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연구 54

공산당의 종교 정책과 기독교에 끼친 영향

해방 후에 한반도는 남북한을 분할 점령한 미소 양국에 의해 남한에서는 미국적 자유민주체제가, 북한에서는 소비에트적 공산주의 체제가 등장하게 되었다. 조선공산당은 서울에서 박헌영 등에 의하여 재창당(1945)되었지만, 남한에서 성공하지 못하자, 소련군 점령지역인 북한으로 월북하고 말았다(1948). 결국 이로 인하여 한민족은 북한의 남침에 의한 6.25전쟁이라는 민족상잔의 참극을 겪어야 했다. 북한은 이 전쟁에서 실패하자 박헌영 등 소위 월북 공산주의 인사들에게 패전의 책임을 떠넘기고 ‘자유시 참변’ 또는 ‘스탈린 대탄압’과 똑같은 방식으로 처형했다(1955경). 소련군 점령 시절 및 북한 공산당 정권 수립 이후에 북한 기독교 역시 처참한 핍박을 당하고 많은 순교자들을 내었다. 과학적 무신론의 본거지 소련..

일제 치하 교회의 양면적 변화

일제는 3.1운동 직후 ‘문화정치’를 표방하였으면서도 1925년부터는 ‘치안유지법’을 시행하여 한민족의 사상 활동을 감시하고 억압하였다. 특히 일제는 교회를 항일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보고 감시와 탄압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한민족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종교보다 민족독립에 우선적인 가치를 두고 있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기독교인들 중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교회를 떠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예로서는 기독교인으로서 전도와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했다가 공산주의자가 되었던 이동휘를 비롯한 다수의 신민회원들, 여운형, 선우혁 등 상해한인교회 인사들, 이동녕과 김구 등 상해임시정부 인사들, 그리고 민족종교를 표방하는 통천교를 만들었던 양기탁 등의 종교적 방랑자들이 있었다. 이들의 행동은 기..

국내 기독교 비판 및 선교지 공산주의자의 교회 박해

(1) 국내 기독교 비판 공산주의 과학적 무신론 사상이 한민족에게 전래된 이래 국내에서 공산주의자들보다 먼저 기독교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은 이광수(李光洙, 1892-1950)로부터 시작되었다. 1917년 이광수는 교역자들이 “신학 이외의 학문에는 무지”하여 “정통(正統)의 폭군(暴君)”이 되었다고 비판했다. 물론 이광수의 비판은 기독교를 전적으로 배척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입장과는 다르다. 이광수는 목사와 전도사들이 “신앙 이외의 사상이나 과학을 경시”하여 “교인들을 미신으로 이끌고 문명의 발전을 막는다”고 비판했다. 서양의 신지식을 받아들이는 통로였던 기독교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이런 비판을 받게 된 것은 기독교 자체의 안일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외에도 1928년 김활란(金活蘭, 1899-1..

국내 공산주의의 기독교에 미친 영향

1) 국내 공산주의 운동 코민테른은 러시아와 중국에서 두 개의 고려공산당의 통합을 추진하다가 마침내 실패하고 말았다. 코민테른이 조선공산당 창당 지도에서 부닥친 최대의 난제는 한민족 공산주의자들의 주도권 경쟁과 관련된 문제였다. 이동휘의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사이에는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유일정통성’을 차지하려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코민테른은 할 수 없이 꼬르뷰로를 따로 조직해서 조선공산당 창당을 전담케 했다(1922. 12.). 그러나 꼬르뷰로가 정재달을 공식적으로 국내에 파견하기(1923) 전에 이미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는 국내에 조직을 따로 만들어놓고 있었다. 이동휘는 상해임정에 있을 때부터 김철수 등의 사회혁명당의 비밀조직을 만들어놓았다. 이르쿠츠크파는 김찬이 조직한 신사상연구회(화..

상해임시정부의 지도자들

상해임정은 27년 동안 5차례의 개헌을 하고 8번을 이사하면서 존속했으나, 상해시대 초기를 제외하면 열악한 재정으로 행정비용을 충당하기에 허덕였고, 내각 인선을 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말하자면 사실상 이름뿐인 정부였다. 임정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한 주원인은 이제껏 살펴본 바와 같이 자금조달의 어려움과 지도적 인사들의 참여 거부, 그리고 공산당 진영의 분열책동 때문이었다. 그리고 중국의 국공내전, 일제에 의한 상해사변(1931)과 중일전쟁의 발발(1937-1945) 등 중국의 정치적 상황은 임정을 보따리장수처럼 옮겨 다니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이렇게 고난에 찼던 임시정부 시대의 지도자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한국 현대사회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임시정부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지도자들 5인..

상해임시정부의 혼란과 분열

1. 대통령 이승만과 ‘국민대표회의 이후의 상해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끝나자 임정 유지파인 민족진영은 곧 국무총리 노백린과 내무총장 김구 등을 중심으로 상해임정 유지에 주력하면서도 현실적인 개혁조치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임시의정원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부재하므로 그 직무를 대행하기 위하여 이동녕을 대통령대리로 선출하였다.(1924. 6.) 그리고 그해 12월에는 이승만을 해임하고 박은식을 제2대 대통령으로 선임했다. 임시의정원의 이런 비상조치에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반대했으나 임시의정원은 1925년 3월에 정식으로 이승만을 탄핵하고 박은식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박은식은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로 체제개편을 서둘렀다. 처음에 국무령제로 출발했다가 통합을 위한 1차 개헌(1919)을 통해 ..

코민테른 동양부와 고려공산당의 실패

(1) 극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의와 고려공산당의 실패 코민테른의 실천사업의 하나인 극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의는 우여곡절 끝에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로 옮겨 1922년 1월 말에 개최되었다. 이때 참가한 ‘조선대표단’은 김규식을 단장으로 각 단체를 대표하는 56명이었으며 여운형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동휘와 상해파 계열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유는 대회서기로 대회를 총괄하는 동양부 비서부장 슈미야츠키가 자유시참변 문제를 은폐하기 위하여 이르쿠츠크파만 참가할 수 있도록 공작했기 때문이다. 이동휘와 결별한 보이틴스키와 동양부 부장 등이 대회 준비위원이 되어 조직적으로 이동휘와 상해파를 배제하는 데 협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이르쿠츠크 한인 빨치산 부대 전권대표로 참석한 김동한은 코민테른이 아닌 러시..

상해임시정부와 공산당의 내부 갈등과 분열

(1) 레닌의 자금지원과 상해임정의 갈등 모스크바에 임시정부 특사로 파견된 한형권은 레닌정부로부터 200만 루블의 지원을 받기로 하고 1차분 40만 루블을 먼저 받았다. 한형권은 박진순과 함께 옴스크로 가서 전로고려인대회(1920. 10.)에 참가한 다음 상해로 가기로 했다. 임정 국무총리를 사임했던 이동휘는 8월에 복귀하여 특사 한형권이 레닌자금을 가져오기를 기다렸다. 이동휘는 모스크바에서 귀환한 한인사회당 이한영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그의 심복 이외에는 일체 비밀로 했다. 그리고 이동휘는 비서장 김립을 파견하여 중간에서 한형권과 박진순을 만나 돈을 받아올 계획을 세웠다. 이동휘의 지시로 김립은 한인공산당으로의 개편대회 직후 임정에서 사임했다. 김립은 9월 말경에 모스크바에 보고하러 가는 것처럼 이한영과..

코민테른 극동부와 한인 공산주의자들

(1) 코민테른: 국제공산당 조직 러시아에서 공산당 혁명에 성공한 레닌은 1919년 3월에 국제공산당(통칭: 코민테른, Communist International)을 창설했다. 코민테른은 이름 그대로 공산주의를 세계에 전파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제기구였다. 코민테른이 레닌에 의하여 모스크바에서 창립되었다는 것은 소비에트 러시아 공산당이 세계 공산주의 운동을 주도한다는 의미였으며, 제2인터내셔널 슈트가르트 회의에서 레닌을 지지했던 그룹들이 대부분 여기에 참여했다. 이로 인하여 제2인터내셔널은 붕괴되고 코민테른이 제3인터내셔널로 불리게 되었다. 코민테른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강령을 채택했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에다 레닌의 저작물과 앞에서 언급한 슈트가르트 결의안(볼셰비키 강령이라고도 함) 등..

상해임시정부 수립을 주도한 신민회

1919년 3.1독립만세사건은 한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대내외에 과시한 것이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6명이 기독교 인사였다. 일제의 정보기록에 의하면 이 운동은 국내에서 단독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다. 이 운동은 중국 ‘상해(上海)의 거류민’과 연결되는 통로를 갖고 있었으며, 2월 8일 동경의 한국인 YMCA에서 이광수가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동경 유학생 독립운동에도 자극을 받은 것이다. 이 당시 일본 유학생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독립청년당은 9명의 실행위원 중 7명이 기독교인으로 구성되었다. 국내에서 3.1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러시아 지역 대한국민의회는 3월 하순에 독립선언서와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명단을 발표했다. 국내에서는 3.1독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