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연구 54

이스라엘 "동예루살렘 서쪽벽 근처서 2천년전 지하건물 발견"

노재현 입력 2020.05.20. 01:35 댓글 240개 자동요약 이스라엘 문화재청(IAA)은 19일(현지시간) 동예루살렘 구시가지의 '서쪽벽'(Western Wall·일명 통곡의벽) 근처에서 2천년 전 만들어진 지하건물을 발견했다고 밝혔다고 타임스오브이스라엘 등 이스라엘 언론이 보도했다. 타임스오브이스라엘은 로마군이 서기 70년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전에 사람들이 지하 공간에서 일상생활을 했음을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이스라엘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을 계기로 서쪽벽을 포함한 동예루살렘을 점령했다. 현재페이지 URL복사 https://news.v.daum.net/v/20200520013513328URL복사 (카이로=연합뉴스) 노재현 특파원 = 이스라엘 문화재청(IAA)은 19일(현지시간) 동..

경건주의 초기 역사에 대한 고찰

1. 서론 경건주의에 대해서는 독일의 슈페너(Philipp Jakob Spener, 1635-1705)와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 1663-1727), 친첸도르프(Nikolaus Ludwig Grafvon ZinZendoef, 1700-1760)를 주로 다루면서 독일 루터교회 내의 종파적 운동으로 보는 교회사가들의 견해가 일반적이다. 칼 호이시(Karl Heussi)나 쿠르트 알란트(Kurt Aland) 등이 대표적으로 이와 같은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유스토 곤잘레스(Justo L. Gonzalez)는 앞의 독일 경건주의자들에 더하여 영국의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를 포함하고 있다. 더욱이 윌리스턴 워커(Williston Walker)는 여기에다 청..

칼빈의 재세례파 유아세례관에 대한 비판

1. 서론 종교개혁시대에 유아세례에 관한 논쟁은 현대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특히 재세례파가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해서는 물론 종교개혁 진영 안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목숨을 건 투쟁을 하였고, 결국 비극적인 종말을 맞고 말았다는 사실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아물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왜 종교개혁 초기부터 유아세례가 이토록 치열한 쟁점이 되어야 했던가? 이 물음에 대해서는 먼저 재세례파의 형성과정과 그들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유아세례의 반대를 지키고자 했던 대의가 그들의 신앙 어느 부분에 함의되어 있는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또한 재세례파의 비극이 된 뮌스터 왕국에 대해서도 살펴보아야겠다. 그리고 종교개혁을 완성했다고 평가받는 칼빈이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재세례파의..

세례논쟁 및 그 전말에 관한 고찰-루터, 츠빙글리, 재세례파, 칼빈

I. 서 론 신약성경에 의하면, 세례는 처음에 유대인들을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세례자 요한에 의하여 시작되었다(마 3:11).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고(마3: 16), 그 후에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서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셨다(요 3:22). 더욱이 십자가의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는 갈릴리에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라고 사도들에게 친히 명령하셨다(마28:19). 그러므로 세례는 기독교의 처음 시작에서부터 집행되어온 것이며,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세례는 그리스도의 제자, 즉 기독교인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절차로서 가장 중요한 성례이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성례의 형식을 차츰 정립하면서 세례를 포함한 7성례를 확정했다. 로마가톨..

루터의 “칭의에 관한 토론문” 읽기

-로마서 3:28절에 관한 마틴 루터 박사의 세 번째 및 네 번째 논제에 대한 토론 서 론 이 “칭의에 관한 토론문”은 1535년 야콥 쉔크(Jacob Schenk)와 필립 모쯔(Philipp Motz)의 박사 자격 심사를 위하여 실시된 것이다. 이 토론문을 보면, 루터 박사가 로마서 3:28에 관련하여 세 번째와 네 번째로 작성한 “논제”들과 그것에 대하여 박사 후보자들과의 “논쟁”으로 구성되어 있다. “논쟁”의 기록문을 보면, 이것 역시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는 “칭의에 대한 루터의 토론”이고, 두 번째는 “믿음이 의롭게 하는가에 대한 루터의 토론”이다. 논쟁의 진행은 먼저 “논제”에 관한 반론이 제시되고, 그 다음에는 대체적으로 보충적 설명에 이어서 루터의 답변이 이어진다. 여기에 ..

터툴리아누스의생애와 사상

1.서 론 우리가 고대 신학자를 짧은 시간에 연구하고자 하는 경우에 부딪히는 난점이 몇 개 있다. 언제나 부족한 것은 자료와 시간이다. 그리고 언어 능력의 부족도 한 가지 난점의 요인이 될 것이다. 특히 모르는 외국어와 번역조차 신통치 못한 경우에는 자료와 시간의 부족에 겹쳐 더욱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터(테르)툴리아누스에 대한 필자의 경우에서도 이 세 가지 난점이 모두 나타났다. 그러나 고대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인 테르툴리아누스(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를 그냥 스쳐지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또 많은 시간을 투입할 수도 없는 형편이므로, 필자로서는 제한된 짧은 시간에 최대한 요점적으로 몇 개의 책을 바탕으로 연구한 결과를 간추려보았다. ..

인류 초기 종교집단?..5000년 전 제례 공간, 이라크서 발견

윤태희 입력 2020.04.01. 10:01 댓글 76개 이라크 남부 디카르주 텔로에 있는 유적지에서 약 5000년 전 한 수호신에게 바친 것으로 보이는 제물의 흔적과 제례용품 잔해가 대거 발견됐다. 미국 과학전문매체 라이브사이언스 30일자 보도에 따르면, 영국 대영박물관과 캐나다 서스캐처원주립대 등이 참여한 국제 연구팀은 고대 수메르 도시국가인 라가시의 중심지 기르수가 있던 이 유적지의 한 구역에서 종료 의식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 조각 300여 점과 다수의 동물 뼈를 찾아냈다.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고대 도시국가 라가시의 중심지 기르수에서 발견된 성지(사진=대영박물관/ASOR) 이라크..

마르크스·엥겔스의 기독교 이해와 신학에 미친 영향

카를 마르크스(뒷줄 왼쪽)가 1864년 세 딸, 그리고 평생의 동지인 프리드리히 엥겔스(뒷줄 오른쪽)와 함께 찍은 사진(모요사 제공) I. 서론 러시아과학아카데미는 『세계철학사』에서 “레닌 시대에 이루어진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발전과정에서 우리는 마르크스주의 세계관의 필수불가결한 부분인 ‘과학적 무신론’이 더욱 수준 높게 발전된 점 또한 빠뜨릴 수 없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적 무신론의 원형이고, 레닌 시대에 이것은 “더욱 수준 높게 발전”되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1917년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1924)에 의한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의 성공을 계기로 세계에 혁명의 열기를 불어 넣었던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최고 수준의 과학적 무신론이라는 것이다. 이렇..

한국교회에 대한 제안 한 가지.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물질계와 비물질계를 연결하는 정신, 곧 영혼의 존재와 불멸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학적 무신론은 그 실상을 자세히 알고 보면 생명의 발생과 물질변화의 법칙을 고의적으로 왜곡해서 만들어낸 하나의 자연발생론, 즉 위장된 과학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과학적 무신론이 유신론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인류사회의 전통적 가치와 윤리체계를 뒤엎고 정권을 탈취하겠다는 야망에서 나온 정치적 이념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신의 존재 여부를 놓고 과학적 무신론자와 종교적 유신론자로 갈라져 생존을 걸고 정치적 투쟁을 하고 있다. 이 투쟁에서 승리하는 쪽이 미래의 사회를 지배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과학적 ..

한국교회의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

이제까지 무신론, 특히 1948년 『공산당 선언』 이후에 과학적 무신론의 형성과 발전과정, 그것에 내포된 오류, 그것이 초기 한민족 사회와 교회에 유입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영향 등을 연구하고 비판하였다. 또한 과학적 무신론에는 과학적인 증거가 없다는 사실을 논증함으로써 전통적 종교의 근거인 유신론의 타당성을 재확인하였다. 그리고 과학적 무신론이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와 다른 사상들을 수용하거나 화해할 수 없는 이유와 근거도 밝혔다. 나아가 과학적 무신론이 한민족 사회와 교회로 유입되기까지의 역사적 과정에서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자행한 반인륜적 폭행과 기독교 박해도 살펴보았다. 따라서 이 책은 탈(脫)경계선을 특징으로 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과학적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타협적 유신진화론자들을 일깨우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