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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의 ‘욤’(날)과 ‘라키아’(궁창)의 현대적 해석

heojohn 2020. 4. 2. 14:29

 

 

 

. 서론

 

기독교 성경에는 창조자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였다고 서술하는 창세기가 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가 당면한 심각한 문제의 하나는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해석하는 창조론이 현대인들로부터 배척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문제를 놓고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갈등하고, 논쟁하고, 심지어는 교회를 떠나기까지 한다. 이 문제의 심층을 들여다보면, 그곳에는 창세기의 서술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충돌하고 있다는 사실이 발견된다. 창조자 하나님과 그의 창조를 믿는 기독교인들조차 창세기를 읽을 때, 모순적인 서술들에 부딪쳐 이해하고 믿을 수 없는 경우가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문제를 안고 있는 창세기를 현대인들이 읽고 올바로 해석하기 위하여 먼저 문헌의 배경부터 알아보자. 창세기는 BC. 1,500년경에 고대 히브리인 지도자 모세에 의하여 고대 히브리어로 쓰인 문헌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정설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자국어로 번역된 창세기를 읽고 있다. 번역서에는 항상 번역자에 의한 오역과 왜곡된 서술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번역된 창세기를 읽는 현대인들에게 모순적인 서술이 발견되는 경우에는 히브리어 원문 창세기를 읽으면서 논의해야 할 것이다.

 

모든 문헌에 대한 해석은 저자가 서술할 당시에 그가 사용했던 문자의 의미를 분석하면서 진행하는 것이 원칙이다. 저자의 서술은 그의 경험적 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고, 그것을 표현하는 문자들의 의미 역시 그의 경험적 인식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저자의 경험적 인식은 비록 표면적 서술에 드러나지 않았을지라도, 서술의 행간에 또는 서술의 배경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창세기에 나타나는 모순적 서술 역시 저자의 경험적 인식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제기되는 근본적인 질문은 창세기의 저자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고 서술한 것인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창세기 해석에서 크게 이견을 보이고 있는 문제들 가운데 이 논문은 특히 ’()라키아’(궁창)의 문제를 논의하고자 한다.

 

 

. 창세기의 모순적 서술에 대한 현대적 해석의 이유

 

창세기를 읽어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창조명령과 창조사건들의 진행을 서술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창세기에 모순적 서술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세기에 모순적 서술이 존재하고 있다면, 그 책임은 모세에게 있는 것으로 한정해야 한다. 인간의 실수가 하나님에게 전가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권위는 훼손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창세기의 모순적 서술에 대한 현대적 해석의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 그렇다면 모세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창조사건들을 보게 되었을까? 그 대답은 성경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국 기독교적 방법으로 모세가 하나님의 영에 인도되어 환상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창조사건을 듣고 보고 창세기를 썼다고 추론하는 길밖에는 없다. 모세가 환상 중에 듣고 본 경험과 그의 인식 수준에서 이해하고 기억한 것들을 바탕으로 창세기를 서술했다고 인정하면, 창세기의 모순적 서술은 모세가 한 일이므로 하나님에게 책임이 전가되지 않는다.

 

고대 히브리인 모세가 맨눈으로 보고 믿고 서술할 수밖에 없었던 창세기를 현대인들이 읽는다면, 모세의 서술에 모순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역사발전의 당연한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이 첨단 광학기구로 관측하여 현대 우주론을 제안하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대 기독교인들은 창세기의 모순적 서술에 대해 문자 그대로해석하거나 믿는 것을 탈피하여 현대적 관점에서 논의하는 일에 아무런 거리낌을 가질 필요가 없다. 아직도 문자주의 해석에 빠져 창세기를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는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일부 기독교 신자들이 없지 않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지식이 고대 히브리인들의 수준에 머물러 있거나 또는 거짓말을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현대과학을 알고 있는 현대인들은 결코 그런 주장을 하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기독교가 창세기의 모순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고 문자주의 해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기독교는 창세기의 모순으로 인하여 현대사회에서 점점 외면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마침내 기독교가 믿는 창조자 하나님의 존재까지 배척하게 될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증거는 그가 쓴 것으로 알려진 민수기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민수기에는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 민족이 신 광야 가데스에서 마실 물을 찾지 못하여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모세와 아론에게 나타나서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20:6)는 말씀을 하셨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어지는 서술을 보면 회중 앞에서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20:11)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모세의 행동에 대해 하나님은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드러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20:12)고 심판하셨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서 하신 말씀을 듣고도 손에 쥔 지팡이를 사용하는 잘못을 범했었다. 여기에서 모세의 서술에 모순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이유가 그의 자의에 의한 불순종인지, 아니면 그의 불완전한 기억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의 잘못은 그의 책임이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과학적 사실과 비교하면서 창세기의 모순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해보면, 창세기의 현대적 해석을 위한 4단계의 이해가 정립된다. 첫째로 출애굽 당시 어느 날에 하나님의 영은 모세를 환상으로 인도하시고, 창조 사건을 보여주셨다. 모세는 그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그가 본 환상을 창세기에 서술했다. 둘째로 모세가 들었던 하나님의 창조명령은 동사와 목적어로만 이루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창조명령에 이미 창조의 목적물에 대한 정보를 모두 넣어놓으셨으므로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히브리어로 쓰인 하나님의 창조명령에 수식어가 길게 붙어 있는 것은 모세가 그의 생각을 설명하기 위해 덧붙인 것이다. 셋째로 모세는 하나님이 한 글자씩 불러주시는 것을 들으면서 창세기를 쓰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창세기에 일부 불완전한 서술이 있는 부분은 저자인 모세의 불완전한 이해와 기억에 원인이 있다. 넷째로 창세기의 모순적 서술이 인간 모세에게서 비롯된 것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창세기에 대한 현대적 해석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창세기의 현대적 해석은, 필요한 경우에는, ‘문자 그대로의 해석방법을 버리는 것이다.

 

 

. ‘’()의 현대적 해석

 

1:5 וַיִּקְרָא אֱלֹהִים לָאֹור יֹום וְלַחֹשֶׁךְ קָרָא לָיְלָה וַיְהִי־עֶרֶב וַיְהִי־בֹקֶר יֹום אֶחָד׃. [바이크라 엘로힘 라오르 욤, 베라호셰크 카라 라엘라, 바예히 에레브 바예히 보케르, 욤 에하드] 이 구절은 한글 성경에서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호셰크: 흑암)을 밤(라엘라)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에레브)이 되고 아침(보케르)이 되니 첫째 날(욤 에하드)이니라고 번역하고 있다. 앞 구절들에서 창조자 하나님은 그의 영을 보내 지구를 감싸고 있는 물 위를 살펴보셨다. 그리고 흑암에 빛을 있게 하심으로써 빛과 흑암을 나누셨다. 이 구절은 흑암에서 빛을 나누신 하나님이 밤과 낮이 이어지는 ’()을 제정하시는 모습을 서술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수없이 많이 존재하는 행성들 중에서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생태계가 지구에만 만들어져 있다는 아주 특별한 사실을 알고 있다. 이 특별한 사실을 알고 있고 창조를 믿는 기독교 신자들은, 하나님이 흑암에 싸여있던 지구에 좋은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서 빛이 있게 하셨다고 믿지 않을 수 없다. 창세기 저자는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빛에 대한 정보를 자세하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 신자들은 이 구절에 서술된 빛의 의미와 의 길이에 대해 좀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창조자 하나님은 이 구절에서 빛을 으로 불러 낮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썼다. 이어서 은 밤을 포함하여 한 을 의미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창세기 뒤에 이어지는 성경들에는 이 불특정한 기간(예를 들면, 시대)을 의미하는 등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빛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보다 심오한 의미를 내포한 비유로 쓰이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인간의 지적 능력이 향상됨에 따라 사물에 대한 이해가 깊고 넓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구약성경을 더 읽어보면 세상의 빛으로 만들어진 아담과 그의 자손들이 창조자 하나님의 창조계획대로 살지 않았으므로 세상의 빛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이르면 창조자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빛의 특별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서 가장 잘 나타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빛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창세기에서부터 신약성경에까지 두루 살펴보아야 하지만, 지면상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스가랴 14:7에서는 주의 오심을 예언하면서 빛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신약시대에는 빛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게 된다. 그리스어 신약성경의 서술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번역한 ‘70인 역본을 통하여 연결할 수 있다. 요한복음 1장은 신약성경의 창세기라고 부를 만하다.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자 하나님과 공동 창조자로 서술되어 있다. 요한은 태초에(ν ρχ) 말씀(λγος)이 하나님과 함께(πρς τν θεν) 있었으니, 곧 하나님(θες)’이라고 서술했다. 여기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이어서 서술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라는 구절을 보면, 요한은 만물의 창조자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라고 보고 있다. 또한 요한은 예수를 사람들의 빛’ (φς τν νθρπων)으로 서술했다(1:4). 요한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세상의 빛’(φς τοκσμου)이라고 말했고(8:12, 9:5, 11:9),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증언했다(5:14).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태초에’(ν ρχ)는 창세기의 태초에’(베레쉬트)와 같은 시기를 말한다. 또한 창세기의 오르와 요한복음의 ㅎ포스는 동일하게 빛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에 의하여 창조 이전 태초부터 세상의 빛으로 예정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공동으로 창조를 계획하고 협의하셨던 사실이 명백해진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공동 창조자라면, 사람은 창조되기 이전에 이미 계획되었다는 사실도 입증된다. 그렇다면 흑암에서 나눠진 빛은 물질적인 빛이 아니라, ‘세상의 빛이시고 사람들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지구에 생태계를 창조하시기 위해 직접 임재하셨다는 사실을 가리킨다는 점도 분명하게 이해된다. 사람들과 세상의 빛이신 그분을 알아보고 그분을 믿는 사람들만이 그와 같이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 말하는 빛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일부 신자들은 물질적 빛의 의미인 의 시간적 길이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의 길이를 지구와 우주의 연대 계산에 적용하여 논쟁을 벌이고 있다. 어쨌든 논쟁이 벌어지면 결론을 내야 한다. ‘의 길이에 대해서 논의하자면,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시작이 빛을 창조하신 때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창세기의 첫 마디인 히브리어 베레시트’(처음에)가 하나님의 천지(우주)창조가 시작된 때를 알려주는 말이다. 그러나 창1:5에서 쓰인 히브리어 욤 에하드첫째 날이라고 번역한 성경들 때문에 오해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오해의 원인은 베레시트에하드를 동일하게 처음의 의미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에하드는 서수(序數)첫째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저 하나’(one)를 의미하는 기수(基數)이다. 1:9에서 물이 곳으로 모이라는 구절에도 이 말(에하드)이 쓰이고 있다. 하나님에게 이 날은 그저 일하시는 하나의 날이었을 뿐이다. 서수를 의미하는 첫째의 히브리어는 라숀(רִאשֹׁון)이다. 이 말은 베레시트의 어근이며, 32:18에서 에서와 야곱의 순서를 말할 때에 쓰였다. 그렇다면 베레시트욤 에하드의 시간적 차이는 어떤 것일까? 간단히 말하자면 베레시트는 우주의 창조를 시작한 때를 말하고, ‘욤 에하드는 창조자 하나님이 지구에 임재하여 생태계의 창조를 시작한 때를 가리키는 것이다. 만약 창세기 저자에게 이 구절에서 하나라는 기수 에하드를 쓴 이유를 묻는다면, 그는 이미 앞에서 첫째를 의미하는 베레시트라는 말을 썼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라숀레시트’(앞에 붙인 는 전치사이다)는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라는 사실은 이러한 차이를 설명하는데 확고한 증거가 된다.

 

또한 하나님이 빛을 가장 먼저 창조한 것이라고 오해하면, 창조의 첫째 날에 밤이 없어진다. 그러면 이 구절에서 서술된 저녁과 아침의 순서에도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처음에 창조한 빛을 이라고 규정하였으므로, 첫째 은 히브리인들의 계산 방식과는 다르게 밤이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처음의 에 밤이 없다면, 빛이 있기 이전의 시간은 창조의 첫째 날에 포함되지 않게 된다. 말하자면 반쪽 하루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밤으로 규정한 흑암(호셰크)을 찾아보면, 앞의 구절에서 깊음(테홈: 1:2) 위에 있다. 그렇다면 빛을 만들기 이전에 이미 밤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한글성경은 이 구절(1:5)에서 호셰크를 어둠이라고 오역하여 밤을 의미하는 호셰크를 왜곡해서 번역해놓았고, 그 때문에 첫째 ’()이 반쪽만 있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고 있다. 이 흑암이 히브리인들의 ’()에 밤이 먼저 나오게 시작한 것이며, 태초부터 처음 빛()이 있기까지 밤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히브리어 창세기는 처음에 하나님이 창조에 사용하신 흑암의 시간이 먼저 있었고, 그 흑암의 시간은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시간에 속하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논의한 바탕 위에서 흑암과 빛을 나눈 처음 의 시간적 길이에 대해서 결론을 정리하기로 한다. 처음 의 밤으로 규정된 흑암에는 하나님이 천지의 창조를 시작하신 때로부터 처음의 빛을 있게 한 때까지의 시간이 포괄되어 있다. 처음 빛이 만들었던 ’()은 하나님이 지구에 임재하여 생태계를 조성하기 시작한 때이다. 현대 우주론에 의하면 우주의 시공간은 빅뱅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 밤은 빅뱅에서부터 지구에 ’(빛 또는 낮)이 나타나기까지 매우 길었던 시간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현대과학에서 계산하는 우주와 지구의 연대에 시비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기독교 신자들이 창세기에 나오는 6개의 의 길이를 멋대로 해석하여 우주와 지구의 나이가 젊었느니, 늙었느니 하고 논쟁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잘못 이해한 것을 자랑하는 어리석은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 창조 둘째 날의 물의 나눔과 라키아’(궁창)

 

1:6 וַיֹּאמֶר אֱלֹהִים יְהִי רָקִיעַ בְּתֹוךְ הַמָּיִם וִיהִי מַבְדִּיל בֵּין מַיִם לָמָיִם׃ [바요메르 엘로힘 예히 라키아 베토크 하마임, 비히 마브딜 벤 마임 라마임]. 이 구절은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라고 번역되어 있다., 영어성경에서는 firmament로 한글성경에서는 궁창(穹蒼)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라키아는 현대인들에게 문자 그대로는 이해될 수 없는 말이다. 그렇다면 라키아는 무엇을 말하는가? 물과 물을 나눈 라키아의 어원은 두드려 펴서 얇게 늘린 판이라는 의미의 명사이다. 그러므로 라키아는 결국 실체적으로 얇은 막 또는 판이라고 이해된다. ‘‘마브딜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나누다는 뜻의 바달동사 앞에 알파벳 을 붙여서 명사화한 말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하나님이 물 가운데 얇은 막이 있으라고 말씀했다. 그러자 물과 물 사이에 나눠짐이 있었다고 직역하면, 고대 히브리인들이 이해했던 라키아의 실체가 훨씬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라키아가 아직 물속에 있는 동안,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을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 상태를 서술하고 있다. 그릭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1:7)었으므로 다음 구절을 보자.

 

1:8에서 하나님은 라키아‘(궁창)를 하늘이라 부르셨다. 이 구절의 행간에는 읽어내야 할 것들이 많이 숨어있다. 먼저 모세의 위치와 시선의 방향을 파악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으면서 창조사건의 환상을 보고 있는 모세는 아직 물 위에 있었다. 모세는 공중에서 내려다보면서 물을 나눈 라키아를 찾고 있다가, 하나님이 라키아를 하늘이라고 부르는 말을 듣고, 위를 쳐다보았다. 하늘 색깔이 밑의 물 색깔과 같았으므로 모세는 그때 하나님이 라키아를 위로 들어 올려서 하늘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런 모세의 생각에 의해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이 형성되었다. 고대 근동 지역의 신화들은 대개 가장 먼저 있었던 것이 물질이고, 그것이 물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집트 신화에서는 신들과 땅도 물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이와 같이 고대 근동 지역 사람들은 물을 만물의 근원으로 알고 있었다. 이집트 왕가에서 자란 모세도 이런 이집트 신화를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집트뿐만 아니라, 서양철학의 비조로 불리는 밀레투스의 탈레스(Thales of Miletus, BC.640-BC.546)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이집트를 여행한 적이 있었다. 그때 탈레스가 나일강이 홍수로 범람한 뒤에 진흙 속에서 작은 벌레들이 생겨나오는 것을 보고, 작은 벌레들의 자연발생설과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주장했던 사실은 서양철학사에서 잘 알려진 사실이다. 모세도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시기 전에 물이 먼저 있었음을 서술하지만, 하나님이 물을 만들었다고 서술하지는 않았다. 모세는 물이 처음에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고, 그 계획에 따라 물이 만들어졌다고 믿었을 것이다.

 

모세가 둘째 날의 하늘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서술하는 구절들을 읽는 현대인들은 큰 모순에 빠지게 된다. 이 구절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모세가 하나님이 물을 나눈 라키아를 하늘로 규정했다고 서술함으로써 라키아위의 물이 그대로 하늘 위에 올라갔다고 이해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모세는 뒤에 노아의 홍수 때에 하늘 위의 물이 쏟아져 내렸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렇지만 현대인들에게 라키아가 하늘 위에 있었고, 그것에 물이 담겨져 있었다는 생각은 발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라키아는 실체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했었다는 흔적도 발견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부터 창세기는 현대인들에게 과학적 사실과 모순되어 배척받게 된다. 최소한 일반적인 수준의 과학적 상식을 가진 현대인이라면, 모순을 가지고 있는 창세기의 라키아에 대한 서술들을 그대로 믿을 수가 없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물은 H2O로 구성된 분자 덩어리이고, 지구에서 하늘은 대기권을 말한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의 관점에서 라키아를 모세의 서술처럼 하늘 위의 실체로 믿고, 그 위에 물을 담고 있었다고 믿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늘날에도 모순을 느끼지 않고 창세기의 서술을 그대로 믿는다고 말하는 일부 기독교인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일반적인 수준의 현대적 과학 상식을 갖추지 못했거나, 스스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다. 현대인들은 현대과학과 첨단기술이 만들어낸 현대문명의 거대한 시스템과 제품들을 보면서 그것들을 만들어낸 현대과학의 힘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그러므로 현대과학에서 입증된 과학적 사실과 창세기의 서술이 모순된다면, 현대인들은 과학적 사실을 믿는 쪽을 선택하게 된다. 따라서 기독교는 이제 현대인들에게 성경의 서술이 하나님의 말씀이니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모세의 서술에 영향을 받은 에스겔은 라키아를 가장 많이 언급했다. 에스겔은 그 살아 있는 창조물의 머리들 위에 있는 라키아의 모습은 무서운 수정 색깔 같았으며 그들의 머리들 위로 펼쳐져 있더라’(1:22)고 말했고, 그룹들 머리 위 궁창(라키아)에 남보석 같은 것이 나타나는데 보좌의 형상 같더라’(10:)고도 서술했다. 에스겔은 에스겔서 곳곳에서 라키아가 하나님의 보좌 밑에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시편과 다니엘서에는 라키아를 하나님의 권능의 궁창’(150:1)궁창의 광채’(12:3)라고 서술되어 있다. 모세에 의하여 고대 히브리인들은 피조물들의 하늘 위에 라키아가 있고, 하나님을 보좌하는 천사들과 하나님은 그 위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영향은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번역한 현대 히브리어 신약성경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고린도후서에서는 셋째 하늘에 다녀온 사람을 말하고 있다(12:2).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주의 재림을 영접하는 곳으로 쓴 라키아를 공중이라는 말로 번역했다(4:17). 신약성경에서 라키아를 가장 많이 쓰고 있는 요한계시록의 한글 번역문에서는 대개 공중(空中)이라는 말로 되어 있으나(8:13, 14:6, 19:17), 공기(空氣)로 번역된 곳도 있다(9:2). 오늘날에도 궁창이라는 말이 나오는 구절은 강의와 설교 등에 자주 인용된다. 그 대표적 구절은 하늘(하샤마임)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하라키아)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19:2)이다.

 

한글로 번역된 성경을 읽으면 라키아에 대한 오해는 더 많이 나타나게 된다. 왜냐하면 라키아가 아닌 다른 말까지 궁창으로 번역하여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한글성경에서는 히브리어 שחקים(셰하킴)궁창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셰하킴잘게 부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שחק (샤하크)의 복수 명사형이다. 그런 뜻에서 먼지나 구름 등을 의미한다. ‘셰하킴이 궁창으로 처음 번역된 구절은 신명기 33:26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샤마임)을 타시고 궁창(셰하킴)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이다. 여기서 셰하킴은 구름으로 번역해야 맞다. 한글로 번역된 욥기, 시편, 잠언, 그리고 이사야와 예레미아의 예언서에는 셰하킴을 거의 모두 궁창으로 번역하고 있다. ‘셰하킴라키아를 비교하여 가장 잘 알 수 있는 구절은 תרקיע עמו לשחקים חזקים כראי מוצק׃ [타리키아 이모 라셰하킴 하나킴 키레이 모자크](37:18)이다. 개역성경에서 네가 그와 함께 하여 부은 거울 같은 견고한 궁창을 펼 수 있느냐로 번역된 이 구절에는 라키아에 접두어 를 붙여 의문형 동사 타리키아’(펼 수 있느냐)가 있고, ‘셰하킴의 목적격 명사 라셰하킴도 있다. 개역개정판에서는 그대는 그를 도와 구름장들을 두들겨 넓게 만들어라고 번역하여 셰하킴을 구름장들로 해석한 본문을 보여주고 있다. 이사야 40:22절 앞 구절은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으니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 구절에서 궁창은 חוג הארץ(후그 알레츠)이며 땅의 구()라는 뜻이다. 이 구절의 영어 번역을 보면, the circle of the earth로 번역하고 있다. 어떻게 이 말을 궁창이라고 번역하여 혼란을 초래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한글성경의 실상이 이러함에도 문자적 해석을 강변하는 근본주의적 창조론자들은 모든 성경은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오히려 왜곡된 해석과 이단적 교리를 조장하고 있다. 그러나 모세가 하나님이 라키아위에 물을 올려놓으셨다고 서술한 창세기에 의하여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늘 위에 물이 있고, 하늘의 창이 열리면 비가 내리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현대인들에게 납득될 수 있는 창조론은 진리의 기준을 사실성에 두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현대의 창조론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론이 서술된 창세기의 창조 사건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사실과 비교하면서 해석하는 것이어야 한다.

 

 

. 넷째 날의 라키아’(궁창)와 광명들

 

1. 1:14절의 현대적 해석

 

וַיֹּאמֶר אֱלֹהִים יְהִי מְאֹרֹת בִּרְקִיעַ הַשָּׁמַיִם לְהַבְדִּיל בֵּין הַיֹּום וּבֵין הַלָּיְלָה וְהָיוּ לְאֹתֹת וּלְמֹועֲדִים וּלְיָמִים וְשָׁנִים׃ [바요메르 엘로힘 예히 메오르트 베레키아 하샤마임 레하베딜 벤 하욤 우벤 하라엘라 베하유 레오토트 우레모아딤 우레야멤 베샤님]. 이 구절에서 메오르트는 복수이므로 광명들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 광명들은 해와 달과 별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모세의 넷째 날의 서술에 대해 살펴보면, 모세는 먼저 하나님이 궁창에 광명()이 있으라고 명령하시는 소리를 들었다. 모세는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모세는 하나님의 있으라는 명령어 외에 그 광명들의 처소를 하늘의 궁창에’(베레키아 하샤마임) 정하신 일, 그 광명들이 주야를 나누신 일, 그리고 그 광명들이 운행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이루는 일도 말씀하신 것으로 서술했다. 이런 서술들은 하나님의 창조 명령어에 모세가 덧붙여 놓은 설명문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모세의 서술은 그가 이미 그 광명들이 라키아에서 날자와 사시와 연한을 이루고, 징조를 나타낸다고 인식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모세의 서술에 의하여 형성된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은 세월이 가면서 점점 더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모세는 야곱의 입을 빌려 땅 밑에 음부(שאלה: 쉐올라)가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37:35). 그리고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모든 하늘의 하늘’(10:14)을 서술함으로써 하늘은 천사들이 거주하는 하늘과 라키아위의 물(마임)을 포함하여 3개의 하늘들로 구성되었다. 가장 큰 변모는 평평하게 펼쳐졌던 라키아 샤마임이 욥기(22:14)에서 후그 샤마임’(וחוג שמים : 天球)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로 [참고 자료]와 같이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을 그린 그림에서는 라키아를 반구형(半球形)으로 그리고 있다. 이사야 40:22에서는 후그 하아레츠’(חוג הארץ : 지구)로 쓰였으나, 한글성경은 이것들을 다 같이 궁창으로 번역했다. 모세가 그의 소견대로 서술한 이 구절들은 토라’(가르침)를 통해 [참고 자료] 그림과 같은 모습으로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이 되었다. 현대인들 중에 모세가 [참고자료] 그림과 같이 서술한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을 문자 그대로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이 그림에 관련하여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미 현대우주론의 기본 개념은 거의 일반적 상식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창세기를 읽으면서 모순을 느끼는 현대인들에게 모세의 서술을 올바르게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직접 하신 말씀은 광명들이 있으라는 명령어뿐이라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넷째 날의 나머지 시간을 지구에 살아갈 사람들의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 광명체들의 운행을 아주 정밀하게 미세조정(fine tuning)하는데 사용하셨다. 모세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해와 달과 별들에 관해 그가 보고 생각했던 소견에 따라 서술했다.

 

                                                 [참고 자료: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 그림]

 

신약성경에도 모세의 우주관이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신약성경에 몇 가지 추가된 서술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에 의해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의 처소를 하늘과 땅에서 구조적으로 구분하는 것들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할 때, 먼저 회개하라 천국(מלכות השמים׃ 말레쿠트 샤마임: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말씀했다(4:17). 또한 예수께서는 자기의 복음을 믿지 않는 자는 지옥의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지옥은 여호수아가 유다지파에 배분한 힌놈의 골짜기’(15:8: 게 힌놈, גי הנם)를 뜻한다. 이곳은 예루살렘 성전의 산 남쪽에 있으며,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도 불린다. 이곳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들을 섬겼던 아하스 왕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녀들을 불태우고 이방신에게 제물을 바쳤던 곳이다(대하 28:3). 예수님은 이곳을 비유하여 지옥을 만드셨다. ‘형제를 미련한 놈이라고 부르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갈 것이라’(5:22)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타올랐던 힌놈의 골짜기’(גיהנם)를 한글성경은 지옥으로, 그리스어로는 게엔나’(γεεννα), 영어로는 hell이라고 번역했다. 예수의 말씀에 의하여 땅 위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가 지옥이 되었다. 그리고 땅 밑에는 쉐올라’(음부) 외에 무저갱이 따로 있었다는 사실이 서술되고 있다. 누가복음 8:31 등에 나오는 무저갱은 그리스어 아뷔쏘스’(αβυσσος)이다. 히브리어 신약성경을 보면 무저갱은 창세기 1:2절에 나오는 테홈’(깊음, 깊은 물)을 말한다. 귀신들은 예수에게 이 말을 사용하면서 그곳으로 보내지 말고 돼지 속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있다. 무저갱으로 들어가는 것이 두려워 도망 다니고 있던 그 귀신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돼지 속으로 들어갔다. 돼지들은 그 귀신들과 함께 호수 물속으로 뛰어들어 죽었는데, 결국 그 귀신들은 무저갱으로 보내졌을 것이다.

 

한편 이사야서에서는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שמים חדשים וארץ חדשה: 샤마임 하다심 베아레츠 하다사)을 다시 창조하실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65:17, 66:22). 이사야에 의하면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여호와의 택한 종들이 살게 될 것이고, 이전 것(모세의 하늘과 땅)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의 날이 임하면 뜨거운 불에 타서 (모세의) 하늘은 풀어지고 물질은 녹아서 (모세의) 땅의 모든 일이 드러나리니, 예수가 택한 의인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벧후 3:13). 특히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자세히 서술(21:1 이하)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새 예루살렘도 내려올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새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여 예배를 드릴 성전도 필요 없다. 새 예루살렘에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이 아버지와 아들이 되어 함께 거주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에 의하면 새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므로 해와 달의 비침조차 쓸 데 없다(21:23). 이사야와 사도들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했던 하늘과 땅은 바로 모세가 서술한 것이다. 이들의 예언대로라면 모세의 하늘과 땅은 버려져야 하는 것이다.

 

2. 1:15의 현대적 해석

 

וְהָיוּ לִמְאֹורֹת בִּרְקִיעַ הַשָּׁמַיִם לְהָאִיר עַל־הָאָרֶץ וַיְהִי־כֵן׃ [베하유 라메오르트 베레키아 하샤마임 레하이르 알하아레츠, 베예히=]. 모세는 이 구절에서 광명들이 하늘의 궁창에(베레키아 하샤마임) 있어 땅을 비추라고 명령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의 명령이 그대로 시행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이 구절의 모순적 서술에 대해 문자 그대로의해석 방법을 따른다면, 기독교에 치명적인 한 가지 문제가 뚜렷하게 부각된다. 그것은 바로 광명들이 있는 베레키아 하샤마임’(하늘의 궁창에)의 해석이다. 하나님이 명령하시니 그대로 되었다고 찬양하는 후렴구 때문에 베레키아 하샤마임에 대한 해석은 더욱 주목을 받게 된다. 고대 히브리인들처럼 모세가 서술한 문자 그대로이해한다면, ‘참고 그림과 같이, 광명들은 땅을 비추기 위하여 라키아’(궁창) 밑에 매달아 놓은 것들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그것이 과학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기독교 신자들이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현대에서 모세가 창세기에서 서술하는 라키아과학적 사실이라고 주장한다면, ‘라키아가 왜 보이지 않는지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여기서 기독교가 직면하게 되는 문제는 문자 그대로해석한 라키아의 존재 여부에 따라 창조자 하나님의 권위가 결정될 것이라는 점이다.

 

먼저 모세가 서술한 라키아가 현재 모이지 않는 이유를 찾으려면, 가장 먼저 라키아위에 있던 물이 쏟아져 내렸다고 하는 노아의 홍수 때에 라키아도 없어졌는지 확인해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노아의 홍수 때에 라키아에 있는 하늘의 창들이 열려’(7:111) 40일 주야로 비가 내렸다가 하늘의 창들이 닫혀’(8:2) 비가 그쳤다고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성경에서 라키아가 없어진 기록은 창세기를 비롯하여 성경 전체를 뒤져보아도 발견되지 않는다. ‘라키아에 대하여는 현재 우주에서 그 존재가 발견되지 않고, 과거에 라키아가 존재했었다는 역사적 흔적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그렇다면 라키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모세의 서술에 의하여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에서만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현대우주론을 알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라키아’(궁창)에 광명들이 매달려 있는 것처럼 서술한 모세의 우주관을 과학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허위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모세의 라키아에 대한 서술이 과학적으로 또한 정확무오한 문자 그대로사실이니, 그대로 믿어야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 억지 주장을 하는 일부 신자들이 없지 않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일반인들은 기독교를 무지의 종교라고 배척하고,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 중에서도, 특히 젊은이들은 오히려 반감을 갖고 교회를 떠나는 길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주장한다면, 하나님의 존재까지도 불신하게 된다. 왜냐하면 모세가 창세기에서 서술한 우주관은 현대인들이 알고 있는 우주와 너무나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모순적 서술을 현대인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어떤 종교의 경전도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과학적 사실이 아닌 서술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런 서술을 가진 경전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감출 필요는 없다. 각 종교는 그런 서술에 대한 책임을 최종적으로 신앙의 대상이신 분에게 넘기지 않는 방법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신앙의 대상이신 분이 인간들에게 제시하는 삶의 길이다. 기독교는 이제 라키아의 모순적 서술에 대해서는 모세가 망원경을 가지고 관찰한 것도 아니고,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모세에게 세세하게 설명하신 것도 아니라는 대안적 해석을 제시해야 한다. ‘라키아의 모순적 서술에 대해서 현대 기독교는 모세가 환상에서 하나님의 창조명령을 듣고 맨눈으로 하늘의 구조를 관찰했을 때, 모세의 눈에는 광명들이 라키아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해석하는 길밖에 없다. 따라서 라키아는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고, 과학적 사실도 아니며, 모세에 의하여 서술된 모세의 견해라고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과거 로마 가톨릭교회는 모세가 서술했던 우주관에 따라 별들과 태양과 달이 라키아에 있는 길을 따라서 지구를 돈다는 천동설을 믿었고, 그렇게 설교했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교회가 지동설을 주장했던 갈릴레오를 종교재판에 회부하여 1633년에 가택 연금에 처하고, 과학자들을 박해했던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기독교 전체의 역사적 실수이자 수치이다. 그 뒤에도 과학적 사실로 밝혀진 지동설을 오히려 이단적 주장이라고 계속 탄압했던 로마 가톨릭교회는 결국 1996년에 교황 바오르 2세가 천동설을 버리고 지동설을 인정하면서 갈릴레오를 사면했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역사적 과오를 사과했다. 뿐만 아니라 로마 가톨릭교회는 하나님의 창조론을 사실상 포기하고, 유신진화론을 수용하는 입장으로 돌아서고 말았다. 그것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창세기 저자 모세의 모순적 서술을 문자 그대로 믿었다가 초래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개혁교회 일부 신자들은 모세의 모순적 서술을 문자 그대로의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과오를 아직도 되풀이하고 있다.

 

 

. 안식교회의 과학적 창조론과 창조과학

 

오늘날 모세의 라키아에 대하여 문자 그대로가장 열심히 믿는 집단은 안식교회(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일 것이다. 안식교회는 모세의 우주관을 그대로 교리로 삼고 있다. 그 이유는 안식교회의 창립자 엘렌 지 화이트(Ellen G. White)6일 창조사건과 노아홍수 사건을 환상 중에 보았는데, 창세기에 서술된 문자 그대로의 모습이었다고 설교했기 때문이다. 안식교회는 화이트를 모세와 같은 수준의 예언자로 존중하고 있으며, 그의 저서는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진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안식교회는 예수의 재림이 곧 닥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모여 1863년 미국에서 창립되었다. 안식교회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해석하면서 초기부터 몇 번이나 예수의 재림과 환난이 닥칠 시기를 예언했다가 모두 빗나간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안식교회는 신자들에게 예수의 재림과 말세의 환난에 대비하여 일부를 제외하고는 사회와 격리된 생활을 택하도록 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바람에 개혁교회는 대개 안식교회를 기독교의 이단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미 앞에서 설명했듯이 이사야와 베드로와 요한은 모세가 서술한 옛 하늘과 옛 땅은 버려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특히 예수님의 인도에 의해 환상을 보고 요한계시록을 쓴 요한은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에 새 예루살렘까지 예비하셨다고 증언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이사야와 예수의 제자들이 하나님은 문자 그대로모세의 옛 하늘과 옛 땅을 버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이라고 예언했음에도 안식교회는 그것들을 왜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미 로마 가톨릭교회마저 버린 모세의 우주관을 개혁교회 일부 신자들은 왜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역사적으로 얽힌 그 이유와 과정을 살펴보자.

 

안식교회 광신자인 조지 맥그리디 프라이스(George McGready Price)가 노아의 홍수를 환상으로 보았다는 화이트의 설교를 듣고, 그것을 기반으로 신지질학(1923)을 썼다. 신지질학은 기존의 지질학을 부정하면서 영국 성공회 제임스 어셔(James Ussher) 주교가 계산한 것과 같이 약 6,000년 전에 오늘날처럼 하루 24시간 6일 동안에 천지를 창조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약 4,400년 전에 전 지구에 걸쳐 일어난 노아의 홍수가 오늘날의 지질 구조들을 형성한 유일한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신지질학홍수 지질학으로 불리기도 한다. 안식교회는 화이트의 설교에 바탕을 둔 신지질학을 그대로 교리로 삼고 있다. 그러나 안식교회의 모순적 행동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믿는다고 하면서 모세의 옛 하늘과 옛 땅을 버리지 않고 예수의 재림을 맞이하는 교회라고 주장하는 점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앞에서 설명한 이사야와 베드로의 예언과 예수에게 이끌려 환상을 본 요한이 예수의 재림 때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뀔 것이라고 증언한 것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혁교회에서 모세의 우주관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헨리 모리스(Henry M. Morris)가 쓴 창세기 대홍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개혁교회 일부 신자들이 안식교회의 홍수 지질학교리를 거의 그대로 답습한 창세기 대홍수에서 주장하는 창조과학적 창조론을 그대로 믿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문자 그대로의진리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결국 안식교회의 창조교리에 개혁교회의 창조교리가 예속되어 있는 형편이다. 개혁교회가 모세의 옛 하늘과 옛 땅에 살겠다는 안식교회 교리를 추종한다는 것이 말이 될 소리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개혁교회가 안식교회 창조교리를 추종하려면, 7일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는 교리부터 먼저 따라야 할 것이다. 개혁교회는 창세기를 현대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왜곡된 안식교회 창조교리를 추종하는 창조과학적 창조론을 버리고, 진정한 개혁주의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이제 개혁교회는 안식교회처럼 모세의 우주관을 과학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창조과학적 창조론을 이제 더 이상 방관하지 말아야 한다. 창조과학적 창조론은 정상적인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현대적 창조론을 논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경을 올바로 해석한 것도 아니다. 일부 기독교 신자들은 창조과학적 창조론을 믿고, 존재하지도 않았던 라키아를 옹호하기 위해 과학적 사실까지 부정하고 있다. 그것은 성경의 판본조차 보지 않고 문자 그대로묻지마 식 해석을 주장하면서 인류의 역사와 과학적 발전을 거부하는 창조과학적 창조론자들의 무지한 억지 주장일 뿐이다. 그런 행동은 일반 신자들 앞에서 성경과 과학을 동시에 왜곡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이라는 말을 쓰려면, 틀린 것을 그대로 답습하거나 비과학적인 방법으로 과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더욱 정밀하게 수정하면서 계속 발전해야 한다.

 

무신론 과학자들이 과학적 사실을 왜곡해서 주장하는 진화론에 대해서는 과학적 방법과 과학적 사실에 의한 현대적 창조론으로 적극 비판해야 한다. 현대과학이 이룩한 현대문명의 거대한 실상을 보면서도, 그리고 현대과학에 의하여 발전한 첨단 의료기술과 통신기술 등의 혜택을 누리면서도, 과학을 부정하면서 창조과학적 창조론을 주장하는 일부 신자들은 과연 누구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심지어는 자칭 창조과학적 창조론자들이 과학적 검증을 통과하여 노벨상을 받은 과학이론까지 성경과 맞지 않으니 틀린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창조과학적 창조론자들이 그런 주장을 입증하는 논문을 발표한다면, 그 논문은 틀림없이 노벨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창조과학적 창조론자가 노벨상을 받게 되면, 그의 창조론은 세계적인 신뢰를 얻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안식교회의 교리를 답습한 창조과학적 창조론은 이제 개혁교회에서 그만 종식되어야 한다. 기독교 새 창조론은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에 공명하는 과학적 이론의 실상을 소개함으로써 현대인들에게 신뢰를 얻어야 한다. 어쨌든 성경에는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고, 모세가 서술한 옛 하늘과 옛 땅은 버려질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이제 개혁교회는 성경에 예언된 예수의 재림의 날이 오기 전에 먼저 새 하늘과 새 땅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 결론

 

창세기의 이 전부 문자 그대로동일하게 24시간의 하루(일자)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면서, 이단적 교회들처럼 하나님의 6,000년 전 창조설을 주장하고 있는 창조과학적 창조론의 모순이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다. ‘은 태양이 빛이 비치는 낮을 가리키기도 하고, 밤과 낮을 포함하는 하나의 일자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 외에도 성경에서 은 어떤 사건이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의 불특정 기간을 가리키는 말로도 많이 쓰이고 있다. 1:5에서 하나님의 창조명령으로 나타난 빛은 첫째 이 되었지만, 은 낮을 가리키는 말과 일자를 가리키는 두 가지 말로 쓰였다. 하나님이 첫 번 째 창조하신 것을 빛이라고 해석하면, 히브리인들의 일자 계산법에 따라 첫째 은 낮만 있고 밤은 없는 것이 된다. 첫째 에 밤이 없다고 해석하면, 첫째 이 정상적인 날로 성립되지 않음은 물론이고, 하나님이나 모세가 거짓말을 한 것이 된다. 그러나 모세는 첫째 에 하나님이 호셰크를 밤이라고 칭하셨다고 서술함으로써 히브리인들의 일자 계산법과 일치하게 빛()의 창조 이전에 밤이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서술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히브리어 창세기에서 첫째 의 밤에 해당하는 호셰크를 찾아보면, 1:2절의 깊은 물(테홈)위에 있었던 호셰크를 가리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따라서 첫째 호셰크는 태초의 천지장조 때부터 있었으며, 그 시간적 길이를 알 수 없는 것이다. 한글성경만 보면 두 개의 호셰크가 이렇게 연결된 사실을 제대로 알 수 없다. 한글 성경은 첫째 의 밤을 의미하는 호셰크를 창1:2에서는 흑암이라고 번역했으나, 1:5에서는 어둠이라고 번역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성경을 읽어보아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 결국 창세기에서 24시간 은 태양이 처음 지고 첫 밤이 시작된 다섯째 부터 정상적으로 시작된다. 그렇다면 태양과 달이 땅에 비치기 이전 넷째까지의 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창조 작업을 하시는 낮 시간과 다음 창조를 위해 잠시 휴식하는 밤 시간으로 구성된 하나님의 시간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문맥상으로 가장 합리적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를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창세기에 나오는 6의 전체적 시간의 길이를 계산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은 시간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말이다. 결국 창세기의 이 모두 24시간을 의미한다는 창조과학적 창조론자들의 주장은 하나님의 주권적 시간을 피조물인 인간이 제멋대로 규정하는 오만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이 물리법칙으로 창조하신 이 우주와 이 지구의 역사에는 모세가 서술한 라키아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라키아가 있는 하늘과 땅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고 말한다면,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라키아에 대한 창세기의 모순적 서술은 최초의 창조론자 모세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그것들을 하나님이 버리실 옛 하늘과 옛 땅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먼저 이사야를 통해 모세의 옛 하늘과 옛 땅을 버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신다고 예언하셨다. 그러나 토라를 문자 그대로믿는 유대인들은 이사야의 예언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예수님도 생전에는 이에 관련한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으나,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계시해주셨다. 성경의 예언과 계시의 의미가 현대과학의 도움으로 이제 밝혀진 것이다. 특히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은 물론 새 예루살렘까지도 하나님이 내려주실 것이라고 예언했다. 물론 그곳에 세워질 하나님의 왕국에는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이 들어간다는 말도 덧붙여 놓았다.

 

결론적으로 정리하면 기독교인들은 이 하늘과 이 땅에서 하나님이 다시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먼저 의 시간적 길이에 대한 무익한 논쟁을 중지해야 한다. 그리고 라키아에 대한 모세의 모순적 서술을 인정하고, ‘라키아가 만들어낸 신화적인 옛 하늘과 옛 땅을 버려야 한다. 현대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하나님의 왕국에서 살아가는 믿음과 소망을 살려야 한다. 그에 맞춰서 기독교 창조론은 이제 하나님이 그의 왕국을 세우시기 위하여 새로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 논의해야 한다. 그것은 곧 모든 기독교인들이 신화적인 모세의 옛 하늘과 옛 땅을 버리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이 새로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에서 살아가는 믿음과 소망을 가지게 하는 새 창조론을 쓰는 것이라고 결론을 맺는다.

 

 

[Abstract] vfr: The Genesis says God created the Universe and all the creatures in six ‘Yom’s. Some Christians insist headstrongly the age of the earth is only about 6,000years on the basis of the Genesis. They explain a ‘Yom’(day) is literally a day of 24 hours. Can it be believable? Also the Genesis says God created ‘Lakia’(firmament) in the water and divided the water over and below it. And God lift up ‘Lakia’ in the sky and made Heaven with it. Also can it be believable? This article has the object to answer the two unbelievable questions in the view of modern 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