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연구 54

공산주의의 한민족 사회 유입과정

1) 유물론 철학 및 계몽사상의 유입 가 편찬한 『세계철학사』에는 기원전 3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한국에서의 철학사상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한국의 철학은 처음에 원시적인 하늘(天) 숭배를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모든 존재자를 두 개의 대립하는 원소(어두운 것과 밝은 것)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봉건제 이데올로기인 불교와 유교가 15-16세기 신유교 발생기까지 한국 철학사상을 지배했으나, 주희(朱熹)의 신유교 학설이 이식되면서 여러 가지 유물론 철학도 발생했다. 한국의 독창적 유물론 철학이 17세기 조선시대에 실학파(實學派)의 등장으로 탄생하였으며,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존재했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에 의하면 한국에서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반봉건제 부르주아 철학이 침투해..

상해한인교회와 독립운동

상해한인교회가 시작된 것은 1914년이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망국의 한을 품고 상해로 건너간 이들은 최재학(崔在學) 외 약 30명이었다. 이들이 영국 조계지에 있는 미해군 YMCA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그곳에서 영어공부를 하다가 예배처소를 마련하게 되었고 김종상(金種商)이 예배를 인도하였다. 일제가 이에 대해 미해군에 항의를 하고 김종삼이 상해를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자 1915년 미국 선교사 피취(Fitch, 費啓澒)의 도움으로 중국인 YMCA 식당을 빌려서 예배장소를 옮겼다. 마침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선우혁(鮮于赫)이 망명해오자 그가 예배 인도자를 맡게 되었다. 1917년 교회는 임원을 새로 선출했는데, 금릉대학에 유학을 왔던 여운형(呂運亨:1..

신민회 망명자들의 분열

신민회 발기인들을 중심으로 망명의 진행과 망명자들의 활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제1차 망명자들: 안창호, 이갑, 유동열 등은 중국 청도에 도착하여 청도회의를 열었다. 여기에서는 독립운동 기지건설을 논의하던 중에 유동열 등이 이종호가 가지고 있는 약 3,000달러의 자금으로 청도에서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자는 안을 제안하여 다수가 찬성하는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당시 청도를 조차지로 관리하고 있던 독일 총독의 불허로 이 제안은 폐기되었다. 결국 당초 계획대로 중러의 접경지역인 밀산(密山)에 토지를 사서 신한민촌을 만들고, 그곳에서 무관학교를 세우는 한편, 농업경영을 병행하면서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각자의 역할을 정한 다음에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세부계획을 다시 논의하기로 했..

신민회의 망명과 ‘105인 사건’

(1) 항일 사건들과 신민회의 망명회의, 그리고 제1차 망명 일제는 1908년에 「대한매일신보」가 주관하던 국채보상운동을 저지하기 위하여 재무 담당 양기탁이 의연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구속했다. 그러나 그는 재판 끝에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양기탁은 1909년 3월에 그의 집에서 신민회 간부회의(제1차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는 일제의 강력한 무단통치에 의해 국내에서 활동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으므로 신민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곳에서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장교를 양성하면서 기회가 왔을 때에 독립전쟁을 수행하려는 계획이었다. 그해 5월에는 양기탁이 주필로 있던 「대한매일신보」의 설립자이자 반일적인 영국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Ernest..

일제 초기 한민족 독립운동과 사상적 동향-신민회의 발기

1910년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되면서부터 조국을 잃은 한민족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특히 만주 지방), 러시아 극동지역, 미국 및 일본 등 곳곳에서 흩어져 살고 있었다. 망국의 한을 품은 한민족의 국권회복 운동은 세계 각지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하면서 살든지, 일본제국의 지배를 벗어나 한민족의 근거지 한반도에 독립국가를 세우려는 염원을 품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당시 한민족은 누구나 독립운동에 관련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당시 러시아 극동지역과 만주에는 한민족 이주자들이 많았고, 독립운동가들도 망명하여 살고 있었다. 합병을 전후한 시기에 먼저 이곳으로 망명한 사람들은 대부분 의병이었거나 무관 출신들이었다. 이들이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일제가 국내에서 이들의 반일활동을 철저히 봉쇄..

초기 러시아 정교회와 공산주의의 유입

1) 러시아 한민족 사회의 형성과 정교회의 선교 만주와 한반도에 인접해 있는 러시아 극동 연해주 지역은 불을 사용하지 못하고 동굴에 살던 고대 인류의 유적까지 발굴되고 있다. 중국과 일본 기록에 의하면, 부여와 고구려 그리고 발해로 이어지는 고대 한민족이 다른 부족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연해주 지역은 발해가 멸망된 이후 중국 영토였으나, 러시아가 1860년에 청나라로부터 획득한 것이다. 러시아는 1870년대에는 알래스카와 캘리포니아까지 지배하였다. 그런데 연해주 지역이 러시아 영토로 편입된 이후 한반도에서 조선인들이 이곳으로 새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의 이주민들은 함경도 지방에서 계속 반복되는 가뭄과 홍수로 인한 흉년을 피해 들어온 농민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이 지역은 비옥한 토지였지만 아무도..

개혁신학이 과학발전에 미친 영향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1. 서론 역사적으로 종교개혁은 1517년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95개조의 항의문 발표에 의해 촉발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과학혁명은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가 1543년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발표한 것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두 사람에 의하여 종교와 과학에서 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의 중세에서는, 과학은 로마가톨릭교회 신학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었다. 그래서 과학은 신학의 시녀(ancilla theologiae)로 불렸으며, 그 역할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교리를 설명하는 일에 봉사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렇게 동시대에 일어난 두 개의 혁명을 통해 로마가톨릭교회의 ..

“필리오크베”교리논쟁이 기독교 영성에 미친 영향

“필리오크베”교리논쟁이 기독교 영성에 미친 영향 - 동, 서 교회의 분열을 중심으로 목 차 I. 시작하는 말 II. 초기교회의 교리논쟁과 공의회에서 결정한 신조들 1. 초기 7개 공의회와 신조들 2. 기타 회의와 신조들 III. “필리오크베” 교리논쟁이 교회 분열에 미친 영향 1.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에서..

초기 그리스 철학-소크라테스 알기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의 첫째 공통점은 우주에 관한 일반 이론을 만들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 방법은 신들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는 신화(mythos)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과 추론을 통해서 겉으로 보이는 것의 배후에 있는 비밀을 편견이 없고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만드는 것이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그리스 세계의 변방이나 식민지, 즉 이오니아와 밀레투스 출신이라는 것이다. 그들에 관해서 전해오는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요점적으로 정리해본다. 탈레스(BC 580년경) 최초의 철학자로 기록된 인물, 밀레투스 학파, 철학적 명언 “모든 사물의 일차적인 원리와 근본적인 본성은 물이다.” 철학적 평가: 최초로 환원론적 사고방식을 도입한 사람 아낙시만드로스..