 언급하면서 추상적인 단자(monad)를 실제적인 균(germ)으로 비유하고 있다. 오파린에 의하면 라이프니츠도 영적인 자연발생론자다. 뷔폰(G. L. Buffon, 1707-1788)과 그의 친구로서 로마 가톨릭 사제인 박물학자인 니드햄(J. T. Needham, 1713-1781)은 생명이 부여된 물질입자가 결합 또는 해체됨으로써 발생과 죽음이 반복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견해는 사제 스팔란자니(Spallanzani)에 의하여 반박되었으며(1765), 10년 후인1775년에 러시아 과학자 테레코프스키(Terekhvskii)는 복잡한 구조를 가진 생명체가 비활성 물체로부터 우연하게형성될 수 있다는 자연발생은 어떤 조건 하에서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당시의 과학계에서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런 자연발생의 원리는 독일 관념철학자들에 의해서 계승되었다. 칸트(I. Kant, 1724-1851)는 유기체의 내적 발달의 원인이 형이상학적이라고 했으며, 헤겔(G. Hegel, 1770-1831), 쉘링(F. Schelling, 1775-1854), 오켄(L. Oken, 1779-1851) 등은 땅과 바다 또는 그 점액질에서 식물과 동물이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연발생론을 검증하기 위한 실험들도 이어졌는데, 프랑스의 게이 루삭(J. L. Gay-Lussac, 1778-1850)이 실시한 산소의 역할 실험, 슈반(T. Schwann)과 슐츠(Schulze)1836년에 각자 실시한 무균 공기의 실험, 1853년에 있었던 하이델베르그의 교수 쉬로더(Schroder)와 더쉬(Dusch)의 공기 필터 실험 등이 있었으나, 불완전한 기구의 사용으로 미생물의 자연발생을 막지 못했다. 1859년에 출판한 포쉐(Pouchet)700페이지 밀짚 탕액 실험논문은 오히려 앞서 언급한 니드헴의 자연발생론을 더욱 발전시키고 있었다 (한편으로 이 해에는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판되었다: 필자 주).

 

그러나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1861년에 자연발생론 비판의 출판과 1862년에 실시된 ‘S자형(또는 백조목) 플라스크 실험을 통해 이러한 자연발생론에 대해 종지부를 찍었다. 오파린에 의하면, 이것은 천문학에서 코페르니쿠스가 이룩한 업적에 비견될 수 있으며, “생물학에서의 완전한 혁명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오파린은 다윈을 끌고 와서 그의 진화론이 생물학의 관념론적 경향인 활성론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였다고 쓰고 있다. 역사적으로 다윈의 진화론인 종의 기원이 발표된 해는 1859년이고, 파스퇴르의 자연발생론 비판이 출판된 것은 1961년이었으며, 백조목 플라스크 실험은 1862년에 있었다. 자연발생론의 오류를 논문으로 비판하고 실험으로 입증했던 파스퇴르의 업적을 생물학의 혁명이라고까지 찬양했던 오파린이, 3년 전에 있었던 다윈의 진화론을 끌어 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모순을 야기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서양 과학계의 통념으로서는 다윈의 진화론과 파스퇴르의 생물속생설은 상반되는 개념으로 보기 때문이다. 두 과학자를 같은 계열에 세우는 것은 파스퇴르를 진화론자에 끌어넣자는 속셈을 드러내는 것이다. 파스퇴르의 실험은 썩는 물질로부터 벌레가 발생한다는 관념은 타파했으나 유물론적 진화론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파스퇴르가 무기물에서 유기물로 진화하는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 언급한 사실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오파린은 보로딘(Borodin)의 말을 인용하여, 이것으로 진화론이 완전한 승리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다윈주의는 하등 육체로부터 고등 육체로 발달하는 것을 유물론적 설명으로 제공할 수는 있지만, 인간의 정신은 그 발달의 핵심(entelechy, 생명력, 세포적인 영 등)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문제를 제기한 것은 드리쉬(H. Drisch)와 우엑스컬(Uexcul) 같은 관념론자들에 의해서였다. 버탈란피(L. Bertalanffy)는 유기체가 갖추어야 할 체계의 자가 형성 가능성을 부인하였다. 리프만(E. Lippman)은 형이상학적으로 보이는 생명의 요체를 이해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관념론자들은 진화론이 생명의 기원 문제를 풀 수 없다고 주장했다.

 

오파린은 이에 반박하여 엥겔스의 말을 끌어내어 비판하고 있다. “자연으로 하여금 수천 년이 요구되는 일을 어떤 냄새나는 물의 도움을 받아 24시간 내에 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어리석다.” 왜냐하면 생명의 등장으로 이끈 것은 갑작스런 자연발생이 아니라 물질의 오랜 진화였기 때문이다.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 중에는 다윈의 친구 헤켈(E. Haeckel)도 포함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생명이 몇 가지 특정한 법칙을 기반으로 자연적으로 생겨났든, 아니었든, 이는 초자연적인 힘들에 의하여 생산되어 왔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스티안(Bastian)의 실험이 가장 심각하고 재미있었다. 그의 밀짚 탕액에서의 포자실험은 1894년 러시아 과학자 티미리아제프(K. A. Timiryazev)에 의하여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앞에 나온 보로딘도 티미리아제프의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오파린은 그가 접수한 자연발생의 사례를 증언하는 편지들에 대해서도 모두 아마추어적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또한 1938년 핀란드 과학협회 저널에 앞의 니드햄과 스팔란자니의 논쟁을 판단하기 위하여 실험한 결과 니드햄의 이론이 맞다고 결론지은 엘프핑(Elfving)의 논문이 실렸는데, 오파린은 이것을 살균 용액의 사용이 잘못되어서 나온 오류라고 비판했다.

 

오파린에 의하면, 이렇게 잘못된 자연발생 이론들은 모두 자연이나 실험실에서 생물체를 잘못 관찰하였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구분하면, 레디 이전에는 벌레와 기생충을 잘못 관찰하면서 오류를 저질렀다. 파스퇴르 이전에는 박테리아를 불완전하게 실험한 결과이고, 현대에는 미생물과 바이러스를 잘못 이해함으로써 자연발생론을 부활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그리하여 오파린은, 오늘날에는 자연발생 이론은 역사적인 흥미꺼리 이야기 이상이 되지 못한다고 했다.

 

3.3. 생명의 영원성에 관한 이론의 비판

 

고대인들에게는 생명은 영원하다는 믿음이 있었다. 이제까지 보아온 바와 같은 자연발생론은 생명의 영원성 이론과 배치되지 않는다. 오파린에 의하면, 관념론자들은 이 두 가지를 결합시켰으며, 포자(panpermia)이론에서 특별히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리스 철학자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BC. 500-428)가 처음 사용한 이 용어는, 어디에나 편재하는 천상의 균”(spermata)이 비옥한 점액질의 땅에서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것을 뜻한다. 어거스틴은 신비로운 씨앗들”(oculta semina)이 가득 찬 세사에서 유리한 환경이 되면 각종 생물이 땅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이와 같이 후대 스콜라 철학자들의 성장의 영”(anima vegetativa), 파라겔수스와 반 헬몬트의 “Arche”, 또는 생명력이라는 관념적인 말은 로마 철학자, 기독교 사제들, 중세학자, 그리고 근대 자연철학자들도 쓰고 있다. 17세기 중엽의 아타나시우스 키르케(Athnasius, Kircher)의 포자이론은 생명의 균이 모든 성분 속에 있는 것으로 진술되고 있는데, 이는 라이프니츠의 표현에서도 나타나며, 니드햄에게서는 부패물질에서 생명체를 만들어낸다. 포쉐는 유기물질의 분자로 이미 들어가 있던 생명력이 자연발생의 원인이라고 했다. 그러나 자연발생론이 19세기 후반으로 가면서 쇠퇴하고 파스퇴르에 의해 건널 수 없는 장벽에 막혔을 때, 관념론자들은 탈출구로서 생명의 영원설을 전면으로 끌어왔다. 그러나 이런 관념적 이론은 유물론과는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19세기와 20세기 초에도 생명 영원성에 대한 가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저명한 영국의 물리학자 톰슨(William Tomson, 1824-1907; 1866년 작위 수여 후, Sir Kelvin이 됨)이 생명의 영원성을 인정했고, 독일 생리학자 헬몰츠(H. Helmholtz)가 그랬고, 프랑스 식물학자 반 티겜(van Tieghem)도 그랬다. 러시아 생화학자 코스티체프(Kostychev)는 그의 지구에서 생명의 출현에 관하여에서 모든 사람들은 생명이 단지 그 형체만을 바꿀 뿐이며, 썩은 것으로부터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오파린은 생명력을 부정하는 유물론자의 입장에서 이들이 어떻게 생명 영원성을 동시에 부정할 수가 있을까, 하고 질문한다. 이 문제는 엥겔스가 생명력생성하는 원리로 해석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어떤 조건이 충족되면, 생명체가 예외 없이 나타난다는 전제는 생명의 영원성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비활성 물질로부터 유기체가 생성될 수 있다는 개념과 유기체는 유기체로부터 상속되는 어떤 생명적 요소가 항상 있다는 개념 사이에는 공통점이 없다. (그러나 오파린은 파스퇴르를 유물론자로 보려고 했다-필자 주). 그러나 콘(F. J. Cohn, 1828-1928)의 새로운 생명을 일으키는 신성한 불꽃은 본질적으로 물질적인 표현이다.

 

러시아 지구화학자 베르나드스키(V. Vernadskii, 1863-1945)는 생명체에 존재하는 동위원소 구성과 배열이 보통의 온도와 기압의 땅에서도 변화하는데 비하여, 비생명체에서의 이런 변화는 오직 고압과 고온상태에서만 변형적으로 형성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자연발생론은 파스퇴르에 의해 부정되었다고는 해도, 그에게는 그것만으로 간단하게 끝낼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 최초의 생명체가 저절로 생겨났는지를 설명해야 할 필요성이 유물론자에게 제기되었다. 그래서 식물의 씨앗이나 포자가 다른 행성으로부터 지구로 유입되었다는 설이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16세기 영국 천문학자 제임스 진스경(Sir James Jeans)이 지구에서만이 생명체가 있다고 선언한 데 반하여, 지오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는 셀 수 없이 많은 행성과 또한 그곳에 지구와 같은 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을 언급했다. 스펜서 존스(H. Spencer Jones)다른 세계의 생명에서 이를 지지했고, 오파린과 페센코프(Fesenkov)는 공저한 우주에서의 생명에서 또한 이런 설을 지지했다. 그러나 우주에서의 생명의 다중 분포가 과학계에서 인정되더라도 생명체의 행성간 이동 문제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이와 같이 오파린은 유물론자의 입장에서 관념론자들의 생명 영원설을 일축한다. 그러나 다중 우주에서의 생명체 존재 가능성에 대해서는 지지하고 있음을 밝힌다. 그리고 이어서 생명체의 행성간 이동 가능성에 대해 논술한다. 왜냐하면 생명체의 행성 이동이 가능하다면, 지구에서의 생명의 기원은 다른 행성에서 온 생명체에 의한 것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실제로 천상의 균이 있다면, 그것이 지구에 올 수 있는 가능성을 검토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파린에 의하면, 이러한 외계생명체 유입설에는 두 가지 이론이 있다. 첫째는 유성(流星)-운석 또는 우주 유충일 수도 있다-에 의한 포자의 운송설이고, 둘째는 빛의 압력에 의한 우주먼지의 포자 운송설이다. 그러나 미생물 자체는 물론 생명 유지력이 매우 강한 포자의 형태로도 행성간 이동시에 장시간 겪어야 하는 극한의 초저온도와 우주에 차 있는 자외선 등의 영향은 생명의 생존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또한 지구에 유입한다고 해도 대기와 충돌하면서 겪게 되는 초고온을 견디는 것도 불가능하다.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가설들을 검토한 후에 이렇게 결론을 내린 오파린은 외계생명체유입설을 부정하고, 지구의 생명은 지구에서 기원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외계생명체유입설에 대해서는 오파린의 긴 논술이 있으나 지구의 생명의 기원을 다루는 본 논문의 주제와는 별 관련성이 없으므로 생략한다: 필자 주)

 

3.4. 과학적 접근의 시도와 실패에 대한 논의

 

오파린에 의하면, 다윈의 진화론에 의해서, 또한 파스퇴르의 실험에 의해서, 관념론적 자연발생설은 배척되었고 19세기와 20세기에 계몽과 회의주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승리한 유물론 과학자들도 대부분은 생명의 기원 문제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생명의 기원 문제를 과학이 아니라, 믿음의 문제로 격하시킴으로써 회피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오직 진보적인 몇몇 과학자만이 유물론적인 접근의 원칙을 수호하기 위해 싸웠다. 1860년대에 영국협회 회장이었던 토마스 헉슬리(T. H. Huxley)는 비생물로부터 살아 있는 원형질의 진화의 목격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또한 틴달(J. Tyndall)1874년의 연설에서 생명은 무생물로부터 기원하였다고 제안하였다. 그로부터 거의 한 세기 동안, 두 가지 논의가 진행되었다. 형이상학적 원칙은 생명체가 어떤 특별한 조건에서는 생명 없는 매체로부터 갑자기 형성되어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반면 진화론적 원칙은 최초의 미생물의 발생을 물질의 일반적인 발달의 단계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났다고 본다. 그래서 생명의 기원의 문제는 과거의 이 놀라운 발생을 단지 설명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러한 설명의 정확성을 검증해야 하는 중요하고도 극단적인 난제가 되는 것이다.

 

오파린은 라마르크가 제안한 이론(용불용설)유기진화론이라고 하면서, 그보다는 라마르크가 물질의 단계적 발달과정에서 생명체의 기원을 묘사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오파린에 의하면, 라마르크는 비유기체 사이에서 극단적으로 작은, 절반은 액체인 몸체가 형성되었고, 그 외적인 껍질 안에서 최초의 유기화를 시작하여 세포체로 발달했다고 보고 있다. 독일에서 오켄(I. Oken)은 탄소복합물의 단계적인 진화에 대하여 썼는데, 이것이 원시 점액질을 형성하게 된다. 찰스 다윈은 1872년에 월리스(Wallace)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스티안의 실험에 대해 자연발생은 증명되지 않았다고 비판하면서, ‘Archebiosis’-먼 과거에 원형질이 비생물체로부터 단계적으로 발달했다는 이론-이 옳다고 보는데 죽기 전에 이것이 증명되는 것을 보고 싶다는 뜻을 피력했다. 오파린은 이에 대하여 생명은 다윈이 생각하는 대로 언젠가는 어떻게든 생겨났어야 하지만, 우리는 아직 생명의 발생 방식을 전혀 모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다윈이 생명의 기원 문제 해결에 보다 중요한 것은 하위 유기체로부터 상위 유기체로 발달한다는 진화론적 원칙을 세웠고, 이런 원칙이 없이는 생명체가 존재하게 되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점에 있다.

 

이 시대에 기계론자들은 진화론 노선을 따른다고 하지만, 진화론에 너무나 많은 짐을 지우고 있다. 그들의 의문은 단지 어떻게 생명을 특징짓는 물질입자의 조합이 생겨나며, 어떻게 모든 생명체의 특수한 구조가 생겨났는가에 있다. 즉 유기물질의 결정화의 문제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에서는 이런 결정화를 볼 수 없고, 실험실에서의 재현 노력은 성과가 없었다. 그들은 생명구조의 형성, 즉 살아 있는 물질의 결정화 조건이 물리적 또는 화학적으로 너무나 복잡하여서 현실적으로는 재현이 불가능하다고 가정하게 되었다. 이런 입장은 헤켈에 의하여 명확히 드러난다. 그는 생명은 이미 원자 안에 존재하므로 유기체와 무기체는 근본적으로는 차이가 없다고 했다. 원시 유기체는 원시 바다에서 복합물질의 단순한 상호작용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발달하였다. 그러나 이전에 지구상에서 이것을 가능하게 했던 힘들이 이제는 사라졌고 재생되지도 않기 때문에 알 수 없다. 프라이어(W. Preyer)는 기계론적 관점에서 그런 알 수 없는 힘들이 과거에 존재했었지만 지금은 없다고 하는 헤켈의 주장을 비웃었다. 그러나 다윈은 1871년의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유기체의 첫 번 째 생산을 위한 모든 조건이 존재하며 이는 과거에는 존재할 수 있었다고 종종 말해진다.”

 

오파린에 의하면, “지난 세기의 끝과 금세기의 초에어떤 물리적인 힘의 영향으로 생명이 자기형성이 가능했다는 기계론적인 개념이 과학자들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알렌(F. J. Allen)은 태양 빛이 원시 바다 물속에서 복합물질을 생명물질로 형성시켰다고 제안했다. 오스본(H. F. Osborn)생명의 기원과 진화에서 생명물질의 유기화의 초기 단계에서 생명에 필수적인 열 가지 성분이 하나씩 하나씩 조합되는가설을 제안했다. 듀보(R. Dubois)와 쿠커크(M. Kuckuck)는 물질을 조합하여 생명물질을 만들어보려는 실험을 하였으나, 이런 것들은 모두 아마추어적인 해프닝일 뿐이었다.

 

독일 과학자 플루거(F. Pfluger)는 유기체 속에 있는 생명물질을 죽어 있는예비 단백질과 살아 있는원형질 단백질로 나누어 분석했다. 전자로서는 달걀 흰자와 씨앗의 단백질 저장물 같은 것으로 매우 안정적이고 화학적으로는 비활성 물질처럼 보였다. 그러나 후자는 불안정성을 보이는데, 이것은 생명세포 안에서 진행되는 화학적 변화의 기초를 형성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두 가지의 단백질의 특별한 차이는 산화능력에 있음을 발견하고 살아 있는원형질 단백질에 어떤 (: radicals)’가 존재한다는 가설을 발표했으나, 후에 이런 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오파린은 이와 같은 가설적인 초기 생명물질의 명칭으로 나에겔리(Naegeli)와 바이스만(Weismann)‘idoplasm’을 비롯하여 매우 많은 개념어들을 제시하고 있다. 바이스만은 ‘idoplasm’이 생명 기간 동안 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유전적 물질과 다른 특성들을 가진 것으로 설명하였다. 바이스만의 ‘idoplasm’은 결코 새롭게 나타나지 않으며 자라나고 방해받지 않고 스스로를 재생한다. 그러나 오파린에 의하면, 이런 식의 연구의 문제는 생명의 기원 연구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점에 있었다. 그러한 예로서는 메레쉬코프스키(C. Mereschkowsky)en의 공생자(symbiogenesis) 이론과 영국 생물학자 민친(E. Minchin)의 엽록소 이론이 더 있다. 이 모든 가설은 결국 가설에 머물 뿐이었고 더 이상은 발전이 없었다.

 

그러자 원형질의 생명적 속성의 원인은 그 구조, 즉 그 특정한 공간적 형상에만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기계론적인 시도가 등장했다. 그렇다면 생명의 이해를 향한 직통 경로는 원형질의 구조를 조사하면 되는 것이지, 신진대사나 다른 생명현상은 연구할 필요성이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그래서 조스트(L. Jost) 는 세포의 활동이 구조보다는 오히려 그 부분의 편성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다고 보았다. 기계론자들은 현미경을 이용하여 그러한 공간적 형상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살아 있는 세포의 구조가 아니라 죽은 세포의 구조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세포의 구조물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보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트라우베(M. Traube)와 뷔츠빌라(O. Butschli), 그리고 럼블러(L. Rhumbler) 등이 이러한 모델을 실험하여 합성생명을 만들어내고자 시도하였다. 레두크(S. Leduc)는 그가 스스로 명명한 합성생물학이론에 따라 물질조합에 의한삼투압 세포를 만들었고, 멕시코의 헤레라(A. L. Herrerra))생명의 기원과 본질에 관한 새 이론에서 합성물질에 의해 생성된 구조물을 발표하였고, 어떤 샘플은 오파린에게도 보냈다. 그러나 오파린은 이러한 구조물들이 “plasmogeny”-인공적으로 살아 있는 유기체를 만들어내는 일-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자연적으로 생성되었다고 해도 생명현상의 특징인 신진대사를 조직화하지 않았고 스스로의 재생능력이 없었으므로 생명의 기준을 충족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3.5. “최근의관념론과 진화론의 발전에 대한 논의

 

오파린에 의하면, 20세기 초에 기계론적 연구 경향이 우세한 분위기에서도 위대한 정신들19세기부터의 진화론적 연구를 선호하고 있었다. 엥겔스는 1870년대에 생명은 임의로 생겨나지 않고 영원하지도 않으며, 생명은 조건이 우호적일 때마다 물질 진화의 과정으로 생겨난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러나 진화적 과정이 생명 발생의 유일한 길이라는 엥겔스의 이론은 당시 폭넓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93년 바르샤바 대학에서 연설한 러시아 식물학자 벨리아예프(V. Belyaev)가 자연이 수천 년을 걸려 만든 것을 실험실에서 빨리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고 언급한 사례 정도를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오파린은, 티미리아제프(K. Timiryazev)1912년의 과학적 년대기에서, 샤퍼(E. A. Schafer)가 영국협회의 년차 회의에서 생명이 없는 물질이 비활성과 활성 사이의 경계지에 있는 물질을 거쳐 우리가 생명이라는 용어를 붙여준 것의 모든 특징을 가진 물질로 변화하는 단계적인 과정에 의하여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게 된다고 한 말은 생명의 기원을 연구하는 문제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평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티미리야제프는 여기서 우리는 다른 모든 물질현상처럼 생명물질이 진화에 의해 탄생되었다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다. 진화이론은 지금 생물학뿐만 아니라 천문학, 지질학, 화학, 그리고 물리학 같은 모든 자연과학을 포용한다.” 그는 여기에 비유기 세계로부터 유기 세계로의 전이가 진화 과정에서 이룩되었음을 확신하게 한다는 말을 덧붙여 썼다.

 

그리고 10년 이상이 지나서 베퀘렐(P. Becquerel)광선 생물기원학이라는 이론이 프랑스 천문학 저널에 실렸다. 그는 외계생명 유입론을 강하게 부인하고 자외선과 방사능 광선에 의해 이산화탄소가 유기물질로 발달했다고 주장했다. 이 해에 오파린은 그의 생명의 기원이 소책자로 발간되었음(1924)을 밝히고 있다. 오파린은 이 책에서 현재 판본의 독자가 더 잘 파악할 수 있는 그의 견해를 매우 개괄적으로 처음 주장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판본에서 그는 탄소복합물 즉 탄화수소가 지구상에서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이것이 진화하여 단백질 복합물로 형성되었고, 그리고 자연선택의 결과로서 내부조직의 단계적 차별화를 겪으면서 콜로이드 체계에 도달한다는 이론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1928년 할데인이 진화론적 관점에서 같은 이론을 발표하였다. 이 이론은 그 후에 큰 행성들의 대기에서 탄화수소가 함유되었음 발견되었을 때에야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오파린은 이것을 진화론자들의 승리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모간(T. H. Morgan)과 그의 추종자들은 진화론의 원칙을 유기물질의 기원과 발달에만 적용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모간은 최초의 유기물은 유전자라고 주장하였다. 뮐러(H. J. Muller)생명의 기초로서의 유전자라는 논문에서 유전자가 최초의 생명체의 기초를 형성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유전자 분자의 형성은 원시 해양의 물에서 용액으로 된 물질의 원자와 분자들이 행복한 만남을 통해서 순전히 우연하게이루어졌다고 썼다. 1924년 리프만(C. B. Lipman)은 최초의 생명 물질의 형성을 살아 있는 분자의 개념으로 설명했다. 1928년 알렉산더(J. Alexander)와 브릿지스(G. Bridges)의 제안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38년에 보이트너(R. Beutner)는 생명물질의 기초가 현재의 통과성 바이러스와 같은 자기 생성 효소일 것으로 보았다. 프랑스의 다우빌리에(A. Dauvillier)l1947년 지구 표면의 유기물질의 근원이 자외선에 의해 이산화탄소가 생성한 프롬알데히드의 복합물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복합물이 브라운 운동(Brownian movement)을 통해 다양한 방식의 콜로이드 조각들로 발달하다가 우연에 의해 살아 있는 물질로 생성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우연은 그에게 가능성이 매우 낮은 것으로 보였지만, “이상한 창조자의 수작업은 바로 시간에만 의존하는그런 것일 뿐이다. 1949년 비들(G. W. Beadle)은 오랜 시행착오 과장에서 자기를 복제하는 능력을 획득한 분자를 제안하였고, 블룸(H. Blum)시간의 활과 진화에서 살아 있는 자기 촉매적 분자를 제안하였으며, “최근에는물러가 단 하나의 성공적인 유전자의 우연한 등장이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어떻게 단 한번 일어났던 현상을 연구할 수 있겠는가? 오파린은 이런 우연의 제안은 과학적 연구에 비생산적이라고 했다.

밀러의 실험

 

이와 대조적으로 생명의 기원에 대한 진화론적 접근은 최초의 생명으로 이끈 물질 발달의 각 단계를 연구하고 실험적으로 재생할 가능성을 광범위하게 과학자들에게 제시한다. 오파린은 이런 과학자들의 이름과 이론을 소개하고 있다. 첫째 유레이(H. C. Urey)의 업적을 들고 그가 밀러(S. L. Miller)의 실험에 기반을 제공하였으며, 밀러는 지구의 원시 대기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체로부터 아미노산을 합성하였다.” 베르날(J. D. Bernal)은 원시 연못에서 유기물질을 흡수한 진흙 입자의 발달 가능성을 제안하였다. 그 외에도 많은 과학자들이 이와 유사하게 발달 단계에 관한 논문들과 또한 물질 발달에 관한 리뷰들을 제출하였다. 또한 새롭고 재미있는 실험적 제안들을 내놓은 과학자들과 생명체의 신진대사의 발달을 연구한 과학자들도 있다.

 

오파린에 의하면, 진화 단계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덜 연구된 부분은, 가장 복잡하게 형성된 유기물질이 가장 원시적인 생명체로 전이하는 단계이다. 이것이 우리의 지식이 아직 뛰어넘을 수 없는 간극이다. 어떤 생명체의 발생에 앞선 조직화 단계는 매우 복잡할 뿐만 아니라, 생명을 특징짓는 기능의 완성에 특별하게 잘 적응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놀라운 현상은 주어진 외부 조건하에서 전체 생명체계의 자기 보존과 자기 재생산을 위한 기능에 대한 형태의 적응으로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생물학에서 발견한 이런 행동에 대해서는 자연선택이란 다윈주의 원칙을 적용해서 생명체와 그 환경의 상호작용을 연구해야 한다. 이것은 비유기체에서 생명의 성립과정의 일부로 발달되었음에 틀림없고, 나중에는 생명물질의 발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진화론자들 중에서도 진화와 자연선택의 원칙을 개별 분자들에 적용하고자 하는 과학자들이 있는 반면에, 오파린을 비롯한 다른 과학자들은 생명이 생기기 전에 틀림없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다분자 체계(할데인의 용어로서는, ‘준 생명 시스템’)가 자연선택에 의해 생명체로 전환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직접적으로 생명의 기원을 연구하는 과학자와는 별도로 생화학자와 해부학자는 이 연구에 관련하여 어떤 가설을 그들의 연구로부터 제안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파린은 현재 이용되고 있는 과학적 증거들로 진화의 그림을 그려보겠다고 끝을 맺는다. 그러므로 오파린의 생명의 기원이론은 판을 거듭할수록 새로운 이론으로 달라질 것이다.

 

4. 결 론

 

오파린이 주장하는 변증법적 유물론에 의하면, 지구상에서 생명은 물질의 법칙에 의하여 진화할 수밖에 없는 무기물이 어느 단계에서는 유기물로 진화하고, 다음 단계에서는 더욱 복잡한 유기체로 합성되고, 그것이 다시 생명체로 진화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물론적 진화는 어떠한 우연성도 부정한다. 그렇게 보면, 생명은 물질의 진화 과정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면, 생명체는 물질의 복합체에 다른 것이 아니고, 생명은 물질의 복합적 현상 곧 화학적 반응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여 태어난 원시 생명체가 진화하여 오파린의 조상을 만들었고, 오파린은 1984년에 그의 부모에 의하여 태어나서 1980년까지 유물론적 법칙에 따라 살다가 죽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이 어떤 방법으로도 풀지 못한 생명의 기원 문제를 과학적으로 풀기 위해 연구했다. 그는 변증법적 유물론 이론의 바탕에서는 생명의 기원을 잘 설명했다. 그는 다만 유기물 복합체에서 생명이 발생하는 순간의 기작을 알아낼 수 없었을 뿐이었다. 그는 이것을 알아내서 인공 생명체를 만들기 위해 그의 인생에서 마지막 10년을 바흐연구소에서 연구원들을 지도하고 자신도 연구에 전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사후 10여년이 지난 1991년에는 변증법적 유물론에 의하여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조차 부정할 정도로 진화한 인간들이 그들만을 위하여 만들었던 소비에트 연방공화국도 해체되었다. 이렇게 유물론적 공산주의 이념은 실패한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오파린이 그토록 열렬하게 소원하던 인공 생명체의 제작은 그가 죽은 지 33년이 넘은 오늘날까지 그의 열렬한 추종자들에 의해서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파린의 망령은 무신론적 과학자들의 영향아래 현대에서도 수그러들지 않고 오히려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오파린은 순수하게 학문적 연구에 몰두했던 과학자는 아니었다. 그는 정치에 이용되었고, 그도 정치적 권력과 특혜를 즐겼다. 그가 살던 당시 소비에트공화국 상황은 어쩌면 정치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었음에는 틀림없다. 일차적으로는 공산주의적 유물론에 반대하는 자는 무조건 반동으로 몰려서 숙청당하는 분위기에서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소비에트연장공화국뿐만 아니라, 그 후에 공산주의화되었던 인근 중국이나 북한, 베트남,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등지에서도 발생했던 역사적 사실임을 알고 있다. 그가 그의 저서 앞부분에서 엥겔스의 유물론과 레닌과 스탈린의 견해를 그의 학문적 이념으로 삼고 있음을 공개적으로 표명하고 있는 것도 이런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에는 리센코와 같이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을 채택하여 스탈린의 인간개조 정책에 근거로 제공했다는 사실은 그의 진술에서도 엿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목적을 위하여 별도로 생명의 기원이라는 대중용 선전 책자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그 책이 일본 과학자에 의하여 일본에서 번역 출판된 사실에서 알려지고 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던 스탈린의 인간개조 정책에 그의 이론이 이용되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자료에 의해서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그는 권력에 맞는 이론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평생 남보다 많은 특권을 누렸다. 이런 일은 인간을 유물론적 존재로 보는 체제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인간을 존중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과학자의 양심에서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인간에게서 개성과 자유를 박탈하고 정치적 목적에 따라 국민을 개조할 수가 있단 말인가? 다만 유물론적 인간관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생명이 어차피 물질적 현상일 뿐이니까, 어떠한 비인간적 행위도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크리스챤들이 공산주의를 배격해야 하는 이유는 그 이론이 창조자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유물론에 근거하는 이념이며, 그러한 이념에서 인간성을 부정하는 비인간적인 정치행위가 자행된다는 것 때문이다

 

본론에서 보았듯이 오파린은 수많은 서양의 철학자들의 사상과 과학자들의 이론을 섭렵하고 최신과학 정보를 수집하여 유물론적 관점에서 관념론적인 것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관념론이라는 것은 유물론 이외의 모든 이론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판수가 바뀔 때마다 이런 내용을 증보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엄청난 노력은 오직 그의 이론만이 과학적 진리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오파린의 이론이 과학적 진리라는 그의 진술은 과연 사실일까? 우선 그의 주장은 물질이 복합체로 발달하면서 상호작용에 의해 진화한다는 것에 기초한다. 그러나 물질은 복합체가 되면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화학적 반응을 일으킨다. 물질의 화학적 반응은 일정한 조건에서는 일정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유물론적 입장에서 그는 물질의 진화 단계에서 생명은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물질의 조합으로도 생명현상을 일으키는 화학적 반응의 공식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것이 장래에는 가능할 것인가? 이에 대한 판단은 진리에 대한 믿음에서 달라질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생명체의 구조물을 복제하면 생명의 기능이 발생할 것으로 보고 연구했던 과학자들도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생명의 기능이 물질적 구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것은 명백해진 것이다. 오파린도 고백했듯이 최초의 생명이 발생했던 복합물체와 외부 조건이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 이것을 밝히는 것이 가장 어려운 문제이며, 생명의 기원에 관련하여 과학이 아직 풀어내지 못하고 있는 마지막 문제이다. 이 점에 대해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기독교적 입장은 그런 기작(機作)은 없다는 것이다. 증명할 수 없는 명제를 놓고 믿음의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파린은 자기의 유물론적 이론이 마치 과학적으로 증명된 진리인 것처럼 선전하면서 세계의 모든 종교, 특히 러시아인들이 러시아 정교회를 불신하게 하는 이론으로 사용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추종자들은 지금도 기독교를 겨냥해 총구를 겨누고 있음은 우리가 직시해야 할 문제이다. 이것은 우리가 마냥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는 문제이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에 대해서 시대에 맞게 과학적인 연구를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과학적 논증으로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파린의 사상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일까? 필자는 그의 사상은 한 마디로 철저하게 무신론적이고 무자비한 유물론적 테두리에 갇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제까지 살펴본 그의 진술들의 평가에서 충분히 입증되었다. 그리고 그의 생애에서 나타난 행동들도 이런 평가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필자의 이러한 평가와 관점의 형성이 아직 연구된 자료가 거의 없는 국내에서, 이제 외국에서 겨우 입수한 많지 않은 자료를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부족한 점이 없지 않으리라는 점은 인정하고자 한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연구를 계속 진행하면서 보완할 것은 보완할 것이다. 또한 그의 이론에 대해서도 더욱 알아야 할 필요성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무신론적이고 무자비한 인간성을 드러내는 오파린의 사상과 이론은 크리스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유해한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러한 적그리스도 세력의 사상과 이론을 알기 위한 노력은 크리스찬이라면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일이라는 권면으로 결론을 맺고자 한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어떤 싸움에서나 이길 수 있다. 선한 싸움에서도 승리하기 위해서는 나뿐만 아니라 적도 알아야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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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고 문 헌

 

<국내 단행본>

 

Miller, Stanley and Orgel, I. E., 박인원 역, 생명의 기원(서울: 민음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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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n Synge tr., The Origin Of Life On The Earth, (New York: Academic Press Inc., 1957).

 

<논문>

 

허 정윤, “생명기원 논쟁에 대한 신학적, 과학적 고찰 -오파린의 생명의 기원에 나타난 화 학진화론 비판을 중심으로창조론 오픈포럼62, (창조론 오픈포럼, 2012. 8), 51-65.

 

<인터넷 자료>

 

http://timeline.britannica.co.kr/bol/topic.asp?mtt_id=68078. (검색일자: 2013. 6.24).

http://en.wikipedia.org/wiki/Alexander_Oparin. (검색일자: 2013. 6.24).

http://science.howstuffworks.com/dictionary/famous-scientists/chemists/alexander-ivanovich-oparin-info.htm. (검색일자: 2013. 6.24).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05r3225b. (검색일자: 2013. 6.24).

 

 

한글 초 록

 

오파린은 뛰어난 과학자였음에는 틀림없다. 그는 생명의 기원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명제에 도전하여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이론을 제안했다. 그것이 러시아제국을 무너뜨린 공산주의자들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절묘하게 딱 맞아 떨어지고 있음은 시기상으로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그의 이론은 공산주의 세력의 독재 정치체제를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그는 그 대가로서 주어진 특권과 특혜를 평생 누렸다. 처음부터 오파린이 의도했든 아니했든, 이 대목에서 그는 순수한 과학자로만 보기 어렵게 된다. 오파린의 이론은 간단하다. 지구상에서 생명은 물질의 법칙에 의하여 진화할 수밖에 없는 무기물이 어느 단계에서는 유기물로 진화하고, 다음 단계에서는 더욱 복잡한 유기체로 합성되고, 그것이 다시 생명체로 진화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과학적으로 완전히 입증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아직 하나의 가설의 단계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오파린의 가설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이 이론이 인류의 종교적 전통-최소한 인류의 문화적 윤리체계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변증법적 유물론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론의 실험은 이미 공산주의 정권에 의해서 그 비인간성이 드러났고, 이들의 집권 시기는 인류 역사에 재앙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오파린의 이론에는 앞으로도 언제든지 이런 사태를 재발할 수 있는 위험성이 남아 있다. 왜냐하면 이 이론의 추종자들은 그들의 이론으로 종교를 대체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인들은 이 이론으로 무장한 적그리스도 세력들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이론의 배경인 오파린의 사상을 알아볼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 이 논문의 목적이 있다.

허 정 윤

(평택대학교 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역사신학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